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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교육부 일방행정에 반대 시위해 관철 5일 한국교총과의 MOU 체결을 위해 방한한 인도네시아 교원연합회(PGRI : Persatuan Guru Rebublik Indonesia) 수리스티요 수위토 아트모레조 회장(사진)을 만나 인도네시아 교육과 교원활동에 대해 들어봤다. 현재 인도네시아 국회 상원의원인 수리스티요 회장은 교원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적 참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 이번 MOU 체결을 통해 PGRI가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 교원연수 프로그램이라고 들었다. 교원 연수는 어떻게 하고 있나. “현직 교사들의 지속적인 전문성 계발을 위해 과목별 교사 포럼 활성화, 교육품질 인증협회 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다. 또한 교원 양성 기관에서도 현직 교사들의 전문성 향상을 돕기 위한 단기과정 및 학위 과정 등을 제공하고 있다. 뛰어난 교사들은 사범교육 기관의 강사로 초빙되기도 한다. 내 경우에도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해 사대에서 공부한 후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현재 대학 강사가 됐다.” - 정부 예산의 20%를 교육에 할당되도록 한 인도네시아 헌법에 대해 지난 2006년 PGRI는 현행 10% 이하의 교육예산이 헌법에 위배한다는 재판에서 승소한 바 있다. 이후 교육예산이 늘었나. “2006년 이후 교육예산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증액된 교육예산은 학교 시설, 무상 의무교육, 빈곤층 교육 등 공교육 발전을 위해 쓰이고 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하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의 무상 의무교육은 원칙적으로는 초등학교(6세)부터 중학교 과정까지 9년으로 돼있다. 그러나 실제로 완전 무상교육은 아니고 정부에서 최소 금액을 부담하고 부모가 나머지를 부담하는 구조다. 그나마 고등학교 진학률은 80% 정도인 데 반해 엄청나게 높은 학비 탓에 대학 진학률은 17% 수준이다.” - 초·중등 교원 양성은 어떻게 하고 있나. “2005년 이전에는 고등학교 졸업 후 2년짜리 과정을 이수하면 교원이 될 수 있었다. 이후 ‘2005 교원법’에 의거,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 과정의 교원 양성 과정을 수료해야 한다. 교직은 2005년 정부규정 19항에 따라 전문직으로 인정됐고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학사학위를 받은 후 학교 현장에서 과목별로 구체적인 교수법, 집중 수업 훈련을 포함한 워크숍 과정 등 36~40학점의 전문 교육프로그램을 밟아야 한다. 지금은 비자격 교원들이 계속해서 교육프로그램을 밟고 있는 과도기 상태이며, 전문 교육 프로그램이 완전히 도입되는 것은 2012년경을 예상하고 있다.” - 인도네시아 교원들의 처우는 어떤가. “유자격 교사가 요구되면서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학사 이상의 학력이 필요해졌다. 상향된 자격에 따라 보수 인상이 요구돼 기본급은 그대로지만 각종 수당이 신설됨에 따라 처우가 좋아졌다. 지금은 의사 다음으로 선호하는 직업이 교사가 됐다. 참고로 헌법상에 명시된 정부예산의 20%를 교육예산으로 반영하도록 했지만 여기에 교원 보수는 포함돼 있지 않다.” - 인도네시아 학생들의 학력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 “인도네시아에서는 학생의 성적표를 모아 한권의 포트폴리오를 만든다. 이 포트폴리오를 통해 개개인의 성적을 한눈에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학생의 학업 향상, 장단점, 태도 등 각 방면을 심층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학생의 학업 이력을 추적하는 동시에 잠재력을 계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가장 뜨거운 교육 이슈는 무엇인가. “작년 초, 정부가 행정체제 개혁을 위해 교육부 구조 개편에 나섰다. 이에 따라 교육부는 5년간 교원 전문성·복지·교권 향상에서 큰 성과를 거뒀던 ‘교직원 자질향상국’을 폐지키로 했다. PGRI는 폐지 무효화를 요구하며 즉각 협상에 나섰으나 결국 해당부서는 사라졌다. 교육부와의 소통이 부재한 상황에서 PGRI는 지난 5월, 2회에 걸쳐 교원 3만명이 참여한 시위를 벌이는 한편 국회 내 정당들과 연락을 취해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결국 교육부 협상을 통해 ‘교원 자원계발 및 자질인증 협의체' 구성에 합의했다.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작년 12월 2일 PGRI 기념일인 인도네시아 스승의 날을 기념하며 협의체를 발족했다. 교원 전문성 계발을 위해 기존 부서 대신 협의체가 생기게 된 것이다.” - 인도네시아 교원들의 정치적 참여는 어떤가. “PGRI는 독립성을 고수하며 특정 정당 지지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원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나 역시 어느 정당에도 소속돼 있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하면서 200만표를 끌어냈다. 의원 출마도 PGRI의 전략 중 하나이며, 각종 법규 제정 및 정책 입안에서 교원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PGRI는 교원들의 활동에서 정치적 입장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참여를 통해 인도네시아 교원들의 전문성, 복지, 교권 수호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
중동 및 북아프리카의 재스민 혁명과 함께 이 지역 교육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권의 민주화 혁명은 이집트를 거쳐, 리비아, 예멘 등 인근 국가로까지 확산됐다. 그 중 교육계의 변화는 이집트에서 가장 먼저 포착되고 있다. 이집트의 학교 중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의 이름을 딴 학교는 388개, 그의 부인인 수잔의 이름을 딴 학교는 160개에 달한다. 차남인 가말의 이름을 딴 학교도 있다. 독재정권 퇴진 직후 이집트 국민들은 아이들에게 더 이상 위선을 가르칠 수 없다며 무바라크 일가의 이름을 딴 학교명을 바꾸는 작업에 나섰다. 또 학교 교실 및 공공기관에 걸려 있던 무바라크의 초상화도 뜯어냈다. 이집트 일간지 알마스리 알윰(Al-Masry Al-Youm)은 최근 기사를 통해 이집트의 주입식 암기 교육이 그동안 인적자원 개발을 방해하는 최대 약점 중 하나였다며 이집트 교육부는 교육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 교육제도 개선을 위한 전반적인 체계를 세우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집트 교육전문가들은 교육시스템 개편이 절실하다면서 세계 추세에 발맞춘 교육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교육전문가인 모하메드 알-모프티는 “이집트의 교육은 학생의 사고력 계발보다 주입식 암기에 의존해 왔다”고 지적하고 “새로운 교육과정은 학생들의 사고력 성장을 위한 연구에 기초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교육전문가는 “페이스북이 이집트 혁명의 결정적인 요소였던 반면, 아이러니하게도 대다수 공립학교 학생들은 컴퓨터 기술이 부족하다”면서 “미래 세대가 글로벌 테크놀로지 발전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의 컴퓨터 사용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들도 이집트 교육을 변화시키는 데 힘을 모으고 있다. 지난 1일, 국가교육과정의 조속한 개정과 교육부 정책 개편을 요구하는 고교생 수백 명이 교육부로 가두행진을 벌였다. 3.1 학생운동으로 명명된 이날 시위에 참가한 18세 고등학생 후세인 하자지는 국가교육과정의 개정을 요구하면서 “오늘 우리의 운동은 우리 자신이 아닌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자지는 “모든 발전의 근간이 되는 교육 분야에서 미국, 중국, 일본은 훨씬 앞서나가고 있는 반면 이곳의 교육은 계속 후퇴하고 있다”며 “심각한 격차는 미래 세대들이 세계 경제에서 경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생들의 요구안에는 더 나은 장비와 시설을 위한 학교예산 증액 뿐 아니라 모든 공식 교과서에서 무바라크를 치적하는 내용을 삭제하고 교원들이 과외를 주된 수입원으로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원 보수를 인상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중동지역 전문가인 서정민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이집트의 경우 일반 사무직의 월급이 10만원 정도인 데 반해 교원 월급은 6만원선”이라며 “박봉으로 교원들 대부분이 방과후 과외를 하고 있고, 정부도 교원 임금 인상 대신 투잡을 허용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처럼 열악한 교원의 처우 개선과 관련해 이집트독립교원연합(Independent Teachers Union of Egypt)은 더 나은 수준의 교육과 임용 기회, 생계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이집트 키나(Qena)에서는 교원들의 종신 계약과 보수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카이로 타히르 광장에 있던 과학교사 알리아 보시우니는 “26년 전 태어난 후, 교육, 취직, 약혼을 거치는 내내 1명의 대통령만 봐왔다”며 “특히 지난 10년은 교육 시스템 악화, 빈곤 증대 등 최악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이번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것”이라며 “교육정책, 교육과정, 교원보수에 있어서도 위로부터 일방적 지시가 견제를 통해 다원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교원보수 인상 등 근무환경에 대한 개선 움직임 뿐 아니라 일자리 부족에 대한 노력도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교육과정 역시 지도부의 일방적인 이념 반영에서 자유, 평등 같은 보편 가치를 담은 내용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변화가 단시간에 이뤄지긴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관장 김창수)은 3월 기획공연으로 26일 오후 3시, 6시 경기도립무용단을 초청 '춤향기' 공연을 갖는다. '춤향기'는 오랜 세월 이어온 전통예술의 맥(脈)인 우리 춤과 역사의 대표적인 문화상징을 엿볼 수 있는 전통무용공연으로서 그 동안 우리 춤 속에서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모색해오며 우수한 공연들을 선보여온 경기도립무용단이 야심차게 준비한 공연이다. 경기도립무영요단은 전통무용의 대중화를 위해 '천년의 유산' 등 창작공연과 정기공연 이외에도 토요상설공연, 금요상설공연 등으로 연간100회 이상의 공연을 진행하였고 유럽, 아시아 공연으로 우리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문화사절로도 활약하고 있는 무용단이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는 경기도립무용단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인 태평무, 장고춤, 농악무 등의 작품들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재구성하여 어떤 장르의 공연보다 환상적이고 다이나믹한 공연이 될 것이며 학생들도 평소 접하기 힘든 수준 높은 공연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학생교육문화회관에서는 이번 공연 이외에도 4월 공연으로 '인천시향의 청소년음악회', '미녀와 야수'등 풍성하고 유익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입장료는 학생 무료, 일반 6천원으로 학생교육문화회관 홈페이지(www.iecs.go.kr)에서 인터넷 예약 가능하며 잔여석 및 현장잔여분에 한해 공연 당일 1시간 전부터 현장 판매를 한다. 자세한 사항은 학생교육문화회관 운영부(032-760-3455)로 문의하면 된다.
인천남부교육지원청(교육장 이재훈)에서는11일 인천신흥초에 설치된 중도·중복장애학급에서 중도·중복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위한 꿈만 같은 입학식을 가졌다. 중도·중복장애는 장애의 정도가 매우 심하고 장애가 2가지 또는 그 이상 중복해 있는 경우를 말한다. 중증의 장애로 인하여 교육 기관을 이용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등 그 동안 중도·중복장애 학생들이 교육에서 소외되어 왔다. 남부교육지원청에서는 중도·중복장애 학생들의 교육권을 보장하고 일반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제공해 주기 위해 지난해9월 인천신흥초에 중도·중복장애학급을 신설하였다. 그동안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통해 현재는 3명의 학생이 교육을 받고 있다. 신흥초 중도·중복장애 학급은 남부교육지원청 특수학급 운영지침을 기초로 대상학생의 발달정도와 개별적인 특성을 고려한 개별 교육과정 운영하고 있다. 또한 통합반 학생들과 함께하는 통합교육을 통해 중도·중복장애학생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 능력과 태도를 육성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으며 다양한 활동 중심의 프로그램 및 현장체험학습을 실시하고 있다. 남부교육지원청 정영수 창의인성교육지원과장은 "장애정도가 심해 적절한 교육적 환경과 기회로부터 배제되어있던 중도 중복장애 학생들도 일반의 동일연령 학생들이 받는 교육과 가장 근접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앞으로 더욱 더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관장 김창수)은 학생들의 특기와 적성을 신장시켜주고 문화에 대한 마인드를 함양시키기 위해 새롭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2011년 상반기 '주5일수업제지원 문화교실'에 참여할 수강생을 모집한다. 모집 강좌는 미술교실, 도자기만들기, 음악줄넘기, 클레이, 오카리나, 난타, 해금, 과학실험, 놀이로 배우는 영어, 벨리댄스, 양초만들기, 나무소품만들기 등 24개 강좌로 매월 학교 수업이 없는 둘째, 넷째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3월 26일 토요일부터 시작으로 6월 11일까지 6차시 수업이 운영된다. 접수기간은 차시별 수업일 1주일 전부터 사전 예약만 하면 수강이 가능한 1회성 수업으로 원하는 강좌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참여할 수 있다. 수강신청은 인터넷(www.iecs.go.kr)으로 선착순 모집하며, 6세부터 고등학생까지 강좌별로 참가 대상이 있으며, 강좌별 정원은 10~20명이며 참가비(재료비포함)는 무료다. 기타 자세한 문의는 학생교육문화회관 운영부(☎ 032-760-3466)로 연락하면 된다.
서울시교육청이'학생 자치활동 활성화 방안'과 '민주시민교육 활성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학교 운영과 의사결정 과정에 학생 참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미 관련 공문이 학교에 내려와 있다. 학생들의 자치활동 활성화를 추진하고 민주시민교육을 활성화 한다는데 기본적으로 공감을 하고 개인적으로 찬성에 한표를 던진다. 그동안 일선학교에서는 자치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있다. 명칭은 살아 있었지만 실질적인 자치활동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교사들도 나름대로 자치활동을 활성화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의 현실은 자치활동을 활성화 하기에는 너무나도 여건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교과부와 교육청 등에서 시간확보의 어려움을 인정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강요하는 교육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성교육, 약물 오남용 교육, 폭력예방교육, 금연교육, 장애인식교육 등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의무적으로 부과하는 교육들이 실질적인 자치활동 보장을 어렵게 만들어 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올해도 마찬가지다. 교육현장에서는 자치활동 시간을 확보해 두었지만 이런류의 교육을 하기 위해서 자치활동 시간을 활용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자치활동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이번에 발표된 내용중에도 주당 1시간이상 자치활동 보장이라는 내용이 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특별활동 영역에 자치, 적응, 봉사활동을 하도록 하고 있는데, 자치활동을 34시간 확보해야 주당 1시간이 가능한데, 계발활동 34시간에 자치활동 34시간이면 특별활동이 끝나게 된다. 적응활동이나 봉사활동은 시간외로 확보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시간외로 확보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다만 학교에서 시간외로 정규수업시간보다 더 하게 되면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하교 후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사교육기관을 찾는 문제까지 포함된 것이다. 정규수업이 아닌 특별활동 시간을 별도로 확보하여 늦은 시간까지 진행하는 것에 대해 학부모들은 이해를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찬성하지도 않는 것이다. 따라서 주문을 많이 한다고 해서 학교육이 활성화되고 자치활동이 활성화 되는 것은 아니다. 자치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여타의 교육을 교과교육에 포함시키거나 별도의 방법을 연구해야 가능한 것이다. 몇시간 확보해야 한다는 식의 활성화는 학교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도리어 수업시수를 늘리는 한이 있더라도 정규수업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10일 충남교육정보원에서 김종성 충남 교육감과 교육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로진학센터 개소식이 개최되었다. 대학입시를 전문적으로 지원하는 기관의 설립에 따라 충남의 학생들은 날로 치열해지는 대학입시에서 더 유익한 정보를 제공받아 미래를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11일 충남 서산 서령고 영재교육원이 인근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숨은 영재를 찾기 위해 영재성 검사를 실시했다. 이번 영재성 검사는 수리, 공간, 논리영역을 중심으로 치러졌으며, 이번 시험에서 선발된 영재들은 서령고 영재교육원에 입소하여 본격적인 영재교육을 받게 된다. 참고로 영재성 테스트는 단순한 수학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조건을 나름대로 분석해 일정한 규칙을 찾거나 해결해가는 창의적 과정이 주류를 이루는 시험이다. 따라서 학생들의 숨은 탐구력과 창의력을 측정하는데 안성맞춤인 시험이다.
2010년에도 변함없이 우리나라는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 이유로 창의성을 길러주지 못하는 주입식 교육과 이공계 기피현상으로 인한 기초연구분야의 우수인력 절대부족, 기초과학 연구 홀대 등을 꼽고 있다. 그러나 노벨상은 단 기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교육 문화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WCU(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 사업)에 참여한 한 외국 교수는 한국 학생들은 "뛰어나고 성실하지만 스스로 시작하기보단 지시를 기다린다"고 평가했다. 우리 학생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하라는 대로만 하던 습관이 배어 있어 자율학습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영재들은 타고난 영재라기보다는 기획된 영재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우리의 교육에 대해 노벨 과학상을 234명이나 배출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칭찬하고 있으니 조금은 이해가 자기 않는 면이 있다. 이를 잘 새겨서 들어보면 결국 우리는 전반적인 교육 수준을 올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미래의 국가 경제를 이끌고 가야 할 창조적 핵심 인재 양성에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창의성 교육을 하여야 하는데 창의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 국민이나 교육을 담당하는 전문가 사이에도 큰 갭이 존재한다. 이제 우리 부모님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할 시점이다. 학생들의 재능은 생각하지도 않고 부모님의 기대치에 맞추어 교육을 시키다 보니 아이들이 쉽게 지치고 흥미를 잃게 된다. 이제 진로교육에 대한 폭을 넓혀 다양한 체험과 스스로의 학습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허용하여야 한다. 창의성은 기획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허용가운데 이루어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창조는 과거의 언어가 아니라 미래의 언어이다. 부모님의 가치관에 의하여 주조된 두뇌로는 미래를 개척하기에 힘이 든다. 너무나 세상이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변화의 시대에 맞는 교육 패러다임이 요구되고 있다. 법관이 되기를 의사가 되기를 원하기 보다 어린 시절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자신의 탐구를 통한 자신의 길을 가도록 지켜보는 인내가 요구된다. 우리 아이들에게 자기의 길을 가도록 지켜 보면서.
지난달 12일, 광교산을 찾았었다. 허리춤에 카메라를 차고 마음속으로는 '광교산의 봄, 어디까지 왔나?' 기사 제목까지 미리 만들어 놓았었다. 그러나 봄의 기운은 결국 찾지 못하였다. 너무 성급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딱 한 달이 지난 오늘은? 동네에서 37번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 안을 보니 광교산을 찾는 등산객이 제법 있다. 경기대학교 앞에서 하차하니 등산객이 줄을 서서 광교산을 향하고 있다. 봄나들이를 나온 것이다. 경기대 정문에서 형제봉을 향하는 능선에 접어 들었다. 모임에서 단체로 온 등산객, 부부 등산객, 가족 단위 등산객들이 보인다. 혹시 야생화나 나뭇가지의 새순을 살펴 본다. 봄의 전령사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백년수에서 흐르는 계곡물을 보니 봄이 왔음이 완연하다. 동행한 아내에게 물었다. "광교산에 봄이 왔음을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나요?" "등산객의 옷차림이 달라졌네요." 그러고 보니 파카 차림의 옷을 입은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등산복의 색깔이 밝아졌다. 겨울엔 검은색 위주였는데 지금은 빨강, 노랑, 초록 등 원색이 눈에 보인다. 백년수 가까이 가니 아줌마 부대들이 옹기조익 모여 이야기꽃을 피운다. 다시 형제봉 데크를 향한다. 원색의 등산객들이 줄을 지어 오르고 있다. 반팔 옷차림도 보인다. 형제봉을 오려고 밧줄을 잡으니 어린이들이 보인다. 광교산의 봄은 어린이 등산객의 밝은 표정과 재잘거림에서 느낄 수 있다. 형제봉 정상이다. 용인시에서 세운 이정표를 보니 눈에 익숙하지 않다. 버들치 고개(석성산), 도마치 고개 명칭이 낯설다. '광교산'이라는 단어 대신 '시루봉'이 더 정확하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광교산이 여러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형제봉 정상나무 옆에 있는새모이통. 좁쌀이나 땅콩 부스러기가 들어 있겠거니 하고 내부를 보았다. 사각형의 플라스틱에 구멍이 뚫려 있고 누가 갖다 놓았는지 멸치 대가리가 몇 개 놓여있다. 그렇다면 새가 멸치를 먹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좀 더 연구를 해 볼 문제다. 까마귀라면 모를까 박새난 곤줄박이가 이것을 먹을 수 있을까? 50대 후반 정도의 등산객이 시루봉 가는 길을 묻는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울산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면서 자기네들은 전국의 명산을 찾아 다닌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언제부터 광교산이 이렇게 유명세를 타게 됐는지? 이제 하산이다. 아직껏자연에서 봄이 찾아왔음을 찾지 못하였다. 능선에서 하광교 소류지를 보았다. 푸른색 물이 출렁거리고 있다. 봄바람이 풋풋하게 느껴진다. 옷깃을 여미지 않아도 된다. 봄이 찾아 온 것이다. 문암골 가까이에서 봄의 흔적을 하나 찾았다. 생강나무 봉오리 하나. 꽃을 피우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오늘 찾으려는 광교산의 봄은 등산객의 밝은 옷차림, 어린이들의 밝은 표정과 재잘거림, 훈훈한 바람에서 찾았다. 3월 중순, 광교산의 봄은 우리들 마음 속에서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군산YMCA(관장 정훈)은 군산시 근대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시민사업 정책위원회가 주최하고 전북외국어고등학교, 군산기계공업고등학교, 엄마손 가족 봉사단의 학부모와 자녀 15여명을 대상으로 군산 근대문화 이해를 위한 교육활동을 진행하였다. 본 교육활동은 ‘쌍천 이영춘 박사’의 일대기를 공부하면서 자치적인 학생 동아리 활동을 구성하여 인터넷 매체(페이스북, 웹진, 인터넷라디오 방송)를 이용하여 홍보하려는 초기 교육활동이었다. 또한 본 사업은 학생이 주체가 되어 사업을 기획하고 준비하였으며, 교육활동 2회, 체험활동 2회, 공동세미나 1회 등의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청소년들의 접근성이 용이한 컴퓨터 매체인 ‘소셜네트워크-페이스북(Social Network)’ 기능을 활용하여 내 고장의 문화유산을 전 세계에 홍보하는 역할을 청소년이 수행하게 될 것이다. 이번 체험에 참여한 허성은 전북외고 학생(1학년)은 “한 나라의 역사는 지역의 역사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앞으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문화 홍보대사의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하였다. 이날 군산근대 문화유산을 소개한 이주민(YMCA) 이사는 “청소년을 대상으로그 지역의 문화유산을전 세계에 홍보하고 알리는 역할을 꾸준히 지원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번 돈 이예요. 빼앗지 마세요. 1977년의 봄은 유난히도 빨리 찾아 왔었다. 지난 겨울에도 별다른 추위가 없이 넘어갔을 뿐만 아니라, 수북하게 쌓일 만큼 눈다운 눈이 내린 적도 없었다. 비가 내린 것도 아니어서 봄이 되어도 파란 싹들이 제대로 돋아나기나 할 것인지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겨우내 비가 내리지 않은 들판은 봄이 되자 얼었던 것이 녹으면서 온통 먼지만 풀썩거리는 사막과도 같았다. 벌써 물이 고이고 못자리를 할 준비를 해야 할 논바닥은 허옇게 메말라 있고, 쟁기질을 하는 논에서 뽀얗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논바닥이 요 모양일 때 밭에 심은 보리나 밀은 자라지 못해서 앙당하게 퍼지기만 하고 키가 자라지 못하였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 전에 보리밭에 풀을 매고 북을 주어서 보리 뿌리를 튼튼하게 해주는 작업을 할 때에도 온통 먼지가 날려서 허옇게 흙먼지를 덮어써야만 하였다. 하긴 그래서 논에 심은 보리는 다른 해 보다는 훨씬 더 좋은 편이었다.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내리는 해에는 보리를 심은 논에 물기가 많아서 보리가 물손(물기가 많아 해를 입어 죽어 가는 일)을 받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올해는 논이 바짝 말라서 밭처럼 고슬고슬하기 때문에 논에 심은 보리는 오히려 아주 잘 자라 주었다. 농부들은 이런 논보리에 정성을 쏟아서 보리 고랑을 쳐 올려서 보리 논 두둑에 뿌려주는 북주기에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 논보리는 다른 해보다 훨씬 더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3월이 되고 4월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비가 오겠지, 오겠지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못자리를 해야 할 때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정부에서도 걱정이 되어서 각 마을별로 공동 못자리를 만들라고 권하였다. 물대기가 편하고 물을 끌어 올 수 있는 곳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힘을 모아서 모를 기를 수 있게 한 곳에 못자리를 만들면 물이 부족하더라도 한 곳에만 대기 때문에 좀 더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양수기나 저수지, 댐이 지금처럼 물을 많이 끌어 올 수 있는 그런 형편이 아니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이 시냇가에 집중적으로 공동 못자리를 만들었지만, 가뭄이 계속 되자 그것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5월도 중순이 되었건만 비가 내리지 않아서 시냇물도 말라서 흐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시내의 바닥을 파서 웅덩이를 만들고 그 웅덩이에 고인 물을 퍼 올려서 못자리의 모들이나마 말라비틀어지지 않게 지켜보려고 노력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부에서는 이처럼 가뭄에 시달리는 농촌을 돕기 위해 어린이들까지 나서서 가뭄극복을 위해 노력 봉사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까지 들판에 나가서 못자리에 물을 주기 시작하였다. 시내 바닥에 고인 물을 세수 대야나 양동이로 길러다가 말라 비틀어져 가는 못자리에 뿌려 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각자가 물을 떠서 가지고 가서 못자리에 뿌리는 일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까 앞의 아이들이 뿌리고 간 자리만 다시 뿌리기도 하고 좁은 논둑길을 오가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점차로 두 줄로 나란히 서서 물을 퍼서 올려 보내면 이어받기를 해서 못자리에 가면 차례로 받아서 뿌려 주는 사람이 있어서 일은 좀 더 효과적이었다. 비가 오지 않아서 논바닥에서는 먼지가 풀썩거리고 메마른 논바닥의 열기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한 평의 못자리라도 더 살려 보자고 우리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물을 퍼 날랐고, 못자리는 조금씩 파랗게 생기를 되찾았다. 이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우리 못자리도 좀 해줘요”하고 선생님을 졸랐다. 선생님들도 있는 힘을 다해서 해보자고는 하지만 어린 우리들이 땀이 비 오듯 흘리면서 먼지투성이가 되어갔다. 이렇게 애를 써서 물을 퍼 나르는 모습을 보고 차마 시킬 수가 없었던지 학교 옆의 일부만을 하고는 계속할 수 없다고 다음으로 미루고 해서 하루 두 시간씩만 물대기 작업을 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동안에 이미 온 몸은 흙투성이가 되고 땀에 흠뻑 젖어서 옷까지 흙투성이가 되곤 하였다. 어린 우리들까지 나서서 못자리 살리기를 하게 되자, 마을의 어른들도 더 이상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을 하였다. 냇가를 파고 물을 퍼 올려서 못자리를 살리는 일에 힘을 쏟게 되었다. 점차 마른못자리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못자리의 모가 겨우 목숨을 건지는 정도여서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학교에 우물을 파도록 교육청에서 지원이 나와서 학교 마당에 구멍을 뚫고 우물을 판 곳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 우물물을 멀리에 있는 곳까지 끌어가서 못자리를 살리는 데 이용하니 학교 부근의 논들은 우선 갈증을 풀 수가 있었다. 이젠 이 들판에 모내기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였다. 온 들판을 가득 매운 보리를 베어 내어야만 모를 심을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이제는 보리 베는 일이 급하게 되었다. 가뭄 극복에 힘을 쏟느라고 보리 베기를 할 손이 모자란 농촌의 일손을 돕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이 무렵만 해도 농촌의 학교에서는 보리 베기나 모내기시기에 맞춰서 농번기 휴가라는 것을 하여 우리 같은 어린이들도 농촌의 바쁜 일손을 돕게 했었다. 그렇지만 올해 같은 때는 농번기 휴가가 문제가 아니라 가뭄 극복과 보리 베기, 모내기라는 일이 한꺼번에 해야 하는 농촌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학생들을 동원하여 도와주라는 지시가 내려 졌다. 보리는 벼와 달리 나란히 베지 않아도 탈곡기에 그냥 쓸어 넣어서 털 수 있는 곡식이다. 우리들 같은 어린이들의 손으로 베어도 탈곡을 하는데 크게 불편하거나 어려움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어른들처럼 품삯을 다 받을 수는 없지만, 일부만 받고 일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한 푼도 안 받는다면 너도나도 해 달라고 해서 어린이들이 다 해주지도 못하고 갈등만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쨌든 우리는 논의 보리를 베러 가야 했다. 처음에 나가서 보리를 베려니까 쉽지는 않았다. 물론 집에서 소먹일 풀을 베어 보기는 하였지만, 보리를 베어 보지 않았던 어린이가 더 많았기 때문에 처음엔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베는 요령을 가르쳐 주셨다. 몸을 다치지 않게 주의할 점도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첫날 논에 나가서 조금씩 일을 익혔다. 어른들은 한 마지기(약 300평)를 베는데 300원을 받는데 우리 어린이들은 200원만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첫날 약 3000 평을 베었다. 물론 하루 종일이 아니고 오전 공부가 끝나고 나서 오후에만 하여서 많이 벨 수가 없었다. 하루에 우리가 번 돈이 2000원이 되었다. 우리는 이튿날 아침에 학급회를 열어서 이 돈을 쓸 곳을 의논하였다. “우리 이 돈을 모아서 가을 수학여행을 가면 어떻겠어요,” 반장인 경수의 의견은 우리 모두에게 환영을 받았다. “선생님 우리가 수학여행을 가려면 돈은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건대요?” 역시 계산에 밝은 영호의 질문이었다. 선생님은 “너희들이 갈 수학여행지에 따라 달라지고, 며칠 동안을 갈 것인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우리 고장의 도시에 2박3일 정도로 간다면 약 3000원 정도면 될 것이다”라고 일러 주셨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렇다면 우리들이 돈을 모아서 수학여행을 갔다 올 수 있게 열심히 보리 베기를 해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들이 모은 돈으로 수학여행을 가도록 하려면 우리 모두 열심히 보리 베기를 해야 한다고 다짐까지 하였다. 그래서 의논을 마친 그 날부터 우리는 아침 시간만 공부를 하고 나서 낫을 들고 들판으로 나갔다. 첫날 우리가 3000평을 베어서 2000원을 벌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쓸 돈을 저축하기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우리들을 장난을 하거나 게으름을 피울 이유가 없어졌다. 혹시 누가 게으름을 피우면 우리 스스로가 “야 ! 명직이 넌 혼자만 편하길 바래? 누군 허리 안 아프고 힘 안 들겠어?”하고 꾸짖으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서곤 하였다. 선생님은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래도 너무 힘들게 하지는 말아라. 무엇보다 낫을 가지고 하는 일이니까 다치지 않게 조심들하고, 알았지?”하고 우리들을 격려 해주시기도 하고, 선생님이 앞장을 서셔서 일을 해나가셨다. 아무리 우리가 잘해보려고 해도 선생님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보리논의 한 두둑씩을 맡아서 베어 나갔다. 자기 몫을 다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끝나도록 좀 쉴 수도 있다. 그러나 일찍 끝난 남자아이들은 이런 일에 서투를 수밖에 없는 여자아이들이 아직 저 만큼 베어 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냥 쉬고만 있지 않았다. 가장 많이 남은 여자아이가 베어 오는 두둑을 중간에서 싹둑 잘라서 베어 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우리들이 힘껏 벤 덕분에 우리는 처음 시작한 다음날이자 우리가 보리 베기 삯으로 수학여행 비용을 마련하자고 결정을 한 첫날에는 논 7200평을 베어서 하루에 4800원을 벌었다. 일이 끝나고 오후 5시가 거의 되어서 선생님은 오늘 한일을 반성해보는 자리를 가졌다. “자, 오늘 우리가 벤 보리논의 모습을 보아라. 저기 언덕에서부터 여가까지 우리 학교 전체 면적보다도 두 배는 될 만큼 많은 논을 우리가 모두 베었구나. 오늘 품삯까지 합하면 벌써 두 사람 몫은 벌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모두 “와 !” 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좋아했고, 우리는 우리 힘으로 이렇게 수학여행 비용이 착착 저금되고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힘 드는 줄을 몰랐다. 힘든 일을 하였으면서도, 우리들은 신바람이 났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였다.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자랑스럽게 오늘 우리가 한 일을 이야기했다. “오늘 우리가 논 7200평을 베어서 우리 고장의 일손을 돕기도 하지만, 우리가 번 돈으로 수학여행 비용으로 하기로 했는데 오늘까지 두 사람 몫을 더 벌었다고 하셨어요. 우리 열심히 일해서 집안일도 돕고 수학여행 비용도 벌 거예요.” “너희들이 힘든 일을 얼마나 할 수 있을는지 걱정이구나. 몸살이라도 나면 안 된다. 너무 애쓰지 말아라.” “에이, 경미가 언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애예요. 보나마나 꾀나 부리고 제일 꼴찌를 하고 있을 텐데 몸살이 날 까닭이 있어요?” “에이, 오빠, 또 날 어린애로 봐. 만날 그런 오빤 뭐 잘하는 게 있어?” “요게? 또 나를 무시하고 덤벼? 너 한 대 얻어맞아 볼래?” “에이, 넌 오빠가 되가지고 동생을 그렇게 놀리고 그러냐? 좀 듬직 해봐라. 그러니까 동생이 널 무시하려는 거 아니냐?” 저녁을 먹은 나는 지쳤는지 금세 잠이 몰려 왔다. 이를 닦았는지 안 닦았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벌써 어머니가 아침상을 들고 들어오시면서 “경미가 아주 지쳤구나. 오늘 학교에 갈 수는 있겠니? 그렇게 힘이 들어서 며칠이나 견딜까? 아무래도 걱정이다. 어서 씻고 오너라. 밥 먹자”하시면서, 나를 깨워주신 것이었다. 나는 환한 아침 햇살을 보면서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서 뛰어 나갔다. 마음속으로 ‘아차 늦었구나. 서둘러야겠는데’하면서 서둘러 세수를 하고, 들어가서 서둘러 아침을 먹고 아버지가 갈아서 잘 싸놓은 낫을 가방에 꽂고 나서 집을 나섰다.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네가 지금 학교 가는 거니? 논에 보리 베러 가는 거지?” 물론 하루 종일 일을 하게 될 것이기는 하지만, 학교에서 하는 일이니 그것도 학교 공부라고 생각하니까 논에 일하러 나가는 것도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아침 인사를 나누는 교실의 분위기는 다른 날보다 훨씬 더 밝고 신이 난 것이었다. “그래, 어제 너무 많은 일을 해서 힘들었지? 혹시 몸살이 난 사람은 없을까 걱정을 했는데. 그래도 너희들 모두 밝은 표정으로 나온 걸 보니까 정말 반갑구나. 힘들었지?” “네에,” 우리들의 목소리는 힘차고 밝았다. “너희들 그렇게 힘든 일을 한 아이들 같지 않구나. 정말 괜찮은 거니?” “네에.”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신 선생님의 표정은 환하게 웃어 주시고 계셨다. “어제 너희들이 너무 많은 논을 베어 치웠기 때문에 오늘은 쉬네 부락 부근으로 가기로 했다. 그랬더니 어제 보다 더 많은 논을 베어 달라고 신청이 들어 왔는데, 너희들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할 수 있는데 까지 하겠다고 약속했다.” “선생님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 오늘은 30마지기를 베어 버릴 거예요.” “까르르” "야, 명식이 ! 너 혼자서 30 마지기를 벨 거라고?” 아이들은 모두 “와 !”하고 웃음으로 즐거운 한 바탕을 만들었다. “오늘 베어 달라고 신청을 한 논이 꼭 30 마지기이거든. 그럼 그걸 정말 다 벨 수 있을까? 너희들 생각은 어때?”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들은 누가 시킨 것도 의논을 한 것도 아니지만 모두 한결 같이 “다 벨 거예요”하고 합창을 하였다. 정말 우리는 그 많은 논을 다 벨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첫째 시간을 공부하는 동안도 아이들은 논에 가서 일하는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 힘든 일을 하기 싫다는 아이는 없었다. 어서 나가서 오늘 베기로 한 30마지기를 다 베자는 생각들 뿐이었다. 첫째 시간이 끝나자 선생님은 “난 이제 교무실에 가서 오늘 작업을 나간다고 신고를 해야 하거든, 너희들은 낫 조심하고 작업 준비들을 갖추고 운동장에 나가서 모여 있거라”하신다. 우리들은 마치 소풍을 나가는 아이들만큼이나 신바람이 나서 “와! 아”하고 함성을 지르며 좋아들 하였다. 물론 작업을 하면 늘 꼴찌를 하는 몸이 약한 성애 같은 아이들은 기가 죽어서 아이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아무리 일이 하기 싫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이렇게 야단인데 혼자서 그런 말을 할 용기도 없었다. 또 논에 나가면 아이들의 도움을 받는 데, 공연히 아이들에게 미움을 살까 봐서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낫을 챙겨 들고 목에 수건을 질끈 묶은 아이도 있었고, 작은 수건을 허리춤에 찬 아이도 있었다. “야 ! 문식이 넌 아주 마당쇠 같다. 마당쇠!” 정근이가 문식이를 놀리자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도리어 “예이, 무엇을 할 깝쇼 마님!” 하며, 마당쇠 흉내를 내어서 온 교실이 한 바탕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우리들이 운동장에 줄을 지어 모여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 선생님과 함께 교장선생님께서 함께 나오셔서 우리에게로 오셨다. 선생님이 반장에게 눈짓을 하자 반장이 “차렷, 교장 선생님께 경례!”하고 경례를 하자 다시 돌아서서 “열중 쉬어!”하자 교장선생님은 “험, 험”하시면서 목을 가다듬고서 “너희들이 작업을 한 것에 대해서 선생님께 잘 들었다. 우리 고장의 일손을 돕고 너희들이 결정한 돈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낫을 가지고 하는 일이니까 우선 다치지 않게 조심들 해야 한다. 너무 욕심을 부려서 일을 하다가 몸살이 나거나 하면 안 되니까 천천히 조심들 해야 한다. 자 열심히 해라. 다치지 않게 몸조심하고, 알았지?”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힘차게 "예"하고 대답을 하였고,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곧장 출발을 하여서 쉬내 동네 부근으로 가기 위해 들판을 가로질러 나갔다. 교실 보다 덥고 먼지가 풀썩이기는 하지만 들판을 나오니, 기분이 좋았다. 소풍을 가는 것처럼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면서 걸었다. 우리들은 마치 적군을 물리치러 나선 국군처럼 씩씩하고 용감하였다. 오늘 하루의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미리 알았다면 아마도 우린 기절을 하고 말았을는지도 모른다. 9000평이라는 면적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 전체의 면적이 3000평 남짓 밖에 되지 않으면 그 세 배나 되는 넓은 면적이 아닌가? 그러나 우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일을 하는 요령도 생겼고, 일을 잘 하는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지지 않을 만큼 익숙하게 보리를 베어 젖히는 것을 본 어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이기 때문에 겁날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도착하자, 논의 주인 되시는 장수동 이장님은 우리들에게 “아직 어리고 공부해야할 너희들에게 이런 일을 시킨 것은 미안하다. 그러나 이왕 일을 하러 나왔으면 어른들에게 욕먹지 않게 깨끗하게 일을 해주어야 하는 거야. 너희들도 모두 우리 고장의 아이들이고, 농사를 짓는 집의 자녀들이니까 모두 내 집의 일이다 하고 생각하고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알겠지?”하고, 말씀을 하시고 나서 선생님께 따로 부탁을 하시면서 조금 후에 새참을 준비해 오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마을로 돌아 가셨다. 우리들은 각자의 옷이나 도시락을 모아서 더워지지 않게 잘 덮어서 햇볕을 가려 놓은 뒤에 각자 한 두둑씩 일을 맡았다. 아무래도 힘이 약하고 일이 서투른 여자들에게는 귀퉁이의 두둑이 짧은 것을 맡기고 남자들은 한 가운데 두둑이 긴 것들을 맡았다. 요즘처럼 논이 반듯하게 농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이니까 아무리 부잣집의 논이라도 모두 비뚤비뚤 땅 모양이 생긴 대로 둑을 지어 만든 논들이었다. 그래서 논에 심은 보리의 두둑은 모두 그 길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른 그 부근에 있는 여러 논의 보리를 베어야 하였으므로, 남자들은 서로 두둑이 길고 보리가 잘 자란 것을 고르려고 하였다. 그래야 다른 아이들과 같이 끝날 수 있고, 다른 아이들보다 잘 하는 아이들이 더 많이 베어야 한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오늘의 일을 시작 해보자. 너희들이 지치면 안 되니까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 때 까지 열심히 베고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잠시 쉬어 가지고 다시 시작하도록 한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다치지 않게 조심하자.” 선생님은 말씀을 마치자 호루라기를 힘차게 불어 주셨다. 우리들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힘차게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가듯이 모두 자기가 맡은 논 두둑에 덤벼들어서 보리를 베기 시작하였다. 모두들 어찌나 열심히 베는지 말소리 하나 나지 않고 마치 누에가 뽕잎을 먹는 소리처럼 사그락사그락 보리들이 베어져 눕는 소리만 들려왔다. 선생님이 맡은 두둑의 길이가 가장 길지만 선생님도 만만찮은 솜씨로 보리를 베어 나가시기 때문에 따라 붙은 사람은 형주와 문섭이 뿐이었다. 두 아이는 키도 크고 힘도 좋아서 집에 가면 어른 몫을 한다고 소문이 난 일꾼들이다. 우리들이 사는 곳은 읍내에서도 40리가 되는 면 소재지에서도 또 십리 길을 더 들어와야 하는 산골 마을이다. 오죽 했으면 정부에서 지정한 벽지(교통이 불편하고 뒤진 고장)로 지정을 받은 고장이었다. 그래서 하루네 4번씩 다니는 버스가 생긴 것도 몇 년이 되지 않고 늘 십리 길을 걸어 다녔다. 큰 장을 보려면 삼십리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이런 일은 결혼 같은 큰 잔치나 있어야 마차를 동원하여 함께 보는 그런 고장이다. 그래서 이 고장의 아이들은 모두 우리처럼 농촌에서 집안의 일을 도와 가면서 자랐기 때문에 대부분이 어느 정도의 농사일을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 고장에서는 이런 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일단 보리 베기가 시작되자 들판은 사그락 거리는 낫질 소리만 들려오고 우리들의 이마에는 금세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가 손등이며 발들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더위에서 힘든 일을 하는 우리들은 이마의 땀을 쓱 팔뚝으로 문지르고 만다. 그러면 팔뚝에 묻은 흙먼지가 이마에 굵은 줄을 그리고 말았다. 이런 모습을 본 아이들은 옆의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히죽거리는 것이었다. 내 왼쪽 곁에 두둑을 맡은 영임이가 오른쪽에서 베던 승희의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보이자 승희는 힘이 들어서 주저앉으면서 “왜에? 내가 뭐 잘못 했어?” 하고, 나의 쪽을 향하여 말을 걸었다. 나는 나에게 그런 줄 알고 의아해서 “뭐? 나보고 그러는 거야?” 했더니, 승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아냐. 영임이가 날 보고 웃잖아.” 하자, 영임이가 다시 낄낄거리면서 “너 이마에 흙탕물을 잔뜩 뒤집어썼어.” 하였다. 이 말에 아이들은 모두 우리 쪽을 바라보고서는 승희의 이마에 팔뚝으로 문지른 자국이 흙투성이 인 것을 보고 한 바탕 웃음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승희가 울상이 되어서 “왜에. 얼굴에 뭣이 묻었는데?” “얼굴이 아니라 이마에 흙이 묻었다구.....” 내가 대답을 해주자 승희는 그제야 웃으면서 “넌 안 묻은 줄 알고, 너희들도 다 묻었어. 옆에 사람에게 물어봐.” 하며,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약 4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이미 일이 끝난 아이들이 잠시 쉬었다가 다른 사람의 줄을 잡아서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형주는 어느 새에 자기 줄을 널펀하게 다 베어 눕혀 놓고서 선생님의 두둑을 거꾸로 베어 오고 있었다. 문섭이도 다 베고 나서 가장 길게 남은 승희의 줄에서 중간에서부터 베어서 도와주고 있었다. 우리는 1학년 입학을 해서 졸업을 하도록 까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같은 반에서 그대로 올라가기 때문에 모두 한 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만약 한 동네에 사는 여자아이가 아파서 걷지 못할 만큼 심하면 남자아이들이 들쳐 업고 달려갈 만큼 우리들은 남자, 여자를 따지고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에서나 남자니 여자니 따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었고, 이렇게 도와주어도 어느 누구도 흉을 보거나 이상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같은 학급의 친구일 뿐이었고, 서로 도와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커다란 논의 보리 베기가 끝나기까지는 불과 2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찌나 열심히 베었든지 모두들 말을 하는 것도 잊은 듯했다, 승희네가 몇 마디 하는 사이에 웃음꽃을 피운 것이 전부였다. 선생님도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서 주르르 흘러내리고 등줄기를 타고 내린 땀이 흘러 내여서 바지의 허리띠 부근이 흠뻑 젖어 있었다. “자, 잠깐 쉬자, 우리가 벤 것이 450평이라는데 꼭 25분이 걸렸나보다. 이렇게 하다보면 오늘 너무 많이 베게 될 것 같은 데 걱정이다 너무 힘을 빼지 말아라. 하루 종일 베려면 안 된다”하시면서, 논둑에 걸터앉으셨다. 나는 그냥 쉬는 것보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자고 생각해서 “산 위에서 부는 바람......”하고 노래를 시작하였다. 모두들 따라 불러 주어서 금세 음악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다음 논으로 가서 자기가 맡을 줄을 잡으면서도 계속 노래를 불렀다. 어쩐지 신이 나고 힘이 덜 드는 것만 같아서 좋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더운 날씨가 점점 더 견딜 수가 없게 만들었다. 우리는 무더위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작업은 멈추지 않았고, 우리가 지나는 들판은 깨끗하게 면도를 한 듯이 보리가 베어져 눕고 말았다. 벌써 들판의 한 부분이 우리들의 손으로 깨끗하게 베어져 가고 하늘 높이 떠오른 햇볕은 목덜미를 따끔거릴 정도로 따가워 졌다. 우리는 시내에 가서 파놓은 웅덩이에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땀을 닦고, 목에 두르면 훨씬 더 시원해졌다. 한 시간쯤 일을 하고 잠시 쉬고, 다시 시작하여 쉬기를 세 번째 하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논주인 되시는 분들이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 주셔서 그걸 먹으면서 잠시잠시 쉬었기 때문에 우린 그리 지치지는 않았다. 들판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 밑으로 모여든 우리는 들판을 지나온 바람이 뜨뜻한 무더위로 우리를 감싸 안았지만, 땀을 흘린 우리는 그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더운 줄을 몰랐다. 점심을 먹고 나자 남자아이들은 시내의 웅덩이에서 멱을 감느라고 소란스러웠다. 여자아이들도 가고 싶었지만 시내에 물이 넉넉하지 않아서 갈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그늘에서 친구들과 손뼉치기를 하면서 놀고 있을 때, 남자아이들이 돌아오면서 “야 ! 너희들도 좀 씻고 와라. 그래도 물에 씻으니까 훨씬 낫다. 더운 줄을 모르겠어” 하면서 우리더러 가보라고 하였다. 정말 우리들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물이 얼마나 있어서 남자들이 더럽혀 놓은 물웅덩이가 깨끗해 졌을까?’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야! 여자들도 가서 좀 씻어라. 옷을 벗고 들어 갈만한 물은 없어도 발목을 적시고 씻을 수는 있는 모양이다”하시면서 우리들에게 가보라고 하셔서 일단 우리들은 시냇가로 가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시냇가에 가자마자 제법 물이 고인 웅덩이를 발견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풍덩”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옷들을 입은 채로 물 속에 뛰어 들어서 서로 물을 끼얹기도 하고, 물 속에 텀벙 잠기기도 하였다. 금세 시냇가는 왁자그르르 우리들의 소리로 채워져 버렸다. 한 동안 정신없이 물장난을 하고 있는 동안에 시간은 벌써 제법 흘렀던가선생님께서 그만 나오라는 호루라기를 길게 불어 주셨다. 우리는 잔뜩 젖은 옷을 대충 물기를 훑어 내려서 털고 나섰다. 그 정도만으로도 얼마나 시원했는지, 아마도 시원한 수영장이나, 해수욕장의 물 속도 이만큼 시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잠시 옷이 좀 마를 동안에 우리는 들판 한가운데서 신나는 음악 시간을 하였다. 교실 안에서 부른 노래보다는 너른 들판 한 가운데서 마음껏 소리를 질러 보는 것도 상쾌한 기분이었다. 오후에 우리는 정말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모른다. 그 많은 논들이 우리가 지나는 대로 깨끗하게 깎여져 들어 누운 것만 보아도 기분이 좋았다. 오후 5시가 되어서 해가 좀 설풋하게 기울자 이제 더위는 좀 가신 것 같았지만, 우리는 상당히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보리를 베는 논의 주인아저씨가 우리들이 쉬는 시간에 맞춰서 간식을 가지고 오셨다. “자, 아이들아 나오너라. 세참 가지고 왔다. 시원한 아이스 바를 사왔어 !” 아이들은 모두 베던 낫을 내던지고 논둑으로 나왔다. 선생님께서 호루라기를 불면서 “야! 다친다. 너무 달리지 마라. 위험하니까. 모두 다 줄 수 있게 사오셨을 거니까 차례로 와도 돼. 염려들 말고”하시면서 안전을 당부 하셨다. 아이들이 몰려 와서 줄을 서자 아저씨가 모두 하나씩 아이스 바를 들려 주셨다. 우리는 너무 반갑고 시원해서 더위가 다 달아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둘째 날의 작업이 끝났을 때는 오후 5시 20분경 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에 우리는 아침에 약속했던 대로 9000평이나 되는 논을 모두 베고 나서도, 600평을 더 베었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 사람이 한 마지기 가까이씩이나 벤 것이란다. 선생님은 한 마지기가 얼마나 되는 땅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면서 우리에게 “야! 너희들 정말 국민학교 6학년이 맞니? 아무래도 너희들은 농군들인가 보다. 너희들이 오늘 벤 논은 9600평이나 되는데, 한 사람이 대략 저 논 한 뙤기 만큼씩이나 벤 거야. 엄청나지 않니?”하시면서 우리들을 칭찬해 주셨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많은 논을 베었는지 다시 한번 우리가 벤 자리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이 이 들판에서 보리를 벤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벤 자리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정말 들판의 한 부분을 몽땅 베어 버린 것이었다. “자, 이제 오늘의 작업은 여기서 마치기로 하고, 지치고 힘이 들 테니까 집에 돌아가서는 시원한 물로 깨끗이 씻고 나서 벽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서 약 30분만 있으면 다리 아픈 것이 좀 풀릴 것이다. 꼭 그렇게 좀 해라. 알겠지?” “오늘 우리가 너무 많은 일을 했어. 내일을 아무리 많은 부탁이 있어도 우리가 너무 무리하게 해선 안 되겠다. 너희들의 힘에 겨운 일을 시킨 것은 오늘 내가 잘 못 생각 한 거야. 내일은 좀 적게 할 테니까 오늘 잘 쉬고 나오도록 해라.” 우리는 학교에 가서 가방을 가지고 돌아 와야 했지만 너무 힘이 들어서 내일 공부한 한 시간 책만 들고 가면 되니까 그냥 가기로 하였다. 들판에서 우리 마을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우리는 들판에서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지친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때쯤에는 기운이 없어서 터덜터덜 돌아갔다. 선생님도 오늘 일을 끝내고 나서는 혼자서 계산을 해보셨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하신 것이다. 사실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 시간까지 잔다고 생각하고 잠이 든 것이 그만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났었다고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억지로 깨워서 저녁을 한술 떠먹고 다시 들어 눕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손아귀가 아파서 주먹이 잘 쥐어지지 않았다. 오빠가 어깨를 주물러 주고, 팔목 운동을 시켜주기까지 하였지만, 아침밥을 먹으려니까 수저를 잘 쥘 수가 없었다. 이런 나의 꼴을 보신 아버지께서 혀를 차시면서 “아니 어린것들에게 얼마나 일을 시켰으면 저렇게 수저질을 못하고 저럴까? 아직 어린 학생들인데 농촌 일손 돕기도 좋지만 어지간히 해야지 아이들이 견디겠어?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저렇게 함부로 일을 시킬 수가 있나? 원”하시는 것을 듣고 나는 만약 아버지가 학교에 오시면 선생님과 싸움이라도 벌이 실 것 만 같아서 “아버지, 그게 아니어요. 농촌 일손 돕기도 하고 품삯을 받아서 우리들 가을 수학여행을 가자고 우리들이 하자고 그런 것 이예요. 선생님도 우리랑 함께 일을 하시느라고 옷도 땀으로 다 젖고 기운이 없어서 흔들거릴 지경이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어제처럼 많이 하면 안 되겠다고 하시면서 우리들이 팔 다리를 쉽게 풀리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셨어요.” “저 녀석은 제 아비 말은 안 듣더니 선생님은 감싸고돌면서 하는 짓이 뭐야 지금?” “아앙, 아빠가 학교에 와서 선생님이랑 싸움이라도 하면 나는 학급에서 쫓겨난단 말이예요.” “왜? 네가 일러 바쳤다고 선생님이 혼낼까 봐서?” “아니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쫓겨나요. 우리가 그렇게 하자고 결정을 했으니까 선생님이 책임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알았으니 어서 밥 먹고 나가서 오늘은 열 마지기씩만 베어라.” 아버지께서 우리들이 하는 일이 못 마땅하셔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한 사람이 열 마지기라니 그러면 어제 학급 전체가 벤 만큼씩을 베어란 말인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게 미운 소리는 하셨지만, 나를 위해서 아버지는 낫을 잘 갈아서 다치지 않게 새끼로 말아서 잘 싸서 내 운동화 옆에 놔주셨다. 엊저녁 같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니 그래도 몸이 개운하여서 얼른 학교를 향하였다. 어제 가방도 안 가져 왔기 때문에 첫째 시간에 공부할 국어 책만 한 권 달랑 들고, 낫을 들었으니 학교에 가는 것인지 일터에 가는 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일에 지친 우리들이지만 아침에 집 앞에 나서니 아이들은 언제 그렇게 힘든 일을 했느냐는 듯이 여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몸이 약한 윤숙이도 힘든 기색도 없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팔이 아프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어제처럼 많은 논을 베지 않기로 했다. 어제 너희들이 너무 무리를 해서 몸살이 나서 다들 학교에 못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단 한 사람도 결석을 하지 않고 다 나왔으니 참 다행이구나. 엊저녁에 힘들었지?”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들은 합창이라도 하듯이 “아니요”하자, 선생님은 어깨를 휘돌리는 동작을 하시면서 “그래? 난 엊저녁에 어깨가 아파서 아이들에게 두들겨라, 주물러라 야단을 했는데?”하시자, 우리들은 “에게, 그 꼬마들이 두들겨서 시원해요?”하고 선생님을 놀리기까지 하였다. 선생님은 학교 안의 사택에서 사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선생님 댁의 아이들을 잘 안다. 2학년짜리 딸아이와 다섯 살, 네 살짜리 두 아들을 두셨는데, 아이들이 너무 귀엽고 우리들을 잘 따라서 가끔씩 아이들을 데리고 놀아 주기도 한다. 아직 세 발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을 밀어 주면서 귀여워서 서로 업어 주려고 쟁탈전이 벌어 지기도 하였었다. 그런데 그런 꼬마들이 두들겨 보았자 선생님의 어깨가 시원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시간 공부를 마치자 벌써 우리들이 작업을 하러 갈 논의 주인이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다. 일손이 없는 노인들만 사시는 댁이어서 우선 해드리기로 약속을 했더니, 혹시 다른 곳으로 갈까 걱정이 되셔서 미리 와서 기다리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왕 일손을 돕는 것이지만 일할 만한 젊은 분이 안 계신 그런 댁의 일부터 해 드리는 게 우리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서 우선적으로 해드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새끼미 마을의 앞들에서 베기로 한 날 이었다. 이 마을의 원호 가족 한 집과 노인들만 있는 집, 그리고 우리 반의 정아네 인데, 할아버지가 농삿일을 하시고 아버지는 몸이 허약하여 일을 못하시는 댁인데, 할아버지께서 앓아 누우셨다고 해서 그 집의 일손을 도와 드리기로 약속을 하였다. 학교에서 동남쪽으로 시내를 건너서 산기슭으로부터 흘러내린 듯이 펼쳐진 들판이었다. 그래서 논들이 계단식이고 그리 넓은 것이 별로 없이 한배미가 보통 한 두 마지기씩이나 되는 것들이었다. 300에서 500평 정도의 논바닥에 아이들이 한꺼번에 들어 갈 수가 없어서 두 세 배미씩 나누어서 들어섰다. 아이들이 힘이 들기는 하였지만, 사흘째가 되니까 낫질을 하는 요령이 생기고 보리 베기에 익숙해져서 점점 더 베는 속도가 빨라졌다. 학교에서 건너와서 우리 동네 정자나무 아래에다가 도시락을 가져다 두고, 논에 들어서서 작업을 시작 한 것이 10시 30분이 조금 지나서였는데,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정아네 집의 논 7마지기를 몽땅 다 베어 버렸고, 원호 가정의 논 다섯 마지기까지 거의 다 베었다. 점심 전에 3600평이나 되는 논의 보리를 다 벤 셈이 된 것이다. 정자나무 아래 제법 너른 마당이 있어서 점심을 여기서 먹게 되었다. 나는 우리 집에 가서 커다란 주전자에다가 시원한 물을 퍼 가지고 와서 선생님께 드리자 “고맙다. 은자야. 집까지 제법 먼데 일부러 가서 이렇게 시원한 물을 떠오니 고맙구나. 아이들이 얼마나 반갑겠니?”하시면서, 차례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셔서 모두 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점심시간에 잠시 쉬라고 하나 아이들은 그 동안에 고누를 두는 아이들, 씨름을 하는 아이들,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로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선생님께서 정자나무에 기대고 눈을 감으시면서 “얘들아 앉아서 놀자!”라고 큰 소리를 하셔서 우리들은 하던 놀이를 멈추고 잠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바로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서 ‘얘들아 앉아서 놀자!’라고 했던 선생님의 친구가 있었단다. 지금부터 약 30년 전의 일이구나”하시자 아이들은 하던 놀이를 멈추고 모두들 선생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30년 전쯤의 일이다. 이 마을에 살던 선생님의 친구가 몹시 집안이 가난하여서 끼니를 제대로 먹고 살 수가 없었단다. 그 무렵에는 모내기를 하면 모내기 나온 사람들의 식구는 모두 다 나와서 모내기하는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지. 부잣집에서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모두 점심을 대접하는 것이 풍습이었단다. 그래서 그 친구가 아침도 굶고 나와서 기다리다가 점심을 먹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의 밥그릇은 이렇게 커다란 그릇에다가 고봉으로 수북하게 밥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가득 담은 어머니의 밥을 그 친구가 혼자서 다 먹은 거야. 겨우 일곱 살짜리가 말이야. 어머니는 다시 타다 잡수셨지만, 일곱, 여덟 살 밖에 안 되는 아이가 어른 밥을 수북하게 한 그릇 다 먹었으니 얼마나 배가 불렀겠니? 배가 남산만 해 가지고 여기 이렇게 기대고 있는데, 다른 친구들은 지금 너희들처럼 뛰어 노는 거야. 이 친구 뛰고는 싶은데 배가 불러서 뛸 수가 없으니까 친구들에게 한 말이.” 선생님이 여기까지 이야기 하셨으니 무슨 말인지 모를 우리들이 아니었다. 모두들 입을 모아서 합창을 하였다. “얘들아 앉아서 노올자 !”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나서는 모두들 손뼉을 치며 깔깔거리고 한바탕 웃음보따리를 풀었다. 우리 선생님이 우리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라셨는데, 학교 다닐 적에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여서 그곳에서 학교를 마치고 우리 학교로 발령을 받아 오셨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이 동네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처음이었다. 잠시 쉬었다가 오후 작업을 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은 또 다시 시끌벅적하게 놀이를 시작하였다. 정말 나무에 기대어서 ‘얘들아 앉아서 놀자’ 하는 얘들도 있었다. 오후엔 비가 내릴 듯이 구름이 끼어서 작업하기엔 좋았지만, 어른들은 이제 비가 올 가봐 걱정들을 하셨다. 그렇다고 베기로 한 논을 다 베지 않고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보리를 베어 나갔다. 오전 보다 훨씬 더 일을 하기가 쉽고, 시원하였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열심히 일을 한 덕분에 어제 보다 도 더 많은 실적을 올렸다. 오늘을 1만평이 넘는 논의 보리를 베었다. 1만1400평을 베었는데도 어제보다 40분이나 빨리 끝났다. 더 벨 논만 있었으면, 아마도 40마지기는 베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논을 베고 나자 동네 어른들이 나오셔서 혀를 내두르셨다. “아니? 이 아이들이 하루에 1만1000평을 더 베었단 말이야? 그럼 거의 한 사람이 한 마지기씩을 베었는데? 그럼 어른들과 같은 거 아니야? 아이구 놀래라. 원 아이들이 뭐 이렇게 일을 잘해?”하시는 분은 바로 이 동네 이장님이셨다. “야! 너희들 이젠 저희들이 어른들보다 일을 더 많이 하게 생겼는데?”하시면서 앞에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어제 너무 힘들어 하길레 오늘은 조금 적에 하겠다고 했는데 어제보다 훨씬 더 많이 베었는데도 이렇게 일찍 끝났는데요”하고 이장님께 말씀드리고 나서 "자, 오늘 일은 여기서 마친다. 너희들이 너무 일을 잘해서 이장님이 이렇게 칭찬을 하셨는데, 난 너희들이 지칠까봐 걱정이다. 집에 가서 잘 씻고 다리도 좀 주물러야 한다. 팔과 어깨도 주무르고 푹 쉬도록 하여라"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아이들은 너무 일찍 끝나서 섭섭한지 한바탕 놀이를 하다가 떠났다.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이 동네 저 동네로 다니면서 보리 베기를 한 것이 열흘 동안이나 되었고, 그 동안에 번 돈이 6만4000원이나 되었다. 320마지기(9만6000평)나 되는 논의 보리를 우리가 다 베어낸 것이다. 완전히 우리 고장의 논보리의 1/3은 우리가 베었다고 소문이 났다. 이렇게 열흘씩이나 보리를 베고 나니 아이들은 코피를 쏟는 아이들도 있고 모두들 지쳤다. 선생님은 이런 우리들을 보면서 “아무리 나가고 싶어도 안 된다. 난 너희들이 스스로 벌어서 수학여행을 가겠다는 결심을 보고 지금까지 함께 일을 했지만 , 이젠 나도 지쳐서 더 이상 안 되겠다. 너희들 벌써 코피를 쏟은 아이가 몇 이냐?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4일간은 작업을 나가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난 더 이상 내 보낼 수 없어. 이젠 안 나간다. 알겠나?”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기가 죽었다. 날마다 돈이 불어나는 것이 좋아서 계속 하자고 하였지만, 지친 아이들이 많아서 더 이상 할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선 나도 지쳐서 이제 그만 했으면 싶었다. 그 동안 못한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서 우리는 체육 음악 같은 시간은 줄이면서 우선 국, 산, 사, 자 4과목의 공부를 계속하였다. 오후 5시가 되도록 하루 열 시간이라도 좋다고 공부에 매달린 우리는 4일 동안에 열흘 동안의 모자란 공부 진도를 거의 다 맞추었다. 우리는 매달마다 월말 일제 고사를 보아서 그 점수만 가지고 성적을 내었기 때문에 안 배우고 시험을 볼 수 없어서 무척 바빴다. 월말이 다가왔었기 때문에 일제고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작업을 하느라고 시험 범위까지 배우지도 못해서 서둘러야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 자습시간까지 공부 시간으로 해서 간신히 시험 범위까지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6월 첫 주에 5월말 일제고사를 치르고 나자, 그렇게 기다리던 비가 조금 내렸다. 이 비가 오자 농촌은 진짜 야단이 났다. 지금까지 논에 물이 없어서 갈지도 못하고 논둑을 붙이는 일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니까, 논을 갈고 논둑을 붙여서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일에 매달려서 단 한 사람도 일손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또 다시 우리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게 되었다. '모내기 농촌일손 돕기 운동'을 펼쳐라는 지시가 잇달아 내려 왔다. 하긴 그 때만 하여도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대부분이 농사에서 얻던 시절인데 이렇게 날씨가 가물어서 전 국민이 나서서 가뭄대책을 서두르다가 비가 왔으니, 온 나라의 모든 힘을 다 모아서 모내기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만약에 위에서 이런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농사일을 돕기 위해서 농번기 방학을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또 다시 들판으로 나섰다. 날마다 이 들판 저 들판으로 다니면서 모내기를 하였다. 어떤 논에는 아직 물이 들어가지 않아서 모를 낼 수가 없어서, 호미를 들고 가서 모를 호미를 일일이 심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하여도 우리는 기뻤다. 못자리에서 모가 타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들판을 지나는 시냇가에서 물을 퍼 나르던 때를 생각하면 모내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절로 났다. 우리는 일주일을 날마다 논으로 나가서 모내기를 돕는 일을 하였다. 물론 우리는 모내기를 해주면서도 조금씩 돈을 받아서 우리들의 수학여행비를 마련하는데 보탬이 되게 모았다. 모내기 일주일 동안에 우린 매일 6000원씩을 벌어 들였다. 모내기는 한 마지기에 300원씩을 주셨다. 보리 베기와는 달리 모내기는 우리가 조금만 잘못하면 농사를 망칠 수 있으니까, 일을 많이 하기보다는 정신을 쏟아서 모를 잘 심는 것이 더 중요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정성껏 모를 심었다. "아이들이 심는다고 농사 망친다고 안 된다고 했더니, 어찌나 꼼꼼하게 심었는지, 어른들이 심은 것보다 더 잘 심었어!"하는 칭찬을 들었을 때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우선 우리가 모두 농촌에서 자랐고, 농사를 짓는 집의 아이들이니까 남의 농사를 망쳤다는 얘기를 들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남의 농사를 망친 것은 내 농사를 망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 아닌가?’ 다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내기를 정성껏 하였고 다행히 잘 심었다고 칭찬을 듣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모내기를 일주일 하는 동안에 3만6000원을 더 벌어서 모두 10만원을 모았다. 우리 한 사람 몫으로 2200원이 넘는 돈이었다. 이 정도면 한 사람이 1000원 정도씩만 내면 수학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으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모은 돈에 희망을 걸고 11월에 수학여행을 갈 때까지 무엇을 해서 돈을 더 모으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둔 7월 초순에 들어서 학교에서는 학교공원화사업을 추진하시던 교장선생님은 학교 화단에다가 세종대왕상과 이순신장군상, 신사임당, 반공소년 이승복상, 효자 정재수의 상, 그리고 동물상으로 호랑이, 사자, 기린, 꽃사슴, 등을 세우기로 하면서 학부형들의 도움을 요청하였고, 학부형들의 기부금이 모자라자 학교 안의 모든 돈을 쓸어 모으게 되었다. 이 때 학교에서는 6학년 어린이들의 수학여행비로 모은 돈을 학교 공원화 사업비로 내어놓으라는 것이었다. “김선생, 지금 학교에서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은 직접 찾아다니면서 기부금을 모아 봤으니 더 잘 알 것이네. 그래서 말인데. 6학년이 모아둔 돈을 좀 내어놓을 수 없겠나?”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선생님께 요구하였다. 그러자 우리 선생님은 “무슨 말씀입니까? 그 돈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자기들의 수학여행비로 모으기 위해서 여름 내내 땀을 흘리면서 보리 베기하고 모내기하여서 모은 돈입니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을 하여서 모은 돈입니다. 그걸 내 놓으라면 안 될 말입니다”하고, 분명하게 거절을 하셨다. 그러자, 학교 경리를 책임지고 있던 강 선생은 우리 담임선생님께 폭언을 하면서 “교장선생님이 하라면 하는 것이지 뭐여? 안 된다고? 학교 안에서 교장의 말을 안 듣고 대들겠단 말이여?”하고 협박을 하였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그런 협박이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아무리 그래도, 우리 반의 아이들이 자신들이 의견을 모아서 한 일이고, 그 아이들이 일을 해서 모은 돈이니까, 그건 아이들의 돈이지 내 돈이 아닙니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아이들에게 무어라고 말을 합니까? 담임이 아이들을 속이고 일을 시켜 먹고 그 돈을 빼앗아야 한단 말입니까? 난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하고 끝까지 반대를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이 일로 해서 학교 안은 한창 소란이 일어났다. 교장선생님과 경리 담당 강선생님은‘돈을 내어놓아서 학교 일에 보태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대부분의 젊은 선생님들은 이와 반대로 ‘무슨 소리야, 아이들이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걸 내놓으라니 말도 안 돼! 교장선생님도 참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기어이 지금 세워야 하나?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인 돈인데 그걸 내놓으라면 담임은 아이들에게 뭐라고 하란 말이야?“하면서 반대를 하였다. 결국 선생님들까지 두 파로 나뉘어서 의견이 달랐다. 이렇게 학교 안에서도 야단이 났지만, 아직 우리들에게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서 우린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 이번에는 교장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을 불러서 “이미 주문을 해 놓았으니 그리 알게. 내가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자네가 맡은 일이 아닌가? 학교 공원화 사업을 하려면 어쩌겠나?”하면서 ‘이미 주문을 해놨으니 그리 알아라’고 일방적으로 다그쳤다. 그러나 우리 선생님은 “전 못합니다. 제가 아이들과 약속을 한 일입니다. 그럼 제가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해서 일을 부려먹었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수학여행비를 번다는 생각으로 그 어린것들이 코피를 흘려 가면서 번 돈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내놓으라고 어떻게 말을 하란 말입니까? 제 입으로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못 합니다”하고, 끝까지 반대를 하고 나섰단다. 이렇게 되자 교장선생님이라도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김선생은 빠지시오. 우리가 아이들에게 이해를 시키겠소.”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말을 하면서 직접 아이들을 설득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정말 교장선생님이 아이들을 설득시키시겠단 말씀입니까? 강제로 하지 않고 아이들이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하도록 만드시겠단 말씀입니까? ‘손들어’라고 하지 말고, 찬반 비밀 투표를 해서 결정을 하시겠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빤히 쳐다보면서 ‘반대하는 사람 손들어’ 식으로 결정을 한다면 저는 인정 못합니다. 아무리 교장이시고 이 학교의 책임자 이시지만, 이번 일만은 순수하게 어린이들이 자기들의 결정에 의하여 자신들의 손으로 마련한 거금입니다. 아직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억지로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김선생 ! 그게 무슨 말이야? 억지로 빼앗다니? 지금 우리가 아이들의 돈을 빼앗아 먹겠다고 하는 건가? 학교를 위해서 협조를 하자는 것이 아닌가?” “만약 아이들이 그 돈을 마련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셨습니까? 그 돈이 없었다면 그 사업 중에 한두 개를 덜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왜 아무 준비도 없이 주문을 하시고선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담임선생님이 너무나도 강하게 반대를 하시니까 교장 선생님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고 생각을 했는지 잠시 생각을 해보시는 눈치이셨다. 그 때 학교 회계사무를 맡은 강선생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김선생! 자네 뭔가? 나이 드신 교장선생님께 그렇게 대드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는 거여?”하고 소릴 지르는 것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어이없다는 듯이 강선생님을 바라보면서 “제가 뭘 잘 못했습니까? 제가 제 욕심 채우자고 그러는 겁니까 ? 아이들이 피 땀 흘려 마련한 그 돈을 억지로 내놓으라니까 그러지요.” “그럼 교장선생님이 욕심을 채우려고 그 돈을 달라고 하는 거란 말인가? 학교 사업을 하자고 하다 보니까 모자라서 좀 돕자는데 그게 잘못됐다는 말이여!” 금방 치고 말겠다는 듯이 협박적이었다. 이 강 선생님은 우리 담임선생님의 형님과 동창생이어서 마치 동생을 대하듯이 함부로 하는 편이었다. 더구나 덩치도 크고 면내에서는 깡패란 말을 들을 만큼 자기 멋대로 하고 다니는 그런 분이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그런 강선생님에게 지지 않고 “그건 아니지요. 만약 그 돈을 준비하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주문을 해놓고 어찌하려고 했는지 여쭤 보는 거예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주문을 해놓지는 않았을 거 아니예요?” 이렇게 따지자, 강 선생님은 “그거야 우리가 마을에 다니면서 협조를 받아 왔지 않아. 그런데 돈이 너무 모자라니까 그러는 거 다 알면서 왜 그래?” “그래서 처음부터 돈이 준비된 만큼만 주문을 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무슨 재주로 학부모님들의 호주머니를 뒤져서 빼앗아 올 수 있다고 억지로 일을 벌여 놓고서 이제는 아이들에게 피해를 입히려고 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야! 너 말 다했어? 정말 이렇게 협조하지 않고 대들 거야? 형을 봐서 참아 왔더니 아주 못 쓰겠구만.” “강 선생님! 형님의 동기동창이시라고 저도 형님 대우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제 큰 형님의 담임이셨다는 것도 알고 살아 왔구요. 그러나 이번 일을 그런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한 것은 잘못이지 형님의 친구라고 그것으로 억지를 부리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이론적으로 부족함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성질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인지 강 선생님은 담임선생님을 향하여 재떨이를 내던졌다. 다행히 피해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큰 일이 날 뻔하였다. 이렇게 소란이 일어나는 동안에 교무실에 선생님들은 점차 험악해져 가는 분위기를 느끼고 하나 둘 교장실로 다가오다가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우르르 몰려들어서 담임선생님과 강선생님을 뜯어말리고 억지로 껴안고 밖으로 끌어내었다. 결국 모든 선생님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여 결정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아이들이 마련한 돈을 쓰는데 아이들의 의견이 아니라 선생님들이 결정을 한다니.’ 무엇인가 잘 못 되어 가고 있었지만, 담임선생님의 혼자 힘으로 이렇게 학교 전체와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일단은 선생님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교무실에 모두 모였다. 한 시간 가량이나 의논을 계속한 결과는 일단 교장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이해를 시키고, 아이들의 동의를 얻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담임선생님은“아무리 그래도 저는 동의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도저히 제 양심으로는 아이들에게 협조를 해달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께서 해주십시오. 그리고 아이들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하면 안 됩니다. 저는 제가 어린이들에게 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도저히 제나 나서지는 못하겠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절대 반대입니다. 아이들에게도 이 말만은 해주셔야 합니다”하고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이렇게 의논이 분분하던 일은 선생님들의 의견을 따라 일단 교장선생님이 교실에 들어 가셔서 아이들의 동의를 구하기로 하였다. “6학년 어린이 여러분 ! 이미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줄로 압니다. 학교 화단에 지금 여러 가지 동상모형을 설치하고 있는데, 여러분 아버지 어머니가 돈을 거두어 주셔서 많이 도움이 되었지만, 아직 돈이 조금 모자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수학여행을 가려고 모아둔 돈을 학교 사업에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의논을 하였으나 담임선생님은 여러분과의 약속 때문에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를 하여서 며칠 동안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주문을 하여서 설치는 해놓았는데, 돈이 모자라서 못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모은 돈으로 학교 화단에 멋진 동상모형을 하나 만들어 두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애써 모은 돈이고 피땀을 흘린 돈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의 의견을 듣기로 한 것입니다. 협조해 주실 거지요?”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들은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교장선생님이 자기 아버지, 어머니의 담임선생님이었던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얼굴을 보일까봐 고개들을 푹 숙이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10여분에 걸친 이야기를 듣고서도 누구도 ‘좋다’ ‘싫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정도로만 이야기를 해 놓고 교장선생님은 나가버리셨다. 교장선생님은 이 정도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으면 되었다고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그런 정도에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도 동의를 해주지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교감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교감선생님은 아주 얌전하신 선비 같은 분이셨다.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무리한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대단히 미안하다. 그렇지만, 이것도 학교를 위한 일이 아니겠느냐? 너희 담임선생님은 너희들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교장선생님께 대들기까지 하셨고, 선생님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다. 이제 너희 담임선생님은 너희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기 때문에 끝까지 그만큼 애를 쓰셨다. 이제는 너희들이 결정을 해야 할 때이다. 너희들이 양보를 하면 담임선생님이 학교에서나 여러 선생님들 사이에 좋은 분이 될 수 있겠지만 너희들이 끝까지 반대를 한다면 너희 선생님까지 욕을 먹게 되는 거다. 너희들을 위해서 그만큼 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 너희 담임선생님 댁에서 하숙을 하고 있지 않니?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여러 선생님들에게 비난을 받는 모습을 볼 수는 없을 것 같구나.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부탁을 하려고 한다. 어쩔 테냐? 너희들의 돈을 지킬 테냐, 아니면 담임선생님을 욕먹지 않게 해드릴 테냐?” 교감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들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이런 우리들을 보면서 교감 선생님은 천천히 우리들에게 이야기 하셨다. “너희들이 그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렸는지 내가 다 안다. 날마다 선생님에게 들었고, 너희 선생님이 녹초가 되어서 저녁을 먹자마자 떨어져 잠들곤 했으니까, 너희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만 하였지. 그런데 너희들이 잘 해주지 않으면 너희 선생님이 곤란해질 것 같구나. 너희 선생님이 끝까지 반대를 하고 있는데, 너희들까지 반대를 하면 그 돈을 쓰지는 못하겠지. 그러나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좋아할 사람이 없게 되어서 따돌림을 받게 될 거야. 너희 선생님은 오직 너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저렇게 다른 선생님과 싸움까지 하였는데, 이제 어떻게 하겠니? 너희들이 양보
자율과 경쟁의 정책 기조 아래 고교 다양화가 추진되고 혁신학교, 자율형공립고 등이 새로 지정되면서 고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일반계고가 정책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반계 고교 교원들은 사실상 일반계고에 우수 인재를 유치할 길이 없는데다 학교 특성화를 위한 예산지원, 학교 자율권이 없는 상태에서 경쟁에만 내몰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범덕 한국국공립일반계고등학교장회 회장(서울언남고 교장)은 “최상위 학생들은 특목고, 자사고로 진학하고 중상위 학생들도 100%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 진학에 유리한 특성화고로 진학하기를 원해 일반계고의 우수 학생 유치가 상당히 힘들다”고 지적했다. 박 회장은 “고교 다양화나 교육 환경이 열악한 학교 지원도 중요하지만 교육정책이 그 방향으로 치중돼 있다는 것이 문제”라며 “다양화나 특성화를 위해 1억~2억원씩 지원받는 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일반계고에도 피부로 와 닿는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윤재열 경기 안산 초지고 교사도 “일반계고에 대한 지원이나 학교를 특성화할 제도적 환경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원인과 과정은 생략된 채 성과로만 학교를 평가하고 책임을 묻는다”면서 “현장 교사로서 다른 유형 고교의 지원에 비해 차별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재정지원에 있어 자율형 공립고나 혁신학교 등은 일반계고에 비해 1억~2억 원을 추가 지원을 받는다. 등록금의 경우도 일반 공·사립고가 연간 100만~145만 원인 데 비해 자율형 사립고는 이의 3배여서 재정 운용과 활용에 있어 큰 차이가 난다. 이경표 서울배화여고 교장은 “같은 법인 내에 중․고가 함께 있지만 중학교의 우수한 학생들이 다른 고교로 진학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면서 “일반계고에서 사실상 승부를 걸 수 있는 게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온 사회가 일반계고를 대입 결과 중심의 경쟁으로 몰아붙이는 상황에서 학생, 학부모의 선택을 받는 우수한 학교로 만들지 않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며 “하지만 현실은 교육과정 편성의 자율권은 묶여 있고, 우수 교원 확보도 어려워 사립 일반계고는 더 어려운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일반계고의 교육과정 운영은 초·중등교육법을 준수해 교육과정을 20% 증감 운영(필수이수 116단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반면 자율형 공립고는 필수 이수 72단위 이상, 교과군별 이수 단위의 50% 증감이 가능하다. 자율형 사립고의 경우는 총 이수 단위의 50% 이상(58단위 이상)만 이수하면 되며, 교과군별 이수 단위 준수 의무가 없다. 특목고는 필수이수 62단위에 전문교과 80단위 이상을 이수하면 된다. 한국교총 정책분석팀 장승혁 씨는 “대다수 일반계고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정책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며 “단위 학교의 자율권 확대와 함께 일반계고에도 우수학생을 유치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학교 사회에서는 3월을 정월(正月)이라 생각한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런 3월이면 ‘교육’이라는 두 글자에 가슴이 뛰는 새내기 교사들이 교육현장에 같이 하게 된다. 요즘 신규교사들은 고교 시절 최소 상위 10%에 들던 우수 인재들이다. 그런 인재들이 교육대학을 지원하고 체계적인 양성 교육을 거쳐 자질과 소양을 쌓은 후 교직에 입문해 그들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는 교육현장을 바라보는 것 참으로 마음 든든한 일이다. 그런데 걱정은 이런 우수 인재들이 마주 대하는 학교라는 현장은 대학에서 이론이나 서책으로만 대하던 것과는 너무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이다. 공부에 전부를 걸어야 하는 것이 그동안 새내기 교사들이 살아온 삶의 짧은 궤적일 것이다. 공부를 잘해야만 교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지고 입학한 후에도 오로지 임용고시에만 매진해야 하는 시스템이 오늘의 교원양성체계이다. 그러다 보니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 다른 사람에 대한 따뜻한 배려, 나를 희생하는 헌신 등의 인간적 자질과 품성을 함양할 기회가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교사로서의 품성과 자질은 이론만으로는 습득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배려,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는 따듯한 감성 등은 부재한 채 차가운 이성만으로 가득 차 있다면 사랑과 헌신이라는 평범하지만 본질적인 자질이 필요한 교사로서 충분히 기능할 수 있을까? 마주대하는 학생 한 사람 한 사람마다의 삶은 저마다 다르기에 하나하나의 존재의 차이를 다르게 감지할 수 있는 따뜻한 감성을 갖추는 것이 그 어떤 교육학 이론보다 우선해야 만하는 것이 학교이다. 또 이것은 동시에 교육자로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 자질이기도 하다. 그동안 논리·연산적 지능 개발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삶을 살아왔다면 이제는 공부만 잘하는 샌님이 아닌 주위를 둘러보고 소외된 학생, 돌봄이 절실한 아이, 도움이 필요해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가슴앓이를 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는 선생님의 눈을 가져야 한다. 모쪼록 이번에 부임한 신규교사들이 선생님의 밝은 눈을 가진 훌륭한 교사로서 거듭나게 되기를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넘쳐나는 교정의 한 켠에서 기원해본다.
학기말의 와중이라 스쳐 지나갔지만, 지난 2월 8일자 도하 언론을 통해 일제히 보도된 내용이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교사들의 글로벌 교육역량 강화를 위해 2015년까지 총 1만여 명의 현직 및 예비교사에게 해외파견 및 연수, 외국 교사자격증 취득 등의 기회를 준다는 보도이다. 만시지탄이지만 그 취지에 대해 전적으로 환영한다. 그간 놀랍도록 성장한 우리의 국격이라든가 경제력에 비해, 교육의 글로벌화를 위한 교사들의 해외 연수 기회는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해외 교육 정보를 얻고자 하는 노력, 해외 교육 수준에 대한 탐방 등의 자비 연수조차도 외화 낭비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시절도 있었다. 교과부의 이번 발표는 방법적인 측면에서 좀 더 보완만 된다면 교사들을 위한 훌륭한 연수 프로그램으로 기능할 것이다. 이와 연관해 내게 두서없이 떠오르는 몇 가지 생각이 있다. 루소, 오바마 그리고 인도이다. 주지하다시피 루소는 명저 ‘에밀’을 통해 교사의 역할을 제시했다. 교사는 우선 에밀이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학습 과정을 하도록 유도한다. 교육 과정은 ‘자연스러움’을 최대로 반영하고, 교사의 훈도에 의해 사회적 영향에서 독립해 스스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인지 능력을 갖춰나가도록 유도한다. 이후 독서로 간접 경험의 기회를 갖게 된다. 에밀이 14세가 되자, 교사는 지금까지의 모든 직접 간접 경험들이 결국 그를 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자발적인 노력이었음을 깨닫도록 인도한다. 이로써 에밀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역사나 신학,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게 되며,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 단언컨대, 교사의 노련하고도 풍부한 경험과 연륜이 없다면 ‘에밀’을 적절하게 교육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독서를 통해 얻은 간접 경험과 인생과 삶에 대한 풍부한 직접 경험을 지닌 교사라야 ‘에밀’과 같은 학생들에게 다가설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교사의 풍부한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과 해외 파견의 연수와 여행과 같은 직접 경험은 교육 행위를 위한 풍성한 자양분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교사의 교육적 역할은 교사 개인이 지닌 경험적 인식과 밀접히 연관된다. 지난 겨울방학에 필자는 교사 6명을 인솔하고 인도 중북부를 다녀왔다. 2월 초의 구정 연휴까지를 활용한 20여 일의 적지 않은 여정이었다. 해외 오지에서 그간 필자는 많은 교사들을 만났다. 인도의 경우, 거리의 구루로부터 히말라야 산맥의 동굴서 평생을 수행하는 개인 수행자들은 명상을 교사로 삼아 철저히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대도시 사립학교의 교사에서 시작해, 시골 공립학교의 교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사들은 당면한 교육 과제로 인해 부심하고 있었다. 많은 경우 극심한 문맹률과 가난의 문제, 그리고 대량 교육의 부담과 엘리트 교육의 과제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교육의 당면 과제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런 그들조차도 중요한 핵심 과제에 이르면 자신이 믿는 종교적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점이다. 첸나이 출신의 교사 루크 자와라얄(LUKE JAWARAWAL)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고백했다. “우리는 진지하게 미래를 걱정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힌두는 힌두대로, 무슬림은 무슬림대로 산다. 시크는 시크대로 부디스트는 부디스트끼리 산다. 자인은 자인대로 파르시는 파르시대로 자신의 세계로 회귀하고 만다. 여기에 국가는 없고 지역과 종교만이 남는다.” 한 개인의 각성이 국민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장을 목격한 순간이다. 그간 델리와 뭄바이에서 대입에 대비한 사교육의 열풍과 총탄을 피해 등교하는 히말라야 산간마을 스리나가르의 학생들을 보았다. 이로써 빈곤 문제와 종교 갈등에 옥죄여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화두를 곱새기게 되었다. 교과부의 이번 구상을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이런 구상조차도 용두 사미격의 ‘빛 좋은 개살구’가 되지 않나 솔직히 염려된다. 그간 검증 안 된 정책으로 교단의 황폐화를 불러들이고 난 후, 교육 당국이 흘리던 선심성 정책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나중이야 어찌 되었든 인기몰이 식으로 한 방 터뜨리는 행태를 말하고자 함이다. 필자는 이렇게 불쾌하게 학습된 기억을 우려하고 있다. 공자는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교사가 있게 된다. 그 잘하는 교사는 선택해 따르고, 그 잘 못하는 교사는 선택하지 말아 고치면 된다”고 했다. 그 잘하는 선택교사로 삼든, 불선택의 반면교사로 삼든 우리 주변을 넘어서 밖을 살피고자 하는 교육적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 잠시 뒤집어 바라보자. 오바마는 우리 교육 현장을 자꾸 공식석상에서 언급하곤 한다. ‘나는 교사이다’를 되뇌는 필자의 입장에서 참으로 손발이 오그라들며 민망해지는 순간이다. 변화 요구에 대한 신속한(?) 환류 체계, 그리고 교육 현장의 요동치는 역동성에 대한 피상적 관찰이 나은 결과라 보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 교육을 그네들이 선택 교사로 보든 반면교사로 보든 이제는 외부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이제 세상은 지구별의 운명으로 한 공동체가 되어 돌고 돌고 또 돌기 때문이다.
교원능력개발평가는 10여 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3월 1일부터 교육감의 교육규칙에 근거해 전국의 초·중등학교에서 시행해 오고 있다. 하지만 교육과학기술부는 올해 3월부터 교원평가제의 법적 근거를 대통령령으로 규정함에 따라 일부 시·도교육감과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다. 그동안 교원평가는 교육계의 커다란 갈등 요소이었기에 향후가 다소 걱정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교원평가는 교장, 교감, 동료교사, 학부모, 학생에 의한 다면평가를 통해 교원 개개인의 능력개발을 위한 자료로 활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교원평가가 교원 간의 갈등과 교육의 획일화를 초래하고 평가결과가 좋지 않은 교사를 퇴출시키려는 일종의 음모라며 반발하기도 한다. 특히 학생평가를 일상적으로 해 온 교사들이 피평가자의 입장이 되고 보면 다소간 거부감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평가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이해관계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이에 평가의 공정성과 객관성 확보는 매우 중요하며 그에 따른 고민이 필요하다. 첫째, 교원평가의 목적은 전문성 신장 및 자기연찬을 위한 자극이 주된 목적이기에 결과를 통한 서열화는 불필요한 긴장과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더구나 교원의 전문성 신장보다 무능력 교사 ‘낙인’에 정책의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자칫 공정성 논란에 휘말려 제도 정착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동료교사 평가는 교사의 전문성, 동질성, 근접성을 고려해 초등은 동학년, 중등은 동교과를 위주로 학교의 실정에 맞게 평가 참여자를 구성하도록 하고 있다. 소규모 학교내지는 교과군별 극소수의 담당교사 등에 대한 동료교사 평가는 평가 비중에 대한 조절 방안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셋째, 현재 우리나라 학교가 처한 상황적 맥락 속에서 교원평가제는 과연 ‘우수 교사’의 선발 기제로 적합한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우수 교사’는 학교조직의 틀 속에서 보는 입장과 학생·학부모가 보는 입장 간에는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예를 들면, 학교 생활부 담당 교사들은 엄격한 훈육에 대한 학생의 감정적 평가로 상대적 불이익이 따르기에 소신 있는 생활 지도가 어려울 것이다. 넷째, 학부모의 자녀 학교생활 만족도 조사에 대한 신뢰도가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자녀의 학교생활 만족도 조사는 학생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평가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더구나 지역과 학교 선호도에 따라 학생 및 학부모의 기대와 만족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일부는 자녀의 학교적응 여부 등을 고려하지 않고 그 책임을 교원과 학교에 전가하는 경향도 있다. 학생·학부모 만족도조사 지표에 상응하는 자기진단 평가를 병행해,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교육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높일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현행 교원능력향상 연수 대상자는 교원평가 결과에 의해 선정되고 있다. 계량화된 선발 기준은 전문성을 촉진하는 기제로는 한계가 있을 밖에 없다. 더구나 교원들은 평가결과의 공정성에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연수의 전문성 확보는 자발성과 진정성에서 비롯되기에, 평가결과에 의한 타율적 단기 처방용 연수는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 향후에는 연수 대상자 선정의 공정성 확보와 현장 적합성을 고려한 맞춤형 연수프로그램 개발 및 창의적 운영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평가결과가 자신의 노력에 비해 현저히 차이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평가관리위원회에 원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본인의 기대와는 달리 장·단기 연수대상자로 선정되었을 경우 행정적인 요식절차가 아니라, 서면보고 외에 구두 진술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소명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일곱째, 평가의 객관성 확보는 평가자가 피평가자에 대한 가치 있는 정보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학생과 학부모는 교원평가의 전면 실시에도 불구하고 세부적인 평가방법 및 효과성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수준에 있다. 학교와 교육행정기관에서는 교원평가에 대한 지속적인 홍보와 정보 제공을 통해 학생 및 학부모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해야 할 것이다. 교원들은 아직껏 교원평가의 방법과 결과 활용에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기에 제도적 정착을 위해서는 새 출발의 준비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의 형식적인 제도로 보존되기보다는 학생의 수업을 위한 교육, 학생의 수업을 위한 행정에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교원평가의 목적이 수업개선의 본질적 개념에 있다면 수업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교사뿐만 아니라, 교육 관련자 모두의 책무성이 동시에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당국의 적극적인 관심과 의지가 중요하다. 단지 교원평가에 따른 가시적인 성과에 치중하기보다는 학교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점을 보완하고 개선해 주는 지원적 노력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체벌(體罰)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몸에 직접 고통을 주는 벌이라고 나온다. 그래서인지 체벌이란 말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어감이 영 마뜩치 않다. 솔직히 교육현장에서 시급히 사라져야 할 구시대적 용어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물론 껄끄러운 느낌을 완화하기 위해 ‘사랑의 매’로 바꿔 부르기도 하지만 거북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새 학기가 시작되며 체벌, 그것도 개념조차 불분명한 간접체벌이 이슈로 떠올랐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해 일부 교육청에서 충분한 검토와 준비 없이 체벌전면금지 조치를 내린 이후 교육현장이 갈등에 휩싸이자 교과부가 이를 보완하기 위한 조치로 간접체벌을 허용하는 쪽으로 관련 법령의 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간접체벌도 인권침해라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도대체 간접체벌의 범위가 어느 선까지이고 또 어떤 유형이 있는 지 궁금했다. 찾아보니 간접체벌은 매를 대는 직접체벌과는 달리 도구나 신체를 이용하지 않고 고통을 주는 벌을 의미하는데 ‘교실 뒤 서 있기’, ‘팔굽혀펴기’, ‘운동장 달리기’ 등이 있었다. 이 같은 간접체벌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도구나 신체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체벌의 비교육적 요소가 근본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교과부의 개정안을 수정하라고 요구했다. 문제는 현실이다. 교실은 학생과 교원이 1대 1로 교육활동을 하는 곳이 아니라, 1인의 교사가 다수(초 31명, 중 35.6명)의 학생과 함께 교육활동을 하는 곳이다. 교육현장에는 인권 못지않게 중요한 권리가 있다. 다수 학생들의 학습권과 이를 위한 교사의 교수권이다. 이것은 어쩌면 학교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근본 목적인지도 모른다. 물론 인권과 학습권, 교수권이 양립하는 것은 아니다. 인권이 보호되면서 학습권과 교수권이 존중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교육현장은 그런 이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지난해 일부 교육청에서 학생인권보호 차원에서 체벌을 금지한 이후 교실에서 나타난 현상이 이를 입증한다. 교사가 학생에게 폭행을 당하고 학생들이 교사를 성희롱하는 장면까지 인터넷에 공개됐다. 언론에 보도된 사례를 일일이 거명하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다. 학생의 인권도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언젠가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모든 유형의 체벌은 사라져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학교의 질서와 학습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체벌이 유효한 수단으로 활용된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충분한 준비나 여론 수렴 과정도 없이 학생의 인권 보호를 명분으로 당장 체벌을 금지한다면 그로 인한 부작용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물론 하기 좋은 얘기로는 아이들과 직접 대면하는 교사들이 애정을 갖고 지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아이들과 단 며칠이라도 교실에서 생활하고 또 수업을 해봤으면 좋겠다. 이상만 갖고 말하는 교육은 약(藥)이 아니라 독(毒)이 될 수 있음을 왜 모르는가. 성장 과정에 있는 아이들 중에는 질서나 규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아이들로부터 대다수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호하거나 교사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만약 이마저도 지켜줄 수 없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가장 큰 문제는 교사의 무관심이다. 잘못한 사항에 대해 따끔하게 혼내도 아이들이 인권을 내세워 따지고 덤빈다면 어떤 교사가 쓴 소리를 하겠는가.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교육을 포기하는 교사들이 늘어간다면 학교는 어떻게 되겠는가. 모든 교육의 기본은 학생들의 생활지도에 있다. 그래서 기본적인 질서와 규율을 가르치는 것은 학교가 할 당연한 소임이다. 아이들이 질서와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불이익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교육의 영(令)이 선다. 물론 우리보다 훨씬 앞서서 체벌금지를 도입한 미국처럼 할 수도 있다. 미국의 학교는 날로 난폭해지는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교사가 나서지 않고 학교에 ‘스쿨 폴리스'를 고용하고 규율을 어기거나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을 격리하고 있다.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학부모를 소환해 함께 책임을 묻기도 하는데 혹시 이런 방법까지 배우겠다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모든 교육 현안이 그렇듯 간접체벌 허용 여부도 단위 학교에 맡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대안일 듯싶다. 학생들의 수준이나 교육 환경을 고려해 간접 체벌이 필요하다면 학교구성원의 합의를 거쳐 관련 규정을 만든 후 적용할 수 있지만 학생들이 규율과 질서를 잘 지키고 학습활동에 적극적이라면 굳이 간접체벌을 도입할 필요는 없다. 간접 체벌 허용에 따른 논란의 본질은 교육청을 비롯한 상급 기관이 통제하려는 데 있다. 그러니 국가인권위원회까지 견해를 표명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문제일수록 학생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학교를 믿고 자율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 본다.
간혹 TV에서 혁신 학교나 핀란드 교육 등의 새로운 이슈를 접할 때마다 관심은 있었으나 빠듯한 학교 일정으로 인해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맞이하게 된 시범 학습연구년제는 필자에게 지역적, 시간적 한계를 넘어 다양하고 충분한 경험을 할 기회를 열어주었다. 처음 연구년제를 시작할 때는 구체적인 지도법 및 프로그램 개발 쪽으로 관심을 가졌지만, 연구년제가 가진 시·공간적 자유로움은 다시는 가질 수 없는 기회였기에 한 분야를 파고드는 수직적 연구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포괄적인 교육 안목을 기를 수 있는 대안 교육의 방향 탐색에 집중하게 됐다. 이를 위해, 해외 교육 우수 사례와 국내 우수 사례를 탐색하고 우리 교육의 문제점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했으며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교육의 본질과 교사로서의 자세에 대해 재정립하는 기회를 가졌다. 우선 북유럽(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을 방문해 핀란드 교육위원회, 스웨덴 교사연합회에서 각국의 교육제도에 대해 알게 됐고 초·중등학교를 탐방해 학교운영의 실태를 확인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핀란드 교육 개혁의 성공사례’에 대한 집중 연구를 하면서 우리와 상황이 비슷한 일본의 ‘배움의 공동체’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국내의 우수사례 탐색을 위해서 경쟁률 10:1의 대안학교인 ‘이우학교’와 경기도 혁신학교 ‘장곡중학교’를 현장 답사해 ‘배움의 공동체 수업과 수업연구회’를 참관하고 특징적 운영사례를 살펴보았다. 또 시간이 날 때마다 각종 세미나, 워크숍에 참여했고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 강좌를 청강하며 아이들을 보는 관점을 재정립했다. 다양한 교육 워크숍과 세미나를 듣기 위해 6개월 동안 타 지역으로 수차례 오가면서 처음에는 새벽에 출발해서 밤늦게 돌아오는 피로감과 숙박문제로 지방의 한계를 느끼며 힘들었지만, 한창 수업에 정신없을 낮 시간에 새로운 곳에서 체험을 하고 있는 신선함으로 차츰 연구가 아닌 여행이란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학교 문화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전체적인 숲을 보는 고민을 하게 됐으며 교육의 관심사도 지역을 넘어 전국 단위로 범위가 넓어졌다. 또한 상담심리학을 통해 교사로서 특정 수업 기술이나 생활지도 프로그램을 익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아이들과 수업을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킨 것도 큰 보람이었다. 연구년제를 임하기 전에는 문제아에 대해 “쟤는 왜 저럴까?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태어날 때부터 문제아는 없다. 지금 단지 힘든 아이이고, 조금 다른 아이일 뿐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아이는 통제의 수단도 어른의 소유물도 아닌데 똑같이 맞추려고 한 자체가 잘못이었다. 획기적인 훈육의 노하우를 펼치기보다 교사가 “나는 너를 믿는다”는 따뜻한 신념을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됐다. 아울러 연구년제를 통해 하향평준화의 우려 속에서도 경쟁을 버리고 ‘평등과 협동’을 모토로 40년간 일관성 있게 인간 중심의 교육을 실천해온 핀란드 교육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것과 정부 주도가 아닌 일군의 교육 연구자와 교사들의 자발적 노력에 의해 조용한 혁명으로 파급되는 ‘일본 배움의 공동체’ 적용 수업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상당히 큰 성과였다. 하지만 6개월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부족했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잡히려고 하니 끝나버렸다. 첫 시행이라 행정적 절차, 대학과의 연계 측면에서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여러 번 겪으며 제도적 기틀을 마련해가면서 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짧은 기간에 일 년치 분량(대학 수강, 해외 체험, 개인 연구, 중간 보고회, 최종결과 보고회, 개인연구보고서, 연수결과보고서, 기행문 제출)을 모두 소화하기엔 시간이 빠듯했다. 올해에는 시범운영 경험을 기반으로 각 시·도에서 위탁교육 기간과 사전에 유기적 연계를 잘 맺으면서 출발하는 분위기여서 다행이다. 앞으로 창의적인 연구 수행을 위해 최대한 자율적 분위기와 탄력적 경비 지원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연구년제를 우수 교사에게만 보상 의 기회로 주기보다 다수의 평교사에게도 고루 기회를 제공해 서로가 'win-win'하며 함께 성장하는 동료장학 풍토 조성에 기여하면 좋겠다. 다양한 견문을 넓히기 위해 타시도 교사들과 다양한 협력네트워크가 필요하고, 1년간 학교를 떠나있는 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연구 교사가 자발적으로 해외 체험, 세미나 경험을 짧게나마 본교에 전달 연수를 하는 등 어떻게든 학교와 연결 고리를 맺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2010년 시범 운영 때는 전국 단위로 운영된 덕분에 부산, 경북, 경기, 울산 연합팀을 구성하여 북유럽체험단을 꾸릴 수 있었고, 연구년이 끝난 지금까지도 ‘늘곁’이라는 모임을 결성해 타시도의 정보를 공유하고 꾸준히 교류하는 값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해진 코스대로 연수를 받아왔었다. 하지는 연구년제는 정해진 코스가 없다.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든 것을 자기가 계획하고 탐색하고 움직이며 몸소 부딪쳐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연수보다 힘든 과정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기획하고 탐색할 수 있는 자유로움은 학교 현장에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특혜이기에 연구년제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해볼 만한 경험인 것 같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은 22개 분야의 정책자문위원회를 설치·운영하기 위해 지난 2월 25일 ‘서울교육정책자문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안’을 의결했다. 이 조례안은 교육정책자문위원회의 위원 전원을 해당 분야 전문가나 학계, 시민단체 인사로 100% 구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곽노현 교육감이 2011년 신년사에서도 밝혔던 ‘교육행정에 학부모와 서울시민의 실질적인 참여를 확대’하는 의도와도 맥이 닿아있다. 이와 같은 의도로 교육정책자문위원회를 구성·운영하는 것이라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이를 통해 실질적으로 교육정책 수립과정상의 시민 참여를 보장하고 공정성과 투명성을 제고할 수 있게 된다면 서울 교육행정의 발전에 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난 3일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곽 교육감이 시교육청 주요 간부들과 산하기관장이 참석한 서울교육협의회 월례회의에서 “교육청의 정책 방향에 동의하지 않는 인사들은 참여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역대 교육감 중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시민과의 소통, 참여 확대를 강조하던 곽노현 교육감이 공식석상에서 새롭게 출범하는 교육정책자문위원회의 인사를 자기 사람으로 채우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 것이다. 교육감의 교육정책에 대해 다양한 구성원의 시각을 전달하고 해당 정책의 장점은 물론 단점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을 해야 하는 자문위원회를 교육감의 정책에 찬성하는 사람들로만 구성할 경우 나타날 정책 독재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첨예한 입장으로 대립되는 무자격 내부형 교장공모제, 학생체벌 전면금지 등에 대해 반대하는 불편한 소리에는 귀를 닫으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각계의 시민인사들이 참여한 정책자문위원회의 의견을 들어 추진한 것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매우 우려된다. 국민들은 상명하달식 관치정책에서 벗어나 현장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고, 다양한 의견을 종합해 교육 본질적 시각에서 수요자 중심의 교육정책 추진할 것을 기대하고 민선교육감을 뽑은 것이다. 곽노현 교육감은 민의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도록 정책자문위원의 선정에 있어서 투명성과 공정성을 기해, 듣기 좋은 의견뿐 아니라 때론 쓰디쓴, 비판적인 의견도 수용하는 성숙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지진 피해를 입은 현장퇴근하자마자 긴급뉴스로 일본의 지진 속보를 전하여 케이블 방송을 통하여 일본 NHK를 시청하였다. 11일 오후 3시경일본 열도를 경악에 빠뜨린 초대형 쓰나미는 동북부 미야기현과 이와테현 해안 지방을 단숨에 삼킨 것이다. 바닷물은 빠른 속도로 해변가를 거쳐 육지 깊숙이 휩쓸어 집과 논밭, 공장지대가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빨려들어갔다. 둥둥 떠다니는 것은 소나 돼지가 아니라 목조 주택과 건물, 선박, 자동차였다. 주민들이 얼마나죽었는지는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일본의 긴급 재난 방송은 "되도록 튼튼한 콘크리트 건물의 3, 4층으로 대피하라"는 얘기만 숨가쁘게 쏟아냈다. 예상을 못한 대지진과 쓰나미의 급습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재해 대비 체제를 갖춘 일본 정부 관계자들도 속수무책으로 허둥대며 의회에서 답변하던 수상도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었다. 오후 2시46분께 일본의 대표적인 지진 발생지역인 산리쿠 바다 밑에서 태평양판과 북미판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거대한 지진이 일본 열도를 강타했다. 쓰나미의 첫 파도는 그로부터 6분 뒤 미야기현 해안가에 도달했다. 50㎝ 높이였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나자 초대형 쓰나미의 진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번 대지진의 직격탄을 맞은 미야기와 이와테현에선 7m를 넘는 파도가 마을과 도시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강력한 에너지를 품은 바닷물은 해안지역부터 차례로 가옥과 차량, 선박을 휩쓸어 나갔다. 재해상황에 대비해 설치해둔 NHK 카메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이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장면을 생생하게 중계했다. 미야기현 센다이만과 가까운 센다이 공항은 활주로가 침수됐고, 승객들은 급히 공항 빌딩 옥상으로 대피했다. 센다이의 빌딩과 아파트 곳곳에서는 화재가 잇따랐다. 이미 7m를 넘은 1파에 이어 닥칠 쓰나미 2파, 3파는 10m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충분한 대비 태세가 갖춰지지 않은 터여서 더욱 큰 피해가 우려된다. 이번 쓰나미는 1896년 2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메이지 산리쿠 대지진 때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일부 해안 지역에선 파도의 높이가 20m를 넘었다니 놀랄수 밖에 없다. 지진에 익숙한 일본인들이 이번 대지진에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강력한 지진의 규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강력한 쓰나미의 가공할 위력 때문이다. 지진을 낳는 북미판과 태평양판 사이에 부드러운 퇴적물이 대량으로 쌓여 있어 양쪽 판의 충돌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진행된다. 이에 따라 빠르게 움직이는 지진파보다 바닷물에 훨씬 큰 에너지가 집적된다는 것이다. 지진 피해는 오늘 졸업식을 거행한 도쿄의 한 중학교에도 피해를 입혀 부상자가 생겼다. 잘 발달한 도쿄역은 귀가하지 못한 샐러리맨들의 숙소가 되고 있다. 이렇게 큰 피해 앞에는 정부의 즉각적인 대응도 일정 시간까지는 한계가 있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주변 사람들끼리 질서를 지키면서 위험한 현상을 이겨내는 일이다. 먹을 것이 없고 불편한 큰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 의젓하게대처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속적인 교육과 훈련에 있다는 생각을 더하게 한다. 2005년도 3월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후쿠오카에 지진이 일어나면서 맨 처음 느끼는 불편 사항은 통신두절이었다. 전기가 끊기고 통화 부하가 걸려 통신이 어렵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아직 일본과 같은 큰 지진 피해는 없는 상황이지만 전혀 완전지대는 아니라면 사전에 대비하여야 한다. 언제 일어날 지 모르는 지진에 대비하여 모든 가족들은 하나의 공통된 약속을 하나 만들어 놓아야 한다. 모두가 연락이 없어도 거주지의 시청 건물 앞에서 모인다는 암묵적 약속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움직이는상황에서 가족들을 만나게 하는 구원 소식이 될 수 있다. 일본의 지진 피해가 하루 속히 복구되기를 기원하면서 우리도 이같은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