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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6·25 65주년 기획>그 날, 어린용사는 총을 들었다

열예닐곱 꽃다운 소년·소녀들
"나라가 부른다" 포화 속으로
세월에 잊혀가는 팔순 老兵들
"어린 학생들 역사 잊지 말길"


어머님! 사람을 죽였습니다.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저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희들 앞에 도사리고 있는 괴뢰군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들은 겨우 71명뿐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이 글은 1950년 8월 11일 포항전투에서 산화한 이우근 학도의용군의 품에서 발견된 편지 내용 일부다. 당시 중학교 3학년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동족에게 총구를 겨눠야 했던 아픔과 인간애, 죽음에 대한 공포가 고스란히 묻어있다. 이 편지는 끝내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께 부쳐지지는 못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펜 대신 총을 들고 학도의용군으로 나섰다. 일본에서도 청년동포 642명이 현해탄을 건너왔다. 이는 재외국민이 조국을 위해 귀국한 세계 첫 사례다. 방방곡곡 '조국이 부른다'는 격문이 붙었고, 꽃다운 학생들이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얼마나 많은 소년·소녀가 전장에 나섰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2012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6·25전쟁 학도의용군 연구'에 따르면 1951년 4월 전국학생연맹이 집계한 2만7700명에, 이후 각지에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 학도의용군을 더해 3만5000명~4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현충원 홈페이지에는 약 5만 명의 학생들이 자진 참전해 그중 7000여 명이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는 전쟁에 직접 참여한 경우만 따진 것이고, 후방이나 수복지역에서 선무활동에 참여한 학생을 합하면 2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된다.

피가 흙이돼 들꽃을 피우고 지기를 반복한지 65년. 구국의 일념 하나로 전장을 누볐던 소년·소녀들 중 살아남은 이들은 어느덧 백발노인이 됐다. 그 사이 목숨을 내건 사투로 지켜낸 조국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분단의 상처는 그대로인 채 그들 중 상당수는 죽어서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뒤늦게나마 학도의용군의 뜻을 기리기 위한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화개·장사·태백 등 주요 전적지에 추모비가 세워졌고, 행적을 담은 영화도 제작됐다. 정부는 산야에 남겨진 이들을 수습해 넋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유해발굴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국민적 공감대 확산과 호국보훈의식 고취를 위해 학생과 일반인이 유해발굴에 참여하는 체험프로그램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무심한 세월의 흐름 속에 이마저도 쉽지 않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관계자는 "2007년 6·25 참전 학도병 발굴사업이 추진된 이래 일부 유해가 골격의 크기 등으로 미루어 학생의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직까지 학도의용군으로 공식 인정된 사례는 없다"고 설명했다.

학도의용군으로 화개전투에 참전, 팔순 노인이 된 정효명 옹. 참전용사 자격으로 유해 발굴사업에 참여했던 그는 "총알이 날아와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버텼던 그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그 날의 역사를 잊지 말고 애국심을 가져 달라"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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