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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최근 색다른 드라마가 전파를 탔다. KBS 1TV가 9월 3일부터 5회에 걸쳐 방송한 ‘임진왜란 1592’가 그것이다. 방송사상 최초의 팩츄얼 드라마를 표방한 ‘임진왜란 1592’ 첫 방송은 토요일이었지만, 2~5회는 9월 8~9일, 22~23일 등 목⋅금요일 밤 10시에 방송했다. 9월 29일 밤 10시엔 ‘제작기-숨겨진 이야기들’이 방송되었다. 이미 알려져있다시피 이순신의 임진왜란은 여러 차례 이런저런 콘텐츠로 만들어졌다. 가령 2001년 김훈 장편소설 ‘칼의 노래’가 출간되었다. 2004년 탄핵정국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읽은 책으로 화제를 모은 ‘칼의 노래’는 그 해에만 50만 부 가까이 팔리는 등 밀리언셀러가 되기도 했다. 2004년엔 ‘칼의 노래’를 원작으로 한 대하드라마가 제작⋅방송되었다. 2004년 9월 4일부터 전파를 타기 시작한 KBS 100부작 ‘불멸의 이순신’이 그것이다. 드라마는 평균 시청률 22%(최고 시청률 33.1%)로 대박이었다. 그때 ‘전주공고신문’ 지도교사였던 나는 학생기자들을 데리고 ‘불멸의 이순신’ 촬영세트장 부안영상테마파크를 다녀온 바 있다. 그리고 2014년 여름 이순신은 영화 ‘명량’으로 다시 왔다. 그냥 힐끗 온 것이 아니다. ‘명량’을 극장에서 본 관객 수는 무려 1761만 1849명이다. 역대 박스오피스 1위를 5년간 차지하고 있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아바타’를 400만 명 넘게 앞선 수치이다. 그야말로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란 이순신의‘명량’이었다. 2015년엔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에서 또 모습을 드러냈다. 류성룡을 주인공으로 한 50부작이었지만, 임진왜란이란 시대적 배경이 이순신을 자연스레 불러낸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순신은 한중 합작의 팩츄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의 한 주인공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징비록’ 종영이 2015년 8월 2일이니 13개월 만의 ‘등판’인 셈이다. 우선 한중 합작의 팩츄얼 드라마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4년 방한한 시진핑 중국 주석의 서울대 강연이 계기가 되었다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다. KBS와 중국 CCTV의 공동제작에 커다란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1592’가 중국에선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최초의 영상물이기 때문이다. 방송사상 최초의 팩츄얼 드라마란 의미도 만만치 않다. 사실에 충실하게 입각한 팩츄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는 기존 대하사극보다 사실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예컨대 1, 2, 5부에서 다룬 ‘사천해전’⋅‘당포해전’⋅‘한산대첩’⋅‘노량해전’ 등 해상 전투신은 가장 정교하면서도 스펙터클한 영상을 보여준다. 그 핍진감이 영 새롭게 다가와 오싹할 정도다. 특히 거북선 전투장면이 그렇다. 선발대인 거북선 안 격군들의 전쟁에 대한 공포감과 결사항전의 의지를 담아내 이순신(최수종)만의 나홀로 나라지키기가 아니었음을 환기하고 있음도 새로워 보인다. 또한 판옥선 선회 공격으로 왜군의 키리코미(적군의 배에 건너가 병사를 칼로 베어 죽이는 기술)를 저지하는 등 고증에 충실한 팩트가 팩츄얼 드라마답다. 또 하나 새로운 것은 바로 관점이다. 이것은 제3부를 침략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김응수) 일대기를 통한 일본정세, 제4부를 명군 출병과 임진왜란의 판도를 바꾼 평양성전투에 고스란히 할애한 데서 알 수 있다. 요컨대 임진왜란이 16세기 3국의 최대 국제전쟁이라는 관점인 것이다. 그런데도 무려 144년 동안 왜와 왕래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정보나 외교, 그리고 통상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콤플렉스가 있는 히데요시를 연기한 김응수의 미친 존재감이 제법 강렬한데, 이순신 역의 최수종은 기자 시사회장에서 말한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영원히 남을 수 있게 하는 작품이 될 것같아 하게 되었다”고. 그것이 어찌 학생들만이겠는가. 왜 다시 이순신인가에 대한 확실한 답이 될 듯하다. 전쟁 같은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려면 분명히 알기부터 해야 된다는 교훈, 그것 말이다. 아쉬운 점도 있긴 하다. 전회에 나온 내용이 다시 나오는 등 잦은 중복화면이 그렇다. 제3부에서 왜장 할복에 여자들이 빵 먹는 장면은 무슨 의미인지 썩 이해 안 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한중 합작이란 한계 때문인지 몰라도 왜군의 만행에 비해 우군인 명군의 조선인에 대한 민폐가 전혀 없는 것은 좀 의아한 대목이다.
대한민국은 해방 후 최빈국의 경제적 상황을 깨고 세계가 주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면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고속성장을 추구하면서 잃어버린 것도 많아 사회적으로 안고 있는 갈등은 물론 정신적 황폐를경험하고 있다. 이제는 물질 생활 이외에도 심리적 안정과 정신적 지주를 필요로 하는 시점이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아름다운 정원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주고 초조한 심리를 정화시켜 준다. 이같은 보배로운 역할을 하는 순천만국가정원은 후대들에게 물려줄 귀중한 자산이다. 그렇지만 내적인 내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잠시 거쳐가는 곳이 현실이다. 그러나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이면 이곳이 보석보다도 귀한 곳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의미를 살리고자 순천조례호수도서관은 '순천만국가정원 찾아가는 생태 인문학' 강좌를 개최하였다.지역공동체활성화센터 모세환 대표를 강사로 관심있는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정원의 참 의미를 발견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계적인 정원 디자이너 찰스쟁스가 설계한 순천만 바람언덕과 호수정원, 황지혜 정원디자이너가 설계한 갯지렁이 다니는 환상의 정원, 세계적 설치작가 강익중씨가 디자인한 꿈의 다리에는 어린이 그림14만점이 전시되어 있다. 순천시민은 물론 다가오는 변화를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길 희망한다.
본격전인 가을을 알리는 10월 첫날이다. 거기에다 연휴다. 우리 선생님들에게는 그야말로 두 날개를 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마음은 가볍고 경쾌하다. 오늘 아침에 “성과급 전면 개선 50만 교원 서명 돌입”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교총, 10대 청원과제 제시 "전국 교원 뜻 모아 반드시 관철" 25일까지 홈피·모바일로 진행…국회·정부 등에 입법 청원키로했다는 내용이다. 10대 청원과제로는 △성과급 차등지급 철폐 등 전면개선 △교장(감) 성과연봉제 도입 추진 철회 △교권침해 처벌 강화 법제화 △교직·담임·보직교사 등 수당 현실화 △비교과교사 수당 신설·현실화 등 처우 개선 △농사용 수준으로 교육용 전기료 인하 △농산어촌 학생 교육권 보호를 위한 소규모 교육지원청 통폐합 중단 △특수학교(급) CCTV 설치법 철회 △유치원 명칭 유아학교 변경 및 단설유치원 확대 △교감 명칭 부교장으로 변경 및 지위·역할 강화를 제시했다. 10대 과제제시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한국교총이 교원성과상여금 전면 개선, 교권 침해 처벌 강화 등을 관철시키기 위해 50만 교원 청원(서명) 운동에 돌입했다. 각종 실험·성과주의 정책으로 궤도 이탈한 교육 본질과 교권 회복을 위해 전국 교원들의 뜻을 모으겠다는 취지다. 교권이 무너지면 교육이 무너진다. 교권보호를 위한 노력이 정치권을 비롯해 국민 모두가 공감하면서 힘을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교권이 무너지면 학생들의 가르침이 겉돌게 된다. 선생님에게 교권을 회복해 달라는 것은 결국 학생들을 위함이다.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바른 길로 인도하며 장차 힘있고 정직한 미래의 지도자를 세우기 위함이다. 선생님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하는 학생이 생기면 교육은 끝나고 만다. 이는 특히 학부모님들께서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교육은 방향이다. 교육정책도 방향이다. 방향이 바르지 못하면 아무리 속도를 내어도 결국은 간 것만큼 되돌아와야 한다. 방향이 틀리고 궤도를 이탈하면 사고가 나고 사람이 다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 선생님들이 싫어하는 것을 왜 정책입안해서 추진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사기진작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사기를 저하시킨다. 예를 들면 성과금이 그렇다. 성과금의 차별화다. 명확하고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잣대를 가지면 문제가 다르다. 가르침에 있어서 어떻게 구체적인 잣대를 가지고 평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전혀 불가능하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교감 명칭을 부교장으로 바꾸는 것이다. 몇 년 전 중국 광저우 월수외국어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 학교는 교감을 부교장으로 불렀다. 교감선생님의 격을 높여주면 본인의 사기도 진작되고 선생님들이나 학생들도 교감선생님을 우대하고 존경하게 된다. 이런 것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시행할 수 있는 제도인데 왜 머뭇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교육의 전통을 이어오는 교총에서 과제를 제시한 것을 관계자들은 예사로이 넘기지 말고 하나하나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주영아, 넌 참 대단하구나! 조남호 선생님을 멘토로 생각하고 있고, 그리고 공부가 무엇인가를 고민하여 본 경험이 있는데 그런 자세로 공부를 대한다면 넌 방향을 잘 잡은 것 같구나. 중학교에 입학하여 1학기 중간고사를 보고 난 느낌이 어떠하였는지 궁금하구나. 인간은 누구나 새로운 공부를 하면 참 머릿속에 안 들어온다. 요즘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정말 재미가 있니? 지금은 성인이 되어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전 기본적으로 고등학교 때도 그쪽은 공부를 안 했거든요. 저는 문과였으니까. 그래도 왜 그렇게 이과 공부를 싫어했나 모르겠어요. 물리, 수학, 이런 공부 정말 싫어했거든요? 특히 수학 공부 정말 싫어했는데, 내가 왜 그렇게 수학을 싫어했을까 생각을 해봤더니 선천적으로 못했던 건 아니었어요. 다만, 저는 그쪽 공부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인 거예요. 근데 문과 쪽 공부는 아마 평균보다 빨리 이해했던 것 같아요. 글을 읽거나 시를 읽을 때 뜻을 이해하고 토론하는 건 머리가 잘 돌아갔거든요. 반면에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건 이해하는 데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시간이 걸렸어요. 그런데 요즘 공부를 해보니까 오랫동안 책을 읽고 애를 쓰다 보면 결국은 이해를 하더라는 거죠. 물론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요. 근데 고등학교 때 그 공부를 포기한 이유는 내가 이해하기 전에 너무 빨리 이해하라고 재촉하거나 아니면 이해해야 하는 시한을 정해놓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이번 시간에 배운 거는 다음 시간까지 이해해야 하고 중간고사 때까지는 완벽히 익혀서 시험 본다.” 그러고 시험을 본 거 아니에요? 어떻게 됐을까요? 당연히 난 이해를 못했으니까 시험 점수가 잘 나올리가 없고 그렇게 시험에 몇 번 실패하고 야단맞고 이러다 보니까 아, 이건 나랑 맞지 않는가 보다 하고 포기했던 거죠. 그게 학교 다닐 때 공부였던 것 같아요.'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 다른데, 그런 시한을 학교는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다, 이게 학교 공부의 특성이 아닐까? 그럼, 학교 밖 공부는 어떨까? 요즘에 혼자서 물리학, 수학 공부를 하는데 왜 재밌게 하는 줄 아는지? 아무도 시험 안 봐요. 아무도 평가 안 해요. 그리고 언제까지 이해하지 못하면 너 바보라고 얘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편하다. 이해될 때까지 읽고 물어보고 시험은 나 스스로 완벽히 이해했을 때 이미 100점 맞은 거 아니겠는가? ' 혹시 학교 다닐 때 공부에 굉장히 짓눌려 공부가 하기 싫었던 경험이 있다면 이제 네 스스로 시간을 정하고 스스로 잘 할 수 있다고 자신을 격려하면서 좋은 공부방법을 찾아 실천하면 이번 학기야말로 좋은 공부를 하는 것이다. 공부를 겁내지 말고 접근하자. 먼 훗날 어른이 되어서 "저 어릴 때 공부 못했어요." 라고 말하지 않도록 노력하여 보는 것이다. 깨달을 때까지 하는 게 공부다. 이제 제대로 된 공부를 한 번은 해봐야 하지 않겠니? 깨달음을 향한 나를 위한 공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중 최고의 것이 아닌가. 네가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평가하는 진짜 공부를 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한 국가의 권력구조는 그 나라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민주국가의 권력 틀을 이루는 정치로 영국을 표본으로 하는 의원내각제와 미국의 대통령제로 크게 구분을 한다. 우리 나라는 여러 차례 정치적 변화를 겪어오면서도 대통령제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은 1776년 영국에서 독립을 쟁취한 뒤 ‘대통령제’란 새로운 제도를 택하였다. 이는 군주제의 폐해를 직접 경험하면서 권력 집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군주가 모든 권력을 갖는 제도와 달리, 의회와 대통령이 이끄는 행정부, 그리고 사법부가 서로 견제하며 권력을 균점하길 바랐다. 특히 의회가 너무 거대해질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의회를 상·하원으로 나누고, 대통령이 의회를 적절하게 견제해주길 원했다. 미국 헌법 1조에 의회의 권한을, 2조에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을 명시한 건 이런 현실적 역관계를 반영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남북전쟁과 국가의 팽창을 거치며 행정부를 이끄는 대통령 권한이 계속 커졌다. 결정적 계기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이었다. 1933년 집권해 4선을 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공황 극복을 위해 경제 분야로 대통령 권한을 확장했다. 또 2차 세계대전은 외교·국방까지 대통령이 틀어쥐게 했다. 전쟁과 공황 같은 ‘비상시국’에 대통령의 권한 확대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로 루스벨트는 ‘제왕적 대통령’의 효시였다. 그래도 삼권분립은 여전히 미국 대통령제의 기본 토대다. 의회는 차관보급 이상 행정부 관리의 임명을 청문회 제도를 통해 제어한다. 상원의원 한명이라도 반대하면 고위공무원 인준은 여러 달씩 지연되기 일쑤다. 복수의 상원의원이 반대한다면 대통령이 장차관을 임명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대통령은 법안 통과를 위해 여당뿐 아니라 야당 의원들을 수시로 백악관과 에어포스원(대통령 전용기)으로 불러 설득한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미국 건국 초기의 고민은 제거된 채로 우리는 해방 이후 대통령제를 받아들였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제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이대통령은 권력을 사유화했고 장기집권을 위해 편법으로 헌법을 바꿨다. 그 결과가 1960년 4월 혁명이 일어나 피를 흘려야 했다. 매우 불합리한 것 같은 미국 대통령제를 안정시킨 건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었다. 워싱턴은 온건하고 초당적이며 국민 권리를 지키는 데 적극적이되 권력 행사를 스스로 조심함으로써 ‘왕’과는 다른 ‘대통령’의 전형을 만들어낸 것이다. 미국민들이 조지 워싱턴을 국부로 칭송하는 건, 초대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바람직한 대통령상을 정립해 대통령제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3공화국 들어서 박정희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국적 형태를 완성했다. 고도성장을 이끈 관료자본주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여기에 중앙정보부·검찰·경찰을 사유화해 권력을 대통령 1인에게 집중시켰다. 아마도 대통령이 보고 느끼면서 자란 건 바로 이런 대통령제의 개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은 너무 권력이 분산되고 국회와 언론은 말을 듣지 않아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인간의 시야는 보고 배운 것에 구속을 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세계 정치사의 권력 구조 변화 속에서 수백년간 대통령제가 살아남은 데엔 ‘권력 분산’과 ‘견제와 균형’이란 원리의 힘이 컸다. 이에 비추어 대통령이 국회의 장관 해임 건의를 거부한 건 이 원리를 뿌리째 흔드는 거나 다름없다. 국회 견제를 거부하고 여론을 무시하면 제왕과 다를 게 없다. 신하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무조건 보호하는 것도 제왕적 속성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정치사 숱한 위기 속에서 대통령제가 국민 지지를 잃지 않은 건, 그래도 과거 독재자들 역시 야당 요구에 최소한의 응답은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야당의 견제를 묵살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사회를 가르친 제자들이 60대가 되었다. 대통령제가 갖는 특성을 현실적으로 보지 못한 제자들이 우리나라는 대통령제 국가 맞아요 하고 묻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도록 정치가 돌아가길 기대하여 본다.
20세기 최고 문호의 한사람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상대성원리로 과학의 새 지평을 연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알버트 아인슈타인, 그리고 21세기의 정보화 사회를 주도한 빌 게이츠 등은 어떤 교육을 어떻게 받았기에 이런 업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 보이지 않는 교육의 힘 분명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 교육의 도움 없이는 이러한 업적을 남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정규 학교 교육 때문인지, 아니면 개인의 잠재력과 비정규적 학습 결과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게이츠는 스스로 대학을 중퇴하였고, 도스토옙스키는 튼튼한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아인슈타인 역시 스위스에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이성적 사고를 통해 과학적 발견을 한 적이 없다’고 고백했듯이 정규 학교 교육 때문만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학교 교육을 ‘보이는 교육(visible education)’라고 한다면 ‘보이지 않는 교육(invisible education)’은 학교 교육이 아닌 개인의 성장 과정이나 자기주도적 학습으로 이루어진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족적을 남긴 사람들은 ‘보이는 교육’과 ‘보이지 않는 교육’이 잘 조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학교에서 간과하기 쉬운 도전정신과 창의적 사고, 끝까지 감내하는 끈기, 삶을 통해 체험한 지혜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생명을 살린 5분의 기적 도스토옙스키는 28살 때 시베리아 벌판에서 사형 당할 운명에 처했다. 사형을 집행한 사람들이 그에게 ‘5분의 시간을 줄테니 이 세상에서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작별 기도하는 데 2분,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른 사형수들에게 작별하는 데 2분, 그리고 눈앞의 자연과 지금까지 서 있게 해준 땅에게 감사하는 데 1분을 사용하기로 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곧 죽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한 번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하고 회한의 눈물이 흘렀다. 그때 저 멀리서 ‘사형 중지’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도스토옙스키는 일생 동안 5분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교육의 큰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교육은 자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는 일이기도 하고 헌 영역을 새 영역으로, 새 영역을 헌 영역으로 바꾸는 일이며, 작은 것을 크게, 큰 것을 작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선의의 경쟁을 함과 동시에 협력을 배우는 일이기도 한 것이 교육이다. 과연 게이츠는 아프리카를 구원할 수 있을까? ‘보이는 교육’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보이지 않는 교육’에 소홀해질 수 있다. 특히 요즘 학교 현장이나 국가적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는 인성교육 역시 보이는 교육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육에서 제대로 된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아인슈타인이나 도스토옙스키, 게이츠처럼 학교 교육만이 아니라 학교 밖에서 자기 체험과 자기 훈련, 단련을 통해 인성의 바탕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만 오늘날과 같은 업적이 가능해진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채우기보다 비우는 것을, 남과의 지나친 경쟁보다 자기를 바라보는 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2005년 세계의 지성인들이 즐겨 읽는 잡지 중 하나인 더 뉴요커(The New Yorker)라는 잡지에 게이츠에 관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과연 게이츠는 아프리카를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기사 제목이었다. 게이츠가 2000년에 재단을 만들어 5년이 지난 그때까지 15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의 생명을 구원했다는 내용이었다. 의문형 제목과 달리 게이츠가 아프리카 대륙의 그 많은 질병과 전염병 퇴치에 기여하고 있다는 희망과 격려의 기사였다. 게이츠가 처음부터 남을 배려하는 성격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픈 이웃을 보면서 자기 훈련을 통해 이처럼 세계 최고 기부 재단의 주인공이 된 것이었다. [PART VIEW] 교육이 진정 가르쳐야 할 것들 우리 교육에서 과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사회적 아픔에 대한 공유, 자기를 비우는 자기 훈련, 일등이 아니라 모두가 일등이 되기 위해 함께 손잡는 노력이 있었는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우리처럼 학위·간판·성적 위주의 학교 문화가 아니라 삶 속에서 자기를 찾는 교육일 때, 인성교육도 21세기의 창의적인 도전도 그리고 자기의 생애 행복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21세기의 중요한 화두라고 볼 수 있는 환경·인구·질병·평화 문제 등도 보이는 교육보다는 보이지 않는 교육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게이츠가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듯이, 도스토옙스키가 2분의 귀중함을 인식하면서 한 번도 헛되이 살지 않았듯이, 아인슈타인이 인류를 위해 물리학의 큰 틀을 쌓는 데 전념했듯이 말이다. 우리 교육에서 진정 가르쳐야 할 것은 이들 세 사람의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듯이 ‘자기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삶의 목적을 설정하는 일이다. 또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를 가르쳐야 하는 일인 것이다. 자기를 채우는 일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것은 불행한 일이고, 일등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일도 불행한 일이며, 남을 모르고, 보지도 못하는 삶 또한 불행한 삶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사람의 과업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보이는 교육’만이 전부가 아니다. 삶 속에 녹아있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배우고, 느끼고, 나누는 ‘보이지 않는 교육’ 또한 중요한 것이다.
지난달 28일부터 시행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부패의 주체에 ‘각급 학교의 장과 교직원 및 학교법인의 임직원’을 포함시킴으로써 우리 사회가 교육계에 갖는 불신이 생각보다 큰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앞으로 교원은 물론이고 행정을 담당하는 직원, 학교법인의 임직원(교직원 등) 모두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이 없더라도 1년 300만 원, 1회 100만 원 이상의 금품 수수 또는 요구·약속 등을 할 수 없으며, 배우자가 금품을 수수한 경우에 이를 기관장에게 신고해야 한다. 이를 위반한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및 3,000만 원 이하의 벌금 등 엄격한 처벌을 받게 된다. 또한 누구든지 직접 또는 제3자를 통해 교직원 등에게 입학·성적·수행평가 등의 업무에 관하여 법령을 위반하여 처리·조작하도록 하는 행위를 청탁할 수 없도록 금지된다. 문제는 청탁을 받은 교직원 등의 대응이다. 법은 청탁을 받은 교직원 등은 상대방에게 부정청탁임을 알리고, 이를 거절하는 의사를 명확히 표시하여야 하며, 동일한 부정청탁을 다시 받은 경우에는 이를 소속기관장에게 서면 또는 전자문서로 신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교육자가 학생이나 학부모를 신고하지 않으면 본인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과태료 등의 처벌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이 법은 ‘교직원 등에게 과도하게 청렴의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법리적 문제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는 지난 7월 28일 김영란법 내용 모두를 합헌으로 결정했다. 더 이상 이 법의 부당성이나 위헌 여부를 논하는 것이 사실상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법이 교육계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이며, 이에 대한 교직원 등이 고려해야 할 사항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란파란치’의 등장 … 보이지 않는 신고 봇물 이룰 듯 김영란법은 ‘대한민국의 부패지수가 OECD 34개 국가 중 27위에 해당하므로 이를 개선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선진화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입법되었다. 따라서 김영란법 시행으로 공직자와 언론인, 교직원 등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던 부패 문제는어떠한 형태로든 개선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지난 수십 년간 논란이 되어 왔던 촌지 문제는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지속적인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촌지 문제가 근절되지 않았던 이유는 촌지 사건이 법정으로 비화되어도 직무 관련성과 대가성을 검찰이 입증하지 못하면 무죄가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1회 수수금액이 100만 원을 넘지 않더라도 교직원 등이 연간 300만 원 이상 받으면 3년 이하 징역 등의 처벌을 받게 된다. 물론 일각에서는 ‘은밀하게 금품이 수수되기 때문에 촌지가 감소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미 언론에 일명 ‘란파라치’ 학원 광고가 나올 정도로 곳곳에서 금품수수에 대한 보이지 않는 신고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진 점을 고려해 보면 생각보다 촌지 문제는 현저히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학부모들의 부당한 요구도 현저히 감소할 것으로 생각되며, 상관으로부터의 부당한 요구 또한 급감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에서 빚어졌던 학부생 또는 대학원생에 대한 ‘갑질’ 역시 감소할 것으로 판단된다. 애매한 법 해석 … 사회적 손실 더 클 수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한민국의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극약 처방식의 김영란법을 제정한 만큼 부패는 상당히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반대로 부패방지라는 사회적 이익을 얻은 만큼 사회적 손실 또한 클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피교육자 및 그 관계인들과 교직원 간의 소통이 급격히 차단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만약 학생이나 학부모가 교직원 등을 상대로 성적·수행평가·입학 등에 대해서 부당성을 하소연하거나 개선 요구를 하는 경우,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지 교원이나 제3자가 신고를 하면 해당 학생이나 학부모 등은 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김영란법의 기본취지가 학생이나 학부모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법률이 될 위험이 커진 것이다. 물론 법상 이의제기가 부당해야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되지만, 부당의 판단 기준이 법률적으로 명확치 않아 사실상 이의제기한 것만으로도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교직원이라는 이유만으로 항상 감시 속에 살아간다는 불안감이 증대되어 교육자로서의 자존감에 커다란 상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법은 누구든지 금품수수나 청탁 사실을 신고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신고하면 보상과 포상금도 주어지기 때문에 교직원 입장에서는 모든 국민이 감시자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악의적인 신고자에 대하여는 무고죄로 처벌할 수 있으므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도 있지만, 김영란법 제13조 제2항*은 해석상 의심이 가서 신고하면 무고죄로 처벌할 수 없을 것으로 이해된다. 마지막으로 김영란법상 일선 학교 교직원들이 교육부 공무원을 상대로 업무 관련 협조를 구하는 것이 부정청탁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법 해석상 불분명하기 때문에 향후 교육부와 일선 학교 간 소통이 급격히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일선 교육현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민원을 처리할 수 있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교육부 관계자와 일선 교직원 간 소통이 이뤄지도록 제도적 보장을 하지 않는 한 향후 교육행정상 큰 혼란이 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PART VIEW] 학교, 특정일 지정… 공식적 소통의 장 마련해야 김영란법으로 인해 향후 교육계는 상당한 격변기를 거쳐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위법성 여부를 가리는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김영란법 시행령에 식사비 3만 원, 선물 5만 원, 경조사비 10만 원 한도를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이 금액 범위 내에서 이뤄지는 식사나 선물, 경조사비 등의 수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그러나 이 기준금액은 국민권익위원회가 사건 처리 시 조사 개시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에 불과한 것이지, 면책기준을 정한 것은 아니다. 일명 ‘란파라치’ 등이 신고한 경우 국민권익위도 금액을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일단 조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국·공립학교는 물론이고 사립학교 교직원 역시 학생 또는 학부모들과 사적 소통을 최소화하고, 공개적으로 학교 차원에서 특정한 일자를 정하여 ‘대화마당’ 등과 같은 공식적인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모든 학교는 내부적으로 김영란법 매뉴얼을 만들어서 이를 비치하고 모든 구성원이 이를 준수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감독하는 일을 지속해서 수행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학사행정을 투명하게 할 필요성이 있다. 학사일정은 물론이고 성적·수행평가, 입학 등과 관련한 절차와 내용을 수시로 홈페이지나 전자문서를 통하여 학생이나 학부모 등에게 공시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최대 피해자는 교육계 아닐까 김영란법의 시행으로 인하여 부패방지라는 성과는 다소 얻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대가 또한 너무 클 수 있다는 우려가 든다. 특히 이 법으로 인해 대한민국 교육계에서 진정으로 학생을 선도하거나 가르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는 교육자들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매우 우려스럽다. 교육이란 지식전달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통하여 앞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몸소 배우고 연마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 김영란법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집단은 교육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진정한 교육을 포기할 수 없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학생 또는 학부모들이 성적·수행평가·입학 등과 관련하여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이를 하소연할 수 있고 면책도 될 수 있는 공식적인 옴브즈맨 제도를 설치하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 지금 학교는 소송이 난무하고 민원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등 정당한 학생지도조차 대항할 수 없는 ‘교육 아노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교총에 접수된 교권침해 건수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지난 2006년에 179건이었던 것이 2015년에 488건으로 2.7배 증가했다. 특히 학부모와의 갈등·분쟁의 경우 2015년도에 발생한 488건의 교권침해 건수 중 227건으로 46.5%나 차지하고 있다. 이는 상담 건수로 잡힌 표면상 수치일 뿐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 발생하는 교권침해 건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육부에 보고된 교권침해 현황과 실제로 가해자에 대한 조치 현황을 살펴보면 더 심각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교권침해 행위에 대한 가중처벌 주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교원단체·정부·국회에서 법제화가 논의되었다. 한국교총의 건의에 따라 지난 2012년도 교육부에서 발표한 ‘교권보호 종합대책’ 방안에 교권침해 학생·학부모 등에 대한 조치 강화 차원에서 학부모 등 제3자의 교권침해에 대한 ‘가중처벌’을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정부가 법안발의를 진행하다가 학부모단체들의 반발이 예상되자 슬그머니 빼버렸다. 그 후 19대 국회에서 일부 의원들이 가중처벌을 담은 법안을 발의했으나 논의조차 못 하고 자동 폐기된 바 있다. 교육계의 교권보호 요구가 빗발치자 국회는 지난 2015년 12월 31일에 ‘교원의 지위향상을 위한 특별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통과시켜 이듬해 8월 4일 시행에 들어갔다. 그 내용을 보면, 교육활동 침해행위의 내용과 조치결과 관할청 보고, 교원치유센터 지정·운영, 학생 및 보호자의 특별교육 또는 심리치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가해자에 대한 과태료 부과와 가중처벌 등 조치 등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그 실효성에는 의문이 제기됐다. 이같은 지적은 교권침해 행위와 수준은 도를 넘어서고 있는데 법령은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따른 것이다. 이 때문에 지난 6월 출범한 제36대 교총 회장단은 첫 번째 현안 과제로 교권침해 행위에 대한 가중처벌 법제화를 꼽았다. 현행 교권보호법의 실효성을 높여 공교육에 대한 신뢰도를 제고하고, 학생의 학습권 침해를 막아 더 이상 교권침해 행위를 방치 하지 않겠다는 이유에서다. [PART VIEW]교총에서 추진 중인 법안 내용(표 3 참조)을 살펴보면, 현행 법령은 교원의 정당한 교육활동 중 발생하는 폭행·협박·명예훼손·모욕 등에 대응하는 제도적 장치의 규정이 미흡하고 교원 개인의 법적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전제아래 교원의 교육활동 침해사건에 대하여 관할청이 해당 교원의 사용자로서 법적 조치의 책임을 부과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에 따르면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 일부를 개정해 교육활동 침해행위를 한 학생 아닌 제3자의 폭행·명예훼손·모욕 등이 관계 법률의 형사처벌 규정에 위반된다고 판단되고 그 행위로 피해를 입은 교원이 요청하는 경우 관할수사기관 등에 고발 조치하도록 했다. 또 장래 피해 발생 가능성 등을 고려하여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접근금지 조치하고 피해를 입은 교원이 직접 관할 수사기관 등에 고소·고발·손해배상 청구 등의 조치를 하는 데 필요한 행정적·절차적 지원을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정당한 사유 없이 특별교육을 이수하지 아니한 보호자에게 과태료를 부과하는 내용도 포함했다. 교권보호를 위한 법령개정의 방향과 과제는 교원이 정상적인 학교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법적인 보호 장치 마련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교권보호는 학생의 학습권 보장과 학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권 실현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물론 여야 국회의원은 이념을 떠나 초당적인 관점에서 교권보호 법안 마련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몇 해 전 ‘우리의 교육은 지속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받고 한동안 고민했던 적이 있다. 자녀의 경쟁력을 기르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학부모, 학업 스트레스와 권위적 교육환경에 허덕이는 학생들, 참된 가르침의 의미를 잃고 휘청이는 교사들…. 이러한 교육으로 학생들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교육공동체 모두가 의미를 찾으며 교육활동에 참여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세계와 자유롭게 어우러지는 역량이 필요하고, 거대한 글로벌 이슈들을 직면하게 된 이 시점에서 우리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으로 세계시민교육을 제시하고자 한다. 티셔츠 한 벌에 담긴 세계시민교육 우리가 무심히 사 입는 티셔츠의 면화는 우즈베키스탄의 목화밭에서 어린이들의 노동착취를 통해 싼값(약 14센트)으로 채취되며, 면화 농사에 들어가는 살충제(전 세계 살충제 사용량의 10% 이상 차지)는 생산지의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티셔츠 한 벌을 만드는 공정 및 운송·판매과정에 탄소 4,600그램이 발생하고, 가상수 4,000리터를 사용하는 등 엄청난 물과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다. 이는 또다시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 환경오염, 물 부족 등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우리의 행동이 지구 환경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예전보다 그 영향의 강도가 강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호의존성의 심화로 빈곤·분쟁·환경 등의 문제가 국지적이 아닌 지구적 대응을 해야 하는 글로벌 이슈가 되고 있다. 지구촌 곳곳의 문제들이 단순히 그 나라들의 잘못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구촌 권력의 역학 구조에서 생겨났고, 그 대응 또한 전 지구적인 힘이 필요해진 것이다. 유네스코 헌장 서문에는 ‘전쟁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평화 또한 인간의 마음에서 구축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글로벌 이슈의 해결과 지속가능한 지구촌을 만들기 위해 국제기구 및 여러 국가가 힘을 모으고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곧 교육에 있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세계시민교육이 전 세계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시민교육은 기존의 교육에 변화를 가져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종래 우리 교육이 개인의 경쟁력 강화를 통해 국익에 기여하는 교육, 획일화와 경쟁을 강조하는 지식 중심의 주입식 교육이었다면, 세계시민교육은 학습자의 세계시민성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에 인지, 사회·정서, 행동의 세 역량을 모두 키우기 위한 과정 중심적·문제해결 중심적·참여지향적인 교육을 바탕으로 한다. 기존 학교 교육의 틀로는 다양성이 심화되는 세계와 새로운 교육을 갈망하는 사회의 요구를 담아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세계시민교육은 우리 교육현장이 다양성과 공생의 가치를 배우며 성장하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으로 다시 서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책임있는 세계시민을 길러내는 교육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인 논의에서는 세계시민교육을 ‘학습자들이 더 포용적이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식·기능·가치·태도를 길러주는 교육’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교육부에서도 ‘인류 보편의 평화·인권· 다양성 등에 대한 지식·기술을 습득하고 가치를 내면화하며 책임감 있는 태도를 함양하는 교육’이라고 정의하였다. 쉽게 말하자면 학생들을 ‘세계시민’으로 키워내자는 것이다. 단순히 한 나라의 국민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시각으로 나의 행동이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책무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키워내는 교육이 세계시민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시민교육의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역사와 교육에 들어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였고, 이는 교육기본법 제2조(교육이념)에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도 우리 초·중등 교육이 추구해나갈 교육 비전으로 제시한 인간상에 세계시민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문화적 소양과 다원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류 문화를 향유하고 발전시키는 교양 있는 사람,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세계와 소통하는 민주 시민으로서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는 더불어 사는 사람’이 그것이다. 세계교육포럼서 양질의 평생학습 강조 2012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로벌 교육 우선구상(Global Education First Initiative, GEFI)’을 출범시켰다. 여기에서 글로벌 시민의식 함양 즉, 세계시민교육이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등장하였다. 2015년 5월, 지난 2000년부터 시행되어온 교육을 점검하고, 오는 2030년까지 교육목표를 결정하기 위해 전 세계 교육 분야 최대 규모 행사인 ‘세계교육포럼’이 인천에서 열렸다. 이 포럼에서 채택한 ‘인천선언’에는 2030년까지 모두를 위한 양질의 교육과 평생학습 기회를 보장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면서 그 실천방법 중 하나로 세계시민교육을 확대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유엔 또한 2015년 9월 미국 뉴욕에서 2030년까지의 전 세계 공동의 발전 목표를 정하였는데 전 세계의 공존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에 합의하였다. SDGs 속에 세계시민교육을 포함한 유네스코의 Post-EFA(차세대 모두를 위한 교육) 교육목표 전체를 채택함으로써 세계시민교육이 전 세계적인 교육의 방향으로 자리매김한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PART VIEW] 교육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아직까지는 세계시민교육이 시작된 단계이고, 범위가 매우 넓어 교사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시민교육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교과수업과 생활지도를 통해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었던 교육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시민교육은 평화·인권·문화다양성·지속가능발전·국제이해 등이 자연스럽게 접목된 교육이다. 이들은 이미 교육과정 안에 들어와 있던 내용이며, 교과교육 내용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세계시민교육과의 관련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표 참조. 관심이 있는 학교와 교사들이 창의적체험활동이나 자유학기제에 시수 배정, 주제통합 프로젝트 학습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서울·경기교육청 등을 중심으로 세계시민교육을 위한 교과서를 개발하고 있으며, 교육과정과의 연계를 위한 교수학습지침서 개발 등 연구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교육부와 지역교육청에서도 중점과제 선정, 선도교사 선발, 교원 연수 운영 등 지원을 하고 있어 세계시민교육이 점차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교육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교육자로서 확신을 가지고 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시야를 넓혀 세계시민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면 교육의 힘이 더욱 강조되고 있으며, 교육으로 지구촌의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교육의 힘을 되찾고, 지금의 교육을 지속가능한 교육으로 바꿔내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그 시작점으로 지구촌의 복잡하고 유기적인 연계성 속에서 세계시민으로 살아야 할 책무성을 가진 나를 발견하고 세계시민교육을 실천해보는 것은 어떨까?
2015년 7월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이 시행되면서 이제 인성교육은 한국에서 국가적 교육 의제가 되었다. 같은해, 유엔과 유네스코는 세계시민교육을 2030년까지 모든 회원국이 추진해야 할 글로벌 교육 의제로 설정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인성교육과 세계시민교육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 인성교육과 세계시민교육의 공통점 먼저 공통점을 살펴보면, 인성교육과 세계시민교육 모두 지식 위주의 인지 역량(cognitive skill) 중심 교육을 넘어, 인성과 시민성이라는 비인지적 역량(non-cognitive skill)을 배양하는 교육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인성교육과 세계시민교육은 둘 다 가치 지향적 교육이지만 지향하는 핵심가치와 덕목이 다르다. 인성교육은 ‘자신의 내면을 바르고 건전하게 가꾸고 타인·공동체·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다. 그리고 예(禮)·효(孝)·정직·책임·존중·배려·소통·협동 등의 마음가짐이나 사람됨과 관련되는 것이 핵심적인 가치 또는 덕목’이라고 인성교육진흥법 제2조에 기술되어 있다. 반면에 세계시민교육은 지구 공동체와 인류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sense of belonging)과 연대감을 배양하며, 평화·인권·민주주의·정의·차별 금지·다양성·지속가능성 등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도록 교육하는 것을 핵심내용으로 하고 있다. 인성교육은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상정하고, 예(禮)·효(孝) 등 한국 유교 문화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반면, 세계시민교육은 세계 공동체를 상정하고 그 속에 사는 인류의 평화·인권·민주주의·정의·차별 금지·다양성·지속가능성 등 보편가치를 배양하는 교육이다. 유럽은 시민교육, 한국은 인성교육 강조 인류 역사에서 대체로 인성교육은 대가족 공동체와 마을 공동체, 그리고 종교가 담당해왔다. 그런데 오늘날 핵가족 사회가 되고, 마을 공동체가 무너지고, 종교가 힘을 잃으면서 인성교육이 약화되었다. 한국에서는 도덕 과목이 학교 정규 과목으로 있으나, 실제영향력은 약하다 보니 인성교육진흥법을 제정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서구에서는 ‘인성’을 대체로 시민교육(civic education)이라는 과목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에서는 아직도 종교가 법이요, 규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듯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다. 왜 유럽 국가들은 시민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한국은 인성교육을 강조할까? 아마도 기본 철학이 다른 것 같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개인 윤리와 공동체 윤리가 연속되고, 연계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신독(愼獨)·신언서판(身言書判)·인의예지(仁義禮智) 등이 좋은 예이다. 유럽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개인 윤리와 공동체 윤리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프랑스의 경우 정치인의 혼외정사나 연애는 사생활이라고 해서 국가 경영 능력과 별개로 치부한다. 대통령의 사생활이 정국 운영과는 무관하다는 사고를 한다. 따라서 프랑스에서는 공교육이 시민교육과목을 통해 공동체 윤리만 담당하고, 개인 윤리는 개인·가정·사회에 맡겨 두고 있다. 개인윤리와 공동체 윤리는 따로 생각해야 하나? 하지만 개인윤리와 공동체 윤리가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개인윤리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친절하며, 깔끔하고, 정숙하며, 정직하는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국민이 있을 수 있다. 반면 국가·집단 차원에서는 상명하복·순종·전쟁과 침략·잔인함 등을 보인다면 높은 수준의 개인윤리가 민주주의 사회의 사회윤리나 세계 공동체를 상정하는 보편윤리로는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연계시키면 도덕군자가 통치하게 되어 유토피아가 될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중세 유럽의 가톨릭·미국의 청교도정신·이슬람 근본주의·유대교 근본주의·조선시대 주자학·인도의 힌두교가 낳은 역사적 폐해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16세기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정치와 도덕의 분리를 주장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다. 인도의 경우 힌두교는 훌륭한 정신적 가치와 교훈을 준다. 그러나 힌두교는 카스트제도를 뒷받침하여, 인간을 차별하고, 불가촉천민을 당연시한다. 오늘날 광신적 이슬람 근본주의는 자살 폭탄 테러도 정당화 한다. 이런 면에서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구분하고, 따로 생각하는 것이 더 진전된 공동체임이 틀림없다. 지구 전체로 확대된 한국의 공동체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한국은 어떤 사회인가? 과학 기술·교통·통신의 발달로 세계는 한없이 작아져 진정한 지구촌(global village)이 되었다. 비행기로 하루 만에 지구 대척점에 도착한다. 온난화라는 전 지구 공동의 과제를 안고 있으며, 시리아 전쟁으로 인한 유럽 난민 문제, 브렉시트(Brexit) 등이 한국의 경제에 영향을 주는 세상이다. 불가피하게 한국인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크기는 한반도에서 지구 전체로 확대되고 있다. 이제 한반도는 핵심 공동체이고, 지구 전체는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체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한국의 인성교육도 ‘개인 윤리+한국 사회윤리+지구 공동체윤리’를 담아내야 할 때이다. [PART VIEW]세계시민교육은 인류 공동으로 직면하는 문제들에 대한 관심을 촉진하고, 지구촌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연대감 및 책무감을 고양하는 교육이다. 또한 인권·사회정의·다양성·평화·지속가능 발전의 가치를 내재화 하는 교육이다. 오늘날 주요 글로벌 이슈 및 지구촌의 상호 의존성에 대한 통합적 지식 및 비판적 이해의 바탕 아래 인류 공동의 문제를 평화롭고 지속가능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다. 이를 위해 소통·협업·창의 및 실천 기술을 습득하고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여, 이를 통합적으로 학습 내용 및 학습 과정에 담아내는 교육이 세계시민교육이다. 인성교육이 이러한 세계시민교육을 담았더라면, 아니 앞으로 담아낸다면 21세기에 바람직한 교육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과거 회귀성 개인윤리에 머무른다면 인성교육은 민주시민사회의 윤리, 나아가 미래의 세계시민공동체 윤리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과거에 머무르느냐 아니면 미래지향적 교육으로 부상하느냐 하는 것은 인성교육이 민주시민과 세계시민을 양성하는 그런 내용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또한 오늘날 21세기 교육의 핵심 과제인 창의성과 혁신은 자유로운 개인, 융합적 사회를 전제로 한다. 인성교육의 덕목인 예(禮)·효(孝)·정직·책임·존중·배려·소통·협동과는 매우 다른 측면인 자유로움·남과 다름·엉뚱함·실패·몰입·집중·까다로움 등을 필요로 한다. 스티브 잡스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자유롭고, 남과 다르고, 몰입·집중하고, 괴팍하고, 까다롭고, 실패와 좌절을 겪었으며, 덜 사회적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창의성과 혁신을 이룰 인재들을 육성하기 위한 인성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인성교육이 답할 수 있어야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다. 인성교육에 요구되는 새로운 가치 오늘날 한국은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다른 인종·다른 문화·다른 종교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연간 수백만 명이 해외로 사업차 또는 관광차 나가고 있다. 이런 21세기 한국인에게 한국이라는 공동체만 상정해서 핵심 덕목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덕목이 되고 말 것이다. 세계 공동체를 상정하고 세계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덕목 즉, 보편 윤리를 가르치고, 배우도록 해야만 시대에 맞는 필요한 교육이 될 것이다.
세계화와 세계시민교육 손안의 작은 스마트폰으로도 세계의 따끈따끈한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계화라는 말은 더이상 낯설지 않은 단어가 되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교육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가? 요즘 높아지는 세계시민교육에 관한 관심은 이러한 고민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세계시민교육은 교육의 구조적 한계와 이에 따른 교사들의 인식 부족, 입시 위주의 교육문화 그리고 이상과 동떨어진 학교 현장의 벽에 부딪혀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교사 10명 중 6명 꼴 세계시민교육 잘몰라 한국 교육계에서 세계시민교육은 주요 관심사이다. 유네스코와 같은 국제기구를 비롯하여 각 시·도교육청에서는 세계시민교육 선도교사 양성 프로그램과 온·오프라인 강의, 그리고 교사 지침서와 같은 자원들을 제공하며 교사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또한 서울·강원·경기교육청은 서로 협력하여 세계시민교육 교재 및 교육과정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관심에도 불구하고 한국교육개발원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초·중·고 교사 1,96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60.6%가 ‘세계시민교육을 잘 모르거나 들어본 적 없다’고 응답했다. 이는 설문 참여 교사들의 낮은 연수비율(9.4%)과 세계시민교육을 학교 활동에 활용하지 않는 비율(70.8%)을 고려하면 이해 가능한 결과라 하겠다. 서울특별시교육청 자료**에서는 중앙정부의 지원이 빈약해 체계적인 연수가 제공되지 않고, 우리의 전반적인 교육풍토가 입시 위주로 진행되고 있어 교사들의 인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도 올해는 교사들의 인식이 예전보다 조금 나아진 것으로 보인다. 주변의 동료 교사들에게 물어보면 ‘세계시민교육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며, 세계시민교육이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인식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대답들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에게 ‘세계시민교육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혹은 ‘세계시민교육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라고 질문하면 자신 있게 안다고 하는 교사를 쉽게 찾을 수 없다. 대부분은 기존의 국제이해교육, 지속가능한 발전교육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았으며 또한 국제적 교육 의제에서 비롯되어 시행해왔던 교육들이 학교교육과정에 가시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사라진 것처럼 세계시민교육 역시 한때의 열기로 끝나지 않겠느냐는 시각이 많았다. 이러한 경향은 근본적으로 한국이 가진 교육의 하향식 정책 결정구조와 진행 방식, 그리고 한국이 직면한 학교 교육의 한계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보여진다. 학교마다 교육사업 몸살... 교사들 업무부담 커 세계시민교육이 함의하는 다양한 주제는 이미 학교 현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문화 교육·창의 교육·글로벌 인재교육 등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문제는 이렇게 현장에서 운영되는 교육 사업들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현재 일선 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교육 사업 중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STEAM 교육·인성교육·진로교육·다문화 교육·영재교육·독서교육 등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방과후학교·돌봄 교실·학부모 교육까지 진행하고 있어 학교는 참으로 많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학교에서 열리는 각종 전시회 및 교내외 대회, 체험활동만 보더라도 10년 전과 비교하면 훨씬 세분화되고 많아졌다. 당연히 교사들이 맡게 되는 행정 및 교육 업무 역시 더욱 증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미 수많은 교육활동과 그에 따른 행정업무에 지친 교사들에게 세계시민교육은 또 하나 얹어진 짐으로 인식되기 쉬울 수밖에 없다. 더욱이 교육활동 결과가 경연이나 대회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은 경쟁과 순위 매김에 익숙해진 학교문화와 한국의 교육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세계시민교육이 영어나 외국어교육, 글로벌 인재교육과 자주 결부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어 그 본래의 의미와 상관없이 많은 교육활동이 입시와 경쟁에 휩쓸려 일부만 부각되는 점 역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나마 입시와 관련이 없는 영역이라면 지속적인 관심조차 받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관심과 지원이 부족한 분야는 그 가치와 상관없이 ‘아는 사람만 아는 그들만의 교육’으로 끝날 확률이 높다. ‘그들만의 세계시민교육’은 곤란 사실 ‘세계시민교육’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갈등이 한창이었던 1차 세계대전 이후 철학자들은 국가와 세계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시민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고민을 해왔다. 한 예로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교육의 과제는 통제가 아니라 사물의 가치를 파악하는 능력을 길러 자유로운 공동체의 현명한 시민들을 양성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고, 또 개인의 자유로운 창조성과 시민 정신을 결합함으로써, 오직 소수만이 성취할 수 있었던 가치를 사람마다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시민이 국가의 이기심을 넘어 인간과 세계를 해석하고 실천과 정치적 행동을 통해 변혁하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고 했다. 유네스코가 강조하는 ‘소속감(sense of belonging)’ 역시 국가를 초월하여 세계시민으로서의 소속감과 정체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비슷한 관점을 지닌다고 하겠다. 2009 국가교육과정에서도 ‘세계와 소통하는 시민’과 ‘배려와 나눔의 정신’, ‘공동체의 발전’이란 말들이 언급되어 있으며, 실제 학교에서 가르치는 다양한 교과가 이러한 생각들을 공유하고 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지불식간에 이미 우리는 많은 것들을 듣고 배워왔고 또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교사가 세계시민교육이라는 용어가 주는 생소함과 이해 부족으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잘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세계와 소통하는 배려와 나눔 정신 길러야 세계시민은 무엇이고 세계시민을 기르기 위한 교육은 어떤 것인지 학자와 전문가들 사이에 합의된 하나의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시민교육 역시 그 범주가 넓어 국제 경쟁력을 위한 리더십부터 윤리 교육·변혁적 교육·비판적 교육 등 다양한 의미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세계시민교육의 개념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깨달아야 할 것은 교육자의 역할이 학생들에게 세계시민이 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격동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 넓은 범위의 다양한 생각과 이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여러 방식이 있음을 안내해주고 가치판단과 결정은 학생들이 내릴 수 있게 돕는 과정 자체가 바로 세계시민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계시민으로서 어떤 세계를 꿈꾸고 만들어 나가고 싶은가? 스스로 끊임없는 반추와 고민을 통해 세계시민교육의 의미를 체득한 교사의 수업에는 세계시민교육이 자연스레 녹아들게 되어있다. 많은 교사가 연수를 통해 얻고자 하는 부분은 ‘세계시민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지루한 이론보다는 수업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자료와 전달 기술’에 관한 것이다. 지금 당장 가시적인 효과를 위해 연구학교와 연수과정의 수를 늘리거나 교육과정과 자료 개발에 재정을 투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연수와 자료, 혹은 교육과정 개편이 교사들의 낮은 인지도와 저조한 확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PART VIEW] 다양한 교육 주체 참여한 토론의 장 필요 최근들어 세계시민교육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제대로 된 첫 단추가 없다. 다시 말해 세계시민교육의 개념, 목적, 정당성과 같은 기본적인 논의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한국의 교육적 상황에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지에 대한 고찰도 부족했다. 이것이 문제점의 시발점이 아닐까 싶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진정 우리에게 세계시민교육이 필요한 것인가, 필요하다면 어떠한 내용과 방향성을 갖고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교사와 학생, 학부모 그리고 다양한 교육 주체들이 자유롭고 활발하게 토론의 장을 열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토론의 장은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세계시민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해결을 모색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채널이 될 것이다. 또한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고 만들어 나가는 토론의 장은 세계시민교육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고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세계시민교육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아가는 데 귀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독일인은 세계 어디든지 있어. 사람들이 너를 알아볼 거야.” 2016년 7월에 개봉한 나의 산티아고(Ich bin dann mal weg)라는 독일 영화에 나오는 대사이다. 주인공 하페는 유명한 코미디언이지만 과로로 쓰러진다. 그는 의사로부터 3개월간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처방을 받게 된다. 그는 산티아고로 순례를 떠난다. 오지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독일인도 만나지만 홀로 자신과 대면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을 만난다. 그는 어느 날 텅 빈 마을로 들어간다. 어느 집 벽에 ‘나와 너’라는 낙서를 보고,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아이를 보며, 그 아이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다. 그 짧은 순간의 장면에서 그는 자신과 신의 관계가 나와 너의 관계였던 과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하며 자신 안에 있었던 너라는 신을 느끼게 된다. ‘나와 너’의 관계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 나의 산티아고는 한 번쯤 우리에게 진정한 세계시민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세계를 누비고 다닌다고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이라고 볼 수 없다. 하페가 깨달았던 ‘나와 너’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한 세계시민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풀이하자면, ‘자신과 타자’의 관계이다. 자신은 나이며, 타자는 내가 대상화하며 관계를 맺는 세계이다. 세계는 자연·사람·문명을 말한다. 시민성은 세계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다름’과 ‘같음’을 인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타자와 관계를 설정할 때 기초적인 것은 ‘태도’이다. 세계를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데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 세계시민의 태도는 체계적 훈련을 통해 습득된다. 예컨대 아이에게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호기심·개방성·진실함·배려·공감능력은 장기간의 커리큘럼에 의해 길러진다. 지식으로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교류하며 타자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하면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지, 스스로 느끼며 깨달아야 한다. 태도와 마찬가지로 ‘인식 및 판단 능력’도 나와 타자의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 세계시민은 지구적 이슈가 자신의 삶과 직접 관련된다는 인식에서 시작하여 양심은 물론 자유·평등·정의 등의 가치에 기초하여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세계시민은 ‘실천력’을 지니기 위해 판단에 기초하여 반복적으로 행동해보아야 한다. 유럽을 품에 안은 독일의 세계시민교육 2015년 현재 독일에는 약 800만 명의 학생들이 약 80만 명의 교사와 초등학교 15,578곳, 중등학교 10,255곳에서 학습하고 있다. 독일의 모든 초·중등학교에서는 체계적으로 정치교육·윤리·철학·종교 수업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민주시민성과 세계시민성을 함양시켜준다. 앞에서 언급한 자신과 타자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해주는 태도·인식 및 판단 능력·실천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독일은 연방국가이기 때문에 16개의 주가 독립적으로 교육정책을 시행한다. 중앙정부는 교육의 방향만 제시하고 16개의 주(州)가 다양하게 자율적으로 구체적인 교육내용과 커리큘럼을 정해서 실시한다. 이는 교육예산이 중앙 정부가 아닌 주 정부에 의해 조달되는 것과 연관된다. 개별 주가 교육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제도 덕분에 독일에는 교육의 다양성이 존재한다. 중앙정부인 교육부가 돈줄을 쥐고 획일적으로 지시하고 통제하는 한국과는 다른 시스템이다. 다양성을 강조한 독일 교육은 창의적 인재가 나올 수 있는 토양이 된다. 세계시민교육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독일의 모든 학교에서는 민주시민성과 세계시민성을 길러주는 교육과정이 투입되지만 교육의 내용·방법·커리큘럼은 각각 다르다. 예컨대 독일에는 ‘유럽학교’라는 것이 있다. 유럽학교제도는 1991년 11월에 16개 주 교육부 장관이 합의한 ‘교육과정에서 유럽적 차원(Zur europaischen Dimension in Bildungswesen)’이라는 결의문에 기초하여 실시되고 있다. 교육과정에 유럽에 대한 학습내용을 넣자는 결의문이었다. 유럽통합이 가속화되는 시점에서 꼭 필요한 교육과정이었다. ‘어떻게 하느냐’는 자유였다. 각 주의 교육부 장관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다양한 교육과정을 만들어 실시했다. 유럽학교는 일종의 인증제로 운영된다. 각 주는 유럽학교 인증 기준을 마련하여 학교가 그 기준에 적합한 유럽 교육을 하면 유럽학교라는 타이틀을 부여한다. 2015년 기준으로 독일에는 542개의 유럽학교가 있다. 전체 학교 수(25,833개) 대비 약 2.1%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의 16개 주 가운데 바이에른(Bayern),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urtemberg), 자란트(Saarland) 등 3개 주에는 유럽학교 인증제도가 없다. 하지만 이들 주 역시 학생들에게 유럽연합의 정치제도와 유럽의 역사를 배우는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유럽학교의 가장 큰 목적은 하나된 유럽 [PART VIEW]유럽학교가 가장 많은 주는 186개가 있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 주이다. 니더작센(Niedersachsen) 주도 118개로 두 번째로 많다. 유럽학교가 운영되는 실태를 보면, 약간씩 차이를 보이지만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모델(NRW-Model)을 변형시켜 운영하고 있다. 반면 베를린에서는 NRW 모델과 차이를 보이며 이중언어 학교로 운영된다. 이를 SESB(Staatliche Europa-Schule Berlin) 모델이라고 한다. 즉, 독일에서 인증제도로 시행되고 있는 유럽학교는 대체로 NRW 모델과 SESB 모델로 각각 운영되고 있다. SESB 모델부터 살펴보자. 베를린에는 총 31개의 유럽학교가 있다. 모두 이중언어 학교이다. 독일어·영어 학교, 독일어·프랑스어 학교, 독일어·그리스어 학교, 독일어·이태리어 학교, 독일어·폴란드어 학교, 독일어·포르투갈어 학교, 독일어·러시아어 학교, 독일어·스페인어 학교, 독일어·터키어 학교가 있다. 각 이중언어 학교마다 초등과 중등학교가 있어서 학생이 연속성을 가지고 졸업장과 두 가지 언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이러한 유럽학교의 수업은 독일어 50%, 파트너 언어 50%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찰스디킨스 초등학교는 독일어·영어 유럽학교로서, 수업은 독일어 50%, 영어 50% 이루어진다. 대체로 과목별로 수업 언어가 다르다. 독일어 수업은 독일어로 하지만, 사회·역사·정치교육 등은 영어로 하는 식이다. 나아가 학생이 유럽의 역사와 정치제도를 학습하게 하며, 학생이 다른 유럽 국가의 파트너 학교와의 교환학생과 교환 실습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다양한 유럽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NRW 모델은 SESB 모델이 약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즉, 유럽의 역사·문화·유럽연합의 정치제도에 관한 수업이 교육과정에 투입되고, 제2외국어로 진행되는 수업의 도입 및 다른 유럽 국가의 파트너 학교와의 교류를 시행하는 형태이다. 특히 이 모델에서는 직업실습을 다른 유럽 국가에서 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독일에서 시행되는 두 가지 유형의 유럽학교는 세계와 관계를 맺는 학생 자신이 한 국가의 경계를 넘어 유럽, 나아가 지구촌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게끔 하는 태도·인식 및 판단 능력·실천력을 길러주고 있다. 독일에서 모든 학교는 정치교육과 윤리 수업을 통하여 세계시민성을 함양시키고 있지만, 유럽학교로 인증받은 학교는 학생의 세계시민성을 극대화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독일의 세계시민교육과 유럽학교 운영방식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아이들의 정체성은 교육을 통해 길러진다는 점이다. 유럽학교를 운영하는 지역에서는 아이들이 유럽이라는 가치를 내재하여 통합된 유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 아이들이 세계의 모든 장소에서 역량 있는 시민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세계시민학교나 아시아 시민학교를 제도화하여 세계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교육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세계가 다양하듯 세계시민교육의 방법과 내용도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는 어느 지역이나 표준화된 국제 학교가 있다. 주로 영어로 수업을 한다. 하지만 세계에는 영어만 있는 것도 아니며 영어만 잘한다고 세계시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지구적 상호 연계성에 기초한 네트워크적 사유방식, 소통 능력, 공감능력, 책임감, 협동심, 문제해결능력 등 세계시민적 역량이 길러져야 한다. 베를린 모델에서 보듯 이중언어학교는 아이들에게 다중 정체성을 길러주어 세계시민이 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주고 있다. 우리도 한국어-중국어, 한국어-일본어, 한국어-태국, 한국어-인도 학교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지역에 따라 인천 교육청은 한국어-중국어 이중언어학교를, 부산 교육청은 한국어-일본어 이중언어학교를 특화 시키는 것은 어떨까? 물론, 다양한 세계시민학교와 이중언어학교를 제도화할 수도 있다. 특화된 이중언어학교 설립 검토해 볼 만 셋째, 세계시민교육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육의 연계성이 중요하다. 독일에서처럼 초등과 중등 교육이 세계시민교육 학교로 연계되는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다. 독일의 NRW 모델은 SESB 모델을 살펴보면, 모두 상위 교육기관으로의 연계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공감능력과 같은 하나의 기초적 역량을 습관화시키는 것도 1-2년이 소요되며, 그러한 공감능력을 사용하여 소통하는 능력(대화, 설득, 토론, 합의)도 5년 이상 소요된다. 시민성은 연령에 맞는 역량(virtue)이 차례로 개발되면서 종합적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초등과 중등을 포괄하는 큰 그림을 그리면서 세계시민교육을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2014년 8월 싱가포르, 제30회 한·아세안교육자대회 지도자회의에 참석한 브루나이교원협회(BMTA) 하지안틴 아하드 회장이 당시 한국을 대표하여 참석한 한국교총 안양옥 회장의 손을 붙잡고 한국에서 대회를 조속히 개최해줄 것을 요청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인도네시아교원연합회(PGRI) 유니파 로시디 부회장도 한국 개최를 거들었다. 한국교총 대표단이 2016년도 개최 예정국인 베트남 교원단체와의 협의 등을 이유로 머뭇거리자 베트남 교원단체 대표단이 양보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어 다른 나라 대표단 모두가 만장일치로 한국 개최를 지지했다. 제32회 한·아세안교육자대회(ACT+1)가 9월 20일 오후 결의문 채택과 교육문화 투어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대회 기간 3일 동안 해외에서 320여명, 국내에서 주요 인사와 교육자 등 800여 명, 총 1,100여 명이 참석하여 열띤 토론과 고민을 쏟아냈다. 지난 몇 년간 평균 500여 명 정도가 참가한 점을 고려하면 한국 대회는 최근 대회 중 가장 큰 규모이다. 2008년 태국의 교원단체인 루쿠사파((Khurusapha, 태국교원심의회)의 초청으로 한국교총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참가한 이래 8년 만에 비아세안국가로는 최초로 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한·아세안교육자대회(ACT+1)는 지난 1979년 태국 방콕에서 제1회 대회를 개최한 이래 매년 열리는 아세안 최대의 교육자 국제대회이다. ASEAN의 총 10개국 중 미얀마를 제외한 9개국과 대한민국이 공식 회원국이다. 대회는 매년 개최되며, 회원국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순환적으로 개최된다. 해당국이 양보할 경우 순번이 조정될 수는 있다. 금번 한국 개최가 그런 경우이다. 내년에는 올해 대회를 양보했던 베트남에서 치러진다. 앞으로는 한국도 알파벳 순서에 의거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개최하게 된다. ASEAN의 철학과 상호 지식, 이해를 증진하고, ASEAN국민의 정신·문화를 함양하며, 교사·교육·과학·문화교류를 통해 상호 이익을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동안 ACT로 표기되어 오다 한국이 2012년 비아세안국가 최초로 정회원국이 되면서 ACT+1으로 공식 표기되기 시작했다. ACT+1에서 +1은 나라로는 대한민국을, 교원단체로는 한국교총을 의미한다. ACT의 영문명은 ASEAN Council of Teachers이다. 국제대회서 인성교육 강조 큰 의의 우선, 인성의 부각을 꼽을 수 있다. 이번 대회의 주제는 인성과 세계시민교육을 통한 양질의 교육 확대이다. 인성이 국제 대회에서 최선두에 주제로 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시다시피 세계시민교육은 최근 몇 년간 교육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부각되고 세계적 관심을 받은 어젠다(agenda)이다. 특히,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지난 2012년 9월 제67차 유엔총회에서 밝힌 글로벌교육우선구상(GEFI : Global Education First Initiative)을 통해 범세계적 교육의제로 부각되었으며, 이후 지난해 5월 인천 송도에서 개최된 세계교육포럼(WEF : World Education Forum)을 통해 향후 2030년까지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교육 분야의 목표를 천명할 때 중요한 실천과제가 글로벌 시민의식 함양이었다. 바로 세계시민교육이다. 인성과 인성교육은 지난 2012년 한국교총이 대한민국의 미래교육과 학생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새롭게 개념화하고 선도적으로 실천해온 우리 교육의 중요한 어젠다이다. 대한민국과 세계가 교육을 통해 공식적으로 만난 것이다. 크게 보면 세계시민교육 속에 인성과 인성교육이 포함될 수 있겠으나 그 개념과 내용이 다른 나라에는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교육으로 자리매김해 온 점을 감안하면 세계시민교육 속에 인성을 포함하지 않고 별도로 표기한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인성과 인성교육이 적어도 아세안 지역과 교육자들에게 깊이 각인되고 널리 알려지게 된 셈이다. 사실 한국교총은 지난해 대회 결의문에 처음으로 인성교육 내용을 담아냈었다. 특히 일반적인 권고문이 아닌 ‘촉구’로 격상하고 별도 항으로 독립하여 결의했는데, 이는 아세안 국가 및 교육자의 교총과 인성교육에 대한 관심과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보다 앞서 7월에는 EI 총회(세계교총 총회, *Education International)에서 인성교육에 대한 긴급 결의문을 발의했으나 세계 교원단체들의 많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참가한 일부 국내 단체의 교묘한 방해로 막판에 채택되지 못한 아픔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여 만에 대주제로 선정된 것은 인성과 인성교육을 아세안이 명실상부 인정했다는 것이며, 더욱더 확산되는 든든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한국교총, 교육부에게도 참으로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둘째는, 대한민국의 최초 개최와 전 회원국의 참가이다. 앞서 여러 문장 속에 비아세안국가 중 최초로 한국이 개최하게 됨을 언급한 바 있다. 이 의미는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아세안이 아닌 나라가 회원국으로 가입하기도 힘들지만 개최는 더 힘들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2012년 회원국이 된 이후 10년쯤 뒤에 개최하려는 계획을 준비했었다. 회원국으로서 맡은 소임을 충분히 하고, 다양한 교류·협력 활동을 벌이고 난 뒤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요청이 의외로 강했고, 한국 교육과 교사들에 대한 높은 평가와 더불어 한국 교육을 배우고 싶어 하는 강한 욕망이 밖으로 표출된 것도 한국 개최에 상당히 작용했었다. 여기에다 한류로 인해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개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차대한 과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울러 이번 대회는 아세안 전회원국 참가했다는 사실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대회 참가국 중 유독 눈에 띄는 나라가 있다. 그 주인공은 캄보디아와 라오스이다. 그들은 어려운 재정 여건 때문에 그동안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 한국 대회에는 참가했다. ACT+1의 창설과 운영 취지를 고려할 때 그 실천과 구현은 회원국 모두가 참여해서 추진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매년 만나서 소통하고 공유하며, 결의할 때 그 실천력과 성과는 배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들 나라들은 대부분 국내 교육적 상황이 아니라 재정 형편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부 몇 명이라도 초청을 해서 모두가 교류를 지속하는 것이 바람직함에도 그동안 개최국들이 참가를 유도하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다. 브루나이·캄보디아·인도네시아·라오스·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태국·베트남·대한민국. 비록 한국의 초청이었지만 명실상부 모든 회원국이 다 모인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 정성이 가미되어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교육 국제적 위상 높여 첫째, 32회 대회까지 오면서 거의 매회 결의문을 채택하고 실천을 다짐했었다. 이제는 선언적 의미의 결의문보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 매년 나라마다 교육적 상황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 해결책은 큰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공식적 참여와 더불어 결의된 상황에 대해서는 정부가 인증하고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둘째, 실천과 성과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 결의문의 실천과 성과를 잘 찾을 수 없는 것은 공유가 부족한 측면도 있다. 해당 국가별로 실천하고 성과를 낸 것을 다음 대회에서 발표하고 공유한다면 모든 교육자가 경각심을 가지고 실천에 대한 책무성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공식 프로그램에 반영하여 성과를 반드시 발표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마지막으로, 프로그램의 정기적 변경 내지는 비아세안국가의 초청(참가) 등을 통한 활성화 유도이다. 한국 대회까지 프로그램들은 거의 동일한 포맷을 유지하고 있다. 개최국의 상황을 조금 반영한 프로그램 정도가 다른 점이다. 이러다 보니 다소 식상해하고, 지루함을 느껴 대회에 참가했음에도 좌석이 비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10개국이 한 바퀴 순환하고 나면 완전히 새로운 포맷으로 대회를 기획·운영하거나, 매 대회 때마다 개최국에서 비아세안국가 중 교육 선진국을 초청하여 교류하는 등의 새로운 운영을 검토해볼 수 있다. 이전 대회와는 다른 의미를 창출한 이번 한국 대회가 더 나은 대회를 위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다면 대한민국 개최의 의미는 분명 ‘전설’이 될 것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최근 ‘숙제 없는 학교’와 ‘초등 선택형 평가 폐지’를 발표했다. 숙제를 폐지하는 것은 학생의 학습 부담을 덜어주자는 취지이고, 선택형 평가 폐지는 단순한 암기 중심 학습을 탈피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공감의 여지도 있다. 그러나 현장 교원이나 학부모의 충분한 의견 수렴이나 숙의 과정 없이 행정적 차원에서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숙제다운 숙제’를 논의할 수는 없었나? 대부분 사람은 숙제를 가정에서 공부시키는 수단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숙제는 교실을 벗어나 배운 내용을 확인하고, 다시 활용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앞으로 배울 내용을 준비하는 기회가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습은 교실 내에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가정과 연계되는 활동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숙제가 갖는 순기능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폐지하기보다 가정과 연계하여 ‘숙제다운 숙제’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먼저 면밀히 검토하는 과정이 선행됐어야 한다. 숙제를 폐지하면 학부모는 과연 어떤 판단을 하게 될까? 맞벌이가 많은 요즘, 숙제의 폐지는 고스란히 학부모의 또 다른 교육 부담으로 전가될 가능성이 높다. 또 폐지를 발표하기에 앞서 숙제에 대한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한 검증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각종 소규모 동아리활동을 지원하거나 연구학교를 지원하는 등 검증 방법을 다양화하여 ‘숙제 없는 교실’에 대한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밝혔어야 했다. 즉, 수업 과정에 미치는 효과, 가정에서의 학습 활동과 그 영향, 자기주도적 학습력 신장 등에 미치는 영향 등을 밝혀 이를 바탕으로 신중한 결정이 이뤄져야 했다. 여기에 더하여 교육청 차원에서 관련 정책연구를 수행하여 정책의 기초로 활용하는 방법도 모색되었어야 했다. 숙제가 사라지면 질문도 사라진다 서울시교육청은 ‘질문 있는 교실’을 주요 수업 방법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학생 참여 중심, 경험 중심, 협력적 배움 중심의 수업 전개를 통하여 활기차고 즐거운 수업을 위한 것이다. 창의적인 생각이 살아 있고, 상호소통이 원활하며, 서로 토론하고 협력하며, 배움의 즐거움을 깨닫게 하는 훌륭한 교육의 방향을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 하지만 질문은 학생이 학습할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따라서 잘못하여 ‘숙제 없는 교실’이 ‘질문 없는 교실’을 유도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동안 학교에서 숙제를 교육적으로 부과하거나 활용하는 측면에서 노력이 소홀했던 점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전체 학생에 대한 획일적인 숙제 부과나, 짧은 기간에 해결해야 한다든지 또는 스스로의 힘이 아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부정적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점은 교사가 반성해야 할 여지가 있다. 숙제는 수업의 연장 어느 교육학자는 ‘숙제는 학습자가 수업과 수업 사이에 교실 밖에서 하는 것으로 이는 학습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방식’이라고 하였다. 결국 숙제는 수업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듀이(Dewey)는 학습의 질과 양을 결정하는 것은 교과가 아니라 아동 자신이라고 했다. 이것은 아동에게 교육과정을 맞추라는 의미로 교육과정에 학생을 맞춰 이끌고 가려는 우리 교육 풍토에 경종을 울리는 경고이다. 숙제도 같은 맥락이다. 학생 스스로 자신에게 더 필요한 것, 알아야 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이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숙제가 제시되어야 한다. 이는 획일적인 부과가 아닌 개인 맞춤형 과제를 부과하는 방식이 된다. 수업 중 내가 알고 싶은 것 한 가지, 이것을 위한 질문 세 가지 등을 생각하게 하는 것도 좋은 사례가 된다. 숙제를 이렇게 초인지적 관점에서 부과함으로써 자기주도적 학습능력과 질문 있는 교실을 더욱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PART VIEW]선택형 문항도 창의력이 필요 또 다른 폐지의 대상이 된 것이 평가에서 선택형 문항이다. 선택형 문항에는 진위형·선다형·연결형·배열형 등 다양한 유형이 있다. 이러한 선택형 문항은 서답형에 비해 쉽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문항 출제기법에 따라 문항의 난이도는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선택형 문항은 서술형 못지않게 더 철저하게 해당 내용을 알아야만 응답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입수학능력시험의 선택형 문항이다. 초등학교 선택형 문항의 폐지 이유가 쉬운 문제라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학습 내용의 성격에 따라서는 선택형 문항으로 측정해 내야 할 것이 있다는 말이다. 선택형 문항을 ‘단순한 지식 이해 정도만 측정’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평가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경계가 필요하다. 물론 학습자의 다양한 반응을 확인하지 못해 창의성이나 문제해결력 같은 것을 측정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그러나 측정 목적에 따라 문항 형식을 융통성 있게 조절할 수 있고 간단한 사실이나 개념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평가 방법이 된다. 또한 해당 내용요소에 대하여 분석과 사고를 구사해야 해결할 수 있는 형태로 문항을 제시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필요하면 특정한 내용요소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선택형 문항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교사 입장에서는 오답 유형을 파악하여 교수·학습에 필요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물론 모든 문제를 획일적으로 선택형 문항으로 측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선택형 문항의 활용 범위를 교사에게 위임하되 일정한 범위 내에서 활용하도록 권장하는 것이 옳다. ‘된다’, ‘안 된다’라고 획일적으로 규정지어 놓는 수업관과 평가관은 바람직하지 않다. 숙제 폐지와 평가권 규제는 교사 자율성 침해 숙제를 부과하는 것도 평가도 교사의 고유한 권한이다. 교육과정 개발에서 숙의 모형을 제시한 워커(Walker)는 교사와 학생이 학교 놀이터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이야기한다면 이는 교육과정의 일부가 된다고 하였다. 교사가 연간 계획표를 세우고, 가르칠 내용을 결정하고, 가르칠 시간을 배당하고, 가르칠 순서를 정하는 것이 교육과정 설계이다. 학생들이 토론 수업에서 요점을 벗어나 샛길로 나갈 경우 교사가 바로 잡았다면 교육과정의 한 결정이 된다. 교사가 중요한 시사 문제를 다루기 위해 본래 계획된 수업을 미루었다면 교사는 교육과정 변경을 위해 전문적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만큼 교육과정에 대한 선택과 결정은 교사의 고유 권한이다. 숙제를 부과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다. 교사가 전문적 판단으로 필요한 내용과 분량을 부과하면 된다. 이것을 행정적으로 획일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교실 내 교사의 교육과정 실행을 행정력으로 규제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3월 ‘질문있는 교실수업 혁신 추진 계획’을 밝히면서 교사의 전문성을 교육과정 및 수업·평가를 설계하고 실행하는 역량, 민주적인 학교공동체 운영 역량, 학생의 전인적 성장을 촉진하는 역량으로 정의하고 교육과정·수업·평가 전문성 및 자율권 확대를 추진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숙제 폐지와 평가권 규제는 교사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이율배반적인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교실에서 교사는 교육과정을 실행한다. 국가에서 제시한 통합적·표준적인 국가교육과정이 학교 울타리를 넘고 창문을 넘어 교실로 연계되면 분화적이고 특수한 내용으로 전환되어 교사의 교육과정이 된다. 이것은 국가 교육과정을 학습자의 일상적인 경험과 흥미를 고려하여 다양화, 특성화하여 가르쳐야 한다고 보는 교육에 대한 권한 위임이다. 이러한 권한을 받아 교육과정을 만들고 결정하는 것도 교사이고 이를 실행하는 것 또한 교사이다. 여기에 따른 숙제 부과나 평가의 선택은 교사의 전문적 판단에 따라야 하며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920년대 미국 콜로라도주 수도인 덴버시에서 교육장을 지낸 뉼런(J. Newlon)은 ‘교사는 외부에서 만들어준 것을 전달하는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가르칠 교육과정을 마련하는 것이 전문성 향상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노력에 호응하듯이 덴버시의 교사들은 전문적 능력과 책임감이 나타나게 되었고 교사에 대한 인식까지 전환시켜 놓았다. 1920년대 당시 이러한 교육관과 교사들의 노력이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진로교육은 개인의 진로와 관련되어, 자기 자신과 직업세계를 이해하고 탐색하여 자신에게 적합한 진로를 찾고, 선택한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종합적인 활동을 말한다. 이러한 진로교육은 개인 특성에 맞는 직업을 찾아 배치하는 과정을 중시한다. 그러나 최근 복잡하고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새로운 방식의 진로교육이 요청되고 있다. 산업사회에서 지식기반사회로, 지식기반경제에서 창의력기반경제로의 패러다임 전환과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따른 채용 관행 변화 속에서 기존의 고정되고 정형화된 진로개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즉, 학교를 마치고 안정적인 평생직장에서 전문성을 신장시켜 나가면서 승진하는 전통적인 진로교육은 현실적으로 어려워진 상황이다. 진로교육의 변화와 지역사회 연계 필요성 이러한 새로운 진로교육의 패러다임 속에서 지역사회 연계의 중요성이 주목받고 있다. 교실 내 텍스트 중심의 진로교육이 노동시장 변화에 따라 필요한 역량들을 개발하고 진로를 준비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면, 지역사회 연계를 통해 공간을 확장하고 학교 밖 자원들을 활용하는 진로교육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지역사회 연계를 통한 맥락·체험적 진로교육은 더욱 생생하고 구체적인 직업탐색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개인의 삶과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고 이러한 통합적 관점 속에서 일의 사회적 가치와 책임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정책적으로도 진로진학상담교사 배치, 진로교육법 제정 등 학교 진로교육이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고, 특히 자유학기제와 맞물려 직업체험 활성화를 위한 자유학기제, 진로체험지원센터, 학교와 체험처 매칭시스템 등 지역협력체제와 체험 인프라 구축에 힘쓰고 있다. 지역사회 연계를 통한 진로교육 실태 진로교육에 있어서 지역사회 연계를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 연계를 통한 진로교육은 아직까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미흡한 상황이다. 경기도 내 중학교와 일반계고 교사 대상 설문조사 결과, 지역사회 연계 정도에 대해서 9.2%는 연계가 전혀 없다고 응답하였고, 대다수(58.8%)는 일부 기관(혹은 개인)과 연계하고 있으나 교류가 활발하지는 않다고 응답하였다. 지역사회 연계를 통한 진로교육의 유형으로는 직업인 초청 강연(38.6%), 심리검사 및 상담(34.9%)이 가장 활발하며, 학과체험(18.4%)과 현장직업 체험(17.4%)이 그 뒤를 이었다. 반면 약 25%인 104개 학교에서는 전혀 없다고 응답하였다. 학생들의 진로체험교육에 대한 요구 수준이 높은 것을 감안하면 아직은 부족한 실정으로 보인다. 이는 전국적인 조사 결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학교 진로교육 실태조사(2015)에 따르면 진로체험 참여율은 중학교 74.2%, 고등학교 68.4%에 그쳤고, 진로체험 중에서는 직업인 특강(56.5%), 현장견학(52.7%)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반면에 학생들의 만족도는 직업실무체험이 3.89점으로 가장 높았고, ‘앞으로 더 참여하고 싶다’고 응답한 진로체험 유형으로는 현장직업체험(55.1%)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학교 밖 진로체험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요구 수준은 높은데 비해 아직 양적으로는 부족한 실정임을 알 수 있게해 준다. 이와 함께 진로체험교육이 형식적이고 일회성 행사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어, 내용적으로 매우 부실하다는 지적도 많다.* 양적으로 체험활동을 늘리는 것에 치중하여 전반적으로 진로체험 사전 진행 및 사후 교육에 대한 안내가 부족하여 의미 있는 체험이 어려운 경우도 다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개인의 적성과 흥미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다양한 체험활동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많았다. 경기도 내 중학교와 일반계고 교사 대상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지역사회 연계를 통한 진로교육의 문제점으로 ‘프로그램 다양성 부족' 과 '교육수요자의 요구 충족 미흡’이 가장 많은 비율(42%)을 차지했고, 다음으로 일회성·행사성 프로그램(32%), 내용부실로 인한 형식적 체험학습 전락(17%) 순으로 나타났다. 면담결과에서도 이러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진로체험교육에 대해서 ‘그냥 재미로 하는 거’라고 받아들이는 학생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다양성이 부족하여 원하는 체험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과 기대만큼 깊이 있는 체험이 부족하였다는 등의 부정적인 인식이 많이 나타났다. 학부모들도 진로체험교육에 대해서 ‘수박 겉핥기’나 ‘놀러 갔다 오는 수준’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PART VIEW]이는 진로체험을 위한 지역인프라가 미비하고 체험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현실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그룹 단위 체험활동 운영이 어렵고, 대부분이 특정 시기에 한정된 직업체험처에 단체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어, 개인의 적성과 흥미를 충족시켜 주기에는 한계가 있다.*** 지역사회 또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적극적인 교육기부를 통한 체험처가 발굴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학교와 지역 연계의 어려움 학교에서는 진로교육의 지역 연계 필요성에 적극 동의하며, 학부모·동문회·개인적 인맥 등을 동원하여 지역사회 연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교사들은 과중한 업무와 지역사회 자원 부족 및 비협조 등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진로진학상담교사들은 본연의 업무인 상담과 진로수업 외에 진로체험처 발굴이 추가되었으며, 진로교사에게 지역사회 연계를 의존하고 업무가 집중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이 외에도 정보의 한계, 지역사회 인프라 부족, 지역사회의 비협조 등을 어려움과 한계로 많이 지적하였다.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안전문제와 지역사회 자원 및 인프라 부족’이 지역사회 연계의 저해요인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는 비단 경기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국단위의 진로교육실태조사결과 중·고등학교 진로진학상담교사들이 가장 부족하다고 느끼는 영역을 살펴보면 과반수 이상(중 62.9%, 고 62.6%)이 ‘유관기관의 네트워크가 가장 부족하다’고 응답했으며(송창용 외, 2015), 동시에 진로체험처 발굴과 관련하여 진로교사의 업무가 가중되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장현진, 2014). 학교 관리자들도 학교 진로교육과 관련한 유관 네트워크에 대해서 보통 수준으로 인식하였으며, ‘민간기업 및 체험처의 협조 및 지원’이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응답하였다(장현진, 2015). 진로교육과 지역 연계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 간 진로교육에 대한 시각 차이도 드러났다. 기본적으로 진로교육이 학생의 소질과 적성에 따른 진로선택을 지원하기를 기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교사들은 진로탐색 및 의사결정 지원뿐 아니라 삶에 대한 이해나 역량 개발도 진로교육의 중요한 목표로 인식하였지만, 학생이나 학부모들에게서는 그러한 인식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학생들이 진로교육에 바라는 점은 대부분 진로체험의 양적·질적 확대로 귀결되고 있다. 학부모들의 경우에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꿈을 찾도록 지원하는 것의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진로보다는 진학지도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학생과 학부모의 경우에 기존 경제적 부나 사회적 지위와 같은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에 따라 진로를 선택하던 과거 인식에서 탈피하여 학생들의 소질과 적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진로교육의 필요성이나 진로교육이 학생들 자신의 삶과 미래, 일의 의미와 가치, 자신의 진로와 사회와의 관계 등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포함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은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진로교육에 대한 기대는 지역사회 연계의 방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면담결과 진로교육에 있어서 지역사회 연계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하였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성원별로 약간 다른 관점을 가졌다. 학부모와 교사 대부분은 진로교육의 효율성 증대와 진로체험 강화 측면에서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지역사회 자원을 활용할 경우 비용이나 시간적인 면에서 효율적이고, 다양한 진로 체험처를 확보하여 학생들의 진로체험 기회를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일부 교사들과 지역 진로체험지원센터 담당자들은 지역공동체 형성에 더 주목하고 있다. 지역사회 연계는 단순한 체험처가 아니라 ‘커뮤니티’를 만들어 상시적이고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단순한 직업체험이 아니라 멘토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서 삶의 가치와 목표, 삶과 일의 관계, 살아가는 방식 등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역 연계 방향성에 대한 고민 새로운 진로교육의 패러다임 속에서 진로교육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계적 측면’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좁은 의미의 직업탐색이 아니라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같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급변하는 미래사회에 자기의 삶을 주도하고 타인과 소통하며 협력하는 역량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일회적인 직업체험보다는 지역공동체 내에서 지역주민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삶의 가치와 일의 의미는 물론 직업인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향 전환을 통해서만 현재 진로체험교육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아울러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외연의 확대보다 진로교육의 내실화를 꾀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를 위해서 ‘진로교육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본질적인 고민으로 돌아가서 학교구성원 간 진로교육에 대한 기대와 비전을 공유하고 지역사회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또한 지역자원을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수준의 지역사회 연계가 아니라 아이들의 배움터로서 마을과 아이들을 함께 길러내는 멘토로서 주민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진로체험교육을 기획해야 하며, 진로체험지원센터 인력을 보완하고 학교에 지역 네트워크 담당자를 배치하는 등 정책적인 뒷받침이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교과교실제는 교사가 이동하여 수업하는 방식이 아니라 교과에 맞게 특성화된 교실로 학생들이 이동하여 수업을 듣는 방식을 말한다. 교과교실제는 미국 등 서구에서는 일반적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수업방식이었다. 교육부는 2009년 학교수업을 다양화하고, 교과운영 방식의 전환을 통한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교과교실제를 도입했다(교육과학기술부 2009). 교과교실제의 도입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육부는 교과별 특성에 맞는 교실환경을 구축하고 학생중심의 맞춤형 교육과정 운영을 지원해왔다(교육부 2014). 교과교실제 선진형 운영학교는 2016년 현재 전환형 196개교를 포함해 모두 735개교(중학교 419개교, 고등학교 316개교)에 이른다. 과목중점형 교과교실제 운영 학교는 총 2,060개교(중학교 1,062개교, 고등학교 998개교)에 달한다. 선진형이든 과목중점형이든 교과교실제를 운영하는 학교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교육부는 교과교실제 도입 초기에는 모든 중·고등학교에 교과교실제를 확대하겠다고 밝혔으나 2014년 신중하게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이후 교육부는 기존의 교실 증설, 리모델링 등 인프라 구축사업에 주력하기보다 교실과 학생의 변화 등 소프트웨어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다. 교과교실제 예산 갈수록 줄어 교과교실제를 도입했던 초기에는 학급증설이나 리모델링 등을 통한 인프라 구축에 많은 예산을 투입했고 이로 인해 학교와 교실의 교육환경이 개선되었다. 또 교과교실제 운영으로 수준별 이동수업이 시행되었으며, 이를 위해 교사나 강사가 추가로 배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었음은 물론이다. 교과교실제를 시행하기 위한 전체 예산을 교육청별로 모두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교육부가 보통교부금을 통해 산정한 교과교실 운영비는 2010년 950억 원, 2011년 1,119억 원, 2012년 1,337억 원, 2013년 1,929억 원, 2014년 1,103억 원, 2015년 804억 원, 2016년 715억 원에 달한다. 교과교실 시설비는 2012년 1,682억 원, 2013년 1,246억 원, 2014년 354억 원 감액, 2015년 81억 원을 지원했다. 그러나 교과교실제에 대한 투자가 2014년 이후 줄어들고 있으며, 특히 시설비 투자는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처럼 교과교실제에 대한 예산 투자가 줄어드는 것에 대해 학교 현장에서는 이 사업이 지속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교실수업 개선 노력이 출발점 교과교실제가 2009년 도입된 지 7년이 흐른 지금, 교과교실제 도입이 가져온 성과를 점검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교과교실제의 도입 목적을 고려할 때 교과교실제의 성과는 첫째, 교과교실제가 학교수업의 다양화에 어느 정도 기여해 왔는지에 대해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성과는 교사들의 수업개선을 위한 노력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교과교실제가 학생들의 수업태도나 만족도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셋째, 교과교실제 정책의 도입으로 교수·학습활동에 긍정적인인 변화가 나타났다면 궁극적으로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존의 선행연구와 필자가 수행한 연구결과에 기초해 교과교실제의 성과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PART VIEW]교사들 수업개선 압박에 부담 커 첫째, 교과교실제가 학교 수업의 다양화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참여관찰·면담·설문조사·실태조사를 통해 발표된 연구결과는 대체로 학교수업이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우선 수준별 이동수업이 거의 모든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수업방식이 다양해졌다. 블록타임제·집중이수제 등을 통해 수업을 다양하게 운영하고, 학습자료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다(강휘석·김병찬, 2013 ; 조진일 외, 2009 ; 조진일 외, 2014). 교과별로 분석한 연구결과는 교과교실제가 실시되고 있는 학교의 사회수업에서 학생중심 활동이 증가했으며 교사들은 수업변화에 대해 압력을 느끼고 있었고(김혜숙·박선미, 2011), 과학 교과에서는 교사의 수업준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사들이 수업개선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서울교육종단연구 4~6차년도(2013~2015년) 자료*를 사용해 비교적 최근의 자료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결과, 선진형 교과교실제를 운영하는 학교의 교사들은 교과교실제를 전혀 운영하지 않는 학교에 비해 수업개선활동 즉, 자신의 수업공개, 동료 교사의 수업 참관, 단위학교 차원의 교과협의회 활동에서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우명숙, 2016). 교과교실제를 운영하는 학교의 교사들은 수업개선의 압력을 상당히 느끼고 있으며, 때문에 수업개선을 위한 노력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연구는 수준별 이동수업이 교과교실제에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수업방식은 아니며, 수업의 다양화와 수업개선을 위해 수준별 수업 이외에도 협동학습·코어티칭·융합수업·프로젝트학습 등을 교과특성에 맞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우명숙 외, 2015). 둘째, 교과교실제가 학생들의 수업태도나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결과에 기초해 살펴보면 학생들의 반응은 상반되게 나타난다. 교사가 아닌 학생이 이동하는 것에 대해 학생들의 초기 반응은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은 이동시간 때문에 휴식시간이 줄어든다든지, 담임교사와 만날 시간이 적어져 전달사항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거나 상담시간이 줄어드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반면 이동으로 인해 학생들이 한 교실에 계속 앉아서 수업을 받을 때 보다 졸음이 덜 하고 학교폭력의 문제가 발생할 시간이 줄어드는 점은 긍정적이라는 반응을 내놨다. 학생들은 무엇보다 학교의 교육환경 개선에 높은 만족도를 보였다(김홍원·오병욱, 2012 ; 박인우 외, 2012). 정책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만난 교사들은 학급을 증설하고 교과교실로 리모델링한 결과, 학생들의 교육환경에 대한 만족도가 무척 높았다고 말했다. 교육환경의 개선이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고 학교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예산이 많이 소요되긴 하지만 교과별로 필요한 자료와 기자재, 학생들의 교육활동 결과물을 갖춘 교실은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더 많이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현장교사들의 반응이다. 과학과목에서는 실험수업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고 연구결과(김혜숙·박선미, 2011; 전화영, 2011)도 있다. 서울교육종단연구 1, 2차(2010~2011년) 자료를 실증분석한 연구는 교과교실제가 수학에서는 학생들의 수업태도에, 영어는 수업평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결과를 내놨다(정동욱 외, 2013). 학교급별 연구에서는 선진형 교과교실제를 운영하는 고등학교의 국·영·수과목에서의 수업태도는 교과교실제를 운영하지 않는 학교의 학생들에 비해 긍정적이긴 하지만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한 수업태도 연구에서는 대학입시와 직결되는 영어와 수학 과목보다는 사회와 과학 과목 등에서 더 긍정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임소현, 2016). 셋째, 교과교실제가 수업의 변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분석한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과교실제가 학업성취도에 미치는 효과를 2011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자료를 사용해 실증 분석한 연구는 고등학교에서 교과교실 운영이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밝혔다(상경아·박경인, 2013).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제공하는 2010~2014년 에듀데이터(수능시험자료와 학교정보공시자료)를 사용해 교과교실제를 4년(2011~2014년), 3년(2012~2014년), 2년(2013~2014년)씩 각각 운영한 학교와 전혀 운영하지 않은 학교를 비교한 결과, 교과교실제가 학업성취도에 미치는 영향은 4년과 3년을 각각 시행한 학교에서 나타나지 않은 반면, 최근 2년 동안 시행한 학교에서 성적이 다소 높게 나타났다(우명숙, 2015). 교과교실제를 운영한 지 7년이 흐른 시점에서 성과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요약하자면 교과의 성격이 드러나는 교과교실이 만들어지고, 교사들의 수업개선을 위한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수업의 방식도 다양해진 듯하다. 학생들은 정책 도입 초기에 교과교실 리모델링 등 교육환경이 개선된 것에 대해 만족도가 높았고, 다양한 학습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극복해야 할 문제점이 많다. 교과교실제는 각 교과를 중심으로 수업개선에 집중하는 구조인데 행정업무 부담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이 교사들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결국 교사들은 행정업무 부담으로 인해 교과목 중심의 수업개선 활동에 집중하기 어려운 현실을 겪고 있는 셈이다. 학생들 역시 이동으로 인한 부정적인 문제점을 겪고 있다. 고등학교에서는 입시, 중학교에서는 생활지도를 둘러싸고 교과교실제가 긍정적인 점이 있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자유학기제와 연계 등 시너지 높여야 끝으로 교과교실제 정책의 추진과정을 지켜보면서 교과교실제가 현장에서 뿌리내리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모형을 모든 학교에 강조하기보다는 단위학교가 중심이 되어 학교와 학생의 특성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자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지원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교과교실제 집행 과정에서 지침이나 가이드라인이 학교현장에 적용하기 어려운 내용이라면 갈등과 왜곡이 생길 수 있으며 향후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중학교 자유학기제, 일반고 역량강화사업,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시행과 연계하여 교과교실제 정책이 교수학습활동의 개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추진될 필요가 있다.
교육부는 2016년 9월 1일 ‘학교폭력 가해학생 조치별 적용 세부 기준’(표 1 참조)을 고시하여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이하 ‘자치위원회’) 심의 시 가해학생 조치 결정에 적용하도록 했다. 학교폭력 가해학생 조치별 적용 세부 기준은 자치위원회 심의를 위한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하여 가해학생 조치를 합리적으로 결정하고 갈등 발생을 사전 예방할 필요성에 따라 만들게 되었으며, 이번 고시안을 통해 자치위원회 조치 결정의 신뢰성·객관성·공정성이 제고되어, 효율적인 자치위원회 운영을 기대하고 있다. 자치위원회는 학교폭력의 예방 및 대책 수립을 위한 학교 체계 구축, 가·피해학생에 대한 조치 등을 심의하기 위해 학교폭력예방법 제12조에 따라 단위학교에 설치되어 있다. 자치위원회 심의를 통해 가해학생에 대해서는 동법 제17조 제1항 각호에서 정하는 조치를 결정하여야 하며, 피해학생에 대해서는 동법 제16조 제1항 각호에서 정하는 보호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동안 학교폭력 가해학생 조치별 적용 세부 기준이 고시되지 않아, 유사한 사안에 대해 자치위원회 간 다른 조치 결정이 이루어지거나, 조치 결정에 불복해 민원 또는 재심 청구 건수가 증가해 온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 2013년 764건에 불과하던 것이 2014년 901건, 2015년에는 979건으로 증가했다. 자치위 심의 자율성 보장... 합리적 판단 기대 교육부는 이번 고시 제정을 통해 유사한 사안에 대해 자치위원회 간 비슷한 수준의 조치가 내려지도록 하면서도, 위원회의 심의 자율성이 보장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울러 이번 고시는 ‘가해학생에 대한 선도·교육’, ‘피해학생의 보호’, ‘일반학생들의 교육적 이익 보호’라는 세 가지 측면을 모두 고려하여 제정한 것임을 밝힌다. 고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기본 판단요소로 학교폭력의 심각성·지속성·고의성·가해학생의 반성 정도·가해학생 및 보호자와 피해학생 및 보호자 간의 화해의 정도 등 5가지 요소를 설정하고, 자치위원회는 각 기본 판단요소를 5단계(매우 높음/높음/보통/낮음/없음)로 평가한다. 아울러 해당 조치로 인한 가해학생의 선도 가능성 및 피해학생 보호를 부가적 판단요소로 고려하여 자치위원회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출석위원 과반수 찬성으로 조치를 가중 또는 경감할 수 있도록 했으며, 피해학생이 장애학생인지의 여부도 부가적 판단요소로 고려하여 조치를 가중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자치위원회는 기본 판단요소와 부가적 판단요소를 종합하여 가해학생의 선도·교육에 가장 적합한 조치를 결정 내릴 수 있도록 했다. 학교 현장 혼란없게 학부모 연수 강화 교육부는 하반기부터 개정 고시된 내용이 학교 현장에 혼란 없이 조기에 적용될 수 있도록 시·도교육청, 학교, 자치위원회 위원 대상 연수 및 설명회를 실시할 예정이다. 또한 학교자치위원회 운영을 통해 내려진 조치 결정 중에서 각 조치별 대표 사례를 모아 2017년에는 적용 사례집을 발간하여 보급할 계획도 세워 놓고 있다. 학교폭력 문제는 사전 예방이 중요하며, 일단 발생하면 학교·교육청 등 교육기관과 학부모, 지역사회가 참여하는 학교공동체 내에서 해결이 돼야 한다. 학교폭력자치위원회가 가해학생 선도와 교육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학부모·교사들의 적극적 참여와 관심이 필요하다.
‘인성’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행해야 하는 최소한의 상식적 언행을 뜻한다. 인간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위기 순간에 직면하면 ‘이렇게 또는 저렇게 행동하라’는 사전적인 교육이나 규범이 없어도, 무의식으로 즉각적인 구조 행동을 펼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몇 해 전, 인상 깊게 본 동물 다큐멘터리 장면이 떠오른다. 사냥을 마친 표범이 어미의 죽음을 목격한 새끼를 보고, 나무 위로 옮겨 안전하게 보호하는 장면이었다. 약육강식의 법칙 속에서 살고 있는 동물 세계 역시 생명을 대하는 태도는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제 갈 길만 바쁜 사람들 지난 8월 대전에서 급성 심장마비 증세를 보이면서 쓰러진 택시기사를 승객 2명이 아무런 구호 조치 없이 다른 택시를 타고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블랙박스 영상을 보면, 이들은 심장이 멎은 택시기사 옆으로 팔을 쭉 뻗어 차 열쇠를 뽑아 트렁크에 실려있던 골프 가방과 짐을 꺼내 다른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택시에 탔던 승객은 사고 2시간 후 경찰서에 직접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고, “공항버스 탑승시간 때문에 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택시기사를 방치하고 자신의 물건만 챙겨 떠나버리는 행위는 어떤 말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비인간적인 행위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간접 살인 행위이다. 누리꾼들은 택시기사를 두고 간 승객들을 향해 ‘비행기를 놓치더라도 사람을 살렸어야 했다’, ‘119에 전화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나. 정말 매정하다’는 반응을 쏟아냈다. 촌각을 다투는 위험 상황에서 119에 전화 한 통만 걸고 떠났어도 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도의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형사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행법상 그들을 처벌할 방법은 없다. 응급상황이나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을 돕지 않고 그냥 지나쳤을 경우, 처벌할 수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 조항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성은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난다 사람의 인간성, 또는 됨됨이를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본인도 모르게 고스란히 인간의 본색은 드러난다. 가슴에 숨긴 빨간색 물감은 맑은 날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비가 오면 제아무리 숨기고 싶어도 겉옷에 물들고 만다. 기본 됨됨이가 안 된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본성을 드러낸다. 평소에는 천사처럼 친절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다가도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 앞에서는 재빠르게 이해타산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TV 프로그램이 관찰 카메라를 통해 유명인들에게 황당한 사건을 제시하는 것도,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모습에서 개인의 품성을 보고자 하는 대중의 욕망 때문이다. [PART VIEW]한 생명을 살리려는 본능은 인간의 생리적 욕구처럼 반사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반사적인 행동은 가정에서는 부모님, 학교에서는 선생님, 사회에서는 언론의 보도를 통해 끊임없이 보고 배우는 반복적인 교육활동의 영향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기성세대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는 삶의 모델이 중요하며, 교육현장을 통해 체득하는 실천이 필요하다. 이번 사건을 생각해보자.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 행위 때문에 온 국민의 분노를 받으며 형사처벌까지 거론되는 것은, 그들이 보여준 인성의 한계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며,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고인과 유족들에 대한 죄책감이 부메랑처럼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택시기사를 구조하기 위해 119에 신고하고 구급차를 기다리면서 심폐소생술 등의 구조행위를 하며 인간의 도리를 지켰다면, 구급대원에게 택시기사를 인계하고 자리를 떠났더라면 그 승객은 칭찬 받았을 것이다. 구조 때문에 비행기를 놓치고, 고액의 계약을 놓쳐 금전적인 손해를 입었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좋은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성이 실력이다 ‘인성이 실력이다.’ 이 말은 사람이 먼저이고, 인간의 됨됨이가 실력인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교육현장에서 고스란히 실천되기를 기대하고 또 기대하며, 나부터인간존중을 실천하고 행동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온갖 인성교육 프로그램이 마치 새로운 먹거리인양 교육현장에 난무하고 있다. 인성교육의 핵심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존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내용이 빠져있다면 의미가 없다. 또한 인성교육을 통해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만들지 못하면 인조인간 로봇을 길러내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머리만 좋고 공부만 잘하는 아이를 기계적으로 만들어낸들 결국은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그들이 고위직에 올라갔을 때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개·돼지를 바라보는 형태와 같다면 한국의 인성교육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것이다. 좋은 인성교육은 미사여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가치를 돌아보는 깊이 있는 생각을 통해 우리가 덮어버리고 있는 인간의 마음을, 개인의 심성으로, 그것들이 필요한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번 ‘택시기사 심장마비’ 사태를 보며 우리의 인성교육이 어떤 역할을 보여주고 있는지, 무엇을 본보기로 삼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회의를 느끼게 한다. 외국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향해 몇 시간을 빨리 가기 위한 목적 지향적 가치가 더불어 사는 가치를 앞섰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빨리 가는 것은 잠시뿐이다. 빨리 가는 이들의 근시안은 멀리 가는 이들보다 좁은 세상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미래의 눈은 빨리 간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성이 생략된 질주는 자신을 바라보는 ‘현재의 눈’을 지워버린다. 현재를 제대로 직시하지 않는 한 결코 미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학교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예방교육으로 신체폭력 발생은 눈에 띄게 감소하였지만 사이버폭력이나 언어폭력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는 학생들의 일상화된 욕설 문화와 스마트폰 사용시간의 증가도 큰 원인이겠지만 그 내면을 파고 들어가면 자신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서툴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 감정을 공감하는 것이 힘든 10대들의 특성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이 비단 10대 청소년만의 모습일까? 교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학교폭력 사안을 상담하다 보면 교사들이 정말 힘들어 하는 것은 아이의 거짓말이나 변명, 욕설이 아니다. 학부모의 노여움이다. 일단 언성부터 높이고 형사고발을 운운한다. 왜곡된 상황을 바로잡으려 해도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중재라도 하려 들면 교사의 중립을 아주 쉽게 의심해 버린다. 그럴 때마다 교사들은 깊은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최근 들어 학교폭력대책위원회 심의를 거쳐 내려진 조치사항에 재심과 행정심판을 청구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운영하는 청소년참여법정의 사건 심의도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한다. 학교에선 아이들이 ‘욱’해서 치고받은 폭력 사건이 알려지면 “누가 합의금으로 몇백만 원을 달라고 했다더라”라는 말이 순식간에 퍼진다. 심지어 사안이 터지고 곧바로 가해학생의 공개사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폭위에서는 부모들 사이의 합의 여부가 가해학생에 대한 처벌의 수위를 결정하기도 한다. 교육의 주체는 비단 교사만이 아니다. 아이들은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보고 배운다. 인터넷과 SNS에 심취해 있는 요즘 학생들은 어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 속에서 그들 나름의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보고 배우고 있다. 개인의 부족한 업무 능력은 기계가 보충해주고 있지만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개인의 능력은 기계가 대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발전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우울감과 사이코패스가 늘어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픈 자존감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자녀가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부모는 성장하는 학생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덕목이 무엇일까 고민해 봐야 한다. 사람이 완벽하지 않은 탓에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된 판단은 누구나 하기 마련이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은 더 자주, 더 많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잘못된 행동을 한다. 이러한 잘못된 판단과 행동은 또래친구들과의 갈등을 야기하고, 갈등을 풀어가는 능력 부족은 학교폭력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예전과 달리 이제는 아이들의 갈등해결 과정에 ‘합의금’이라는 어른들의 대처법이 등장했다. 정말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을 받으면 아이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일까? 학교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내 아이가 받은 상처가 비단 코뼈가 내려앉고 얼굴이 찢어지는 육체적 상처뿐일까? 그렇지 않다. 대개의 경우 아이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자존감의 상처이다. 합의금이 자존감의 상처까지 치유해 주지는 못한다. [PART VIEW]내 아이가 잘못한 점을 인정하기에 앞서 상대의 잘못을 따지고, 만나서 사과하려는 몸부림을 거부하고, 정신적 위자료라는 이름으로 합의금을 요구하는 어른들의 대처법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어떤 가치관을 갖게 될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진심 어린 사과는 벽을 보고 혼자 할 수 없다. 자존감의 상처는 어느 한 아이만 입는 것이 아니다. 시작은 한 아이의 상처로 시작될 수 있지만 그 갈등해결 과정에서 모두가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갈등 풀어가는 방법 알려주자 상대방의 잘못을 덮어주고 용서해주는 따뜻한 마음, 상대에 대한 충분한 공감을 기초한 진실한 사과만이 자존감의 상처를 회복하고 더 깊은 우정을 쌓아갈 기회를 낳는다. 우정은 자판기에서 툭 떨어지는 캔 음료가 아니다. 내 아이 주변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진정성 있는 친구가 있기를 바란다면, 갈등을 풀어가는 법부터 가르칠 일이다. 서운함과 노여움 같은 자신의 감정이 격앙되지 않은 상태에서 섬세하게 표현하는 대화법은 상대의 공감과 이해와 신뢰와 용서를 불러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의금을 앞세운 어른들의 해법은 아이들 마음속에 쉬 회복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다.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비록 그 아이의 사과가 부족하고 서툴지라도 너그럽게 믿어주자. 그래서 내 아이에게 용서하는 법을 느끼게 하자. 어느 아이도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이들이 우정을 회복하고 비 온 뒤 굳는 땅처럼 그 우정을 더욱 견고히 해 나갈 수 있는 교육적 기회를 ‘어른들의 합의금’으로 삭제해버리지는 말자.
01 중학교 2학년에 막 올라갔을 때이다. 3월 첫 주, 역사 시간이었다. 새 과목의 새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던 우리 앞에 나타나신 선생님은 당신의 이름을 칠판에다 크게 쓰셨다. ‘김유해(金有海)!’ 그리고는 우리더러 한 자씩 띄어서 ‘김·유·해’라고 소리 내어 읽도록 했다. 그런 다음 선생님은 그 이름 옆에 자신의 또 다른 이름 하나를 써서 소개했다. 그 두 번째 이름은 ‘백민(白民)’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이를테면 선생님의 아호(雅號)인 셈이었다. 선생님의 설명이 뒤따랐다. 간략하지만 매우 인상적이었던 설명이었다. “백민(白民)! 이 이름에 어떤 뜻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나? 사전을 찾아보면 ‘아무 벼슬이 없는 백성’이라고 뜻풀이가 되어 있지. 그러니까 일반 평민을 백민이라고 하는거야. 그런가 하면 흰옷을 즐겨 입었다고 해서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 백의민족을 줄여서 ‘백민’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내가 너희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우리 역사의 주인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과 백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이 ‘백민’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저런 뜻이 두루 들어 있는 이름이다. 이 이름과 함께 역사 선생인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선생님의 아호 설명은 나에게 산뜻하고 강렬한 느낌 두 가지를 주었다. 하나는 당당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아호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아호는 연세가 지긋한 어른들이나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처럼 저렇게 젊은 분도 아호를 가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선생님은 서른 살 내외의 젊은 나이였다. 또 아호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들이나 가지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선생님처럼 평범한 분도 가질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정말 평범한 백성이란 뜻의 ‘백민(白民)’을 아호로 삼은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하나는 아호 속에 담긴 선생님의 진지한 자아의식이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역사를 탐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의 정체성을 저렇게 이름으로 천명하고, 그것을 진정성 있게 학생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니. 어린 나에게 감화를 주기에 충분했다. 이름이란 작명의 동기와 그 사용 맥락이 어떠한지에 따라 참으로 묘한 매력을 드러낸다. 학생들과 처음 대면하는 역사 교실에서 당신의 아호를 진정성 있게 소개해 주신 선생님이 나는 너무 멋있어 보였다. 그냥 인상이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선생님 내면의 정렬함이 오롯이 나를 감싸고도는 듯했다. 선생님은 그냥 당신의 아호를 간략하게 소개했을 뿐인데도 나는 그 이름으로부터 적지 아니한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받은 셈이었다. 역사에서 정치적 사건들을 배우는 것과 더불어 일반 평민들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게 되었다. 그들의 생활 풍속의 역사를 읽는 재미를 터득하였다. 또 역사와 나란히 가는 우리 백의민족에 대한 의식이 각별히 살아났다. 특히 문화사나 정신사를 배울 때 더욱 그러하였다. ‘백민(白民)’이란 아호에는 어쩌면 역사를 전공하여 가르치는 선생님의 민족의식, 민주의식, 그리고 그의 국학정신 등등 그 모든 것의 의미가 스며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설명을 구체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백민’이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가 그런 심지를 초월적으로 전해주며 다가온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02 본명 이외에 또 다른 이름을 가지는 것은 우리 전통사회, 특히 선비들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문화였다. 원래 우리는 이름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인식이 있어서, 그것이 훼손되는 것을 피하였다. 특히 서열 의식이 심했던 근대 이전에는 아랫사람이 웃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쓰는 것을 삼갔다. 글을 지을 때도 왕의 이름에 들어 있는 글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 집안에서 이름을 지을 때도 조상의 이름자에 든 글자는 애써 기피하였던 것이 그러한 예들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 통념적으로 본명이 쉽게 아무나 아무렇게나 불리는 것을 피해 가는 지혜로 아호를 지어서 편하게 사용하는 관습이 있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통문화를 낡은 것으로만 치부할 이유는 없다. 이름을 여러 개 가지는 것이 현대사회의 삶의 생태에 비추어 보면 긍정적인 면도 있다. 사회가 복잡다단해지고 관계가 여러 방향으로 생겨나고, 소통이 훨씬 더 다양해짐에 따라, 발신자로서의 나의 정체성이 한 가지 이상으로 요구될 때가 생기기 때문이다. 여기에 맞추어 필요한 이름들을 새롭게 만들고, 그 이름으로 소통의 질과 양을 더욱 알차게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현상은 여기저기 보인다. 엄마의 태중에 있는 아기에게 태명(胎名)을 지어 준다. 이는 이름 자체보다도 태교를 더욱 뜻깊게 하려는 데서 생겨난 신풍속이라 할 수 있다.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가 인터넷 공간에서 소통을 위해 어떤 공동체에 가입할 때 사용하는 소위 아이디(ID)라는 것도 이름의 일종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아이디를 정할 때도 자신의 내면 정체성을 잘 담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노력을 하는 동안에 내가 나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내 삶의 실천을 어떻게 하겠다는 도전과 의지를 키우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이디는 인터넷 사용의 도구이므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냥 기능적으로만 쓸 수 있으면 그만이다. 머리 아프게 의미 따지지 말자.” 매양 이렇게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사람됨과 정체성 자체도 “의미를 따지면 귀찮다. 그냥 대충 편하게 때우자.” 이렇게 굳어질 수 있다. 정말 이런 성격의 사람이 되고 싶은가. 이른바 이름의 마법이란 것이 있다. 이름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안에 들어와서 그 이름의 의미 쪽으로 몰고 가도록 최면을 건다. 골몰하여 뜻을 헤아리게 되는 이름 짓기는 나의 자아가 발달하고 나의 정체성이 확장되는 시간이다. 본명은 물론이고, 아호도, 닉네임도, 아이디도 모두 그러하다. [PART VIEW]아호를 만들어 썼던 우리 전통문화에서도 아호를 만드는 원리 중의 하나로, ‘소지이호(所志以號)’의 원칙이 있었다. 이루고자 하는 뜻을 호로 삼는다는 것이다. 사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성삼문은 호가 매죽헌(梅竹軒)이었다. 그가 매화와 대나무로 상징되는 ‘고결한 지조와 절개’의 뜻을 자신의 아호에 담고, 그것을 실천해 가는 삶을 살았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확인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 김응현 선생은 아호가 ‘여초(如初)’였다. ‘처음처럼’이라는 뜻이다. 성공의 자리로 나아갈수록 초심을 잊지 않겠다는 뜻을 그의 아호가 담고 있는 것이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마땅히 권장해야 할 이름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03 소파 방정환 선생은 필명(筆名)이 여럿이었다. 무려 39개의 필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1920년대 ‘개벽’과 ‘어린이’ 등의 잡지사에서 일할 때, 잡지에 글을 쓸 작가가 부족하여 선생이 직접 여러 개의 글을 쓰고, 각각 다른 필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필명의 사연을 말하는 것은 어린이를 사랑하는 선생의 진정성을 놓치는 것이 된다. 선생의 필명은 어린이들과의 문학 소통에 얼마나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는지를 보여 준다. 아이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글을 쓸 때는 ‘깔깔 박사’라는 필명을 즐겨 사용했다. 판타지 분위기의 이야기를 쓸 때는 ‘몽중인’이라는 필명을, 탐정소설을 쓸 때는 신비감을 주기 위해 ‘북극성’이라는 필명을, 비평문을 쓸 때는 파리가 세상을 내려다본다는 생각으로 ‘은파리’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그의 글쓰기 동기들이 얼마나 진정된 것인지 그의 필명들이 입증한다. 우리는 이름을 너무도 기능적으로만 사용한다. 그 이름의 소리(記表)만 사용할 뿐, 그 이름의 뜻(記意)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심지어 본인조차도 그러하다. 사람이 목적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수단으로 인식되는 현상이 여기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이 든다. 각기 지향하는 정신과 뜻을 담아서 새로이 이름들을 지어 보자. 소지이호(所志以號)’의 원칙이 살아나도록 지어 보자. 그리고 그 이름의 정신을 품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보자. 필명을 먼저 지어서, 아이들을 향한 글쓰기의 의욕을 불러일으켜 세울 수는 없을까. 그리고 방정환 선생처럼 필명의 힘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면 어떨까. 내가 스스로 대견스럽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