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학부모들이 참여하는 특성화 중학교 설명회에 참석하여 여러 학무모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다수의 부모들이 해당 학교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학부모들의 관심은 여전히 학생들의 전인적인 성장보다는 학력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높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같은 현상으로 보아 학부모들의 생각이 학교교육에 매우 큰 영향을 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에게 꿈을 가지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 아이는 도통 별다른 꿈이 없다며 속상해 한다. 하지만 그런 부모들 역시 별다른 꿈이 없다. 부모들을 만날 때면 종종 묻곤 한다. 부모님의 꿈은 무엇이냐고? 미래에 어떤 인생을 살고 싶냐고? 그러면 부모들은 당황해하며 아이들 건사하기에 바빠 지금은 꿈이고 뭐고 생각할 여유도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아이들이 떠난 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수명이 길어지면서 할머니,할아버지로서의 삶은 점점 길어지고 어쩌면 아이들을 키우는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홀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는데 말이다. 이러한 삶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는 아이들의 교육에 관한 관심 못지않게 중요하다. 너의 건전한 성장을 기대하는 나도 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자라는 아이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지 않을까?
바버라 쿠니가 쓴 <엠마>는 스스로 꿈을 꾸고 꿈을 이뤄가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았다. 엠마도 여느 할머니처럼 아이들을 키워 내보내고 지금은 혼자 빈집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을 키울 때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외롭지는 않았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면 그 결과를 볼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남은 것은 텅 빈 공간과 무의미한 시간뿐이다. 생일이면 손자, 손녀들까지 모두 모여 축하를 해주지만 그것은 잠시뿐이다. 곧 혼자만의 시간이 다시 이어질 것임을 엠마는 알고 있다.
가족들은 엠마를 챙기고 도와준다. 불쌍하게 여기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엠마가 원하는 것은 동정이 아니다. 엠마가 원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할머니라고 마음까지 늙는 것은 아니다. 일흔두 살을 먹어도 여전히 젊은 시절만큼이나 삶을 느끼고 싶어 하고,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그저 덤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할머니를 할머니로 보고 싶어 한다. 몸을 움직여 즐거움을 찾기엔 너무 늙었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주책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엠마는 가족들이 생일 선물로 준 산 너머 작은 마을을 그린 그림을 보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어린 시절 살았던 마을과는 달라.’ 그러고는 손수 자신이 예전에 살았던 마을을 그리기로 결심한다. 엠마의 삶은 그때부터 달라진다. 더는 멈춰 있는 삶이 아니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본능이고, 본능이 발현될 수 있을 때 인간은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엠마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보여주기에는 자신도 없고 괜히 주책없다는 말을 들을까 걱정해서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고 가족들은 엠마의 생생한 그림들을 좋아했다. 이제 엠마는 그림을 감추지 않는다. 가족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준다. 엠마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장소를 그리면 외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니까. 엠마는 여전히 한 살 두 살 늙어가고 있지만 마음은 더 행복하다. 꿈을 갖지 않기에 우리는 늙는 것이지, 늙어서 꿈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에겐 꿈이 중요하다면서 내가 가진 꿈이 없다면 아이들은 얼마나 진실되게 이를 받아들일까도 생각해 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