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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라이프&여행] 한산대첩의 역사 현장, 통영

 

휴가철에 붐비는 곳 가운데 한 곳이 통영이다. 바다가 아름답고 또 먹을 것도 다양하고, 여러 인물과 관련된 장소도 많으며 아름다운 섬도 많아서 인기가 많은 곳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통영이라고 하면 이순신의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한산>을 통해 관심이 더 높아진 곳이기도 하다. 통영 앞바다가 한산대첩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한산대첩의 역사 현장, 통영으로 떠나보자.

 

이순신 장군이 남긴 승리의 발자취

 

한산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다. 그런데 다른 전쟁, 곧 행주대첩과 진주대첩과 다른 점이 있다. 바다에서 싸운 전쟁이고 같은 조건에서 싸운 승리란 점이다. 한산대첩 이전, 곧 임진왜란 1년 전에, 47세의 나이로 이순신은 전라 좌수사로 부임했다.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임명된 것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방비 차원이긴 했다. 이순신 장군은 다른 곳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전라 좌수사가 되자 매뉴얼에 따라 군사들을 훈련하고 또 무기를 마련했다 물론 새로운 무기 개발에도 나섰다. 또한 남해안의 바다 물길을 익히는 것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육군이 전투 예상지의 지형을 익히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 과정은 이전 장수가 하지 않았으니 일부 부하들에게는 불편하거나 혹은 불필요하게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고 또 전투에 나서며 부하들의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전투의 승리, 부하의 안전을 챙기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믿을 수 있는 리더의 모습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첫 해전인 옥포해전이 펼쳐졌다. 경상 우수사 원균의 요청으로 이뤄진 전투로, 적선 40여 척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의 장계 첫 문장은 널리 알려져 있다.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옵니다.’ 이 장계를 받은 선조와 대신들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하다. 옥포해전의 승리를 시작으로 사천, 당포, 당항포 등 여러 곳에서 이순신 장군의 수군은 승리를 이어갔다. 조선이나 일본 모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조선 수군의 선전은 일본의 전쟁 수행 전략을 위협했다.

 

당시 20여 일 만에 한양을 함락한 일본은 평안도와 함경도로 진격했다. 그리고 바다를 통해 군수품을 보급받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이들 부대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급변하자 도요토미는 용인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중심으로 조선 수군과 맞설 것을 명령했다. 구키 요시타가, 가토 요시아키 등과 협력하도록 했는데 와키자카는 공을 세우기 위해 먼저 나섰다. 한산대첩의 전운이 감도는 순간이다.

 

마침내 1592년 7월 7일, 와키자카가 이끄는 73척의 일본군 전선과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전라 우수사 이억기, 경상 우수사 원균이 연합한 56척, 그리고 거북선 2척 등 총 58척의 조선 수군이 맞서게 되었다. 일본 전선에 비해 큰 전선인 조선의 판옥선을 활용하려면 좁은 해협, 견내량 대신 한산도 앞 바다를 전장으로 삼아야 했다. 그리고 결과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조선 수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조선 수군은 일본의 전선 중 47척을 격파하고 12척을 나포했다. 와키자카 등 일부 왜군만이 겨우 14척의 배로 도망갔다.

 

한산대첩의 현장은 통영에서 한산도로 갈 때 만나는 넓은 바다이다. 여기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거제대교 아래 해협이 보이는데, 일본 수군이 진을 치고 있던 견내량이다. 통영에서 한산도, 한산도에서 통영으로 오고 가는 뱃길은 그 자체가 역사 현장을 지나는 것이다. 사적으로 지정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한산대첩 승리 배경에는 조선 수군의 무기 체계가 일본을 압도하는 부분도 작용했다. 판옥선은 일본의 전선인 아타케부네에 비해 규모도 크고 노를 젓는 격군과 총과 포를 쏘는 군사가 구분돼 있어서 전쟁에 유리했다. 또 조선의 배는 크고 단단해 포를 장착할 수 있지만 일본 전선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군 특유의 전술인 등선, 곧 배에 올라타는 작전을 수행하기도 어렵고 또 접근하기 전에 포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같은 판옥선을 갖고도 경상 좌수사 박홍, 경상 우수사 원균은 패배, 또는 도주했으니 무기 체계를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당시 이순신 장군이 활용한 신무기, 돌격선 역할을 맡은 거북선은 적에게 큰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한산대첩의 승리는 임진왜란의 국면전환을 가져왔다. 이후 명과 일본이 화의에 나서며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한편 한산대첩을 본 조선 정부는 새로운 관직을 만들었다. 1593년, 유래 없이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 것이다. 원래 조선은 가능하면 여러 지역으로 군대를 나누어 지휘하도록 했다. 충청, 전라, 경상의 경우 수군 군영은 5개로 나뉘어서 운영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통괄하는 직책을 만들었다. 동시에 통제사가 일할 사령부도 생겨났다. 이 사령부의 이름이 삼도수군통제영, 줄여서 통제영이니, 이를 다시 두 글자로 줄이면 ‘통영’이다.

 

조선시대 수군의 중심지

 

지금 통영시의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했다. 처음 통제영은 한산도에 설치됐다가 이후 전황에 따라 고하도, 고금도 등으로 옮겨 다녔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 이경준 통제사가 지금의 통영시 두룡포로 통제영을 옮기면서 조선시대 내내 유지가 이어졌다.

 

통제영의 중심 건물은 객사인 세병관이다. 그리고 통제영이 자리를 잡았을 때는 세병관을 중심으로 무려 130여 채에 이르는 건물이 있었으니 통영 일대가 통제영의 건물로 장관을 이뤘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세병관 이외의 건물이 사라졌는데, 최근에 통제영의 건물을 복원하여 옛 모습 일부를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세병관은 국보로 지정된 건물로 군사용 건물이라는 점에서 거창함을 강조했다. 지금은 신발을 벗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으니, 올라가서 내부를 살펴보면 거창함에 놀라게 된다. 세병관이란 이름은 두보의 시 구절인 ‘만하세병’, 곧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더 이상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군대를 기르는 이유는 사실 전쟁을 막는 것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세병관과 거의 쌍둥이 건물이 있으니 전라좌수영에 있는 진남관으로, 역시 국보이다.

 

또 통제사 집무실인 운주당, 그리고 통제사 아래 핵심 장군들이 모여 군사 업무를 다루던 백화당 등이 있었다. 그리고 관심을 갖고 봐야 하는 곳이 바로 통제영의 공방이다. 공방의 관리처인 좌기청 아래 12개의 공방이 있었는데 통제영에서 필요한 물건을 생산했다. 통제영 공방의 물건은 실력이 뛰어난 장인이 만들면서 그 명성이 높아졌다. 12개의 공방은 시기에 따라 그 수가 변하기도 했다. 공방에서 생산한 물건은 부채, 나전칠기, 장석, 그림, 가죽제품, 철물, 목가구, 금은 세공 제품, 갓이 있다. 지금 통영의 특산품으로 알려진 부채나 갓, 나전칠기, 가구, 두석, 소반 등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거창한 통제영은 1895년, 전국에 있던 군사시설을 폐쇄할 때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탁지부로 이관된 가운데 통제영의 여러 건물이 헐리거나 옮겨졌다. 1909년 세병관을 수리해서 공립보통학교 건물로 쓰기도 했다. 또한 통제영을 중심으로 이뤄진 성곽 도시였던 통영은 1930년대 도시 확장과 도로 건설로 옛 모습을 거의 잃어버렸다. 그래서 현대에 통영을 찾아간 사람들은 세병관과 통영을 연결해서 생각하기보다는 거창한 옛 건물 하나가 도시에 지어졌다고 생각할 정도다. 다행히 최근에 세병관을 보수하고 또 옛 통제영 건물을 복원하면서 각각의 건물이 가진 원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이처럼 통영은 조선시대 수군의 중심지, 곧 해군 사령부의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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