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카이스트 학생과 교수의 잇따른 자살을 계기로 카이스트 학사 운영과 서남표 총장의 거취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그대들이 좌절을 겪는다고 해서 자살에 대한 유혹을 쉽게 느껴서는 곤란하다. 그대들은 젊음과 미래를 함께 가지고 있는 패기만만한 젊은이들이 아닌가. 그래서 ‘젊은 사자’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자살에 관한 유혹을 이길 수 없단 말인가. 물론 그대들은 아파서 그런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얼마나 아프면 목숨을 끊을 마음이 들 것인가. 그러나 요즘 베스트셀러가 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을 보라.
아픈 것은 젊음의 특권이다. 또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의 표증이고 또 아프기 때문에 나을 수 있고 면역이 생긴다는 희망도 가능하다. 젊음은 도전과 어려움의 장이다. 젊음 앞에 항상 주홍색의 양탄자만 깔리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면 ‘루저’도 되고 ‘실패자’도 되며 ‘낙오자’도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살을 택한다면, 아픔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을 가슴속에 새겨야 할 그대들이 ‘아프니까 자살한다’고 한다면, 젊음의 특권을 오·남용하고 있는 셈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 비극적인 자살문제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권이나 시민단체가 관심을 표명하고 나서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 놔라 감 놔라” 하는 식으로 간섭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이 와중에서 서 총장의 용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문제와 관련, 용퇴나 책임을 지라는 주장을 하기 전에 해법을 위한 지혜를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불이 났으면 불을 끄는 데 힘과 지혜를 모아야지 불의 원인이 무엇인지, 혹은 화재에 대해서 누가 책임을 질 것이냐 하는 문제로 논란을 거듭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우리는 대학 구성원들의 자율적인 능력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이 잇단 자살 문제에 대해 가장 큰 충격을 받고 고민하는 주체는 카이스트가 아닌가. 또 카이스트가 지성인들의 공동체인 만큼 이 비극적인 상황을 풀어나갈 해법을 모색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은 노심초사하며 해법을 강구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정치권이나 사회는 그들의 자율성을 믿고 그들의 역량 발휘를 지켜보는 것이 순서다. 물론 어떤 사안의 경우에는 외부인의 눈으로 사태를 가늠하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번 문제는 다르다. 교육개혁의 와중에서 일어난 비극이라면, 일차적으로 교육의 당사자들이 나서서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미 그리스의 석학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한 바 있다. 자기 자신에게 어떤 신발이 맞는지는 외부 사람들이 말할 수 없고 본인만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법이라고.
우리의 일상생활을 보더라도 이런 통찰은 타당하다. 옷을 맞추던, 가방을 사던, 자기에게 무엇이 맞는 지는 개인 본인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 부모라도 본인만큼 잘 알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좀 더 차분하게 당사자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지 지켜보며 격려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자살문제는 카이스트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사회의 자살률은 OECD 국가들 가운데 상위권에 올라와 있다. 자살문제가 더 이상 특정 대학이나 학생들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의미다.
우리 사회에서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열망은 대단하지만, 일단 대학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만사휴의(萬事休矣)’의 분위기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대학에 들어간 경우에도 학생들의 실존적인 문제나 고민을 들어주며 보살펴 주는 제도가 작동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삶의 고민, 학업의 문제와 직면한다. 따라서 이런 실존적인 문제를 더불어 고민할 수 있는 상담과 지도가 제도적으로 긴요하다.
문제는 우리 대학에서 학생지도는 좀처럼 중요한 관심 사항으로 간주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대학생들은 성인이라고 생각해서 일수도 있고, 또 교수의 직분을 연구와 수업에만 국한되는 것으로 판단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대학생들이 삶과 학업에 대해 느끼는 무거운 짐이 방치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카이스트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특정 개인 누구를 비난하고 책임을 지라는 식의 요구보다는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강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 우리 대학, 우리 젊은이들이 ‘자살의 철학’이 아닌 ‘생명의 철학’을 어떻게 체득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학 경쟁력의 비전을 가지면서도 인간에 대해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 사회와 대학은 제도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