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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과 강연에 바쁜 시간을 쪼개어 쓰고 있는 J 선생님이 SNS에 재미있고 경쾌한 톤으로 ‘잔정’ 이야기를 한다. 주변에 자신의 작은 인정을 나누는 일상의 이야기이다. 그러고 보니 잔정은 특별히 표나지 않는 방식으로 일상에 스며들어와 있다. 만약 잔정이 일상의 자연스러움으로 생기지 않고, 매우 특별한 발생 기제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잔정이 아닐 수 있다. 
J 선생님은 ‘잔정을 치르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다’고 전제하며, 자신의 잔정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가볍게 이야기한다. 잔정을 치른다는 표현도 경쾌하다 못해 왠지 신선하다. 그분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본다. 
  
오래 도움을 주신 분께 간만에 카톡 메시지를 한 방 보내기, 어제 10년 만에 인사받은 제자에게 카톡으로 톡톡 답인사 보내주기, 내 강의 한 번 들은 인연인데 수줍게 선물 내민 어떤 선생님께 그분이 쓴 글 한 편 읽고 서프라이즈 전화해주기, 밤에 잠 못 드는 거 같아 뵈는 후배에게도 공연히 전화 걸어 주기, 산미(酸味, 커피의 신맛) 좋아하는 베스트 프렌드에게 커피원두 선물하기. 이전 근무처에서 함께 고생했던 옛날 직원분들이랑 다음 주 저녁 약속하기. 

 


 정말 재미있는 것은, 아니, 정말 지혜로운 것은 J 선생님 잔정 베풀기의 끝판이다. 마지막 잔정 베풀기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 

 

어차피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테니, 나 자신에게도 ‘참 잘했다!’ 스스로 칭찬하기. 

이런 자기 강화는 좋은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J 선생님이 이렇듯 잔정을 전하는 모양새가 경쾌하면서도 깊숙하다. 이런 잔정을 베푸는 마음은 아무에게서나 발현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잔정은 ‘진정성’의 일면을 가지는지도 모르겠다. 


국어사전은 ‘잔정’을 ‘자상하고 세세하게 베푸는 정’이라고 풀이한다. 잔정의 ‘잔-’은 잘고 가늘고 자질구레하다는 뜻을 가진 순수 우리말 접두어이고, 정(情)은 한자어이다. 잔주름, 잔가지, 잔기침, 잔심부름, 잔소리 등에 붙는 ‘잔-’이 잔정의 ‘잔’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잔정’에 붙는 ‘잔-’은 긍정적인 의미가 더 두드러진다. 자상하다, 잔잔하다, 세심하다 등의 의미 자질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부연하면, 작은 것에까지 신경을 써 주는 정, 그러나 너무 잔 것이어서 조금씩 조금씩 쌓이는 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풀이대로라면 잔정은 좋은 뜻이 담뿍 담긴 말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사전에 올라와 있는 말의 사전적 의미일 뿐이다. 그 말이 인간 세상 현실로 내려와 사람들 사이에서 다채로운 의미 작용을 할 때는, 아무리 좋은 말도 좋은 의미로만 나돌아 다니지 않는다. 현실세계의 인생행로에서는 좋은 것 안에 안 좋은 것이 들어 있고, 안 좋은 것 안에 좋은 것이 솟아날 기회를 품고 들어 있다. 잔정이 좋은 것이라면 응당 그 안에도 안 좋은 것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복을 불러오는 것이 그 안 좋은 것 안에 있기 마련이다.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김정탁 교수가 새로운 시각으로 <노자>를 재해석한 책 <노자도덕경-장자와 함께하는>을 읽어 보았다. 그가 풀이한 것 중에 내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천지는 사소한 은혜를 베푸는 식으로 (세상 만물을) 기르지 않는다. 천지는 어질지 않다(天地不仁)’라는 구절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렇든 어떻든 천지는 세상 만물을 기르지 않는가. 아주 큰 어짊(大仁)은 그 어짊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언뜻 이런 뜻으로 해석해 보았지만, 딱히 그런 뜻으로 고착되지도 않는다. 

 

아주 크다는 것이 무엇인지, 도가의 사상은 대개 초탈의 원대함을 느끼게 한다. <노자(老子)>에는 이와 비슷한 말이 또 있다. 예를 들면 대교무교(大巧無巧)나 대방무우(大方無隅) 같은 것이 그러하다. 대교무교(大巧無巧)는 ‘아주 큰 기교는 기교가 없는 것이다’로 직역할 수 있고, 대방무우(大方無隅)는 ‘아주 큰 모서리는 각이 지지 않는다’로 직역된다. 모서리가 각이 없다니, 좁은 틀에서 보면 모순인 듯하다. 그러나 도가에서는 이런 사유(思惟)를 초탈의 우주를 향하여 자유자재로 던진다. 그러면 여태 갇혀서 안 보이던 것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천지무인(天地無仁)에 대한 김 교수의 풀이는 이러하다. 
  
천지가 어질지 않다는 것은 천지의 어짊이 ‘큰 어짊’이라는 거다. 그 ‘큰 어짊’은 ‘소소한 어짊’이 아니다. ‘소소한 어짊’에 익숙한 사람은 ‘큰 어짊’을 두고 몰인정하다고 여긴다. 
  
물론 이 풀이가 ‘큰 어짊’이 몰인정하다는 데에 방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큰 어짊’의 가치를 넌지시 깨닫게 해 주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큰 어짊’은 유정함·몰인정함·무정함 등의 소소한 차원을 넘어서서, 인간 세상에 보이지 않는 섭리, 즉 ‘사람과 사람 간 정(情)이 이어지는 길’로 작용한다는 인식일 수도 있다. 
나는 ‘소소한 어짊’에 익숙한 사람은 ‘큰 어짊’을 두고 몰인정하다고 여긴다는 풀이에서 생각이 깊어진다. 거칠게 떠올려 보는 생각으로, 우리의 세태가 ‘소소한 어짊’에만 너무 기울어져서 혹시라도 ‘큰 어짊’의 교육적 가치는 아예 도외시하는 건 아닌가 하는 데에 계속 생각이 맴돈다. 그러면서 어짊(仁)의 행위를 오늘날 우리네 잔정에 결부하여 생각해 본다. 

 

잔정이 많다는 것, 동양의 덕목으로 말한다면 ‘어질다(仁)’에 상통할 수 있을까. 원래 어진 마음, 즉 인(仁)은 불행한 사람을 그편에서 이해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에서 일어나는 것 아니었던가. 잔정이 많은 사람에게 측은지심이 먼저 생겨날 법하다. 상대를 아끼고 이해하려는 마음은 잔정을 통해 드러난다. 잔정이 많은 사람은 상대가 품고 있는 동기와 과정까지 따뜻하게 이해해 주려고 한다. 잔정의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네 마음 내가 잘 알아’이다. 물론 이 감정의 호응은 ‘내 마음 알아줘서 정말 고마워’이다. 잔정이 친밀감을 밀어 올려서 드러내는 일등 공신임을 알 수 있다.

 

잔정은 대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면이 강하다. 정(情)의 오고 감이 비교적 분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을 주는 쪽에서 정이 많아서 그 정을 숨기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이런 쉽사리 드러남의 성향 때문에 잔정은 상대에게 금방 감화를 주고, 서로의 정서적 만족감을 빠르게 환류시킨다. 그런 점에서 잔정은 ‘어진 성품’과 ‘어진 덕성’에 결부되면서도 <노자>의 인식론에 따르면, ‘소소한 어짊’에 넣어 볼 수 있으리라.

 

소소한 어짊이어서 잔정은 한계도 있다. 잔정에 너무 빠져서 익숙해지면 금방 베풀어지지 않는 정에 대해서 기다리지 못한다. 또 상대의 숨은 정을 깊이 헤아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걸로 인해 섭섭함에 들 수 있다. 더구나 요즘의 우리 소비 세태, 즉 요구하면 즉각 대령시키는, 이른바 ‘On Demand’의 세태에 익숙해지면, 가시적 잔정을 끊임없이 소비하려 할지도 모른다. 집집마다 하나밖에 없는 자녀를 양육하는 시대, 현대의 교육학은 아이들에게 부단한 스킨십과 마르지 않는 잔정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아끼고 깊이 헤아려서 그 어떤 정을 베푸는 데는, 그것을 쉽게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숨겨 두려는 데서 정(情)의 가치와 무게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잔정의 상대어를 무정이나 몰인정으로 두기보다는 ‘속정’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속정은 또 그 헤아림의 깊이가 얼마나 오묘하며, 그 생성과 교감의 회로가 얼마나 심원한 것인지! 여기서는 내가 발설했던 고백의 문장 하나로 ‘속정’을 환기해 본다. 

 

“아버지는 무뚝뚝하시고 말씀이 없으셨지만, 속정이 깊은 분이셨어요. 우리 형제는 자랄 때는 몰랐습니다. 철없을 때라 가난한 아버지를 원망도 했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비로소 알았어요.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아버지의 편지나 수첩의 기록을 들여다보면서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속정이 얼마나 깊고 큰 정인지, 그때야 알았습니다.” 

 

이쯤서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 본다. ‘소소한 어짊’이 ‘잔정’에 결부된다면, ‘속정’은 ‘큰 어짊’에 가까운 것이 될 수 있을까. 만약 그걸 허락해 준다면, 다시 이런 생각이 잇따른다. 가정교육이든 학교교육이든 아이들을 길러내는 모든 장면에서 우리는 ‘소소한 어짊’과 ‘큰 어짊’의 균형을 얼마나 잘 살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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