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인 영국의 로알드 달(1916~1990)은 〈찰리와 초콜릿공장〉, 〈마틸다〉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화작가로 꼽힌다. 그가 동화작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재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가 세계적인 동화작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여덟 살 때부터 쓴 ‘비밀일기’였다고 한다. 그는 일기를 가족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일기장을 방수가 되는 얇은 상자에 싸서 집 정원에 있는 나무 꼭대기 가지 위에 묶어 두었다고 한다. 그는 매일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일기를 썼다. 마치 동화속의 주인공처럼 일기를 쓴 것이다.
그의 일기 쓰기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달의 아버지는 비록 그가 세 살 때 돌아가셨지만 그는 평생 아버지가 남긴 일기를 간직했다. 전쟁이 일어나는 5년 동안 달의 아버지는 거의 매일 당시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관찰과 나름대로의 해석이 담긴 일기를 썼다고 한다. 아버지의 일기 쓰는 습관을 보고 자란 달 역시 일기를 썼으며, 그게 그를 세계적인 동화작가로 키워준 원동력이 된 것이다.
미국의 정치가이자 성공한 사람들의 대명사인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은 자기 관리와 시간 관리에 철저했다. 그 까닭에 그의 이름을 딴 ‘프랭클린 다이어리’가 등장했고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시간 관리수첩의 상징이 될 정도로 유명하다. 시간을 잘 관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을 잘 활용한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갑부인 빌 게이츠는 아직도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이 있다.

세계적 대문호 만든 평범한 습관사소한 것이라도 습관 하나가 위대한 작가를 만들고 철학자를 만들고 부자를 만든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 중에 하나가 다름 아닌 좋은 습관이다.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차이 하나가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에도 영향을 준다. 생활습관에서 공부습관, 건강관리습관 등 좋은 습관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성공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부모가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부모의 습관을 모방한다. 그것은 백만 달러를 물려주는 것보다 더 위대한 유산이 된다. 한 집안의 가보(家寶)는 다름 아닌 부모의 좋은 습관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는 두 살 때 어머니 마리아를 여의었고 아홉 살 때에는 아버지마저 잃었다. 아버지가 죽고 9개월 만에 할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당시 톨스토이 가족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었다. 톨스토이 5남매는 하루아침에 고아신세가 된 것이다. 톨스토이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교사에게서 공부를 할 수도 없었다(톨스토이는 정규 학교 졸업장이 하나도 없다). 그는 공부를 혼자서 했기 때문에 체계적이지 못하다고 스스로 고백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톨스토이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도 세계적인 대문호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작은 습관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톨스토이에게는 열아홉 살부터 시작해 평생 이어진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일기 쓰기’였다. 평범한 일기 쓰기가 톨스토이를 세계적인 대문호로 만든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와 〈부활〉 등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런데 걸작만큼 더 값진 보물을 남겼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60여 년 동안 쓴 그의 일기다. 톨스토이의 일기 쓰기 습관은 그의 문학적 결실을 이루게 한 엔진과도 같았다.
1) 반드시 실행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실행할 것.
2) 실천할 때는 성심성의로 단단히 할 것.
3) 책에서 얻은 지식은 다시 보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 자기 것을 만들 것.
4) 내가 지니고 있는 지혜는 더욱 키워 나갈 것.
5) 언제든지 소리를 내어 책을 읽을 것.톨스토이가 스스로 세운 계획이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언제든지 소리를 내어 책을 읽는 습관’이다. 우리나라에도 이전에는 아이들이 어려운 한문책을 큰소리로 반복해서 읽었다. 소리를 내 읽으면 자연스럽게 암기가 될 뿐만 아니라 반복해서 읽을 경우 자연스럽게 그 의미를 깨우칠 수 있다. 특히 발표력을 향상시키는 데는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한다. 요즘에는 발표를 잘하는 인재가 기업이나 사회에서 대접받는다.

콤플렉스 극복 위해 스스로 단련톨스토이의 일기를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일기를 통해 치열하게 내면과의 싸움을 벌였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일기는 대문호로서 인격을 완성하게 한 참회록이자 고백록이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어려운 성장과정을 거쳐 대문호에 이른 톨스토이의 영혼의 울림이 담겨있다. 그것은 치열한 자기반성의 기록이었다.
톨스토이는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열아홉 살 때부터 일기를 쓰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반성을 하고 계획을 세우며 실천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무리하게 공부계획표를 짤 정도로 ‘공부 욕심’이 많았다. 톨스토이는 공부 목표를 정한 일기를 쓰고 이튿날이 되자 무리하게 계획을 짰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음과 같이 일기를 쓰기도 했다. “나는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규정을 부과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수행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힘이 모자란다.”
우리는 톨스토이와 같은 훌륭한 사람들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해 열등감이나 콤플렉스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위대한 인물일수록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톨스토이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인간적인 콤플렉스가 오히려 약이 됐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고 반성을 하면서 인격적인 성숙에 힘썼던 것이다.
그는 일기를 쓰면서 차츰 자신을 단련해나갔다. 목표를 이루지 못해 자신의 노력이 미흡할 때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떤 날에는 목표를 달성한 자신에게 “크게 진보되었다. 그 정신적인 개선의 진전속도에 크나큰 기쁨을 맛본다. 절대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목표한 바를 이루면 자기 자신에게 칭찬해줘야 한다. 자기 자신을 칭찬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 큰 효과를 나타낸다. 이게 이른바 ‘마인드 컨트롤’이다. 마인드 컨트롤을 잘 하면 자신감을 샘솟게 하면서 더욱 정진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일생을 살면서 크게 삶의 방향을 바꾼다. 청년시절까지만 해도 명문 귀족 신분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가문에 대해 자긍심을 가졌다. 그러다 나이가 들수록 차츰 귀족 신분을 부담스러워하며 농민학교를 세우고 농민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이웃사랑의 이상주의가 싹트게 된다. 톨스토이의 이런 심정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는 그의 일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는 먼저 하루 한 가지의 착한 일을 하자는 맹세를 일기에 적고 있다. “나는 평생을 이웃 사람들에게 바칠 각오를 했다. 말하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앞으로 사흘 안에 남을 위한 일을 한 가지도 못하면 나는 자살한다.” 이러한 일기를 쓴 한 달 뒤에는 “만일에 내일 (이웃을 위해)아무 일도 하지 못하면 자살한다”고 적고 있다. ‘말하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표현과 ‘자살하겠다’는 결의에 찬 표현에서는 그가 얼마나 자신에게 엄격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어려운 여건에서 방황을 거듭했고 결국 성자로 불릴 정도의 영혼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의 인간적 완성은 다름 아닌 일기 쓰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어느 날 쓴 일기에서 자신의 과오를 우유부단, 자기기만, 성급함, 거짓 수치심, 신경질, 혼란, 모방심, 변덕스러운 마음, 경솔함 등으로 꼽고 자기반성을 하기도 했다. 그는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온갖 번민과 인간적 고통을 껴안고 싸웠던 것이다. 그 엄격함이 결국에는 톨스토이를 소설가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로 만든 것은 아닐까.
자녀에게도 전염시킨 일기 쓰기톨스토이의 일기 쓰기 습관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일기의 ‘전염성’이다. 톨스토이는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 아들과 딸 등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일기 쓰기를 전염시켰다. 톨스토이가 굳이 가족들에게 일기 쓰기를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전 가족이 일기 쓰기의 애호가가 됐다. 톨스토이 자신에게는 일기가 작품의 원천이 되었고, 아내와 자녀들에게는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된 것이다. 일기를 통해 가족들은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이해를 넓혀갔다. 여기서 바로 부모의 솔선수범만큼 더 큰 스승이 없다는 것을 새삼 알게 한다.
“아빠는 우리에게 벌 준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내 눈만 보고도 아빠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았고, 나는 그것이 무서웠다. 나는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지만 아빠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빠는 금방 알아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아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의 일기에 이러한 아빠의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면 아마도 그 아빠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톨스토이의 아홉 명의 자녀들은 톨스토이 사후에 그들이 쓴 일기를 토대로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마치 경쟁하듯 출간했다. 모두 10여 권에 이른다. 세계적인 문호 가운데 톨스토이만큼 회고록이 많은 이도 드물다.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의 일기 또한 남편인 톨스토이에 대한 글로 가득하다. 소피아는 열여덟 살에 서른네 살의 톨스토이와 결혼해 13명의 자녀를 낳고, 특히 톨스토이의 원고를 교열하고 정서하는 데 평생을 보냈다. 그야말로 남편을 위해 평생을 헌신적으로 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소피아는 톨스토이가 자기에게 해주는 부드러운 말을 적는 등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일기에 옮겼다. 자녀들과 함께 체조를 한 이야기며 심지어 톨스토이가 배앓이를 한 것까지 적었다. 톨스토이가 나이 들어서 시작한 네덜란드어와 이탈리아어 공부에 대한 기록도 있고, 꿀벌 사육, 테니스 등 남편이 열중한 것에 대해 40여 년 동안 성실하게 일기에 적었다.
초등학생을 둔 우리나라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매일 밤마다 아이와 일기 쓰기로 실랑이를 벌이곤 한다. 이런 집안에서 대부분 엄마 아빠는 일기를 쓰지 않으면서 아이에게만 강요한다. “엄마 아빠는 쓰지 않으면서 왜 나만 쓰게 하세요”라고 아이가 떼를 쓴다면 부모로서는 아이를 설득할 말이 없다.
창의성 키우는 자율적인 자녀교육
톨스토이는 소설을 쓸 때 작업실에 아이들을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지만 아이들과 놀 때는 동화를 즐겨 들려주었다. 그가 아이들에게 들려준 〈일곱 개의 오이〉는 톨스토이 자녀들의 일기나 회고록에 꼭 등장한다. 이 동화는 한 사내가 오이를 손으로 부러뜨려 먹는다는 이야기인데, 톨스토이는 오이를 부러뜨리는 장면과 먹는 장면을 흉내 내면서 아주 사실적으로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톨스토이가 몸으로 흉내를 낼 때마다 너무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또 톨스토이는 아침마다 소설을 쓰기 전에는 반드시 아이들과 함께 체조를 했는데 톨스토이는 자녀들에게 지적인 정신세계뿐만 아니라 건강한 신체도 물려주려고 애썼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아이들에게 벌을 준 적이 한 번도 없다. 창의성을 키우는 이러한 자율적인 교육은 자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톨스토이는 9명의 아이들이 성장하자 직접 집에서 가르쳤다. 아이들은 8시에 일어나 차를 마시고 9시부터 공부를 시작해 저녁 9시까지 공부를 했다. 영국과 독일에서 데려온 가정교사에게 영어와 독일어 공부를 했다.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어머니로부터는 프랑스어와 러시아어, 역사, 지리를 배웠다. 아버지에게서는 산수를 배웠다. 식사시간과 오후 자유시간 2시간, 각 수업시간 사이 15분간 휴식을 제외하고는 수업의 강행군이었다. 그리고 오후 7시에서 9시까지는 숙제를 한다. 한주에 두 번은 사제와 함께 성경공부를 한다. 부모는 그림에 재능이 있는 딸 타티야나에게는 그림 과외를 시켰다.
자녀들이 가장 긴장한 시간은 톨스토이가 가르친 산수시간이었다. 요즘에도 아빠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아이들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면 성질이 급한 아빠들은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인다. 톨스토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톨스토이 역시 평범한 아빠들처럼 아이들이 조금만 머뭇거려도 화를 내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결코 때리지는 않았다. 타니야나가 쓴 회상록 〈딸이 본 톨스토이〉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이 대목에서는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5분의 2 더하기 5분의 3은?”
침묵. 아버지는 소리를 지른다.
“흰 빵 두개와 흰 빵 세 개는 몇 개냐?
“흰 빵 다섯 개”하고 나는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로 대답한다.
“맞았다. 5분의 2 더하기 5분의 3은?”
‘옳지, 알았다!’ 그러나 내 입은 꽉 닫힌 채였고, 눈에서는 눈물이 솟았다. 나는 무서워서 5분의 2 더하기 5분의 3은 5분의 5, 즉 1이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내 태도를 눈치 챘는지 부드러워졌다.
“좋아, 일어서서 좀 뛰어봐라!”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는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마지못해 그 자리에서 뛰었다. 그러자 실제로 내 머리는 확 밝아졌다.
대안교육의 선구자로 추앙받아톨스토이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현재도 톨스토이 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톨스토이 학교는 1859년 톨스토이가 고향에서 가난한 농민 자녀들을 대상으로 ‘농민학교’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학생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톨스토이 학교는 현재 러시아 전역에 100여 개가 있다. 톨스토이 학교는 세계 각국에서 대안교육을 연구하는 교사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톨스토이는 발도르프, 몬테소리, 프레네 등과 더불어 자유로운 창의성 교육을 강조한 대안교육의 선구자로 추앙받는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고아나 다름없었던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로 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명문가의 후예라는 가문에 대한 자긍심도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300여 년 전에 톨스토이의 고조부인 표트르 안드레비치 톨스토이가 큰 공을 세워 귀족(백작)의 대열에 올라섰다. 표트르는 톨스토이의 고조부로 〈이탈리아 여행기〉를 썼고 군사령관과 외교관도 역임했다. 톨스토이의 조부는 해군준장, 톨스토이의 부친은 중령을 지냈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귀족의 특권을 모두 버리고 농민 편에 서서 살려고 노력했지만 600년 명문가라는 자부심은 어린 시절 그를 지탱해준 ‘묘약’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의 후손은 100여 명이 작가와 예술가 등으로 러시아와 유럽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생가는 모스크바에서 버스로 6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다. 2층짜리 하얀 저택인 톨스토이 생가에는 전 세계에서 자녀교육에 관심 있는 이들이 찾는 ‘교육 성지’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