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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독도는 日 침략야욕의 첫 희생양

10월25일은 ‘독도의 날’이다. 1900년 10월25일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를 공포해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키면서 그 범위 내에 독도를 포함시켰다. 독도의 국제법적 지위가 이날 확립된 것이다. 독도의 날은 정부가 공식으로 제정한 기념일은 아니지만 교총을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10월25일을 ‘독도의 날’로 기념하면서 각종 행사를 거행해 오고 있다. 올해도 25일을 전후해 전국적인 특별수업 등 여러 행사들이 거행됐다.

일본 공문서도 실효지배 인정

칙령 제41호는 대한제국의 관보에 실려 세계에 공표됐다. 독도가 한국 땅인 것이 세계적으로 선포된 셈이지만 일본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칙령 제41호로 선포된 울도군의 범위가 ‘울릉도 전체와 죽도, 그리고 석도(石島)’로 표기돼 있기 때문에 독도의 이름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칙령의 석도가 바로 독도다.

당시 울릉도 해금정책 시행이 중단된 1883년부터 거의 480년 만에 울릉도 이주가 시작됐는데 이주민들이 독도를 돌섬으로 불렀고 그것을 중앙에서 한자로 표기하면서 석도로 한 것이다. 이때 울릉도로 이주해 간 사람들이 대부분 전라도 출신이었는데 돌섬을 전라도 방언으로 독섬이라고 부르면서 독도라는 명칭이 굳어졌다고 한다. 원래 독도는 역사적으로 우산도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으나 1882년 고종 임금이 울릉도 이주정책을 시행하면서 몇 가지 이유로 우산도라는 당시의 명칭을 없앴다고 ‘고종실록’에 기록돼 있다. 이후 독도라는 이름이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1889년에는 당시의 어업협정인 ‘조일양국통어규칙’이 제정돼 울릉도주변에 들어와 조업을 하려는 일본 배들은 조선정부에 세금을 내야 하게 됐다. 부산 소재 일본영사관이 정부를 대신해 세금을 거뒀고 일본 배들의 조업을 감찰했다. 일본영사관은 물론 거둔 세금을 모두 조선정부에 납부했다.

1889년과 1902년의 부산 일본영사관 기록을 보면 일본인들이 전복을 따러 독도에 갔다가 울릉도로 되돌아와서 일본으로 수출하면서 수출세를 낸 기록들이 있다. 이 보고서에는 울릉도를 독도의 본도(本島)라고 기재하고 있다. 독도가 울릉도에 속하는 섬이라는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히 기재된 일본 공문서가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일본인들이 독도에서 채취한 전복 등을 일본으로 수출할 때 수출세를 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이 세금정책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그러므로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 오키섬으로 편입하기 전에 이미 독도는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는 만큼 독도가 무주지였다는 일본 주장은 더 이상 성립되지 않게 됐다. 1900년 10월 25일을 전후해 공포된 칙령은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역사적, 국제법적 근거를 최종적으로 마련한 것일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토편입 항의 못했던 침략상황

그런데 일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이 독도가 일본 땅으로 편입됐다는 얘기를 알게 된 후에도 정식으로 항의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국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묵인한 것이다.”

1906년 3월 일본의 시마네현 관리들이 울릉도로 입도해 심흥택 군수에게 독도가 일본땅이 됐다고 구두로 전했다. 군수는 “본군 소속 독도가 일본 땅이 됐다고 한다”는 보고를 상부에 올렸다. 대한제국 정부는 “그럴 리 없다”며 “앞으로의 일본인들의 행동을 주시하라”는 지령 제3호를 하달했다. 이렇게 한국 내부에서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재차 확인했지만 일본의 침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에 직접적인 항의를 하지 못했을 뿐이다. 고종황제가 일본에 어떤 항의도 못한다는 상황을 알고 1907년 3월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3명의 밀사를 보내 일본의 영토야욕을 폭로하려다 실패해 일본에 의해 퇴위당하고 군대까지 해산 당했다. 게다가 일본의 내정간섭을 인정하는 정미 7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기까지 했다. 한국이 일본의 침략을 심하게 받는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의 독도편입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독도의 날’을 맞아 일본 침략야욕의 첫 번째 희생이 된 대한민국 영토, 독도의 역사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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