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정치의 계절을 맞이하였다. 각 정당들이 경제문제를 이슈로 제시하여 국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의 대선 모습도 가끔 보면서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양당의 경제 공약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 얘기가 전혀 안 나온다는 사실이다. 오바마, 부시, 클린턴이 당선될 때도 그랬고 트럼프가 특이한 공약을 발산하는 2016년 대선 레이스도 마찬가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경제학 박사에게 물어봐도 자기 나라, 즉 미국 1인당 GDP가 얼마인지 대답을 못한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대통령 후보도, 경제학자도, 개인들도 1인당 GDP에는 모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관심이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 별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개인들이 관심이 없으니 이들로부터 표를 얻어야 하는 대통령 후보도 무관심한 것이다.
GDP는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이먼 쿠즈네츠 교수에 의해 개발됐다. 그는 197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쿠즈네츠도 분명히 우려하며 말했듯이 GDP는 생산된 부가가치를 나타내지 국민의 행복, 삶의 질, 복지를 측정하는 지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경제가 번영하면 경제가 성장하고, 경제가 성장 하면 당연히 GDP 성장을 떠올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GDP는 분명 ‘경제 그 자체’도 아니요, ‘경제의 궁극적 목표’도 아니다. 국민이 더 잘살고, 더 행복해지는 목표를 위해 필요한 수단일 뿐이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 세상, 이것이 현재의 경제 현실이다. 미국 대선 후보들 간 경제이슈 토론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잘 산다’는 개념을 생산보다 개인의 소득과 소비 관점에서 규정한다. 그러다 보니 강조되는 경제 주체가 가계가 되고 가계의 소득, 특히 ‘가처분소득’이 자주 언급된다. 헐벗고 굶주린 상태라면 생산이 지상과제일 수 있지만, 어느 정도 먹고 살게 되면 필수불가결한 곳에 지출하고 남는 소득, 즉 ‘여유 있는 돈’`이 얼마나 있는가가 더 잘 살게 되었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미국도 지난 10년간 1인당 GDP 증가율보다 가계소득증가율이 낮다. 이는 과실의 몫이 기업 쪽에 더 많이 갔다는 뜻이다. 한국의 경우 그 격차가 더욱 크게 벌어졌다. 게다가 소득 중에서 먹고살기 위해 필수적으로 빠져나가는 부분, 즉 세금, 생활비, 주택비, 교육비가 늘어나면 그만큼 ‘여윳돈’은 줄어든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1인당 GDP가 증가해도 국민은 더 잘 살게 되었다고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행복할 수도 없다. 그래서 1인당 GDP를 늘려주는 대통령보다 ‘여윳돈’, 즉 가처분 소득을 증대시켜주는 대통령을 선호한다. 미국 대선에서 1인당 GDP가 관심도 못 받고 언급도 안 되는 이유다. 둘째, 평균을 얘기하지 않는다. 1인당 GDP는 총 GDP를 인구수로 나눈 평균이다.
바로 이 평균 개념에 문제가 있다. 두 사람 모두 50을 벌면 평균도 50이지만 한 사람은 90, 다른 사람은 10을 벌어도 평균은 50이다. 10을 번 사람에게 50이란 평균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소득 순서로 사람들을 일렬로 세웠을 때 중간에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얘기한다. 이 중위값(median)이 평균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빈부격차가 큰 미국에선 이미 평균이 의미를 잃은 지 오래되었다. 한국도 이런 단계에 접어들지 않았는지 우려스럽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사람들은 평균에 관심이 없다. 나의 세금, 나의 임금, 나의 주택담보 대출 이자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며칠 전에 본 미국 TV 토론회에서 방청객이 한 발언이다. “저는 경제를 잘 모르지만 무엇이 더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생각이 있습니다. 필수적 비용을 지출하고도 남는 돈, 즉 여윳돈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분명히 더 행복하다고 느낄 겁니다.” 한국도 이젠 1인당 GDP보다 가처분 소득을 늘려주는 대통령을 더 원하는 시점에 왔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