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7 (수)

  • 맑음동두천 26.0℃
  • 구름많음강릉 28.0℃
  • 구름많음서울 24.5℃
  • 맑음대전 25.8℃
  • 맑음대구 26.1℃
  • 맑음울산 22.5℃
  • 맑음광주 25.0℃
  • 구름조금부산 21.0℃
  • 맑음고창 25.3℃
  • 구름조금제주 18.9℃
  • 구름조금강화 22.5℃
  • 맑음보은 25.4℃
  • 맑음금산 26.8℃
  • 맑음강진군 22.8℃
  • 맑음경주시 28.3℃
  • 맑음거제 21.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오피니언

달밭에서 얻은 희망의 열매

 

3월과 쏙 빼닮은 11월의 햇살이다. 노오란 가을볕 아래 서니 절로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강당을 가득 채우던 하모니가 아직도 온몸에서 울리는 것 같다.

또다시 눈물이 나려 한다. 부끄럽지만 행복했던 월전에서의 마지막 학습발표회. 나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움직이며 합창하는 학생들과 교사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하니 많은 추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이곳에 부임하던 날의 설렘부터 지금까지 아이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촤라락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참 많이 행복했구나! 선물처럼 내게 와 준 아이들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던 그날이 벌써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연선이와 호준이가 등을 툭 친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추락한다. 추억 속을 거닐며 느슨해졌던 마음이 순식간에 단단해진다.

화들짝 놀라는 선생님의 모습이 무에 그리 재미있을까? 달아나며 까르륵 웃는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마주 웃는 수밖에. 하여간 못 말리는 개구쟁이다.
점심시간의 해프닝을 뒤로하고 5교시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유난히 이쁘고 사랑스러워 보인다. “사랑해” 툭 튀어나왔다. 무심결이었다. 아이들도 당황했겠다 싶었는데 괜한 우려였다. “나두요”입을 맞춘 듯 능청스러운 응대에 한바탕 웃었다. 미술 시간 내내 기분 좋은 말들이 교실 위로 날아다녔다.
하교 시간, 아이들이 쪼르륵 줄을 선다. “사랑한다, ○○이. 조심해서 가고 내일 보자.” 같은 말을 네 번 반복하고 안아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비로소 고요가 찾아왔다.


업무를 시작하려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잠시 휴식을 취하려 의자 등받이에 기댄다. 교탁 한쪽에 놓인 작은 쟁반이 눈에 들어온다.

사흘 내내 자리를 지킨 쟁반 위의 초코파이 하나를 뜯는다.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아이들의 예쁜 마음이 달콤하게 입안을 채운다.
바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점심시간에 아이들만 급식실로 보냈다. “선생님, 바빠? 점심 안 먹어?” 캄보디아에서 들어온 지 일 년 남짓인 연선이의 정겨운 반말이 시작이었다.

급식을 받아놓을지 묻는 호준이, 자기들끼리 먹어야 하냐고 확인하는 준서, 정말 드시지 않을 거냐며 걱정하는 민우. 네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올라왔다.

“너희들끼리 먹어. 왜 자꾸 올라와?” 퉁명스러운 말들로 돌려보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아이들이 초코파이와 귤이 세 개씩 담긴 작은 쟁반을 들고 왔다. 살그머니 교탁 가장자리에 내려놓더니 후다닥 나갔다. 무슨 일인지 물어볼 정신도 없었다.

겨우 일을 끝내고 숨을 돌리는 데 행정사님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교실로 들어서더니 대뜸 아이들을 어쩜 그렇게 잘 가르쳤냐고 칭찬하셨다. 담임선생님이 점심을 못 드셨다고 걱정하는 모습이 하도 예뻐서 초코파이와 귤을 담아줬다는 말씀에 울컥했다.

열두 살 속 깊은 아이들이 마흔이 훌쩍 넘은 철부지 담임을 만나 고생이 많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힘들었던 학기 초가 거짓말 같다. 여기서 투닥투닥, 저기서 티격태격, 하루도 거르지 않는 다툼으로 존재를 확인시키던 호준이를 어르고 달래다 하루가 갔다.
‘선생님, 시간 되시면 연락 주세요. 6학년 ***아빠입니다.’ 느닷없이 날아든 문자에 잔뜩 긴장한 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뉴스에서 보고 듣던 일이 아버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호준이가 카톡방을 개설해 반 친구들, 6학년 형·누나들, 사촌 형들을 초대했어요. 민우가 자신을 놀렸다며 혼 내달라고 했어요. 호준이의 중학생 사촌 형이 민우에게 반성문을 쓰라며 윽박지르며 욕을 하더라고요. 호준이의 사촌 형들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해서 꾸중을 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는 다짐을 받았어요.”


호준이를 불렀다. 아이는 자기가 다가가면 하던 말도 멈추고, 자기를 힐끗거리며 속닥거리는 게 분명히 자신을 헐뜯는 거라고, 모두들 자기만 미워한다고 울분을 토했다.

미운 말만 골라서 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행동하면서 어찌 친구들과 어우러지길 원할까? 입 밖으로 나오려는 핀잔을 꿀꺽 삼켰다.

아이를 바라보다 퍼뜩 겨울방학에 읽었던 심리학 서적의 내용이 생각났다.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의 불안 심리가 안타까웠다.

손을 꼭 잡았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호준이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빼려 하더니 잠시 뒤 잠잠해졌다. 민우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나지막한 아이의 음성에 눈물이 나려 했다. 처음이었다. 변명이 아닌 반성이라니. 야호, 한 발짝 나아갔다! 소리치고 싶었다.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다고 비웃듯 다음날도 사건이 이어졌다. 동아리 시간, 준서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달려드는 호준이에 놀란 선생님이 두 아이를 데려오셨다. 한두 번이 아니라며, 선생님이 계셔도 개의치 않고 싸운다며 하소연하듯 말씀하시고 돌아가셨다.

 

씩씩거리는 호준이와 억울한 표정의 준서를 자리에 앉혔다.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호준이 대신 준서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아리가 끝나고 무엇을 하고 놀까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하다 호준이와 눈이 마주쳤는데 자기 욕을 한다며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호준이가 거짓말이라고, 자기 욕을 하고 있었다고 소리를 질렀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이었다. 준서를 내보냈다. 호준이의 분노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아이의 손을 잡고 조그맣게 말했다. “사랑해” 바보처럼 눈물이 났다. 눈물방울이 아이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아이의 눈물방울도 내 손등 위로 떨어졌다.

우린 함께 울었다.

실컷 울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피식 웃음이 났다. 우리만의 비밀이 생겼다.

 

그렇게 밀고 당기며 3월이 막을 내렸다. 거짓말처럼, 기적처럼 작은 변화들이 감지되었다.

호준이가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넘어진 동생을 일으켜주고, 친구에게 물건을 빌려주고, 그림 그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호준이의 노력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친구들도 서서히 호준이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함께 어울려 보드게임을 하고 수다를 떠는 모습을 보노라면 절로 웃음이 났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투덜거리며 교실 문을 들어서던 아이가 언젠가부터 웃는 얼굴로 아침 인사를 한다.

가끔 투닥거리는 일이 생겨도 폭력을 사용하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거나, 자기만 억울하다고 호소하지 않는다. 아이는 지금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 마음이 예뻐서 절로 희망의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학년말의 교실에는 평화와 화합이란 낱말이 빛을 발하고 있다.  

 

한 주를 마무리하는 회의가 끝나고 선생님들과 함께 차를 마신다.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이렇게 좋은 아이들을 만나지 못할 것 같다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 얘기 작년에도 하신 것 같은데요. 재작년에도 하신 거 아니에요?” 옆반 선생님의 답변에 모두들 크게 웃었다.
그랬던가? 달밭에서 나는 꿈의 씨를 뿌리고 희망의 열매를 거두었던가?

지난 시간을 다시 되짚으니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간다. 겨울날 단팥죽처럼 달콤하고 따스한 기운이 온몸에 퍼진다.

월전 학교에서의 삼 년은 이십 년 교직 생활에 대한 상이었나 보다. 수고했다고 하늘이 이런 인연을 맺게 해 준 것은 아닐까 싶다.

순하고 맑은 아이들과 함께하며 얻은 에너지가 남은 시간을 든든하게 지켜줄 것이다.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갈 나를 그리며 교문을 나선다.

-----------------------------------------------------------------------------------------------------

2019 교단수기 공모 동상 수상자 수상 소감

벽지 학교에서 만난 천사들 잊지못할 행복했던 순간

 

선물처럼 내게로 와 준 아이들과의 일 년 살이가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펼쳐집니다.

출장 가는 날이면 교문 앞까지 따라나오며 손을 흔들어주던 아이들, 바빠서 점심을 거른 날 간식을 가져와 수줍게 내밀던 아이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라 웃음을 만듭니다.

벽지 학교에서 만난 네 명의 천사들과 알콩달콩 행복했던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 수상으로 이어지게 되어 더욱 기쁘고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걸어갈 그 길에서 고운 추억 차곡차곡 쌓아가라는 응원이겠지요. 교사라는 이름의 행복을 일깨우는 기회를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