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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오래된 정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최근 영화, 만화, 소설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통해 1980년 광주를 재조명하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되살리고, 그 역사적 의미를 뒤돌아보는 것이다. 그중에서 소설가 황석영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오래된 정원>도 한몫을 한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이후 암울한 시대 속에서 어려운 사랑을 할 수밖에 없었던 두 남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본다.


1980년 광주의 봄을 시작으로 80년대를 관통했던 암울한 시대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삶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황석영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오래된 정원>은 이러한 질문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영화이다.

<바람난 가족>, <그때 그 사람들> 등을 통해 시대와 사회의 부조리 속에 내던져진 사람들을 형상화하는 데 장기를 보여준 임상수 감독은 시대의 그늘과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를 모색하는 원작의 구성을 바탕으로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그 시절 청춘들의 슬픈 자화상에 연민의 시선을 던진다.

우리가 망각해버린 ‘오래된 정원’
영화는 오랜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온 현재의 오현우(지진희)의 회상에서 시작된다. 80년대 군부독재에 반대하다가 젊음을 온통 감옥에서 보낸 현우. 17년이 지난 눈 내리는 어느 겨울, 교도소를 나선다. 변해 버린 가족과 서울풍경, 모든 것이 그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단 한 사람, 감옥에 있던 17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지갑 속 사진의 얼굴만이 익숙하게 다가온다.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바로 한윤희(염정아)다. 며칠 후, 현우의 어머니는 그에게 한윤희의 편지를 건넨다. “소식 들었니? 한 선생, 죽었어.”

이제 카메라는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검거를 피해 숨어든 운동권 대학생 현우를 ‘갈뫼’라는 한적한 마을에 숨겨준 윤희와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피생활을 하던 현우를 숨겨줄 사람으로 소개받은 윤희는 첫눈에 봐도 당차고 씩씩하다. 자신은 운동권이 아니라고 미리 선언하면서, 사회주의자라는 현우의 말에 “아… 그러세요? 어서 씻기나 하세요, 사회주의자 아저씨!” 라며 환하게 웃는다. 현우는 그런 윤희와 지내면서 마치 딴 세상에 온 듯한 평화로움을 느낀다.

두 사람만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은신처인 갈뫼와 최루탄이 난무하는 살벌한 거리를 오가는 카메라는 험난한 시절을 통과해온 이들의 아픔과 시대상을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인물들과 일정부분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감독의 연출에 의해 주인공들의 가슴 아픈 사연은 신파적인 눈물을 덜어내고 담담하게 진행된다.

갈뫼에서의 천국 같은 6개월이 지난 후, 동료들이 모두 붙잡혔다는 소식에 갈등하던 현우는 갈뫼를 떠날 결심을 한다. 윤희는 그를 잡고 싶지만 차마 잡을 수가 없다. 그렇게 현우를 떠나보낸 후, 윤희는 수감 중인 현우의 얼굴도 한 번 못보고 홀로 그의 아이를 키우면서도 좌절하지 않는다. 감독은 화가의 길을 걸으면서 꿋꿋하게 현재에 충실하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채워나간 윤희의 시선으로 당시의 운동권과 시대를 바라본다.


혼자만 행복한 게 미안했던 시절

영화는 80년 광주에 대해, 한 운동권의 삶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재현하면서 그 시절의 불행한 청춘들을 위로하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섣불리 결론내리지 않는다.

‘사랑도 사치이고 혼자서만 행복하면 왠지 죄책감이 들던’ 시대에 현우는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기 위해 개인적인 삶과 청춘을 저당 잡혔다. 이에 반해 윤희는 “인생은 길고 역사는 더 길다. 우리 좀 더 겸손하자… 상황은 달라지기 마련이고 그때 그때 할 일이 또 있을 거야”라고 말하며 힘든 세월을 버텨낸다.

현우의 후배인 ‘영작’은 투쟁의 전면에 나서라는 운동권 조직의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택한다(이 캐릭터는 후에 정치가의 길을 걸어갈 것임을 암시해 씁쓸함을 남긴다). 감독은 이들 등장인물들에게 때론 연민을 보여주고, 때론 냉소를 보내면서 삶보다 이념이 지배하던 시대의 흉물스러움을 잘 보여 준다.

영화 <오래된 정원>은 또한 현재의 우리는 80년대의 그 암울한 시절보다 얼마나 더 나은 시대를 살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현우의 수감 기간 동안 부동산 졸부로 변모한 현우 어머니(윤여정)의 모습을 보며 부동산이 서민들을 웃기고 울리는 한국 사회를 떠올리면서 쓴웃음을 짓게 된다. 섬뜩하리만치 리얼하게 묘사된 80년대 당시 한 여공의 분신 모습은 현재의 생계형 시위를 연상시키며 마음을 무겁게 한다.

청년 ‘사회주의자’ 현우가 흰머리가 듬성한 중년이 되어 갈뫼를 찾아와 윤희가 남긴 기록과 기억을 더듬어가는 모습은 살아남은 자의 쓸쓸함과 회한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윤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그곳에서 현우는 윤희가 남긴 일기와 그림을 통해 17년 전의 과거와 윤희의 삶 속으로 빠져든다. 이제 한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서 그때 그 시절과 그때 그 사람들을 떠올리고 반추하면서 그리고 윤희가 자신에게 남기고 간 선물을 통해 그는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갈 힘을 얻는다.

“당신은 그 안에서, 나는 이쪽 바깥에서 한 세상을 보냈어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우리 이 모든 나날들과 화해해요. 잘 가요, 여보.”

윤희가 남기고 간 이 마지막 편지를 통해 그 사랑의 깊이를 헤아리면서 현우는 비로소 자신의 청춘과 사랑을 저당 잡히게 했던 그 시절과 그 자신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게 된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심 되살려
영화 <오래된 정원>은 잘 알려져 있듯이 소설가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 소설은 그 자신이 80년 5월 광주를 직접 경험했고 방북 등의 대외 활동으로 인해 수감 생활을 해야 했던 저자의 생생한 체험과 진지한 사색에 의해 탄생된 역작이다. 그래서 소설 <오래된 정원>은 시대와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 고통스런 시절을 겪어 내면서 가슴 속에 사연과 상처를 간직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묵직하게 담겨 있다. 거기다 저자 특유의 힘 있고 유려한 문체와 유기적이고 서사적인 구성이 더해져서 이야기의 감동을 배가시킨다.

이에 비해 영화 <오래된 정원>은 두 주연 배우의 성숙한 연기에 의해 캐릭터는 생생하게 빛을 발하지만, 원작소설이 주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깊은 울림과 이해는 다소 부족하다. 이는 방대한 분량의 장편 소설을 2시간 내외의 영화로 만들 때 핵심적인 플롯 중심으로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 각색을 거치면서 빚어진 결과이기도 하지만, 전작들에서 보여준 감독의 예리한 풍자와 연출력이 뭉툭해진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픈 역사라는 무거운 소재를 들고 대중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고민을 해야 하는 감독의 입장에서는 주인공들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의 선택이 보다 적절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지금의 젊은 세대들, 특히 과거의 역사를 잘 모르는 십대들에게는 이런 영화를 통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또한 특정한 시대와 사회를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늘 사건보다는 그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보여주었던 감독의 관점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더불어 사람들이 망각해버린 것들에 대해 자꾸만 환기시키려는 감독의 노력과 진심도 살아 있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 임상수 감독은 그간의 냉소적인 관찰자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따뜻한 온기를 뿜어낸다.

살아 있노라면 언젠가는
영화 종반부에 중년의 아버지 현우와 윤희의 당당함을 쏙 빼닮은 딸이 눈 내리는 거리에서 조우하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17년 동안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살았던 딸 은결(이은성)은 원망이나 눈물이 아닌 신세대다운 쿨한 태도로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우리 자주 만나죠, … 아버지.” 은결의 이 한마디에 현우는 그간의 모진 세월이 할퀴고 간 가슴의 상처들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윤희가 험한 시절을 살아 내면서 현우의 외로운 인생에 남겨 준 귀한 선물 ‘은결’. 감옥에서의 세월을 버티며 힘겹게 살아남은 현우에게 이 감격적인 순간과 은결의 존재는 남은 인생을 살아갈 이유가 될 것이다.


젊은 현우와 윤희의 아버지, 삭발한 윤희 그리고 딸이 나란히 등장하는 윤희의 그림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살며시 손을 잡는 마지막 장면은 가슴 뭉클함을 자아낸다. “인생은 길다”는 윤희의 말처럼 살아 있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는 따스한 위로를 넌지시 건네고 있는 것이다.


*영화정보
제 목 : 오래된 정원
감 독 : 임상수
출 연 : 지진희, 염정아
관람등급 : 12세 관람가
제작연도 :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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