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석헌은 한민족이 지난 2000년 동안 5,60회의 외침에 시달렸고 그 중 30여회는 전국이 철저하게 유린당한 재앙이었다고 헤아렸다. 그 원인은 이른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국력과 국격(國格)의 부족에서 찾아야 한다. 그 국력과 국격의 함양에는 특히 교육이 불가피한 책무를 지녀야 한다.
힘은 센데 인격이 부실한 사람을 우리는 싫어한다. 나라 역시 국력은 큰 데 국격은 엉망이고 부실하다면 그 나라는 안팎으로 불행하다. 나라의 국격은 사람들을 사람답게 대접하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체제를 말한다. 나는 그런 국격을 자유민주주의에서 찾는다.
자유민주주의는 아직까지 인류가 발견한 최선이 정부형태다. 모든 지도자는 그 본질에 있어서 교육자이며, 교육자가 못되는 지도자는 단순 관리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유능한 지도자에게 필요한 요건은 유능한 교육자에게 필요한 요건과 동일하다. 한 나라의 지도층은 그 나라 정신풍토의 방향타를 쥐고 있는 '교육자’들이다.
흔히 한국교육에는 이념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틀린 말인 동시에 맞는 말이기도 하다. 헌법에서 밝힌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교육법에 함축된 전인교육이 명문으로서의 한국교육의 이념이다. 그러나 그 이념이 교육실제에서는 도무지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육에서 실제로 강력하게 작용하는 원리는 입시교육의 회오리뿐이다.
한국교육은 가히 '무철학의 행진’을 하고 있다. 왜 '교육붕괴’라고 까지 표현되는 교육현실이 벌어졌으며 그 가능한 치유책은 무엇인가. 전인교육과 자유민주주의 교육의 이념은 한국교육에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이념을 실천, 실현하기에는 지금의 한국교육은 너무나 허약하고 역부족이다.
도리어 이념은 잠시 잊고 체질부터 고치고 바꿔야 할 형편이다. 나는 한국교육의 체질을 바꿔야할 '보약 해법’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는 사회기관 전반에 관한 탄원이고, 둘째는 정부에 대한 간청이며, 셋째는 교사에 대한 호소다.
첫째로 전인평가를 제안한다. 대학, 정부기관, 기업체 등 사회 여러 기관은 그 인사 선발에서 필답고사를 지양하고 전인평가 방법을 택하기를 탄원한다. 한국사회는 지금 고시 과신, 필답시험 맹신, 점수 광신에 빠져있다. 하버드 대학의 입학선발 방식인 학업능력-과외활동-스포츠-성격의 네 가지 특성 평가 방식이나 최근 우리나라 몇몇 기업의 입사시험 방법, 즉 합숙하면서 여러 활동을 관찰 평가하는 방법 등은 장려되고 확산되어야 할 전인교육 평가 방식이다.
두 번째는 자율이다. 교육부나 교육청 등 행정기관은 학교와 교사에게 대폭적인 자율을 허용해주길 간청한다. 자율은 장인적 교사의 존립 근거이고 사기의 근본이다. 해방 후 60년간을 돌아보면 우리나라 교육계의 가장 생기 있고 발랄했던 때가 도리어 1950년대였다. 춥고 배고픈 시대였지만 교육계는 광복과 신생 민주주의의 재건이라는 명제가 교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런 교육계의 자율이 60년대 '개발독재’ 때부터 단절되었다. 그 후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중앙집권적 관료권위주의는 변함이 없고 오히려 강화·확장 일로로 교육계를 덮어왔다.
셋째로 교사는 교육에 대한 사명감, 식견, 전문윤리를 간직한 장인으로 자처할 것을 호소한다. 장인 정신은 교직에서 더욱 필수적이다. 교사는 자기 스스로를 천직으로 자처하는 정도에 따라 더욱 유능해진다. 일선 학교에는 지금 말없이 교육의 본연을 꿋꿋이 실천하는 수많은 교사들이 있다. 그들 때문에 그래도 한국교육이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다. 한 나라의 교육은 국가의 명운이 달린 막중한 일이고 교사는 막중한 교육의 최종 결정자이다.
한국교육의 지상과제는 한국의 국력과 국격을 고양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한 당면 과제로 나는 전인평가의 실시, 자율성의 과감한 허용, 교사의 장인성 유지를 촉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