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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게 물결치는 보리밭

5월은 수많은 꽃이 피는 시기다. 특히 이팝나무 등 나무꽃들이 본격적으로 피는 때다. 그럼에도 이번 달 소재로 보리밭을 선택한 것은 5월의 들녘에서 푸른 보리밭이 물결치는 것이 정말 장관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 때 보리밭 물결은 우아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참 근사하다. 5월 말엔 보리가 노랗게 익어가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보리밭을 볼 때마다 박완서의 동화 또는 성장소설 <자전거 도둑>이 생각난다.

 

 

5월, 푸른 보리밭이 물결치는 들녘

<자전거 도둑>은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글 중 하나로 돈과 요령만 밝히는 어른들 틈에서 자신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열여섯 살 수남이의 성장 일기다.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다. 주인공 수남이는 시골에서 상경해 청계천 세운상가 전기용품 도매상에서 일하고 있다. 수남이는 부지런해 주변 사람들 칭찬을 받는다. 주인 영감은 그런 수남이에게 “내년 봄 시험 봐서 고등학교에 가라”고 독려하고, 수남이는 고등학교에 갈 생각만 하면 ‘심장에 짜릿한 감전을 일으키며 가슴을 온통 휘젓는 이상한 힘’이 생긴다. 수남이가 고향을 그릴 때 생각하는 이미지는 ‘바람이 물결치는 보리밭’이다. 그가 일하는 가게 골목에 심한 바람이 불자 수남이는 시골 풍경을 떠올린다.

 

시골의 바람 부는 날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보리밭은 바람을 얼마나 우아하게 탈 줄 아는가, 큰 나무는 바람에 얼마나 안달 맞게 들까부는가,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함께 사는 숲은 바람에 얼마나 우렁차고 비통하게 포효하는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이 골목에서 자기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수남이를 고독하게 했다.

 

그런데 주인 영감은 어느 날 바람이 심하게 부는데도 배달을 다녀오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배달 나갔을 때 자전거가 바람에 넘어져 옆에 세워둔 자동차에 약간의 상처를 낸다. 차 주인은 수남이에게 수리비를 요구하지만, 수남이가 내지 못하자 수남이 자전거를 묶어둔다. 이 시련 앞에서 수남이는 구경꾼들의 부추김에 따라, 차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자물쇠를 채운 자전거를 들고 돌아오는 것을 택한다.

 

주인 영감은 수남이가 한 짓을 나무라기는커녕 잘했다고 칭찬한다. 하지만 수남이는 도둑질만은 하지 말라고 당부한 아버지와 도둑질로 순경에게 잡혀가던 형의 모습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낀다. 결국 수남이는 주인 영감의 이중성에 실망하면서 ‘도덕적으로 자기를 견제해 줄 어른’을 그리워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내용이다. 수남이가 죄책감 때문에 귀향하려고 짐을 꾸릴 때도 다시 보리밭이 등장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소년은 아버지가 그리웠다. 도덕적으로 자기를 견제해 줄 어른이 그리웠다. 주인 영감님은 자기가 한 짓을 나무라기는커녕 손해 안 난 것만 좋아서 ‘오늘 운 텄다’고 좋아하지 않았던가.

수남이는 짐을 꾸렸다. 아아, 내일도 바람이 불었으면. 바람이 물결치는 보리밭을 보았으면.

마침내 결심을 굳힌 수남이의 얼굴은 누런 똥빛이 말끔히 가시고, 소년다운 청순함으로 빛났다.

 

이처럼 보리밭은 이 소설에서 도시생활을 하는 열여섯 살 소년에게 향수의 대상이자, 순수했던 시절의 상징으로 나오고 있다. <자전거 도둑>은 작가가 1979년 샘터사에서 낸 첫 동화집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에 들어 있는 동화였다. 그런데 한 출판사가 1999년 이 중 몇 개를 어린이들을 위해 추려 다시 책으로 펴낸 동화집의 표제작으로 실렸다. 처음 발표한 지 40년이 더 지났기 때문에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작가와 생각이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수남이가 한 행동이 도둑질인가’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 있다. 어쨌든 남에게 피해를 입혀놓고 책임을 지지 않고 도망가는 행동은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바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일인데, 가난한 점원에게 고액을 요구한 차 주인이 더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작가는 수남이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으로 견제해 줄 어른’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보리밭 사잇길로~’ 고향생각에 빠져들다

내 또래 중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보리밭에 얽힌 추억이 많을 것이다. 어릴 적 가을걷이를 끝내고 나면 바로 논에 보리를 심는 집이 많았다. 그러나 요즘엔 시골에 가보아도 겨울에 파란 보리밭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곳곳에 보리밭축제 같은 행사가 생겼을 것이다.

 

보리는 본격적인 추위가 오기 전인 초겨울, 한 4~5cm쯤 자랐을 때 보리밟기를 해주어야 튼튼하게 자란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웃자라 수확량이 준다. 우리는 밟으면 보리싹이 부러져 못쓰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심조심 밟았다. 그러면 어른들은 “건성건성 밟지 말고 꾹꾹 밟아라”고 했다. 학교에서 수업을 하지 않고 보리밟기 행사에 가는 날도 있었다.

 

우리 옆집은 논이 많아서 일꾼들이나 가족들만으로 보리밟기를 다 할 수 없었다. 옆집 할아버지는 동네 꼬마들에게 논 한 마지기당 50원 정도의 ‘수당’을 약속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우리들은 보리밭에서 놀 수 있고 용돈까지 받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였다. 그 당시 50원이면 라면 한 봉지 정도 값이라 애들에겐 적지 않은 액수였다. 요즘은 그 넓은 보리밭을 일일이 밟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하다.

 

작가 박완서의 남편은 1970년대 청계천 세운상가 근처에서 전업사를 했다. 맏딸 호원숙씨는 한 글에서 “형광등, 서클라인, 그 안에 들어가는 안전기나 스타터·플러그·소켓·전선 등을 취급했다”며 “품목은 많았지만 길고 좁고 어두컴컴한 통로와도 같은 가게였다”고 했다. 호씨는 또 “하늘이 보이지 않던 그 골목엔 언제나 매캐한 먼지바람이 휘몰아쳤었다”고 했다. <자전거 도둑>에 나오는 세운상가 전업사와 일치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작가가 <자전거 도둑>을 남편한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어쩌면 주인 영감이 작가의 남편일지도 모르겠다.

 

이 세운상가 전업사와 남편이 등장하는 작가의 소설이 하나 더 있다. 작가의 남편은 1975년 뜻하지 않은 사기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단편 <조그만 체험기>는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검찰·구치소·법원 등이 국민들에게 얼마나 불친절한지, 심지어 얼마나 냉대하고 비리도 많은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황석영은 ‘한국 명단편 101’을 골라 작품집으로 얽으면서 박완서 작가의 작품은 <조그만 체험기>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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