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에서 우루무치까지

중국 실크로드를 다녀왔습니다. 시안[西安] 일대-천수-난주-가욕관-주천-둔황-투루판-우루무치를 거치는 일정이었습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볼 때 이 일정은 실크로드 전체의 반에도 미치지 않는 짧은 거리입니다. 하지만 서쪽으로 달려 갈수록 눈에 띄게 달라지는 자연환경이나 사람들의 생김새는 ‘역시 실크로드다!’하고 감탄하게 합니다.
‘사막에서도 흰 눈이 덮인 산맥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수차례 듣고 사진으로 확인도 했지만 정작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요, 나와 상관없는 남의 집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렇게 뻣뻣했던 나그네에게, 감탄에 익숙지 않은 내게 실크로드는 말로 못할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새벽을 종착지로 해서 밤새 서쪽으로만 달리던 기차는 종착지에 다다를 무렵 드디어 저 멀리서 흰 눈을 뒤집어 쓴 채 나를 향해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코 앞에는 누렇고 메마른 사막인데도 말입니다. ‘어리석은 중생아,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넓단다’하는 가르침을 던져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에어컨이 설치된 버스를 타고 편안한 숙소에서 머물며 실크로드를 다닐 수 있다지만 그 옛날 척박한 이 땅에서 생활했을 사람들을 떠올리면 아찔합니다. 수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열사의 사막에서, 훼방꾼의 침입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사라져 갔을 것입니다.
이제 한 해를 한 달여 남겨 놓은 이즈음에 순례자의 마음으로 실크로드로 다시 떠납니다. 그 속에서 우리 것, 우리 역사, 우리 문화와 관련한 것들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실크로드의 시작시안은 중국 고도의 한 곳으로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인 서역으로의 여행이 시작됩니다. 중국의 절세의 미인이었다는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화청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과 병마용갱 등 볼 것 많고 들을 것 많은 곳이라 이곳 가이드는 중국에서도 1급에 속한답니다.
시안에서는 몇 인물을 떠올립니다. 먼저 진시황.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짓고 불로초를 찾아 영원한 삶을 누리고 싶었던 그였지만 정작 불로초를 찾아 떠난 신하들은 함흥차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또한 불로초를 얻을 수 없음을 미리 감지했을까요? 생전에 자신의 죽음에 대비해서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지요. 병마용의 호위 속에 그 무덤 속에서 영생을 누리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거대한 무덤 바닥에는 수은이 흐르는 강이 있고 행여 침입자가 있을까 독묻은 화살을 설치해두고 자동 발사 장치까지 해놓았답니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은 이미 죽은 사람일 뿐입니다. 하지만 무모하리만큼 파격적이었던 그의 스케일답게 그의 사후에도 그가 남긴 유적은 시안을 먹여 살리는 대표적인 관광지로 남아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으니 사후까지도 그 영향력이 참 대단한 사람이네요.
진시황이 중국 역사상 황제의 시발에 해당하는 위상을 갖는 과거의 인물이라면 양지발이라는 사람은 어쩌면 시안에서만큼은 진시황에 견줄 만한 현존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진시황릉을 지키는 거대한 지하군단인 병마용을 처음 발견했던 사람입니다. 1974년 극심한 가뭄 끝에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한 병마용갱,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지금껏 박물관에서 자신의 책을 팔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의 출근지는 박물관, 하는 일은 책에 사인하기. 병마용갱의 위력에 놀란 사람들은 병마용갱을 처음 발견했다는 이 사람을 보기 위해 몰려듭니다. 그의 책은 윤전기에서 쉴 새 없이 신문을 찍어내듯 팔립니다. 매일 매일 사인만 해주고 돈을 버는 사람, 그와 진시황과의 인연이 부럽습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사랑이라는 현종과 양귀비의 파격적인 러브스토리는 지금껏 회자되고 있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요즘의 기준이라면 양귀비는 미인 축에 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는 시대를 잘 타고 난 것 같습니다. 중국 절세미인으로 잊혀지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비극적인 그녀의 죽음, 그래서 파격적인 러브스토리는 결국 윤리를 넘지 못했나 봅니다.
시안은 현장스님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인도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현장이 그가 가져온 수백 권의 불경을 모셔두었던 탑이 시안 시내 자은사라는 사찰에 있는 대안탑입니다. 서유기의 삼장법사로 잘 알려진 현장에게는 신라승인 원측이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원측에 대한 논의는 우리나라보다 중국에서 활발하게 진행 중이라고 하네요. 대웅전 뒤 위패를 모신 사당에는 원측의 위패도 볼 수 있으며 그의 사리는 흥교사라는 곳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역시 인도를 다녀온 신라승 혜초 또한 이곳 장안에서 머물렀습니다. 원측과 혜초 스님을 비롯한 신라의 학승과 유학생들이 머나먼 장안까지 와서 국제화교육을 받았을 터입니다. 얼마나 많은 신라인들이 이곳을 찾아왔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조아려 봅니다. 시안 회족거리는 야시장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에는 서부 지역의 건조한 지대에서 많이 생산되는 견과류를 파는 가게가 가득합니다. 그 야시장에서 한글로 쓴 글귀를 봅니다. ‘고급곶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옛날 이 당에 있었을 신라 사람들을 발견한 듯 반갑기 그지없네요.
경주에서 찾아낸 서역신라는 황금의 나라로 유명합니다. 금관, 금 허리띠, 드리개, 귀걸이 등을 비롯한 신라의 황금문화는 북방 유목민족의 황금문화가 신라에 유입된 것입니다. 특히, 관모와 같이 사용했던 관식의 형태로 볼 때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도 나타나듯 신라와 고구려가 깃털이나 새 날개 모양의 장식을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관점으로 볼 때 장회태자묘 출토 사신도에 등장하는 조우관을 쓴 인물이 신라인이냐, 고구려이이냐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시안에 있는 산시성[陝西省] 역사박물관에는 이 사신도를 크게 확대하여 전시하고 있는데 마침 사신도 앞에 신라에서 발견된 서역인의 토용과 무척 닮은 토용이 자리하고 있어 심정적으로는 신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황금문화와 함께 유리제품이나 장식보검 등도 실크로드를 거쳐 신라에 직접 전래되었습니다. 미추왕릉 지구에서 발견된 장식보검은 철제 칼집과 칼은 썩어 없어져 버리고 금으로 된 장식만이 남아있던 것입니다. 이 유물은 시신의 허리 부분에서 발견되었는데, 자루의 끝부분이 골무형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붉은 마노를 박았으며 칼집에 해당되는 부분 위쪽에 둥근 무늬를 넣었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동양에서는 발견되는 일이 없어 신라의 대외교류를 짐작하게 하는 대표적인 유물입니다.
그 밖에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리잔,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유리병 및 유리잔 등 로만글라스라고 불리는 유리제품은 지중해 연안에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신라에 전해진 서역물품들입니다. 특히,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유리병의 경우 페르시아계 제품과 흡사하고 유사한 물품이 없어 서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당시 신라와 활발하게 교역했던 서역계의 인물상도 남아 있습니다. 지난 호에 말씀 드린 괘릉의 석상과 함께 용강동에서 발견된 문관 토용(土俑), 미추왕릉에서 출토된 상감유리구슬 목걸이 등에서 신라인인 아닌 외국인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경주 천마총은 천마도가 발견되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천마도 또한 북방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 천마를 간쑤성[甘肅省]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간쑤성 무위라는 곳에서 출토된 청동분마는 천마총의 천마와 매우 흡사합니다. 이 청동분마는 한쪽 발아래 제비를 밟고 있는 모습입니다. 천마가 얼마나 속도감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나라 무제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천마로 한혈마(汗血馬)라고도 부르지요.
경북 칠곡에 있는 송림사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오층전탑이 있습니다. 1959년 이 탑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할 때 탑 안에서 많은 유물들이 나왔는데 특히 사리장치는 신라의 황금문화와 서역의 유리가 만난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막고굴에서 생각해 보는 침탈의 역사실크로드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과도로서 대상(隊商)들이 만들어낸 길입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만든 길인 것입니다. 당시 로마를 비롯한 서양에서는 동양에서 넘어온 비단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대상들은 그 물건을 팔기 위해 위험을 마다하며 떠났던 것이죠. 실크로드를 통해 비단, 자기, 종이 등을 서쪽으로 전파시키고 동쪽으로는 향신료, 유리, 보석이 오갔습니다. 대상들은 곳곳에 있는 오아시스에 의지하여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낙타를 이용해서 그 길을 오갔습니다. 이렇게 장사에 나섰던 캐러밴은 그 후 약탈한 문화재를 싣고 가는 낙타의 행렬로 이어지다 요즘은 관광객을 싣고 나르는 낙타의 행렬로 이어져 왔습니다.

실크로드는 많은 문화유산을 남겨 두었습니다. 생활용품과 무역품 외에 신앙과 관련한 유적지가 많습니다. 그 험로를 움직이는 일정 자체가 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불교가 들어오면서 곳곳에 불교사원을 많이 남겨 두었지요. 하지만 실상 제자리에 남아 있어야 할 문화재가 제자리를 잃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크로드에 불어 닥친 문화적 침탈의 여파입니다.
실크로드 문화유산에 대한 침탈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스웨덴의 헤딘, 영국의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와 같은 이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의 석굴 등을 뒤져가며 각종 문서 및 공예품 등을 수집해 본국으로 가져가기에 혈안이었습니다.
막고굴(莫高窟·둔황 석굴)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막고굴은 모래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명사산(鳴砂山) 동쪽 절벽에 석굴사원으로 천불동이라고 불립니다.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석굴은 무려 천 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막고굴이 있는 둔황[敦煌]은 수많은 장사꾼들이, 순례자들이 이곳에 휴식하며 재충전하던 오아시스 도시였습니다. 동서양을 잇는 통로로 한창 번성을 했던 실크로드는 점차 동양과 서양을 잇는 바닷길이 개척되어 가면서 그 경쟁력을 잃게 됩니다. 생존보장조차 없는 험난한 육로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바닷길을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청나라가 기울어가는 혼란기였습니다. 막고굴에 머물고 있었던 왕원록이란 자는 이곳을 찾아온 각국의 탐험대에게 수많은 문물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귀중한 문서와 유물이 세계 곳곳으로 나눠지게 된 것입니다. 또 이곳에 머물렀던 백러시아 군인들이 동굴에서 숨어 지내면서 둔황문서를 불태워 추위를 막기도 하고 벽화에 조성된 금박을 떼어 내어 팔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막고굴의 역사는 번성과 쇠퇴를 거듭하면서 급기야 문화적 침탈을 받다 지금은 다시 세계 관광객들의 주목을 받으며 번성하고 있지요.
막고굴 17번 굴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습니다. 신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인도로, 중앙아시아로 험한 여정을 끝낸 그는 분명 앞선 국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고향은 항상 아른거렸나 봅니다. 그가 남긴 망향가가 그의 심정을 대신해 주고 있습니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 뜬 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네 /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소식 전해줄까국제화시대라며 외국어 열풍이 식을 줄 모릅니다. 교통수단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면서 이제 전 세계가 성큼 가까워진 만큼 국제화에 대한 대비는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 국제화시대를 살았던 이들을 떠올려 봅니다. 앞선 국제인, 선구자였던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였습니다. 국적기를 타고 며칠 만에 받아본 우리나라 신문 1면에는 아직도 여행오기 전 읽었던 기사가 그대로입니다. 온통 책임론 타령이었습니다. 누가 잘 했고, 누가 못 했고….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왔다는 증거입니다. 이 시대에 좀 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세계를 상대로 정치를 펼치고, 물건을 팔고, 우리 문화를 알려야 할 때인데….
다음 호까지 실크로드 기행이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 환절기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