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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최근, 9월 초부터 실시되는 대학 수시모집을 앞두고 입시설명회가 이어지고 있다. 하물며 수도권 소재 일부 대학의 경우, 지방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1학기 기말고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일찌감치 일선 고등학교를 직접 방문하는 대학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 토요일 수도권 소재 여러 대학이 연합하여 실시한 입시설명회에 다녀왔다. 이날 설명회는 일선 학교 진학교사 및 고3 수험생 그리고 수험생을 둔 많은 학부모가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각 대학에서 설치한 부스에서는 수험생을 위한 일대일 상담까지 이뤄져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얻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수시모집에서 학생부 종합전형의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자신의 수준에 맞는 대학 선택이 그만큼 중요하게 되었다. 이에, 대학에 대한 정확한 입시 정보가 곧 대학 합격과 연관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인지 입시설명회에서 많은 정보를 직접 듣고 궁금한 사항을 알려는 수험생과 학부모의 관심이 남달랐다. 이날 설명회는 각 대학의 입학처장이 제한 시간 내 2017학년도 대학입시 전반적인 내용(학교소개, 모집인원, 전년도 입시결과, 장학제도, 취업률 등)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대학관계자는 맺음말을 하면서 구체적인 입시요강은 배부한 책자를 꼭 참조해 달라고 당부했다. 설명회가 진행되는 내내, 하나의 정보라도 더 얻기 위한 수험생과 학부모의 관심도 뜨거웠지만 한 명의 학생이라도 더 유치하려는 대학 측의 열정 또한 대단했다. 학부모는 책자를 펼쳐가며 전년도와 달라진 내용에 밑줄을 그어가며 설명회 내용을 빠짐없이 적었다. 그리고 고3 수험생은 중앙 스크린에 비치는 PPT자료를 휴대폰으로 연신 찍었다. 사실 중소도시는 수도권 대도시보다 대학 입시설명회의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래서일까? 한번 입시설명회를 개최할 때마다 수험생과 학부모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는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입시 책자나 입시학원의 정보보다 입시설명회에 참가한 대학관계자의 말을 직접 듣는 것이 알짜정보를 얻을 수 좋은 기회라며 입시설명회가 개최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는 학부모도 더러 있다. 수험생과 학부모는 입시설명회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심리를 갖고 참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일부 대학의 경우, 단지 많은 학생을 유치하면 된다는 생각에 사실이 아닌 내용을 속된 말로 뻥튀기하여 과장 홍보하기도 한다. 따라서 수험생과 학부모는 대학의 이런 검증되지 않은 정보에 현혹되어 입시에서 낭패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3학년 담임을 연임하면서, 입시설명회에서 대학 관계자의 말만 믿고 지원했다가 낙방한 사례를 자주 보았다. 그러므로 수험생과 학부모는 대학입시 홍보를 단지 참고로만 해야지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거기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 본인이 떠안아야 하며 그 누구도 그 피해를 보상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대학의 입시설명회가 단순히 대학 홍보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학 측은 입시설명회에서 대학의 입시요강에 대해 정확한 정보만을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게 전달해 줄 필요가 있다. 수험생 입장에서 중요한 것이 자신의 적성과 수준을 고려한 대학과 학과 선택인 만큼, 대학은 대학 측에 유리한 입시제도만을 고집하지 말고 교사와의 간담회 및 학부모와의 질의응답을 통해 대학이 필요로 학생이 어떤 학생인지를 분명히 피력하고 그런 학생들이 지원할 수 있도록 주문해야 한다. 입시설명회를 통해 알게 된 정보도 중요하겠지만, 학생들은 최종 대학과 학과를 결정하기 전에 진학상담 교사와의 충분한 상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학생부 종합전형에서는 모험이 통하지 않는 만큼 수험생은 대학 홈페이지 및 입시책자 그리고 입시학원 등의 모든 정보를 꼼꼼하게 따져보며 자신에게 유리한 대학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여건이 된다면, 자신이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입학한 모교 선배의 조언을 들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입시설명회가 끝난 뒤에는 나중에 생길 궁금증을 생각하여 참석한 대학 관계자의 연락처를 알아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 입시설명회에서 얻은 많은 정보가 대학 합격을 위해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입시설명회의 너무 지나친 ‘정보의 홍수’는 오히려 수험생에게 혼선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입시설명회’ 잘 이용하면 자신에게 약(藥)이 될 수 있지만 잘 못하면 오히려 자신에게 독(毒)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수험생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챙길 것은 챙기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입시 전략(戰略)이 필요하다. 입시설명회 이것만은 알고 가자 - 생기부를 가지고 가라. - 궁금한 내용을 사전에 적어가라. - 설명회장 안내도를 사전에 숙지하라. - 가능하다면 부모님과 동행하라. - 앞자리에 앉아 경청해라. - 필요한 정보를 사진에 담아라. - 설명회 중에 실시하는 특강을 들어라. - 대학에서 마련한 입시요강 책자를 꼭 챙겨라. - 끝난 뒤, 확인서를 꼭 챙겨라.
인간의 삶은 경기에 자주 비유되고 있다. 신약성서의 사도바울도 "경기장에서 여러 선수들이 달리지만 우승자는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모르십니까?"라고 비유하고 있다. 이 세상은 큰 경기장이다. 다양한 경기가 이뤄지고 있다. 그 가운데 세계인들의 관심을 끄는 종목이 축구이다. 지금 유럽에서는 유로 2016이 열려 많은 사람들이 이 경기에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축구팬의 주목을 끈 경기는 미대륙 최강자를 가리는 코파 아메리카 센테나리오 결승전이었다. 승부차기 끝에 아르헨티나팀이 칠레에 패한 것이다. 이 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한 메시가 은퇴를 선언을 한 것이다. 그는 개인 통산 네 번, 그리고 최근 3년 연속으로 메이저 국제대회 결승전에 오르고도 매번 준우승에 그친 데 자책하며 더는 대표팀에서 뛸 자신이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하여 메시에게 결정을 번복해 달라는 자국민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어느 학교 선생님이 그에게 보낸 편지가 화제가 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학교 선생님이 대표팀 은퇴 선언한 메시에게 보낸 감동의 편지 핵심 내용은 "영웅인 당신, 우리 아이들에게 이기지 못하면 포기해도 괜찮다는 선례를 남가지 말았으면..." 하는 내용이었다. 그 어느 유명 인사의 은퇴 번복 요청보다 더 가슴을 울리는 한 평범한 선생님의 편지 한통이 최근 아르헨티나 언론을 통해 소개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작은 마을 비알레에 거주하는 요아나 푹스는 페이스북에 게재한 편지를 통해 "나는 선생님이 돼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를 향한 학생들의 존경심은 그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에 미치지 못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그 아이들이 지금 영웅이 포기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당신을 지치게 만든 일부 아르헨티나인들의 어두운 면을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대표팀 은퇴는 당신을 욕하고 깎아내리는 그들에게 굴복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처럼 승리의 가치만 느끼고 패배를 통해 성장하는 가치를 무시하는 어리석음에 넘어가지 않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푹스는 "아이들에게 이기는 것만이 우선이고 유일한 가치라는 선례를 남겨선 안 된다"며, "아르헨티나의 어린아이들이 인생의 목적은 다른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해선 안 된다. 당신이 어린 시절부터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며 오늘의 메시가 됐는지 잘 안다. 성장 호르몬 결핍이라는 병을 앓은 당신이 어린 나이에 고통스러운 주사를 몇 대나 맞아야 했는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대표팀에서 은퇴하면, 이 나라의 아이들은 당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지금의 당신처럼 가족은 물론 부와 명예까지 있는 사람이 졌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한다면, 오늘도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가치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호소했다. 푹스는 이어 "나는 학생들에게 메시를 얘기할 때, 당신이 얼마나 멋지게 축구를 하는지 가르치지 않는다"면서, "아이들이 메시에게 배워야하는 건 경기장에서 보이는 화려함이 아니다. 아이들은 경기에서 프리킥으로 단 한 골을 넣기 위해 당신이 같은 장면을 수천번이나 연습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유니폼을 벗어선 안 된다. 모든 팬들이 당신에게 승리만을, 우승만을, 트로피만을, 메달만을 바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제발 우리 아이들에게 2위는 패배라고, 경기에서 지는 게 모든 영광을 잃게 되는 일이라는 선례를 남기지 말아달라"고 설명했다. 끝으로 푹스는 "진정한 영웅은 패했을 때 포기하지 않는다. 진정한 영웅이라면 이길 때는 같이 이기고, 질 때도 혼자가 아니라는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니 당신이 우리나라를 대표할 때만큼은 리오넬 메시가 아닌 아르헨티나 그 자체라는 마음으로 대표팀에 남아줬으면 한다. 결과와 관계없이 사랑하는 일을 하며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위대한 우승인 것"이라며 글을 마쳤다. 이처럼 한 선생님의 메시지는 SNS를 타고 저 넓은 세상에 퍼져나가고 있다. 한 선생님의 소망이 이뤄질 것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이 선생님이 강조한 가치를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면서 아이들 앞에 패배는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슴에 담아 두고싶다.
기증 받은 어린이 신문 얼마나 읽혀지나? 학교에 들어오는 기증용 어린이 신문을 주말 과제로 읽히곤 한다. 시골이라 신문이나 잡지를 가까이 하기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읽는 책만으로는 왕성한 호기심을 채워줄 수 없다. 글을 읽기 시작하는 1학기 말이 되면 1학년 아이들의 지식욕은 엄청나다. 가히 폭발적으로 뇌폭풍이 일듯 책을 들이키는 모습을 본다. 이때 어린이 신문을 읽게 하면 무척 즐거워한다.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어 하는 절정적 체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양한 지식을 섭렵할 수 있는 재료로 어린이 신문의 위력을 체감한다. 교실에 모아두었다가 읽히려고 아껴둔 자료를 소개해 올린다.각 학교마다 어린이 신문을 기증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그분들의 마음과 기대만큼 기증된 어린이 신문을 잘 읽히는 학교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제발 읽히지도 않고(주말과제로 나눠주기라도 했으면!) 종이 재활용함으로 넣지 않기를 비는 마음이다. 여기 우리 1학년 학생들에게 읽힌 조선의 위대한 선비, 정약용의 자식 사랑의 흔적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귀양길에서도 자식을 염려한 지극한 부성애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시대 실학을 완성한 인물이다. 당시 서양의 학문에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를 보이며 ‘목민심서’와‘경세유표’ 등 실학과 관련한 500여 권을 후세에 남겼다. 그는 전남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두 아들(학연ㆍ학유)과 제자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올해 다산 서거 180주기를 맞아 이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1학년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이라서 읽어 보게 한 내용이다.(2016. 4. 12. 소년한국일보 참고함) “어린 너희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독서뿐” 어렸을 때부터 ‘다독가’였던 다산은 자식들에게 늘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유배지에서 둘째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내가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오직 열심히 독서하는 일 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독서만이 기초 소양의 근본을 두텁게 쌓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는 기초 소양을 다지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미 없는 독서는 경계했다. 깨달은 바 없이 마구잡이로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그러면서 책을 읽으며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으면 세심하게 연구해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몸 움직이는 것, 말하는 것, 얼굴빛 바르게 하는 것” 다산은 자식들에게 늘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일렀다. 올바른 몸가짐이 마음의 안정을 가져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스듬히 드러눕고 옆으로 삐딱하게 서고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몸을 움직이는 것, 말을 하는 것, 얼굴빛을 바르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지내라”고 말했다. 이 세 가지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다른 일에 힘쓴다면, 아무리 뛰어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도 올바른 길로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남의 도움을 바라지 말고, 먼저 도와줘라.” 다산은 천주교인이 되면서 유배를 당하고 중앙 정계에서도 배척당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바라지 말고, 먼저 도와줄 것을 당부했다. 남이 어려울 때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주기만을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또 남을 도운 뒤에는 다른 사람이 보답해주지 않더라도 원망치 말고 바로 미루어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산은 “나는 지난번에 이렇게 해 주었는데 저들은 이렇구나!”와 같은 말이 한번이라도 입 밖으로 나올 때에는 그동안 쌓은 공덕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소개하고 보니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매우 절실한 덕목들이다. 어쩌면 조선 시대보다 더 책을 읽지 않는 지금의 세태가 부끄러움으로 다가선다. 내가 기른 자식과 제자들이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책을 읽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며 마음이 무거워진다. 남을 돕기는커녕 조금만 서운하게하면 얼굴빛이 달라지고 가슴에 한을 품는 우리들의 모습을 질타하는 듯하여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도 내가 먼저 반성했다. 날마다 가르치며 내가 더 배우는 교직의 끝자락에 서서 더 잘하지 못한 회한에 반성문을 쓰는 지금. 아이들에게 나눠 주는 어린이 신문의 한 꼭지가 마음을 찌르니 평생 배우는 이 자리의 소중함에 감사하고 이 순간에 감사하며 7월 첫날의 교단일기 쓰기 숙제를 마친다.
산행을 하다 보면은 깊은 산속의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한 흔적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수 십 년이 지났음에도서 그 상처는 아물지 않도 남아 있다. 물자가 풍부하지 못햇던 필자의 어린 시절에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와서 송진을 채취해서 살아가야만 했던 옛 사람들의 힘들었던 삶을 생각해본다 . 하지만 송진재취에 대하여 거의 많은 분들이 일제시대의 수탈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사실 송진 채취는 1970년때 까지 이루어진 우리나라 산골 농가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힘들었던 세월...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후대들에게 들려줄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대한민국 이대로 가다가는 희망이 안 보인다. 아픈 과거를 돌이켜 보고 새 길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도 힘들다고 쓰러지는 청년들, 학생들의 모습을 잘 관찰하고 이들에게 도전하는 의지를 키우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퇴직을 하고 나서 1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간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재미있느냐고?" 그렇다. 삶이 재미있다. 여유가 있어서 좋다. 교장이라는 직책은 평상시에는 별로 중요한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만 보면 교장이 학교에 없어도 된다는 발상을 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교장의 존재가치가 약화된 것 같다. 교장의 가치가 약화되고 선생님의 가치가 존중되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는 학교의 가치가 같이 약화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얼마전 시골에 사는 쌍둥이 엄마가 하소연을 해왔다. 올해 중학교에 들어간 쌍둥이 아들이 1학기 중간고사 성적표를 받아왔는데, 둘의 평균점수를 합쳐도 60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꼴찌들에게도 희망이 있을까요?’라는 물음이었다. 원래 중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성적표는 앉아서 보지 말고 누워서 봐야 한다. 초등학교에서 느슨하게 교육시킨 어머니들이 지켜야 할 수칙이다. 점수에 신경을 안쓰고 지내다가 갑자기 중학교의 성적표를 받아 보면 놀라 뒤로 넘어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공부가 무엇인가?'물어야 한다. 지나치게 학교 성적 점수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예전과는 달리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성적의 사다리 보다는 성취를 지켜봐야 한다.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공부는 못해도 꿈이 야무져야 한다. 그런데 쌍둥이 중 큰애는 프로게이머, 작은애는 KTX 기관사라고 한다. 학교 시험 성적은 현재 얼마나 선생님이 가르친 것을 많이 기억하여 그대로 베껴내는 능력이다. 이것에만 만족하여서는 안된다. 앞으로 성적은 베끼기가 아닌 얼마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만들고 도전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핵심 문제는 이 과정에서 소통이 가능하는가이다. 질문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 조금 성적이 떨어졌다고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기가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성이다. 공부 못해도 인성이 참 좋은 아이들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인사도 잘 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 요청을 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응대를 하는 인간 관리 능력이다. 인성이 좋아야 협업이 가능하고 공감이 가능하다. 이 시점이 바로 시작점이다. 공부는 꼴찌여도 친구들보다 잘하는 거 하나는 있는가이다. 운동을 잘하든 악기를 잘하든 노래를 잘하든, 자신을 발견하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공부 잘하던 극소수 아이들은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시험으로 정해지는 자리에 가 있지만 나머지는 정말 예측 불허다. 세상을 좀더 넓게 보면 오히려 공부에 주눅 들었지만 저마다의 숨은 장점을 살려서 더 크게 성공하여 즐겁게 살고 있는 친구가 한둘이 아니다. 최근 더욱 다양해진 직업군 중에서 성적으로 차지할 수 있는 직업은 매우 한정적이다. 더구나 꼴찌에게는 이제 올라갈 희망만 남아 있지 않은가. 우리의 인생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부모가 해야 할 중요한 몫이다. 꼴찌에게도 얼마든지 기회와 희망이 있을 테니까.
야간자율학습 일괄 폐지 보도를 보면서 경기도교육감이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또’ ‘사고’를 쳤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또’라는 것은 이 교육감 재임 시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며 ‘사고’라는 것은 ‘학교의 여론을 수렴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을 말한다. 바로 교교 야간자율학습 폐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교육감이 하는 일은 그렇다. 어느 날 중학교 학생들의 건의를 받아 들여 ‘9시 등교’를 전격 시행했다. 몇 몇 학교가 반발했지만 곧바로 수그러들고 말았다. 인사권과 재정권을 가지고 있는 지방교육 수장의 무소불위 권력에 감히 도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야간자율학습 전격 폐지도 이와 같은 수순을 밟으리라고 본다. 즉, ‘9시 등교’처럼 교육감의 생각에 98% 이상의 학교가 쫓아가리라고 보는 것이다. 지난 겨울, 광교산 산행 중 중학교 교장을 만난 적이 있다.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 명퇴신청을 했다고 알려준다. 그 교장은 혁신학교 고교 교장(공모) 4년, 혁신 중학교 교장 2년차이다. 나이로 보면 정년퇴직까지 6년 이상이 남아 있다. 그런데 명퇴라니? 그는 말한다. “학교의 등교시각 하나 정하지 못하는 교장입니다.” 법으로 교장이 해야 일을 교육감이 빼앗아 간 것이다. 그가 명퇴를 신청한 이유는 이것만이 아닐 것이다. 건강이라든가, 퇴직 후 새로운 인생 출발, 가족과 함께 하는 전원생활이라든가 등. 그러나 그가 명퇴한 이유 중의 하나가 교직염증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교장이라는 지위, 아무나 오를 수 없는 중요한 자리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를 과감하게 내 던진 것이다. 필자가 가장 우려 하는 것은 그 교장의 ‘학습된 무기력’을 염려하는 것이다. 흔히들 교육자들은 자존감을 먹고 산다고 말한다. 제자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것도 이 자존감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존감이 무참히 무너졌을 때는 교직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교직에 있으면서 ‘학습된 무기력’을 경험했을 때 더 이상 교직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것은 교장, 교감, 교사 모두가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9시 등교’나 ‘자율학습 폐지’의 공통점은 학교의 자율적 판단이 철저하게 소외되었다는 것이다. 학교는 교육여건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학교의 구성원들은 교육감의 결정에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이게 자칭 진보교육감이라는 사람들의 교육정책 추진 방법이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나를 따르라’식이다. 이들의 행태는 진보가 아니라 구태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가장 편한 공직생활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자발성. 자율성, 창의성 없이 그저 상의하달로 내려온 것을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마음이 편하다. 상관으로부터 눈밖에 날 일이 없다. 그러나 학교 발전, 교육발전, 지역발전은 없다. 학교 특색도 발현할 수 없다. 침체된 조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경기도내의 고교 교장들의 고민이 깊어질 것 같다. 지금 현재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자율학습을 교육감 생각대로 폐지해야 할지 아니면 유지해야 할지? 교육감과 맞짱 뜨다가는 괘씸죄에 걸릴 수도 있고 야자를 그대로 유지하다간 눈밖에 날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간단하다. 교육적 소신을 접는 것이다. 교육감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자존감이 강한 교장은 명퇴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교 운영조차 교육철학을 반영할 수 없으니, 그렇다고 교육감과의 불편한 관계도 싫고 하여 명퇴를 택하는 것이다. 편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사는 방법도 있다. ‘9시 등교’는 역설적으로 출근 시간을 늦춰주어 행복한 아침을 만들어 주었다. ‘자율학습 폐지’는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어 준다. 이 얼마나 고마운 정책인가? 학생의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교육이 살아나려면 자존감이 충만한 교육자들이 있어야 한다. 자존감이 있는 교원들 아래에서 자존감이 있는 학생들이 자라난다. 학교 운영에 자율성이 있어야 한다. 지역여건을 고려한 교육이 제대로 된 교육이다. 교육감 혼자서 교육에 대해 고민하면 아니 된다. 교육감은 교원들의 무기력을 더 이상 습관화시켜서는 아니 된다. 현장 교원들의 생각이 존중되는 교육 정책이 아쉽기만 하다. 내년도 경기도 고교 교장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국가인권위원회가 학생들의 교내 휴대전화 사용 금지를 완화하라는 권고를 내놓은 것에 대해 학교 현장의 속내는 불편하다. 수업시간 외에 필요한 때만 사용하게 하면 괜찮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학교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는 게 교원들의 목소리다. 많은 학생들이 온종일 카톡, 문자에 열중하고 게임에 빠져 있는 현실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 여파가 학교라고 비껴가지 않아 교사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이런 문제를 막으려고 휴대전화를 수거·보관하는 과정에서 교사들이 겪는 고충과 부담은 만만찮다. 분실이나 도난사고라도 나면 배상 책임을 고스란히 져야 한다. 일명 ‘대포폰’을 내고 다른 휴대전화를 사용하다 적발돼 교사와 실랑이를 벌이면서 폭언까지 하는 교권 침해 학생도 비일비재하다. 일선 학교는 그야말로 ‘휴대전화와의 전쟁’ 중이다. 한국교총이 2013년 교원 3147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휴대전화로 수업방해가 심각하다’는 응답이 중학 교원 63%, 고교 교원 68%에 달할 정도다. 이런 문제는 외국도 마찬가지여서 영국 학교의 3분의 1이 교내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 문부성은 7년 전에 초중학생이 휴대전화를 갖고 등교하지 못하도록 전국 교육위원회에 지침을 내려보냈다는 게 교총의 설명이다. 학교는 가르침과 배움의 공간이다. 그 특수성 때문에 사회 통념을 일반화해 일방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학생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휴대전화 사용을 허용하라는 뜻으로 해석 돼서는 곤란하다. 운전 중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하듯 학교라는 특수한 환경에 맞게 사용을 제한해야 한다. 인권위는 과거에도 초등 일기장 검사 금지, 초등생 집회·시위 보장 등 인권에 치우친 권고를 내려 비판을 초래한 바 있다. 따라서 앞으로 교육과 관련된 결정을 내릴 때는 학교 현실과 교육적 측면을 함께 고려한 균형적 시각을 갖기를 촉구한다.
지난달 23∼24일 서울과 제주에서 2000여 명의 학교 비정규직이 파업해 150곳의 학교에서 급식이 중단되는 등 혼란을 겪었다. 급식실 종사자, 방과후 돌봄전담사, 교무실무사, 전문상담사 등이 참여한 파업은 강원, 경기, 전북에 이어 도미노처럼 전개되는 양상이다. 더욱이 이달에는 총파업까지 예고하고 있어 현장의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다. 일선 학교는 간편식 주문이나 도시락 지참, 빵·음료 등을 주문하고, 단축수업을 하거나 정교사들이 방과 후 수업을 담당하는 등 파업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학교는 교육과정을 수정하는 등 정상적인 학사운영에 차질을 빚었다. 교육현장의 갈등은 이뿐만이 아니다. 누리과정과 맞춤형 보육을 둘러싼 사립 어린이집, 유치원의 집단 휴업이 학부모들의 교육 불신으로 이어질까 우려스럽다. 더 큰 문제는 교육현장의 파업·휴업이 정부와 시도교육청의 정책·제도 변화에 출렁이며 갈수록 빈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학교 비정규직 문제는 교육감이 다수의 고용 주체라는 점에서 결자해지해야 한다. 교육감들은 학교 비정규직 문제를 부족한 교육재정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사실 학교 비정규직을 양산한 장본인은 교육감들이다. 학교 비정규직에 근무하는 사람도 한 가정의 가장이다. 비록 넉넉지는 않더라도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처우 개선이 수반돼야 교육에 헌신할 수 있다. 이들의 요구를 전향적으로 검토해 점진적으로 개선해나가는 것이 혼란과 불신을 막는 첩경이다. 동시에 교육현장의 파업과 휴업은 자제해야 한다. 어른들의 명분에 떠밀려 학생 교육이 멈춰서는 안 된다. 잇따른 파업·휴업을 딛고 더 굳건한 교육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정부와 교육감의 책임이 누구보다 막중하다. 상생과 협력을 끌어낼 수 있는 학교 안정화 대책을 조속히 마련하고 추진하길 기대한다.
최근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발표한 ‘2015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2013년 기준 9∼24세 청소년의 사망원인 1위는 놀랍게도 ‘고의적 자해(자살)’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10만명 당 7.8명에 해당하는 수치로 2003년(7.4명)보다 소폭 증가한 것이고, 운수사고(4.4명), 악성신생물(암)(3.1명)로 인한 사망보다 훨씬 높은 놀라운 결과다. 청소년 사망원인 1위 ‘자살’ 오명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벗기 위해 다양한 예방정책을 추진해왔고, 교육부도 매년 전국의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생정서·행동발달 선별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소년 자살 문제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청소년 자살문제의 원인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우리나라 특유의 입시 경쟁, 성적지상주의와 학벌사회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청소년 중 무려 39.3%가 자살충동의 원인을 성적과 진학문제라고 응답했기 때문이다. 대학입시를 위한 끊임없는 경쟁, 사교육을 통해 좋은 대학교를 나오면 출세할 수 있다는 사회구조적 문제가 깊게 깔려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가정교육의 부재다. 알다시피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대부분의 학생 뒤에는 문제 가정, 문제 학부모가 존재한다. 최근 맞벌이로 인해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가 적어지고 식탁에서도 각자 스마트폰으로 대화하는 삭막한 풍경이 만연하다.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물질적 지원에 급급하고 과잉보호로 자녀의 정신적 성장을 가로막는다.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심신을 단련시켜야 할 아이들은 게임과 스마트폰에서 위안을 찾고 있다. 학교폭력과 왕따(집단따돌림)도 주요 원인이다. 예전에는 학교폭력이 단순히 신체폭력에 국한됐지만 최근에는 점점 지능화돼 심부름, 은밀한 집단따돌림, 욕설, 조롱(놀림) 등의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친구집단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입시 개혁, 가정 회복 등에 힘 모아야 따라서 청소년 자살예방을 위해서는 이런 원인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입시위주 교육의 대개혁이 필요하다. 자유학기제 등을 통해 시험보다는 학생의 꿈과 끼를 키워주는 학교 만들기에 노력하고 있지만 입시 중압감을 해소하는 제도 개선이 같이 가야 성과를 낼 수 있다. 가정의 교육적 기능을 회복하는데도 모두 나서야 한다. 부모와 자녀가 식탁에 마주 앉아 대화를 자주 나눌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근로환경 개선에 노력해야 한다. 자녀교육에 서투른 부모들을 위해 학교나 지자체 등에서 부모교육프로그램을 적극 운영할 필요도 있다. 마지막으로 청소년 자살예방을 위한 전문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학부모, 교직원, 관리자, 지역사회 유관단체, 교육청 담당자에게 자살 위험 신호, 자살 위험 대처법, 자살 예방과 관련된 전문교육을 반드시 실시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자살 예후가 보이는 학생에 대해서는 학교와 관련기관(교육청·학교·청소년상담센터) 간의 긴밀한 연계와 협조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런 관심과 노력들이 사회적으로 모아질 때 청소년 자살률은 크게 낮아질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인성교육이 강조되고 있다. 무엇을 많이 알기 전에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지만 인성교육은 그렇게 좁은 개념이 아니다. 그냥 착해서만도 잘 살아 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뮤지컬 ‘빅터’가 주는 감동 작년 7월부터 인성교육이 학교 등에서 의무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교육부와 인성교육범국민실천연합은 인성교육 확산을 위해 2013년부터 ‘우수 인성교육 실천사업 공모전’을 시작했다. 작년 제2회 우수 인성교육 실천사업 공모에서는 세계 수재들의 모임 ‘멘사’ 회장 빅터 세리브리아코프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뮤지컬 ‘빅터’가 선정되기도 했다. 소설 ‘바보 빅터’에 나오는 주인공 빅터는 아이큐가 173인 천재다. 그런데 그는 청년기까지 무려 17년 동안 그 사실을 모르고 자신을 바보라 여기며 살아간다. 나중에 자신의 아이큐를 알고는 본인이 더 놀란다. 하지만 자신의 잠재력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던 시기 동안 그는 그저 바보일 뿐이었다. 아이큐는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상징하는 도구일 뿐이다.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느냐, 무시하느냐에 따라 발현될 수도 있고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빅터는 학창시절 아이큐 검사에서 ‘73’을 받았다. 돌고래와 같은 수치라 같은 반 아이들과 주변 사람 모두에게 엄청난 놀림을 당했다. 그때 빅터의 가능성을 본 친구가 바로 로라다. 자신도 늘 별 볼 일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던 로라는 빅터의 공책에 적힌 발명품 아이디어를 보고 ‘넌, 대단하다’며 그의 특별함을 일깨워줬다. 빅터 역시 작가를 꿈꾸는 로라의 습작 노트를 보고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칭찬했다. 그 순간 놀라운 변화의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빅터는 타고난 아이큐가 173이어서가 아니라 그를 알아봐준 로라라는 친구가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모두에게 무시당할 때, 한결같이 빅터를 감싸준 아버지도 감동적이다. 빅터를 위해 특별한 행동을 한게 아니라 ‘오늘 무슨 일 있었니?’ 관심 가져주고 ‘빅터는 뭐든 잘할 수 있을 거야’ 믿음을 보내준 것 뿐이다. 격려와 인정이 ‘기적’을 만든다 이렇게 아이를 변함없이 믿어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학교에서 받아온 시험 점수 하나에, 사소한 잘못에도 아이를 야단치고 주눅들게 만드는 게 현실이다. 물론 학교 공부도 중요하다. 하지만 아이가 세상을 향해 풀어낼 잠재력과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고 할 수 있는 일도 너무 많다. 그 누구도 자신의 기준으로 아이들을 재단하고 틀에 가둬서는 안 된다. 제 몫의 인생을 살아 내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런 점에서 평범한 우리들 누구나 친구, 선생님, 부모로부터 격려 받을 자격이 있다. 주변의 손가락질에 기죽은 청소년들을 보면 ‘너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절실하다. 뮤지컬 빅터는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필 평가 점수가 아닌, 아이가 가진 잠재력을 바라봐주는 눈과 기다림, 사랑이 필요하다. 오늘부터 힘들어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아들아, 딸아, 넌 잘 할 수 있어" 격려해보자. ‘작은 기적’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학부모 신청’ 3개 학교 불구 11개교 목표에 10개교만 지원 서울교육청이 올해 하반기 추가 지정을 위해 서울형혁신학교를 공모한 결과, 신청학교가 미달된 것으로 나타났다. 교원을 배제하고 학부모 동의만으로 신청할 수 있게 문턱을 낮췄지만 현장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지난달 28일 시교육청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 신규 혁신학교 지정 목표는 11개였지만 신청학교는 10개에 그쳤다. 이 중 학부모 동의만으로 신청한 학교는 3개교였다. 시교육청은 현재 10개교에 대한 현장 심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빠르면 8일쯤 지정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11개교를 신규 지정해 총 130개교 운영을 목표로 했는데 신청학교가 10개교에 그쳤다”며 “연 단위로 움직이는 학교 특성상 하반기 응모가 어려운 점이 있어 그런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작년 하반기 공모 때도 12개 목표에 10개 학교만 신청해 미달을 빚은 바 있다. 하지만 지난 5월 시교육청이 단위학교 전체 학부모의 25% 동의만으로 신청이 가능하게 요건을 완화했음에도 미달된 것이라 혁신학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들어 혁신학교를 경험한 교원들 사이에서 ‘학생 기초학력 저하’, ‘주도교사와 일반교사와의 갈등’ 등 부작용이 거론되며 "돈으로 하는 혁신이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부정적 의견이 늘고 있다. A중 교사는 “일부 혁신학교 교원들은 교육보다 예산 사용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데다 주도 교사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경우 빚어지는 마찰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며 “특히 학교 최고 책임자인 관리자의 의견이 무시되는 의사결정 구조에 회의감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는 갈수록 더 심화될 것이라는 게 현장의 우려다. 학부모 동의만으로 신규 지정 되는 학교의 경우 교원들과 학부모 간 갈등의 소지가 다분하고, 실제로 신청과정에서 몇몇 학교는 잡음을 빚었다. 또한 신규 지정 혁신학교에서 근무를 원하지 않는 교사에 한해 전보를 허용했던 인사방침을 내년 3월 1일부터 폐지하기로 한 것도 교원들의 불만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지적이다. B초 교사는 “시행 5년 동안 1000억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된 사업이지만 대다수 학교가 외면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일부에서만 환영받는 제도라면 중지하는 게 마땅하다”고 비판했다.
어제 저녁에 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언제나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만족을 준다. 시원함을 준다. 그래서 단비라 했던가. 비가 내리지 않으면 우리는 제대로 살 수가 없다. 행복한 삶, 풍족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고마운 비가 때를 따라 내려오니 정말 살기 좋은 나라다. 감사하다. 어제 인천을 가니 학교 담에 담쟁이가 엄청 많이 자랐다. 왕성함을 보았다. 그들의 인내를 보았다. 담쟁이가 우리 선생님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쟁이 줄기는 너무 가늘다. 힘이 없다. 우리 선생님이 그렇다. 너무 약하다. 아무 힘이 없다. 권력도 없다. 아무도 선생님을 강하다고 하지 않는다. 그래도 엄청 강하고 질기다. 담쟁이는 조금도 약함을 보이지 않는다.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다. 그러면서도 왕성함을 보여준다. 우리 선생님이 그러하다. 담쟁이는 인내가 필요하다. 담을 의지하며 자라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담에서 떨어지면 생명이 끝난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정성을 쏟는다. 우리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가르칠 때 온갖 어려움과 역경이 닥쳐온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는다. 인내하고 또 인내한다. 끝까지 인내한다. 학생들을 향한 열과 성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그리하여 많은 학생들을 왕성하게 한다. 담쟁이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담을 의지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하루도 몇 번이고 몇 백번이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날 것이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면 죽는다. 포기하면 이루지 못한다. 포기하면 얻는 것이 없다. 그래서 포기라는 것이 없다. 우리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일에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하루에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그래도 학생들을 향한 열정 때문에, 사랑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 게 성공의 비결이다. 이런 글을 읽었다. 19세기의 영국의 위대한 문학가인 찰스 디킨즈가 하루는 성공의 비결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고 “내 인생에서 하려고 했던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일들까지도 모두 열과 성을 다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결인 것 같습니다.” 담쟁이는 쭉쭉 뻗어나간다. 담이나 나무만 있으면 타고 나간다. 열악한 환경을 오히려 좋아한다. 평평한 땅에는 담쟁이가 자라지 못한다. 우리 선생님들은 언제나 연구하고 연구해서 날마다 지식을 더해간다. 실력이 향상된다. 교육의 환경이 열악해도 그것 탓하지 않고 오히려 잘 적응하며 나아간다. 그렇게 해서 학생들을 쭉쭉 성장하도록 가르치고 지도한다. 좋은 선생님은 언제나 자신을 내면적으로 살찌운다.
경기도교육감이 9시 등교에 이어 취임 2주년에 맞이하여 내년부터 고등학교의 야간자율학습을 전면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교육감은 “입시위주, 성적위주, 성과위주의 경쟁적 교육이 ‘야자’라는 이름의 비인간적, 비교육적 제도를 만들었다”며 “더 이상 학생들을 ‘야자’라는 비교육적 틀 속에 가두지 않겠다”고 말하고 그 대신 대학과 연계한 ‘예비대학 교육과정’을 도입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찬반의 논란 뜨겁다.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은 대체로 환영을 하고 있지만 중상위권 학생을 둔 학부모들은 반발이 거세다. 그들은 야간자율학습에 대한 뚜렷한 대안도 없이 학생들을 사교육 시장으로 내모는 정책이 아니냐고 비판하고 나섰고, 또한 많은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성적이 상대적으로 하향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사실 경기도는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 증가율이 전국에서 제일 높고 고교 2학년 학생의 기초학력 미달(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 비율도 높은 지역이다. 지난 2월 교육부와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경기도는 2013년 대비 2015년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 증가율(4.6%·1만2000원)이 전국 1위였다. 같은 기간 전국 평균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 증가율(2.1%·5000원)을 크게 초과한다. 뿐만 아니라 야간자율학습 폐지에 대해 학생에 대한 학교의 책무감을 저버린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경기도는 매년 실시하는 학업성취도평가에서 기초 학력 미달 학생 비율이 높은 지역이다. 지난해 경기 고2의 기초 학력 미달 비율은 5.4%로 서울(7.1%)에 이어 2위였다. 기초 학력 미달 비율은 이 교육감 취임 이후 더 높아졌다. 국어의 기초 학력 미달 비율은 2013년 3.8%에서 2014년 1.5%로 낮아졌지만 지난해 2.9%로 높아졌다. 같은 기간 수학은 6.6%, 7.2%, 7.4%로 계속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대안 없이, 학생, 교원, 학부모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수렴이나 공청회 하나 없이 일률적으로 시행하는 9시 등교와 같이 취임 2주년의 이밴트식 교육정책이라는 비난은 면할 수 없다. 그리고 야간자율학습 대신 ‘예비대학 교육과정’은 아직은 우리 교육현실에 맞지 않고 불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예비대학과정은 외국처럼 고교와 대학이 연계하는 교육적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우리의 현실은 당장 어느 대학은 입학하느냐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경기도만 시행한다는 점에서 실현성이 낮다. 현행 야간자율학습권은 단위학교의 학교장에게 있다. 야간자율학습의 폐지는 교육감이 일률적으로 결정할 게 아니라 학교가 자율적으로 맡겨야 한다. 교육감이 학교운영의 세부까지 하나하나 시시콜콜 간섭하는 것은 창의적인 학교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교경영은 지역, 학생, 학부모 그리고 교원들의 공동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학교가 처해 있는 여건이나 환경은 이들이 자세히 알고 있다. 바로 학교환경에 알맞은 교육정책이 가장 좋은 정책인 것이고 높은 교육성과를 걷을 수 있는 전략도 이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이번 야간자율학습 폐지에 대해 사설 학원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것이다. 반면 학부모들은 사교육비 부담에 걱정과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9시 등교 이후 또 다른 교육실험에 학교는 다시 혼란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서산 서령고(교장 김동민)는 6월 30일(목) 오후 일곱 시 양경미(한국평생교육아카데미원장) 강사를 초청, 교내 세미나실에서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공감과 소통으로 성공하는 자녀교육’이란 주제로 특강을 실시했다. 김동민 교장선생님께서는 30일 행복한 가정과 부모자식간의 유대강화를 위한 소통의 장이 되도록 학부모 특강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날 특강에서 양경미 강사는 자녀의 감정에 공감하는 법, 부모가 잘못했을 때 자녀에게 사과하는 방법, 부모의 인내와 끈기의 필요성, 자녀에게 말할 때 간단히 말하는 법, 경청하는 법, 칭찬하는 법, 뇌 교육의 효과와 실수에 대해 용서하는 방법, 자녀의 말에 반응하는 방법 등을 실제 사례와 자료를 활용하여 강의해 학부모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특강이 끝난 뒤에는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이 있었다.
▲ 서산시 석림동에 있는 천년된 은행나무(위쪽)와 표지석 충남 서산시 ‘남원’이란 마을에 수령이 무려 1000년이나 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곳 남원은 행정구역상 서산시 석남동에 속하는 마을이며 예전 사람들은 ‘남안’이라 부르기도 했다. 남원이란 옛날 원(院)제도에서 연유된 명칭으로 고려시대에 역과 역 사이에 두었던 관원(官員)들을 위한 국영여관이 있던 곳을 말한다. 실제로 남원마을은 이 지방의 교통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이러한 남원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 엄청나게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천년쯤 된 것으로 나무 높이는 30미터를 훨씬 넘으며 그 둘레만도 약 8미터나 되는 거목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나무는 서산 정씨(瑞山 鄭氏)의 시조인 원외랑 정신보가 송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귀화하여 이곳에 살 때 심은 것이라 한다. 서산의 위인으로 잘 알려진 양렬공 정인경 장군은 그의 아들인데 이곳에서 각종 무술을 익혀 고종 말엽에 침입한 몽고군을 크게 물리치는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그의 공로를 높이 사서 고려 명종 때 민란으로 인해 폐군시켰던 부성현(富城懸)을 서산군(瑞山郡)으로 개칭하여 복군시켜주기도 했다. 지금도 은행나무 밑 너럭바위에는 말발굽자국이 선명한데, 정인경 장군이 말을 타고 훈련하던 흔적이라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예부터 이 바위나 은행나무를 훼손하면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는 전설이 있다. 따라서 마을사람들은 매년 칠월칠석에 경건하게 제사를 올리고 마을의 안녕과 각자의 소원성취를 빌고 있다. 한편 남원마을 뒷산에는 원외랑 정신보가 산에 올라 멀리 고국인 송나라를 바라보며 그리워했다는 망운대(望雲臺)가 토성으로 축조되어 있고 건너편에는 그의 외손이며 호산록(湖山錄-서산읍지)의 저자인 한여현의 조부 한영희의 묘소도 있다. 남원마을 앞에는 ‘남안들’이라 불리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겨울이 되면 북쪽에서 수백 마리의 두루미가 무리를 이루어 날아왔으므로 ‘학도래지’라는 천연기념물 지정 표지석이 세워져있었으나 지금은 학이 찾아오지 않아 표석마저 없어져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쓸쓸한 마음을 안고 돌아오는 길, 천년수 은행나무 옆에는 채 1년도 살지 못하는 한해살이 풀인 벌개미취가 한여름을 재촉하는 바람에 가녀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찾아가는 방법 서산세무서 건물 앞마당에서 바라보면 바로 맞은쪽으로 천년된 은행나무가 웅장하게 서 있다. 리포터 김동수
슬프게도 이제 우리는 술과 담배, 컴퓨터 게임, 인터넷, 스마트폰, 야동 등에 중독된 아이들을 쉽게 만납니다. 중독은 나약한 의존적 성격 때문일까요? 유전자 또는 잘못 들인 습관 탓일까요? 도대체 왜 거의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걸까요? 강제로 끊게 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중독,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갈망 미국의 경우 고교생의 24%가 마약을 포함한 불법 약물을 사용한 경험이 있고, 약 9%가 물질 남용이나 의존현상을 보입니다. 한국에는 마약과 술 같은 물질보다는 컴퓨터 게임과 도박 등 행동에 중독된 경우가 흔합니다. 행동중독에도 물질중독처럼 뇌 보상 중추에서 도파민이 활성화되며 충동성과 인지적 오류가 개입됩니다. 통제 불능의 욕구도 똑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물질중독만큼 심각한 문제입니다. ‘마약이 아니니 다행’이라는 식으로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중독매개는 중독자의 의식과 의지를 지배하며 결코 자연스럽게 소멸하지 않습니다. 중독을 끊도록 야단도 치고, 격려해주거나 보상을 약속해도 별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문제입니다. 중독자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까요? 사람이 산길에 잘못 들어가서 헤매고 있다면 회귀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단초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중독 회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어떤 과정으로 중독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중독치료자 클레멘스 박사는 중독을 “생존, 특히 정신적인 생존을 위한 시도”이며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갈망”이라고 합니다. 일상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약물과 행동으로 의미 공백을 메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호기심이 작동되는 경우도 있지만 흔히 불안함과 슬픔 등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는 현실을 맞이하기 힘들 때,중독매개를 통해 피하거나 극복하기 위해서 시작합니다. 중독 회복을 위한 3단계 처음에는 중독매개 자체에서 얻는 쾌락을 좋아하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의 아픔을 피할 수 있음이 더 중요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중독자의 시야가 좁혀지고, 자신의 세계로만 더 집중되며, 타인과 세상은 멀어집니다. 중독매개는 중독자를 지배하며 중독자에게 유일하게 중요한 존재로 다가옵니다. 중독자는 점차 중독매개와 의존적 관계를 형성하고 이 외의 모든 것과 단절하여 유일하게 관계를 맺는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결국 중독매개가 삶의 우선순위 맨 위로 떠오르게 되며 세상에 대해 무기력하고, 환경을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다룰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며 궁극적 붕괴 상태가 됩니다. 즉, 중독에 빠져드는 단계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회복 역시 매우 구체적이고 순차적이며, 체계적인 단계와 절차를 거쳐야 가능합니다. 간단하거나 빠르거나 쉽지 않습니다. 크게 삼 단계를 거치며 장기전을 치러야 합니다. 1단계 _ 자신과 만남 먼저 중독자가 중독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약물로부터 차단된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회피했던 감정과 감각이 홍수처럼 밀려와서 절박하고 감각을 마비시키고 싶은 강한 욕구가 밀려오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매우 큰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서 혼자 회복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위험합니다. 2단계 _ 자신과 타인 지지를 해줘서 타인과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중독자가 타인으로부터 안전성과 안정성,신뢰를 확보해야 합니다. 3단계 _ 자신을 넘어 환경단체, 봉사단체 등 다양한 단체 활동에 참여해서 자신을 확장시키고 정체성을 성장시켜 나가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삶에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세 단계는 제가 칼럼에 여러 차례 소개한 바 있는 인성교육의 핵심인 자기조율, 관계조율, 공익조율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즉, 인성교육은 효과적인 중독 회복 방법인 동시에 중독 예방교육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독 전문가의 도움이 요원하니 모두가 다 함께 인성교육에 힘쓰면 좋겠습니다.
문학이라는 말은 항상 나를 살짝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어쩌다가 소설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지만, 정식으로 문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렇듯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치약이나 약 상자에 씌어 있는 사용법에서부터 광고 문구에 이르기까지 글자로 씌어 있는 모든 것을 허겁지겁 읽었으며, 특히 소설책이나 시집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일은 아니지만, 지속해서 일기 비슷한 것을 썼다. 내가 문학교육이라는 걸 받았다고 우기자면 아마도 이것이 전부일 것이다. ‘무엇이든 읽기’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쓰기’. 무엇이든 읽기 무슨 책이든 다 재미있다고 말했던가? 당연히 거짓말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랬다. 책이든 포장지든 가게 앞에 붙어 있는 간판이든, 글자로 씌여 있는 모든 것이 재밌었다. 처음으로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책은 아마도 교과서일 것이다. 수업시간 내내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들여다봐야 하고, 선생님이 읽으라는 부분을 읽어야 하고, 읽으면서 외워야 하고, 외운 것을 시험까지 봐야 하니까.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특히 독서는 자발적이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물론 기계적으로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일은 가능하다. 하지만 재미나 그밖에 아무런 보상도 없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흡수하기는 힘들다. 문학적 독서는 더더욱 그렇다. 학문을 연구하고 익히기 위한 독서는 아마도 체계적으로 그리고 누군가의 지도를 받아서 읽는 게 더 효과적이고 유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나 시를 읽는 방식은 순간적인 흥미나 직관, 혹은 우연을 따라가야 한다. 그게 더 좋은 방식이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설이나 시가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다가오지 않는다니 무슨 말인가? 오래전 카피캣(1995, 존 아미엘 감독)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 장면 대부분을 잊었지만, 오직 한 장면은 또렷이 기억한다. 주인공이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현관문 밖으로 단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해 괴로워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범죄심리학자이며 자신이 분석한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는 중이고, 실제로 피습을 당한 경험도 있다. 그래서 일종의 광장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 어느 날 자신을 협박하고 있는 범인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데, 마침 열려 있던 현관문 밖으로 서류가 날아가 버린다. 그녀는 서류를 쫓아가다가 문 앞에서 멈춰 선다. 한 발자국만 나가면 그 서류를 주울 수 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두려움 때문에 문밖으로 나갈 수 없다. 문턱을 잡고 몸을 구부려 손을 최대한으로 뻗어 보지만 복도에 떨어져 있는 서류에 닿을락 말락 할 뿐이다. 마침내 서류는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그녀는 무기력하게 그것을 바라본다. 앞뒤 상황을 훤히 이해할 수 있는 영화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면,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단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하는 그녀를 의지 박약한 무능력자, 패배자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현관문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딛으려고 할 때 마주하는 어려움은 보통 사람이 4~5m쯤 되는 벽을 기어 올라가서 뛰어내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막막함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의지가 아무 소용도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광장공포증 같은 비합리적 두려움이 있는 사람이 현관문 밖으로 나가려면, 보통 사람이 현관 밖으로 나가고자 할 때 필요한 의지보다 수십, 수백 배 정도 강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문학이나 예술이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는 의미를 이해했다. 말은 어렵지만 의미는 단순하다. 내가 아닌 남이 되어 보도록 하는 것. 내가 경험한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을 근거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든 것은, 현실에서는 ‘나의 입장과 상황’을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친밀해진 관계, 그래서 너와 내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인 사이가 아니라면 우리는 쉽게 타인의 입장이 되지 못한다. 타인이 ‘되어보려 하기’보다는 재빨리 어떤 범주 속으로 집어넣어 타인을 ‘파악하려 하기’ 마련이다. 문학이나 예술은 나에게 타인이 되어 보는 경험, 낯선 존재가 되어 보는 경험을 허락한다. 소설이나 시가 나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음악이나 미술, 영화 같은 형식은 시각이나 청각 같은 감각적 도구를 사용해서 더 직접적이고, 문학은 언어라는 지적인 도구를 사용하므로 더 간접적일 수 있다. 그 대신 언어는 매우 일상적인 것이라서 접근하기 쉬운 도구이기도 하다. [PART VIEW]생각나는 대로 쓰기 요즘처럼 볕과 바람이 좋은 때는 늘 창문을 열어 놓고 지낸다. 내 방 창문 바로 옆에는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동네 할머니들이 자주 나무 그늘 아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다. 화제는 다양하고 날마다 만나도 할 말은 늘 많다. 서로 남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자기 이야기 하기 바쁘다. 특별히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다. 주로 이웃의 흉을 보거나, 그마저도 바닥나면 어제 저녁에는 뭘 먹었고, 오늘은 뭘 먹을 예정이며, 그것은 어떻게 해 먹어야 맛있다는 이야기만으로도 몇 시간이 흘러간다. 그런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보면, 사람은 늘 하고 싶은 말로 가득 차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문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쓰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무엇인가를 쓰려고 하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말랑말랑하고 동그랗기도 하고 길쭉하기도 하고 끈적끈적하기도 한 이야기들이 단단하고 네모진 형태로 위축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결국 튀어나오는 것은 언젠가 어디선가 보았던 그럴듯하지만 밋밋한 글이다.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게 아니라 정해진 대로 쓰게 된다. 불타는 사랑에 바쳐지는 것은 언제나 붉은 장미이고, 세상을 등진 순수한 영혼은 늘 하얀 나비로 날아간다. 언어 자체가 보편성을 표상하는 도구이기에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문학은 보편적인 도구로 개별적이고 특별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숙명을 갖고 있다. 그래서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다. 어쨌든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누구나 다 경험하는 이야기 그래서 하나 마나 한 이야기는 별로 문학적이지 않다. 나만의 경험, 나만의 생각, 나만의 감정, 나만의 감각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아마도 문학에 가까운 작업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내가 아닌 타인을 경험하도록 만드는 것, 내가 경험한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문학의 목적이라면, ‘나에게서 비롯된 나만의 이야기’ 외에는 굳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는 과격한 결론도 가능하다. 나에게서 비롯된 이야기란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의 기준은 다를 수 있겠지만, 나의 기준에서 가장 재밌는 글은 몰래 훔쳐보는 남의 일기이다. 요즘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과 공유하는 인터넷 게시판이나 소셜네트워크에 너무 사적인 이야기를 쓰면 ‘일기는 일기장에’라는 비난의 말을 듣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가장 독창적인 글쓰기는 내밀한 사유와 감정을 고백하는 부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글을 쓰려면 자유롭게 느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이 가장 필요하다. 모순된 이야기 같지만,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자유가 억압당할 때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가장 커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 앞뒤가 맞지 않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이 문학이 되어 버리면, 문학은 이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라는.
이제 곧 방학이다. ‘교사의 방학’은 일반 회사원이나 행정직 공무원들에게는 부러움의 극치이다. 연차·월차 이것저것 다 끌어와도 기껏 일주일 정도의 휴가를 받는 이들에게 ‘월급까지 받으며 한 달을 쉬는’ 교사의 방학은 부러움을 넘어 따가운 눈총의 대상이다. 마치 방학 기간 내내 여행을 다닌다든지, 빈둥거리면서 놀고 있는 것처럼. 교사의 방학은 곧 연수 하지만 착각이다. 그런 눈총을 받는 것이 억울할 때도 있다. 방학은 학생들의 것이지 교사의 것은 아니다. 방학이라고 교육이 멈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틈틈이 학교에 나가서 업무도 봐야 하고, 미뤄놨던 ‘연수’도 들어야 한다. 물론 학생들과 씨름해야 하는 일은 잠시 멈춰졌지만, 이런 재충전의 시간조차 없다면 교사들은 번아웃(burn out) 상태에 빠질 것이다. 교사들이 지치면 질 높은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방학은 ‘질 높은 교육’을 위한 교사들의 재충전 시간이자, 자기계발 시간이다. 특히 바쁜 일상으로 인해 방학 때로 미뤄놨던 ‘교원 연수’를 듣느라, 교사들에게 ‘방학은 곧 연수’나 다름없다. 연수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교원의 연수는 법으로 정해져 있다. 교육공무원법에 ‘연수의 장(제37조~42조)’을 별도로 배정하여 ‘교육공무원은 그 직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부단히 연구와 수양에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여 놓았다. 또한 현재 유·초·중·고 교사들은 연간 60시간 이상의 직무연수를 받지 않으면 교원평가에서 감점을 받도록 되어 있다. 교원연수는 곧 교원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에 해당한다. 이처럼 중요한 교원 연수가 형식적이거나 소홀히 행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연수의 결과는 고스란히 최종 수혜자인 학생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부실한 연수는 학생들에게 도리어 해악이 될 수도 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세상에서 그 어떤 분야보다 시대에 맞추어 빠르게 적응하고 주도해 가야 하는 분야가 ‘교육’이다. 여차하면 교사가 가르치는 교과서 모두가 ‘낡은 역사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육 질 높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 실제 아찔했던 순간이 있었다. 4년 전, 정보통신활용 과목의 교과서를 집필할 때의 일이었다. 집필진 사이에서 ‘통신기기의 활용’이라는 단원에 폴더폰과 스마트폰 중에 어느 것을 주요 소재로 삼을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는 스마트폰이 막 보급되기 시작한 때라서 폴더폰 사용자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오랜 논쟁 끝에 ‘폴더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판단으로 기기를 결정했다. 교과서가 발간되고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폴더폰은 자취를 감추고 스마트폰이 대세인 세상이 되었다. 이처럼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사들에게 시대의 변화는 다른 직종보다 민감할 수밖에 없다. 급변하는 세상에 맞추려면 교사들도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연수의 중요성은 새삼 주목받고 있다. 교사들의 연수는 타 직종의 연수에 비해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교육부와 시·도교육청 역시 교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강좌를 개설하여 연수를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제도 운용에 문제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첫째, 인터넷 원격 연수의 남발이다. 예전에는 연수의 대부분이 집합 연수였다. 그러다 보니 방학이 아니면 받기 힘들었다. 연수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학교나 개인 모두에게 정말 큰 행사였다. 연수장 근처에 숙소를 구해야 했고, 연수가 끝날 때쯤이면 수업 내용을 적은 공책을 복사하기 위해 연수장 근처 인쇄소가 북적거렸다. 그러나 그런 연수의 풍경은 아득한 추억이 됐다. 인터넷을 통한 원격 연수가 태반이고 집합 연수도 그렇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교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연수는 ‘원격 교육’이다. 그런데 각 기관의 연수 프로그램이 대동소이하다. 심지어 같은 프로그램을 올려두는 일도 있다. 많은 프로그램이 있어 보이지만 막상 선택하려면 들을 만한 것이 없다. 제목만 다를 뿐 유사한 내용으로 개설된 강좌가 너무 많다. 또한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안전교육’, ‘성교육’, ‘자살예방교육’ 등의 강좌는 들으나 마나 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교사들이 원격 연수로도 다양하고 질 높은 자기계발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선택의 폭’을 넓히고, ‘내용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 현장 교사들의 여론이다. [PART VIEW]둘째, 집합 연수 프로그램의 확대가 필요하다. 인터넷 원격 연수는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는 편리성이 있지만, 정보통신기기를 통한 단방향 전달 방식이다 보니 한계가 있다. 연수는 지식 전달 이외에 동료 교사들 간의 경험을 나누거나 의견을 교환하는 소통 기능도 있다. 특히 학생들의 인격 존중과 행동의 다양성이 강조되면서, 강사가 알려주는 매뉴얼만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이럴 때는 강사의 지식보다 현장의 체험담을 서로 나누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집합 연수가 필요한 기능 위주의 연수까지도 인터넷 강의로 때우기보다는 함께 모여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집합 연수 프로그램을 더 확대하는 것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셋째, 교원 연수의 의미가 ‘시간 때우기’로 퇴색되고 있다. 연수 시간에 따라 교원평가 점수가 달라지다 보니, 현장교사들은 연수를 통한 지식 습득보다 시수 채우기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 정말 필요한 연수보다는 쉽고, 시간 채우기에 좋은 강좌를 고른다. 이같은 의무적인 시수 채우기식 연수는 연수의 질을 떨어뜨릴 뿐이다. 연수 시간을 평가에 반영하더라도 연수 이수 시간을 줄여 교사의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연수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다. 인터넷 원격 연수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집합 연수, 특히 숙박 연수의 경우에는 그 경비가 녹록지 않다. 당일치기도 마찬가지이다. 연수 장소에서 가까운 교사라면 몰라도 멀리 있는 사람은 오가는 경비도 만만찮다. 차편이 불편한 사람은 자가용으로 가야만 한다. 그런데 현재 여비 규정은 야박할 정도로 인색하다. 교통비는 대중교육 기준으로 잡혀있으며, 숙식비도 마찬가지이다. 직무연수는 말 그대로 직무를 위한 연수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연수이다. 따라서 자기연찬을 위한 일반연수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수 경비의 일부를 자비(自費)로 감당해야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스스로 원해서 가는 연수와 직무상 꼭 필요해서 받는 연수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는 실비로 지급되는 것이 옳다. 연수 경비 청구 절차도 문제이다. 주유나 숙박 영수증은 꼭 연수받은 곳 인근에서 끊은 것이어야 하고, 연수 참여 여부를 영수증으로 확인한다. 연수비 지급이 국가 세금으로 지급되는 만큼 재정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까다로운 절차를 마련하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연수에 참가했다는 출석 확인만 있어도 될 것을 영수증으로 참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교사를 믿지 못하는 데서 온 것이다. 따라서 부당한 지출이 없도록 애초부터 소요 경비를 올바르게 책정하고, 그 대신 확인 영수증을 연수 보고서에 첨부하는 일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방학 기간 중 자발적 연수, 응당한 지원책 필요 ‘항상성의 원리’라는 것이 있다. ‘생물은 스스로를 가능한 한 자극이 없는 상태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중 지식의 변화는 교사들에게 피곤한 자극이다. 특히 교직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점점 자신을 합리화하고 타성에 젖어간다. 그런 타성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계발이다. 그리고 그 계발의 대부분을 교원 연수에서 얻고 있다. 따라서 교원 연수를 맡고 있는 교육 당국은 지금까지의 천편일률적인 연수 내용과 방법에서 벗어나 교사들의 편의를 도모하면서 학교 교육과정 운영에 도움이 되는 내실 있는 연수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학생들의 수업권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여유 시간을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방학 기간을 택해 연수에 참가한 교사들에게 응당한 지원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법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아동·청소년법, 여성보호법, 노동법 등…. 마찬가지로 올해 8월부터 시행되는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이하 교권보호법)’도 우리 사회에서 교권과 교육활동이 자연스럽게 보장되기보다 법으로 규정되고 보호받아야 할 만큼 약화되었고, 쟁점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사를 존경한다’ 응답 학생 비율 11% 물론 학습자·소비자 중심 시대인 오늘날 교권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대체로 ‘철밥통’으로 표현되는 교직에 대한 인식은 ‘선호’와 ‘불만’, ‘비판’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공존하고 있다. OECD 교수·학습 국제 조사(Teaching and Learning International Survey : TALIS) 결과, ‘교사 위상 지수(Teacher Status Index 2013)’는 상위권을 차지했으며, ‘교직을 희망한다’는 학생의 응답률도 터키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반면 현직 교사의 자기효능감과 직무만족도는 현저히 낮다(김갑성 외, 2011:OECD, 2014). ‘교사가 된 것을 후회한다’는 교사의 응답률은 1위를 차지했으며, 교사를 존경한다고 응답한 학생의 비율 역시 11%로 조사 대상국 중 가장 낮았다(김이경, 2014). 이러한 불일치의 원인은 무엇일까? 현직 교원 입장에서 ‘교사 위상 지수’는 상위권이지만 ‘교직 불만’이나 ‘교수 효능감’이 낮은 요인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예컨대 교직에 대한 사회와 언론의 부정적 시각, 학부모나 학생의 교사에 대한 물리적·언어적 폭력 증가, 사교육 확대에 따른 공교육에 대한 기대?의존의 상대적 약화, 교수·학습활동을 직·간접적으로 침해하는 학교 업무의 지속적인 증가와 시간 부족(정바울 외, 2014)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교실에서 학부모나 학생에 의한 교사 폭행, 교권침해 사례가 증가하고 있고, 학생인권조례 및 교육공동체 헌장 제정(중앙일보, 2016.6.1.) 과정에서 학생인권과 학습권이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교육자로서 교사의 권위와 권리는 더욱 약화되고 있는 것도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교육 생태계 관점에서 교권 재정립 하지만 교권과 인권, 학습권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즉, ‘교권 문제’를 교육 생태계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최근 ‘교권’은 학술적 주제로도 재조명받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에서 발간하는 온라인 교육저널 ‘교육정책포럼’은 지난 3월호를 국내외 교권 문제에 할애했다. 또한 유·초·중등 및 특수교육 분야의 다양한 전문 연구자와 실천가들이 참여하는 한국교원교육학회는 지난 5월 말 ‘교육 생태계 관점에서 교권 재정립의 방향 탐색’이라는 주제로 춘계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 학술대회는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교권 문제를 교육 생태계 관점에서 좀 더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보고, 학생의 인권과 교권, 학습권의 관계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과 토론을 시도했다. 이 글은 이러한 사회적 상황과 학술적 논의를 배경으로 하여, 특히 한국교원교육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발표·제안된 내용을 중심으로 교권·인권·학습권의 의미를 검토하고 이의 보장과 한계, 과제를 정리한다. 교권·인권·학습권의 의미와 상호작용 ● 교권 교권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교육권(敎育權)을 말하는 것으로 교육을 받을 권리와 교육을 할 권리를 포함한다. 여기에는 학생의 학습권, 부모의 교육권, 교사의 교육권, 학교 설립자의 교육 관리권, 국가의 교육 감독권 등이 모두 포함된다(주삼환, 2016 : 5). 그러나 ‘교권이 침해 또는 실추되었다’고 할 때의 교권은 좁은 의미에서 ‘교원이 갖는 모종의 힘’을 말하며, 여기에는 권위(authority), 권리(right), 권력(power) 등의 개념이 모두 포함된다(이차영, 2016b). ‘권력으로서 교권’은 교원이 자신의 영향력을 관철할 수 있는 힘으로 정치적 성격이 강한 개념이다. ‘권위로서의 교권’은 교원이 학생의 교육에 대해 가지는 전문적인 능력(전문적 권위)과 이를 인정하여 부여한 제도적인 힘(제도적 권위)을 말한다. ‘권리로서의 교권’은 교원이 자신의 지위나 이익을 주장하거나 누릴 수 있는 법규상의 힘(법규상의 각종 권리)을 말한다. 이러한 교권 개념을 종합해보면, 교권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전문적 능력과 품성에 기초한 전문적 권위이며, 이를 바탕으로 제도적 권위로서의 교권, 권리로서의 교권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이차영, 2016b). ● 학습권 학습권은 교육받을 권리, 수학권(修學權)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하여 자유롭게 학습할 수 있는 권리와 자신의 학습에 필요한 조건의 정비를 공동체에 요구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이차영, 2016b), 자유롭게 학습하고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양희인 외, 2015)를 말한다. 이러한 학습권은 헌법 제31조 제1항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와 교육기본법 제3조(학습권) ‘모든 국민은 평생에 걸쳐 학습하고, 능력과 적성에 따라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에서 법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 인권 인권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모든 사람이 갖는 권리로 학생을 포함한 학습자의 기본적 인권은 학교 교육 또는 사회교육 과정에서 존중되고 보호된다(교육기본법 제12조). 이러한 교육활동에서 인권문제는 학생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며 교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최근 알려진 학생이나 학부모에 의한 교사에 대한 폭행·폭언 등은 교권 침해, 나아가 교사 인권 침해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교권·학습권·인권은 교육활동이나 교육장면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행사된다기보다는 상호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이차영, 2016b). ‘교사의 교육권, 학부모의 교육권, 학생의 학습권’의 관계에 대해 우리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이 상호협력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교권·인권·학습권의 보장과 한계, 그리고 과제 2012년 이후 교권 침해 건수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2012∼2015년) 동안 교원의 교육활동 침해가 연 4,000여 건 이상 발생하였고, 교권 침해의 심각성에 대한 우려는 커지고 있다(교육부, 2016.3.31.). 정부는 ‘질 높은 교육을 위해 교원의 교육활동을 보호하고 교권을 정립하기 위한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를 받아들여 몇 가지 대응 방안을 마련하였다. 2012년 8월 교권보호 종합대책 발표에 이어 교원 예우에 관한 규정 개정?시행(2013.5), 교원 지위 향상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 국회 제출(2013.4) 등이 추진되었고, 2016년부터 대전·부산·대구·제주 등 전국 4개 시·도교육청에 ‘교원치유지원센터’를 선정하여 시범운영 중에 있다(교육부, 2016.3.31.). [PART VIEW] 교원의 교육활동 보장과 교권 확립을 위한 방안 및 과제는 전문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교권·인권·학습권 보장을 위한 방향과 과제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주삼환, 2016; 이차영, 2016a·b). 첫째, 모든 교육활동은 학생, 학습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학생의 학습을 증진하기 위한 교권, 학생의 유익을 위한 교권 개념이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교사의 교육권을 학생의 교육권을 보호하거나 신장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때, 교권과 학생의 학습권은 상충하거나 대립하기보다 상호 협력적 관계로 발전될 수 있다. 둘째, 교권, 학습권 보장을 위해 더욱 엄격한 교육과 훈련, 교사 학습(teacher learning), 전문적 학습(professional learning), 전문적 능력 개발(professional development)이 요구된다. 셋째, 교직이 전문직으로 인정받고 권위로서의 교권, 권리로서의 교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전문직 단체로서 교직단체의 역할이 보다 확대되고 강해져야 할 것이다. 전문직은 동료와의 협력, 자기관리(self-governing)를 통해 상호 학습한다. 교직단체는 회원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회원의 자질이 없거나 윤리강령에 어긋나는 회원을 규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넷째, 교권·인권·학습권은 교사교육의 핵심 내용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교사교육을 통해 예비교원과 현직 교원들의 교권·학습권·인권교육을 제공할 뿐 아니라 학부모와 학생을 대상으로도 교권·인권·학습권의 상호협력적 관계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교권 보장을 위한 과제들은 교권·인권·학습권을 상호협력적 관계로 보고, 교권을 보호·보장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학생의 인권과 학습권을 최대한 실현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교권 보장의 의미와 과제는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이 법의 목적, 즉, ‘교원에 대한 예우와 처우를 개선하고 신분보장과 교육활동에 대한 보호를 강화함으로써 교원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궁극적으로) 교육 발전을 도모하는 것’에 함축되어 있다.
교실 안에 괴물이 있다. 학생의 모습으로 아이들 속에 앉아 있다. 아이들도, 선생님도 눈치를 본다. 아이가 언제 괴물의 본색을 드러내고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과장된 이야기 같지만 과장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어떤 아이는 분명 괴물처럼 보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뭇사람을 괴롭히고 상처 입히곤 한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처음부터 그랬을까? 아닐 것이다. 그 아이들의 처음 또한 다른 아이들과 다름없이, 누구보다 소중한 한 가정의 아이였을 것이다. 해맑은 미소로 엄마와 아빠를 행복하게 했던 평범하고 귀여운 아이였을 것이다. 어떻게 된 걸까. 그 귀엽던 아이가 왜 지금과 같은 괴물로 변할 걸까. 아무도 모르게, 아이가 괴물이 되기까지 승민(가명)이 아버지는 매우 엄격한 교육철학을 지니고 있었다. 아이가 자신의 방식대로 모든 걸 해내길 원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승민이에게 숙제를 내주었고, 퇴근 후에는 검사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술에 취해 새벽에 귀한 날에도 어김이 없었다. 승민이는 숙제 검사를 통과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준에 맞게 숙제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성에 차지 않는 승민이의 숙제는 무자비한 폭행으로 이어졌다. 승민이는 노력했다. 아버지의 기준에 맞춰 잘 해보려고.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려고. 그러나 아이의 노력은 번번이 허사였다. 그럴싸한 거짓말도 방어막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은 아이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턱뼈가 부러졌다. 폭력 앞에서 아이는 몸을 웅크리는 거 외에 달리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이의 몸은 자랐고, 6학년이 된 승민이의 덩치는 아주 커졌다. 승민이의 가출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다. 하지만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가출한 승민이에게는 더 심한 폭력이 가해졌고, 그 폭력을 피하기 위한 승민이의 가출 또한 더욱 잦아졌다. 그렇게 거리로 나온 승민이는 더 이상 앳된 모습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분노로 가득 찬 학교폭력의 주범, 악의 축이 되어 있었다. 집과 학교 대신 경찰서와 법원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다니던 학교에서는 강제전학이 되는 등 언론에서 보도하는 괴물 같은 청소년으로 자라 있었다. 현태(가명)가 어릴 적, 엄마는 집을 나갔다. 술에 절어 허구한 날 주먹을 휘두르는 아빠를 견디다 못해 나갔다. 그렇게 집에는 아빠와 누나, 어린 현태가 남았다. 엄마가 집을 나간 후, 아버지의 폭력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래서 현태도 집을 나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출을 했고, 자연스레 비행청소년 형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때 소년원에 가게 됐다. 남의 집 옥상에서 자다가 너무 추운 나머지 빨랫줄에 걸려 있는 옷을 태워 불을 쬐었고, 현태는 방화범이 되었다. 어린 현태는 그게 그리도 큰 죄라고 생각지 않았다. 아이들과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재판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 현태의 재판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현태는 자신이 재판을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그래서 재판정에서조차 평소대로 막말을 하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모습을 본 법원은 현태의 행동을 정신적인 문제로 인한 방화로 판단했고, 현태는 결국 치료감호 소년원에 최연소 위탁생으로 보내졌다. 소년원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아는 동네 형들이 이미 들어와 있었고, 형들로부터 보호도 받았다. 하지만 현태의 마음속에는 억울함이 차올랐다. ‘엄마는 왜 나를 버리고 도망갔는가?’, ‘아빠는 왜 술을 먹고 누나와 자신을 그리도 때렸는가?’ 현태는 분노로 똘똘 뭉친 아이가 되어 소년원을 나왔다. 눈에 거슬리면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싸웠다. 억울함이 느껴지는 상황에선 더욱더 잔인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또 한 명의 아이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 괴물이 되어갔다. 부모에게 학대받았다고 해서 모든 아이가 괴물이 되는 건 아니다. 모든 비행청소년과 위기의 아이들이 직접적인 폭력으로 인해 괴물이 된 것 역시 아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괴물인 아이는 없다. 단 한 명도 원래 ‘그런’ 아이는 없다. 괴물이 된 아이들의 삶 속에는 아이를 괴물로 만든 환경이 자리해 있고, 아이는 다만 처해질 뿐 스스로 선택하고 바꾸어갈 만한 힘을 지니지 못했다. 그 힘이 어른인 우리에게 있다. 괴물의 죄를 묻고, 그리된 아이를 탓하며, 괴물이라 낙인찍고 묶어두는 대신 괴물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묻고, 상처를 다독이며, 아이가 잃어버린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우리가 도울 수 있다. 할 수 있는 일의 시작, 어떻게 이 아이들을 바라볼 것인가 ● 나쁜 아이 VS 아픈 아이 이 아이들을 나쁜 아이로 바라본다면 버릇을 고치려 하거나 다른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격리 혹은 추방(?) 조치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을 아프고 상처받은 아이라고 생각한다면 치료와 회복의 방법을 찾을 것이다. 아픔과 상처 속에서 몸부림치며, 그 표현을 비행으로 하는 거라고 여기며 아이를 보듬어 안을 것이다. [PART VIEW]● 가출한 것인가? VS 탈출한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는 가정이어야 한다. 부모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정서적인 안정과 더불어 인성 대부분이 형성되는 토대가 바로 가정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아이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인가? 쉼과 평안을 주는 곳인가? 지지와 격려, 미래를 위한 지원이 있는 곳인가? 학교는 또 어떠한가? 아이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키워갈 수 있는 곳인가? 꿈과 희망이 자라는 터전이 되고 있는가? 아이들의 시행착오를 끝까지 기다려주고 인내해주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곧 이유다. 수많은 아이가 거리로 뛰쳐나오는 오늘의 이유. 편한 집 놔두고 생고생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아이들에게 집은 편안한 곳도 안전한 곳도 아니다. 고통과 아픔과 상처로 가득한 지옥일 수 있다는 말이다. ● 쓰레기 VS 자원 쓰레기는 치워야 하고 자원은 개발해야 한다. 위기청소년들을 쓰레기로 바라보면 할 수 있는 건 눈앞에서 깨끗이 치우는 것, 격리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이 아이들을 존귀한 가치와 가능성이 있는 자원이라고, 그저 지금은 일그러진 모습에 가려져 있는 것뿐이라고 믿는다면 아이들을 돌보고 자원을 개발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 변하지 않는다 VS 이 또한 지나가리라 비행이 습관화된 아이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는가? 이 아이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가? 아니면 지금의 힘겨운 시기를 이겨내면, 그렇게 혼돈과 방황을 잘 겪어내면 멋진 어른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면 ‘네가 그렇지’라고 포기해 버릴 것이고, 변하지 않는 건 아이의 과거이지 그 아이가 아니라고 믿는다면 끝까지 기다려 주고 잡은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바라보기의 다음, 한 걸음 다가서기 마이 페어 레이디(1964)라는 오래된 영화 속의 대사가 위기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잘 보여준다. 언어학자인 헨리 히긴스 교수는 절친한 친구인 피커링 대령과 묘한 내기를 한다. 거리에서 방황하는 하층계급 여인을 한 명 데려와 정해진 기간 안에 그녀를 교육시켜 우아하고 세련된 귀부인으로 만드는 내기다. 이 내기의 대상으로 선택된 여인은 빈민가 출신의 꽃 파는 부랑녀 일라이자 토리틀이다. 그녀는 히긴스 교수의 끈질긴 교육으로 이상적인 여인상이 되고, 그 과정에서 둘은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놀라운 귀부인의 매너와 품위를 보이는 그녀가 유독 자신을 교육시킨 히긴스 교수 앞에서는 막돼먹은 여자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히긴스 교수가 이유를 묻자 일라이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숙녀와 길거리의 꽃 파는 여자와의 차이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어떤 대접을 받느냐의 차이입니다. 당신의 친구 피커링 대령은 나를 숙녀로 대해주지만 당신은 나를 언제나 꽃 파는 무식한 소녀로만 바라보고 있지요.” 위기의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그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청소년은 이 땅의 미래라고 한다. 그렇게 보고 아이를 대한다. 그런데 위기청소년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위기청소년도 이 땅의 청소년이다. 인생의 한때, 위기의 시기를 건너고 있는 이 땅의 미래다. 바라보는 이의 생각과 시선과 태도에 아이들은 반응할 것이고, 그렇게 아이들이 변할 것이다. 비록 많은 시간을 들여 느리게 변할지라도. 그렇기에 ‘위기청소년’이라 불리는 아이들의 진짜 호칭은 ‘더 따뜻한 손길이 필요하고 더 많이 기다려주어야 할 아이들’인 것이다. 아이들이 가장 미워 보일 때가 가장 사랑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