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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냥

01

1994년이니까 벌써 25년 전의 일이다. 가수 임종환이 레게(Reggae)풍의 노래, ‘그냥 걸었어’를 발표하여 대중음악계에 큰 주목을 받았다. 매우 특이한 노래 형식을 구사하여,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 노래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비 오는 날이면 라디오 방송의 DJ들은 어김없이 이 노래를 틀어주곤 했다. 나로서는 이 노래에 따라붙는 대화체의 가사가 재미있었다.

 

이 노래의 의미 구조는 소박하다. 주인공 남자는 빗길을 걸으면서,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는 남자가 일찍이 좋아했던 존재, 그러나 지금은 멀어져 있는 사람, 그래서 남자는 안타깝고, 아쉽다. 무의식 안에서도 그녀가 그립다. 노래가 시작되면, 전주와 더불어 전화를 받는 그녀의 전화음 목소리 “여보세요”가 나온다. 가라앉은 듯한 저음의 차분한 목소리이다. 이어서 주인공 남자가 전화 속 그녀에게 노래로 말을 한다. 노래는, 전화음으로 된 ‘그녀의 짧은 물음’과, 그 물음에 답하는 남자의 말로 이어진다.

 

노래 가사의 일부를 소개한다. ( ) 안의 말은 전화음으로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이다.

 

(여보세요?)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 해서/ 오랜만에 빗속을 걸으니 옛 생각도 나대.//

울적해 노래도 불렀어. 저절로 눈물이 흐르데./너도 내 모습을 보았다면 바보라고 했을거야.//

(전화 왜 했어?)

정말이야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냐.//

 

(거기 어디야?)

미안해 너희 집 앞이야.

난 너를 사랑해 우-우우

(비 많이 맞았지?)

 

우우 나 그냥 갈까.

(잠깐만 기다려 나갈게)

 

02

노래의 제목은 ‘그냥 걸었어’이다. 남자는 그녀가 무어라 묻든 ‘그냥 걸었어.’라 말한다. ‘걸었어’에는 두 가지 뜻이 다 들어 있다. ‘별생각 없이 전화를 걸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그녀의 집까지 무작정 걸었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 노래 가사는 이런 중의적 표현이 더 울림이 클 수 있다.

 

문제는 ‘그냥’이란 말이다. 왜 그냥 걸었단 말인가. ‘그냥’을 사전에서 찾으면, 세 가지의 뜻풀이가 나온다. 첫째는 ‘아무런 변화 없는’, 둘째는 ‘줄곧’, 셋째는 ‘아무런 조건이나 까닭 없이’ 등으로 풀이되어 있다. ‘그냥 걸었어’를 사전 뜻대로 적용해 보면, ‘아무런 변화 없이 걸었어’의 뜻이 되거나, ‘별 까닭 없이 걸었어’가 되거나, ‘그대로 줄곧 걸었어’의 뜻이 될 뿐이다. 이렇게만 풀이했을 때 노래의 깊은 맛이 우러나는가? 아니다. 맹탕의 맛이다. 사전적 풀이로는 가닿을 수 없는 심층의 의미가 ‘그냥’이란 말에 숨겨져 있다. ‘그냥’이란 말의 심층 의미는 한국인의 심리 정서 원형에서 살아 움직인다. 말은 사전적 의미와 더불어서 그것을 사용하는 문화적 맥락에서 깊은 맛이 우러난다.

 

‘그냥’이란 말에 숨어 있는 심리와 정서와 태도는 어떤 것인가. 혹시 애써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그 마음을 더 꼭꼭 숨기어 감추려는 심리가 개입하지는 않았을까. 그럴 때 ‘그냥’이란 말이 얼마나 좋은 은폐 막이 되어서, 우리 내면의 부끄러움 따위를 숨겨주는 역할을 하는지 느껴 보았으리라. ‘그냥’이란 말은 그 지시하는 바 의미가 모호하다. 그래서 ‘그냥’이란 말에 내 부끄러움이 숨어 있기가 편하다.

 

‘그냥’이란 말의 의미 작용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주인공 남자는 자기 마음을 오로지 숨기기 위해서 ‘그냥’이라고 말하는 건가. 아닐 것이다. 그녀를 향한 그리움을 그녀가 알아차려 주기를 바라는 심리 또한 ‘그냥’이란 말에 묻어 있다. ‘그냥 걸었어’를 반복해서 말하는 행위 자체에 ‘그녀에게 다가서고 싶은 소망’이 들어 있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할 뿐이다. 그 주춤거리는 소망이 ‘그냥’이란 말에 서식한다. 한국인이 사용하는 ‘그냥’이란 말에 담긴 감정의 무늬가 얼마나 복잡 섬세한지를 알겠다.

 

03

한국 사람들 대화에서 이런 장면은 흔하다. 무어라고 물었는데, 그 대답이란 것이 모호하다. “박선생을 좋아하시는 거지요?”라고 물었는데, “글쎄요”라고 답을 한다. “요즘 무얼 하고 지내니?”하고 물었는데, “그냥요.”라고 대답한다. 딱히 내용 있는 답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답을 아니 하는 것도 아닌, 그런 답이,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있다.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이런 일을 겪는다면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라 할 것이다. 문화 인류학자인 강신표 교수는 30여 년 전에 벌써 한국인이 사용하는 ‘글쎄’라는 말에는 무려 30여 가지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다고 했다.(한국문화연구, 1985)

 

‘글쎄’가 그러한 만큼 ‘그냥’이란 말도, 그 의미의 숨은 층위가 깊고도 다양하다. 논리로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하기 그지없는 한국인의 심리나 정서를 안으로 품고 있는 대표적인 말들이다. 사전이 밝혀 놓은 뜻 이외에도 다양한 의미 변이를 해 온 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변이되고 확장되는 의미를 그 말의 ‘문화적 의미’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말이 종전에 쓰이던 뜻에서 변이되어 그것이 공동체 안에서 새롭게 널리 공유되면, 그 말은 문화적으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그냥’은 원래는 아무런 의도나 목적이 없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실제로 사용하는 심리 맥락에서 보면 그 반대의 경우가 많다. ‘그냥 걸었어’라는 노래 가사에서 ‘그냥’은 문자 그대로의 ‘그냥’이 아니다. 그냥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그 어떤 상태보다도 감정적으로 고조되어 있고, 그 마음에는 어떤 의도가 배어 있다. 그 어떤 심리보다도 민감해 있다. 또 자아 내면을 숨기는 듯 드러내는 언어적 전략이 작동하고 있다. 이게 어디 아무 목적이나 까닭 없이, 있는 그대로의 ‘그냥’을 노래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노래에서의 ‘그냥’은 한국인들만이 알 수 있는 심리와 소통 문화를 담고 있다. 또 이 노래를 즐기는 대중들도 ‘그냥’이란 말에서 그런 심리와 상황을 즐겁게 누리고 공유한다. 그래서 이 노래는 들을수록 마치 내 마음 같고, 그래서 따라 부르고 싶은 것이다.

 

04

‘그냥’이란 말에는 묘한 마력이 있다. 밋밋한 듯하지만, 모종의 의연함 같은 것이 비치기도 한다. ‘그냥’을 나의 지혜 안에서 ‘나의 언어’로 태어나게 할 때, 더욱 그렇다. 사실 모든 언어는 나의 경험과 의지 안에서 ‘나의 언어’가 될 때, 새로운 힘을 가진다. ‘그냥’을 나의 주관적 언어로 만날 수 있는 지혜를 키워 보자. ‘그냥’을 ‘자기 다스림의 언어’로 친숙하게 갈무리할 수 있도록 해 보자. 밖으로부터 가해지는 어떤 힘이 나를 끌어가려고 할 때, 나의 태도를 물어온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그때 ‘그냥’이라고 말해 보자. 내가 내 안을 향해서 말해 보자. 흔들리지 않는 자아를 만날지도 모른다.

 

현실의 어려움과 대결하며 나의 정체성이 도전받을 때, 급변하는 환경에 나의 적응력이 도전받을 때, 내가 내린 결심과 내가 세운 계획들이 다시 나를 강박할 때, ‘그냥’을 ‘자기 해방의 언어’로 삼아서 자유로운 나를 구축해 보자.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물음 앞에 나의 자아를 떠올리며, ‘그냥’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냥’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더욱 유연한 자유와 더욱 단단해지는 자아를 만날 수도 있으리라.

 

‘그냥’은 각자의 자기 성찰 안에서 진화하고 발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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