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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조롱 달린 붉은 사철나무 열매

전경린의 단편 <강변마을>은 처음 간 강변 외갓집에서 외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은 것이 줄거리로,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았음 직한 이야기다. 2011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이다.

 


전경린 단편 <강변마을>에 등장하는 사철나무

화자인 은애는 열한 살인 문방구집 딸이다. 그런데 ‘벌써 인생에 지친 기분’이다. 주먹질하는 오빠와 엉겨 붙는 동생들, 엄마의 악다구니, 계집애인 것 자체를 질타하는 할머니의 힐난,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돌발적인 분노 등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엄마와 할머니는 잔뜩 날이 서서 서로에게 퍼부을 욕을 애들에게 대신 쏟아낸다. 여기에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 집안으로 스며드는 집이다. 그런데 어느 여름방학 때 오빠·여동생과 함께 외갓집에 간다. 원래 외갓집이 없었는데 엄마가 갑자기 ‘사촌 외갓집’에 가 있으라고 한 것이다. 한여름 뙤약볕에 몇 시간에 걸쳐서 힘들게 찾아간 그곳엔 우선 온화하게 웃는 외할머니가 있었다. 수박과 포도를 실컷 먹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사랑만 해주는 곳이었다. 이들 남매는 낮에는 실컷 먹고 놀고, 밤에는 마당의 평상에서 ‘알고 있는 모든 노래를 다’ 부르며 지낸다.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이들 남매가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게 한 집엔 사철나무가 있었다.


저녁이 될 때까지 외할머니는 부엌 곁 텃밭에서 풀을 뽑고, 우리는 밭 가장자리의 사철나무에 매달려 놀았다. 허리가 굽은 늙은 사철나무들은 매달리기 좋게 옆으로 구불구불 가지들을 뻗었고 총총한 잎사귀 속에는 붉은 열매들이 조롱조롱 달려 있었다. 동화에 나오는 나무처럼, 그 나무에 오르기만 하면 아무리 오래 매달려 놀아도 힘들지 않았다.


우리는 과자를 잔뜩 먹은 뒤 새 팬티와 러닝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머리띠까지 두른 채 사철나무로 달려가 매달렸다. 사철나무 붉은 열매는 노래하는 음표들 같았다. 거꾸로 매달려 주렁주렁 매달린 길쭉한 오이들과 옥수숫대 옆구리에 붙어 자라는 수염을 늘어뜨린 알알이 영근 옥수수와 보라색 가지들도 노래 부르는 것 같았다.

 

이처럼 사철나무는 이 소설에서 어린 나이에 세파에 찌든 소녀가 파라다이스 같은 곳에서 듬뿍 사랑받으며 마음껏 자유를 누릴 때의 상징처럼 나온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은 되지만 후반부를 좀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꿈같은 외갓집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집안은 그대로인데, 아기 하나가 생겨 있었다. 소녀는 당연히 강변마을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강변마을에 대해 입에 올리면 엄마에게 등짝을 맞았다. 그것은 금기어였다. ‘사촌 외갓집’은 실은 아버지의 젊은 여자 집이었고,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 위해 집에 들어온 동안, 다녀온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에서 작가의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과 아름다운 묘사가 놀랍다. 이남호 고려대 교수는 이 소설에 대해 “오랜만에 만나는 아름답고 따뜻하고 슬프고 안정된 작품”이라며 “작가의 이런 탁월한 감각과 문체가 엉뚱한 곳에 낭비되지 않고, 앞으로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쓰다듬어줄 수 있는 작품들을 낳기를 기대하고 또 믿는다”고 했다. 소설가 이승우도 “인물들을 긍정하는 따뜻한 시선과 감정을 사물에 투사하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묘사, 그리고 단편소설에 맞춤한 미학적 구도의 안정감을 통해 읽는 이를 정화시킨다”고 썼다.

 

작가 전경린(1963년생)은 경남 함안 출신으로 소설집 <염소를 모는 여자>, <천사는 여기 머문다>, <물의 정거장>과 장편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내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황진이> 등을 냈다. 작가는 우리 사회 여성들의 삶을 다룬 작품을 많이 썼다. 우울증을 앓는 듯한 여성의 자세한 심리묘사는 금방 질려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강변마을>은 뜻밖에도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밝고 따뜻했다.


사족처럼 하나 덧붙이자면, 사철나무 열매는 10~12월 노란빛이 도는 붉은색 껍질에 싸여 열린다. 이처럼 사철나무 열매는 빨라야 늦가을인 10월에 열리는데, 시간적 배경(여름방학)이 8월쯤인 ‘강변마을’에 ‘붉은 열매들이 조롱조롱 달려’ 있다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서울 기준으로 8월엔 사철나무 꽃이 지고 막 열매가 녹색으로 맺히는 정도다. 작가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푸른 잎을 간직한 채 겨울을 나는 사철나무

​사철나무는 이름 그대로 사철 푸른 상록성 나무다. 주로 남부지방에서 자라지만, 북쪽으로 황해도까지 올라가 자란다. 중부지방에서 겨울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는 상록수는 대개 소나무·향나무·주목 같은 침엽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철나무는 잎이 넓은 활엽수 중에선 거의 유일하게 서울 등 중부지방에서도 푸른 잎을 간직한채 겨울을 날 수 있다. 회양목과 남천 정도가 서울에서도 잎이 떨어지지 않은 채 겨울을 나지만 잎 색깔까지 푸르게 유지하지는 못한다. 남천은 겨울에 빨갛게 단풍이 들고, 회양목 잎도 겨울에는 다소 붉은 빛을 띤다.

 

사철나무는 요즘 서울 도심에서도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울타리가 아니어도 공원이나 교회 앞마당 등에서 별도로 한두 그루 심어놓은 사철나무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꽃은 6∼7월에 연한 노란빛을 띤 녹색으로 피는데, 꽃잎 4장이 마주 보면서 핀다. 꽃 가운데에 암술이 1개 있고, 수술이 4개 있는데, 우주선 전파 수신기처럼 삐죽 튀어나온 수술대가 재미있다. 달걀 모양의 잎은 가죽처럼 두껍고 반질반질 윤이 난다. 가을에 달리는 불그스름한 열매는 녹색의 잎새와 잘 어울린다. 줄기에서 뿌리를 내려 다른 물체를 타고 오르는 줄사철나무도 있다. 사철나무는 아주 오랜 세월 우리 땅 우리 곁에서 함께 해온 나무지만 사철나무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깃거리가 하나도 없는 것이 아쉽다. 아마도 주변에 너무 흔해서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싶다. 그래서 사철나무를 주요 소재로 쓴 <강변마을>과 같은 소설이 더욱더 반가웠던 것 같다.

 

사철나무는 노박덩굴과 나무인데, 이 과에 재미있는 나무들이 많다. 줄기에 화살 모양의 날개가 있는 화살나무, 가을에 맺히는 열매가 분홍빛으로 마치 꽃처럼 고운 참빗살나무, 잎 위에서 앙증맞게 작은 꽃이 피는 회목나무, 미역줄기처럼 벋으며 자라는 미역줄나무 등이 노박덩굴과 나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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