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꼬마 역사가다. 꼬마 역사가는 이미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과 탐구심을 갖고 역사를 찾아간다.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이 되어 궁금한 점을 찾고 질문하며 이해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고 분석하고 유추하며 역사를 꾸미고 해석한다. 이런 일련의 활동 속에서 학생들은 역사를 보는 눈을 새롭게 하며 역사 속에서의 나를 찾을 수 있고, 쉽고 재미있게 역사에 접근할 수 있다. 이때 꼬마 역사가들이 가장 흥미를 갖고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자료가 바로 그림·사진·지도 등의 사료이다. 역사수업의 마중물 ‘지도’ 예를 들어 한양이 도읍지로 정해진 까닭을 알아보면서 한양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는 수업을 계획한다면 1840년대에 김정호가 제작한 목판 인쇄본의 한양 지도 ‘수선전도(首善全圖)’를 활용해 보자. ‘수선전도’는 조선 건국 당시의 지도는 아니지만 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되기 위한 지리·정치·경제·군사적 이유를 직접 탐색하기에 적합하다. 또한 직접 이성계가 되어 한양 천도를 선포한다면 학생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여 역사 현장에 동화될 수 있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PART VIEW]
민선 2기 교육감시대가 출범한지 7월이면 3년째를 맞는다. 교육현장의 기류는 급변했다. 교육감들의 목소리는 커졌고 위상은 확연히 달라졌다. 교육행정의 무게중심이 중앙에서 지방으로 옮겨가면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지역 특성을 살린 교육, 주민자치 교육이 조금씩 틀을 잡아가면서 교육부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교육감들은 일사불란한 조직력으로 교육부 등 중앙정부를 압박하면서 민선 1기 교육감 시대와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다. 예컨대 누리과정 문제로 불거진 지방교육재정 확충 부분에서는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한목소리를 냈다. 교육부 눈치만 보던 종전과 달리 ‘할 말은 하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반면 시도교육청의 책무성도 그만큼 커졌다. 학업성취도부터 교육복지까지 교육감들의 역량에 따라 차이를 드러내고 평가를 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민선교육감 시대는 분명, 우리 교육현장에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체제가 긍정적 방향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그 반대의 역기능을 초래할지 아직은 가늠하기 어렵다. 아울러 현재 진보성향 교육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 같은 체제 또한 얼마나 지속될지 속단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가끔 상담 도중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아이들을 만난다. 상담자도 사람인지라 돌아나가는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깊은 심호흡으로 억누를 때도 있다. 내 인생 최고의 ‘강적’은 올해 만난 1학년 학생이다. 상담 도중 “상담교사라는 사람이 그딴 식으로 말할 거면 입 닥쳐요. 여기서 나가라고요”라고 소리치는 학생이다. 3개월 정도를 만나고 있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교사들은 물론 선배들도 멀리서 이 학생이 나타나면 피해 다닐 정도이다. 도대체 이 아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견적’조차 나오지 않는다. 상담을 한다고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학생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은 부담스럽고, 두렵다. 하지만 이대로 사회에 내보내면 9시 뉴스에서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더 두려웠다.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변화가 생겼다면 상담실에 비상벨이 생겼다는 것이다. 한 대 맞을까 봐서…. 7살에서 정신적 성장이 멈춘 듯 보이는 아이 처음 상담실에서 만났을 때 어깨는 좌우로 삐딱하게, 치마에 손을 찔러 넣고, 눈은 위아래로 훑어 내리면서 건들건들 걸어 들어왔다. 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 이 학교 선생들은 다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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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보다 ‘정치’ 앞세운 진보 교육감 행보 취임과 동시에 행해졌던 교육감들의 정치적 행보는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모든 교육적 의제들을 정치화하며, 사사건건 중앙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특정 집단과 정치적 이념과 행보를 같이 하면서 교육현장을 정치판으로 만들어 갔다. 진보 교육감들이 특정 집단의 호위무사도 아닐진대 ‘교육’보다 ‘정치’를 앞세운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공교육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성적 부담과 학교폭력으로 스러져간 학생들의 슬픔은 갈수록 깊어졌다. 학교 교육이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의 미로에 갇혀 있어도 그들에게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같다. 실제로 지난 2년 동안 학생과 학부모에게 보여준 이들 교육감의 행보는 누리과정 예산 및 역사 교과서 발행체제 논란을 핑계로 교육부와 힘겨루기 하는 모습뿐이었다. 청와대 앞 1인 릴레이 시위와 걸핏하면 공동 대책 회의, 공동 기자회견 등으로 자리를 비우고, 정작 중요한 현안 등에 대한 해결 의지는 보이지 않은 채 2년이란 소중한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내고 말았다. 이 같은 갈등과 대립은 학부모들에게 심각한 피로감을 안겨주었고 결과적으로 교육정책에 대한 불신만 키
진보 교육감과 보수 교육감. 우리 학생들은 이 둘의 대립 구도를 탈권위주의 교육관과 권위주의 교육관으로 이해한다.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이론을 빌려 표현하면 진보적인 전자는 ‘자상한 부모’의 프레임으로, 보수적인 후자는 ‘엄격한 부모’의 프레임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으로 본다면, 유권자들이 보수 성향의 후보들을 낙선시키고 진보 성향의 후보들에게 교육감 자리를 내어 준 것은 처벌과 보상, 권위와 통제, 경쟁 등의 가치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교육 시스템 대신 학생 자치와 학생 인권 보장, 낙오자 및 소수자에 대한 배려 등과 같은 탈권위적이고 수평적인 교육 시스템을 원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교육 시스템이 탈권위주의적인지 권위주의적인지에 따라 학교에서의 전반적인 삶이 결정되는 학생들 입장에서 어느 쪽을 더 만족스러워 할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는 변함없이 숨 막히고, 여전히 견고한 입시지옥 철옹성 그렇다면, ‘자상한 부모’ 이미지의 진보 교육감들은 지난 2년 동안 학생들에게 커다란 고통이 되어 왔던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교육 시스템을 청산하고 수평적인 교육현장
나의 수업브랜드는 ‘행복한 도덕 교실’이다. 나는 왜 교사가 되었는가? 나는 어떤 수업을 하고 싶으며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싶은가? 등에 대한 진지한 수업 성찰 후에 명명하였다. 수업 방법의 변화를 통해 ‘하고 싶은 공부, 즐거운 학교’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학생의 지나친 학습 부담을 감축하고, 학습 흥미를 유발하며, 단편적 지식·이해 교육이 아닌 학습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수업에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도덕 교사의 의무 도덕 교과는 인간의 삶에 필요한 도덕 규범과 예절을 익히고 인간과 사회, 자연,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올바른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이해하며, 다양한 도덕 문제에 대한 민감성과 사고력 및 판단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도덕적 앎을 실천으로 연결할 수 있는 실천 동기 및 능력을 함양하여, 바람직한 가치관 확립과 나아가 우리 사회와 세계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역점을 두는 인성 형성의 핵심 교과이다. 따라서 도덕 교사로서 나는 학생들의 도덕적 예민성, 도덕적 판단성, 의사결정능력, 행동 실천력 등의 인성 판단력과 정직·약속·책임·배려·용서 등의 사회성을 키
의사는 정치적 성향이 ‘좌’든 ‘우’든 간에 기본적 역할인 환자 치료를 차별하지 않는다. 교육자 역시 ‘보수’든 ‘진보’든 아이들을 잘 가르치자는 교육목적에는 좌우의 차이가 없어야 한다. 교육에 대한 사안들을 정치 쟁점화하여 갈등과 분열을 조장할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과 학부모들의 몫이고, 이에 대한 책임은 모두 교육계에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런데 진보 교육감들은 교육의 본질적 가치나 궁극적 목적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을 앞세우며, 자신들이 관할하는 지역의 교육에 관한 한 마치 전제 군주나 되는 양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고 있다. 교육계에 포퓰리즘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냐’ 강한 불만 표출 사실 지난 2년 동안 진보 교육감들의 입에서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시킬 것인가’ 혹은 ‘학생들의 인성교육과 생활지도를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라는 화두가 나온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진보 교육감들이 교육 본연의 기능과 역할은 망각한 채, 자신들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교육계를 양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진보 교육감들이 주도한 포퓰리즘적 교육정책들은 이정표를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 학부모와 학
최근 인성교육에 대한 특강을 한 후에 받은 질문입니다. “저는 고등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데요, 요즘 많은 학생들이 친구들에게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왕따도 시키는데 너무 가슴이 아파요. 친구들의 괴로움과 슬픔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을 변화시킬 방법이 있나요?” 저는 한참 머뭇거렸습니다. 제가 마땅히 해드릴 짧은 답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의 경우에는 아직 누군가의 영향력을 듬뿍 받을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게 참 많습니다. 중학생의 경우에도 비록 반항하는 사춘기지만 새로운 틀을 짜는 시기인 만큼 개입할 여지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고의 틀이 상당히 형성된 고등학생을 위해서 쉽게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고슴도치 보살피다 고슴도치 돼 버린 현실 “미안해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저도 모르겠어요.” 한참 뜸 드린 후에 이런 맥 빠진 답을 하게 되어 정말로 미안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바쁜 시간을 쪼개서 어렵게 특강에 참석하실 때에는 신통한 해결책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참석자 모두에게 미안했습니다. 물론 이론적인 답변은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행동은 있지만 문제아는 없다. 아이들은 어른이 하기 나름이다. 문
지난 4월 총선을 앞둔 어느 날, 모 일간지에 ‘선거권 연령 하향은 청소년 정치적 권리의 첫 단추’라는 기사가 떴다. ‘청소년 총선 대응 네트워크’라는 단체 대표가 “국회의원 선거는 18세, 지방선거는 16세까지 투표권을 달라”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가진 일간지 기사였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청소년단체들의 주장과 요구가 여과 없이 보도되고 있다. 실제로 일부 청소년들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교복을 입고 거리에 나서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마치 정당이나 일부 시민단체와 같은 정치적 이익집단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느낌이다. 학교 담장 넘어 일상 정치 넘보는 청소년단체 최근 들어 자주 등장하는 청소년단체들의 주장과 그 흐름을 살펴보자. 지난 2010년 7월 서울 광화문에서 청소년인권운동을 표방한 A 단체 회원들이 일제고사 반대 집회를 열고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주장했다. 또한 법원이 ‘19세 미만 청소년들이 당원으로 가입한 것은 부적합하다’고 결론 내리자 정치적 탄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정치적인 결사체에 속한 시민들처럼 행동하였다. 문제가 된 A 단체는 2004년 말 중·고생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청소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