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교육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독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보니 독서는 다 좋은 것이고 하지 않는 것만이 나쁘다는 인식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사고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독서평 등 책에 관한 책을 일반적으로 ‘메타북’이라 부른다. 메타북은 대부분 책읽기에 관한 한 저마다 나름대로의 깊은 내공을 지닌 사람들, 즉 ‘책벌레’들이 쓴 것이 많다. 그러다보니 메타북을 읽는 것은 일반적 독서와는 달리 그것만의 독특한 재미가 있다. 같은 책을 놓고 나는 이렇게 읽었는데 메타북의 저자는 저렇게 읽었네, 하는 흥미로움 때문이다. 그 흥미로움과 관심 속에는 나와 저자 사이의 은근한 내공의 비교나 겨루기 같은 짜릿함, 가치관의 차이, 공감이나 반감 등이 뒤엉켜 교차한다.
'책의 정신'은 메타북이다.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이란 부제를 단 책은 작가이자 대학강사인 강창래가 그동안 책, 책읽기 등을 주제로 한 강연과 글 등을 엮은 것으로 지금까지 가졌던 생각의 껍질을 벗겨내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일반적인 메타북이 저자가 읽은 개개의 책들에 관한 분석과 평가 등을 실었다면, '책의 정신'은 좀 더 근본적이다. 물론 저자가 읽은 많은 책들이 언급되고 있지만 개별적 책 이야기가 아니라 주제를 잡아 서술한 점이 특징이다.
다섯 가지 주제를 하나로 묶는 고갱이를 꼽으라면 '좋은 책이란 어떤 것이고, 비판적·비평적 책읽기가 얼마나 중요하냐는 것'이다. 이를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 좋은 점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시공을 초월한 걸작으로 불리는 이른바 고전들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깨뜨리며 비판적 책읽기를 강조한다. 저자가 말하는 ‘좋은 책’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이바지한 책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왠지 꼭 읽어야만 할 듯한 동서양의 고전에 대해 저자는 “하나의 고정관념일 수 있다”거나 “후대 편집자의 의도에 맞게 만들어졌을 가능성” “당대 이데올로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음” 등을 언급한다. 대부분의 지식인들도 고전이란 왜 고전인가에 대하여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선 서구 구술문화의 정수로 불리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도 사실 그동안 숱한 비판을 받아왔다. 17세기의 유명한 비극작가이자 대수도원 원장이었던 프랑수아 에드랭의 “줄거리가 형편없고 등장 인물의 성격 묘사도 빈약”하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저자는 “그럼에도 고전으로 평가받는 것은 문화적 쇼비니즘, 호메로스 띄우기의 결과”라며 “고전은 오랫동안 비평을 견뎌낸 걸작이 아니라 비판적인 비평을 숨기며 걸작이라는 이름으로 우상화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는 사실 직접 남긴 글은 없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문제’라는 말이 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말이라는 게 사실은 플라톤의 생각인 것 같기도 하다는 의미다. 실제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의 말, 생각들은 플라톤의 저작물을 통해 아는 것일 뿐이니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관련 저작물을 썼다. 그러다 보니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순전히 오래된 기억에 바탕해 조작된 인물일 확률이 높은” 셈이다. 실제 ‘너 자신을 알라’는 것도 소크라테스의 말인지, 플라톤의 말인지 아무도 모른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처럼 공자의 '논어'나 '성경'도 소크라테스의 문제와 같은 비슷한 문제를 지닌 것은 마찬가지다. 후대 학자들에 따라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해석이나 평가들이 나오지만, 누구의 해석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저자는 “사실 많은 고전들은 편집자의 의도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며 “고전이란 정말 좋은 책인가에 대한 구체적 답변은 ‘의심하라’이다”라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저작물, 고전은 원전보다 2차 문헌들이 원전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즉 어떤 종류의 고전은 원전 읽기보다 그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대혁명의 성서’라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기까지는 거의 읽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같은 명제는 타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1762년 출간된 이 책은 혁명이 있던 1789년 이후인 1791년이 돼서야 한 번 더 찍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혁명, 세상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한 ‘좋은 책’은 무엇일까. '사회계약론'이 아니라 바로 연애소설 <신 엘로이즈>다. 이 책은 1761년 출간돼 40년 동안 무려 115쇄나 찍었다니 그 파급효과를 짐작할 수 있다. <신 엘로이즈>나 영국작가 리처드슨의 <파멜라> 같은 연애소설은 혁명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 답은 프랑스 대혁명 전공자이자 문화사학자인 린 헌트의 저서 <인권의 발명>에 있다. 헌트는 연애소설 독자들이 소설의 등장 인물들과 강렬한 공감을 이뤘고 자신과 비슷한 감정·이성을 가진 같은 존재로 보게 됐으며 이런 배움, 공감이 인권이 발명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을 만들어주었다고 설명한다.
즉 포르노그래피가 하층민들에게 계몽사상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포르노그래피에서 묘사되는 성행위 과정을 보면 신분의 차이가 완전히 사라지는데 이는 지배층의 위선을 폭로하고 평등사상을 담아낼 수 있는 최고의 이야기 소재가 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역사적으로 국가 권력이 왜 포르노그래피를 억압하는지를 분석하는 대목은 흥미롭다.
책에는 이 밖에 근대의 과학혁명처럼 현대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본성과 양육’의 논쟁, 고대부터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책에 대한 학살’ 등에 관한 분석도 담겼다. 이처럼 독서는 분석적인 책 읽기가 아니면 단지 시험을 위한 독서라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일인가를 깨닫는 일이다. 사람은 각자의 나이에 맞게 생각과 이해의 폭이 정해져 있다. 그리고 독서 역시 그 폭에 적합한 수준으로 진행해야 되야 한다.
아무리 운동 신경이 좋아보여도 걸음마를 땐 아이에게 마라톤을 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느 유명대학이 읽어야 할 고전을 추천했다 하더라도 어린 학생들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 자기 아이가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주커버그처럼 ‘일리아스’를 줄줄 외우길 꿈꾸는 부모님들의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무턱대고 ‘일리아스’에 도전했다가 그 후 10년 간 신화는 쳐다도 보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떠올려 본다면 독서가 아무리 좋아도 무리한 책읽기는 결코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이를 통하여 모든 꿈이 반드시 이루어지지는 않는 것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