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독자는 잠재적 작가다. 글쓰기를 통해 문학을 삶의 현장으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문학적 글쓰기에 대한 신비화는 문학이 일상에서 멀어지게 했다. 글쓰기를 통한 자아 실현과 삶의 통합성을 추구하는 일은 그 자체가 교육적 의의를 지닌 활동으로, 교사와 학생이 함께 읽고 글쓰기를 하는 데 지침이 될 만한 전거가 필요하다. 본 창작 체험의 설계를 통해 교육현장에서 교사와 학생이 함께 즐겁게 글쓰기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노래방에도 시가 있어 젊은 시절에 시인이 아니었던 사람 누가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그런데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대개는 시를 잊고 산다. 시와 담을 쌓고 산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시를 써 보겠다는 의욕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이따금 만난다. 반가워서, 시를 써 본 적이 있는가 물으면 대개는 고개를 가로 젓거나 초등학교, 중학교 정도에서 시를 써 본 적이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로 얼버무린다. ‘글은 손으로 쓴다’는 화두를 잊은 것이다. 시를 써 본 적이 까마득하다는 이들에게, 다시 시를 자주 읽는가 묻는다. 답은 아주 당연하기라도 한 것처럼, 시간을 못 낸다고들 한다. 시간을 내어 시를 읽을 정도면 시에 가까운 사람이다. 아무튼 시는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시를 이야기하고 시를 써 보는 나로서는 이따금 아득한 느낌에 빠지곤 한다. 시가 뭐기에 이렇게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간 것인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자 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하다. 시는 우리 주변에 널리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이미 우리들 삶이 시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시는 노래다.” 노래가 있는 곳에는 늘 시가 있다. 다만 우리가 잘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묻히고 말 뿐이다. 시와는 무관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도 노래방에 가서 노래 몇 곡 못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가 부르는 노래가 유행가인가 팝송인가 가곡인가 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노래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잘한 노래, 잘 부른 노래는 그 자체가 시적 자질을 보증하는 단서가 된다. 노래 잘하는 사람, 노래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가수(歌手)라 한다. 가수를 예술가라 하고, 시인도 예술가에 든다. 그러니까 시 잘 읊는 사람이나 노래 잘 하는 사람이나 예술가 축에 든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노래를 할 줄 아는 이는 누구나 시를 알고 시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정말 그러한가? 모임에서거나 노래방에서 노래를 할 때, 사람들은 노래 내용에 따라 감정을 잘들 조정한다. 기쁨과 슬픔의 영역을 넘나들며 열에 들뜨기도 하고 처연하게 가라앉아서 노래를 하기도 한다. 노래 내용에 내 감정을 전이하고 다시 거기 빠져들어 열창(熱唱)을 한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시를 읊는 것과 흡사하다. 감정이 섞인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말을 할 때도 내 이야기를 하는 경우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노래도 나의 심정을 직접 토로하는 경우도 있고 남의 마음을 내 노래에 담는 경우도 있다. 본인이 작곡가나 작사자가 아니면 대부분 남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남의 노래를 부르되 그것이 마치 나의 기쁨과 슬픔인 것처럼 노래한다. 노래에서 나는 남과 심정적으로 하나가 되어 기뻐하고 슬퍼한다. 시인이 쓴 것을 내가 읽으면서 혹은 낭독하면서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은 인간의 정서적 소통의 한 전례(典例)가 된다. 시인의 시를 내가 읽는 데도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나아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데 하물며 나의 심정을 시로 쓴 경우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쓴 시를 내가 읽어야 절실한 감정이 살아난다든지 체험이 우러난다든지 하는 식으로 과장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남의 승리에 환호를 하기도 하고 남의 슬픔에 눈물을 흘릴 줄도 아는 공감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공감력이야말로 인간의 보편성을 증거하는 중요한 징표이다. 인간의 예술활동은 절실한 자기표현을 통해 공감을 얻어내는 행위이다. 공감을 통해 타자를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세계를 자아 가운데 아우르는 행위가 예술행위이다. 자기표현은 남에게 동의를 구하는 일이다. 나는 이러이러하게 느낀다, 그런데 당신도 그렇게 느끼지 않는가, 내 표현에 동의를 해 달라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 예술행위다. 예술행위가 관객과 감상자를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 사람이라도 독자가 없다면 시인은 시인일 수 없다.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이 독자라도 독자가 있어야 시적 행위가 가능하다. 시는 공감이고 대화이기 때문이다. 노래와 시가 상통한다는 이야기는 기실 진부하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노래가 본질적으로 시와 상통한다는 점을 설명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저 넘어간다. 거듭하건대 시는 노래다. 노래를 할 줄 아는 모든 사람은 시를 읽을 줄 알고 쓸 수 있다. 한잔 하고 나서 노래방에 다녀 나오면서 시원하다거나 가슴이 좀 트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면, 그게 노래의 힘이다. 그런 힘은 시에도 있다. 노래를 하는 것처럼 시를 읽고, 노랫말을 만들어보는 것처럼 시를 써 보기로 하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노래 가운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게 있다. 1997년에 발표된 노래니까 10년 넘겨 애창되는 노래다. 정지원의 작사로 되어 있고, 안치환이 작곡하고 노래한 곡이다. 우선 가사를 옮겨 놓고 읽어 보기로 한다(여기 옮겨 놓은 가사를 따라 노래를 불러 보거나 노래를 들어 보면서 가사를 음미하기 바란다. 형식을 따로 갖추지 않고 인용하기로 한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으음~ .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 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 사랑.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 사랑.
이 노래는 리듬이 힘차고 패기가 있어서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출하기 좋다. 노래하는 사람으로 상정되는 대상에 대한 의미부여가 당당하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누군들 강물 같은 자기 노래를 가지고 싶지 않겠는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다가 이들이야말로 알게 된다고 하면, 노래하는 이들은 자연 그렇게 자신을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으로 동일시하게 된다. 이 노래를 하는 동안 당신은 이 노래의 주인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셈이다. 그런데 무엇을 아는가, 알게 되는 내용을 뒤에 제시함으로써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기대를 하게 하면서 음미하는 중에 노래가 진행된다. 호기심을 부추기기 위한 방안인지 내용이 그렇게 쉽게,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강물을 품고 있어서 강의 위치로 자리바꿈을 한다. 강물은 산과 어울려야 제대로 된 풍경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강산’이라는 말이 실감을 하게 된다. 강이 조용히 바라보는 산들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모양을 달리한다. 낮에는 오히려 침묵으로 ‘내내 어두웠던 산’들인데 저녁이 되면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꾼다. 산 그림자가 질 시간은 아니니까 산의 기억이 혹은 산의 정기가 강으로 스미어 낮에 꾸지 못한 꿈을 꾼다. 산이 강에 잠기어 꿈을 꾼다는 데부터는 시적 발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이 들어간다. 누가 부둥켜안는가? 산과 강이, 아니면 강물 속에서 산들이? 아무튼 부둥켜안는 주체가 누군지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는 중에 노래는 멜로디를 따라 흘러간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하는 노래 때문에 이미지의 확실한 논리는 리듬에 밀려 나간다. 그런 풍경은 강 같은 노래를 지닌 사람이라야 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제는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사실로 화제를 바꾼다. 그 사람이 아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되어 있다.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알게 된다는 것인데 맥락이 단순치를 않다. 형식상으로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 본 사람”이 알게 되는 사실을 나타내는 목적절로 되어 있다. 그 절에 포함된 주어는 ‘사랑’이다. 그런데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는 존재”는 사람으로 짐작이 된다. 헌데 사람이 ‘꽃눈을 닫’을 수는 없다. 더구나 잎을 키우는 것은 나무다. 사랑으로 자라는 나무가 “숲이 되고 산이 되어” 강에 비치고 강물과 교감하는 그런 세계에서 울려 퍼지는 환희성(歡喜聲) 그것이 메아리일 터이다. 이런 맥락의 뒤에 거듭되는 핵심구절이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기에 앞에서 분석해본 사실들이 충분한 근거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바로 그대’이고 ‘바로 당신’ 이며 ‘바로 우리’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는 수사학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렇다. 이 정도로 분석을 해 보아야 뜻을 알 수 있는 가사로 되어 있는 노래를 아무 거침없이 부른다는 점이다. 노래를 부르면서 뜻을 묻기 전에 느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에 취한다. 시도 그렇다. 전체적으로 산뜻하다, 명랑하다, 처연(悽然)하다, 비애감(悲哀感)이 든다 등 전체적인 분위기로 접근하고, 그러한 분위기와 느낌이 발생하는 구조는 시를 공부하는 과정에 부과되는 과업이다. 노래를 하듯이 시를 읽으라. 그리하여 그 리듬을 몸에 저장하라. 몸에 저장될 때는 시의 어느 한 부분이나 요소가 아니라 ‘시 전체’가 저장된다. 몸에 저장된 시들이 때를 만나면 저절로 당신의 시가 되어 싹터 나온다. [PAGE BREAK] 짜증스런 일상도 노래가 되나 문학을 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것이다. 모든 노래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도 고정관념의 일종이다. 시가 아름다운 정서의 표현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모든 감흥이 시가 된다. 짜증스런 일상을 노래하고 시로 읊을 수도 있다. 장기하라는 신예가 작사를 하고 작곡을 한 노래 가운데 <싸구려 커피>가 그러한 예에 속한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 마리쯤 슥 지나가도 무거운 매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의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에 나가 본다. 아직 덜 갠 하늘이 너무 가까워 숨쉬기가 쉽질 않다. 수만 번 본 것만 같다.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남은 것도 없이 텅 빈 나를 잠근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반복) 뭐 한 몇 년간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물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이거는 뭐 감각이 없어. 비가 내리면 처마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그냥 가만히 보다보면은 이거는 뭔가 아니다 싶어 비가 그쳐도 희꾸무리죽죽한 저게 하늘이라고 머리 위를 뒤덮고 있는 건지. 저거는 뭔가 하늘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너무 낮게 머리카락에 거의 닿게 조금만 뛰어도 정수리를 꿍하고 찧을 것 같은데 벽장 속 제습제는 벌써 꽉 차 있으나 마나. 모기 때려 잡다 번진 피가 묻은 거울 볼 때 마다 어우 약간 놀라 제멋대로 구부러진 칫솔 갖다 이빨을 닦다 보면은 잇몸에 피가 나게 닦아도 당최 치석은 빠져 나올 줄을 몰라. 언제 땄는지도 모르는 미지근한 콜라가 담긴 캔을 입에 가져가 한모금 아뿔싸 담배꽁초가. 이제는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몰라 해가 뜨기도 전에 지는 이런 상황은 뭔가.
이하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등을 반복한다. 마치 이상의 소설 <날개>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무 할 일도 없이 빈둥대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주인공의 짜증스런 일상을 지루하게 늘어놓았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남은 것도 없이 텅 빈 나를 잠근다”는 비유는 시적 자질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제부(라이트모티프)에 해당하는 구절,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를 아무런 변조 없이 몇 차례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반복은 일상적 사건의 특징이다. 낡은 표현으로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식으로 지나가는 일상의 특징이 그러하다. 일상의 구조와 노래 가사의 구성이 유사성을 지니기 때문에 실감을 불러온다. 이러한 지루한 일상의 나열이 노래가 되는 까닭은 타성적 상투성을 깨고 지루하고 짜증나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을 과장하지 않는 것이 이 노래의 미덕이다. 시가 별거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출발하라. 좋으면 좋다고, 뭐가 좋은지 생각하면서 반복해서 써 나가라. 분통이 터지면 분통이 터진다고 되풀이해서 말해보고, 가능하다면 노래처럼 흥얼거려 보라. 가락이 생기면 일단 써 놓고 그게 시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뒤에 찬찬히 살펴보아도 늦지 않다. 노래로 시의 형식을 익히자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는 좀 다른 맥락에서, 시는 일정한 형식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형식은 우리와 친숙하고 어떤 것은 너무 익숙해서 그게 시 형식인지를 인식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런 예가 시조(時調)다. 안민영의 시조 가운데 하나를 예로 든다.
바람이 / 눈을 몰아 / 산창에 / 부딪치니 3 / 4 / 3 / 4 찬 기운 / 새어들어 / 자던 매화를 / 침노하니 3 / 4 / 5(3) / 4 아무리 / 얼우려 한들 / 봄뜻이야 / 앗을소냐 3 / 5 / 4 / 4(3)
오른편에 적은 숫자는 음절수이다. 괄호 안의 숫자는 시조의 자수율 원형에 해당한다. 두 군데 변형이 나타난다. 종장의 첫 구절이 3음절로 맞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치 않다. 이 시조를 호흡단락을 중심으로 분절하여 빗금으로 표시하면 4음보(四音步) 율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요컨대 ‘4음보 3행’으로 쓴 시라면 시조형식의 기본을 갖춘 셈이 된다. 한문의 경우는 한자(漢字) 하나하나가 독립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글자 수를 맞추기가 쉽다.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명사에 조사가 붙고 동사는 활용을 하는 중에 글자가 추가되기 때문에 자수를 정확하게 맞추어 율격을 조성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호흡단락을 중심으로 율격을 조성하면 설명이 포괄성을 띤다. 가곡으로 널리 불리는 <가고파>는 이은상의 연시조를 가사로 삼은 것인데, 그 첫 수는 이렇게 되어 있다.
내 고향 / 남쪽 바다 / 그 파란 물 / 눈에 보이네 꿈엔들 / 잊으리요 / 그 잔잔한 / 고향 바다 지금도 / 그 물새들 날으리 / 가고파라 / 가고파
자수는 정확하게 맞지 않지만 음보는 위에 보는 것처럼 분석이 된다. 한국시에서 엄격한 의미의 정형시는 없다. 형식적 유연성이 한국시의 특질인 셈이다. 형식은 필요하되 그것이 가변성이 크다면, 짐짓 해보는 식으로 시의 틀에 맞추어 글을 만들어 보는 데서 시쓰기는 시작된다. 자유시의 시대에 무슨 시조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되지 않는 소리를 할 때 그를 비웃어 ‘시조하고 있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우리가 깨버려야 하는 고정관념이다. 사람들이 한 천 년쯤 해온 일은 까닭이 있는 법이다. 시조의 역사를 천년으로 본다면, 그 천년의 존재이유를 탐구할 것이지 시대가 변했으니 버려야 한다고 납들 일이 아니다.
글쓰기 어렵다고 한숨 푸념 뱉다가도 한나절 궁굴려낸 생각들 보석이 되면 보게나, 그대 가슴에 수를 놓는 별무리
이런 정도의 어설픈 시도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공연히 쑥스럽고, 그게 무슨 소용이 쓸모가 있는가 망설이는 동안 당신의 시적 재능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서서히 마모된다. 하얗게 바래고 닳아 없어지는 그대의 재능을 새파랗게 싹이 돋도록 하기 위해서는 노래방에 가서 노래하듯이 그렇게 시를 써 보시라. 운율이니 이미지니 상징이니 함축성이니 하는 등의 전문용어는 다 잊어버려도 좋다. 흉내도 방법이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지금 당장 컴퓨터를 켜고 글을 써 보라. 형식을 유념하자면 먼저 ‘노래틀’을 만들고 시작하라. 이러한 틀 속에 당신의 시적 상상력이 보석처럼 박히기를 바란다. 모종을 심듯이 철에 맞춰 하나하나 쌓아 가다보면 당신은 어느 사이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