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 개교 기념식이 있다. 시험이 끝나고 홀가분하게 잠시나마 살짝 해방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개교식을 맞이하여 작은 이벤트를 하나 추진하고자 하여 우리아이들이 자신에게 주는 스스로의 격려의 메시지,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할까?에 대해 엽서를 써서 꾸미고 전시를 하려고 글을 쓰게 했다. 엽서글을 붙이면서 한 장 한 장 읽어보다 어쩌면 이리도 우리 아이들은 자신에게 상채기를 내고, 자괴감에 빠져있는 학생들이 많을까? 가슴이 허허로워짐을 느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혹 우리 아이들의 행동 하나 하나, 또는 아이들이 생각하는 사고 방식, 우리 아이들의 언어 하나 하나가 어쩌면 우리 어른들이 모습과 말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청년 실업이 큰 문제가 되어가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자신감과 자긍심의 부재는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또한 그로 인해 나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나 존중도 많이 부족한 현실인것 같다.
전에 TV예능에서 안철수 씨가 나와서 어머니의 교육관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어렸을 적 어머니가 항상 자신에게 존댓말을 써왔다고 한다. 학교를 갈 때에도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존댓말을 쓰지 않는 상황이 더 거북하다 말한다. 존중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알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자기 자신이 존중받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성년의 날 그 많은 날이 들어있는 가정의 달 5월에 가정에서는, 학교에서는 우리는 아이들과 무엇을 나누어 가자고 있는가? 물질적인 선물이 아닌 말의 선물, 마음의 선물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선생님이 학생들 대할 때,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 한마디까지도 조심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교수이자 기업인인 안철수 씨처럼 꺾이지 않는 소신과 자존감은 바로 그러한 가정에서 어머니의 존중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와 실수와 실패를 하더라도 계속적인 기회를 줌으로써 그들의 도전정신을 키울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나 싶다.
무난하게 학교 졸업하고 무난하게 취직하고 무난하게 결혼하는게 삶의 희망이라고 말하는 많은 우리 아이들, 적당한 자리에 취직이라니. 어느 자리가 적당한 자리인지 기준이 있는 건가? 어떤 사람이든 결혼할 당시에는 열정적으로 사랑을 했건 혹은 다른 이유가 있었건 각자의 이유가 절실해서 결혼한 것이 아닌가? 과연 우리는 보통이라는 기준을 어디에다 잡을 수 있는 걸까. 나는 보통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라는 게 식사 때의 기준량 처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고, 저마다의 개인의 과거를 가지고 있고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고 그만큼 개인의 생각이나 상황에 대한 대응방식은 천차만별이다. 물론 같은 문제를 보고 같은 결론을 내는 경우는 흔히 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한 데로 모아지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같다고 해서 사고의 체계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닐 것이고, 모로 가도 서울이 나올 수 있는 법이다.
인생은 효율성이 전부가 아닐텐데, 내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고, 어떤 일을 하면 재미있는지 찾아낼수 있는 재능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강한 소신과 자존감 우리는 부단히 아이들에게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너는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이 모양 이 꼴이니?"
누구를 닮아서일까? 아니 누구를 보고 배워서일까?
무학도사가 태조 이성계에게 했다는 말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가 생각나게 하는 글귀가 마음에서 울린다. 우리 학생들 눈에는 무엇이 보일까?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성년의 날.
부디 내 아이로 태어나줘서 고맙고, 내 제자가 되어줘서 고맙고, 치열하게 살지만 다급하게 살지 않고, 부드럽지만 자신의 꿈에 확고하고,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대한 신뢰와 세상에 대한 믿음. 너희들은 스토리다. 부디 창밖에 보이는 물 차오른 연녹빛 나무처럼 싱그로운 행복한 달이길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