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다. 바쁘게 움직인 덕분에 숨 가쁘게 출발하려던 지하철의 발목을 잡았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옆 사람을 생각해서다. 지하철은 좁은 의자에 의지하며 지하를 오가지만 삶의 활력소를 온몸으로 느낄 수가 있기에 즐겨 이용한다. 그와 반면 갈수록 인내력을 발휘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늦은 가을날 아침이다. 지하철 안은 마치 식당차 같다. 옆자리에 앉은 대학생들이 아침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남의 시선은 알바 없다는 듯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하기는 길가에서 군것질을 하는 것과 비교하면 색다를 것도 없지만 자꾸만 내 시선을 끌었다. 기계의 힘을 빌려 억지로 환기를 시키는 곳에서 내놓고 그런 모습을 보여야 했을까. 비록 공부하는데 시간을 투자하느라 촌음을 아껴야했다고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식사하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더군다나 자기들을 지켜보는 눈들이 한 칸 가득인데도 무시할 수 있다 것이 평범하게 와 닿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하루는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탄 주부가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를 내면서 무언가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북했다.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녀의 행동은 고무줄처럼 늘어졌다. 목에 까지 치미는 무언가가 있었지만 옆에 서 있는 아이를 생각해서 삭혔다.
예는 몸에서 우러난다고 한다. 하기는 바쁜 시간대의 지하 공간에서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라 할 수 있지만 그 공간은 우리 모두가 주인이지 않던가. 그러니 우리들은 대접 받을 이유이자 원인이다. 동시에 상대방을 배려해야할 의무 또한 안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또한 하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모이고 모이면 우리의 문화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며 눈앞의 그 현상도 가벼이 볼 일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쩝쩝거리면서 음식을 먹는 것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다. 문제는 소음이다. 특히 너도나도 없이 갖고 있는 휴대폰 통화로 지하철 안은 114안내 센터 같을 때가 많다. 그곳을 개인 집으로 착각한 걸까. 부풀린 목소리로 사생활을 중계하는 전화는 송충이가 내 몸 위를 서멀서멀 기는 것처럼 몸서리를 치게 한다. 좁은 공간에서 왕왕 울리는 울림현상까지 힘을 합치면 그 증세는 더 심해진다.
20대 아가씨가 옆자리에 앉았다. 앉기 전부터 상대방과 주고받던 농담은 10분이 넘어도 끊어질 줄을 모른다. 참고 들어주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공공장소에서의 예를 지켜달라고 부탁을 했다. 순간 주변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모두들 바랐던 바지만 그 누구도 나설 수가 없었던 끝이리라.
이 같은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 가까이에서 지켜본 지인들은 참으로 용감하다면서 박장대소를 한다. 어느 순간 부터는 군복도 입지 않은 나에게 군기반장이라는 별명까지 붙여 주는 게 아닌가. 한편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듣는 가족들은 큰 걱정들이다. 혹시 해를 당하면 어떻게 할 거냐면서 회색론자로 살아 라고 다그치기까지 한다. 가족들의 염려를 들으면 등골이 오싹해질 때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때 뿐이다.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기준은 있다. 또한 이 사회의 누군가는 그 기준이 꽃을 피우고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미래라는 큰 그림을 장만하는 데에 제어장치이자 브레이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우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야단스럽지 않아도 된다. 아니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런 군기반장이 없어도 될 사회, 그런 역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이라는 역설적인 생각까지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