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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인생을 부탁해!-<고양이를 부탁해>

밝고 화사한 청춘의 표상인 스무 살! 대부분의 성인들은 그때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아이와 어른의 경계지점에 있는 스무 살이라는 시기는 현실과 마주쳐야 하는 가장 위태로운 시기다. 예쁘게 포장된 브라운관 속 스무 살이 아닌 현실의 스무 살 청춘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고양이를 부탁해〉를 통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순수한 꿈을 동시에 안고 사는 5명의 스무 살 이야기를 만나보자.


스무 살, 그녀들의 꿈과 좌절
젊음을 담보로 자유를 만끽하기엔 삶이 너무나 팍팍해져버린 요즘이지만, 대중매체 속에서 보이는 스무 살은 여전히 밝고 화사한 청춘의 표상인 것처럼 포장된 채 괴리감을 던져준다. 그러나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 지점에 서 있는 현실의 스무 살들에겐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끼리도 털어놓기 어려운 비밀과 고민들이 있다. 여기에 스무 살의 진짜 이야기를 해주는 한 영화가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인천에 있는 한 여자실업계고를 갓 졸업한 다섯 명의 스무 살짜리 친구들 이야기이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지닌 채, 꿈도 많고 고민도 많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이 운영하는 맥반석 찜질방 카운터로 일하는 태희(배두나)는 특별한 고민도 욕심도 없는 평범한 인물로 비춰진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친구들을 챙기는 밝은 성격에 봉사 활동에서 알게 된 뇌성마비 시인을 좋아하는 등 엉뚱한 구석이 있으며 늘 세상 밖으로 여행할 꿈을 꾸는 몽상가다.

혜주(이요원)는 증권회사에 다니며 멋진 캐리어 우먼을 꿈꾸고 있는 야무진 친구이다. 때로는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이기적일 정도로 새침하지만, 자신의 삶을 발전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따라붙는 여상 졸업이라는 꼬리표는 직장에서 차별대우와 하급인생 취급을 받게 한다.

지영(옥지영)은 부모님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셋이서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집에 산다. 미술에 재능이 있어 유학을 꿈꾸지만 탈출구 없는 가난한 환경에 그녀의 삶은 나날이 찌들어 간다.

화교 쌍둥이 자매 비류와 온조(이은실, 이은주).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성장한 그녀들은 활발한 성격으로 항상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화교는 여전히 이방인에 가까운 존재이다.

전작 단편들에서 십대 소녀들의 자의식과 일상적 고민을 잘 그려냈던 정재은 감독은 장편영화 데뷔작인 이 작품의 주인공들에게 깊은 애정과 지지를 보낸다. 그래서 드라마틱한 구성이나 기교는 없지만 캐릭터와 그들이 놓인 상황 위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잔잔한 느낌을 주고 각 인물들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스무 살,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디딘 여상졸업생의 꿈과 좌절, 졸업 후 만남이 뜸해지면서 느끼는 친구들 간의 소원함 등 본인 스스로도 젊은 여성인 감독은 스무 살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감성을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팍팍한 현실을 감싸 안는 애틋함
감독은 또한 우리가 쉽게 망각하고 스쳐 지나가 버리는 것들에 대해 애틋한 시선을 던진다. 관객들은 문득 스무 살 또래의 청춘들이 모두 대학생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동시에 그녀들의 삶의 터전인 ‘인천’이라는 도시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인천에 살고 있지 않는 이들에겐 단지 서울 옆에 있는 광역시라는 정도로 각인되어 있는 도시, 주변부의 느낌이 강한 낡고 오래된 곳, 몇몇 해수욕장이 있는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라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천이다.

이 주변도시 인천에서 인문계 학교가 아니라 실업계 학교를 갓 졸업한 그녀들은 인천이라는 ‘변두리’에서 서울이라는 ‘중심부’로의 이동을 꿈꾼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경쟁사회라는 냉정한 현실 앞에서 이들은 출발선부터 뒤처져 있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인천을 떠나 서울에 있는 증권회사에 다니게 된 혜주는 서울 입성을 뿌듯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혜주의 말대로 인천 최고의 여상을 나왔음에도 그들에 대한 사회의 평가는 냉정하다. 혜주는 대학을 나온 직장의 팀장으로부터 ‘저부가가치 인간’이라는 말을 들으며 홀로 눈물을 삼킨다.

고교시절 늘 함께였던 단짝친구들이었지만 스무 살이 되면서 그녀들의 관계엔 알 수 없는 틈이 생긴다. 그녀들은 인천에서부터 두 시간 넘게 지하철을 타고 젊음과 화려한 패션이 있는 동대문 의류상가로 놀러 가지만 서울과 인천의 거리만큼 혜주와 친구들 사이엔 어딘지 모를 어색함이 감돈다. 결국 그녀들의 조건은 그녀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심부 언저리에서만 머뭇거리도록 만드는 현실적인 제약으로 작용하고 마는 것이다.

영화 중간 중간 화려한 네온사인과 빌딩이 밀집된 서울과 연기를 내뿜는 공장 굴뚝이 떠오르는 인천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화면들이나 월미도에 주인공들이 놀러갔을 때 머리가 헝클어질 정도로 거칠게 불던 바닷바람 등 인천이라는 공간을 세밀하게 잡아낸 카메라는 쉽게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고교 시절의 즐거운 추억이 깃든 월미도가 이제 각자의 삶의 고민을 안고 있는 스무 살 그녀들에게 어느덧 낯선 풍경이 되어버렸음을 묘사하는 이 장면은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긴다.

또 이 영화는 성장기의 고민을 갖고 있는 청소년들이 그들의 미숙한 자존심과 어른들의 무심함으로 인해 서로 간에 소통이 힘든 현실을 잘 보여준다. 혜주 부모님의 이혼, 태희의 가출 고민 등은 친구들에게 잘 공감되지 않는다. 또래에게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고민들이 타인이나 어른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다. 일례로 지영의 가난과 불우한 환경은 끝까지 혼자만의 몫으로 남는다.


지친 등을 두드리는 진심어린 격려
어느 날 지영이 길 잃은 새끼 고양이 ‘티티’를 만나면서 그녀들의 삶에 고양이 한 마리가 끼어들게 된다. 혼자 있길 좋아하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신비로운 동물 고양이. 고양이를 닮은 스무 살 그녀들. 다락방을 서성이며 머뭇거리던 고양이가 한 곳에 정착해 보호받지 못하고 혜주, 지영, 태희를 거쳐 비류와 온조에게 맡겨지는 것처럼, 그녀들에게 현실은 쉽게 머무르거나 다가설 수 없는 낯선 공간으로 다가온다.

영화의 마지막, 공항에 온 태희와 지영은 세상을 향해 ‘Good Bye’라고 외치며 당당히 발걸음을 옮겨 딛는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들에게 전망 부재의 시간들은 계속될 것이다. 때때로 그들의 삶은 자신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다섯 명의 주인공들은 학벌(여상 출신), 가정환경(고아), 혈연(화교)에서 이미 약자의 위치인데다가 여성, 인천 출신이라는 짐이 추가로 얹혀 있다. 텍스타일 디자이너의 꿈을 안고 유학을 가겠다는 지영, 바다와 외국과 선원을 동경하는 태희, 코도 높이고 영어공부도 해서 성공할 거라는 혜주의 말은 모두 현실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희망과 꿈마저 보잘것없는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현재가 힘들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게 인생인 것처럼, 이 영화는 스무 살의 저편 너머에, 아직 뚜렷이 보이진 않지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살며시 속삭인다. 삶이 여전히 고단할지라도 꿈을 잃지 말라고 이들의 작은 등을 두드리며 힘내라고 격려한다.

‘소녀와 여인’,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은 ‘창 너머로 바깥세상을 꿈꾸는’ 고양이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감독은 이들 주변의 무심한 어른들과 이들을 둘러싼 냉혹한 세상을 향해 말한다. “고양이를 부탁해, 정말 진심으로 부탁해.”

어른이 되어 가면서 하나 둘씩 놓치고 가는 것들에 대해 깨닫게 해주는 이 작고 따뜻한 영화는 사람들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귀한 보석 같은 다섯 소녀들을 가슴속에 오래도록 심어준 영화이다.

엉뚱하지만 속 깊은 태희, 똑똑하고 예쁜 깍쟁이 혜주, 그림을 잘 그리는 아웃사이더 지영, 명랑한 쌍둥이 비류와 온조. 6년 전 당시 스무 살 단짝친구들이었던 그녀들의 지금 모습이 문득문득 궁금해진다. 부디 그녀들이 씩씩하게 잘 살고 있기를 바래본다. 그리고 다시금 마음속 깊이 빌어 본다. “고양이를 부탁해! 멋진 인생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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