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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약자들을 위한 서사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련의 사태는 인간의 욕심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다양한 차원에서 생각하게 한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과도한 욕심과 오만이 새로운 바이러스의 합성을 낳았고, 첨단 과학기술이라면 어떤 문제든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인간의 오만이 사태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영원할 것처럼 오만했던 미국과 유럽이 적절한 대응책을 못 찾고 허우적거리는 것 또한 주목할 대목이다. 일선 학교로 시선을 돌리면, 이 정도로 상황을 안정시킨 공로는 수많은 혼란을 온몸으로 막아낸 현직 교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아쉽게도 교육당국의 오만함과 무책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임진왜란 초반 무기력했던 관군을 생각한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영웅들

<일리아스> 서두에서는 갑작스럽게 창궐한 전염병에 트로이에 원정 온 그리스 연합군이 고통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역병은 아가멤논의 탐욕에 대한 아폴론의 징벌이다.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의 총대장이자 부인을 트로이에 뺏긴 메넬라오스의 친형이다. 헬레네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납치당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이었을 것이다. <역사>를 썼던 헤로도토스의 말처럼 여자 한 명 때문에 대군을 이끌고 10년 동안 전쟁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명분은 무엇이 되었건 이면의 속내는 식민통치를 위한 정복 전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용장 아킬레우스는 전리품으로 납치한 여자 하나를 놓고 서로 갈등한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인근 도시를 약탈한 후 전리품 분배 과정에서 소외되자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을 뺏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위대한 인물이라는 영웅들의 행태가 사실은 탐욕스럽고 졸렬하기 그지없다. 여러 이유로 플라톤은 <일리아스> 같은 작품을 읽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호메로스는 왜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겼을까. 구비전승으로 시작되었을 이 서사는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을까. ‘화려한 영웅들의 서사’라는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영웅을 자처하는 자들의 졸렬한 행태와 그로 인해 고통 받는 백성들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표면이 아닌 이면을 읽어내려고 해야 한다.

 

호메로스가 아가멤논의 이야기를 남긴 이유가 무엇일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서구 문학의 불멸의 고전이라는 생각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여러 가설을 세워볼 수 있겠지만 호메로스가 영웅들을 진심으로 영웅으로 평가했을지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전투에서 쓰러질 운명의 노잡이들에게 영웅들의 탐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메로스가 영웅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것은 어떤 의도였을까.

 

아가멤논은 예언자 칼카스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지 않는다며 맹비난한다. 칼카스는 아가멤논을 위한 예언자이고 지혜의 전달자인 예언자가 아가멤논에게 아부해야 할 이유는 없다. 칼카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여자를 돌려주라고 설득하지만, 아가멤논은 거절한다. 99개의 선물을 가진 자가 1개의 선물을 받지 못했으니 동료의 선물을 뺏어야겠다고 생떼를 쓰고 있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아킬레우스는 더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일리아스>의 이야기는 아킬레우스가 느낀 분노의 연속이다. 그 분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고 타자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아가멤논의 졸렬함이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일으켜 그리스 연합군은 수난을 겪는다.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많은 영웅이 부상으로 이탈하여 진지가 함락될 위기에서도 아킬레우스는 꿈쩍하지 않는다. 보다 못한 파트로클로스가 나타나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빌려 입고 트로이 병사들을 밀어낸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후 아킬레우스는 자신에 대한 화를 참지 못하고 전장에 복귀해 트로이의 대장 헥토르를 죽인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모욕하고자 전차에 매달아 시신을 훼손하려고 한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에게 머리 숙여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른다.

 

헥토르를 모욕하고 시신을 훼손하는 것은 아킬레우스의 오만이다. 호메로스를 비롯해 우리는 모두 앞으로 전개될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알고 있다. 아킬레우스 본인만이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의 한계를 모를 뿐이다. 하지만 그의 삶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헥토르와 별반 다르지 않을 상황이 될 것을 알았을까. 아킬레우스가 프리아모스와 함께 망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고대인들이라고 해서 역지사지의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모두 고대인답게 자신에 대한 지나친 애착으로 자신과 타자를 힘들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 전체에서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살육의 묘사가 <일리아스>에 담겨 있는 것은 그것이 영웅들의 가치관에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오디세이아>의 데모도코스가 그랬듯, 가인들은 영웅들의 집에서 잔치가 무르익었을 때 흥을 돋우기 위해 노래를 불러야 했다. 따라서 <일리아스>의 내용은 영웅들의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영웅들은 자신들이 아킬레우스처럼 널리 이름을 알릴 불멸의 존재로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영웅들의 구미와 기호에 맞는 내용은 작품의 표면이 되어 오늘날까지 <일리아스>를 남아있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호메로스가 단란한 헥토르의 가족, 안드로마케와 아스티아낙스를 비춰주는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 아스티아낙스는 트로이의 함락 직후 죽을 것이고 안드로마케는 전리품으로 끌려가 아킬레우스의 아들에게 농락당할 운명이다. 헥토르와 같은 강력한 영웅들의 삶이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음을, 그들 또한 고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평범한 존재라는 사실이 구전되고 기록되어 영웅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게 되었다. 신들의 가호가 없는 영웅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리아스>는 형식상으로는 영웅들의 서사처럼 보이지만 통상적인 영웅 서사와는 다른 반전이 남아있다.

 

삶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보여주는 고전

<일리아스>가 서사문학이라면 서사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 되어야 하고 그것에 작품 외적 자아가 개입해야 한다. <일리아스>가 영웅 서사라면 동명성왕 주몽의 일생에서 확인되듯 비범한 출생 때문에 차별받던 주인공이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하늘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이어야 한다. 아니면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고난을 이기고 대업을 성취하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혹은 오디세우스처럼 자아와 타자 때문에 고생하게 된 주인공이 귀향에 성공해서 구혼자를 물리쳐야 한다. <일리아스>는 그 어느 면에서도 전형적인 영웅 서사와는 구별된다. 오히려 <일리아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타나 삶에 대한 각자의 시선을 드러내는 장면이 확인된다.

 

테르시테스는 그리스 연합군에서 가장 못생기고 말 많은 사람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영웅들은 부유하고 지체 높은 미남들이다. 테르시테스가 못생겼다는 뜻은 그가 낮은 신분의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 ‘마음속에 무질서한 말들로 아르고스인들을 웃길 수 있다고 생각되면 공연히 왕과 시비하려고 했다’는 말은 그가 영웅들의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같은 반골 기질의 평민이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같은 귀족들의 미움을 산 것은 당연하다.

 

테르시테스는 아가멤논을 마구 비난한다. 99개를 가진 사람이 하나를 포기하지 못하고 여자 하나를 더 갖기 위해 최고의 명장을 모욕하여 전선을 엉망으로 만드는 자를 위해 과연 어떤 사람이 희생할 수 있을까. 병사들이 도시를 약탈할 때마다 바친 미녀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코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야 하는 소위 영웅들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다. 아가멤논의 탐욕을 조롱하며 무의미한 전쟁을 멈추고 고향으로 떠날 것을 제안하는 테르시테스는 평민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아킬레우스와는 달리 지혜로운 오디세우스는 테르시테스를 비난하며 매질한다. 겉으로는 오디세우스가 테르시테스를 정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테르시테스의 바른말에 사람들은 속으로 공감하며 괴로워한다. 매질을 한 오디세우스 역시 귀향을 바라는 존재였음은 <오디세이아>에서 잘 드러난다. 오디세우스는 태형(笞刑)으로 군기를 다스리는 동시에 테르시테스의 의중을 전달해준다.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여! 이제 아카이오이족은 모든 필멸의 인간들 앞에서 왕이여! 그대를 가장 멸시받는 인간으로 만들려 하고 있소이다. 그리고 그들은 말을 먹이는 아르고스에서 이리로 오는 동안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일리오스를 함락하고 나서 귀향하게 해주겠다고 그대에게 약속했건만, 이제 와서는 그 약속조차 이행할 뜻이 없는 모양이오. 그들이 마치 어린아이들이나 과부처럼 저희들끼리 울며불며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하니 말이오(Iliad, II. 284-298).”

 

겉으로는 아가멤논에게 일부 병사들이 무례를 범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색에 빠져 전쟁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아가멤논을 비난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트로이를 함락 시켜 전리품을 나눠주겠다는 약속을 병사들이 했을 리 없다. 아가멤논이 설득과 강제의 방법을 동원하여 병사들의 마음을 사 왔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아킬레우스와 감정싸움 하고 있는 아가멤논이 실제 비난의 대상이다. 테르시테스의 반란을 일단 힘으로 제압한 오디세우스가 특유의 언변으로 병사들을 다독거리고 적절한 보상을 통해 상황을 수습하고 있는 것이 대화의 형국이다. 신들에 대한 제사가 끝나자 “일이 끝나자 음식을 차려 먹었는데 공평한 식사로 마음에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표현은 테르시테스의 반발이 효과적이었음을 보여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서구 교육의 교재로 쓰였고, 서구 사상의 고전이며 지금도 서구 고전교육의 핵심이라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고전이 지녀야 할 보편성과 시의성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영웅들의 졸렬한 대결이나 불쾌한 전투 장면은 그다지 대단한 교육적 의의를 가지지 않는다. 전투 장면은 표면적인 쾌락을 통해 작품을 후대에 전승하는 데 기여했다면, 칼카스와 테르시테스의 고발은 은연중 강자의 오만함과 약자의 지혜를 의미한다. 고전은 누구나 읽어야 할 가치가 있다는 책이라고 하지만, 그 고전의 기준을 만드는 것은 우리가 지향하는 삶과 교육의 가치관에 있다. 코로나19 이후의 시대는 기존 관념을 걷어내고 새로운 방식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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