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황석영 장편소설 ‘낯익은 세상’ 출간 소식이 중앙일간지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1962년 등단했으니 햇수로 50년 만에 펴낸 신작이다. 2010년 6월 ‘강남몽’을 펴내 구설에 오른지 1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이기도 하다. 일단 소설가 황석영이 원로인 점을 감안하면 왕성한 필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거기엔 왕성한 필력말고 나름의 이유도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월간 신동아(2010년 11월호)가 제기했던 ‘강남몽’ 표절 의혹에 대한 일종의 불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표절 의혹은 다소 ‘싱겁게’ 막을 내렸다. 신동아에 “이미 실수를 인정하는 답변서를 보낸 바 있다”(조선일보, 2011.6.2)고 인터뷰에서 밝혔기 때문이다. 같은 인터뷰에서 황석영은 “사실(기사 ‘김태촌·조양은 40년 흥망사’ 등을 쓴) 해당 기자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거나 책에 인용 사실을 밝혔어야 했다. 다큐소설 형식이고 일종의 역사소설이었지만,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부분이 있다. 미안하다”고 말한 바 있다.
황석영은 또 다른 인터뷰에서 “미국에서는 소설에 주를 다는 건 물론 인용한 자료 목록을 논문처럼 작품 뒤에 밝힌다. 우리는 그런 전례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그걸 놓쳤다”(중앙일보, 2011.6.2)며 변명성 발언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표절 사실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말할 나위 없이 황석영은 장편소설 출간 소식을 중앙일간지들이 경쟁하듯 일제히 보도하는(그것도 기자들이 중국 윈난성 리장까지 달려가서) 한국문단의 ‘대작가’이기 때문이다.
제4장 ‘개와 늑대의 시간’ 부분에 다른 자료를 참고했거나 인용한 내용이 있다면 그 사실을 미국의 경우나 국내의 전례와 관계없이 소설 말미에 밝혔어야 했다. 물론 그로 인해 작품 전체를 폄하하거나 황석영의 문학 역정까지를 매도해선 안 된다. 친일 이력으로 인해 서정주·채만식·이원수 등의 추모사업 등 문학적 공적까지 간과해선 안 되는 이유와 같다.
어쨌든 ‘강남몽’은 4개여 월 동안 18만 부(한겨레, 2010.10.26 참조)가 판매된 베스트셀러이다. ‘개밥바라기 별’ 이후 2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이기도 하지만, 2009년 5월 이명박 대통령과 중앙아시아에 동행하면서 논란을 낳았던 터라 ‘강남몽’에 대한 대중일반의 관심도 컸던게 아닌가 생각된다. 1989년 방북과 독일에서의 망명생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7년간 옥살이를 했던 그였기에 논란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황석영은, 이를테면 ‘화려한’ 구설수의 작가인 셈이다.
내가 ‘강남몽’을 선뜻 읽은 것도 지은이가 바로 황석영이기 때문이다. 나의 평론 데뷔작이 황석영론(‘소외집단의 존재인식’)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본격적으로 소설 읽기와 독후감 쓰기를 하던 시절 황석영은 내게 ‘우상’이었다. ‘객지’, ‘삼포 가는 길’, ‘장사의 꿈’, ‘아우를 위하여’, ‘섬섬옥수’ 등 일련의 황석영 소설은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그 주역이면서도 소외된 민중에 대한 존재의식을 뚜렷히 하는 특징을 드러냈다. 그의 대하역사소설 ‘장길산’(전 10권)과 또 다른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전 2권) 등도 모조리 읽었음은 물론이다. 평론가일망정 나는, 이를테면 황석영의 ‘왕팬’인 셈이다.
2. 다큐멘터리의 소설화
‘강남몽’은 1995년 대성백화점 붕괴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끝나는 것도 대성백화점 붕괴에서 마지막 생존자 구조장면이지만, 소설은 그 이전의 역사를 들춰낸다. 물론 아름답지 못한 이 땅의 역사이다. 예컨대 일제침략과 해방, 좌·우 대립 정국과 5·16 쿠데타, 개발독재와 도시개발, 산업화과정과 신군부 쿠데타, 5공화국의 ‘정의사회 구현’과 노태우정권의 ‘형식적 민주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소설의 주인공들은 서로 얽혀 있다. 김진·홍양태·박선녀·심남수·임정아가 그들이다. 그 외 박정희·김구·여운형 같은 실재(實在)인물과 김창수·이희철·장영숙 등 역사 속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주인공을 금방 떠올릴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무너지는 대성백화점조차 사실상 상품백화점 붕괴사건을 뜻하고 있어 저자 스스로 “80% 이상이 사실 그대로”라고 밝혔듯 가히 ‘다큐소설’이라 할만하다.
우선 우리가 ‘강남몽’에서 실감하는 것은 소설가 황석영이 원로가 되어서도 역시 황석영답다는 점이다. 작가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했다”고 말하지만, ‘강남몽’은 그가 70년대 써낸 일련의 소설세계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외집단에 대한 안쓰러우면서도 따뜻한 시선이 그것이다.
그 점은 특히 백화점 점원인 임정아를 통해 드러난다. 임정아는 박선녀·김진·홍양태·심남수 등 4명의 주요 인물과 서로 얽히고 설키는 유기적 관계에서 다소 동떨어져 있지만, 누구보다도 선명한 이미지와 뚜렷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인물형이다. 그녀 부모(임판수와 김점순)의 인생 역정이 그렇고, 백화점 붕괴현장에서의 마지막 구조가 그렇다.
임정아를 “백화점 건물이 무너진지 십칠일 만”에 마지막 구조자로 설정한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같이 묻힌 백화점 회장 김진의 세컨드 박선녀의 죽음과 대조해보면, 그리고 그들이 서로 주고 받은 대화를 떠올려 보면 그 점이 더욱 뚜렷해진다. 잠깐 직접 만나 보자.
-그래 그거 내가 다해 줄 수 있어. 박선녀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임정아는 머릿속으로 그리던 그림들을 지워 버리고 말을 끊었다. -나 재력있는 사람야. 근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박선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임정아가 천천히 말했다. -내 동생 휠체어를 왜 사모님이 사주죠? 그리구 집두요. 저는 임시직인데요. 우리 부모님은 시골서 올라와서 여태껏 일만 죽도록 하구두 산동네를 못벗어났지요. -그러니까 앞으론 잘 살아야지. -그렇지만 ……. 정아는 이어서 단호하게 말했다. -사모님이 다 해줄 수 있단 말씀 다신 하지 마세요. 337~338쪽
세상엔 돈 가지고도 안 되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강남으로 상징되는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호된 비판인 셈이다. 비판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 답은 아래 인용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유린당한 민중(서민이라 해도 좋다)의 꿈에 대한 복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 우리 식구 앞으루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냐. 집두 있겠다. 너하구 나하구 둘이 벌면 금방 저축도 많이 할 수 있을 테구, 부자들두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지 우리보다 별로 잘사는 것 같지두 않더라. -엄마, 내가 나가는 점포에 오는 손님들 보면 정말 돈 잘 쓰더라. 내 월급의 몇 배 되는 애들 옷을 여러 벌씩 사가는 거야.(하략) 371쪽
한편 ‘강남몽’은 우리에게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작가가 풀어낸 백화점 붕괴 이전의 역사를 몰라서가 아니다. 일제침략기의 밀정이라든가 해방 정국에서의 좌·우 대립, 제주 4·3사건, 여·순반란사건, 대통령 박정희의 군인 이력, 이른바 정의사회 구현의 삼청교육대 등 웬만큼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인데도 그것들이 강남의 ‘부’와 ‘밤의 세계’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몰랐으니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잠실에 아파트가 우후죽순 생겨날 때 나도 거기 살았었다. 미수로 그치긴 했지만, 건설현장 인부들을 대상으로 한 포장마차 개업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것이 좌절되자 잠실 누이 집에서 광화문 사무실을 오가며 책 세일을 했던 때였다. 떼돈 벌기가 땅 짚고 헤엄치기인 줄 알았어도 나 역시 소설 속 임판수처럼 “땅 사모을 돈은커녕 하루 벌어먹기도 어려운 때”였으니 그냥 무지 몽매한 서민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소설 속 임판수처럼 혹은 현실의 나처럼 강남을 몰랐거나 알았다해도 속수무책으로 강건너 불 구경하듯 해야 했을 것이다. 다큐소설 ‘강남몽’이 문학적 힘을 발하는 이유이다. 다큐소설이 학계나 문단에서 아직 정립된 개념은 아닌 걸로 알고 있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어떤 깨달음을 갖게하는 건 확실하다. 당연히 그것은 어떤 지식의 전수가 아니다. 만약 강남 역사에 대한 지식 전수가 목적이라면 2006년 전북대 교수 강준만이 펴낸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 같은 책이 훨씬 유익했으리라.
그렇더라도 밀정의 역사라든가 땅투기 방식, 싸움의 기술과 감방 묘사 등 작가의 박학다식은 역시 황석영답다는 찬탄을 다시 한 번 갖게 한다. 또한 몽자 돌림 룸살롱 유행이라든가 담배 ‘파고다’ 한 보루(10갑)값이 500원 같은 시대상의 리얼한 모습은 ‘강남몽’이 ‘구운몽’이나 ‘홍루몽’ 따위 허무맹랑한 고대소설류가 아님을 웅변한다.
물론 김진의 백화점 붕괴, 홍양태의 도박중독증, 박선녀의 죽음 등 시대의 양심이나 사회정의와 아랑곳 없는 주요 인물들의 몰락이 다소 권선징악적이긴 하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할퀴고 찢기고, 당하는 자들의 원혼을 위한 씻김굿이라 생각하고 싶다. 모든 음모와 악행의 정점에 있는 위정자들의 파멸이 직접 그려지지 않아 약간 아쉽긴 하지만, 당하는 자들은 그때뿐 아니라 언제나 있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문학적 힘 역시 영원할 수밖에 없다.
3. 현실적 아쉬움
우리가 ‘강남몽’을 읽고 느낀 현실적 아쉬움은 정작 다른 데 있다. 왜 ‘강남몽’이 1권짜리 장편소설이냐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작가는 “10권짜리로 썼어야 되는데 압축하는 과정이 워낙 힘들었다”(서울신문, 2011.6.2)고 실토한 바 있다. 또 작가는 “대하소설의 시대는 갔다”(한겨레, 2010.7.3)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강남몽’을 출간한 2010년이 대하소설이 유행하던, 70~80년대 사회적 분위기는 아니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계속되면서 대하소설에 대한 창작동력을 잃거나 그것이 희미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집권여당이 그것을 ‘잃어버린 10년’이라 규정한 지금은 어떤가. 소설가 전성태가 “가치의 전도, 허위와 위선, 언어의 훼손이 이처럼 적나라하고 뻔뻔한 시대도 드물었다.”(한겨레, 2010.9.11)고 말한 지금은 어떤가? 언론 및 표현의 자유 등 민주주의의 여러 가지가 30년 전으로 자꾸 후퇴해가고 있다는 지금이야말로 ‘태백산맥’·‘아리랑’·‘한강’ 같은 대하소설이 필요한 때는 아닐까! 1995년 이전의 70~80년간 이 땅의 역사는 1권의 단행본에 담아내기엔 너무 방대하고 버거운 무게와 부피이겠기에.
‘강남몽’을 읽는 내내 너무 서술적이거나 핍진감이 부족해보인 건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강남몽’을 펴낸 창비는 국내 굴지의 메이저 출판사인데, ‘룸쌀롱’(51쪽 룸살롱), ‘쌕소폰’(61쪽 색소폰), ‘댓가’(308쪽 대가), ‘후덥지근한’(329쪽 후텁지근한) 따위 오타 내지 오류는 어떻게 된건지 의아스럽기까지하다. 어쩌다 있는 너무 긴, 무려 한 페이지에 달하는 문단 등도 간과할 수 없는 아쉬운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