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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사람들] 마음 속 등불이 되어준 작은 수도원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를 떠나 밤새도록 200㎞를 달려온 미니버스는 캄캄한 마을 쥐로비치에 여행자를 토해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마을에서 뭘 해야 할지, 어디로 걸어야 할지, 당최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그냥 걸어가야 한다면 북극성을 따라가기라도 하겠지만, 오늘 밤은 이곳에서 자야 했다. 불빛이 보이는 나지막한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어둠 속에 걸어오는 사람이 있어 수도원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지금은 수도원을 닫았으니 300m 정도 내려가다가 왼쪽으로 가면 파란색 기차가 보일 거요.”

 

이 밤중에 파란색 기차는 어떻게 알아볼 것이며, 쥐로비치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마을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볼 심정으로 더듬거리며 두리번거릴 뿐. 그때 갑자기 번쩍 들어온 가로등 불빛 그리고 잠시 후 꺼졌다. “가로등 인심 한 번 각박한 동네군.” 

멀리 희미한 조명을 등대 삼아 다시 걸었다. 비포장길을 걸을 때 신발이 내는 소리가 꽤나 요란했다. 그 소리에 동네 개들이 마구 짖기 시작했고 인기척에 공장 같은 곳에서 불이 켜졌다. 그때 아까 행인이 말한 파란기차가 보였다. 객차 두 칸이 숙소로 쓰이는 것 같았다. 여기 아니면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수도원에 머물려고 왔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무섭게 생긴 경비원이 파란기차 안으로 안내를 해줬다.

 

세상에 처음 맡아보는 이상한 냄새가 퍼졌다. 늦은 시간이라 이미 잠든 사람들의 코 고는 소리도 요란했다. 경비원이 배정해준 자리는 모래가 쓸리고 울퉁불퉁했다. ‘시험이다. 날 시험하는 것이야.’ 경비원은 두터운 모포 하나를 건네고 객실을 빠져나갔다. 몸을 구겨 놓고 눈을 감아 봤지만, 소리와 냄새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른 시간부터 열차 안은 요란했다. 일하러 가는 그들을 따라 수도원으로 들어섰다. 만나기로 했던 보리스 수사님이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수사님 얼굴을 보니 어젯밤 고생은 다 잊어버렸다. 어제 잤던 기차는 마약과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들이 치유하며 머무는 공간이라고 했다.

 

기차가 어떤 곳이었는지 미리 알았더라면 발을 디딜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감안했기에 그렇게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수도원 경내에 있는 방문자 기숙사에 짐을 풀고 수사님의 안내를 받으며 동네를 돌아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쥐로비치 마을은 수도원을 위해 존재하는 듯 보였다. 형형색색 집들이 이 작은 마을에 있을 줄이야. 집 한 채 한 채 작게 만들어서 배낭에 넣어가고 싶을 정도다. 마을 끄트머리에는 성수가 가득 담긴 공간이 있었다. 속옷만 입고 이 성수를 거닐면 아픈 곳이 낫는다고 했다. 날이 쌀쌀해서 그냥 보고만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가 정말 속옷만 입고 물속을 이리저리 걷다가 옷을 챙겨 입고 갔다. 쥐로비치 마을이 어떤 곳인지 그 남자가 몸소 보여주었다.

 

수도원을 가만히 걸으며 여러 가지 상념들을 하늘로 올려보낸다. 사찰을 거닐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특별히 할 일 없는 수도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뿐이니 내가 아끼는, 나를 미워하는,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하고 또 한다.

 

수도원에 밤이 다시 찾아왔다. 희미한 조명은 어젯밤 가로등보다 밝았고 방은 열차보다 깨끗했다. 불편한 것을 겪었기에 지금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 며칠 더 머물고 싶었지만 야속한 벨라루스 비자가 허락하지 않는다.

 

이 먼 곳에 언제 와도 따뜻하게 맞아줄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복 받은 일이다. 낯선 나라지만 마음만은 가깝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준 수사님이 고맙다. 가끔 기대고 싶을 때 수사님이 떠오른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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