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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엄격한 지도 · 징계 권한 줘야

이제 학교폭력 문제는 공교육의 신뢰회복에 앞서 선행돼야 할 가장 큰 과제로 대두됐다. 오죽하면 대통령까지 나서 최근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졸업식 뒤풀이를 거론하며 ‘우리 사회의 중병’이라며 개탄했겠는가. 한국의 높은 교육열을 칭찬한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이런 우리의 교육 현실을 알았다면 한국을 배우자고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교육열 세계 1위’의 뒤에 드리워진 학교폭력과 같은 후유증은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을 사례로 들면서 미국의 교육개혁을 외쳤다고 해 화제가 됐었다. 대학진학률 세계 1위, 인구 대비 미국 유학생 수 세계 1위, 사교육비 지출 세계 1위를 염두에 뒀을 터이다. 아무리 가난한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의 교육에는 ‘무한도전’하며 자신들은 가난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먹는 것, 입는 것을 아껴가면서 자식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우리나라는 교육열로 보면 단연 교육의 최대 강국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수업하는 학교가 안전한 곳이 아니라 일부 학생들의 탈선에 의한 폭력의 공포에 내몰리고 청소년 범죄의 온상이라는 이미지를 풍기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최근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중 · 고생들의 졸업식 뒤풀이는 학생들의 행동으로 보기에는 그 도가 지나쳐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했다. 이는 문화의 수준을 넘어 성폭력이요, 약자에 대한 ‘막무가내식’ 집단폭력으로 명백한 범죄다.

진화하고 있는 학교폭력
단순히 속박의 상징에서 벗어나려는 ‘교복환송식’에 그치던 졸업식 뒤풀이가 ‘알몸졸업식’, ‘졸업빵’과 같이 성희롱, 집단폭력으로 변질되어가는 등 최근 학교폭력이 점점 다양하고 잔인하게 진화하고 있다. ‘셔틀’이라는 변종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운송기기를 뜻하는 단어 ‘셔틀(Shuttle)’은 학교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방적 폭력과 착취의 의미로 사용된다. 어원은 스타크래프트(Starcraft)에서 병력 운송을 담당하는 프로토스의 유닛 셔틀이다.

‘빵셔틀’은 ‘빵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지만 단순히 빵을 사오는 개념이 아니라, 학교 폭력의 일종이다. 심부름의 종류에 따라 돈셔틀, 안마셔틀, 버스셔틀, 가방셔틀, 반찬셔틀, 검투사셔틀, 담배셔틀, 휴지셔틀 등 그 종류도 많다. 셔틀은 알몸 졸업식 같은 폭력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점차 진화되어가는 학교 폭력의 단면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학교폭력의 착취 · 폭력이 문어발식 대기업처럼 세분화 · 분업화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성세대는 더 이상 기존의 경험과 시각을 가지고 학교 폭력을 보아서는 안 된다. 조직폭력이 갈수록 진화하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제는 주의와 관심, 예방만으로는 학교폭력은 막을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폭력불감증에 걸린 학생들
최근 보도에서 보듯이 졸업빵, 셔틀졸업식, 알몸 뒤풀이 등 학교폭력의 양상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폭력들이 사회적인 이슈로 대두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이것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평소에는 정상적인 학생생활을 하고 있는, 큰 문제가 없는 평범한 아이들의 행동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학교폭력인지 조차 모르는 상태로 ‘범죄가 아닌 장난’이라며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교복 찢기나 알몸 집단폭행 등을 관례로 이어온 졸업식 뒤풀이, 돈 많고 힘없는 친구들의 집을 돌며 절도와 폭행을 일삼은 사건, 인사를 하지 않는다며 후배를 사망에 이르게 한 집단폭행사건, 성매매 강요 등이 학교 주변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학생들이 폭력불감증에 걸린 사이 학교폭력은 위험수위에 이른 셈이다.

가정의 ‘밥상머리교육’의 부재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떤 가정교육과 사회화 과정을 밟아 왔느냐에 따라 폭력요인은 크게 좌우된다. 오늘날 가정은 고유의 가정교육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풍요 속에서도 고독하고 불행하며 정서적으로 불안한 가정으로 전락하고 있다. 대부분의 청소년 문제는 일차적으로 이런 가정의 교육 기능 상실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학생의 기본생활습관 정착과 인성교육의 출발점은 가정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가장 나쁜 부모를 대리할 가정교육자가 없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보호시설이 있다 할지라도 부모가 있는 가정보다 좋은 시설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가정교육을 강조하다 보면 혹자는 학교의 교육적 책임을 가정에 떠넘기려는 변명 아니냐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가정이 모든 교육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밥상에는 삶의 의욕을 돋우는 이야기와 세상사는 도리가 버무려진 메뉴가 올려졌다. 일차적인 사회성을 밥상머리에서 배운 뒤 학교로 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모두가 학교에만 의존하려고 한다. 그런데 차라리 의존하기만 해도 괜찮은 부모도 있다. 많은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자녀의 일탈에 대해 수긍하고 잘못을 따져 지도하기보다는 우선 자녀가 갖게 되는 상처나 아픔에 더 관심을 가진다. 부모야말로 자녀교육에 대한 일차적이고 최종적인 책임자가 되어 자기 자녀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교육적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학교교육의 제한성과 지도 권한의 약화
최근 학교폭력 등의 청소년 비행이 증가하는 것은 학교에 문제 학생에 대한 제재 등 지도 권한이 지나치게 약화된 것도 큰 요인이다. 초 · 중학교에는 심각한 비행에 대해 퇴학이나 전학, 정학 등 강력한 제재방안이 없다. 의무교육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아이들을 관대하게 안고 가야 한다. 물론 잘못된 행위를 무조건 처벌하고 격리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안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더 많은 관심과 배려로 그들을 바람직한 인간으로 길러내야 하는 것이 교사와 학교의 책임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적절한 제재방안이 없음으로 해서 더 많은 학생들이 이런 점을 악용해 비행과 일탈을 저지르고 있다. 아무런 가책이나 반성이 없이 문제 행위를 반복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수업 중 여교사의 지도에 반항하며 폭언이나 폭력을 휘두르는가 하면 ‘인권’을 앞세워 교사들의 정당한 교육적 지시마저도 따르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만연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학생 비행이 심각해지는 경향에 비해 학교에서의 처벌 권한은 지나치게 약화돼 있다는 것이다. 육체적 체벌 금지는 물론 ‘훈계’, ‘교내봉사’, ‘사회봉사’ 수준이 고작이다. 선도위원회나 학교폭력대책위원회를 열어서 벌을 주면 무엇하는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학생들 사이에서 영웅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해하는 판국이다. 노동의 수고로움을 통해 뉘우침의 시간을 갖게 하는 ‘교내봉사’의 경우에도 하기 싫은 수업을 면제해주니 도리어 쾌재를 부르는 상황이다. 학교에서 이런 솜방망이 처벌이나 훈계만으로는 비행 학생이 잘못을 반성하고 교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무기력한 교칙’을 비웃게 할 뿐이다.

‘생활지도’와 ‘인성 · 인권교육’의 혼동
인권 존중을 우선하는 사회적 추세와 자녀에 대한 부모의 그릇된 과잉보호 의식, 교사들의 소극적인 지도 태도가 어우러져 학생 지도를 더욱 어렵게 한다. 이제라도 학생들의 탈선이나 비행에 대해 체벌이 아닌 엄한 ‘처벌’ 등 가능한 교육적 지도권한을 학교에 주어야 한다. 모두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 “교육이 중요하고 공교육이 살아야 한다”고 외치지만 정작 학교의 권위를 살리는 일에는 모두가 인색하다. 가정과 사회의 교육적 기능이 약화된 채 모든 책임을 학교에 전가하는 작금의 우리 사회풍토에서 학생들의 비행을 근절시키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우리 사회의 ‘생활지도’와 ‘인성 · 인권교육’의 혼동이 현장의 교사들을 또 한 번 무력감에 빠뜨리고 있다.

인권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의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활지도는 어디까지나 생활지도여야 하는데, 지나친 인성 · 인권 교육의 그늘 아래에서 과연 제대로 된 생활지도를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이런 혼돈 때문에 학교에서는 학교폭력은 물론이고 학생 비행에 대해 학교나 교사의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생활지도’ 없는 ‘인권 강조’가 정말 바람직한 교육인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
요즘 학교에서는 동급생이 교실에서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 사실을 선생님에게 알리지 못하는 추세이다. 주변 친구가 맞는 것을 모른 체하는 방관자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도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폭력에 상시 노출된 아이들이 친구의 고통을 ‘그’만의 고통으로 취급하며 폭력에 둔감해지거나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 폭력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양자 구도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의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대다수 방관하는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학교 폭력이 줄어들 수도, 늘어날 수도 있다. 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적 용인은 결국 가해, 피해를 넘어 모든 아이들의 폭력성향을 키우는 꼴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지속적인 논의를 통해 방관자에 그치고 있는 아이들을 방어자로 참여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학교폭력 대부분에 있어서는 피아(彼我)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학교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별이 뚜렷한 경우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고, 어떤 경우에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시간적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가 어우러져 공생하는 동안 학교폭력은 암세포처럼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 폭력의 예방은 미래사회의 도덕성을 제고하는 거시적인 관점의 조명이 바람직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적 관점의 접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세계적인 추세 ‘무관용 정책’ 도입해야
학교폭력과 기물파손, 교사에 대한 거친 반항, 마약 투여나 밀거래, 갱단 가입, 총기 난사사고 등 온갖 범죄와 낙제생의 집합소였던 미국 LA 조던고등학교에 스티븐 스트래천이라는 흑인 교장이 부임했다. 그가 모두가 기피하는 ‘문제 학교’에 부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학교의 ‘권위’를 살리는 일이었다. ‘학교에서만은 사소한 규칙 위반에도 관용을 베풀지 않고, 잘못을 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미국식 체벌주의 ‘제로 톨러런스(Zero tolerance, 무관용 정책)’을 도입했다. 잘못한 정도에 따라 교실추방, 가정근신, 정학 등 평년보다 대폭 많은 징계 처분을 내리면서 엄격하고 강한 벌을 통해 교내 생활에서 ‘죄와 벌’의 상관관계를 확고히 한 것이다. 그 결과 비행과 결석률이 놀랍도록 감소하고 졸업시험 통과 비율과 주(州)학력평가시험 성적도 크게 향상되는 등 학교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문제 학교’가 불과 2년 만에 모두가 가고 싶은 ‘선호학교’가 되었다. 지난 2008년 미국 에 보도된 학교경영 성공담이다.

학교 내 비행학생 문제로 고심하던 영국도 미국을 본받아 영국식 체벌주의 ‘문제 학생 영구추방 정책’을 적용하고 있다. 교사들이 학생이 교칙을 어기거나 교내에서 심각한 비행을 저지른 경우 육체적 체벌 이상의 엄격한 징계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물론 학교 밖에서도 사법경찰에 준하는 지도 단속 권한을 부여해 규율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했다.

마찬가지로 최근 학교폭력과 집단 따돌림, 교사 폭행 등 학원 범죄로 고심하던 일본도 초 · 중학교에 미국식 ‘제로 톨러런스’를 도입하기로 했다. 매년 3만 건 이상 터지는 학생 폭력, 교내 마약 복용과 거래, 교사 폭력 등 심각한 ‘교실붕괴’를 뿌리 뽑기 위해서 정부가 발 벗고 나선 것이다. 바야흐로 학교에 강화된 학생지도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인 것이다.

교육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교육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학교폭력은 학교와 가정 그리고 사회에서 교육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본다. 즉, 명문대학 진학과 같은 수단적 가치가 아닌 교육이 추구해야 할 본질적인 가치가 무시되고, 실력보다는 간판이 중요한 사회에서는 교육의 기능을 실현하기 위한 제반 활동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교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무관심’과 관련되어 있다.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못 한다는 이유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처음에는 무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나중에는 그러한 무관심의 그늘 아래서 계속 주먹을 휘두른다. 피해자들 역시 무관심 속에 위축되어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으며,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한 몸부림들 또한 무관심 속에 묻혀버리는 것이다. 모든 교육은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적과 입시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에 ‘무관심’한 우리의 교육 현실과 사회 풍조가 참으로 통탄스럽다.

가장 바람직한 학생생활지도는 학교, 학부모, 학생 모두의 책임 있는 행동과 서로를 인정하고 돕겠다는 민주주의정신으로 상호작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교사와 학교가 학생의 모든 일을 맡아서 하고 책임지라는 것은 무리다. 모두 함께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위한 시스템 정착이 급선무인 것이다.
최근 학교폭력이 급속히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경찰까지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늦은 감이 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동안 남의 집 불구경하듯 방관하던 사람들이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함께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폭력은 관련 당사자 및 사회가 함께 책임 있게 대처할 때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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