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픽투스(Homo Fictus).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수만 년 전 인류의 정신이 미숙하고 인구가 적었던 시절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만 년 뒤 지구 상에 인류가 넘쳐나는 지금도 대다수 인간은 사물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에 귀를 쫑긋 세운다. 그래서 신화는 모든 이야기의 바탕이 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그렇고 한국의 삼국유사도 빼놓을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소설이 쓰이고, 종이 위에서, 무대에서,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살인 이야기, 섹스 이야기, 전쟁 이야기, 진실 이야기, 거짓 이야기 등 온갖 픽션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인간이라는 종은 이야기 중독자다. 몸이 잠들었을 때조차 마음은 밤새도록 깨어 스스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뉴욕타임스, 뉴요커 등의 필자인 조너선 갓셜은 '스토리텔링 애니멀'을 통하여 이야기의 힘과 감동이 어디서 오는지 과학과 통계로 해답한다. 저자는 좀 별난 구석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낸다. 삶과 정치도 모두 이야기로 풀어낸다. 대통령 선거는 나라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상충하는 이야기가 경쟁하는 장이며, 재판은 검사와 변호사가 누가 진정한 주인공인지 가려내기 위해 유죄와 무죄의 서사를 구성하는 이야기 경연 대회로 보는 관점을 유지한다. 심지어 TV 광고는 30초짜리 단편 영화이고, 스포츠 중계에서도 스토리텔링은 핵심이라고 말한다.
종교와 국가를 유지하는 힘도 이야기에서 찾는다. 종교가 인간의 실존을 지배하는 것은 성스러운 픽션이 지닌 힘 때문이며, 인간이 신과 영혼과 요정을 불러내는 것은 설명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인간이 이토록 뼛속까지 이야기에 푹 젖어 있다면, 왜 그럴까?
실제로 우리가 매혹되는 이야기는 대부분 비슷한 구조를 공유한다. 갈등과 고통이 포함된 비극적 이야기가 많다. 스티븐 핑커 등의 진화 이론가들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해 사회생활의 주요 기술을 연습한다고 주장한다. 재닛 배러웨이는 비용이 적게 드는 대리 경험이 픽션의 일차적 유익이라고 주장한다. "문학은 공짜로 감정을 선사한다. 일상에서는 사랑하고 비난하고 용서하고 소망하고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감정에 대가가 따르지만, 문학에서는 그런 위험 없이 이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
이야기라는 `모의 비행장치`를 통해 위험한 사내에게 대들거나 남의 배우자를 유혹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경험하지만, 죽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뇌과학자들은 이를 증명했다. 픽션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사이코` 같은 공포영화를 보면 눈을 감고, `러브스토리` 같은 신파 영화에는 눈물을 흘린다. 뇌를 기능자기공명영상장치(fMRI)로 촬영했더니 스크린의 감정을 따라 뇌도 성나고, 슬픈 반응을 보였다.
결국, 우리가 픽션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진화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픽션이 전반적으로 우리에게 이롭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야기는 아주 복잡하고 실패할 확률이 높은 인간들이 삶의 거대한 난제를 시뮬레이션하는 오래된 가상 현실 기술이라는 말이다.
심리학자의 실험을 근거로 저자는 픽션을 많이 읽는 이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며, 스토리텔링은 생존의 기술이라고 주장한다. 인류가 품을 법한 많은 질문을 이야기의 힘만으로 답해 나가는 고집과 패기가 돋보이는 책이다. 주장을 꿰어 나가는 저자의 스토리텔링 능력 또한 강력하다.
지금 순천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인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 정치인이 끝없는 집념으로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무대를 만들어 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되는 무대를 택할 것인가는 시민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끝이 나면 어떤 것을 택했는가에 따라 스토리가 달라질 것이다. 결국은 어떤 스토리가 사람의 마음을 사는가이다. 삶도 정치도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가 보고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