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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최철자 여구회 회장이 17일 전주교대(총장 유광찬)를 방문해 발전기금 100만원을 기탁했다. ‘여구회’는 전주교대 9회 졸업생 중 전북권 교육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25명의 초등 여교사들이 교육정보 교류 및 활성화 도모 등 전북 초등교육진흥에 기여하기 위해 결성했다.
김태헌 한국교원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가 10일 정년퇴임을 기념해 교원대에 대학 발전기금 1000만원을 기탁했다. 김 교수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도 우수한 교사로 커나갈 수 있도록 장학금으로 써 달라”고 밝혔다. 1987년부터 한국교원대 교수로 재직해온 김 교수는 학생처장, 제2대학장, 한구인구교육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김원식 전남 나산중·고교 교사가 최근 뉴스메이커가 선정한 ‘2012 한국을 이끄는 혁신리더’로 선정됐다. 전 올림픽 국가대표 마라토너인 김 교사는 현재 교육과학기술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스포츠스타 명예체육교사, 달리기학교 무료강습, 마라톤 해설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영화 서울화계초 교장이 22일 건국대에서 ‘학교조직혁신의 결정요인에 관한 연구: 초등학교 교원의 사회연결망 특성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김 교장은 조직 구성원 간의 연결망 구조, 상호작용, 행위자의 특성 등을 살펴보고 수업, 학교운영, 학교조직에 있어 어떤 결정요인에 의해 혁신이 촉진 및 억제되는가를 밝혔다.
최수룡 대전비래초 교사가 최근 한국교육신문, 조선일보 등에 기고했던 교육현장 관련 칼럼과 에세이 등을 엮어 ‘맛있는 교단일기’를 펴냈다. 책에는 학교폭력과 인성교육 문제, 수석교사에 대한 정책 제언 등이 담겨 있다.
김범철 강원대 환경과학과 교수가 20일 한국하천호수학회 제24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한국하천소후학회는 국내 생물·생태를 비롯한 물 환경 전문가들이 참여해 하천, 호수, 습지 등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는 학회로 1967년 창립됐다. 김 교수는 강원대 환경연구소장, 청정강원21 실천협의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임기는 2년.
◇대변인 김문희(5일자), 홍보담당관 염기수(23일자)
어린 시절 시골마당의 멍석에 앉아서 옥수수를 먹던 추억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온 가족이 저녁을 먹고 풀잎을 태워 모기를 쫒는 연기를 쐬며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여름밤을 보냈었다. 라디오도 없었던 시절이라서 마을단위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을 주제로 이야기하다가 피곤한 몸으로 누워서 밤하늘의 은하수를 따라 별을 세며 하루를 보냈던 그 시절이 요즘의 도시생활 보다 더 정겨웠던 것 같다. 어쩌다 고향을 지나칠 때면 도로 옆에 원두막을 짓고 대학찰옥수수를 파는 임시로 만든 가게가 여기저기 보인다. 피서 철을 맞아 지나가는 차량이 멈추어서 가족과 함께 삶은 옥수수를 사서 먹는다. 그리고는 맛있다고 하며 옥수수를 담은 자루를 트렁크에 싣는다. 초여름부터 추석 무렵까지 몇 차례 옥수수를 판매하고 있다. 입소문이 퍼져서 전국에서 택배로 주문이 쇄도하여 현장에서 판매하는 것 보다 택배로 파는 양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TV에도 수차례 소개되어 괴산 장연의 대학찰옥수수는 없어서 못 팔정도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찰옥수수를 먹어 본 사람은 다른 옥수수는 맛이 없어 못 먹겠다고 한다. 매년 단골로 사가거나 전화로 주문하여 택배로 받아 삶아 먹는다고 한다. ‘대학찰옥수수’가 탄생하게 된 것은 1991년 이 고장 출신 최봉호 박사가 충남대학교에 재직할 당시에 신품종으로 개발한 옥수수(장연 연농1호)라고 한다. 개발했을 당시 찰옥수수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대학교수가 개발했으니 ‘대학찰옥수수’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굳어졌다는 이야기이다. ‘대학찰옥수수’는 일반옥수수(15~17줄)와 다르게 한 자루에 8~10줄로 알이 굵고 색이 희다. 차지고 고소한 맛에 껍질도 얇아 잇새에 끼거나 달라붙지 않는 특징이 있고 맛이 달다. 보통의 씨앗처럼 옥수수 알을 심어 재배하면 특유의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대학찰옥수수’를 개발한 최 박사님이 미국(오클랜드)에서 씨앗을 생산하여 국내로 보내와 농가에서 재배한다고 한다. 올해 재배현황은 약 2,600여 농가에서 재배하여 약 201억 여 원의 소득을 올릴 예정이라고 한다. 농학박사의 애향심으로 고향사람들은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대학 찰옥수수가 유명해 지자 인근지역으로 확산되어 재배되고 있다. 옥수수를 냉동처리를 하여 저온저장고에 보관하기 때문에 겨울철에도 냉동옥수수를 녹여서 쪄먹으면 그 맛이 제철에 먹는 것처럼 맛이 있다고 한다. 옥수수 작목반이 구성되어 생산하고 저온저장고도 괴산군청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현지의 이상기온으로 옥수수 씨앗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정년 후에도 연구를 계속하는 최박사는 미국에 거주하면서 대형농장에서 생산한 씨앗을 고향으로 보내주고 있다. 최봉호 박사의 공로는 인정해주어야 한다. 성품이 겸손하시고 애향심이 남달라서 매년 고향마을 경로당 어르신들에게 돈을 보내주셔서 잔치를 한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들린다. 이렇다 할 만 한 특용작물이 없던 농촌지역에 알맞은 ‘대학찰옥수수’라는 품종을 개발하여 보급함으로써 농가소득에 크나큰 보탬을 주고 있는 학자이다. 지역축제도 여러 차례 하였고 이제는 그 명성이 전국에 알려졌다. 피서 철에 송계계곡을 비롯하여 단양팔경, 청풍, 수안보, 문경새재, 쌍곡 등의 계곡을 찾는 피서객이 많이 사먹는다고 한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IC가 있는 곳이라 교통도 편리하여 오지마을 이었던 곳인데 이 고장 출신 농학박사의 남다른 애향심으로 살기 좋은 마을로 성장해 가고 있다. 농업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식량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우리의 토종종자까지 지키지 못하고 미국에서 역수입해오는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통일벼 품종을 개발하여 식량자원 확보에 크게 공을 세운 충주 소태면 출신 ‘통일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허문회 박사도 충주출신이다. 2010년에 작고하신 고 허문회 박사의 기념관이 조동리 선사박물관 안에 마련되었다고 한다. 고향땅의 기후와 토질에 맞는 찰옥수수를 개발 보급하여 고향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최봉호 박사의 기념관이 그 분의 고향집근처에 개관 될 날을 마음속으로 기대해 본다.
EBS 국제다큐영화제(EIDF) 개막작인 ‘불리(BULLY)’는 학교폭력 문제에서 ‘공감하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준다.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철저히 피해자 학생·학부모의 입장에서 학교폭력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관람을 마치고 나온 교원들도 “가슴이 무겁고 먹먹하다”고 소감을 전한 이유다. ‘변화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영화의 마지막 메시지처럼 학생․학부모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이 학교폭력문제 해결에 얼마나 중요한 열쇠인지는 우리나라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대전지역에서 학교폭력 발생 건수가 많았던 태평중(교장 김정옥)은 지난 4월부터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청소년 영화제작 모임’을 만들면서 학교폭력이 크게 줄었다. 이 학교는 학생선도위원회·학교폭력징계 처분 조치를 받았던 학생, 각 반에서 폭력 언행 가능성이 높은 학생 등 학교폭력 가능성이 높은 ‘위험군 학생’들로 모임의 80%를 구성하고, 이들 스스로 학교폭력 예방 영화를 제작하도록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3월 7건, 4월 5건이었던 학교폭력 발생 건수가 모임 구성 후인 5, 6월에는 각각 1건씩으로 줄어든 것이다. 허원준 지도교사는 “위험군 학생들이 영화 속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잘못된 행동과 모습에 대해 반성했던 것이 효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영화 촬영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 의식, 참을성, 약속․소속감 등 위험군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인성에 대해서도 배우게 됐다. 나중에는 학생들이 “우리는 학교를 대표해 영화를 만드는 팀이기 때문에 절대 징계 받는 행동을 하지 말자”고 서로를 설득할 정도가 됐다. 지난해 자살한 학생의 담임교사가 학교폭력 방조혐의로 불구속 입건돼 논란의 중심에 섰던 서울 S중의 경우 학생·학부모․교원을 대상으로 올해 상반기에만 30차례 이상 대대적인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실시해 학생·학부모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S중 교장은 “학교폭력 사안을 학생생활기록부에 기재할 일이 없을 정도로 지난해와 비교해 학생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예방교육도 교육이지만 친구의 자살과 검찰조사를 직접 받거나 지켜보면서 자신의 일처럼 모두 공감하게 된 것이 변화의 핵심이었다”면서 “아직도 학교폭력은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다른 학교 교원들을 보면 먼저 나서서 알려주고 싶을 만큼 안타까울 때도 있다”고 말했다. 20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범죄학대회’에 참석한 김일수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도 ‘공감’과 ‘공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 원장은 “우리나라는 구성원 전체가 범죄의 위험과 파장에 대해 공감하는 힘이 약한 사회”라며 “학교폭력 문제로 자살사건이 벌어진 뒤 흐지부지 대책이 되풀이되는 것은 해당 범죄의 심각성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힘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에서는 지난해 학교폭력으로 한 학생이 자살하자 모든 중고교에서 ‘추모의 날’ 행사를 열어 문제의식을 공유했다”며 “의식적으로 사회와 학교에서 공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눈물’의 의미 오늘도 나는 운다. 별것도 아닌데 눈물이 곧잘 나온다. 슬픈 이야기나 드라마를 보아도 그렇고 책을 보다가도 슬픈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눈물이 솟는다. 주변에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을 보아도, 병고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인생의 밑바닥에서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보아도,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해도 맥없이 눈물이 나온다. 슬프게 우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함께 동요되어서 눈물이 나온다. 왜 그렇게 눈물이 많은지 때로는 민망할 때가 있다.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것도 큰 병이다. 눈물을 절대로 안보이려고 노력을 하지만,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글썽 고이고 눈시울을 적신다. 인생은 눈물이다. 수감번호 333번의 여동생을 떠올리려니 갑자기 눈물이 난다. 1987년 6.10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수감 중일 때 촌로인 아버님과 면회를 갔던 그 기억은 또 나를 슬프게 한다. 군 제대하고 복학하여 대학 4학년 여름 우리 가족은 한가로이 청양고추를 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골마당으로 봉고차 한대가 들어오더니 여동생을 내 동댕이치고는 무심히 달아났다. 지금도 그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노사분규를 주도하던 여동생은 관리직 구사대에 의해서 헌신짝 같은 운명으로 시골에 격리된 것이다. 약자의 처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가끔은 나는 비운의 주인공인, 조광조, 정약용, 김옥균, 그리고 노무현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들이 이루려는 변혁의 역사가 미완의 역사로 끝난 것에 대한 통한의 눈물을 흘리곤 한다. 5.18 광주의 진실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그 광란의 주인공들이 아직도 이 신성한 땅에서 당당하게 고개 들고 사는 모습에 가슴 아파 운다. 정의가 실종된 사회를 살아감에도 눈물 흘리고, 아버님 산소 앞에서 당신의 삶이 얼마나 숭고했는가를 뒤 늦게 알고 통곡한다. 한 평생 안 늙을 것 같으신 어머님의 휘어진 허리를 먼발치에서 훔쳐볼 때 나는 가슴으로 도려내는 시린 아픔을 속으로 삼킨다. ‘인생은 흘린 눈물의 깊이만큼 아름답다’고 한다. 이 말은 ‘인간 고뇌의 깊이만큼의 그 눈물로 아름답게 성숙하는 게 인생이라는 뜻이다.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하고 어떻게 인생의 깊이 있는 내면의 이야기를 논할 수 있으랴.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가슴이 없어서, 매 말라서, 타인의 슬픔에 동요하지 않아서 그럴까? 그런 사람은 대개는 자기의 슬픔밖에 모른다. 인생 밑바닥까지 가 본 사람은 눈물의 의미를 실감한다. 하기야 극도의 슬픔의 한계에 도달하면 눈물은커녕 기가 막혀 멍하니 제 정신을 놓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나락에 떨어진 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사람의 아름다운 용기와 희망을 접하면 감격의 눈물이 솟아난다. 사람은 자기가 흘린 눈물만큼 인생의 깊이를 안다고 한다. 눈물보다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뇌의 그 눈물을 씻어버리고, 다시 바로 시작하는 용기와 투지이다.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도전할 가치가 있다. 눈물은 인생의 ‘깊이’이며, 나는 울보다.
漢字속에 숨은 이야기 (15) 제30회 런던 하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양궁여자단체전에서 7연패(連覇)의 위업을 달성했고 개인전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하는 낭보(朗報)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 한다. 남자단체전 4강의 감독이 모두 한국인이고 40개 참가국 중 12명의 한국인 감독이 활약하고 있다. 이(夷)자를 파자하면 大 +弓(활에 화살을 합쳐 형상화)한 글자인데 설문해자에 오랑캐(중국의 변방사람)이(夷)자로 되어있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큰활 이(夷)로 가르쳐야 한다. 은나라 갑골문에 나오는 동이(東夷)는 활을 잘 쏘는 민족으로 명판(明板)에 “夷人不盜”라 했고 夷는 仁也, 大也, 居也라 했다. 동이(東夷)는 君子 不死之國이라고 하여 우리민족은 동이(東夷)족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올림픽을 통해 증명해주고 있다.
교육감 징계 못한다고 ‘배짱’ 교육청 간부・교원고소는 ‘남의 일’ 교원징계 ‘시국선언’ 수순 또 밟나 김승환 전북도교육감은 23일 교육과학기술부가 학교폭력 가해학생 조치사항의 학교생활기록부 기재를 거부한 전북도교육청에 대해 특별감사에 착수하자, 특별(?) 성명을 발표하고 교과부를 비난했다. 김 교육감은 성명에서 “폭력사실 기재는 성장하는 아이들의 삶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낙인, 즉 주홍글씨를 새겨 넣는 반 교육적 만행이다”며 거부방침을 고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뿐만 아니다. 김 교육감은 “교과부 지침은 법이 아니고, 교과부 장관은 전북교원에 대한 징계권이 없다”며 개의치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김 교육감의 주장은 사실일까. 김 교육감의 말처럼 감사에 적발돼도 교과부는 교육감을 징계할 수는 없다. 선거직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공무원 징계규정에 따르면 교육감은 교과부의 징계 요청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행해야 하지만, 특별성명도 내는 특별한 교육감이 특별 사유를 내놓지 않을 리 없기 때문이다. 교육감이 비호하니 교육청 직원과 교원은 정말 ‘개의치’ 않아도 될까. 법령위반은 교육공무원의 ‘징계’사유다. 따라서 교육장이나 교육국장 등에 대한 징계권을 갖고 있는 교과부는 교육청 간부를 직접 징계할 수 있다. 국가공무원인 교원에 대한 징계권은 교육감에 ‘위임’한 사안이다. 교육감이 징계를 회피하거나 거부하면 직무이행 불복종으로 고발 조치되며, 판결에 따라야 한다. 김승환 교육감에게는 이미 전례가 있다.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사에 대한 교과부 징계를 거부했지만, 결국 지난한 재판과정을 거쳐 징계했다. 이 역시 같은 수순을 밟겠다는 뜻이다. ‘개의치’ 않을 일이 아니다. 김 교육감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지자체 교육수장으로서 그의 대처와 발언은 적절치 않다는 비난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교과부 배동인 학교선진화과장은 “헌법에 위배된다는 둥의 김 교육감 주장은 개인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교육감으로서 할 말이 아니다”라며 “헌법에 위배되고 아니고에 대한 판단은 대법이나 헌재가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전북교육청 홈페이지 교육정책 의견함에 최근 일주일간 김 교육감의 철학을 비판하는 글들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A 씨는 “자식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폭력가해자가 되는데 대학입시에서 불이익을 받는다고 기재하지 않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으며, B 씨 역시 "가해학생의 인권을 거론하면서 학교폭력을 막자는 것은 너무 한가한 이야기"라며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인식해 현실적이고 구체적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C 씨도 "학생부 기재는 학교차원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책"이라며 "모두를 위해 학교폭력 가해사실을 학생부에 기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2일 광주교육청은 고3학생에 대한 학생부 기재는 하기로 방향을 선회했고, 서울지역 대학입학처장들도 이날 계획대로 학생부 전형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그럼에도 23일 경기와 강원교육청은 “교과부가 지침이행을 강요하고 있다며 이 또한 폭력이자 보복”이라는 기자회견과 성명을 내놓았다. 교과부는 광주를 제외한 경기‧강원교육청에도 27일까지 시정명령 조치가 이행되지 않으면 감사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전북과 경기는 교과부와 고소고발로 인한 소송 7~8건의 소송으로 지난 2년을 소비했고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여기에 한 건 또 얹는 게 그들에겐 ‘개의치’ 않을 일인지 모르겠지만 현장 교원은 그렇지 않다. 전북의 한 교사는 “헌법학자 교육감은 헌법 들여다보며 자신을 변호하는데 소비한 지난 2년의 시간이 억울해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심산인 모양”이라며 “참 좋은 교육자이자 학자의 모범”이라고 꼬집었다.
세종시가 외국어 교육 열풍으로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국제고냐?, 외국어고냐? 하는 쟁점으로 말이다. 나름 이유 없는 논리가 어디 있겠는가? 지혜를 모아 희망찬 세종의 외국어교육이 착근하길 바라면서 몇 가지 제언을 해본다. 송인옥 성남고 교장은 “2013년도에 세종시에 외국어고등학교 설립시 관내 중학교 졸업생들이 외국어고등학교로의 쏠림 현상이 심해져 학교 운영에 어려움이 예상된다.”며 “다양성 확보, 공교육 강화, 세종 교육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국제고 설립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김학출 세종시교육희망네트워크 사무국장은 “외국어고 입시를 준비한 학생과 학부모를 고려하고, 이 지역의 교육예산은 이 지역 아이들에게 투자돼야 함을 고려해 당초 계획대로 외국어고가 설립돼야 한다”라고 했다. 신정균 교육감은 외국어고의 국제고 전환 움직임과 관련 “아직 결정된 사항은 없다”면서 “지역주민과 교육가족 등을 대상으로 충분한 의견 수렴과 어떠한 형태의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세종시와 세종시 교육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검토를 거쳐 신중하게 추진토록 하겠다”고 소회했다. 이 세 분의 논리에 나름 공감하면서 현장에서 영어를 강의하는 입장도 같이 피력해본다. 이제 세종시는 명실공이 특별차치행정복합도시다. 대한민국 중핵의 요람이다. 누가 뭐래도 정치, 교육의 본산인 셈이다. 따라서 모든 위상이 여타 시도와는 달라야 된다. 그리고 그런 위상에 맞는 외국어 교육 수준도 갖춰야 할 이유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청심국제고, 서울국제고, 인천국제고에 이어서 세종시에도 품격을 갖춘 국제고 설립이 위상에 걸 맞는 외국어 영재 교육, 귀국학생들을 위한 배려 교육, 영어가 국가 경쟁력이라는 사실 그리고 학생들의 미래에 대한 국제적 비젼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외국어고와 비교해 보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우선, 위상에 걸 맞는 외국어 영재 교육이 필요하다. 세종시는 이미 연기군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우수한 두뇌들이 하나씩 둘씩 모이는 종합 행정 복합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그에 걸 맞는 수준의 교육인프라를 갖출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세종특별자치시가 발전해 갈수록 학부모들의 영어에 대한 열망과 몰입교육의 필요성은 점점 커져만 갈 것이다. 이런 열망에 부응하고 향후 완전 자족기능의 세종시가 제 자리를 찾을 때 국제적 감각을 갖춘 외국어 인재를 포괄적 범위에서 선발․교육하는 것이 외국어고가 세종시만의 자원으로 선발하는 것에 비해 훨씬 경쟁력이 있다. 다음은, 귀국학생들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필요하다. 외국에 살다가 귀국하게 된 귀국학생(Returnee) 지도를 위한 연수가 필수적이다. 그들은 부모와 함께 외국에 나갔다가 그 곳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외국 문화에 익숙해져 있어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 경우엔 문화적 충격으로 인해 적응을 잘 못하고 있다.그들을 위해 현재 일부 학교에서 몇 몇 교사들이 특별학급을 운영하면서 지도하고 있지만,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관리 교육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들에겐 학교공부가 가장 어렵다고 하며, 언어, 친구관계, 학교질서와 규칙, 선생님과의 관계 등이 매끄럽지 못하다. 그렇다고 일부 부유층을 위한,국제적 유능인의 양성을위한길은 현실과 맞지 않다. 어린 시절부터 인재를 발굴하여 영재 교육이 필요하고 그것이 곧 헌법 제 11조의 상대적 기회 균등차원에서 합헌적이다. 외국어고에서 이들을 교육하기에는 현행 입시에 초점을 맞춘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적 감각을 키우기엔 많은 한계가 있다. 또한, 이미 영어는 국가 경쟁력이 되었다. 한국의 글로벌기업이 실질적인 영어공용화를 도입하는 이유는 기업의 생존이 영어경쟁력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가경쟁력도 영어경쟁력 강화에 예외일 수가 없다. 실제로 영어경쟁력과 국가경쟁력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세계 최고의 국가경쟁력을 가진 국가는 거의 예외 없이 영어공용국가이거나 국민 대부분이 영어를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는 ‘영어선진국’인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라 밖의 현실은 이런데 국내에선 아직도 ‘영어공용화’ 주장이 금기시되고 있다. 영어교육의 확대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영어는 해외와 직접 경쟁하는 사람들이나 필요하지 대부분의 국민들은 번역사와 통역사를 통해 영어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일부는 더 나아가 세계화 시대에 국가 정체성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영어를 국민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한국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행위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이들은 국제 현실에 걸맞지 않은 언어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요즘 글로벌기업에선 영어를 외국어로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입사시험이나 업무평가에서 영어능력을 기본능력으로 평가하고, 일상 업무도 영어로 처리하는 부서도 늘고 있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외국인 직원과 임원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일부 기업에선 영어가 한국어를 대체하고 있다. 경제학 차원에서 보면 영어모범국가들이 세계 최고수준의 국가경쟁력을 가진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우선 영어가 글로벌 지식경제시대의 개인과 기업의 경쟁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국제시장에서 영어를 하는 사람은 영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정보, 지식, 네트워크, 그리고 교육기회에 접근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제교육은 현재의 근시안이 아닌 미래지향적으로 볼 때 절실하다. 국제고는 귀국학생이나 외국인 자녀등을 위한 학교로 마련되고, 그리고 여타 다양한 학교를 국가가 설립하여 다양한 사고와 다양한 자질을 가진아이들을 다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제고는 외국어고와 다르게 국어와 역사 등을 제외한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한다. 이는 영어 소통 능력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다. 결국, 국제고의 장점은 국내에 머물면서 해외 유학생과 비슷한 환경에서 생활한다는 것이다. 국어, 역사, 제 2외국어 등 몇몇 과목을 제외한 모든 수업이 ‘완전 영어 몰입교육’으로 이뤄진다. 또한 일방적인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닌, 토론식 미국, 영국식 수업 체제로 운영된다. 학교에 따라서는 현지 고등학교 원어민 교사의 화상강의를 현지 학생들과 함께 듣기도 한다. 학교 안에서는 학생들끼리도 대부분 영어로 의사소통 한다. 따라서 외국어고와는 다른 환경에서 수업을 듣는다. 참고로 서울국제고는 영어듣기 평가로 Pass·Fail을 결정한 후 심층면접 , 청심국제고는 영어평가와 면접, 인천국제고는 이수능력평가, 부산국제고는 인문·사회능력평가 시험을 치른다. 각 학교마다 평가 과목과 방식은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큰 비중을 두는 것은 학생의 영어 능력 평가다. 이에 반해 외국어고는 중학교 교육과정 운영의 파행 때문에 영어면접이나 전문성 측정을 못하고 내신위주로 선발하다보니 일반계 고등학교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외국어 경쟁력을 위해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가 자명하다. 따라서 국제고가 설립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어가 사회전체를 개방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영어가 자유롭게 통용되면 외국인에 대한 수요도 높아지게 되고 외국인의 한국 거주 비용이 낮아짐에 따라 외국인의 공급도 늘어나게 된다. 외국인에 대한 우리나라의 개방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영어의 확대가 국내 그룹 간의 경쟁을 확대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행정 복합 도시인 세종시가 장차 한국의 중핵도시가 된다고 가정할 때, 세종시는 국제적 감각,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의 모든 저변의 문화를 수용하여 활력 있는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모두가 혁신(innovation)에 대해 떠들어 댄다. 혁신ㆍ혁신ㆍ혁신! 그런데 혁신이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혁신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다.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닌 현실 적용 가능한 의미의 혁신의 정의는 무엇인가? 나는 혁신을 주장하기 전에 가장 먼저 `죽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 상태를 죽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혁신을 주창한 교사나 학교경영자들은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르는 난감한 이야기를 두루뭉술한 문장과 어휘로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혁신의 구체적인 실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보통 혁신을 언급하면 `질문을 많이 하라` `의문점을 제기하라` `창조적인 생각을 하라` `도전적이 되어라` 등의 이야기를 해왔다. 이런 이야기는 학교가 소규모일 때는 실현 가능하다. 하지만 소규모를 넘어서 교육부가 되면서부터 교육 문화를 규정하는 `벽`의 두께는 점점 두꺼워진다. 구성원은 물론이고 교육부 자체도 벽을 넘어선 그 어떤 생각도 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이야기하는 `혁신`에 뒤처지면 안 되니 대부분의 학교들은 혁신을 시도한다. 컨설턴트에게 의뢰를 하기도 하고 인재 개발 프로그램 차원에서 트레이닝도 한다. 예를 들면 스위스의 유명한 국제 제약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는 `혁신 트레이닝`으로 유명한 미국 기업을 초청해 임원들 교육을 맡겼다. 혁신 트레이닝을 시작한 미국 기업은 곧 단 한마디도 제대로 먹히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제약회사의 임원들이 모두 50세 이상에 꼬장꼬장한 표정을 한 중장년층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혁신`이 무엇인지 알 필요성도 없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다들 앉아서 각자의 블랙베리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뿐이다. 혁신 강습과정을 마치 꼭 들어야 하기 때문에 앉아 있는 대학 학부의 교양과목마냥 앉아서 시간을 때우려는 임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교육계에도 "앞뒤가 꽉 막힌 중견교사들 이상의 사람들이 항상 문제다. 그들은 혁신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지금 이대로 현상유지만 하면 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변화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에게 혁신에 대해 질문하면 뻔한 대답뿐이다. `창조적인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등의 모범답안만 이야기한다. 문제는 `창조적인 생각이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며 어떤 질문이 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눈빛도 반짝일 수 있게 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해당하는 불만 토로`다. 무엇이 가장 큰 불만인지, 어떻게 하면 해소될 수 있는지, 경쟁학교에서는 어떤 혜택이 더 주어지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곧 봇물 터지듯 말은 쏟아진다. 변화는 필요 없다던 게으른 중견교사들에게 조차도 불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은 신선하다. 그렇다면 대답은 간단해진다. 모두가 간직하고 있는 그 불만들이 채택되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올 수 있다면 사람들의 참여도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젊고 열정으로 가득 찬 교사들에게 새롭게 변화된 학교를 만들기 위한 `학교 죽이기`란 엄청나게 매력적인 활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열정이 가득 한 사람들이 쏟아놓는 불만, 즉 `학교 죽이기`는 비전을 잃은 학교가 새롭게 재탄생하는 `윤회 기적`의 시작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죽고, 이 세상에서 죽은 자는 저 세상에 태어나며, 저 세상에 태어난 자는 저 세상에서 죽고, 저 세상에서 죽은 자는 다시 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윤회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동일한 사람이 계속해서 죽었다가 살아나느냐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영속적인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무아윤회를 주장하고 있다. 사람이 윤회에서 새롭게 태어날 때 그 모습은 항상 변한다. 육체에 있어서 연속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마음만은 흩어 지지 않고 연속한다고 한다. 정신과 육체의 양 측면에서, 연속하되 항상 변화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현생의 존재와 내생의 존재는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혀 다르지도 않는 윤회의 산물이다. 윤회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첫 단추는 `죽음`이다.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날 수 없음은 진리다. 윤회를 믿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그 존재를 깨닫기 위해서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학교를 어떻게 죽여야 하는가? 이 질문에 자유로운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지금 한국의 학교는 이처럼 기존의 시스템을 해체 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 상황에 대하여 그 누구도 반기를 든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물론 정도차이는 있을지 모르겠다. 기득권 비 기득권의 싸움이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공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영원히 사는 학교’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 죽이기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다. 즉 ‘현재 학교에 불만이 무엇인가?’로 시작하여 경영학에서 말하는 SWOT분석을 중심으로 학교의 ‘강점(strength)과 약점(weakness), 기회(opportunity), 위협(threat)'의 요소들을 규정하여 이를 바탕으로 전략 짜기를 한다. 중견교사 주도로 위.아래로 퍼지는 혁신을 유도하여 반발도 적고 효과도 큰 변화를 이끌며 자연스럽게 시너지효과를 창출해야 한다. 그래야 학교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내내 교사들의 명예퇴직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례로 서울시 교육청의 경우 세계일보(2012.8.8)에 따르면 2009년 649명이던 것이 2010년 795명, 2011년 853명, 2012년 1223명으로 나타났다. 전북의 경우도 전북일보(2012.8.9)에 의하면 2009년 125명, 2010년 173명, 2011년 175명, 2012년 218명으로 해마다 증가했다. 한국교총이 제31회스승의 날을 맞아 전국 초ㆍ중ㆍ고 교사 327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교원인식설문조사’에 그 답이 나와 있다. ‘명예퇴직 증가 원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94.8% 교사가 ‘교육환경 변화에 따른 어려움’이라고 답했다. 또 ‘어떤 교육환경 변화 때문이냐’는 질문에 70.7%가 ‘학생인권 조례 추진 등으로 학생지도가 어려워지고 교권이 추락해서’라고 답했다. 실제로 요 몇 년 사이 필자와 같이 근무했던 동료 여러 명이 교단을 떠난 바 있다. 정년이 5년쯤 남은 필자와 또래이거나 2~3년 선배들이었다. 그들 모두에게 답을 들을 수 없었지만, 수술 같은 신병으로 그만둔 선배를 제외하곤 위에서 말한 명퇴 급증 원인과 닿아있지 않나 생각된다. 분명한 사실은, 그만큼 ‘선생질’하기가 힘들어진 세상이라는 점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갈수록 좋아져야 하는 것이 순리인데, 어찌된 일인지 선생하기는 날로 어려워지고 있다. 예컨대 법률 제정도 없이 밀어 붙이는 교원평가제가 그렇다. 학교를, 교사를 보험회사의 설계사처럼 가시적 실적으로 재단하려는 교원 성과급이 또 그렇다. 거기에 학생인권조례다 뭐다 하며 대한민국 학교현실에 대한 사태 파악 못한 것들이 설쳐대 그로 인한 교권 추락까지 더해졌으니, 그걸 다 감당하며 자릴 지키는 교육경력 20년 이상(명퇴가능 조건) 교사들의 초인적 힘이 신기할 정도다. 그나마 다행인지 최근 화제가 만발한 학교폭력 문제 따위로 명퇴할 생각이 일어나는건 아니다. 그럴망정 수업시간에 자는 애들 깨우지 않고, 화장하거나 매니큐어 칠한 학생들 봐도 그냥 말로만 살짝 뭐라하고 넘어가야 무사할 수 있다. 그냥 0점 주라며 수행평가에 응하지 않는 학생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선생질’이라 해도 부인할 교사가 별로 없다. 명퇴한 교사들은, 아마도 그런 선생질을 하지 못한 강직함으로 똘똘 뭉친 제2의 페스탈로찌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올바른 교육관과 제대로 된 가치관 등 제 정신이라면 교사 하기가 그만큼 힘든 학교현실인 셈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없고 성적과 줄세우기, 강제적 방과후 학교와 취업에만 올인하는 학교에서 교사 역시 스승이긴커녕 그냥 ‘월급쟁이’일 뿐이라면 필자만의 억지스런 호들갑일까? 그러나 내가 학교를 떠나고 싶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글쓰기 지도 등 ‘존재감’을 예전처럼 가질 수 없게 되어서다. 젊은 학부모가 전화해 “백일장에 꼭 가야 하냐?”며 다그치듯 말하는 것에 그만 깜짝 놀라서다. 내 승용차에 태워 백일장 참가하는 학생의 버스표를 첨부하라는 탁상행정에 오만 정이 다 떨어져서다. 일각에선 배부른 소리한다며 비아냥댈지 모르지만, 30년쯤 선생하면서 지금 같은 열악한 학교 환경은 처음인 것 같다. 주당 수업시간이 되게 많았어도 국어교사더러 자격증도 없는 도덕과목을 가르치라 했을 때도 이런 ‘더러운’ 기분은 아니었다. 사표(師表)까지는 아니더라도 ‘천직’이라는 자부심만큼은 넘쳤기에 교사일 수 있었던 것이다. 천직이라는 교사의 자부심을 정년 단축, 개혁대상 등으로 송두리째 앗아간 원조가 이명박 정부는 아닐지라도 그것을 고착, 심화시킨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4년 동안 진행된 교사 명퇴 급증이 단적인 증거이다. 한국교총 설문조사대로 하면 이상만 앞서고 물색 모르는 이른바 진보교육감들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가시적 성과의 숫자 놀음이 교육의 본질은 아닐진대, 박 터지게 경쟁만을 부추기는 게 가르침의 본령은 아닐텐데, 그렇게 하라고 한다. 교사로서 지녀왔던 존재감이 자꾸 희미해져간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는 각급 학교에서 학생들을 직접 지도하고 있는 담임교사의 학생 지도를 위한 상담을 중심으로 한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고, 학교장의 담임 교사의 인사 운영 등 자율성을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담임교사 운영제도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였다.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과 면대면하면서 실제 지도를 하고, 가장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역할을 하며 동시에 ‘교과지도, 인성교육, 진로지도, 생활지도’ 등 교육활동의 중핵적 역할을 수행하는 각급 학교 담임교사의 역할과 기능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현재 일선 학교 담임 교사들은 정규 교수학습활동 이외에도 학적관리, 아침학습지도, 교내봉사활동, 조․종례, 생활지도 및 상담, 각종 행사지도 등 많은 업무와 책임을 지고 있음에도 별다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최근 교권추락, 학교폭력 심화 등으로 학급담임 일선 학교에서 담임 교사에 대한 기피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감안하여 이번에 담임 교사의 운영의 방향을 명확히 하고 그 역할과 기능을 초ㆍ중등교육법시행령 등 법령 개정을 통해 선진화하겠다는 취지는 만시지탄이긴 하지만 바람직한 정책 방향이라고 본다. 다만, 일선 학교 교육위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담임교사의 역할과 기능 강화는 단지 법령 개정 등 외재적 강화만으로 충분한 효과를 거두기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담임 교사의 역할과 기능 강화를 위해서 더 중요한 것은 일선 학교 담임교사들이 보람과 열정을 갖고 학생 지도에 충실히 임할 수 있는 다양한 지원적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또 각급 학교에서 학생 간 폭력, 교사와 학생의 갈등, 학생들의 학습지도, 교육관계, 진로지도 등 다양한 학생 고민 상담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담임교사의 수업 외의 행정업무 경감을 통해 상담시간 확보가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담임 교사의 수업 시수 감축을 위한 교사 증원과 전문 상담 교사와의 유기적 업무 연계 둥이 필요하다.또한 현재 11만원으로 동결중인 담임교사 수당을 인상하고, 담임 교사들을 승진, 전보, 포상, 연수 등 인사 상의 처우와 우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비담임 교사들에 비하여 담임교사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보람과 긍지를 갖고 근무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일선 학교 담임교사들이 보람과 자부심을 갖고 교직에 종사할 수 있도록 장기적으로는 학교안전사고 발생의 경우 ONE-STOP 시스템 도입, 담임 및 생활지도 업무경력 승진 가산점 부여 , 학습연구년제 대상자 선발 우애, 성과급 평가시 담임업무 평가비중(수업시수 및 담임업무 합산 기준) 상향 조정, 담임 교사의 일반 업무 경감 부여, 복수담임제 확대 및 증원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부여하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학교 폭력, 교권 추락 등으로 일선 학교에서 담임 교사 기피 현상을 완화시키고 담임 교사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의 다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계제에 유념해야 할 점은 ‘담임교사 운영제도 선진화 방안’의 담임 교사 우대책이 비담임교사의 역차별을 유발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근본적으로 담임 교사, 비담임 교사를 포함한 모든 교원들이 교직에 사명감을 갖고 학생 교육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보람 있는 교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여건 조성에 교육 당국은 물론 전 국민이 지혜와 뜻, 그리고 마음을 함께 모아야 할 것이다.
오늘은 가을을 알리는 처서다. 가는 비가 내리고 있어 그런지 몰라도 더위는 한풀 꺾였다. 위세를 떨치던 더위도 때가 되면 물러갈 줄 안다. 이제 선생님들은 가르치기가 훨씬 수월해졌고 학생들이 공부하기가 훨씬 좋아졌다. 좋은 계절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가르치고 배우는 선생님, 학생들이 되면 좋겠다. 공자의 제자 중 자랑할 만큼 뛰어난 제자가 하나 있다. 그분이 바로 자공이다. 논어 학이편 15장을 보면 자공이 얼마나 부유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나중에 부유하게 되어 스승인 공자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정도였다. 자공은 자신이 가난할 때도 떳떳했고 부유할 때도 교만하지 않았다. 자공에게서 배울 점은 우선 아첨하지 않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면 배를 채우기 위해 아첨하기 쉽다. 그러나 자공은 그러하지 않았다. 이게 배울 점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도 굴하지 않고 아첨하지 않는 자세는 정말 빛나 보인다. 또 하나 배울 점은 교만하지 않는 점이다. 자공이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한 위치에 있어도 교만하지 않았다. 돈 좀 있다고 뽐내고 자랑하고 사치하고 남을 낮게 보고 자신이 최고인 양 교만하면 넘어지고 만다. 자공은 부유할 때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더욱 겸손했다. 감사하며 살았다. 남을 높일 줄 알았다. 이런 자세도 배울 만하다. 또 하나 배울 점은 많이 가지고 있을 때 자기만을 위해서 살려고 하지 않았다. 사랑의 손길을 베풀었다. 특히 자기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에게 은혜를 갚았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도왔다. 자기가 어려울 때를 생각하면서 어렵게 사는 이웃에게 눈을 돌릴 줄 아는 자공이었다. 이러한 점이 배울 만하다. 우리 선생님들은 물질면에서는 넉넉하지 못해도 지식에 대해서는 부유하다. 전문적 지식에는 부유하다. 선생님이 가진 것 나누어 줄 줄 아는 선생님, 자랑하지 않고 더욱 겸손하게 더 많은 것을 배워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는 선생님이 되면 학생들은 그럴 수 없이 좋아할 것이다. 또 한 가지 배울 점은 스승인 공자께서 자공에게 더욱 독려하는 것이다. 자공도 역시 사람인지라 자기도 모르게 스승인 공자께서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럴 때 주마가편(走馬加鞭)식으로 더욱 분발하도록 하였다.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셨다. 자공이 하루는 스승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난하여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여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떠합니까?” 이 질문 속에는 ‘선생님,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나를 좀 알아주십시오. 이 정도면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인품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는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 하는 욕망이 마음속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공자께서는 자공이 질문을 했을 때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분발하도록 하셨다. “좋은 말이나, 가난하여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이만 못하느니라”고 하셨다. 가난할 때 아첨하지 않고 부유할 때 겸손한 건 좋은데 가난하여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 예를 좋아하는 것이 더 낫다고 가르친 것이다. 가난할 때 즐거워하기란 어렵다. 부유할 때 예를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런 어려운 일까지 해낼 줄 아는 완벽한 인품의 사람이 되도록 더 노력하라고 하신 것이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족하고 즐거워할 줄 아는 것도 필요하고, 부유해도 겸손해할 뿐만 아니라 예를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나음을 가르쳤다. 아첨도 모르고 교만도 모르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고 행복을 찾으며 여유가 있을 때에도 윗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예의바른 사람이 되도록 공자께서 가르치셨다. 공자께서 옥석을 만들 때나 뼈나 뿔로 작품을 만들 때 들어가는 정성을 인성교육에서도 보이라는 말씀이 보석과 같이 빛난다.
지난 8월 11일부터 12일까지 대학동기 부부들이 충남 서북부지역의 문화재와 자연풍경을 돌아봤다. 어디인들 소중하지 않은 곳이 있을까만 코스를 정할 때 되도록 고속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문화적 가치에 비해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여행지를 우선시했다. 짝짝짝!!! 런던올림픽 축구경기 동메달 결정전.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트집삼아 바다 건너편에서 괜히 열을 내고 있던 때라 경기 내내 TV 앞에서 마음 졸였다. 우리의 태극 전사들이 투지를 불사르며 2:0 승리를 이뤄낸 덕분에 날밤을 새웠어도 정신이 멀쩡했다. 청주를 출발한 일행들이 경부고속도로와 21번 국도를 달려 처음 찾은 곳이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추사고택이다.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건립했다는 추사고택은 조선후기의 실학자로 서예가를 대표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고택은 솟을대문의 문간채ㆍㄱ자형의 사랑채ㆍㅁ자형의 안채ㆍ추사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이루어졌고, 왼편의 야트막한 산 아래에 멋들어진 소나무가 만든 풍경이 아름다운 추사 선생의 묘가 있다.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소박하면서도 품격이 느껴지는 사랑채와 화단 앞쪽 중앙의 석주가 맞이한다. 사랑채는 추사가 거처하며 친교와 예술 활동을 했던 공간이고, 해시계로 사용되었던 1m 높이의 석주에 '石年(석년)'이 새겨져 있다. 뒤편으로 돌아서면 벽에 걸린 주련과 낮은 굴뚝이 맞이하고 먼발치의 추사영실까지 담장이 이어진다. 안채는 안방ㆍ건넌방ㆍ대청이 배치돼 있고, 부엌의 천장에 다락이 설치돼 있다. 사랑채에서 안채로의 이동로,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로운 공간구조, 지붕의 부드러운 곡선미가 돋보인다. 안채 뒤편의 돌계단으로 연결된 작은 문을 들어서면 돌담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건물이 있다. 이곳이 추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추사영실이다. 추사영실(秋史影室)이라는 현판은 추사체의 제자인 권돈인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사당에서 바라보이는 고택의 야트막한 지붕들이 평화롭다. 추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장남으로 태어나 병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고 당쟁에 휘말려 떠난 제주도 유배지에서 추사 예술의 진수인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그렸다. 추사고택 곳곳에서 추사가 남긴 유물과 유작들을 만나볼 수 있다. 죽로지실(竹爐之室)ㆍ무량수(無量壽)ㆍ만수무강(萬壽無疆) 등의 편액이 방마다 붙어 있고, 추사의 글이 적힌 주련(기둥이나 벽에 장식 삼아 써 붙인 글씨)이 고택을 감싸듯 걸려 있다. 주련의 글귀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추사고택에서 백송으로 가는 길가에 돌담장이 둘러있는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 열녀문인 화순옹주 홍문(충남 유형문화제 제45호)과 묘막터, 조각공원이 있다. 김한신은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로 김정희의 증조부이고 화순옹주는 영조의 둘째 딸로 남편이 38세의 나이에 별세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의 길을 택해 정조가 열녀정문을 내렸다. 예산 용궁리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은 수령이 약 200년으로 높이가 14.5m 정도 되는 껍질이 하얀 소나무이다. 백송은 추사 김정희 일가의 상징으로 1810년경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추사가 필통에 씨를 넣어 가져와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것으로 전해온다. 백송은 번식이 어렵고 잘 자라지 않아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은 희귀수종으로 지상 50cm에서 갈라진 세 줄기 중 동쪽의 줄기만 외로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618번 지방도로를 40여분 달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의 서산마애삼존불상으로 갔다. 운산면의 고풍저수지 앞에서 좌회전하면 가까운 곳에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이 있다. 가뭄으로 물이 적지만 용현계곡에 피서객들이 많아 차를 주차하기 어렵다. 마애삼존불상은 용현식당 앞 산기슭에 있어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관리소를 지나면 강한 비바람을 막아주도록 큰 바위의 아랫부분에 부조로 조각된 삼존불이 백만불짜리 미소로 맞이한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아침에는 밝고 평화로운 미소, 저녁에는 은은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보여주는 백제시대 최고의 걸작이다. 계곡의 층암절벽에 여래입상(2.8m)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보살입상(1.7m), 왼쪽에 반가사유상(1.66m)이 조각되어 있다. 어느 위치에서 보든 개성이 뚜렷한 세 불상이 세상을 다 품은 듯 포동포동한 얼굴에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1400년 전에 조각한 불상의 자연스러운 생김새와 편안한 미소가 보면 볼수록 우리네 이웃을 닮았다. 불상 앞에 보호각을 세웠다 철거하는 등 그동안 마애삼존불상의 보존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중국과 교류하던 시절 백제의 도읍지 부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용현자연휴양림 쪽으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보원사지를 만난다. 보원사지는 불교문화를 꽃피운 절터로 보물로 지정된 석조, 당간지주, 5층석탑, 법인국사보승탑, 법인국사보승탑비가 자리를 지킨다. 마애삼존불을 나와 좌회전해 서산 방향으로 가며 고풍저수지를 구경한다. 삼거리에서 647번 지방도로로 좌회전해 직진하면 소떼가 풀을 뜯는 목장지대와 한우개량사업소를 지난다. 개심사 방향으로 좌회전한 후 목장지대 사이의 신창저수지를 지나면 운산면 신창리에 개심사 주차장이 있다. 주민들이 농산물을 파는 상가에서 산채비빔밥을 먹었다. 상가 끝에 몇 년 전에 세운 일주문이 서있다. 일주문이 세워진 후에도 개심사의 진짜 분위기는 계곡 옆 산책길을 지나 작은 돌덩어리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일주문을 대신하는 두 개의 돌에 마음을 씻는 동네와 마음을 여는 절 입구를 뜻하는 '세심동(洗心洞), 개심사입구(開心寺入口)'가 써있다. 산속에서 이보다 좋은 말을 어떻게 만나겠는가. 그런데 산책로를 공사 중이라 두 개의 돌이 사라졌다. 돌이 서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세심동 개심사입구'의 뜻을 되새겼다. 백일홍이 붉게 꽃을 피우고 맞이한 개심사는 수덕사의 말사로 651년(의자왕 11)에 창건되었을 만큼 역사가 깊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ㆍ영산회괘불탱화ㆍ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의 문화재가 있고, 굽은 소나무를 가공하지 않고 건축자재로 사용한 종루나 심검당이 볼거리다. 심검당의 벽면을 보고 있으면 기둥의 나무들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세상엔 속은 채우지 않고 겉만 화려하게 포장하면서 크기를 키운 것들이 많다. 하지만 개심사에서는 고즈넉한 연못과 작은 앞마당, 낮은 축대와 울퉁불퉁한 돌계단, 부드러운 곡선과 자연으로의 회귀를 배우는 화장실 등 공간에 어울리는 아담한 크기의 건물들을 만난다. 이렇게 작고 소박한 것들이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한다. 개심사에서 나와 서해안고속도로 해미IC와 가까운 해미면 읍내리의 해미읍성으로 갔다. 해미읍성(사적 제116호)은 원형이 잘 보존된 읍성으로 해안지방에 피해를 입히던 왜구를 막기 위해 조선시대에 건립되어 병마절도사가 청주읍성으로 옮겨가기까지 230여년간 충청도의 군사와 행정을 책임졌던 곳이다. 해미읍성도 다른 옛 성들과 같이 3년 이내 무너질 경우 책임을 지도록 공사를 맡은 구역에 고을 명을 새겨 넣는 실명제를 실시했다. 실명제 실시로 튼튼하게 성을 쌓은 읍성은 밖에서는 수직의 석성이나 안에서는 비스듬한 토성이다. 당시 내 고장 청주사람들이 이곳까지 와서 성을 쌓았다니 그 고생을 알만하다. 성문에 들어서면 수령 300여년의 회화나무(기념물 제172호)와 옥사가 눈에 들어온다. 해미읍성은 선조 12년(1578) 충무공 이순신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고, 약 3천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로 처형당한 순교성지이다. 1790~1880년대에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의 머리채를 회화나무 가지에 철사줄로 매달아 고문했다. 옥사에서 나와 민속가옥을 지나면 동헌이다. 외삼문과 동헌, 객사와 내아를 둘러보고 뒷산으로 올라가 송림과 성벽을 따라 걷는 것도 좋다. 송림 옆 정자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더위를 식혔다. 서문 밖으로 가면 순교성지를 알리는 '순교현양비'와 병인 대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자리개질로 처형했던 사형도구 '순교 자리개돌'이 있다. 광천IC까지 서해고속도로를 달려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의 갈매못성지로 갔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자리 잡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갈매못은 1866년 병인박해 때 프랑스인 다블뤼 주교와 장주기 요셉 등 500여명이 처형된 곳이다. 갈매못성지가 우리나라 유일의 바닷가 순교성지가 된 사연이 있다. 고종의 국혼을 앞두고 한양에서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면 국가의 장래에 이롭지 못하다는 무당의 예언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오천의 충청수영으로 보내 사형을 집행했다. 형장은 바닷가 모래밭 수군들의 훈련장이었는데 부근에 암매장 되었던 유해는 명동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975년 순교지가 확인되며 순교비가 세워지고 성지가 조성되었다. 이곳에 순교성인비, 순교터 표석, 예수성심상, 기념전시관, 승리의성모성당 등이 있다. 오천항은 주변의 산과 섬들이 방파제 역할을 해줘 폭풍의 피해가 없고, 조수간만의 차에 관계없이 선박의 통행이 자유로운 서해안 천혜의 항구로 조선시대 충청수영이 있어 군선이 정박하고 수군이 주둔하던 곳이다. 오천항 바로 옆 산중턱에 왜군의 침범과 이양선을 감시하던 오천성이 있다. 오천항에서 홍성군 서부면의 남당항까지 40번 국도를 달리면 보령방조제, 천북굴단지, 홍성방조제를 지난다. 남당항은 가을철이면 해마다 대하축제가 열릴 만큼 해산물이 풍부해 주변에 횟집이 많고 안면도가 바라보이는 해안경관이 아름답다. 이곳의 신토불이횟집 (041-632-8000)에서 푸짐한 회와 소주를 앞에 놓고 여행의 피로를 풀며 올림픽 여자배구 동메달 결정전을 시청했다. 일본에 패해 아쉬웠지만 4위도 대단한 성과이기에 기분 좋게 술잔을 부대며 "위하여"를 외쳤다. 인근의 숙소로 향하며 첫째 날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가방에 집착하는 여자 나는 가방을 참 좋아한다. 그렇다고 비싼 명품에 집착하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세상 일에 미련이 많아서일까? 저장 본능 같은 것이 마음 속 깊이 내재되어 있어서 그런 걸까. 단골 마트에서 물건을 일정 금액 이상으로 구입하면 가방을 보너스로 얹어주는 행사를 할 때면, 몇 번을 망설이다 기어히 사고 마는 집착을 보인다. 물건 자체보다도 가방에 마음이 끌려서 충동 구매를 하는 편이니 고쳐야 할 태도이다. 그렇게 해서 받은 여행용 가방을 아들에게도 주고 딸아이에게도 주었다. 친구들 모임에 가거나 직장의 친목 모임에서 여행을 갈 때에도 가장 먼저 챙기는 물건이 가방이다. 제자의 주례 부탁을 받고 제일 먼저 준비한 것도 가방이었다. 심지어 딸아이가 색다른 손가방을 가지고 다니면 자꾸 예쁘다며 아이들처럼 귀찮게 하곤 한다. 그렇다고 쓰지 않고 둔 가방을 버리거나 쉽게 처분하지도 못한다. 그 가방에 얽힌 자잘한 이야깃거리까지 같이 버리는 것같아서이다. 가방에 대한 이런 집착은 어렸을 때 제대로 된 책가방을 가져보지 못한 탓이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마치 모유를 제대로 먹지 못한 아이가 손가락을 빨거나 특정한 물건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처럼 나도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의 파랑새, 새 어머니 가방에 대한 나의 이런 애착은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어머니의 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30년이 넘은 어머니의 작은 옷가방. 그것은 새어머니가 우리 아버지와 재혼하면서 가져오신 참 작은 가방이었다. 그 어머니는 3년 동안 홀아버지와 삶을 이어가던 우리 집에 찾아온 파랑새였다. 쉰을 넘긴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면 철없는 딸아이 대신에 따스한 저녁 밥을 지어놓고 아버지의 지친 어깨를 보듬어 준 여인이었으니 우리 집의 희망이었던 새어머니는 파랑새가 분명했다. 다만 어린 나에게는 그것이 늘 서럽고 불만이었지만 적어도 아버지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등불이었던 어머니. 그 어머니는 가로 세로 50센티미터에 깊이는 10센티미터 쯤 되는 연하늘색 작은 손가방 하나를 가지고 우리 집에 오셨다. 45년이나 지난 그 가방의 모양과 색깔, 심지어 지퍼의 위치까지 장기기억의 저장고에 정확하게 기억되어 있으니 놀라울 뿐이다. 그날은 칠월칠석이었는데 비가 참 많이 왔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놀려댔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에 결혼을 한다면서. 나는 그날 샘통을 부리면서 방 아랫목에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어른들의 농담을 들으며 괜히 슬퍼했다. 사람들이 나의 친엄마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어린 마음에 슬펐던 것이다. 나이 많고 가난하고 볼품 없는 남편을 사랑한 어머니 어머니는 그 손가방을 무척 소중히 하셨다. 내 손이 닿지 않을만큼 높은 시렁에 올려놓으셔서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몰랐다. 어머니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손가방을 갖고 싶어서 욕심을 부리곤 했지만 어머니는 늘 높이 올려 놓고 구경조차 시켜주지 않으셨다. 가난한 아버지를 따라 두 번째 시집을 온 어머니. 내 어머니와 헤어지고 3년 동안 홀로 나를 기르시던 아버지와의 만남은 동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만큼 금슬이 좋으셨다. 아버지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어머니는 아버지 마음 하나보고 사신다며 아버지의 얼굴때문에 싸우거나 탓하는 소리를 듣지 않고 자랐다. 하얀 피부에 곱상한 얼굴을 가진 어머니는 손재주가 좋으셔서 뭐든지 잘 만드셨고 음식 솜씨도 일품이어서 얌전하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솜씨가 좋으신 어머니는 나를 가르치는 데도 엄격하셨다. 그때 겨우 초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음식을 하실 때면 곁에 세워놓고 설명을 하시며 요리법을 가르치고 솜씨를 가르치셨던 어머니였다. 초등학교 3학년에게 살림 가르친 독한(?) 엄마 "옥순아, 아직 어린 너에게 일을 가르치고 음식 만드는 법까지 배우게 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울지 모르지만 네가 커서 성공하여 다른 사람을 부릴 때에도 네가 알고 시키는 것과 모르고 시키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단다. 그리고 여자가 부지런해야 살림이 모이는 법이다. 밥태기 하나라도 구정물에 버리면 죄 받는다. 음식이 귀한 줄 모르고 함부로 하는 것은 아주 나쁜 짓이지. 너희 아버지가 일터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해서 벌어온 돈으로 사들인 쌀인데 한톨이라도 버리면 되겠냐? 자고로 여자는 엉덩이가 가벼워야 하는 법이다. 어디 가서 놀면서 해넘는 줄도 모르면 안 되지. 시집을 가더라도 시댁에 가면 제일 먼저 설거지통을 가까이 해야 한다." 열살 남짓한 어린 내가 알아 듣지도 못할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게 읊으시던 어머니의 신부 수업(?)은 그렇게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어머니는 야박하리만큼 나에게 일을 가르치셨다. 설거지를 해놓으면 밥 그릇 둘레를 손가락으로 만져 보시며 행여나 덜 씻어졌나 확인하시곤 했다. 어머니 맘에 들 리가 없던 어린 소녀는 그런 엄마가 팥쥐엄마 같았고 나는 콩쥐라고 생각해서 늘 몰래 울고 다녔다. 그런데 어머니에게 듣던 잔소리를 내 딸아이에게 그대로 반복하는 내 모습이 튀어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웃곤 한다. 오히려 딸아이를 아낀다며 잔소리 대신 내가 다 해주는 바람에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하는 것같아 부끄러운 생각이 들곤 한다. 그 당시에는 시집올 때 혼수품목으로 재봉틀이 손꼽혔지만 가난한 신부였던 어머니는 재봉틀 대신 손으로 옷을 잘 지으셔서 옷도 잘 만들어 입으셨고 내 옷도 잘 지어주셨다. 바느질 솜씨와 요리 솜씨가 뛰어난 어머니는 얌전하셔서 살림 밖에 모르셨으니 아버지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그런데 그 어머니는 성질이 급하셔서 느려 터지고 고집도 센 나와 정반대라서 그게 문제였다. 그래도 어머니께 느리고 고집부린다고 매라도 맞으면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눈물을 감추는 지혜로움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얻곤 했다. 내가 울고 있으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할 것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나더러 영리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걸 보면 미련퉁이는 아니라며 동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추켜 세워 주시곤 했다. 이제 생각하니 우리 부모님은 '미녀와 야수' 커플이었던 것같다. 마술이 풀리지 않고도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하며 가난하고 볼품없는 외모를 가진 쉰을 넘긴 한 남자를 극진하게 사랑한 어머니. 가난한 남편의 수입을 쪼개어 쓰던 어머니는 살림의 지혜가 빛났던 분이었다. 어쩌다 소고기 한 근을 사 오면 그것을 볶아서 시원하게 갈무리하여 일주일 동안 아버지의 조반상에 조금씩 국으로 끓여 내놓는 현명한 부인이었다. 아끼고 모으는 전형적인 아내의 모습을 내게 보여주셨던 어머니의 모습을 은연중에 나도 배우고 있었다. 외모로 보아서는 여자들의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아버지의 외모는 젊어서 병치레로 얼굴 중에서 외모를 결정짓는 잘 생긴코 모양이 정상인들과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미남이셨던 아버지가 젊어서 병을 얻어 코를 상하신 후 인생을 포기하려고까지 하실만큼 치명적이었다. 철없는 나도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부형 총회 때 아버지 얼굴을 보고 친구들이 놀려대는 게 싫어서 늘 숨어버리곤 했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엄마들이 학교에 나오는데 우리 집에서는 다른 집 아버지들보다 훨씬 나이 들고 코 모양까지 보통 사람들과 달랐던 아버지가 학교에 오시는 날은 복도 쪽을 내다보느라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던 철없는 딸이었다. 오직 친구들의 놀림이 부끄럽고 싫었던 초등 학생이었던 나에게 아버지의 자상함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선생님을 존경한 멋진 아버지의 교육 방법 학교에서 회의가 있거나 선생님의 가정방문이 있는 날은 일도 나가시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주신 아버지의 교육열은 박수를 받아 마땅했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를 부끄러워한 불효자식이었다.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신다고 하면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잉어튀김을 하여 술상을 차리게 하셨고 소풍을 가는 날에는 아버지가 즐겨 피우시던 아리랑 두 갑을 꼭 싸서 갖다드리라시던 아버지. 아버지가 가장 많이 고개를 숙이던 유일한 분은 나의 담임 선생님이셨다. 어렸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우리 선생님인 줄 알았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아버지도 꼼짝 못하고 인사를 공손히 하는 분이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교직이나 선생님을 우습게 보거나 자식들 앞에서까지 선생님을 험담하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었다. 심지어 중학교를 시험을 쳐서 가던 그 시절에 아버지가 원하는 중학교에 원서를 내야 진학시킬 수가 있으니 도시로 원서를 내면 좋은 중학교에 합격이 되더라도 집안 형편상 학교를 보낼 수 없다며 발이 닳도록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설득을 하시면서도 내 앞에서 선생님을 원망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이제 생각하니 아버지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선생님을 그처럼 위하고 존경했던 것이리라. 결국 나는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도시 학교로 원서를 낸 선생님의 뜻대로 입학시험을 보았고 합격했으나 진학하지 못한 채 가방끈이 짧은 인생을 시작해야 했다. 초등학교(그 때는 국민학교)시절에는 책가방이라기보다는 책보자기가 전부였다. 친구들의 멋진 빨간 책가방이 부러웠던 초등학교 시절, 그리고 멋진 교복을 입은 여중학생이었던 친구들이 가지고 다녔던 의젓한 책가방은 부러움을 넘어 집착으로 변질되었으니, 사춘기를 지나던 소녀의 가슴 속에는 '나도 배우고 싶다'는 간절함이 나를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주경야독의 길을 찾아 서울 길을 떠날 때 어머니는 가장 아끼는 물건인 그 손가방을 선물로 주셨다. 어머니의 손때 묻은 손가방 속에는 책 몇 권과 성경, 속옷 한 벌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나를 집안을 일으키는 기둥으로 여기셨고 서울로 돈을 벌러 떠나는 나를 보내시며 하염없이 우셨던 1974년 5월 8일. 20개월 동안 식모살이를 하며 월급을 모아 세 식구가 살 전셋방을 얻어 고향으로 내려오던 날, 나는 어머니의 손가방을 몇 배나 큰 가방 속에 담아서 귀향했다. 그 어머니가 가르치신 대로 주인 집의 살림을 잘 해냈고 알뜰히 모은 월급으로 강의록을 사서 독학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젊은 날의 내 가슴 속에는 늘 어머니의 손가방과 내가 갖고 싶었던 책가방이 있었다. 젊어서 고생한 덕분에 잘 이겨낸 세월 비록 친구들처럼 당당하게 정규중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주경야독의 길로 돌아와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었다. 그렇게 공부한 결과 공무원 시험을 합격하였고 한 발 더 나아가 통신대학 학사 과정을 마치고 교사 자격증을 획득하였으며 순위고사를 치르고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까지 얻었다. 교단에서 내려서는 그날부터는 가장 좋아하는 분야의 박사 학위에 도전할 생각이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배우는 자로 살고 싶다. 나는 아직도 책가방을 소중히 하며 살아가고 있다. 퇴근 후에는 도서관에 들러 독서 활동을 하곤 한다. 서점에다 주문해 둔 새 책을 책가방에 넣고 다니며 어린 시절 부족했던 책가방에 대한 포만감을 느껴보는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이승의 문을 지나 먼저 가신 저 세상에서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슴에 안으신 채, 언젠가 만나게 될 추억의 손가방을 들고 나를 기다려 주시리라. 나를 낳아주신 친어머니가 내 육신의 어머니라면 길러주신 어머니는 나를 가슴으로 낳아주신 분이다. 친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지만 새어머니는 늘 내 눈물샘을 자극하는 분이다. 그 어머니가 가신 음력 3월 보름에는 어머니가 그토록 소중히 하셨던 그 손가방과 꼭 닮은 가방을 하나 사야겠다.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나에게 인생의 희망을 걸고 지극히 믿어주셨던 어머니의 비원을 담아주셨던 그 손가방 덕분에 나는 아직도 살아있는 동안 생각을 갈고 닦는 일에 목말라 하는 지도 모른다. 늘 채웠다가 비우는 연습을 하며 주인의 의지에 따라 용도가 바뀌는 손가방. 어머니는 비록 나를 몸으로 낳아주시지는 못했지만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나를 끔찍히 아끼신 분이었다. 그 마음을 담아 슬픈 서울 길에 당신을 대신하여 딸려 보낸 손가방에 마음을 담아 나를 지켜 주셨던 내 어머니! 먼 후일 어머니를 다시 만나는 그 날, 지상에서 제대로 하지 못한 딸노릇을 다하렵니다. 그 때는 어머니, 당신의 손가방에 제 마음과 영혼, 가슴까지 가득 담아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겠습니다. 생전에 드리지 못한 말, "사랑해요! 내 어머니! 그리운 내 어머니! "
23일 마산제일고 강당에서는 전교직원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6대 박근제 교장의 취임식이 있었다. 박근제 교장은 마산제일여중 교장으로 근무하다20일 학교법인문화교육원(이사장 이학예)의 인사발령에따라 취임식을 하였다. 학교장은 학생들과 전교직원들에게 학교 발전을 위해 노력 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