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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작품 읽기와 문학하기

합평회의 추억
글쓰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오해와 고정관념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것이다. 글은 고독한 환경 속에서 자기 결단의 결과로 나온다는 것. 그럴지도 모른다. 글을 쓰면서 친구 불러 상의하고 이웃 초청해서 묻고 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임은 물론 정신 집중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글을 쓴 것은 누군가 읽어 주어야 글 값을 한다. 편지가 그러하듯이. 근래 문학이론에서 독자에게 주목하는 까닭도 이 부근에 있다. 독자의 문학 수용 그 결과의 집적이 문학사라는 주장을 펼치는 수용미학(受容美學)은 문학이론의 맨 마지막 남은 영토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문제를 제기한다. 제기한 문제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비평가를 포함한 독자이다.
기억을 되살려 보라. 그동안 누가 내가 쓴 글을 읽어 주었던가.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에 이르는 교육의 과정에서 내가 쓴 글을 착실히 읽고 고쳐준 선생님이 몇이나 있던가. 내가 편지를 보냈을 때 답을 해 준(읽고 반응을 보인) 친구는 몇이나 있던가. 어쩌면 독자 없는 글을 참 많이도 썼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와서 경험한 글쓰기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합평회(合評會)’라는 모임 덕이었다. 당시 ‘사대문학회’는 회원 수도 많고, 여러 학과 학생들이 다양하게 모여 있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글을 쓰고, 그 작품을 돌려 읽었다. 나아가 일주일에 한 번씩 날을 잡아 한 주일 동안 쓴 작품을 내놓고는 이른바 합평회라는 모임을 가졌다.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공개비판을 연상할 정도로 분위가가 살벌해지기도 했다.
시는 길이가 짧아 이야기감으로 삼기가 수월한 편이었다. 그런데 소설은 그렇지를 못했다. 원고지로 60~70장 되는 단편을 한 자리에서 내려 읽었다. 그 낭독을 듣고 그 작품에 대해 이야길 하자면 열심히 들어야 했다. 대학에 갓 들어가, 읽는 소설의 줄거리조차 파악이 잘 안 되는 판인데 선배들은 역시 노장들이었다. 플롯이 어떠니 문체가 어떠니 하며 공박을 하다가, 도대체 주제의식이 뭐냐고 따지고 들면 서로 얼굴이 벌개져서 자못 삼엄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배들의 비평을 소화해내는 가운데 제법 여러 편의 글을 쓸 수 있었다. 어떤 친구는 시작(詩作)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한 달에 시 10편을 썼다고 읽어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 친구는 이미 잘 알려진 시인이 되어 있다.
매주 토요일, 거의 빠짐없이 이루어지는 합평회에서는 다음 발표할 순번을 정하곤 했다. 어떤 때는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지목이 되기도 했는데 그럴 경우는 하루 밤을 새워서 단편 하나를 써야 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글을 내용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분량(分量)으로 쓰는 것이 글쓰기의 한 방법이라는 점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 하는 일은 열정이 식기 쉽다. 혼자 글을 쓰다 보면 이걸 누가 읽어 줄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일기를 쓰듯이 혼자 기록해 두는 걸로 가치를 삼기는 ‘세속적인 소통의 욕구’가 용납을 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일종의 인정투쟁(認定鬪爭)에 가담하는 결단이다. 나는 이런 감성으로 이렇게 세상을 본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 글쓰기인 셈인데, 그 선언을 들어 줄 사람이 없다면 선언의 의미가 없다. 모든 선언은 나를 인정해 달라는 호소이다.
고독한 글쓰기를 넘어서서 소통의 글쓰기를 모색해야 한다. 글 친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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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답시로 가는 우정의 길
동업자들끼리는 대개 짙은 교감을 하면서 살아간다. 문학이 고독한 개인의 작업이라는 점에서는 동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닌 듯하다. 그러나 문인들의 친교(親交)는 글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유달리 짙은 우정의 향기를 남긴다. 또한 우정을 글로 남기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그 행적을 잘 알게 된다. 그러한 예로 우리는 박목월과 조지훈의 사귐을 기억한다.
박목월의 <나그네>에는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 芝薰”이라는 제사가 붙어 있다. 조지훈의 그 한 구절을 자신의 시에서 변용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선 박목월의 <나그네>를 보기로 한다.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앞에 예시한 제사는 조지훈의 시 ‘완화삼(玩花衫)’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시에는 “木月에게”라는 제사가 붙어 있다. ‘완화삼’이라는 말은 ‘꽃물 든 옻자락을 바라보고 즐긴다’ 정도의 뜻이다. 그런데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머물던 성도(成都)에 그의 초당이 있던 완화계(浣花溪)를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음이 같아서이고, 두보와 이백(李白)의 우정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완화삼>은 이렇게 되어 있다.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냥 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이 두 시인이 시를 주고받은 내력은 이렇다. 당시 조지훈(1920~1968)은 고향 경북 영양에 살고 있었고, 박목월(1916~1978)은 경주에 머물렀다. 조지훈이 박목월을 찾아 경주로 내려간다. 이 두 시인은 석굴암을 찾아가는 길에 불국사에 들러 찬 술을 마시고, 조지훈이 한기가 들어 떨고 있을 때 박목월이 외투를 벗어 덮어 주어 추위를 녹이게 해 주었다. 이후 조지훈은 경주에 2주가량 머물면서, 박목월과 함께 옥산서원에 방을 하나 얻어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깊은 우정을 나눈다. 경주에서 영양으로 돌아온 조지훈은 “목월에게”란 제사를 달아 ‘완화삼’이란 시를 지어 박목월에게 보낸다. 이 시에 대한 화답시(和答詩)가 ‘나그네’이다. 친구가 보낸 시 한 구절을 자신의 상상력과 문학적 감성에 따라 다른 시로 변용하는 일은 깊은 공감과 정신적 교감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반복이 아니라 창조를 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의 우정은 앞에 예시한 바처럼 두보(712~770)와 이백(701~762) 사이에 유별(有別)하다. 두보가 이백과 맺은 교유는 ‘飮中八仙歌(술마시는 여덟 신선을 노래함)’에도 나타나는 데, “이백은 한 말 술에 시 백 편을 짓고”, “나는 주중의 신선이다”하는 호방함을 칭송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백과 교유하는 가운데 그의 시에 대한 평을 하고, 그와 더불어 글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어 하는 절절함은 ‘春日憶李白, 봄날 이백을 생각하다’에 잘 나타나 있다.

이백의 시는 당할 이 없고/ 자유분방하여 시상은 우뚝 솟았다/
청신한 맛은 유신(庾信) 같고/ 뛰어난 재능은 포조(鮑照) 같다/
위북(渭北)에는 봄날의 나무/ 강동에는 해질녘 구름/
어느 때 술 한 동이 갖다 놓고/ 다시 더불어 꼼꼼히 글을 얘기해 볼까.
白也詩無敵 飄然思不群 淸新庾開府 俊逸鮑參軍
渭北春天樹 江東溢暮雲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文
(<당시>, 김원중 역해, 412쪽)

이백은 다른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과도 사귐이 깊었는데, ‘贈孟浩然(맹호연에게 보내다)’,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에서 광릉 가는 맹호연을 전송하다)’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친구와의 우정을 읊기도 하고, 상대방의 시를 평하는 내용을 시로 읊었다. 문학적 교감의 결과가 다른 시를 탄생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감은 남의 글을 읽어주는 데서 비롯된다.
문단에 나가는 이들이 동인(同人)을 조직하여 서로 글을 읽어 주고, 평을 함으로써 서로 간의 문학적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수준의 향상을 도모하는 것은 오랜 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쓴 글을 읽어줄 동료를 찾는 일이고, 그것이 발전해 나의 글을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료보다는 선배가 글에 대한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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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를 찾아서 만나라
문단 인사들의 호칭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 ‘형’이다. 나를 문단에 추천한 은사의 친구 분을 만났는데 나를 향해 ‘우형’ 그렇게 부르는 바람에 잠시 멈칫하고 아연(啞然)해진 적이 있다. 생각을 해 보니 우리들의 관계를 형제관계로 상정하고, 공경의 뜻을 담아 부르려 하매 그렇게 나오는 것이려니 수긍이 되었다.
후배를 ‘형’으로 부르는 문학 선배는 우선 내가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작품을 사이에 두고 소통이 이루어진다. 또한 문학인으로서 참조인물이 될 수 있다. 문학적 생애의 전범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그리고 문단(글 판)의 사람들과 연결 지어 줌으로써 후원자 역할을 해 주기도 한다. 그런데 ‘형’이라는 존칭을 붙이는 한, 후배의 자유로운 문학적 추구를 완벽하게 보장하고 지원해 준다는 점에서 이상적 패트론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다.
문학적인 선배는 추종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극복의 대상이 된다. 선배를 극복했는지 여부는 작품의 질적 수준과는 별 관계가 없다. 각자 자기 세계를 구축한 일가(一家)를 이루었을 때는 서로 극복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개성을 드러내는 대비만이 가능한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광수와 김동인은 문단의 선후배 격이지만, 이광수는 민족주의, 이상주의 작가로 자기 몫을 했고, 김동인은 개인주의, 자연주의 작가로 자신의 위치를 확보했던 것이다.
한 작가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평가하고 그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연계한 예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진 바로는 괴테가 만난 헤르더나, 괴테와 실러 사이의 우정에서 그러한 예를 보게 된다. 또한 이미지즘의 기수로 알려진 에즈라 파운드와 T.S 엘리어트, J. 조이스의 관계 또한 문학의 선후배 관계의 전범에 해당한다. 파운드의 ‘지하철 정거장에서’는 아마 단시(短詩)의 백미에 해당할 것이다. 그의 시를 설명하고자 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이미지즘의 정수에 해당하는 시를 함께 보자는 뜻에서 달아 둔다.

군중 속에서 홀연 나타나는 이 얼굴들
물젖은, 검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는 장편시 ‘칸토스, The Cantos’가 대표작인데, 이미지즘을 선언한 행적이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는 평탄치 않다. 미국에서 태어나 서양고전문학을 공부한 그는 시작(詩作)을 하다가 유럽으로 떠나 베니스, 파리, 런던 등지를 돌아다니며 문학활동을 전개한다. 그 문학활동 가운데 T.E. 흄, D.H. 로렌스를 만나 교류한다든지, W.B. 예이츠를 만나 개인비서로 일을 하는 등은 문학수업과 연관되는 흥미로운 항목이다.
그는 이어서 J.조이스와 T.S.엘리어트의 문학활동을 지원한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출판되게 하는 데에 온힘을 기울였고, 엘리어트의 시 ‘J. 알프렛 프루프록의 연가’가 빛을 보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파운드가 이들 작품을 읽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조이스가 시력이 약해지고 경제적으로 곤핍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떨쳐나서서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기도 한다. 제임스의 그 난해한 소설 ‘율리시즈’가 잡지에 연재되도록 주선하기도 하고, 그 작품이 책으로 나왔을 때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함께 일체가 되어 <율리시즈>를 찬양해야 한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파운드와 엘리어트의 문학적 교유 가운데, 다른 사람의 작품을 얼마나 깊이 읽고 교감할 수 있는가 하는 사례를 보게 된다. 엘리어트의 장시 ‘황무지, The Waste Land’는 동서양의 신화와 역사 등이 호한하게 얽혀 있는 작품이다. 처음 썼을 때는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의 배쯤 되는 분량이었다고 한다. 이를 파운드가 대폭 줄이고 내용을 수정하도록 해서 발표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의 작품을 읽는 정도가 진전되고 수준이 높아지면 심정적 공감은 물론 창작과정 자체를 조정하기까지 한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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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를 쓰기로 전환하라
모든 문학 창작은 읽기에서 시작한다. 달리 말하자면, 어느 작가도 독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국 작가는 독자의 변신일 뿐이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남에게 독서 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읽기의 쓰기로 전환.
남에게 독서자료를 제공하는 일차적인 방식은 내가 쓴 작품을 읽어주는 것이다. 읽어준다는 것은 들려준다는 뜻인데, 예컨대 자작시 낭송과 같은 것이 그 예에 해당한다. 내가 이런 글을 썼으니 읽어 달라고 선전을 하고 다니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런 기회도 냉큼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의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내가 쓴 것을 읽어 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편이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지도자 과정’이 있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교사를 양성하는 과정이다. 1년 단위로 운영하기 때문에 두 학기로 나누어 수업이 진행된다. 1학기 종강이 지난 6월 16일에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나서, “시를 하나 써 왔는데 읽을까요, 말까요”하는 사이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시를 낭독해 주었다. 수강생들이 내 강의보다 시를 읽는 나를 더 좋아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욕심에서 오는 착각일지도 모른다.)

유월의 숲에서

우리는 우뚝한 나무로 서서
자기 삶의 깊이만큼 그림자를 드리운다.

우리는 숲을 이루어 살아가게 마련이라
그윽한 숲의 향기를 그리워하며 마음 조인다.

숲이 넓을수록 지평은 아득하고
숲이 깊을수록 정신은 웅건한 법이거니

우람한 나무로 날 기르는 나날이여
깊고 그윽한 숲에 익어가는 세월이여

나무와 나무가 가지를 곁고
향과 향이 서로를 감싸고 돌아가듯

숲 사이로 지혜의 바람은 살랑대고
나무 꼭대기마다 꿈처럼 피어나는 구름이 고와라.

내 작품에 대해 나 스스로 자주 하는 이야기인데, 이게 시가 되는지는 안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내 시를 들어 달라고 읽어주는 일은 내 시의 독자를 현장에서 확보하는 일이다. 이것이 문학창작에 필요한 일종의 소통의 욕구가 구체화되는 예가 아닌가 싶다.
남의 작품을 읽어 주고, 그리고 내 작품을 읽어 달라고 적극 요청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작품을 터놓을 동료와 선배를 만나는 일이 급선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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