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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에 세계가 큰다

모든 독자는 잠재적 작가다. 글쓰기를 통해 문학을 삶의 현장으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문학적 글쓰기에 대한 신비화는 문학이 일상에서 멀어지게 했다. 글쓰기를 통한 자아 실현과 삶의 통합성을 추구하는 일은 그 자체가 교육적 의의를 지닌 활동으로, 교사와 학생이 함께 읽고 글쓰기를 하는 데 지침이 될 만한 전거가 필요하다. 본 창작 체험의 설계를 통해 교육현장에서 교사와 학생이 함께 즐겁게 글쓰기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인간의 생애 - 이야기 한 자락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은 대개, 문득, 예상치 않게 다가온다. 그리고 가뭇없이 자취를 감춘다. 어느 날 문득, 당신의 생애를 간단한 이야기로 정리해 보라는 요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든지, 배우자를 만나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든지, 약력을 소개할 일이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주문을 받는다.
 남에게 나를 소개할 경우 이력서(履歷書)라는 양식을 이용한다. 이력서에는 출생과 연관된 사항, 학력, 경력, 업적 등을 항목화하여 기록하게 되어 있다. 사회에 진출하는 초기 이력서를 생각해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이력서 한 줄 추가하는 데 몇 년이 걸린다던 선배 이야기가 실감을 더한다. 더구나 처음 내는 이력서에는 경력이 있을 수 없어 당황하기 십상이다.
 사람들이 늘 하는 말대로 우리들 삶은 복잡다단(複雜多端)하다. 굽이와 가닥이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으로 얽히고설킨다. 가슴에는 한도 많고 원도 많고 때로는 환희가 넘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환희로운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더구나 돌아볼 때는 어슴푸레한 망각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래서 좀 과장하면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생애도 잘 정리가 되지를 않는다.
 내 생애를 정리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처럼 남의 생애 또한 정리가 쉽지를 않을 것은 의당 그러하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생애 가운데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력서에는 기록하기 어려운 사항이지만 기억이 뚜렷한 일들이 있는 법이다. 그 기억이 선명한 이야기들을 기록한다면, 말로 정리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내밀성을 지닌 생애 이야기가 된다.
 우리들은 대부분 부지런히, 열심히 산다. 천성이 게으르다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부지런함이 남을 앞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열성과 근면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람이 성공적으로 생애를 경영하는 예는 없다. 그런데도 내 생애를 이야기해 보라면 이야기 거리가 없어서 허둥거리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맥을 잇지 못하고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맥을 이어가는 것은 시간축과 공간축을 따라 사건을 의미 있게 배열하는 구성작업이다. 시간의 연속성과 공간의 폭과 넓이가 그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世界, die Welt)이다. 세계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기도 하고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것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 살아가면서 관여하는 일들이 세계의 지평을 이룬다. 그런가 하면 이상(理想)으로 생각하고 추구하는 관념의 영역 또한 세계의 지평을 형성한다. 이처럼 시공간으로 구체화되는 생애의 장면들을 이어나갈 때 이야기는 완결성을 지니게 된다.
 신혼 생활을 꿈같다고 한다. 그리고 신혼생활 중에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고 학교에 가고 하는 일반적 과정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태어날 때 어떤 꿈을 꾸었고, 어떤 태실(胎室)에서 어떻게 산고를 치렀고, 똥오줌을 가리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 하는 것을 자세히 기억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어버이날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는 노래를 듣고 눈물을 글썽이더라도, 그 아이의 생애를 혹은 나의 삶을 이야기로 정리하기 어려운 까닭은 시간에 따라 구체성이 마모되었기 때문이다. 구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구체성을 유지하고 상황에 따라 다시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생애는 싱싱한 감성을 길어올리고 신선한 빛을 발하게 된다.
 이처럼 한 인간의 생애는 이야기로 재구성될 때 논리성과 구체성을 띠게 된다.

문학의 영토 안에서의 이야기
 우리말에서 이야기라는 용어는 그 사용 범위가 너무 넓어 종잡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이야기를 이야기한다고 할 경우, 불어의 재귀동사처럼 쓰이는 용법인데, 앞뒤의 ‘이야기’를 잘 규정하지 않으면 뜻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서사문학(敍事文學)이니 소설문학이니 하는 것들로 장르가 분화된다. 문학의 기본장르는 잘 아는 대로 서정, 서사, 극 그리고 교술(敎述, didactic genre, thematic genre) 등으로 구분된다. 서사문학 장르의 원형은 서사시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서양의 서사시는 그리스어 에포스에 어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야기라는 점, 과거사의 기억이라는 점을 강조할 때 역사와 구분되지 않는다. 극은 물론이고 교술도 때로 이야기를 포함하기 때문에 문학을 크게 가른다면 서정과 서사로 영역이 나뉜다. 서정은 노래고 서사는 이야기이다.
 이 둘의 속성을 잘 그린 예를 시인 최두석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그의 시 <노래와 이야기>는 이렇게 되어 있다.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가리라
 정간보가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이 시의 첫 행은 시의 내용 전체를 아포리즘으로 압축한다.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노래는 생의 리듬이나 충동과 연관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는 아무래도 격정적이다. 그런데 그 노래는 사리 분별을 헤아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베개에 떨어진 머리카락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건’을 처리하는 데는 선후가 맞는 논리가 있어야 한다. 격정을 벗어난 논리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수행된다. 그래서 노래를 주로 하는 시인도 이성적인 삶을 운용하는 데는 이야기를 동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감성과 논리를 주체 안에 통합하면서 진행된다. 이야기는 그러한 삶의 통합성을 지향한다. 시 속에 이야기를 포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 시를 포함하는 것은 선례들이 있거니와, 시 쓰는 사연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문학이 가치 있는 체험의 언어적 형상화라는 명제는 가치 있는 삶의 이야기라고 바꾸어도 틀림이 없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잘할 줄 아는 사람은 문학을 하는 것이고, 그 가치의 높낮이는 이야기를 거듭하는 데 따라 향상되게 마련이다.

나의 이야기와 남의 이야기
 작가 이상(李箱)은 이런 말을 했다. “비밀이 없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허전하다.” 실감이 가는 말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비밀로 가득한 인생이 얼마나 폭폭하게 살아야 할 것인가 싶기도 하다. 비밀을 털어 놓으면 비밀이 아니다. 비밀을 지키고 있어야 비밀이고, 그 매력은 비공개의 속성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비밀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호기심이 일게 마련이다. 나의 속 이야기를 털어놓기 싫은 것은 남의 비밀을 캐거나 훔쳐보고 싶은 욕망의 다른 쪽이다.
 나의 치부(恥部)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치부를 드러낸 것이 인생의 진실 일부를 담고 있지 않으면 스캔들로 전락한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다. 자서전에 거짓을 쓰기도 어렵고 자서전에다가 진실을 담보로 부끄러운 이야기를 쓰기도 쉽지 않다. 수필도 마찬가지이다. 수필은 주로 작가의 체험을 진솔하게 털어놓는 문학 양식으로 규정된다. 진솔하게 털어 놓기 고약한 소재는 수필에서 제외된다. 우아한 이야기를 시종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동안에 가면이 끼어들기 십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부끄러운 이야기에 인생의 진실을 담을 수 있는가?
 여기에서 방법으로 등장하는 것이 허구적 상상력(虛構的 想像力, Fictional imagination)이다. 소설을 곧바로 허구라고 하는 데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 그러나 허구양식으로 소설을 규정하는 것은 소설의 가능성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뜻을 지닌다. 허구는 신적(神的)인 속성을 지닌다. 신이란 절대자를 뜻한다. 절대자는 모든 것은 초월한다. 쉽게 말하자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그 소위(所爲)가 모두 정당성을 지니는 그런 존재가 신이다. 뒤집어 말하면 허구적 상상력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에서는 현실과 사실의 논리 이외에는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다.
 허구는 나의 이야기라도 남의 이야기로 들어 달라는 요청이다. 그리고 그 증거를 묻지 말아 달라는 묵계의 승인이다. 그러니까, 소설에 서술된 내용을 작가의 체험으로 알고 작가의 도덕성을 의문시한다면 소설을 제대로 읽는 방법이 아니다. 소설 속에 외입과 도박과 마약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것은 작중인물, 허구적 인물의 체험이지 작가의 체험이 아니다. 그러니까 허구는 작가의 현실체험에 대한 강박을 풀어주는 장치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모든 것을 상상해서 소설에 녹여 넣는다고 생각하지 말 일이다.
 작가를 신으로 비유하는 것은 비유일 따름이다. 작가는 사회 • 문화적으로 흘러가는 맥락에 의존하는 존재이다. 체험의 일부가 작품 속에 용해(溶解)되어 형상화에 기여할 뿐이지,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쉽게 말해서 자가가 소재를 발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좀 편하게 생각하기로 하자. 그리하여 작가의 교사적 소명이나 성직자적 의무 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이야기 세계를 펼칠 수 있도록 할 일이다. 남을 내세워 세상을 비평하기도 하고, 못된 놈 속을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내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처럼 전개하는 데 소설의 매력이 있다. 연암 박지원도 그의 <열하일기> 속에 소설을 써 넣으면서 들은 이야기라고, 남의 이야기라고 발명(發明)을 하고 있지 않던가. 법정에 섰더라도 내게 불리한 증언을 안 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 내용이 내 품위를 손상하고 집안을 망신스럽게 하는 경우라면 자서전처럼 쓰되 남의 이야기라고 하라. 방법은 간단하다. 죄를 모두 고백하고 그 죄 그대로 벌을 받는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경우라도, 표지에다가 소설(小說)이라고 두 자만 써 넣으면 면책특권을 얻게 된다.
 자서전을 쓰고서 소설이라고 장르를 달아 둔다고 해서 벌칙이 내리지 않는다. 허구는 신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나의 세계를 키운다
 모든 문학이 그렇듯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이야기를 쓴다. 남의 이야기도 내가 하는 한은 나의 이야기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선택했다는 것이 나의 주체적 판단이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가 된다. 좀 확대 해석을 하자면 남이 남의 이야기를 쓴 소설을 내가 읽을 경우, 그것은 나의 문학이다. 나의 감성과 지성과 윤리감각에 영향을 행사하는 이야기라면 그것은 나의 이야기요, 나의 문학이 아니겠는가.
 나의 이야기가 나를 위한 것이란 뜻은 내가 쓰는 이야기가 혹은 소설이 결국 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는 뜻이다. 이광수는 전집 20권으로 표현되는 그의 세계를 구축하고 산 것이다. 채만식은 전집 10권으로 그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다른 작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들이 소설로 형상화한 삶은 그의 실제 삶의 한편에 혹은 곁에 자리잡고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구체적인 몸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 그의 세계를 형성한다면, 작가들은 허구적 상상력의 세계를 따로 지니고 사는 이들이다.
 작가가 구축한 허구적 상상력의 세계는 현실세계를 반영한다. 현실 세계의 여러 면모를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인물들만큼 작가는 일상을 넘어서는 세계를 경험한다. 작가의 작품에는 하고많은 사건이 등장한다. 작가는 그러한 사건에 관여하는 것이다. 관여 방식은 일정하지 않다. 동조자가 될 수도 있고 비판세력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그리는 세계는 작가가 사는 실제 현실을 구축하는 자료 역할을 한다. 어느 작가의 작품이 많이 읽힌다면 그렇게 작품을 읽는다는 ‘독서현상’이 그 사회를 구성하는 자료가 된다. 그런 예로 <마담 보바리>를 들 수 있다. 주인공 엠마가 파리 같은 대도시로 나가고 싶은 열망으로 생애를 망치는 것은, 당시 유행하던 삼류소설을 마구 읽은 결과이다. 이는 당대 사회의 면모를 반영한다. 한편으로 <마담 보바리>를 읽고 그 도덕성을 법정에서 논의하고 하던 것은 당대 사회를 형성하는 소재가 된다. 이처럼 소설로 대표되는 이야기문학은 사회를 반영하고 사회를 형성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결국 작가는 자신이 사는 사회를 작품 속에서 재구성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키워 나가는 것이다.
 그리스의 20세기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의 문학에서 예수, 석가, 성 프란체스코, 콜럼버스, 알렉산더 대왕 등 인류사의 성인이나 영웅에 해당하는 인물을 다루었다. 이는 이 작가가 형성해 나가는 세계가 그러한 성인들의 행적과 연관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작가의 세계와 교합하면서 다시 구축하는 또 다른 세계이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전기를 읽기도 하고, 그가 남긴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읽기도 하면서 이순신의 생애에 공감하고 감동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이순신이 되어서, 혹은 이순신과 함께 행동하는 서술자가 되어서 이순신의 행동과 심리와 이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의 이야기를 쓰는 것만큼 절실하지는 않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작가가 구축한 세계이고, 그 세계를 살았다는 점에서 작가의 생애 스펙트럼에 둥두렷이 떠오르는 원광(圓光)과도 같은 아우라이다. 작가는 작품을 씀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키워나가는 사람이다.
 소설을 쓰는 것,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작가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데서 출발한다. 거기에 남의 이야기가 추가되고 대비적으로 의미가 부여된다. 이야기는 삶에 대한 해석 행위이다. 삶의 해석으로서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삶의 지평을 확대해 준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경우, 생애에 논리를 부여해 주고, 구체성을 확충해 주며, 삶의 가치를 증대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의 이런 가치를 인정한다면, 우선 자신의 생애부터 정리해 보기 바란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를 전개해 보라.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의 의미나 가치는 다시 숙고해볼 일이다. 사람살이는 혼자서 해낼 수 있는 과업이 아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으며 살게 마련이다. 그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해 나가면서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환희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세계는 커간다. 이는 인생의 허무감을 극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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