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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경북도교육청은 일본 지진·해일 피해를 돕기 위한 성금 1억9000여만원을 모금했다고 28일 밝혔다. 경북도교육청은 교육청과 학교 등의 자율적인 참여로 일본을 돕는 모금활동을 펴 모두 1억9421만원을 거둔 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언론기관에 전달했다. 이영우 경북교육감은 "일본 지진 피해지역 주민과 학생들이 하루 빨리 정상생활 및 수업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 직원들이 뜻을 모아 성금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전북도 내 일선 초중고교가 지난 한 해 동안 접수한 학교발전기금 가운데 '학생복지 및 자치활동비'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8일 도 교육청에 따르면 작년에 도내 762개 초중고교 가운데 365개 학교가 총 44억5024만여원의 발전기금을 모금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2009학년도 44억4627만여원보다 396만원이 늘어난 것이다. 조성 목적별로 보면 '학생복지 및 자치활동비'가 22억5378만원으로 전체의 50.6%를 차지한 것을 비롯해 '교육용 기자재 및 도서구입비' 11억6321만원(26.1%), '학교체육 및 학예활동비' 5억2732만원(11.9%), 교육시설비 5억592만원(11.4%) 등의 순으로 파악됐다. 또 형태별로는 '금전 및 유가증권'이 전체의 67.9%인 30억2204만원으로 가장 많았고, '도서 및 물품' 11억634만원(26.1%), '수목, 시설 및 재산' 2억6785만원(6%) 등이었다. 이밖에 학교급별 접수현황을 보면 도내 206개 중학교 가운데 106개교가 발전기금을 모았고, 초등학교 417개교 중 208개교가, 고등학교 130개교 가운데 48개교가, 특수학교 9개교 중 3개교가 각각 발전기금을 접수한 것으로 분석됐다.
충남대와 공주대, 공주교대 등 대전·충남 3개 국립대학 총장들은 28일 오전 공주대 대학본부 3층 회의실에서 '통합 추진 및 세종시 융복합캠퍼스 구축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양해각서는 '2020년 세계 100대 명문대학 진입'을 목표로 행정중심복합도시에 세종융복합캠퍼스를 설립하고, 세계적 수준의 융복합관련대학(원)과 글로벌교원 양성대학을 두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총장들은 지역을 초월해 '대한민국 대표 국립대학'을 의미하는 교명을 새롭게 짓는 한편, 참여 대학의 교직원과 학생에 대해 통합으로 인한 신분·교육상 불이익이 없도록 한다는데 뜻을 모았다. 충남대교수회 등에서 문제를 제기했던 '대학본부 위치' 등에 대한 내용은 양해각서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들 대학은 원활한 통합 추진을 위해 대학별로 5명씩 총 15명으로 구성된 통합추진위원회(통추위)를 두고, 통합 추진에 따른 실무적인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통합추진실무위원회를 통추위 산하에 두게 된다. 통합에 성공할 경우 학생 수는 4만9000여명으로 서울대의 2만6900여명(대학원생 포함)보다 많고, 교수도 1500명으로 서울대 1800명에 이어 두번째 규모를 갖추게 된다. 이날 조인식에는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과 송용호 충남대 총장, 서만철 공주대 총장, 전우수 공주교대 총장, 각 대학 보직교수, 동창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주호 장관은 "3개 대학이 조속한 시일 내에 통합방법과 과정, 절차를 구체화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공주대 관계자는 "대학입학 자원의 감소 등 급변하는 환경 변화에 대처하고, 세계 100위권 대학으로 진입하기 위해 통합을 추진하게 됐다"며 "구성원의 의견수렴을 거쳐 오는 5월31일 이전까지 교육과학기술부에 통합계획서를 제출하고, 내년 3월1일에 통합대학을 출범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절차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통합 논의를 반대하는 충남대교수회는 성명을 통해 'MOU 교환은 원천 무효'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교수회는 "MOU 교환을 위한 여론조사는 양해각서에 포함될 내용을 두고 각 대학이 동일한 내용으로 설문조사를 하는 것이 원칙이자 상식"이라며 "핵심쟁점인 '대학본부의 위치'에 대해 각 대학이 서로 다른 내용으로 실시해 나온 설문조사 결과를 근거로 MOU를 교환하는 것은 올바른 의견수렴의 기본 원칙을 위배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학 통합과 같은 중대한 일을 추진하면서 주요 구성원의 하나인 학생들의 의견을 반드시 물어야 함에도 대학본부는 학생참여를 완전 배제했을 뿐 아니라 교수회에서 주장한 학생참여 필요성을 묵살했다"며 "통합논의의 졸속 추진과 상식에 반하는 내용, 방식으로 설문조사를 주도한 기획처장의 사퇴를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이들 대학은 MOU 체결을 앞두고 교·직원들을 상대로 통합 논의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으며, 충남대는 '대학본부 세종시 입주 방침'을 내세워 투표 참여자의 61.3%가, 공주대와 공주교대는 '대학본부 공주 입지'를 내세워 각각 참여자의 86.7%와 81.3%가 통합에 찬성한 바 있다.
"학생들이 자신의 행동이 범죄가 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미래의 범죄를 막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28일 오전 동료 경찰관 5명과 함께 '학교전담경찰(스쿨폴리스)' 임명장을 받은 경기지방경찰청 소속 박미자(43) 경사의 말이다. 현역 경찰관으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학교전담 경찰로 임명된 박 경사 등은 앞으로 학생생활인권지원센터가 설치된 수원, 용인, 구리남양주, 성남, 시흥, 의정부 등 권역별 6개 주요 지역 교육청에 1명씩 배치돼 활동하게 된다. 이들은 생활인권지원센터에서 근무하며 학교폭력 예방활동과 범죄예방교실 운영, 학교폭력 예방 교육, 학교폭력 관련 사안 및 민원 해결 지원, 학교폭력 피해자 보호 및 가해학생 선도 등의 역할을 담당한다. 지난해 수원에서 실시된 시범 학교전담경찰 제도에도 참여했던 박 경사는 "지난해 학교 주변에서 학교전담경찰로 활동을 하다 보니 금품을 빼앗는 것을 빌린다고 생각하는 등 학생들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범죄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더라"라고 말했다. 이어 "이 같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행동이 범죄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이런 학생들이 성인이 돼 미래에 범죄의 나락으로 빠지는 것을 막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자 책임"이라고 덧붙였다. 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평소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학교전담경찰에 지원하게 됐다는 박 경사는 "지난해 소위 문제학생이라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많이 했다"며 "상담 뒤 자신의 행동이 큰 범죄행위라는 것을 알고 반성한 뒤 경찰관이 되는 방법을 물어볼 때 많은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중학교 3학년생과 초등학교 5학년생 두 아들을 두고 있어 부모의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학생들에게 접근한다"는 그녀는 "나만 즐거우면 된다는 어린 학생들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학교 현장에서부터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어 학교전담경찰관이 좋은 제도라도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검거만이 다가 아니다. 예방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박 경사는 "앞으로 비행 학생을 가정환경까지 파악해 준법정신을 갖춘 성인으로 성장시키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6명의 학교전담경찰관들은 이날 스쿨폴리스 발대식에서 학교폭력을 근절하고, 가해학생을 선도하며, 학생들의 인권을 보호하는데 앞장서겠다고 결의했다. 경기도교육청과 경기지방경찰청은 앞으로 이같은 학교전담경찰을 점차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한편, 이날 학교전담경찰제 시행을 위한 경기도교육청과 경기지방경찰청간 업무 협약에서 김상곤 교육감은 "학교의 범죄예방 활동에 나서 준 경찰에 감사한다"고 말했고, 이강덕 경기지방경찰청장은 "앞으로 문제학생을 찾아내 선도하고 범죄를 예방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살다보면 이미 지난 일을 추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때로는 어리석고 무모했던 일들이 후회와 함께 떠올려지기도 하고, 또 어떤 기억들은 두고 두고 행복함으로 떠올려지기도 한다. 필자는 교직경력이 30년을 넘었음에도 일학년을 담임했던 적은 두어번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일학년 아이들과의 기억들은 늘 행복으로 떠오른다. 지난 번 근무했던 학교는 바로 집 앞이었다. 시종소리가 시작될 때 집을 나서면 그 종소리가 끝날 쯤은 어느새 학교에 도착할 정도라고 할까. 담임을 했던 1학년에 지각을 밥먹듯이 하는 아이가 있었다. 엄마 아빠가 모두 새벽같이 출근하는 바람에 할머니가 건사하여 등교시키는 아이였다. 일찍부터 깨워 준비시키는 할머니 말을 잘 듣지 않고 늦장을 부리다가 종종 지각을 하곤 했던 것이다. 마침 그 아이 집이 같은 아파트 같은 층이었던 터라 지각하는 버릇도 고쳐줄 겸 출근 시간에 그 집에 들러 같이 등교하기로 했다. 두어 번 아이 손을 잡고 등교하였더니 학급의 다른 아이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왜 종환이랑 같이 와요?” “응. 집이 가까워서 같이 오는거야.” “와, 종환이는 좋겠다. 나도 선생님하고 같이 학교 오고 싶다” “그러니? 그럼 내일 아침엔 우리 둘이 만나서 같이 올까?” 다음날 우리는 함께 등교를 했다. 그랬더니 교실에서는 난리가 났다. “나도 선생님하고 같이 학교에 오고 싶다.” “나도, 선생님은 왜 종환이, 수민이하고만 와요? 나랑도 같이 와요.” 아이들이 우르르 나와 함께 등교하자고 법석이 난 것이다. “그러면 칠판에다 이름을 써 봐, 선생님이랑 같이 학교 오고 싶은 사람은.” 순식간에 칠판 가득 아이들 이름이 적혔다.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천진만만한 아이의 바람을 그저 들어주고자 하였던 일이 그만 커지고 만 것이다. 처음엔 큰일났다 싶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므로 집 찾기도 수월하고 학교까지 거리도 멀지 않은지라 할만할 것 같았다. 나는 아이들 이름 옆에 선생님과 함께 등교할 날짜를 적어주었다. 혹시라도 집으로 찾아가면 부모님이 불편해하실 수 있으므로 정해진 시각, 정해진 장소-아파트 출입현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고 그 날부터 아이들과의 동반 등교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학교를 코앞에 두고 아이들 집을 들러오느라 헐떡이며 출근해야 했으나, 아이들은 자신에게 배당된 날을 기대하고 고대하며 손꼽아 기다렸다. 일학년 아이들은 정확했다. 늘 정해진 시각에, 만나기로 한 장소에, 평소보다 더욱 예쁜 용모로 나와서 선생님을 기다렸다. 옛 어른들이 말씀하셨듯 깎은 밤처럼 뽀얗고 탐스런 아이들 손을 내 아기처럼 꼭 잡고 출근하다가 문득 위를 올려다보면, 영락없이 아이의 집 베란다에서는 아이와 똑같이 생긴 그 엄마가 눈이 부시도록 예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었으나 서너명의 아이들은 인근 주택단지에 살고 있어 그 아이들과 함께 등교하기로 약속된 날은 하루 전 쯤 미리 아이의 집을 답사해야 했다. 아침에 집을 찾느라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칫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동명부의 주소를 들고 기웃거리며 주택단지를 돌아다니다 거리에서 놀고있는 아이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오랫동안 못만난 가족이라도 만난듯 반가움에 발을 동동 구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선생님 손을 잡아 끌며 자기 집을 알려주곤 아침에 길 잃지 말고 잘 찾아오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마치 자기가 선생님인것처럼. 나도 집에 등교시켜야 할 아이가 있었던지라 바쁜 아침 시간을 소모하는 게 때때로 힘에 겨웁기도 하였으나 도중에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아이들과의 약속도 약속이거니와 무엇보다도 아침마다 내 손안에서 꼬물대는 아이들의 작은 손과 그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 그리고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며 손 흔드는 아이 엄마의 모습에 중독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물론 지각생이었던 아이는 더 이상 지각하지 않는 부지런장이가 되었고, 교실은 아침마다 선생님과 등교한 경험을 나누느라 다정한 정이 넘치곤 했다. 그 아이들이 곧 고등학생이 된다. 며칠 전 그 중 한 아이가 이멜로 편지를 보내왔다. 그저 안부를 전하는 메일이었지만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일을 생각하며 웃고 있었다. 혹시 아이들은 그 일을 잊었을까? 그렇다 할지라도 전혀 섭섭하지 않다. 그 때, 내가 그들을 사랑한 것보다 그들이 더 많이 나를 사랑해주었기 때문이다. 누가 그 이른시간에 설레는 마음으로 나를 기다려줄 것인가? 또 베란다에서 행복한 웃음으로 손을 흔들며 배웅해 줄 것인가? 돌이켜보니 아이들과의 시간 중 많은 부분들은 일이라기보다 추억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나와 함께 등교해주었던 작은 천사들, 내 인생에 찾아와 준 기적같은 그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3학년 1반 권○○선생님, 3학년 2반 김○○선생님, 3학년 3반 유○○선생님" 이름이 불리워지는 선생님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학부모들에게 90도로 인사를 하는 광경이 한참이나 계속된다. 3월 하순 경이면 학교마다 학부모총회가 성황을 이룬다.이날 학교구성원들은 많은 준비를 하고 교육수요자라는 이름으로 교육현장에 계시는 학부모들은 맞이하게 된다. 요즈음은 학부모총회라는 명칭보다는 '○○학교교육과정안내의 날, ○○학교 교육과정공개의 날' 등 각 학교 나름의 특색 있는 교육과정을 학부모 및 지역사회에 선보이는 날이 되고 있다. 교육과정을 '학교에서 학생들이 경험하게 되는 총체'라는 정의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현실적으로 '학교는 교육과정을 운영해야한다'라는 초중등교육법의 법적인 강제규제 위에서 학교는 그 학교만의 특색 있는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기에 이를 학교장을 중심으로 한 교원들이 교육수요자인 학부모에게 피력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할 것이다. 그러나행사의 이름짓기 마저 학부모총회에서 교육과정 안내 및 공개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변하고 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않는 폼이 학부모들에게 교직원을 소개하는 형식이다. 규모가 제법 큰 학교에서는 학반과 이름 정도만 불리워지는 말 그대로 스치고 지나가는 모습이 되고 있는 것이 변하지 않는 폼인데, 교육현장이 변하고 내용도 교육과정 안내로 바뀌었는데도 아직도 학부모총회의 양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다보니 주객이 전도되어 교육과정 안내의 시간에 교직원 소개의 시간이 주가 되고 있다. "남자에게 참 좋은데......."로 시작되는 광고카피가 있다. CEO가 광고에 직접 출연하여 하는 건강식품 광고로 알고 있다. 광고의 기법이겠지만 듣고 있다 보면 CEO가 직접 하는 말이다 보니 일단 믿음은 간다. 학교교육과정 설명회 및 안내의 시간은 전통적인 학부모 총회와 달리 학교장의 독무대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교육현장의 CEO인 학교장이 학부모와 지역사회에 학교장의 학교경영 비전과 학교 교육목표 및 지향점을 제시하여 같이 그 가치를 공유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직원 소개를 이런 식으로 해보면 어떨까? 담임 소개용으로 간단하게 제작이 가능한 PPT자료로 제시해보는 것이다. 대형 강당에서 100인치가 넘어가는 초대형 실사화면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따뜻한 표정이 있는 이미지를 제공하면서 학교장의 부연설명을 덧붙이는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이미지 속에는 평소 교사들의 삶의 좌우명이 함의되어 있고 한 문장으로 기술될 수 있는 유의미한 교사 나름의 교육관을 표현한다면 참으로 멋진 풍경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담임선생님이 안 계시는 가운데 가끔씩은 좋은 의미의 담임선생님 험담도 학부모와 같이 좀 해보면서 학부모와 교장만의 비밀을 만들어가는 것 그 학교가 추구할 가치를 공유하는 첩경이 될 것 같다. 어차피 학부모와 학급 담임교사는 전체 모임이 끝나면 자녀가 있는 학반에서 아이의 특성 및 가정의 과정적 배경 등에 대하여 교사와 심도 있는 교육상담의 시간이 마련되어져 있다. 그 장소에서 이미지가 아닌 실물로 선생님과 만나게 되는 과정이 있기에 그냥 의미 없이 해오던 일이라 하는 방식은 이제 그만 지양하고 학교마다 다른 모습의 교직원 소개의 시간이 마련되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인천교총(회장 윤석진)은 인천교육청(교육감 나근형)과 25일 교육청 회의실에서 청소년 업무에 시간외 수당을 지급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한 2011년도 교섭·협의 합의서 조인식을 개최했다. 총 59개 안건을 담은 교섭·협의 합의서에는 전문직 교원단체의 활동 보장, 교원 복지·후생 증진, 교원 인사, 교육 환경, 사립·직원 교육, 유아·보건·영양·특수 교육 등이 주요 골자로 구성됐다. 주요 내용으로는 ▲휴무일에 청소년 단체 활동을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증빙자료가 있는 경우 시간외 근무수당 지급 ▲연수기관 및 교육기관 강사등급에서 기타강사에 해당하는 교원 분류기준을 일반강사로 상향 조정 ▲교원회의와 연수시 수석교사제 적극 홍보 ▲국회의 자료제출 요구와 관련해 단순통계 DB구축 및 일선 학교 요구 최소화 ▲장애 유아가 유치원 일반학급에 배치된 경우 유아특수 업무보조자 지원 ▲사립학교의 기간제 교원 최소화 ▲교원 자율연수비 지원 ▲행정직원 유고시 대체인력 지원 등이다. 윤석진 인천교총 회장은 “이번 교섭은 교원 권익 신장과 교육 여건 향상에 초점을 맞췄다”면서 “이를 통해 많은 회원들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번 조인식은 작년 11월 19일 교섭·협의를 요구한 후 서면교섭 2회, 실무교섭 1회를 거쳐 이뤄졌다.
새터민과 함께 하는 통일·안보교실 ○…대구교총(회장 신경식)은 학생들의 올바른 국가관 정립과 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새터민과 함께하는 통일·안보교실’을 추진 중이다. 새터민(북한 이탈 주민)이 학교현장을 찾아 북한 교육제도와 서민생활 등을 전하는 이 행사는 30일 경북공고에서 첫 수업이 열린다. 또 대구교총은 9일 열리는 ‘문경새재길 걷기’ 행사에 참여할 회원을 모집한다. 참가인원은 80명이며 참가비는 5000원. 4월 1일까지 신청 받는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tfta.or.kr) 참조. 4월 6일부터 회장 후보 등록 ○…강원교총(회장 김동수)은 23일 대회의실에서 제306회 이사회를 열고 2010년도 결산 심의 및 제27대 회장 선거, 교섭·협의 추진 일정 등을 논의했다.(사진) 강원교총 회장 선거는 4월 6~13일 후보자 등록을 시작해 5월 26일 당선자를 발표할 예정이다. 출마 희망자는 강원교총 선거분과위원회에 구비서류를 제출하면 된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gwfta.or.kr) 참조. 학교용지분담금 상환액 합의 논평 ○…경기교총(회장 정영규)은 21일 보도자료를 통해 경기도와 도교육청이 학교용지분담금 상환액에 대해 합의한 것에 환영한다고 밝혔다. 경기교총은 이번 일을 계기로 양 기관이 교육에 대해 보다 건설적인 협조관계를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임원-시·군회장 연석회의 ○…전북교총(회장 김기천)은 25일 전북교총 회의실에서 임원 및 조직인사-시·군교총 회장 연석회의를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2011년 주요사업계획, 현안 정책, 회세 확장, 복지회원증 발급에 대해 논의했다. 임기가 만료된 7개 시·군회장에게는 공로패가 전달됐다. 상조금 지급 ○…경남교총(회장 강동률)은 17일 2월말 퇴직자 296명에 대해 상조금을 지급했다. 정년·명예·장기근속·사망회원은 각각 100만원 지급되며, 일반 퇴직은 회원가입 기간에 따라 차등 지급된다. 또 18일에는 경남교총 회의실에서 시·군교총 사무국장 회의를 개최하고 연간 행사, 사무국장 업무지침, 회원가입 활동 등에 대해 논의했다. 제306회 이사회 ○…부산교총(회장 김진성)은 22일 회의실에서 제306회 이사회를 개최했다. 이날 이사회에서는 제64차 임시대의원회, 2010년도 회계 결산서, 제12회 어머니배구대회, 제5회 회원 및 회원가족 등반대회 등을 심의했다.
정명숙 서울 유석초 교사는 다섯 번째 저서인 '졸라맨 낱말퍼즐 4-1'을 펴냈다.
곽덕훈 EBS 사장은 21일 미국 PBSd(미 공영방송 PBS 자회사)와 양해 각서를 체결하고 교육프로그램 공동제작 추진에 합의했다.
김학준 전 교총 회장이 21일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됐다. 김 고문은 인천대 총장, 동아일보 회장 등을 지냈으며 2007년부터 인천아시안게임 유치위 부위원장을 맡아 대외유치에 공헌했다. 임기는 2014년 10월 4일까지.
수석교사제가 4년째 시범운영을 맞았다. 2정-1정 이후 관리직이 아닌 교수직 상위자격에 수석교사를 둬 우수교사가 교장이 되려고 교실을 떠나지 않도록 붙잡고, 동료교사들의 수업까지 지원해 함께 성장하게 만드는 제도다. 하지만 원칙 없는 시범운영에 수석교사들은 연구와 지원 활동에 한계를 겪고 있다. 어렵게 뜻을 품던 교사들도 외면, 올해 2000명을 선발하려던 목표는 765명에서 멈췄다. 수업전문성을 쌓은 교사를 우대해 모든 교사가 공부하고, 교실 수업 개선에 진력하는 교직사회는 요원한 일일까. 안병철 초등수석교사회장(부산 온천초 수석교사)와 백선희 중등수석교사회장(경기 구운중 수석교사)은 그 해답을 “수석교사 법제화”라고 말한다. 안병철=올해도 ‘시범’ 딱지를 못 뗐네요. 뭐가 잘못된 걸까요. 백선희=우선 인원이 너무 적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활동하고 좋아진 점을 느껴야 하는데 몇 십 개 학교에 한 명 정도잖아요. 학부모나 대국민 홍보는 고사하고 교직사회에 대한 인식 제고도 부족했습니다. 국회 교과위가 파행을 겪으며 제대로 법제화 논의를 못한 것도 아쉽습니다. 현재 교과위에는 민주당 김진표 의원 법안과 한나라당 임해규 의원안, 박보환 의원안이 각각 계류 중인데요, 수석교사제가 승진 위주의 교직사회에 일대 혁신과 수업 발전을 가져오리라는 신념을 갖고 법제화를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안=‘올해는 법제화 되겠지’하고 기다린 게 벌써 3년이 지났군요. 1980년부터 논의가 시작된수석교사제는 1982년과 1995년, 교육법 개정이 추진되다 무산된 아픔이 있습니다. 이후에도 교과부의 각종 종합방안에 담기는 등 숙원과제였지요. 마침내 2008년 3월 172명을 시작으로 시범운영이 시작돼 벌써 4년차인데요, 30여 년 이상 연구․논의되고 3년간 시범을 통해 교사, 학부모, 학생들의 호응까지 얻은 이 제도가 왜 시범 꼬리표를 떼지 못하는지 안타깝습니다. 파행만 되풀이하는 교과위, 정책추진에 소극적인 교과부, 예산 타령만 하는 정부 부처가 그 답을 갖고 있겠지요. 백=4년차인 올해는 선발에 역량평가가 도입됐는데요. 안=수석의 직무는 수업을 담당하면서 동료, 지역교사들의 수업을 지원하고, 관련 연구와 강의활동을 하는 것인 만큼 높은 전문성과 소통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1단계 서류전형은 Pass/Fail 방식인데요, 추천서, 지원계획서, 개발한 학습자료, 수업선도실적, 수업동영상 평가와 동료교원 면담을 통해 2배수를 선정했어요. 그리고 2단계 역량평가에서는 수업 전문성과 시연 능력, 신임․동료교사 수업평가 및 컨설팅, 멘토링 능력, 학생지도력 등을 봤고요. 백=말씀대로 엄정한 심사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2008년부터 활동해 온 수석교사를 네 번째 같은 내용의 검증을 거치게 한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아무리 시범운영이지만 능력을 검증 받은 사람에게 매년 같은 평가를 되풀이 할 게 아니라 전년도의 수석교사 활동이 바람직했는지 여부를 평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안=선발과정 개선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백=네. 역량 평가와 심층면접이 위주가 돼야겠지요. 다양한 전문가, 특히 교육전문가와 이미 수석교사로 활동했던 경험자를 면접관으로 위촉한다면 전문성이나 지도력을 잘 검증할 수 있을 겁니다. 안=교실에서 쌓은 전문성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아야 하고, 신념을 갖고 교육공동체와 소통할 수 있는지 리더십을 살펴야 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학생, 학부모, 동료교원 등이 참여하는 ‘수석선발사정관제’를 통해 선발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백=시범 3년을 한번 되돌아보죠.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안=학교와 시·도교육청의 사정에 따라 참 다양한 활동을 폈습니다. 교내 활동으로는 신임․저경력 교사 수업코칭과 멘토링, 교내 연수, 연구학교 컨설팅, 동료교사 및 학생 상담활동 등을 했고, 지역 차원에서는 연구수업 참관 및 조언, 현장연구와 수업연구대회 컨설팅 장학, 교과연구회 활동, 자격 연수 등 교원 양성·연수기관 강의 활동, 창의·인성교육에 대한 컨설턴트 역할 등 수업개선과 교원전문성 신장에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학교 구성원 설문 등에서 호응을 얻었고요. 백=법제화 미비로 마음껏 활동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원래 취지와 달리 부장이나 담임을 맡고, 업무나 수업 경감도 이뤄지지 않은 곳이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낸 것에 뿌듯함을 느낍니다. 안=특히 젊은 교사들의 관심이 꽤 높아졌어요. 1정 강습을 하면 ‘어떻게 하면 수석교사가 될 수 있습니까’ ‘저도 수석교사가 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이 쏟아집니다. 학생 생활지도, 학부모 상담, 학급경영, 관리자와의 소통 같은 어려움을 들어주고,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습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나 봅니다. 열정으로 충만한 그들에게 수석교사는 희망이자, 도전하고 싶은 길이기도 합니다. 참 기쁜 일이죠. 백=아무래도 관리직은 평가 측면이 강한데 비해 수석교사는 동료교사로서 교사들의 수업을 지원하고 컨설팅 해주니까 수업 면에서 도움이 되지요. 또 생활지도나 학급경영 등에서 수석교사들이 오랜 경험을 나눠주기도 하고요. 안=관심과 기대가 큰 만큼 앞으로 더 발전적인 모습, 역할을 보여줘야 할 것 같습니다. 백=물론입니다. 그러려면 여러 가지 제약이나 한계도 제거돼야 하는데요. 안=우선 수석교사를 별도 정원으로 배정하지 못한 채, 수업을 50% 줄이려니까 그 부담을 학교와 수석교사가 떠맡는 문제가 큽니다. 구걸하듯 시간강사를 구하고, 그들에게 수업을 맡겨야 하는 부담이 커요. 학교 내 인식도 아직은 낮습니다. 저경력 또는 신규교사들이 있으면 수업 코칭 등이 가능한데 그렇지 않은 학교는 교사가 원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수석교사 혼자 힘으로 교실 문을 열 수는 없으니까요. 백=그래요. 수석교사에 대한 학교 현장의 인식이 분명치 않은 게 큰 걸림돌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수석교사가 활동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허락되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었고요. 안=시범을 3년이나 했으면 문제를 개선해야 할 텐데요. 백=법제화가 못 되다 보니 학교 사정에 따라 수석교사가 담임, 보직을 맡거나 부장 밑 계원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본래 임무 외에도 다른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선발에서 미달사태가 벌어진 거고요. 결국 법제화가 시급합니다. 그리고 이에 앞서 교육당국과 학교는 수석들이 충분히 제 역할을 하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안=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고, 또 일은 많은데 위상은 불안하니까 수석교사들의 이탈도 늘어나고, 능력 있는 교사들도 도전하길 꺼립니다. ‘법제화 되면 생각해 볼게요’라는 주변 교사들의 반응을 많이 들었어요. 이러면 승진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법제화를 통해 젊은 교사들이 교수직 트랙에 남아 교단의 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백=결국 법제화가 과제군요. 안=교직문화 개선, 수업 혁신, 교육 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생각했으면 합니다. 이해관계자들의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할 일이 아닙니다. 교단이 승진만 좇는다고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제도가 그러니까요. 가르치는 일을 즐기며 교실에 올인하게 하려면 수석교사가 대안이고, 그 토대는 오직 법제화의 방향과 내용뿐입니다. 백=관리자가 학교 전반적인 관리에 바빠 교수학습 모형개발과 교사들의 교수학습을 살피기 어렵고, 저경력 교사의 컨설팅이 현실 상황에서 어렵다면 수석교사로 하여금 그 역할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도적인 장치로 그런 활동을 뒷받침해야 하고요. 안=교장, 교감, 연구부장과의 역할설정도 중요합니다. 아무래도 교장, 교감은 승진과 함께 교실을 떠나 수업 지원, 학교 관리, 교사 복무 등의 일만으로도 하루가 바쁩니다. 그러다보니 수업 지도는 복도 순시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죠. 연구부장과는 전년도 학교교육과정 운영을 분석해 올 학교교육과정을 계획하고, 교육공동체와 함께 운영하게 되는데요. 여기서 수석교사는 학생들이 교과교육과정 상의 성취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교사들의 수업을 지원하고, 교단을 학습공동체화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교장, 교감과 늘 의논하고 소통하지요. 수석이 오래 근무한 학교는 역할이 조정돼 가고 있어요. 백=안 회장님 말씀처럼 수석교사는 교장․교감의 역할을 나눠 갖는 존재가 아니라 그분들이 잘 살필 수 없었던 내용을 보완해 수업 혁신의 새 축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참, 아까 수석교사제를 큰 틀에서 봐야 한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데요, 그 어떤 제도보다도 수석교사는 기존 교직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안=해방 후 60년 동안 교육과정은 9번이나 바뀌었지만 교원 승진 문화는 그대로네요.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실 수업입니다. 그 수업에서 교과지식 뿐만 아니라 협동하는 것, 자율적인 것, 공동체 생활 그리고 인격까지 배웁니다. 그런데 그 교실문화를 책임질 교사들의 목표가 잘 가르치는, 좋은 교사보다 관리직이 되는 것이라면 이제 그 문화는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수석교사가 될 수 있는지, 무엇을 잘 해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는 젊은 교사들의 희망을 더 이상 꺾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교사 본연의 의무인 학생을 사랑하고 수업을 잘 하려고 열심히 고민하면 수석교사로서 존경받을 수 있다는 꿈을 주고, 그 꿈을 좇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열정이 교직을 바꿀 것입니다. 백=인구가 불과 500만인 핀란드가 교육선진국으로 부상하고 있고, 그 뒤를 우리는 우리의 교육 문제에 시달리며 반면교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석교사의 등장은 학교의 재정관리, 인적관리, 시설관리, 환경관리 등의 일과는 다른, 수업이라는 교사 본연의 역할에 대한 재조명의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수십 년 노하우를 축적한 수석교사들이 수업과 생활지도에서 신규교사, 저경력 교사의 전문성을 높이고 학생의 문제를 해결해 학교교육력, 나아가 국가교육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수석교사가 대안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안=네, 함께 기원하고 노력해 나가죠.
“다양하고 많은 교과목과 출판사의 특성에 맞추기 어려운 상황에서 뜻있는 선생님들이 밤을 세워가며 11과목이나 되는 사회과목의 수업용 자료를 만들어 보급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선생님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교과연구모임으로 발전했습니다.” 2003년 7차 교육과정에 들어서면서 사회과 수업에 대한 자료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선생님들이 알음알음 모인 것이 6000명.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선생님이라는 뜻으로 만든 ‘두리쌤’으로 더 유명한 ‘전국사회지리교과연구회’의 시작과 현재 상황이다. ‘전국사회지리교과연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각 지역의 지역국과 함께 활동하는 ▲지오공감연구회 ▲창의체험연구회 ▲교양도서집필모임 ▲국토연구모임 ▲교재개발연구모임 ▲교과창의연구모임 ▲횐경탐방연구모임 ▲수업컨설팅모임 ▲한국의명소연구모임 ▲국토사진연구모임 등 10개 지회가 자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 그래서 연구회 전체적인 활동보다 이들 모임을 중심으로 한 비정기 활동이 더 활성화 돼 있다는 것이 연구회의 자랑이다. 이들 연구모임들은 국토관련 연구활동, 교과교육관련 연구 및 답사, 학습자료 개발, 수업컨설팅 연구 등을 진행한다. 이 중에서 ‘영화 속 지리세상’, ‘세상을 보는 눈’(각 4월 출간예정) 교양도서를 집필하는 부분은 집필과정에서 선생님들의 아이디어를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된다고 모임 관계자는 설명했다. 최근에 연구모임은 독도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기로 하고 범교과적인 통합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교사라면 우리 영토 수호에 앞장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지리뿐만 아니라 역사, 국내법과 국제법, 자원에 관한 연구 등을 역사, 지리, 일반사회 교사들이 모여 연구자료와 교과용 수업자료 등을 만들고 있으며, 단순히 연수활동을 넘어 탐방과 영토 수호연구까지 진행하겠다는 것이 연구회의 복안이다. 이두현 전국사회지리교과연구회장(수원 영생고 교사)는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자료를 나누는 소통의 장이 됐는데, 앞으로 학술답사 및 실질적인 연구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지원할 계획”라며 “앞으로 전국단위 교과 연구모임이 더 활성화 될 수 있도록 교과부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 달라”고 당부했다.
스마트 했다. 자리에 앉아마자 그가 켠 것은 스마트패드(태블릿PC)였다. 진익철 서초구청장은 전국 지자체 중 유일하게 대한민국 인터넷 소통평가 고객대상을 받은 서초구의 수장답게 모든 소통은 디지털기기를 활용한다고 했다. 그리고 교육도 교사, 학생, 학부모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역 대학과의 MOU, 고등학교 명품강사 지원, 초등학교 영어보조교사 지원 등 교육지원사업을 늘려가고 잇는 진 구청장과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 취임 이후 교육지원 사업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구정에 반영된 교육철학은. “지난해 한 일간지가 가장 가고 싶은 학교 20곳을 뽑았을 때 서초구에 있는 학교가 8개교나 됐고, 대졸 학부모가 가장 많은 75%에 달할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 우리 구입니다. 아무래도 주민들이 요구에 귀 기울여 듣고 맞춤형으로 지원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들이 있습니까. “교육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우수 강사들을 선정해 방과후 학습을 진행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각 학교 우수교사로 구성된 인재풀을 만들고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선정해 방과후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8월 시범운영에서 반응이 좋아 약 3억2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신학기부터 지원을 확대했습니다. 또 관내 교육방송(EBS)과 MOU를 통해 관내 학교에서 방송을 녹화하도록 해 관내 학생들의 집중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방송이 아닌 실강의를 듣는 것이지요.” - 초등학교 영어학습도 지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원어민보조교사의 문제점 중 하나가 한국문화의 이해부족인데 이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외국에서 학교를 마친 내국인들로 보조교사를 구에서 선발해 학교에 지원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7명을 선발해 관내 22개를 맡겼는데 반응이 좋습니다.” - 어린이급식지원사업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데. “안전한 먹을거리를 어린이에게 제공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위생과 질에 대해 학부모들의 관심이 많고 우려도 큰데 구에서는 유치원 9곳을 비롯해 영양사가 없는 100명 미만의 급식시설에 영양사를 지원해주고, 식생활정보센터를 만들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평소 무상급식에 대한 생각은. “일단 학교 시설 등 주민들의 요구가 있는 곳에 교육예산을 먼저 투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인 만큼 서울시가 예산을 편성한다면 계획에 따라 추진할 예정입니다.” - 대학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데. “관내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교대, 백석예술대 등과 MOU를 통해 ‘시민을 위한 역사와 문화탐방’, ‘청소년오케스트라 및 방과후 학교 지원’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 건국대와는 인문학 강좌를 개발해 방과후학교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 전국에 있는 선생님들께 한 말씀 전한다면.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대한민국이 IT강국, 경제강국으로 성장하고 G20을 개최할 수 있게 된 것은 국민들의 높은 교육열과 이에 부응하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급변하는 교육정책과 교권이 위협받는 상황이지만 선생님들께서 긍지와 자부심으로 대한민국의 인재들을 키워주십시오.”
작은 꿈이 꽃 필 때 1. 농삿군 아이들 1987년 5월말쯤의 날씨는 유난히도 무덥고 몇 달 째 계속되는 가뭄에 마을 앞의 개울물이 말라붙어서 실낫 같은 물줄기를 붙잡기 위해서 여기저기 냇바닥을 파고 양수기를 쓰기도 하고 두레박으로 퍼서 물을 끌어올리고 있었습니다. 못자리의 모가 자라서 모내기를 하여야 할 때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바짝 마른 논바닥에 모를 낼 수가 없어서 날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비가 오기를 바라는 비타령만 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한 나라에서는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못자리에 물주기를 하라고 시켰습니다. 냇물에서 못자리까지 100m도 넘는 긴 줄을 두 줄 세우고 한 줄은 물을 담은 그릇이 가는 길이고, 다른 한 줄은 빈 그릇이 냇가로 가는 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이 귀한 물을 한 방울이라도 더 많이 못자리까지 가져 갈 수 있도록 조심조심 물그릇을 손에서 손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논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도 바가지에 담겨 오는 물을 뒤집어쓰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목이 타도 마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시간쯤이나 작업을 하면 겨우 스무 평 남짓한 못자리에 물을 한 번 뿌려주는 정도였지만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나마 서로 해달라고 야단이 나서 우선 가장 많이 타들어 가는 못자리부터 하기로 하고, 일손이 없는 집의 못자리부터 물을 뿌려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며칠째 이렇게 물을 퍼 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 이제 얼굴을 새까맣게 그을러 있었습니다. 더위에 지치고 목이 타들어 가는 것을 참으면서 그래도 열심히 일을 하는 아이들은 이게 모두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야, 조심해! 애써 퍼 올린 물이 다 엎질러지지 않아!” 여자들의 앙칼진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드는 남자아이들이었습니다. “에이, 더워 못살겠네.” “넌 저렇게 타들어 가는 모들은 얼마나 목이 타고 더위에 지쳤을까 생각을 해 봤니?” 이런 핀잔에 아이들은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인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힘 드는 작업을 하던 아이들은 이제 익어 가는 보리를 베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농촌 일손 돕기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령은 아이들에게 낫을 들려서 보리 베는 일을 돕기로 하였습니다. 보리 한 마지기(여기 산골에서 300평)을 베면 삯으로 200원씩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른들의 품삯의 1/4이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주인댁에서 새참으로 간단한 음식을 주기도 하고 시원한 음료수를 사다가 주는 집도 있었습니다. 영국이네 반의 아이들은 모두 76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많은 아이들이 한번 논바닥에 들어갔다 하면, 마치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이 순식간에 보리밭은 사라지곤 하였습니다. 농삿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요즘의 아이들과는 달리 이 무렵의 아이들은 일을 여간 잘 하는 것이 아니어서 이 반이 하루(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어떤 날은 어두워지기까지 일을 한 적도 있었음)에 7000여평을 베기도 했습니다. “자! 이제부터 이 논의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데, 너무 서두르지 말고 손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잘 베도록 합니다. 한 두둑씩 맡아서 베어 가고 옆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쪽 논두렁에 먼저 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와주어도 좋고 잠시 쉬어도 좋습니다.” 날마다 작업을 시작 할 때는 주문처럼 외우시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벌써 저만치 베어 나가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옆의 친구와 내기를 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자! 저기 논둑까지 누가 빨리 베어 가는지 시합이다. 시~작!” 아이들은 그 일이 힘들고 지겨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겁고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돈은 모아서 올 가을에는 수학여행을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으니까, 조금만 애를 쓰면 부모님의 도움이 없이도 여행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런 약속이 아이들에게 이 일이 한층 더 신나는 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4~6학년의 아이들이 들판을 휘젓고 다니니까 불과 일주일 만에 그 넓은 들판(이 무렵엔 거의 모든 논에 보리를 심었음)이 보리 베기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따뜻한 남쪽, 지도에서는 금방 바다가 보일 듯한 고장인 이곳은 남쪽을 가로막은 존재산(해발 600여m)이 있어서 이 고장에 들어서면 강원도 산골을 생각케 하리만치 깊은 산간 마을입니다. 빙 둘러선 산들이 오직 북쪽으로 빠끔히 문을 열어 시냇물이 흘러 나가고 있을 뿐 백록담이나 천지 같은 연못으로 보일 만큼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대접처럼 생긴 고장입니다. 이 고장의 들판이란 오직 이 산에서 시내까지 이어지는 밋밋한 산기슭을 일구어 놓은 산비탈의 밭과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논이 전부일 뿐이었습니다. 불과 20여 년 전에 있었던 6·25의 전쟁 중에는 이 고장은 가장 늦게까지 빨치산의 깃발아래서 온갖 고생을 다하던 그런 고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들(감남골·갓바위·버드내·새끼미·한골·배골)은 모두 소개령(공산당이 발붙일 곳을 없애기 위해 마을을 없애라는 명령)으로 모두 불타고 오직 들판 한 가운데에 있는 기빠리 만이 겨우 옛 모습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고장의 복판쯤에 자리 잡은 작은 학교는 아담한 모습과도 같이 아이들이 오순도순 모여들어 꿈을 키워가고 있는 곳입니다. 이 학교에 5학년 교실은 유난히 떠들썩한 소리로 조용한 학교에서 가장 활발한 공부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이담에 큰 농장을 가진 부자가 되고 싶어요.” 학급에서 가장 가난해서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전영국이의 이 말은 학급아이들에게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 하였습니다. 이 고장에서는 가장 잘 사는 사람이 바로 땅(농토)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국이네는 아버지가 남의 밤나무 밭을 관리 해주고, 그 댓가로 밤나무 밭에 딸린 밭을 일구어 겨우 끼니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봄이면 산나물을 뜯어서 나물죽을 끓여 먹고, 틈이 나는 대로 말려서 일년 내내 두고두고 식량을 아끼는 귀중한 먹거리로 쓰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오면 밤나무 밭에 많은 지네를 잡아서 수입을 올렸고, 산과 냇가에 흔한 뱀을 잡아서 뱀술을 담그는 것도 이 집에서는 큰 돈벌이가 되고 있었습니다. 가을이 오면 산과 들에서 딴 산열매(머루, 다래, 금정)들을 따 모아 술을 담그기도 하고 내다 팔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가난에 찌들은 영국이네의 살림을 보태기 위해서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큰누나는 서울의 한 제약회사에서 제법 월급을 받아서 집으로 부쳐 주어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돕고 있었습니다. 올해 졸업한 누나는 그런 큰누나의 덕택에 중학교에 가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졸업을 하게 될는지 걱정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영국이는 졸업을 하면 큰누나가 있는 서울로 올라갈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을 모르는 친구가 하나도 없으니 영국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난한 것이 영국이네 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고장의 대부분의 아이들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점심을 굶은 학생이 반도 넘은 이 고장에서 가장 반가운 것이 학교에서 급식소를 차려서 아이들에게 점심을 굶지 않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점심시간이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었고, 어떤 아이는 점심을 얻어먹는 단 한 가지 재미에 학교를 하루도 결석하지 않고 열심히 다닐 정도였습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동차 운전사가 될 거야. 차도 실컷 타보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으냐?” 승일의 말에 아이들은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승일이는 이런 아이들의 하는 짓에 무안하고 겸연쩍어 뒷통수를 긁적이며 얼굴이 붉어져서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이들은 제 생각을 스스로 잘 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차례로 시켜서야 겨우 말들을 하면서도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말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지 않을 것을 찾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난 장차 간호원이 되겠어요.” “난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난 군인이 될 거예요.” “나는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채소 농사로 부자가 되겠어요.” 학급에서 가장 공부를 잘 못해서 아이들의 놀림을 받는 경태의 말에 입바른 명진이가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누군 군인이 안 되냐? 다 군인에는 갔다 와야 하는디?” 이 말에 또 한번 까르르 웃음이 터졌습니다. 선생님이 가로막으며 “아니지, 그냥 군인이 아닌 계급이 높은 군인, 진짜 나라를 위해 몸 바칠 수 있는 훌륭한 군인이 되겠다는 게 뭐가 잘못 된 것은 아니지!” 그 말씀에 아이들은 웃음을 그치고 조용해졌습니다. 이렇게 꿈이 많던 아이들은 제각기 할 일을 일찌감치 결정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2.꿈을 안고 떠난 길 이런 속에서 이 고장의 여름은 서서히 무더위를 몰아오고 있었습니다. 유난히 더운 이 고장의 기후는 아마도 대구와 비슷한 지형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동서남북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고장은 누가 보아도 완전한 분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딜 보아도 산이 아닌 곳이 없는 산 속의 마을 그곳은 유난히 여름에 땀을 많이 흘리게 했습니다. 더구나 가뭄이 계속 되자 날씨는 더욱 사람을 들볶아대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더워도 시내에 나가 멱을 감을 곳도 없어진 이곳의 아이들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날마다 TV에서는 동해안의 피서인파가 몇 십만이 모였으며, 서해안의 어느 해수욕장은 어떤지를 비춰주고 있었지만, 이곳의 어린이들은 말라붙은 시냇가에서 미꾸라지나 송사리 같은 물고기를 잡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말라붙은 시내의 바닥은 여기저기 파서 물줄기를 끌어다가 퍼 올리느라고 냇바닥마저 제대로 있는 곳이 없을 지경이니까 어디 물장구 한 번 쳐 볼수 있는 곳도 없었습니다. 온 들판은 목이 타서 여기저기서 바지작 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만 했습니다. 갈수록 산의 나무들마저도 시들해 가는 듯 색깔이 달라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지쳐서 이마의 땀방울도 말라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날마다 쳐다보는 하늘은 이제 어쩌면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잔뜩 찌프리기도 하고, 날마다 구름이 덩실거리고 가끔은 먹장구름이 몰려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옛말에 '7년 가뭄에 비가 안 오는 날이 없다'는 말과 같이 거의 날마다 빗방울은 금방 쏟아 부을 듯하다가 땡볕으로 바뀌어버리곤 하였습니다. 이제 모내기를 해야할 때가 너무 늦어져서 벌써 못자리에서 벼가 웃자라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못자리에서는 벼가 패었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옵니다. 결국 사람들은 모내기를 하는 게 아니라, 모심기를 시작했습니다. 말라붙은 논바닥에 간신히 물을 퍼 끼얹은 다음에 물이 젖은 논바닥에 호미로 모를 한 포기씩 심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업을 하다보니 하루 종일 하는 일이란 게 보통 모내기의 10분의 1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땡볕으로 이글거리는 땅에서 내뿜는 열기는 모내기를 하는 사람들의 숨통을 틀어막을 듯이 확확 끼얹어서 숨을 헐떡거렸습니다. 6월이 다 가고 7월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직도 못자리에는 수많은 모들이 시집(모내기)도 못 가고 벌써 이른 벼들은 이삭을 내 놓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여름이 점점 다가오는 동안에도 날마다 하늘을 바라보는 농민들의 마음은 갈수록 무거워지기만 하였습니다. 이제 몇몇 집에서는 이런 속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퍼져 나가고 있는 듯 했습니다. 갓바위에 사는 진이 아버지는 이웃마을에 살던 친구들이 서울에서 살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면서, 이제 이렇게 살기 어려운 환경에서 더 이상 있어 보아야 견딜 수가 없다는 쪽으로 마음의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장연이 보게. 날씨가 가물어서 날마다 타들어 가는 들판의 사진을 보면서 걱정이 앞서네. 며칠 전에 그곳의 친구에게 들으니, 한골의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어서 사람들이 물고기를 가마니로 잡았다는 얘기를 들었네. 얼마나 들 고생이 심한지 정말 걱정이라네. 난 이곳에서 비록 딱 잡아 뭐라고 할만한 직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오라는 곳은 많아서 벌어먹고 살기는 별 걱정이 없다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곳에서 살 때보다는 편하면서 걱정도 훨씬 없는 것 같다네. 자네도 어지간하면 집안을 정리하여서 이곳으로 올라오게, 어떻게든지 내가 자네가 오면 일할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겠네. 무엇을 하던지 할 일은 많아서 놀 시간은 없으니까 걱정을 하지 말고 올라오게. 아이들의 교육문제도 그렇고. 잘 생각을 해보시기 바라네. 이곳 서울은 날씨가 가물던지 비가 오던지 그게 별 걱정거리가 안 되는 곳은 이곳인 것 같다네. 소식 주길 바라네. 친구 영식이 쓰네." 이런 편지를 받은 진이 아버지는 곧장 답장을 보냈습니다. "편지 잘 받았네. 나의 장래를 생각해주는 자네에게 감사드리네. 사실은 이곳의 생활이 말이 아니라네. 날마다 말라 가는 들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피가 말라 가는 듯하다네. 자네 말대로 난 이곳에서 어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네. 어디든지 내가 가면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좀 알아보아 주게. 자네의 편지가 오면 당장이라도 올라가겠네. 식구들은 내가 자리를 잡은 다음에 차차로 올라가기로 하고 말이네. 꼭 소식 주기 바라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올라가고 싶지만 아직 자신이 없어서 움직이지를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네. 소식 기다리겠네. 친구 장연이가." 이런 편지가 오고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식구들은 날마다 한숨소리만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버지는 벌써 서울로 떠나갈 준비를 차근차근 해가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준비를 하고 있던 진이네의 이야기는 결국 영식씨의 편지로 온 동네에 알려지고 말았다. “아니 진이네는 서울로 떠나기로 했다면서? 잘했다. 어쩜 그렇게.” “난 잘 몰라요. 애 아버지가 혼자 생각으로 준비를 했던 모양인데 이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타관에 가서 어떻게 벌어먹을 수나 있을는지 걱정 뿐이지라우.” “아무러면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어? 벌써 서로 연락들을 했다면 가서 일 할 자리를 알아보고 가겠다고 한 거 아니겠어?” “글쎄요?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오만 아직은 그런 것도 없이 무작정 가겠다고 나선 거 아닌가 몰라요.” 이렇게 온 동네 사람들은 진이네의 이사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고, 잘 생각을 하였다고 칭찬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진이 어머니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우선 아직까지 읍내를 벗어나 보지 못했던 진이어머니의 걱정은 낯선 곳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시집을 와서도 석삼년은 친정집이 그리워서 잠을 못 이룬 적이 한두 번이 아닌 암뜬 성격이어서 첫째 걱정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눈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속담은 옛말이고 이제는 '눈뜨고 있어도 홀랑 당한다'는 험한 곳이 서울이라지 않은가? 이렇게 서울에 가는 것을 겁먹고 있는 진이어머니에게 “걱정하지 말고 차분히 준비나 해요. 나도 이 자식들을 굶길 것 같으면 가겠다는 생각을 했겠오. 영식이가 내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께 걱정은 마시오”하고 안심을 시키시는 아버지도 속으로는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6월이 지나가는 동안에 몇 장의 편지가 왔으나 아버지는 아직도 어두운 낯빛으로 편지를 힘없이 치우곤 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보는 진이의 마음은 조마조마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의 일터가 잘 되어서 서울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도 이 정든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서운하고 정든 친구들과 헤어지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이제 진이네 반의 아이들까지 모두 진이가 서울로 떠나간다는 소식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이와 별로 친하지 않던 아이들까지도 며칠 남지 않은 동안이라도 진이에게 잘해주겠다는 생각으로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주고 무엇인가를 진이에게 주려고 들 하였습니다. 이런 친구들의 마음 씀씀이가 더욱 진이를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진이는 이젠 정말 이곳을 떠나기가 싫어서 차라리 아버지의 일터가 마련되지 말았으면 하고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친한 친구 경란이와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거의 날마다 붙어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진이는 경란이와 헤어질 것을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그래서 경란이와 함께 산에 올라서 이 고장을 눈 속에 몽땅 넣어 가지고 가려는 듯이 구석구석을 살피기도 하고, 경란이네 집에 가서 늦도록 둘이서 함께 숙제도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7월도 며칠이 지나서 이제 여름방학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나서,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조용히 말씀을 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먼저 떠나야 하겠오. 여기서 아무리 힘들여 일을 해보았자 우리 식구들이 입에 풀칠하기도 힘이 드니 어떻게 더 버텨볼 힘이 없어졌오. 그래서 모레 아침에 우선 내가 먼저 올라가서 일터를 마련하고 방 한 간이라도 얻어 놓아야 이 식구들이 몸을 붙일 수 있지 않겠소. 그래서 내가 우선 자리를 잡아보고 식구들이 올라오도록 합시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올라갈 생각을 하셨어요. 미리 알려주어야 옷이라도 빨아서 준비를 할 게 아니겠어요?” “되었오. 내가 뭐 호강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옷은 우선 입을 것 몇 벌이면 되겠지 뭐?” “타관에 가서 옷도 손수 빨아 입어야 할 텐데.”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오. 내가 옷이야 어떻게 못해 입겠소. 그래도 여기보다는 힘이 덜 든다고 하니까 무슨 일을 하던지 살수 있는 길은 있겠지 싶소.” 이렇게 이야기하신 아버지는 이틀 후에 아침 일찍 집을 떠나셨습니다. 진이는 이제 정말 이곳을 떠나는구나 싶은 생각을 하니 학교에 가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운 듯 힘이 없습니다. 터덜터덜 힘없이 학교를 향하는 진이의 모습을 발견한 경란이는 줄달음을 쳐서 진이를 따라 잡았습니다. 경란이의 달음질치는 소리도 못 들은 채 맥없이 걷고 있는 진이를 경란이는 어깨를 툭 치면서 “진이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하고 물었습니다. 이 소리에 놀란 진이는 펄쩍 뛸 듯이 놀라면서 “아유 깜짝이야! 간 떨어지겠네”하고 웃었습니다. 둘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깔깔거리고 웃음보따리를 풀어 놓았습니다. 그렇지만 경란이는 벌써 진이가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진이야, 무슨 일이 생겼구나? 무슨 일이니?” “으응, 아버지가 오늘 아침에 서울로 떠나셨어. 어쩜 곧 우리도 이사를 가야할는지 몰라.” “얘, 넌 좋겠다. 이제 서울 가시나가 되겠구나?” “뭐? 넌 내가 이사를 가는 것이 기다려지는가 보구나?” “뭐라고? 내가 기다린다고? 너 정말 그렇게 생각을 하니?” “아니. 난 지금 이사를 갈 것이 걱정인데 네가 그런 소릴 하니까 그러지 않아.”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학교에 가서도 진이는 하루 종일 기운이 없이 하루를 보냈습니다. 3.낯설은 서울에서 여름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이었지만, 진이는 학교에 오지 않았습니다. 경란이는 진이의 책상을 바라보면서 섭섭한 마음을 달래고 있습니다. 진이네는 방학 동안에 서울로 이사를 해버렸다는 소식을 갓바위 아이들에게서 들었지만 진이는 아직도 소식이 없습니다. 어떻게든지 편지라도 한 통 보내 줄줄 알았는데 너무 한다고 생각이든 경란이는 진이가 보고 싶으면서도 미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경란이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며칠 안에 진이의 편지가 날아왔다. 경란이는 ‘역시 나의 친구 진이야‘ 하는 생각으러 편지를 뜯었다. "경란이에게. 경란아, 난 이제 서울로 와서 여기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있지만, 그곳에서 너희들과 지내던 때가 생각이 나서 못 견디겠어. 여기 아이들은 나에게 잘 해준다고 하는 모양인데 도무지 정이 들지 않아. 모두들 왜 그렇게 잘들 사는지 우리 집만 가난뱅이 같고, 마치 아이들이 나에게 '얘 이 거지야'하는 것만 같아서 늘 자신이 없고 부끄러워. 그러니까 아이들은 더욱 나를 우습게 보는지 불쌍하게 여기는 것 같아. 난 지금도 그곳에서 잘해주던 너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고 꿈에도 늘 그곳에서만 놀곤 한단다. 선생님께도 따로 편지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고 친구들에게도 소식이나 전해 주면 좋겠어. 아직 여기에 정이 들지 않아서 고생을 하고 있는가 봐. 우리 아버지는 여기저기서 일을 하시기 때문에 우선 먹고살기는 할 것 같은데, 너무 돈 쓸 곳이 많아서 힘이 드시는 것 같애. 경란아 답장 꼭 해 줘. 이 다음에 다시 쓸게. 안녕. 진이가" 경란이는 진이의 편지를 읽고 나니 더욱 진이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 복잡한 서울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니 더 진이의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진이네는 서울에 오자마자 홍제동 산동네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서대문구 홍제동 산 1-100번지 산골짜기를 따라 산등성이까지 야금야금 먹어 가는 판자 집들이 이제 골짜기를 넘어가서 이웃동네까지 연결이 되어 버린 곳입니다. 어찌나 가파른지 아무래도 한번에 올라가기가 힘들만큼 험한 골목길을 요리조리 꼬불꼬불 올라가야 했습니다. 학교까지 가는데도 20분은 걸어가야 하는데 골목길을 걷자면 키가 닫을 듯한 지붕들을 타고 나오는 연탄 냄새와 화장실의 냄새가 코를 싸잡고 다녀야 할 만큼 심했습니다. 진이 아버지는 이웃마을 아저씨와 짝을 이루어 건축 일을 하시러 다녔습니다. 농촌에서 일을 하시던 분이라서 그리 힘들어하시지는 않지만 저녁에 돌아오실 때는 솜처럼 지친 몸에 술을 드시고 곤드레가 되어 돌아오시곤 했습니다. 하루 일당인 5000원을 받아들면 온 식구가 먹고 살 쌀을 몇 되 살수 있었다. 농촌에서 일할 때보다는 훨씬 많은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연탄을 사야하고 물 한 바가지라도 돈이 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길을 가더라도 이제는 걸어서 다니는 것보다는 차를 타고 다녀야 하는 서울 생활이다 보니, 돈이 모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일년이 다 가도록 하루살이 같은 생활을 하다보니 이제 앞날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사 온지 일년이 지나자 집주인은 집세를 올려 달라고 독촉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이 엄마, 아무리 어려운 줄을 안다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동네에서 우리 집보다 싼 집은 없어요. 다른 집처럼 많은 돈을 달라고 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십만 원은 올려 주어야겠어요. 그래도 다른 집보다는 삼십만 원은 싸게 드리는 것이에요. 그 많은 식구들을 데리고 다른 집에 가보세요. 누가 방을 주기나 하는지. 식구가 많고 아이들이 많으면 방을 주지 않는 게 서울사람들이에요.”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었다. 적어도 두 달은 안 먹고 버텨야 할 만큼 많은 돈이었습니다. “여보,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 산동네도 이렇게 집값이 비싸니 더 싼 곳을 찾을 수도 없을 것이 아니겠어요.” “글쎄, 더 싼 곳을 찾아보아야지요. 어디든 가면 살 곳이 있겠지요.” “그런 곳을 어디서 찾는단 말이오. 이제는 서울을 떠나야 할 거 아니에요?” “어디로 떠나야 한다는 말이오. 여기보다 못한 곳이라면 이제 다시 시골로 돌아가자는 말이오?” “아니?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소. 우리가 그 곳을 떠날 때 사람들은 얼마나 부러워들 했소. 그런데 이렇게 초라하게 돌아갈 수는 없지 않소. 우리 끝까지 버텨냅시다.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잘 살 날이 돌아오겠지. 그렇찮소?” 아버지와 어머니는 며칠을 두고 이렇게 걱정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뾰쪽한 수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진이네는 저 변두리에 있는 진관내동이라는 서울의 끝동네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 동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시골처럼 벼농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들 채소와 꽃을 가꾸는 비닐하우스 재배를 하고들 있었습니다. 이제 먹고살기 위해서는 온 식구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진이는 학교에 다녀오면 이웃 비닐하우스에서 꽃모종을 내는 일을 도와주고 용돈을 얻어 쓰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진이의 어머니는 이미 비닐하우스 마을에서는 소문난 일군으로 사방에서 어서 오라고 손을 벌일 만큼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농촌에서 일을 하던 솜씨로 꼼꼼히 일을 해주게 때문에 서로 데려가려고 미리 돈을 가져다가 맡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살림은 크게 나아지는 게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절대로 돈이 생긴다고 해서 함부로 돈을 쓰거나, 돈이 생긴 것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항상 나아지는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날마다 불어나는 저금통장의 금액을 보면서 몇 년 만 더 고생을 하면 우리도 비닐하우스를 얻어서 꽃 농사를 한 번 지어 보자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잘 하면 2,3년 후 조그만 비닐하우스를 하나 마련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런 희망에 부풀은 진이네의 생활은 이제 조금씩 즐거운 가족의 분위기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술타령을 하시지 않고,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나서서 하려고 하였습니다. 온 집안 식구들이 이렇게 나서서 무언가를 하고 또 아껴서 돈을 모아 가는데 살림이 불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이제는 용돈도 벌어 쓰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학교에서 끝나는 시간도 더 늦어졌지만 이제 서울의 아이들에게 지지 않으려면 더 부지런히 공부를 하지 않으면 따라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밖에 일을 하러 나가시고 없는 집안일을 알뜰히 해드리는 것이 집안일을 돕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진이는 용돈을 버는 일보다 집안일을 열심히 도와드리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 바로 숙제를 하고 틈이 생기지 않도록 집안의 청소며, 부엌에 들어가서 식구들의 저녁 끼니를 준비하는 일까지 모두 어머니가 믿어 버리고 일을 할 수 있도록 말끔하게 처리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진이의 집안일 돕기는 동네에서 소문이 나서 칭찬이 자자하였습니다. 누가 자랑을 해서가 아니라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두 진이의 부지런한 것을 부러워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까 이제는 소문난 효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진이 엄마는 얼마나 좋을꼬, 저렇게 착하고 야무진 효녀를 두어서. 집안일을 그렇게 깔끔하게 잘 한다면서요?” 이런 칭찬을 들은 진이 어머니는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보다 몇 배 자랑스러웠습니다. 더구나 집안일을 그렇게 도와주니까 다른 사람보다 안심을 하고 일을 할 수가 있어서 다른 집에서 일을 할 때도 더 환영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돈을 살그머니 더 얹어 주는 집도 있었습니다. 열심히 해준 대가라고는 하지만 여간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한 진이 어머니는 더 열심히 일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온 동네에서 칭찬을 받으면서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그렇게 창피한 일이 없다고 생각을 다진 진이는 공부도 밤을 새우듯 열심히 하여서 학교 성적도 점점 올라가서 우등권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중2년이 되는 해(서울로 이사를 한지 4년째)에는 이제 진이네가 자신의 비닐하우스를 마련하기로 한 해였습니다. 사실 그동안에 아끼고 모은 돈으로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만 되었다면 벌써 마련하고 남을 비닐하우스가 이렇게 늦어진 것은 해마다 돈을 모은 만큼 땅을 빌리는 값도 뛰어 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채에 100만원 안팎이던 하우스 사용료가 해마다 30만~40만원씩이나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곳의 농사가 수지가 맞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올라가는 부동산 값은 이제 서울 시내보다는 이렇게 변두리에서 더 많이 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으로 개발이 되면 이런 땅을 사두어야 한 몫을 잡는다고 생각한 서울시내 부자들의 자가용이 드나들면서 날마다 값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땅값이 오르니까 비싼 땅을 싸게 빌려 주려고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농사를 하는 사람들만 더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미루다가는 이제 오르는 전세 값도 제대로 댈 수가 없겠다고 생각을 한 진이 부모님은 큰 결심을 하였습니다. 4.꿈은 사라지고 이제까지 모아온 돈이 조금 모자라기는 하지만 너무 착실한 진이네를 믿는 동네 사람들이 돈을 빌려 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이제는 용기를 내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결심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곳의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면 하우스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그것에서 일년 내내 꽃을 가꾸거나 채소를 가꾸어서 소득을 올리면 네다섯 식구가 매달려도 살아 갈만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이곳은 하우스가 아주 많아서 일일이 생산한 것을 가지고 팔러 다닐 필요도 없이 장사꾼들이 모여들어 미리 돈을 주기까지 하니까 팔 곳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여 기왕이면 이 마을에서 하우스를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마을 변두리에 두 채의 하우스를 가진 사람이 농사를 짓는 게 싫어서 남에게 빌려주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알까 봐서 얼른 계약을 하지 않으면 구하기 힘든 하우스를 당장 계약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사람과 마주 앉아 의논을 하였습니다. “그 하우스가 그렇게 쉽게 나온 것을 보면 별로 재미를 못 본 게 아닐까요?” 아버지는 은근히 걱정이 되어서 물었습니다, “이 양반이? 하기 싫으면 관두시오. 지금 이 하우스가 나왔다는 말만 나오면 누가 먼저 계약을 하는지 모를 지경인데 당신에게 차지나 갈 것 같아서 그러오?” “아따 이 양반 성질은? 아, 묻지도 말라는 말이오?” “글쎄, 싫으면 관두라는 것 아니오. 아마 내일이면 다른 사람이 계약을 하고 말 것인데 그때는 후회하게 될 것이오.” 소개를 하겠다는 사람은 어지간히 서두르고 주인이라는 사람은 “여보시오. 복덕방을 하려면 이렇게 하는 거요? 바쁜 사람 나오라더니 이렇게 의심이나 받으란 말이오? 그만 두시오. 난 바빠서 가 보겠소. 이제 그만 갈 테니 내일이라도 당신이 임시 계약을 하고 연락을 하시오”하고 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복덕방아저씨는 죄송해서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겠다는 듯이 죄송해 하면서 전송을 해드리고 들어와서는 “여보시오. 최씨! 나 당하는 꼴 보았소? 당신이란 사람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오. 아직 터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 도와주려고 했더니 망신만 당하지 않았소”하고 신경질을 부리며 자리를 뜨려는 것을 아버지가 옷자락을 붙들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여보시오. 이러면 되오? 날 도와주려면 끝까지 좀 도와주시오. 시골에서 올라와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 잘 알지 않소.” 이렇게 사정을 하여 간신히 붙들어 앉히고 사정사정을 하여서 계약을 하게 된 것입니다.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가장 값이 싸고 땅이 좋지 않은 편이었지만 얻기가 쉽지 않은 비닐하우스를 보증금 150만원에 연 30만원씩이나 주기로 하는 계약을 맺었을 때, 진이네 식구들은 돈이 조금 모자라기는 하지만 자기들의 하우스를 갖게 되었다는 기쁨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스스로가 한만큼의 소득을 올릴 수가 있게 되었다.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우리 모두 온 힘을 다해 보기로 하자.” 아버지의 말씀은 온 가족에게 희망을 주고 기쁨이 한층 더한 것이었습니다. 뿌듯한 마음으로 가족들이 신바람이 나는 며칠을 보내고 나서, 이제 진이네가 장만한 비닐하우스를 찾아가서 비워줄 것을 부탁하기로 하였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서 나란히 손을 마주 잡고서 부풀은 가슴을 억누를 길이 없는 듯, 발걸음도 가벼웠습니다. “안녕하세요? 주인님은 어디 계시죠?” “누구시죠?” “네에, 아직 연락을 받지 못하셨군요. 지난 15일에 하우스를 전세계약을 하였는데요. 혹시 주인이 알려 주시지 않으셨나요?” “무슨 소리예요? 누구에게 전세계약을 하셨다구요?” “주인이 강경식씨가 아니었나요?” “주인이요? 이건 우리 것인데요?” “아니 그럼 강경식씨가 아니란 말이에요?” “무얼 잘못 알고 오셨나 보군요. 딴 곳에 가서 알아보십시오. 여긴 우리가 이렇게 작물을 재배하고 있는데, 누가 전세를 내어주었단 말입니까?” “뭐라구요? 아니 그럼 우리가 돈을 준 것은?” 아버지는 그만 머리를 싸쥐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여보! 여보! 정신 차리세요.” 어머니는 그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는 아버지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지만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며칠을 멍하니 먼 산만을 바라다보면서,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몇 달을 보내야 하였습니다. 경찰서로 검찰청으로 찾아다니며 애원을 해봐도 어느 누구도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지 형식적으로 문서나 접수할 뿐이었습니다. 그 동안에 진이네는 이제 꿈도 희망도 모두 사라져 버린 빈껍데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날마다 가족들의 먹거리를 마련하는 것만도 벅찰 지경인데, 돈을 빌려준 이웃들은 이제 돈을 받지 못 할 것을 염려하여 눈치코치 살펴주는 법이 없이 재촉이 불같았습니다. 그렇게도 믿고 다정했었던 이웃 사람들이건만 잘못 되어서 돈을 떼이게 되었다고 하니까 도와주기는커녕 자신의 돈부터 달라고 야단들을 하는 것이 너무나 야속하기만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끔 불편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시고 싸움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5. 귀향의 길 한달 가까이 사기를 치고 도망을 간 두 사람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여기저기 알아도 보았지만, 더 이상 그를 찾는 방법도 없거니와 찾는다고 하더라도 사기란 어지간히 지능범이라서 경찰에서도 쉽게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법률구조공단에서의 설명을 듣고서는 더 이상 버틸 힘마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죽기로 결심을 하셨던지 농약을 마셔 버리셨습니다. 자리에 들었다가 설풋이 잠이 들었는데 어머니가 신음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진이의 다급한 목소리에 놀란 아버지는 아직 술이 덜 깬 목소리로 “뭐어? 엄마가 어떻다고?” “아버지, 어머니가 이상해요. 갑자기 신음을 하시면서 쓰러지셨어요.” “뭐? 어디가 아픈 가부다.” 아버지는 술기운을 못 이기겠다는 듯이 그냥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진이가 불을 켜고 살피다가 방구석에 뒹구는 농약 병을 발견하였습니다. “아버지, 엄마가 농약을 마셨나 봐요. 어서요.” 이 말에 아버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에게로 다가오셨습니다. “진이야. 어서 엄마를 등에 업혀라. 어서 병원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어서.” 이렇게 다급하게 집을 나섰는데 마침 응급실에 불이 켜진 동네 의원을 발견하였습니다. 다행히 얼른 발견이 되었기 때문에 가까운 동네 의원에서 위세척을 하는 등 응급 처치를 잘해서 큰 탈이 없이 3일 만에 퇴원을 하셨습니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더 이상 이 지긋지긋한 서울에서 살고 싶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었는데 두 분의 이야기 소리가 도란도란 들려 왔습니다. “여보, 우리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이렇게 살아 보았자 우리 같은 촌뜨기들은 서울 사람들의 밥 노릇이나 하지 어디 이게 사람의 새끼들이 사는 곳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 여기서 살아갈 자신이 없지 않아요. 다시 내려갑시다.” 어머니의 말씀에 이어 아버지는 “당신의 마음을 알만하오. 나도 지금 생각을 해왔오. 이렇게 살아보았자 아무런 앞날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오. 그래서 차라리 고향에 내려가서 내가 어려서부터 몸에 익힌 농사를 짓는 게 제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소, 다만 우리가 여기 와서 익힌 비닐하우스를 거기에 가서 한 번 해보면 어떨까 생각을 하고 있었소. 당신 생각은 어떻소?” “그래요. 우리 내려가서 거기에서 땅을 빌리면 싸게 빌린 것 아니겠소. 여기서 익힌 것이니 하우스를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오. 3년 동안 배운 지식을 이용한다면 거기에서도 충분히 잘 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소. 나도 이제는 제법 알게 되었으니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책임을 질 거예요.” 두 분의 마음은 이미 서울을 떠나 고향 들판에서 비닐하우스를 짓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진이는 마음속으로 차라리 잘 됐지 뭐. 그렇게라도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기운을 차려서 열심히 하신다면 충분히 잘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일주일 후 어느 날 밤에 진이네는 마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이삿짐을 지고 나섰습니다. 물론 가까운 이웃들에게는 자신들이 가는 곳의 주소도 알리고 그 동안 진 빚은 방세를 빼어서 모두 갚았습니다. 다만 서울까지 왔다가 못살고 떠난다는 말을 듣기가 너무 서러워서 밤에 떠나기로 한 것입니다. 고향에 도착을 한 진이네는 곧장 이웃 사람들에게 청하여 마을 앞 논을 몇 마지기 세를 얻었습니다. 비닐하우스를 짓지 않은 빈 땅이라지만 서울에서의 1/10도 안 되는 싼 땅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이기도 하지만 동네에서 가장 농토가 많은 부잣집이라서 농사철에 농사를 돕는다는 조건으로 몇 마지기는 그냥 보리를 심어 먹도록 주기도 하였습니다. 진이네 온 가족이 힘을 합쳐서 논에 보리를 심고 북을 주고 가꾸는데 전력을 하였습니다. 겨우내 남의 집 보리밭도 매고 남의 집이라면 달려가서 도와주고 나섰기 때문에 식구들이 굶주리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봄에는 보리를 많이 거두어 보리밥이라도 먹고 살수 있게 되었고, 비닐하우스에 심은 채소는 겨울 동안 제법 돈벌이가 되어서 당장 하우스를 짓는데 들었던 비용은 갚아 나갔습니다. 이렇게 몇 년 만 고생을 하면 빚을 벗고 나설 수가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이제는 진이네가 하는 일이라면 서로 도와서 함께 살기를 바라는 마을 사람들의 고마운 마음에 더욱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해를 보내고 나니 이제 지긋지긋한 서울은 완전히 머리에서 사라진 듯 모두들 이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졌습니다. 이웃들의 고마운 도움으로 먹고사는 문제는 간신히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겨우 먹고사는 데만 매달려서는 도저히 앞날이 없을 것이라는 걱정에 무엇인가 좀더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이것저것 찾아도 보았고, 농촌지도소의 도움을 받기 위해 영농교육에도 찾아다니면서 아버지는 새로운 작목에 눈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6. 우루과이 라운드 1992년 우리나라의 5천년 역사 이래 이 나라의 국민을 먹여 살리는 1차 산업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떠들면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던 농업에 가장 무서움 바람이 불어 닥쳤습니다. 세계무역기구에서는 우루과이라운드라는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자기 나라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역장벽으로 다른 나라의 값싼 농산물의 수입을 억제하거나 자기 나라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보조금을 주어 값을 조절하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협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 협약은 겉으로 보아서는 별로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은 것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농업분야에 있어서 다른 나라처럼 큰 농장을 기지고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닌 나라에게는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대부분이 자기가 생산한 농산품을 팔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급자족을 위한 것일 경우 생산성이 떨어지고 생산비가 많이 들어서 비싸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값싼 농산물을 수입해 오는 것을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농업은 값싼 외국 농산물에 밀려서 그 설자리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쌀의 경우 우리나라의 쌀 80kg한 가마를 생산하는데 드는 비용이 20만원이라면 넓은 농토에서 기계화된 농업을 하는 미국산은 불과 5,6만원 밖에 들지 않고, 중국에서 수입을 하면 4만원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싼 국산보다는 값싼 외제 쌀을 수입해서 먹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그렇다면 우리 농업인구는 무엇을 할 것이며,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식량을 전혀 생산하지 않는다면 그 때는 우리나라의 국민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어떤 어려움이 따를는지 모르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미국이나 브라질 같은 넓은 국토를 가진 나라들은 한꺼번에 넓은 농토에 팔기 위한 환금작물 위주로 농사를 짓기 때문에 값으로 경쟁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이겨내는 방법은 진이 아버지처럼 무엇인가 새로운 작물을 심어서 자기가 먹고살기 위한 농사보다는 팔아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작물을 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농촌지도소를 드나들면서 비교적 안정적이면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작물을 재배하도록 지도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우리 군에서 비교적 소득을 많이 올리는 것은 하우스에서는 오이와 방울토마토이고, 산지에서는 양다래가 비교적 괜찮은 작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밭작물로는 마늘과 시금치, 겨울 배추 등이 괜찮은 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저의 경우 몇 동의 하우스에서 채소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논이나 밭을 얻어서 새로운 작물을 좀 심어 볼까 하는데 가장 전망이 있는 것은 무엇이 될까요?” “글쎄요. 거기라면 땅의 성질이 사질 양토이고 물 빠짐이 아주 좋은 곳이지 않습니까? 거기라면 우리 고장에서는 마늘이 비교적 손도 덜 가고 비교적 소득이 좋은 작물이니까 한번 생각해 보실 만 합니다만, 본인이 결정을 하셔야 지요. 자신이 재배 경험이 있고 어느 정도 자본도 있어야 하니까요.” 이런 지도사의 조언을 듣고 여러 날을 생각한 끝에 마늘을 재배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이곳이 바다와 면해 있지는 않지만 땅이 비교적 사질양토(모래참흙)이어서 마늘의 성장에 아주 알맞고 또 마늘을 심지 않았던 땅이므로 병충해의 피해를 입을 염려도 없다는 것이 마늘을 선택하게 된 이유이었습니다. 마늘은 가을에 벼 베기가 끝난 다음에 논을 얻어서 심었다가 모내기 전에 뽑아 수확을 하기 때문에 보리를 심는 것과 같이 두 번 지은 농사에 해당하므로 큰 비용이 들지 않은 편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작년에는 마늘 값이 아주 비쌌기 때문에 올해에도 마늘을 심으면 값을 잘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농촌지도소의 말에 더욱 용기를 갖고 덤빈 것입니다. 마늘 종자 값으로 약 100여만 원을 들였고, 비료와 농약을 쓰고 논을 빌린 도지를 주려면 논 300평당 적어도 200만 원 이상이나 들었지만, 작년에 마늘 한 접에 약 1만원이나 받아야 겨우 수지의 한계선이 될 것입니다. 진이네가 일년 동안에 가장 크게 기대를 걸었고, 많은 돈을 들여서 가꾼 마늘입니다. 그런데 풋 마늘 때부터 벌써 마늘이 과잉생산이라는 방송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진이네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걱정을 하고 있다고 일이 잘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늘을 수확할 때쯤에는 마늘 한 접에 겨우 8000원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받는 다면 진이네는 겨우 투자한 돈을 건질까 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순전히 빚을 얻은 돈이나 겨우 건질 수 있을 처지였습니다. 온 가족이 전심을 다해 기른 마늘이 이 모양이니 또 다시 맥이 풀리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차떼기 장사가 덤벼들어서 겨우 밭떼기로 본전을 건진 것만도 다행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값이 계속 떨어지자 돈을 치른 채소 장수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아서 모내기에 쫓겨서 삯군을 사서 간신히 마늘을 캐어 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농사라는 것이 참 예측할 수 없습니다. 너무 시장이 좁기 때문에 누가 돈을 벌었다네 하면 금방 너도나도 하고 덤벼서 곧장 값을 끌어내리고 심지어는 아주 똥값으로 변해 버리기 때문에 도무지 무얼 심으면 틀림없이 괜찮을 것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시장의 변화를 무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이것을 심으십시오 하고 권장을 할 수 없다는 게 저희들의 한계입니다”하면서 미안해하는 지도사의 말을 들으면서 진이 아버지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7. 쉬운 것부터 이제는 농촌에서 무얼 심어야 하고 무엇을 얼마나 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 많은 투자를 해서 빚을 지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심어 가꾸기 쉽고 관리도 수월하며, 별로 힘들지 않은 작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의 논을 빌어서 시금치를 잔뜩 심었습니다. 시금치는 비닐하우스를 하지 않고 그냥 야생으로 심어도 괜찮은 작물이며, 하우스에서 가꾼 것보다는 훨씬 맛이 더 좋은 것이기 때문에 잘 팔리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시금치를 심었고, 밭의 한 구석에는 늦게 뿌린 배추를 역시 자연 상태에서 가꾸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논 900평에 시금치를 약 600평이나 심었고, 배추를 200평정도 심고 나서 유채를 약 100평쯤 심었습니다. 어느 것이 더 나을지 모르기 때문에 아직은 자신 있게 무엇하나를 심을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겨울 동안 자라는 시금치와 배추며, 유채는 별로 병충해도 없으며, 손질이 많이 가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물이 고이지 않게 물빠짐을 좋게 해주고, 시금치는 산성 토양에 약하므로 석회 등 알카리성 성분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는 것과 배추가 잎 끝이 마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짚을 뿌려 찬바람을 막아주는 것 정도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겨울 동안에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오이 농사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눈이나 비가 오면 물이 고이지 않은지 만 살폈습니다. 겨우 내내 따낸 오이는 진이네 가족의 생활비를 대고 약간의 저금도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12월도 마지막 고비를 넘기려는 무렵에 밭에 찾아온 채소 장수는 뜻밖에도 시금치와 배추를 몽땅 다 살터이니 흥정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미리 치르기는 하지만 반 만 치르고 나머지는 전화를 하면 작업을 해서 상차(차에 싣기)까지만 해주면 물건을 받은 날 구좌로 송금을 하기로 합시다”하면서 제시한 채소 값은 뜻밖에도 평당 1만5000원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산을 해보니 900평에 1350만원입니다. 투자한 금액은 도지로 지불할 270만원과 씨앗 비료 등 농자재 값으로 약 220만원, 그리고 작업에 든 인건비가 심을 때와 작업 할 때 합쳐서 약 100만원을 합한다고 해도 590만원을 투자하여 투자비를 빼고서도 760만원을 벌게 된 것입니다. 이 정도면 여태까지 빌려 쓴 돈을 모두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돈을 빌려서 농사를 지었고, 남의 신세를 지며 살았는데 이제는 내 힘으로 살 수 있게 되겠구나 싶으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진이네는 이제 가장 힘이 들지 않으면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리하게 많은 돈을 들여서 마늘처럼 재미를 못 보는 것보다는 실패를 하더라도 이웃끼리 나누어 먹고 정 안되면 논에 퇴비로라도 할 수 있는 잎채소를 심어서 가꾸는 것을 전문적으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름엔 상추나 쑥갓, 깻잎 등을 심고 가을이면 시금치와 배추는 노지에 심고 상추, 쑥갓을 하우스 안에 심어서 여러 가지 채소 중에서 조금 나은 것에서 잘 못된 것을 보충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하우스 안에도 잎채소의 사이사이에 열매채소인 고추를 드문드문 심어서 사이갈이의 효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제 상당히 지식이 모여서 무슨 작물이 어느 시절에 어디에서 많이 소비되고 어느 작물은 언제쯤에 값이 나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진이 아버지는 채소별로 우선 가장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시기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시기에 맞추어서 생산을 할 수 있도록 역으로 계산을 하여 파종을 하고, 재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언제나 그렇다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계산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해 동안 잎채소를 가꾸면서 남다른 전략이라고 정한 것이'남이 안 할 때를 노려라'(逆發想)는 방식이었습니다. 지난해에 값이 떨어져서 형편없었다는 작물이 무엇이며 언제쯤에 가장 많이 출하가 되었던가를 살펴서 바로 그 시기에 출하를 하도록 재배를 해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과 거꾸로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무얼 심어서 돈을 벌었다네 하면 자기는 심지 않고 오히려 무얼 심어서 망했다네 하면 그걸 찾아 심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규모가 작기 때문에 냄비경제의 특성을 지녔다. 달아오르면 금방 더워져서 넘치고 식기 시작하면 금세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게 우리 경제의 특성이다." 영농교육 시간에 경제를 강의하신 강사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으로 해보자는 것입니다. 식기 시작하는 것을 불을 지피면 다시 더워지는 것입니다. 남이 좋다고 할 때는 너도나도 하기 때문에 항상 넘칠 위험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8. 돈 안 드는 농사를 진이네에서 몇 년 동안에 잎채소를 가꾸면서 한 가지 꼭 지키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해로운 비료나 농약을 될 수 있는 한 쓰지 말자." 이것은 진이 아버지의 생각이고 또한 자신의 농산물을 팔아주고 먹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퇴비를 만들고 유기질 비료를 사다 쓰더라도 화학비료는 적게 쓰고 농약을 뿌리지 않는다는 자신의 다짐을 꾸준히 실천에 옮겼습니다. 처음엔 농약이나 화학 비료를 적게 쓰는 것에 그쳤지만 점점 이런 농사에 경험이 쌓이면서 완전히 쓰지 않는 청정재배로 바꾸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니 몇 가지 이익이 있었습니다. 우선 비료와 농약 값의 절약입니다. 이것도 상당한 금액이 절약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비료를 많이 쓰는 작물은 비료 기운으로 웃자라서 우선 보기에 좋고 싱싱해 보이지만, 연약하여서 병충해가 많이 붙습니다. 그러나 유기질 비료와 퇴비를 사용한 채소는 싱싱하게 잘 자라지는 않을지라도 튼튼하기 때문에 병충해가 별로 발생하지 않아서 사람의 손이 덜 가고 걱정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자신이 생산한 작물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제 누가 와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논밭이나 하우스에서 채소를 뜯어다가 물에 훌렁훌렁 씻어서 바로 먹을 수 있습니다. 이런 농사법이 알려지자 농촌지도소에서는“최진선씨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농약은 물론 화학비료까지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청정채소를 가꾸고 있습니다. 소장님 이제 우리 고장을 청정채소 재배단지로 바꾸어 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우선 누가 뭐라 해도 공인이 되고 충분히 합격을 할 수 있는 최진선씨를 '청정유기농산물 생산자'로 지정하여서 높은 값을 받게 도와주면 이웃한 모든 사람들이 따라 갈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청정단지를 가진 가장 앞선 지도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도사의 말은 지도소의 전체 회의에서 큰 찬성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지도사를 직접 파견하여서 청정유기질농업 표시를 할 수 있도록 신청을 해서 허가를 받으면 더 값을 잘 받을 수 있다는 조언을 해주면서 등록 방법에 대하여 알려 주었습니다. 진이 아버지는 자신이 스스로 택한 농사법이 정부에서 인정을 해서 더 비싼 값으로 팔로를 개척하여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농촌지도소에 들어가 '청정 유기 농산물' 표지를 획득하는 수속을 밟았습니다. 농촌지도소에서 더 적극적으로 나서 주었기 때문에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별로 없었습니다. “자, 이제 서류가 완전히 갖추어 졌습니다. 이제 이 신청서가 접수되면 심사관들이 직접 방문하여서 실제 농작물을 검사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해왔지만, 만약에 농약 성분이나 비료 성분이 검출되면 허가는 취소되므로 철저하게 잘 해주시기 바랍니다.” 당부를 듣고 집으로 돌아온 진이 아버지는 하우스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다시 한번 농약이나 화학 비료 등이 혹시라도 남아있지는 않은지 일일이 살펴보았습니다. 일주일 후 심사관이 다녀가고 각종 채소를 몇 군데씩 채취하여 검사용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마치 입시를 치르고 발표 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초조한 며칠이 지나자 농촌지도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축하합니다. 검사 결과 청정이 확인되었답니다. 이제 며칠 동안 인증서를 발급해 주는 과정만이 남았습니다. 이제 최씨네 농작물은 다른 곳에서 온 장사들이 적어도 20%에서 30%까지 더 비싸게 사가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고장을 청정단지로 만드는 길잡이가 되어 주십시오.” 전화를 받고 나서 다시 사흘이 지나고서야 지도소장이 직접 인증서를 예쁜 액자에 넣어서 가지고 오셨습니다. 전달하는 것을 사진도 찍고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 거름주기, 벌레 잡기 등의 활동을 일일이 찍어서 한 나절을 사진 모델 노릇을 하였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도 나와서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농촌지도소장은 “마을 어르신들께서는 이 조그만 인증서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이제 최진선씨의 채소는 이 마을의 다른 분들의 채소보다 적어도 20% 이상 비싼 값으로 팔리게 될 것이며, 도시에 부자들, 귀한 분들에게만 공급되는 고급 채소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얼마지 않아서 백화점에도 전시되고 팔리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고장의 여러분께서도 모두 이런 인정서를 받아서 이 고장 전체가 '청정유기농지역'으로 지정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만이 여러분이 더 잘살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하고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군 농촌지도소와 군청 산업계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협조를 해주어서 6개월 후에는 드디어 인증서가 도착한 것입니다. 진이 아버지는 이제는 떳떳하게 이 허가증을 걸어 놓고'이동 청정 유기농 작목반. 생산자 최진선'이라는 표시를 하여 출하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는 유기농 작물만을 취급하는 식품전문매장에서 주문이 들어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점차 인증서를 받기 위해 진이아버지와 함께 의논하고 함께 방법을 찾아가면서 지도소의 지도대로 차츰 온 동네가 '청정유기농업단지'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신용에 금이 가지 않도록 더욱 정성껏 다듬고 골라서 포장을 하여 보냈더니 이것을 본 서울의 유명 백화점에서 전문 매장에 판매를 허용하겠으니 납품을 할 수 있겠는지를 문의하는 편지가 왔습니다. "최진선 님 귀하 귀하의 청정 유기농산물은 품질을 인정받고 있으므로 본 백화점의 유기농산물 전문 매장에서 판매를 희망하시면 다음 규정에 의하여 납품하여 주시면 귀하의 상표를 부착하여 판매토록 하겠습니다"하면서 농산물의 납품 방법과 결재 방법 등을 자세히 안내하는 편지가 도착하였습니다. 누가 선전을 하거나 찾아다니지도 않았지만 양심적으로 생산한 청정 채소가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청정 마크를 획득한지 불과 1년 도 안 되어서 이처럼 주문이 밀리고 알려진 것은 그 만큼 정성을 들인 결과이었습니다.
최근 발표된 한국교총의 ‘2010년도 교권회복 및 교직상담 활동실적’ 보고서는 교권이 갈수록 추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해 교총이 접수 처리한 교권침해사례는 총 260건으로 104건이었던 2001년에 비해 2.5배 증가했으며, 2006년(179) 대비 1.5배 늘어났다. 2009년(237건)에 비해서는 23건이 증가돼 약 10% 정도 나날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 같은 수치는 교총에 접수 처리된 사건에 국한될 뿐 실제로 학교현장에서는 훨씬 많은 교권침해사건이 발행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고서 내용 중 주목할 점은 학생지도 차원의 경미한 체벌에 대한 피해보상 및 처벌 등의 피해가 39건으로 2009년 28건과 비교해 14%의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는 학생체벌전면금지조치 및 학생인권조례제정과 무관하지 않으며, 학교현장의 교권추락, 교실위기 현상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권침해의 형태도 더욱 다양화·지능화되고 있다. 교원이 정상적으로 학생을 지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식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인권을 침해당했다며 교사나 학교에 사직 및 전근 강요, 담임박탈 등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례도 많았다. 또 안전사고가 학교에서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와 교사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사실과 다른 내용을 게재해 명예를 훼손하는 등 교권침해가 더욱 다양한 형태로 벌어지고 있다. 교권이 백척간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심각한 상태다. 교사들의 자긍심과 교권이 날로 추락해 가는 상황에서 교사들에게 열정과 헌신적인 가르침을 기대할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교권확립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일부 문제 학생들에 의한 수업방해 행위와 교칙 위반행위로 인해 선량한 다수 학생들의 학습권과 교원의 교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제도적 방안 등 다양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무엇보다도 국가적 차원의 교권보호안전망 구축이라는 차원에서 학교출입절차마련, 교육활동전담 변호인단 설치․운영, 교권침해에 대한 엄정 조사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교원의 교육활동보호법’이 조속히 제정될 수 있도록 정치권과 정부가 앞장설 것을 촉구한다.
바깥에서 일어난 큰 지진피해로 우리나라에서 다시 한 번 지진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다. 앞서 일어난 중국 쓰촨성 지진으로 학교의 지진 피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지진피해가 엄청나게 크다. 3월 11일 발생한 일본 동북지방의 지진은 원전의 방사능 유출로까지 이어지면서 일주일 이상 뉴스 시간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단 지진이 발생하면 국회에서 한번, 행정자치부, 그리고 각 관계부처가 파상적으로 실태조사부터 시작한다. 항상 보고서 1장 수준에 원칙만을 반복하고 머물다가 밀물처럼 사라진다. 그래서인지 현재 우리 국민에게는 안전에 대한 우선순위가 낮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3월에 밀어닥친 우리나라의 지진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지도 의심스럽다. 눈앞에 닥쳐야 시설을 보완하고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현실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아이들의 안전이다. 지진을 포함한 자연재해, 그리고 화재와 같은 사람이 만든 재해에서 안전하게 아이들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어른들의 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현행 국토해양부에서 관장하는 내진설계기준(1988년 시작)에 따르면 사용자가 많은 건물은 일반건물에서 적용하는 지진하중의 크기를 1.5배까지 증가시켜 안전도를 높이도록 한다. 반면 2008년 교과부에서 만든 내진설계기준은 학생수 1500명 이상의 학교 시설물에 지진하중을 증가시키게 했다. 이 설계기준으로 과연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지진을 만나면 안전할까? 50명 이하의 유치원 그리고 작은 규모의 학교는 지진에 덜 안전해도 된다는 경제논리가 좋은지 다시 생각해보자. 학교 시설물은 교실, 강당, 도서관, 식당으로 이루어진 교육 공간이다. 그리고 재해 후 지역사회에 대피소의 공간으로 이용된다.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공간인 만큼 학교의 내진 보강은 꼭 필요한 일이다. 우리 학교의 지진에 취약성은 교실구조에 있다. 기둥과 보로 이루어진 간단한 콘크리트 골조에 짧은 방향으로 각각의 교실사이에 벽돌에 채워지고 긴 방향으로는 창문을 내어진 구조 시스템이다. 예상되는 지진에 취약한 방향은 그 창문이 있는 긴 방향이다. 창문이 있는 쪽의 기둥은 원래 설계할 때 대부분 전체 교실의 높이로 설계 시공한다. 그러나 창문 때문에 벽체의 허리춤으로 기둥이 짧아진다. 짧아진 기둥은 지진하중을 그 만큼 크게 받는다. 짧은 젓가락은 긴 젓가락보다 휘기 어려워 그 만큼 자기 능력보다 힘을 많이 받아 먼저 파괴되는 이치와 같다. 이 같은 학교 교실의 구조는 일본, 대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대만은 몇 년 전 큰 지진 발생 후 학교건물의 내진성능 확보를 위해 대대적으로 학교건축에 대해 내진성능을 파악한 작업을 수행했다. 현장 조사와 실험결과 지진하중처럼 옆으로 밀어보니 기울기가 얼마 되지 않아 폭삭 무너졌다. 이러한 경향은 구조 시스템으로 보면 골조가 지진하중에 적절하지 않고 철근 콘크리트 기둥과 보에 적절하게 철근이 배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내진설계기준에서 정한 지진하중에 대한 건물의 기울기에 대한 값에 비해 반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거의 유사한 우리나라 학교 건물에서 우선 학교 건물의 긴 방향에 대한 적절한 내진보강이 시급하다. 하지만 내진 보강은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며 할 때 제대로 해야 한다. 현재 학교건물의 시공은 대개 중소기업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기술의 도입과 질에 대해 제3자에 의해 검토가 필요하다. 먼저 전국적인 실태조사가 필요하며 반드시 전문가가 해야 한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구조공학자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봉사하는 자세로 참여해야 한다. 데이터를 취합한 후에는 정부에서 내진보강의 우선순위를 정해 추진해야 한다. 또한 과정은 우리 아이들에 대한 안전 확보를 위한 것이므로 모든 면에 세밀해야 한다. 생각은 크게 하고 실행은 세밀해야 언제 닥칠지 모를 유사한 자연재해에 그나마 대비할 수 있다. 이러한 계획은 중장기적인 예산이 확보돼야 실행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이 이 밝은 미래의 첫날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사회를 흔히 포스트모던 사회라고도 한다. 그 이전의 사회를 근대사회라고 하며, 그 이전의 사회를 전근대 사회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사회는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를 거쳐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사회로 이행된 것이다. 그러면 서로 다른 이러한 사회의 특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전근대사회는 한마디로 마술적 세계관이 지배했던 사회이다. 즉, 전근대사회의 사람들은 세계가 정령(精靈)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옛날 사람들은 숲에는 숲의 신이, 별이 빛나는 하늘에는 신 혹은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런 그 무엇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누군가가 병에 걸리면 ‘악령’이 깃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마술적인 관념이 일상생활의 모든 곳에 내재되어 사람들의 삶을 지배했던 사회가 전근대사회이다. 반면에 근대사회는 한마디로 이성적 세계관이 지배했던 사회이다. 모더니즘의 사회가 등장하면서 근대 합리주의가 가장 먼저 해체해 버린 것이 이러한 마술적 세계관이었다. 모더니즘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이성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명함으로써 ‘탈(脫)마술화’를 추진하였다. 따라서 숲이나 하늘 그리고 인간 등은 더 이상 신비적인 대상이 아니라, 과학적 이성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는 물리적인 대상으로 변해 버렸다. 요컨대 ‘세계의 탈마술화’가 이루어지고, 결국 이성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 근대 합리주의 사상의 기본 패턴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모더니즘의 태도에 대해 부정적이다. 과연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이성에 의해서 제어되고 해명될 수 있을까? 인간의 삶은 이성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종종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감성에 의해서 지배되기도 한다. 그래서 혹자는 “비합리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것이다”라고 역설하기도 한다. 이처럼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성적 자아라는 미명 하에 거부당해 왔던 비이성적 신체․감각․감성을 해방시키고, 도덕적 자아라는 미명 하에 속박 당해 왔던 비도덕적 욕구․욕망․충동을 해방시켰다. 그리하여 감성의 복권과 더불어, 이성중심주의 사회에서 마음(mind)에 의해 배척받아온 몸(body)도 복권된 것이다. 사실 그간 이성중심주의 사회에서는, 감성은 이성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감성의 주체인 몸을 억압하고 학대해왔던 것이다. 우리가 굳이 전인적 인간관의 입장을 들지 않더라도, 과연 ‘몸’이 배제된 ‘영혼’과 ‘정신’만의 삶을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또한 ‘감성’의 개입 없는 ‘이성’만의 삶을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러한 식의 문제제기들 속에서 포스트모던 사회가 등장한 것이다. ‘마음’과 ‘이성’의 자리를 ‘몸’과 ‘감성’이 대신하게 된 것이다. 흔히 21세기 사회는 여성중심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측해 왔다. 왜 그럴까? 전술한 바와 같이 근/현대 사회는 이성중심의 사회인데, 이성은 차갑고 논리적이다. 그러나 감성은 따뜻하고 비논리적이다. 그런데 이성은 남성적이고, 감성은 여성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성중심 사회에서의 여성은 논리적으로 사유할 능력도, 진리를 발견할 능력도 없는 존재로 치부되어, 여성 그 자체가 남성에 의해 종속되고 폄하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몸과 감성을 더 중시한다. 즉, 남성적인 것보다도 여성적인 것을 더 강조하고 선호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페미니즘 철학은 여성의 복권을 주장한다. 최근에 들어 ‘정의’나 ‘논리’ 보다는 ‘배려’나 ‘보살핌’이 강조되고 부각되는 이유가 바로 ‘몸과 감성과 여성’의 복권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중심의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은 몸 중심의 사회 내지는 감성중심의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냉철하고 강한 것보다도 따스하고 부드러운 것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의미이다. 즉 이제는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중시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어쨌든 21세기의 포스트모던 사회는 이성만능의 근/현대 사회가 저버렸던 감성을 되찾은 시대이다. 단순히 되찾은 것만이 아니라, 감성은 창의성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창의성이 무엇보다도 중시되는 후기정보화 사회의 총아가 된 것이다. 우리의 초․중등 교육현장에서 감성을 중시하는 교육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국교대(교원대)총동문회 임원들이 18일 교총과 첫 간담회를 갖고 교원 정원 증원, 교원의 정치참여, 교권보호, 교대 통폐합 등 초등 교육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10개 교대(교원대)총동문회 임원들은 간담회에서 3년째 동결된 교원 정원 문제에 깊은 우려를 표하고 한목소리로 교원 정원을 증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준환 춘천교대총동문회장은 “자타공인 최고의 우수한 인재들이 교대에 들어오지만 그중 일부만 임용되고 나머지 아이들은 맨주먹으로 나간다”면서 “무엇보다 초등 교육여건 개선을 위해 교사 1인당 학생수를 OECD 평균에 맞춰 정규교원을 임용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행 공주교대총동문회 사무총장도 “교대는 특수목적대학으로 사관학교, 경찰대학이 100% 임용되는 것처럼 당연히 정부가 임용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마다 증가하는 교권침해 사건으로 인한 교원 사기 저하와 교권보호 문제도 집중 거론됐다. 신은초 한국교원대총동문회장은 “교육활동 중 사고가 났을 때 교사를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반면 마녀사냥 식 언론보도로 끝내 그 교사의 교육적 열정까지 무너트리는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면서 “교원의 교육활동보호법 제정 등 교권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 달라”고 주문했다. 전원범 광주교대총동문회장도 “학생인권조례는 교사가 교육현장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조례”라며 “반대로 교사를 위한 교사인권조례 제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원 정치 참여를 위한 활동을 교총이 적극적으로 해달라는 주문도 이어졌다. 박규선 전주교대총동문회 수석부회장은 “시․도교육감이 시․도지사와 러닝메이트로 선출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면서 “이것은 교육자치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으로 교총이 추진하고 있는 교원의 정치참여를 통해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고 했다. 교대의 최고 이슈인 교-사대 통폐합 문제도 논의됐다. 2009년 제주대와 통합된 제주교대 총동문회 문명자 사무총장은 “통합 이후 교대는 예산, 인사권 등을 모두 빼앗겨 사실상 공립만큼도 못한 국립이 됐다”면서 “우수 초등 교원 양성을 위해서는 교-사대가 통합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안양옥 교총회장은 “6․2 지방선거 이후 교육계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교총이 나아갈 방향을 잡는데 초등 교육을 위한 소중한 의견들을 기초로 삼겠다”면서 “교원 정원 증원, 교원의 정치참여 등 주요 현안 해결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앞으로 교대는 물론 사범대까지 교육계 의견 수렴을 위한 간담회를 정례화 하겠다”고 밝혔다.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일본을 돕기 위해 교육계의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교육청과 학교 차원의 모금운동은 물론이고 아껴 모았던 저금통을 통째로 기부한 학생부터 모금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나선 교장들에 이르기까지 훈훈한 소식들이 전해진다. 경기 과천 문원중 장준영 군(13·1학년)은 고이 모아왔던 저금통을 기부했다. 얼마를 모았는지 모르는 저금통은 깨지도 않고 통째로 지인을 통해 일본의 한 신문사에 전달했다. 장 군은 “TV를 통해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를 보고 아빠와 일본을 도울 방법을 찾다가 내린 결정”이라며 “일본을 돕게 돼서 가슴이 뿌듯하다”고 했다. 경기 안양에서는 일본을 돕기 위해 교장들이 나섰다. 교원, 학생이 참여하는 모임인 안양다지구협동장학회 소속 9개교 교장들이 비상 모임을 갖고 일본을 도울 방안에 대해 협의한 것. 장학회 소속 교장들은 각 학교에서 학생,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행사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기로 했다. 김기백 안양다지구협동장학회장(안양 근명중 교장)은 “가장 가까워 마음이 가는 일본의 엄청난 피해를 보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뜻을 모았다”면서 “조그마한 정성이지만 일본이 하루 빨리 정상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인천 미추홀외고는 학생회가 앞장서서 모금운동을 벌였으며 일본어전공 학생들이 일본의 피해를 알리는 사진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교총은 일본 대지진과 관련해 적극적으로 모금활동을 하고 있는 학생, 교사, 학교의 실천사례를 계속 모집하고 있다.(문의 02-570-5532~3) ◇ 성금 모금 = 한국교총, 조선일보와 함께 일본 돕기에 나선 기관․단체의 계좌나 ARS, 문자를 통해 참여할 수 있다.(ARS 1건 2000원, 문자후원 1건 5000원) ▲ 사회복지공동모금회(신한 140-003-865933) ▲ 대한적십자사(우리 1005-899-020202) ▲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하나 353-933047-32237, ARS모금 060-700-0770, 문자후원 #9599) ▲ 굿네이버스(우리 1005-301-611036) ▲ 월드비전(기업 082-015195-01-015) ▲ 구세군 대한본영(하나 939-1004-1004-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