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같은 밤,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짧지만 강력한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쨍쨍하게 얼어붙은 밤하늘을 날카롭게 가르며 번득이는 칼날을 움켜쥔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던 사내는 오랜 세월을 준비한 듯, 철저하게 계산된 움직임으로 왕의 이름을 외치며 근정전을 향해 날아오른다. 무슨 일인가? 도대체 저 사내는 누구이기에, 문무대신이 조회를 하는 근정전 앞에서 감히 왕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질주하는가? 의문이 해소되기도 전에 호위무관들과 궁녀들이 왕을 에워싸며 보호한다. 하지만 복수심으로 단련된 사내는 한 마리 매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정확하게 목표 지점에 내려앉는다. 그 순간 멀리서 날아온 화살 하나가 사내의 발목에 꽂힌다. 날렵했던 움직임이 둔해지고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직감한 사내의 얼굴 표정이 일그러진다. 안타까운 눈길로 사내를 지켜보던 왕의 눈동자에 회한의 고통이 아로새겨진다. 사건은 그렇게 시작됐다. 훗날 ‘성군(聖君)’으로 추앙받을 조선 왕조의 세종대왕 ‘이도(한석규 분)’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전 7일 동안 벌어진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역사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이정명 원작, 김영현 · 박상연 극본, 장태유 · 신경수 연출)는 첫 회의 첫 장면을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답게 음산한 분위기로 풀어낸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 드라마를 표방한 <뿌리 깊은 나무>에서 노비 출신의 겸사복 강채윤이 조선의 왕 이도를 살해하고자 했던 사건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사건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라는 ‘한글’ 창제 과정에서 발생한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이다. 새로운 문자를 연구하던 집현전 학사들이 연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것을 수사하는 과정을 통해 세종대왕의 인간적 고뇌와 정치적 결기 그리고 ‘한글’ 창제 과정의 비화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조선의 자주성 강화는 물론 말과 글이 달라 고통 받는 백성을 위한 정책을 추구했던 세종대왕이 ‘한자(漢字)’를 숭상하는 일부 집현전 학사들의 반발을 제압하고 새로운 문자를 창제했다는 정도로 알려진 ‘한글 창제 과정’을 집현전 학사들의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으로 풀어낸 것은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는 일반적으로 이미 발생한 사건에 대한 ‘추리’와 ‘수사’, 그리고 ‘해결’로 이어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뿌리 깊은 나무> 역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 공식을 따라가되, 몇 가지의 사건들을 중층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강채윤이 이도를 죽이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사건과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 위해 이도가 은밀하게 운영하던 비밀조직의 학사들이 연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결합되면서 전혀 다른 지점에 위치한 이도와 강채윤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재상중심주의를 표방했다가 태종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한 정도전의 비밀결사조직인 ‘밀본’이 건재하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아버지 태종의 피비린내 나는 정치를 배격하고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지향했던 이도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죽임의 정치를 고민하고, 강채윤은 이도를 죽이기 위해 이도의 명령을 수행하는 역설의 상황에 ‘왕권(王權)’을 억압하는 ‘밀본’의 암약이 결합되면서 사건은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왕 이도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는 강채윤의 복수극으로 시작해 ‘한글 창제’라는, 세계 문명사적인 변혁의 현장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시청자로 하여금 당대 상황을 추리하게 만든다. 왕의 지시로 비밀스럽게 새로운 문자를 연구하던 집현전 학사들을 살해한 범인을 수사하는 표면적인 사건과 ‘죽임과 살림의 정치, 왕권과 신권의 권력 투쟁, 왕과 노비의 원한’ 등의 대립과 충돌로 빚어진 이면의 사건이 결합된 서사 구조는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하다. 밀본의 조직원에게 암살당한 집현전 학사 ‘윤필(강성민 분)’이 죽기 전에 주자소의 활자를 집어삼켜 남긴 ‘사자전언(死者傳言)’을 해독하는 극적 상황이 추리와 수사가 결합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윤필의 죽음과 그가 남긴 사자전언을 단서로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이도의 비밀스러운 계획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20여 년 전에 사라진 줄 알았던 비밀결사조직 ‘밀본’의 실체가 윤곽을 드러내면서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윤필이 남긴 한자 ‘곤구망기(口亡己)’의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 강채윤은 일부러 수사 정보를 흘리고, 집현전 학사는 물론 사대부까지 나서서 ‘곤구망기’의 의미를 풀어보지만 그 어떤 조합으로도 의미가 명료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으로 집현전은 물론 조정의 분위기가 흉흉한 상황에서 풀리지 않는 사자전언은 소통과 의사전달의 도구로서 ‘문자’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극적 장치였다. 이도 역시 윤필의 사자전언을 두고 고심을 거듭하다가 ‘口亡己’이라는 활자가 한자가 아닌, ‘밀본’을 뜻하는 한글 암호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왕권을 위협하는 재상중심주의 세력의 끈질긴 움직임에 분노를 참지 못한다. 집현전 학사들이 연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사건, 이도의 지시로 강채윤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미 발생한 살인사건으로 시작하되, 그 사건을 해결하기 전에 발생한 또 다른 살인사건으로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자연스럽게 사건의 원인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된다. 그리고 시청자는 자신이 부리던 집현전 학사들의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는 왕 이도의 심정으로 강채윤의 수사를 따라가면서 사건의 원인을 집중적으로 추리한다. 이 과정에서 이도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이유가 어린 시절 2대 밀본의 아들 ‘정기준’에게 받은 정신적 외상이라는 정보가 드러나면서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는 3대 밀본의 본원(本元) 정기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처럼 <뿌리 깊은 나무>는 집현전 학사들의 의문의 죽음을 수사하는 과정을 통해 ‘한글 창제’ 과정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대립과 갈등을 중층적으로 구조화함으로써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특징을 제대로 보여준 역사드라마이다. 연쇄살인사건이라는 ‘범죄’와 그것에 대한 ‘수사’를 통해 한글 창제를 둘러싼 당대의 정치적 대립 구도를 보여준 <뿌리 깊은 나무>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플롯은 범죄에 대한 정보와 그것에 대한 조사라는 이중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문학교과서에 수록된 영화 시나리오 <공동경비구역 JSA> 역시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적 특성을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다. <뿌리 깊은 나무>를 공동 집필한 박상연의 소설 를 각색해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북 분단과 군사적 대치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을 감각적으로 영상화함으로써 호평을 받았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북 분단의 상징적 공간인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초소에서 북한군 병사가 누군가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남한과 북한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상황에서 중립국의 수사관이 파견되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을 미스터리 스릴러 기법으로 풀어낸 영화이다. ‘추리’와 ‘수사’ 그리고 ‘해결’의 두뇌 게임이라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장르적 즐거움은 결국 이미 발생한 사건에 대한 조사를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시선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드러나는 사건의 진실이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지는 비극적 결말이 남북 분단 현실에 대한 성찰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공동경비구역 JSA>는 충분히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TV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서사 구조를 비교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