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단 초년생이었던 35년 전에는 가정방문이 학년초 필수행사였다. 아이들은 수업을 마치기가 무섭게 달려와 자기 마을에 먼저 와달라며 간곡한 부탁을 하고 가기도 했다.
우리 반에는 장거리 통학 탓에 일년을 기다렸다가 누나와 동생이 같은 학년에 나란히 다니는 남매가 있었다. 학교로 봐서는 최장거리 통학생이었다. 거리가 워낙 멀어 선생님들은 그 마을 가정방문을 엄두도 못 내고 있었지만 아이들이 통학하기에 얼마나 먼 곳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또래 여교사 3명이 가정방문길에 올랐다.
어른이 걸어도 먼 거리였다. 가파른 산길에 몇 고개를 넘고 산모퉁이를 돌아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마을인 줄을 알았다. 앞질러간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에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두 나와서 우리를 반겨줬다. 우리가 남매네 집의 사랑채로 들자 학교를 다니는 아이,
다니지 않는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몰려와 우리를 구경했다.
얼마 후 출타 중이었던 남매의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선생님이 방문했다는 소리에 "아이구, 선생님! 먼길에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 애들 할머니께서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꼬…"하며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향해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는 것이었다.
갓 스물이 넘은 우리들은 삼촌뻘 되는 학부모의 예상치 못한 큰절에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남매의 아버지는 4년전에 선생님 한분이 다녀가시고 처음이라며 거듭 반가워하셨다. 그 날밤 깜깜한 산길을 되돌아올 수가 없어 하룻밤을 묵었다. 당시엔 귀하게 여기던 계란을 통째로 넣어 끓인 시래기국과 한사발 푸짐하게 무쳐낸 고사리 나물이 그렇게도 맛있었던 그 아침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학기초, 소풍이나 운동회 때 선생님을 만날 기회가 있어도 선뜻 나서서 반갑게 인사하기보다 모른척 그냥 지나쳐버리는 젊은 어머니들을 보면서 그때 그 학부모의 큰절이 그리워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