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1 (목)

  • 맑음동두천 5.5℃
  • 구름조금강릉 10.9℃
  • 맑음서울 9.2℃
  • 맑음대전 8.3℃
  • 구름많음대구 11.7℃
  • 구름많음울산 11.0℃
  • 구름조금광주 10.9℃
  • 구름조금부산 12.3℃
  • 맑음고창 7.0℃
  • 구름조금제주 15.3℃
  • 맑음강화 10.1℃
  • 맑음보은 4.8℃
  • 맑음금산 5.7℃
  • 맑음강진군 11.0℃
  • 구름조금경주시 9.6℃
  • 구름조금거제 10.4℃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마흔 무렵의 일이다. 불혹(不惑)에 들던 때이니,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그러함에도 기억은 생생하고 부끄러움은 선명하다. 나는 그때 교직(1974~1978)을 떠나, 연구소로 옮겨온 지 11년째 되던 해였다. 그러니까 내 자의식 속에 ‘선생으로서의 정체성’은 좀 희미해진 때였다.


그해 입동 무렵 어느 날, 절친한 고향 친구 S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병석에 오래 계셨던 어른이시다. 빈소는 경기도 포천 이동(二東)이다. 고인이 사시던 집에서 조문받고 장례를 모신다고 한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 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는 일은 드물었다. 대개는 집에서 장례를 모셨다. 오후 6시, 서둘러 퇴근하여, 사당동 어디쯤서 빈소에 갈 친구 몇몇이 모였다. 누군가 차를 가지고 나왔다. 간단히 저녁 요기하고 오후 7시가 넘어 출발한다. 어두운 지방도로, 길을 물어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는다. 빈소에 조문하고, 이쪽 방으로 건너오니, 오래 보지 못했던 옛 친구들이 한 방 가득 우르르 몰려 있다. 함께 섞여 앉으니 오랜만의 추억담으로 질박한 언어들이 오간다. 고향 친구, 허물없는 사이 아닌가.


문상객을 위해 술이 들어오고 밥이 들어오고, 그 술과 밥 위로 오래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한쪽에서는 담요를 펼치고 화투판이 벌어진다. 상갓집 밤 풍경이 그러했다. 장례로 인해 집안 대소가 가족들, 그리고 고인을 아는 사람들이 두루 만나게 되니, 장례 안에 축제의 메커니즘이 있다고도 하지 않는가. 장례는 애도의 분위기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인의 혼백이 빈소에 함께 계신다 생각하고, 밤을 새워 지켜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여긴다. 그래서 문상객들은 상가의 적막함을 염려하고, 상가에서 밤새우기를 풍속으로 삼는다. 우리 친구들 대부분도 밤샘을 작정하고 늦도록 술자리에 둘러앉는다. 


금방 자정이 넘어갔다. 우리 자리에 술이 떨어졌다. 낮에 양조장에서 가져온 술이 다 했단다. 상주는 인근에 있는 술집에 연락하여 술과 안주를 비상 주문한다. 취한 사람일수록 술이 모자란다고 소리를 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술집의 술과 안주가 왔다. 술을 가지고 온 사람은, 흔들리는 불빛에 얼른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서른이 될까 말까 한 아가씨이다. 시골이지만, 술집에서 술도 팔고 술손님도 응대하는 이른바 종업원인 듯하다. 갑자기 술집 분위기가 옮겨 온 듯하다. 그녀의 등장이 상갓집에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취기가 오른 친구들이, 농담 부스러기를 마당에 선 그녀에게 던진다. 나는 이런 게 참 부자연스럽다.


근데, 어라! 이 아가씨가 술을 가져다주고는 가지를 않는다. 날도 추우니 잠깐 몸이나 녹이고 가라는 친구들의 장난기 주문에 서슴없이 방으로 들어와 앉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동네 입구에 있는 자기네 술집으로 놀러 오라는 말을 빠트리지 않는다. 좀 밝은 불빛에 보니 많이 상한 얼굴이다. 아까 마당에서는 줄에 매단 전등이 흔들려 이 아가씨도 흔들리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실제로 약간씩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취해 있었다. 친구들의 실없는 농담이 이어졌고, 그녀는 아무 농담이나 되는 대로 응수하고 있었다. 


그녀가 방안 공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농을 주고받는 수작들이 한 바퀴 돌았다. 그녀는 방안을 조금 더 주목하여 살핀다. 구석에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낸다.


“어머나! 우리 한문 선생님”
“아! 박인기 선생님, 우리 선생님 맞지요?”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상황을 짐작해 내었다. 나는 1975년에 서울 약수동 어느 여자중학교에서 3학년 국어와 한문과목을 가르쳤다. 3학년은 모두 12개 학급이었는데, 나는 그중에서 8개 학급에 수업을 들어갔다. 4개 학급은 국어과목을 주당 4시간씩, 다른 4개 학급은 한문과목을 주당 1시간씩을 가르쳤다. 학급당 학생 수가 70명을 넘는다. 그러니, 나에게 학생들은 그냥 불특정 다수이었다. 더구나 일주일에 한 시간 들어가는 한문수업에서 나의 학생들은 나에게는 더더욱 불특정 다수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14년의 세월을 지나왔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분명하게도 나의 제자임을 말한다. 그녀에게 나는 불특정 다수로 남아 있지 않다. 그 증거가 있다. 첫째, 그녀가 나를 한문 선생님으로 기억한다는 것, 둘째는 ‘우리 선생님’으로 불렀다는 것, 셋째는 나를 ‘박인기 선생님’으로 호명하여 불렀다는 것이다. 나의 학생이었던 그녀는 잔을 들고 내 자리 쪽으로 건너왔다. 옛날 선생님께 드리는 술이라면서 내게 잔을 올린다. 주전자를 든 그녀가 다시 흔들린다. 갈라지고 거칠어진 손, 세상 험난한 예각들에 시달린 그녀의 시간과 표정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 삭막해진 그녀의 마음, 그 황량함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이렇게 세상 바닥 낮은 곳까지 나의 학생은 흘러들어 왔을까. 


사정도 모르는 친구들은 구경거리 놓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세상 호기심 다 기울여 이 장면을 ‘리얼 예능’인 양 소비하려 한다. 농담과 장난의 말을 무더기로 쏟아 놓는다. 고향 친구들의 허물없음이 이렇듯 야속하다고 여겨 본 적이 또 있을까. 그녀의 말대꾸가 또 다른 농담을 불러들인다. 나는 좀 난감하고 많이 민망스러워진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그녀의 이름을 묻고, 졸업 학년도를 묻고, 살았던 동네를 묻는다. 그리고 나를 알아봐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사는 일의 고단함은 일부러 묻지 않는다. 그녀가 다시금 흔들린다. 이 흔들림은 무엇인가. 살짝, 눈물을 비친다. 그녀는 좌중을 둘러보며 학교 때 한문 선생님 참 좋았다며 광고하듯 말한다. 다시 눈물 보였다가 웃는다. 


나는 그녀에게 많이 취했으니 술을 그만하고 이만 들어가라고 말한다. 그녀는 취하려면 아직 멀었다면서, 자기 술집에 꼭 들러 달라고 말한다. 선생님 대접을 집에서 제대로 한다고 했다. 친구들이 짓궂은 야유조로 박수를 보낸다. 너 옛날에 선생 하면서 학생이나 꼬시고 그랬구나. 하하하 뭐 이런 식이다. 나는 어떻게든 이 장면을 피하거나 끝내고 싶었다. 좀 부끄러운 심정이 되었다. 뒷날 생각해 보니, 이때 내가 느낀 부끄러움은 창피하다는 느낌과 통하는 것인데, 나는 그 부끄러움에 대해서 정말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왜 좀 더 진짜 선생답게 의연하고 의젓하지 못했을까. 만회할 수 없는 후회다. 


그녀는, 아니 나의 옛날 학생은, 더 많이 취해서 돌아갔다. 나는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계속 종용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녀가 돌아가는 것을 협조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를 방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가볍게 역정을 내었다. 말은 그럴듯했다. 이렇게 몸을 살피지 않고 함부로 몸을 다루면 험한 세상 병들어서 어떻게 살까 보냐고. 그런 투의 말로 역정을 내었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는 술 담아 온 주전자며 그릇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내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 집에, 꼭 오셔야 해요. 꼭. 기다릴게요.” 그녀는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그녀를 보내 놓고 나는 ‘후유’ 했다. 그 민망하고 창피한 시간의 터널을 겨우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빨리 여기를 떠나 서울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에게 이렇게밖에는 못 하는 나에 대해서 화가 났다. 내 안의 진짜 선생은 간곳없고, 미묘한 나의 위선을 보았기 때문이다. 참담했다. 


시간은 새벽으로 가고 있었다. 아침 출근을 위해서 새벽 네 시 경 이동(二東) 마을을 출발했다. 그날 새벽, 포천 일대는 안개가 짙게 깔렸다. 10m 앞도 분간이 안 되는 몽환과도 같은 안개, 나는 간밤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마을 입구를 지나올 때, 제자의 술집을 보았다. 불은 꺼져 있고, 안개에 녹아내리는 그 집은 실제보다 훨씬 더 작고 불쌍해 보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해 보니, 지난밤 내내 나의 제자는 내 친구들과 농을 주고받으며 거의 반말로 응수했다. 다만 나에게는 반말로 하지를 않았다. 
  
제자는 전통 시대의 개념이다. 스승이 특정하여 택하거나, 제자가 특정의 스승을 찾아 그 문하에 받아들여지기를 청하고 허락받음으로써 제자가 되었다. 예수·석가·공자의 제자들이 그러하다. 근대 산업사회 이후에 그런 제자는 없어졌다. 제도 학교의 틀 속에서 배우는 불특정 다수의 학생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제자의 고전적 의미를 이어받으려는 문화적 인식은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 있어서, 교육에 인간적 향기를 피우게 한다. 


선생을 했던 사람은 지금도 어디선가 부단히 소환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누구에게 소환되는가. 옛날 제자들에게 소환된다. 어디로 소환되는가. 제자들의 마음 안으로 소환된다. 수많은 불특정 다수의 내 학생들에게 나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그가 구체적 기억으로 나를 새겨두고 있다면 나는 모르더라도 그는 나의 제자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불특정 다수에 속하는 나의 학생이었을 뿐이다. 성공하고 잘난 제자들은 스승의 기억에 남아 특정의 제자로 인연을 이어간다. 제자이긴 하지만 그렇지 못한 제자들도 허다히 있을진대, 그들을 생각해 보며 스승의 날을 보낸다.  

관련기사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