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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창가에서> 전문성에 대한 단상

잡무, ‘교육전문직’ 칭호 등
교사 전문성 해치는 주범


그럼에도 결국 떠오르는 건
‘내가 변해야 세상도 변해’


최근 새 학년을 맞아 몸단장을 하러 미용실에 들렀다가 옆 자리에서 여성 둘이 나누는 말을 듣게 됐다. ‘이번에는 젊은 남자 선생님이 우리 애 담임이 되면 좋겠어.’ ‘나는 남자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여자라도 나이든 사람만 아니면 좋겠어.’

나는 그 사람들에게 왜 그런지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꾹 참고 내 자신을 돌아봤다. 나이가 들었다고 권위적이지는 않았는지.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는지. 머리카락이 중요한 게 아니라, 머리카락 밑에 있는 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더 주목해야 하는 건 아닌지 등.

그리고 교사의 전문성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초등교육 전문가라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 서글펐다. 고은 선생의 시집 '순간의 꽃'에 이런 시구가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그 꽃.’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을 내려오는 경력 교사는 볼 수 있음을 그 학부모들은 알지 못한다. 삶이 무엇인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무엇에 복종하고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세상의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지. 나이 오십 줄이 돼서야 알 것 같은데.

교사 자신이 아무리 전문가로 자처하고 경력이 중요하다고 해도 주변에서 그렇게 여기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봤다.

우선 교사가 하는 일이 참 많다. 교과 수업뿐만 아니라, 생활지도, 급식지도, 청소지도, 교통안전지도, 진로지도, 아침자습지도, 돌봄교실, 아동 간식지도. 뭐든 ‘지도’라는 말만 붙이면 교사의 업무에 포함된다. 모두 중요한 지도다.

또 통일교육, 녹색성장 교육, 학부모 평생 교육, 소방 교육, 방과후 교육. ‘교육’이라는 말만 붙이면 이것들도 모두 교사의 업무다. 그리고 대체로 그 업무들은 늘 새롭다. 해마다 바뀌고, 근무학교가 바뀔 때마다 또 새롭게 주어진다. 그럴 때마다 경력은 무시되고 새내기 교사처럼 배워야 한다.

교사의 전문성을 저해하는 다른 이유는 ‘실적’ 위주의 교육행정이다. 언제부턴가 모든 교육 활동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 평가 때문이다. 통일교육을 했으면 통일문예행사 결과물을 교육청에 보고하고, 독서교육을 했으면 독후활동 결과물이 있어야 하고, 연구학교나 시범학교를 운영하면 보고서에 활동하는 사진과 학습지가 첨부돼야 하고. 결과 보고서를 잘 쓰면 상도 준다.

심지어 어떤 학교에서는 교사 연수 동아리 활동(동호회 활동)도 사진을 찍어 보고서를 작성해 결재를 받는다. 그래서 극장 앞에서 교사들은 어깨를 반 쯤 포개는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그 영화를 보았다는 결과보고서를 쓰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의 현실은 이렇게 비루하다.

교사의 전문성을 떨어뜨리는 또 하나는, 장학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하는 ‘교육전문직 시험’이란 단어다. 전문직 시험에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전문직이 아니라는 말인가. ‘교육전문직 시험’이라는 용어를 수정하거나 정리해야 한다. ‘장학전문 시험’ 또는 ‘장학사 시험’이라고 하면 좋을 듯도 하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에 빠져있는 중 문득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불평하지) 말고, 내가 남을 몰라보는 것을 걱정하라’는 논어의 구절이 눈에 들어오는 건 왜일까. 결국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교사의 전문성을 외쳐도 교사의 전문성을 채워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란 것을 다시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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