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1 (목)

  • 맑음동두천 26.0℃
  • 구름많음강릉 28.0℃
  • 구름많음서울 24.5℃
  • 맑음대전 25.8℃
  • 맑음대구 26.1℃
  • 맑음울산 22.5℃
  • 맑음광주 25.0℃
  • 구름조금부산 21.0℃
  • 맑음고창 25.3℃
  • 구름조금제주 18.9℃
  • 구름조금강화 22.5℃
  • 맑음보은 25.4℃
  • 맑음금산 26.8℃
  • 맑음강진군 22.8℃
  • 맑음경주시 28.3℃
  • 맑음거제 21.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고구려 보장왕, 나당 연합군을 물리쳤다면

본지는 그동안 연재됐던 ‘세계화 시대의 세계사’에 이어 이번 호부터 ‘뒤집어 읽는 역사이야기 if…’를 다루고자 합니다.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수용했더라면, 침략 가능성을 경고한 황윤길의 보고를 귀담아들었다면, 이순신 장군이 끝까지 백의종군해야 했더라면, 그리고 거북선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등과 같이 역사적 순간의 다른 선택, 다른 결과를 가정해 현재의 상황을 유추하는 가정의 역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이미 결과가 반영된 현실에서 무의미한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역사적 의미나 위치를 바르게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역사의 흐름을 옳게 인식하는 혜안을 기를 수도 있기에 연재를 통해 역사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경우 인류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었을 세계사적 사건들을 개괄적, 거시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편집부

“고구려, 7년여의 격전 끝에 나·당연합군에 대승해 나라를 보전하다.” 안타깝지만 사실은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고구려는 당과 신라에 패해 668년(보장왕 27)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더불어 넓은 만주 또한 우리 민족의 생활무대에서 거의 벗어나 버렸다.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을 물리쳤을 경우 오늘날 동북아시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동북공정(東北工程,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약어)’이란 낱말은 무슨 공업화 프로젝트를 연상시키지만 실로 무서운 작업이다. 중국은 근래에 해괴하기 이를 데 없는 엉뚱한 일을 벌이고 있다. 5만여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를 슬금슬금 자국 역사에 편입시키더니 급기야 고구려까지 자국 역사로 만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우리나라가 강릉 단오제를 유네스코 ‘인류 구전(口傳) 및 무형문화재 걸작’으로 등록하려 하자 단오절이 중국의 전통 명절임을 내세워 문화약탈이라 비난하고 나섰다.

2004년 7월 1일 중국의 쑤저우[蘇州]에서 열린 28차 세계유산위원회(WHC)는 결국 중국과 북한의 고구려 유적을 나란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평양 동명왕릉 등 진파리 고분 15기, 평양 호남리 사신총과 호남리 1-16호분 등 고분 34기,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 1-3호 고분, 강서 삼묘·덕흥·약수리 고분과 용강대총 및 쌍영총, 안악 1-3호 고분이 등재된 북한 소재의 고구려 유적들이다. 오녀산성·국내성·환도성 등의 왕궁과 태왕릉과 장군총 등 왕릉 13기, 각저총·무용총·장천 1, 2, 4호 고분 등 귀족묘 26기와 광개토왕비 등 43건이 등재된 중국 소재의 고구려 유적이다. 더불어 중국의 언론들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 후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부였음을 재강조하고 나섰다.

로마제국의 후예 이탈리아가 스페인·터키·프랑스 등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 않듯이 고구려의 후예이기도 한 우리도 간도를 제외한 만주를 우리 땅이라고 우기지 않는다. 다만 고구려는 백제·신라와 함께 우리 조상이 세운 나라였고, 천만번 당연하지만 따라서 고구려 역사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일 뿐이다. 탈취, 탈취하지만 역사탈취라니? 별일도 다 있는 세상이 되었다. 아무리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관계라지만 역사는 마음대로 바꾸고 어쩌고 할 수 없는 엄연한 객관적 실체 아닌가? 부끄러워 버리거나 숨기고 싶어도 버리고 숨길 수 없는 것이 역사고 탐나서 뺏고 싶어도 빼앗지 못하는 것이 역사 아닌가?

고구려 동북아 정세 변화 못 읽어
한반도 북부와 만주일대를 통치한 고구려는 유목·농경·해양 문명을 고루 갖춘, 참으로 대단한 나라였다.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신라·백제와 겨루기도 했지만 5세기엔 중국 남북조와 더불어 동북아시아 4강 체제를 이루었고 6세기말 7세기 초에는 중국의 수·당과 대결했다. 도대체 당이 어떤 나라였는가? 당은 중국 역사상 가장 광대하고 강력한 세계제국이었다. 그런 당나라, 더욱이 전성기 당나라에게 치욕을 안겨준 고구려가 아니었던가?

주지하듯이 영양왕의 고구려는 요하를 건너 요서를 공략했다(598). 수나라의 문제가 보복공격에 나섰으나 실패하자 이번에는 양제가 100만으로 일컬어지는 대군으로 침공했다. 요동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양제는 평양을 겨냥해 30만 별동대를 투입했지만 청천강에서 을지문덕의 고구려군에게 참패했다. 어디 그뿐인가? 수를 이은 당의 태종은 대당(對唐) 강경파 연개소문이 득세하자 대군을 투입하여 요동성을 함락한 후 안시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양만춘의 고구려군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게 했다. 중원을 통일한 당나라의 최전성기를 연출한 야심만만한 태종이었지만 고구려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불행하게도 당의 위상을 현실적으로 고려해 유연한 외교를 펴지 않는 등 변화하는 동북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제거하고 영류왕의 조카(보장왕)를 옹립한 연개소문은 당과의 관계에서 강경책을 고수했다. 사실 태종이 당나라의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고구려와 당의 관계는 대결로만 치닫지는 않았다. 당이 건국되자 영류왕은 사신을 파견하는 등 친선을 도모했다(619). 당 고조는 고구려-수 전쟁이 남긴 포로의 교환을 제의했고, 고구려는 1만명의 중국인 포로를 귀국시켰다. 뿐만 아니라 영류왕은 624년에도 당에 사신을 보내 역서(曆書)를 얻는가 하면 당은 영류왕을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 국왕(上柱國 遼東郡公 高句麗 國王)’으로 봉했다. 625년에 신라와 백제가 당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조공을 방해하며 자주 침공한다고 고해 고구려와 당 사이에 외교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영류왕은 세자를 당에 파견하고 자제들을 당에 유학 보냈다(640).

하지만 당나라 태종은 즉위 이후 줄곧 고구려 침공을 노렸다. 수가 당한 패배를 되갚을 겸 요동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함이었다. 동(東)돌궐을 평정하고 천산산맥 남쪽의 서역을 장악해 실크로드를 확보하고 토번을 회유하는 데 성공한 태종은 고구려 침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641년에 진대덕이란 자를 파견하여 고구려를 정탐케 한 태종은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에 시달리던 신라의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의 출병을 요청한 643년에 결국 고구려 침공을 결심했다. 그때 태종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이며, 만약 당의 권고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출병하여 징벌하겠다고 통고했다. 물론 연개소문은 당 태종의 위협을 일축하고 오히려 당의 사신을 구금시키는 등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당나라 태종은 644년에 대군을 직접 지휘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당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비롯해 몇 개의 고구려 성들을 함락시켰으나 안시성에서 크게 패해 회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의 대군은 작은 산성에 불과한 안시성을 하루에도 6, 7회 공격하는 등 60여 일 동안 집요하게 포위·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은 완강히 저항했고 결국 성을 지켜내었다. 647년에 재침하는 등 태종은 그 후에도 몇 차례 고구려에 재침했으나 번번이 패하고 말았다.

외환(外患)보다 무서운 내우(內憂)로 무너져
한편 한강유역을 장악한 이래 줄곧 당나라와의 친선교류를 위해 노력해 온 - 사실 그 때문에 결국 삼국통일을 실현시켰지만 - 649년에 태종을 이어 고종이 즉위한 후 신라는 대당외교를 더욱 강화했다. 고종 역시 두 차례나 고구려 공격에 실패한 후 신라와의 관계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신라는 백제에게 신라-백제 국경지대의 요충지 대야성을 빼앗겼는가 하면 방어선을 낙동강까지 후퇴시켜야 했다.

위기에 처한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를 찾아가 원조를 요청했으나 연개소문이 오히려 한강유역의 반환을 요구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김춘추는 당을 방문해 양국이 연합해 백제를 공격기로 하는 합의를 이끌어내었고, 양국의 연합군은 합의한 데로 660년에 백제를 협공했다. 소정방이 이끈 당나라군은 백강(금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공격하고 김유신의 신라군은 현재 대전의 동쪽인 탄현을 넘어 공격했다. 계백이 지휘한 백제의 결사대가 황산(현재의 연산)에서 패하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자 웅진(공주)으로 몸을 피했던 의자왕은 결국 항복했다(660).

백제를 제거한 신라와 당은 다시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보장왕 20년(661), 소정방의 당군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을 공격했다. 연개소문의 고구려군은 초기엔 힘겹게나마 당군을 막아냈고, 그리하여 소정방의 당군은 다음해에 퇴각했다.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방어력은 날로 무디어가고 적군의 공격은 역으로 강화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거듭되는 전쟁에 국력이 낭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무서운 적인 ‘내분’에 빠져들었다. ‘내우외환’이라지만 내우야말로 흔히 외환을 불러와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지 않는가? 백제를 정복한 나·당의 다음 목표가 고구려임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었으되 고구려는 상하가 결속해 방비를 튼튼히 하기는커녕 안타깝게도 더 심한 내분으로 치달았다.

주지하듯이 연개소문 사후 내분은 결국 고구려를 반신불수로 만들었다. 그의 장남 남생은 아우인 남건에 패해 국내성으로 도주해 당에 항복했고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했다. 역사는 고비마다 반역자를 마련해 두지만 마라톤전으로 유명한 2회 페르시아전쟁 때 한동안 아테네를 통치한 히피아스가 페르시아군의 길 안내자로 나섰듯이 남생 또한 당나라군의 길 안내자로 나섰다. 당의 이적은 남생의 안내를 받으며 총공격을 감행했고 때맞추어 신라군도 출동했다.

고구려 굳건했다면 동북공정은 없어
고구려가 내분에 휩싸이지 않고 부국강병한 국가로 남아있었더라면, 동돌궐 정복 후 동북아시아 제패를 시도하던 당과 유연한 외교를 폈더라면, 혹은 청천강과 안시성 전투처럼 661∼668년에도 나·당군을 꺾었더라면 오늘의 한국은 어떠할까? 물론 신라의 통일도 그것대로 평가받아야겠지만 신라에 의한 통일 이후의 우리 역사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를 영토로 하는 동북아시아의 대국으로 존재할 것이다. 또 멀게는 임진왜란도 병자호란도 없었고 가까이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지도 남북으로 분열되지도 6·25가 일어나지 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남만주에 흩어져 있는 고분을 비롯해 고구려의 빛나는 문화유산을 첨성대나 미륵사지 석탑처럼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퉁거우에 있는 장군총의 위용, 삼실총 벽화 공성도·12호분의 숨막히는 기마전도·무용총의 기마상 등등. 모두가 우리 조상의 늠름한 기상과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귀중한 문화재다. 중국은 얼마 전부터 동북공정 작업의 일환으로 각각 약 2억 8천만원과 1억 4천만원을 투입해 발해와 고구려의 유적을 보수·정비했다. 중국은 그 후에도 3조원도 더 투입한 동북공정을 통해 만주의 사람·역사·문화 모두를 중국화하려 해왔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만주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의 문화재들이 결국 유네스코에 의해 중국이 남긴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만약 고구려가 이겼더라면 동북공정이니 고구려의 중국역사화 등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일 텐데 말이다.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만주의 역사와 사람이 중국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깊은 의도는 무엇일까? 혹 만주가 역사적으로 자기들의 영토임을 기정사실로 함으로써 한반도, 특히 북한에 대한 현재나 미래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간도지방에 대한 우리의 주장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원려(遠慮)의 소산일까? 간도는 청나라와 조선이 1712년에 합의해 세운 백두산정계비가 말해주듯이 우리의 영역임에도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중국에 넘겨주어 현재에 이르지 않았는가? 지금 중원에서 기세 좋게 피어오르는 패권주의(覇權主義)의 끝은 어디일까? 고구려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한다.

고구려가 내분에 휩싸이지 않고 부국강병한 국가로 남았었더라면, 동돌궐 정복 후 동북아 재패를 시도하던 당과 유연한 외교를 폈더라면, 혹은 청천강과 안시성 전투처럼 661~668년에도 나·당 연합군을 꺽었더라면 오늘의 한국은 어떠했을까? 무엇보다 한국은 한반도와 만주일대를 영토로 하는 동북아의 대국으로 존재했을 것이며 동북공정처럼 중국의 역사왜곡도 없었을 것이다.


진원숙
대구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문학박사)로 인문대학장을 역임했다. <마키아벨리와 국가이성>, <증보 서양사산책>, <서양사 이야기1, 2>, <뒤집어 읽는 역사 이야기 55>, <주니어를 위한 역사 이야기>, <시민적 휴머니즘과 인간·역사·과학>, <십자군, 성전과 약탈의 역사>, <서양 근대사 1500∼1815>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역서 외에 수십 편의 논문을 집필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