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이라는 이름의 타인들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늘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매일 같이 밥 먹고 잠자며 사소한 일로 부딪치는 사람들. 설령 며칠에 한번, 아니 몇 달에 한 번씩 얼굴을 보게 될지라도 별 어색함 없이 마주 앉아 밥 한 끼 먹을 수 있는 사람들. 싫으나 좋으나, 미우나 고우나 평생 외면하고 살 수 없는 사람들. 이들을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너무나 친숙해져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가도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집단, 이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어 가는지 가끔씩 새삼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런 호기심은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를 유심히 지켜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제목이 ‘가족의 탄생’이라니? 그 오묘하고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주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세 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화 〈가족의 탄생〉은 가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혹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소묘이며, 그 안에서 사랑의 본질(혹은 이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가족’이라 불리는 공동체는 우리가 흔히 봐오고 알아오던 혈연 중심의 가계도를 그리지 않는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누나와 남동생, 두 번째 에피소드에선 어머니와 딸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소위 가족으로서의 기본적인 역할에 그다지 충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주위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낯선 이들이 존재한다.
서로에게 상처 주는 무책임누나 미라(문소리)는 몇 년 동안 소식도 없던 남동생 형철(엄태웅)이 데려온 어머니뻘 되는 여자 무신(고두심)을 올케로 인정해야 하고, 선경(공효진)은 어머니 매자(김혜옥)가 낳은 아버지가 다른 동생을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형철은 말만 앞서는 사고뭉치에 철없는 남자이고 매자는 ‘사랑 지상주의자’로 딸은 안중에도 없다. 게다가 형철과 매자는 자신들의 욕망으로 힘들어하는 가족들에게 미안해하지도 않고 오히려 무책임하게 사라져 버리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은 더 이상 사랑과 혈연으로 끈끈하게 연결된 공동체가 아니다. 이 가족들의 삶은 당황스럽고 이해할 수 없고 화나는 일 투성이다. 형철을 위해 밥을 지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미라는 돈을 달라는 형철의 요구에 냉담하고, 선경은 자신을 찾아온 엄마를 매몰차게 밀어내면서 문도 열어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세 번째 에피소드인 청춘의 파릇함이 마냥 눈부실 듯한 연인 경석(봉태규)과 채현(정유미)은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충돌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감독은 이 위태위태한 인물들의 관계를 섬세하고 따스한 손길로 꿰매어 경이로운 그림을 만들어낸다. 남동생이 떠난 후 미라는 무신이 전 남편에게서 낳은 딸 채현과 무신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비가 오든 해가 비치든,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흰 눈이 내리는 그 세월 동안, 채현을 정 많은 아이로 키워내며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간다.
새롭게 탄생한 가족 공동체홀로 남겨진 선경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남동생 경석을 돌본다. 늘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도 늘 외로웠던 엄마를 이해 못하던 선경은, 엄마의 죽음 이후 그 커다란 빈자리를 깨닫게 된다. 엄마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연애’라고 말했지만 자신의 딸과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음을 그들의 기억 한 곳에 새겨 놓았다. 부모의 온전한 사랑 속에서 자라지 못해 가슴이 메말라버린 선경에게, 엄마가 남기고 간 그 한 줌의 사랑은 남동생의 여린 등을 보듬게 만드는 힘이다.
미라와 매자, 선경과 채현은 사연 많은 과거를 저만치 밀어버리고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인다. 때론 원망도 하고 눈물을 흘릴지라도 가슴깊이 분노를 쌓진 않는다. 선경은 사랑을 주고받는 데 익숙하지 못해 남자 친구와 갈등을 겪지만 어린 남동생을 따뜻하게 품어준다.
두 명의 엄마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 채현은 정이 너무 많아 경석을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나름의 이타적 사랑법에 당당하다. 그녀들은 무조건적인 희생이 아니라 서툴지라도 자신의 방식대로 타인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채현을 매개로 미라와 무신, 경석이 한 집에서 만나게 되면서 드디어 그들은 ‘새로운 가족’이 된다. 혈연과 배타적인 사랑이 아닌, 인간에 대한 의리와 동병상련의 애틋함으로 가족이 재구성된 것이다. 그렇게 감독은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울타리를 살짝 뛰어넘어 새롭게 탄생한 가족 공동체로 인도하는 손을 내민다.
혈연 아닌 인연으로 재구성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여자들이다. 무능하고 무책임해 보이는 남자들 대신 어린 아이를 돌보며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은 여자들은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킨다. 그들이 만든 ‘가족’의 조건은 이기적인 사랑과 혈연주의를 넘어선다. 그저 비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배고픈 이를 위해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올려놓는 그런 온기와 배려와 기다림으로 가족을 일구어낸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혈연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모계)가족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바탕엔 관계와 사랑에 대한 섬세하고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김태용 감독은 전작 〈여고괴담 2〉에서 우정, 사랑 등 인간의 존재를 규정짓는 관계들이 어긋났을 때 그 상실감에서 오는 외로움과 아픔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담아냈었다.
감독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만의 영역이었던 곳에 그 사람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라는 평범하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진리를 이론이 아닌 몸으로 체험하게 한다.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현실의 팍팍함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을 보여줌으로써 슬픔을 위로하고, 발상의 전환을 통해 일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만든다.
영화 〈가족의 탄생〉은 비정한 현실 속에 숨겨진 작은 희망의 실마리들을 한 줌씩 풀어내면서 상처받은 이들의 눈물이 반짝이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힘들지만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말며, 사랑의 밝은 면만이 아니라 그 어두운 면까지 바라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내 주위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라고 말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가족은 새롭게 태어나고, 관계는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다.
박준용 문화평론가에 이어 김지희 영화평론가가 이번 호부터 Film Review 집필을 맡습니다. 필자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월간 <출판저널>, 주간 <여성신문> 취재기자를 거쳐 현재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www.siyff.com)에서 미디어교육팀 스탭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영상에 관심이 많은 청소년들을 위한 영화제작캠프와 비평캠프, 미디어교육 포럼을 운영하는 일을 담당하며 좋아하는 문학과 영화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