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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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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2001 교원문학상 소설 당선작> 일직날-날개를 달아 주는 반딧불이

태풍이 올라오면서 곳곳에 비 피해가 크다. 어제로서 후반기 보충 수업이 끝나긴 했지만 이러다간 나들이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사흘 얻은 휴가 마저 다 놓칠 것 같다. 그나마 하루는 일직으로 걸렸으니...... 이번 정류장은 오거립니다. 다음 정류장은 b동 고갭니다. 부산히 쓸리는 전망창 닦개 너머로 멀리 빗발 속 우산들이 승천을 기다리는 혼령들 형상으로 까마귀 떼처럼 모여 있다. 차 머리가 인도 쪽으로 꺾이자니 먼발치의 우산들이 진작에 서둘러 차도로 내려서며 밀치며 헤집으며 실랑이질에 앞자리 다툼한다.

빠듯이 들어차는 물생들. 일요일 아침에다 이 우중에 오늘 따라 웬 사람들인고? 그들이 묻혀 들이는 비릿한 빗물 냄새와 함께 차안이 후텁한 무덤 속이다. 정체된다 싶어 전망창 앞을 내다보았다. 두 마리의 두꺼비가 짝짓기 하듯 엉켜 있고, 그 옆에 반바지와 대머리가 빗줄기 속에서 상대의 멱살을 부여잡고 그들의 두꺼비처럼 엉켜 있다. 그 통에 한길이 온통 얹혀 버린 것이다. 어디다 손을 대요? 갑자기 찌르듯 삦어 나온 여자의 외마디, 드디어 숨가쁨의 뻐끔질이 시작되려나 보다. 이 아주머니가! 누가 손을 댔다는 거야! 되받아치는 사내의 지름소리에 이어 아저씨, 내려 줘요, 걸어갈래요, 하는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천장을 찌른다. 진작 그럴 것이지, 느물거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능글맞아요! 하는 그녀의 대거리가 만만치 않다. 기사 양반, 나두 내리겠우. 문 열어요. 숨차 헐떡이는 뻐끔질, 그 빈사상태. 차가 그 뻐끔질에 동조한다. 여자가 내리고 사내가 내린다.

이 무슨 해괴한 광경인가? 개 고양이 같던 여자와 사내가 한 우산 속에서 다정하게 붙어간다. 나는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7시 50분. 8시안에 대 가긴 애저녁에 틀린 일이다. 소금쟁이 같은 검은 제복의 모자가 등장한다. 엉켰던 반바지와 대머리 사이에 간격이 지어진다. 소금쟁이가 팔을 들어 길가 쪽을 가리킨다. 반바지와 대머리가 각기 제 두꺼비에 오르고 그들의 두꺼비가 길가 쪽으로 끌리면서 비로소 엉겼던 한길이 봇물처럼 터진다. 일련의 광경이 무성 영화를 보는 듯하다.

또 태울 참인겨? 차 머리가 보도 쪽으로 꺾이는가 싶으면서 송곳 같은 날카로운 지름소리가 천장을 가른다. 어째 잠잠하다 했다. 고만 태우라우! 어데 더 탈 틈이 있다고 이라노! 삶의 뻐끔질이 용틀임칠 기세다. 어머! 내 돈! 60만 원! 돌연한 절규와 동시에 그 성 희롱 연극의 우산 속 남녀의 환영이 아차 하는 머리받힘을 일으킨다. 아저씨! 아무도 내려 주지 마세요! 숨차 할딱이는 여인. 열리려던 차 문이 서둘러 아물린다. 이 안에 소매치기 있다구요! 다급해 하는 여인의 목소리. 아니다. 소매치기는 없다. 나는 속으로 뇐다. 접어들이려던 차가 내쳐 발길을 내딛는다. 차 세워! 내린다구! 차 안 서고 와 이라노! 차 세우라우! 차안이 분화구처럼 들끓기 시작한다. 경찰서까지 가야 합니다. 운전수가 우련히 뇐다.

경찰서가 어디야? 강파른 말마디가 앞으로 날아온다. 조금만 가면 됩니다. 운전수가 차의 고삐를 다그친다. 쓰린 쓰리고 내릴 사람은 내려야지! 가이고 탔으만 단다이 챙길 기지 시간 없는데 이기 뭐꼬! 쓰리꾼이 여태 이 안에 있가지비! 바보야? 촌각을 다투는 아침 시간에 이게 뭔고! 시내를 한 바퀴 돌 참이여? 익명성 뻐끔질이 화산처럼 폭발한다.

포도청 마당 안으로 차 머리가 디밀리자 의례 그것이려니 하는 표정의 하늘색 반소매가 다가온다. 소매치기. 운전수가 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그 일상성에 '남의 일' 하듯 하늘을 쳐다보며 다가온 반소매에게 말하였다. 얼마? 반소매가 물었다. 60만 원. 운전수가 여전히 해바라기 하듯 얼굴을 하늘에 꽂은 채 대답하였다. 추적이는 빗발 속에서 반소매가 앞문에 붙어선다. 또 다른 반소매가 나타난다. 먼저 나타난 반소매에게 다가간 뒤의 반소매가 먼저 온 반소매와 잠시 더듬이짓 하더니 뒷문으로 간다. 반소매가 빚어지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몸뒤짐한다. 내가 내리자 반소매가 나의 대봉투에서 책을 꺼내 책갈피를 후루룩 넘겨본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낸다. 지갑 속에서 편지 봉투와 돈이 나왔다. 얼마요?

반소매가 지갑을 들치며 물었다. 편지 봉투 속의 것은 알지만 지갑 속의 것은 아슴아슴하기에 '글쎄요.' 하였다. 그 쭈밋거림이 못마땅한지 얼만지도 모른단 말이요, 하고 타박이다. 선생이요? 반소매가 뒤져 꺼낸 신분증을 들여다보며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나의 대답에 촌지 받은 거요? 하며 편지 봉투를 까불린다. 어제 보충 수업비 받은 겁니다. 미처 집사람에게 건네지 못하고......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나의 쭈밋거림이 수상한지 아주머니! 이리 와 봐요! 하고 소리 친다. 한 아주머니가 달려온다. 이거 봐요, 하며 반소매가 봉투에서 수표를 꺼내 아주머니에게 내 보인다. 아니에요. 현찰이에요. 아주머니가 징징거린다. 반소매가 지갑과 수표를 나에게 돌려준다.

비가 삐어 가고 있으므로 우산을 접었다. 어제 보충 수업비 받은 겁니다, 미처 집사람에게 건네지 못하고...... 뒤늦게 그 변명이 비굴하고 자괴스럽고 언짢다. 그 언짢은 기분을 해소시킬 양으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았다. 없다. 그 흔한 담뱃가게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문 앞까지 와서야 담뱃가게를 만날 수 있었고, 담배를 사 가지고 돌아섰을 때 하늘이 다시 비를 퍼붓기 시작한다. 접었던 우산을 도로 펼쳐 들었다.

철문이 배죽이 열려 있다. 철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징거 주었다. 비에 씻긴 운동장이 휑뎅그렁하고, 여러 가닥의 물길이 실개천을 이루며 지절거리고 있다. 바람까지 실은 빗줄기는 빗발의 삼대밭이다. 튀겨 오르는 물방울이 자자하게 물안개를 피워 올리며 바짓가랑이에 무게를 단다. 우산 천 속으로 튀겨드는 는개 같은 물방울이 소분소분 눈썹에 달라붙는다. 누렇고 비썩 마른 개 한 마리가 빗속을 누비며 비실비실 뒷문 쪽으로 기어가고 있다. 꼬리가 축 처진 녀석의 잔등은 빗물로 털이 줄줄이 엉겨 붙었다. 꼬락서니하군, 나인지 개인지를 딱해 하며 층계를 올랐다. 빗발 속에 갇힌 두 동의 회색빛 시멘트 덩이는 거대한 괴물만 같다.

구관의 현관은 자물쇠를 물고 있었다. 지나치는 걸음으로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자니 창문 하나가 열려 있고, 그 열려진 창문으로 빗물이 들이치고 있다. 창문을 닫아 주지 않고는 집채가 빗물에 잠길 형국이다. 열쇠를 가져 와야 했고, 서둘러 본관으로 향하였다. 현관문을 밀었다. 집채를 허물어뜨릴 듯한 문소리가 비명을 질러대며 몸서리치게 하였다. 수납 창구를 통해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없다.

시계를 보았다. 9시가 반이 넘고 있다. 일직 교사를 기다리던 야간 경비원 곽 씨는 그만 들어간 모양이다. 여태 기다릴 리가 없다. 주혜자 선생도 아직 오지 않았나 보다. 이런 일을 감안해서 두 사람씩 짝 지어 놓지 않았는가. 우산을 문 옆에 세우고 복도로 올라 서무실 문을 열었다. 드르릉거리는 미닫이가 몸살을 앓는다. 서무과장 책상으로 가 당직 근무 일지를 당겨 끈을 물고 있는 갈피를 잦혀 당직자 서명란에 '한정수'를 기재하고 사인을 했을 때 현관문 소리가 났다. 수납 창구를 통해 내다보았다. 무슨 일로 이제야 나타나는가? 그녀가 우산을 접어 벽에 세우고 복도로 올라서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목례를 하고는 곧장 교무실 쪽으로 향한다. 무슨 대면이 저런가?

열쇠함 쪽으로 걸어가 함을 열어 보았다. 함이 비어 있다.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열쇠 꾸러미는 사환 아이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열쇠 꾸러미를 집어들고 복도로 나오자니 그녀가 교무실 문 앞에 서 있다. 뭐 꺼낼 거 있나 보다는 생각에 뭐 꺼낼 거 있습니까, 하고 다가가자 그녀가 네, 하고 희미하게 대답하였다. 넝마뭉치 같은 열쇠 꾸러미는 뒤죽박죽 미친년 머리채다. 열쇠 꾸러미를 뒤져 '교무' 열쇠를 건져 교무실 문을 열어 주고 돌아서서 현관으로 나왔다. 우산을 집어들고 현관문을 밀었다. 우산을 뒤집을 기세의 바람비가 콩자루를 쏟는 듯한다. 우산대를 꽉 거머쥐고 빗속을 뚫어 구관의 현관 앞에서 몸을 날렸다. 열쇠 꾸러미를 뒤져 '구.현' 열쇠를 건져 올려 자물쇠를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릿한 빗물 내가 고역스레 얼굴을 덮쳤다.

뻔한 유리창들은 청맹과니다. 비바람에 청맹과니들이 아우성을 쳐댄다. 들이치는 빗발을 피해 맹수한테 접근하듯 열려진 창문으로 다가갔다. 벌떼처럼 날아드는 빗방울을 무릅쓰고 창문을 당겨 보았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 꼼짝도 하지 않으니까 그냥 가 버린 것이다. 부룩송아지를 다루듯 해 보았다. 마침내 부룩송아지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채를 메다꽂았다. 복도가 한결 성질을 죽였다. 손수건을 꺼내 팔뚝과 얼굴에 달라붙은 빗물을 훔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욱한 습기에 갱도처럼 침침한 복도가 한 배 가득 푸른빛을 머금은 거대한 고분을 연상시키며 무섬증을 몰고 왔다. 후텁 하면서도 서늘한 복도가 발길을 옮겨 놓을 때마다 삐극삐극 몸살을 앓는다. 한 틈입자가 벽 틈 어디에 은밀히 몸을 사리고 있다가 얼른 다른 곳으로 몸숨김 했을 것만 같다. 물어뜯는 빗발 서슬에 유리창들이 와그르르 한바탕 소란을 피우며 비바람의 날카로운 발톱에 사정없이 할퀸다. 입시 격문이 붙은 복도 천장의 시멘트 턱살이 희번득희번득 인광을 풀어내는 사자의 관구만 같다. 교실 쪽 벽의 두어 발 간격으로 나무틀에 갇힌 연필화 석고상들은 사자와 함께 순장된 내관들만 같다. 벽 속의 한 천둥벌거숭이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벌거숭이를 노려보았다. 벌거숭이도 나를 노려보았다.

어딘가 씨무룩한 벌거숭이에게서 씁쓸한 눈길을 거두고 총총 삼층 복도로 발길을 돌렸다. 삼층에서 길게 뚫린 복도를 흘낏 일견하고 사층을 거쳐 오층으로 올랐다. 수업을 파하고 우르르 빠져나간 도깨비들의 지껄임과 웃음소리와 발자국 소리들이 복도 바닥의 틈바구니에 틈틈이 박혀 있다가 여름날의 논두렁에서 꽉꽉거리는 엉머구리 떼 마냥 와그르르 한꺼번에 되살아날 것만 같다. 내다보이는 바깥은 여전히 세찬 빗줄기로 희뿌옇고, 회색빛 하늘은 가라앉을 듯 대지를 짓누르고 있다. 운동장 끝의 구름을 찌르는 한 떼의 유령 같은 거대한 사시나무들은 비바람에 휘청거리며 뿌연 우연 속에서 산발한 머리채를 흔들흔들하고 있다. 철조망 가두리에 갇힌 이 엄청난 시멘트 덩어리는 양 날개를 열 길도 넘는 낭떠러지 위에 드리우고서 아래로 토물을 게워 내고 있다. 또 다른 토물은 사태가 난 곳 뒷부분께서 철조망 밖으로 하수구처럼 배설되고, 그 건너편 주택들의 지붕 위에서는 빗줄기들이 모래알처럼 부서지고 있다. 별안간에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손등으로 인중을 훔쳤다.

비릿한 열쇠 쇳내가 코 끝에 달라붙는가 했을 때 천둥소리가 시멘트 덩어리를 할퀴고 심장을 갈아 뭉개며 짜증을 몰고 왔다. 그 짜증이 나를 단숨에 일층으로 내려오게 하였다. 현관문까지 내려와서야 본관으로 건너가려 했던 것을 상기하였고, 다시 이층으로 올랐다. 구관에서 본관으로 통하는 이층 사잇문에도 자물쇠가 채어 있다. 밖에서 들여다볼 때나 마찬가지로 본관은 희뿌연 망자의 영기로 가득 찬 고분의 긴 회랑 그것이었다. 발길을 옮겨 놓을수록 음산하고, 창문들이 비바람에 울어댄다. 복도 깊숙이 눈길을 한번 주고 삼층으로 올랐다. 독서실 문이 양 날개를 펼친 채 벌렁 퍼드러져 있다. 삼백여 개의 의자와 책상들이 깊은 잠 속에 빠져 있고, 밤늦도록 시달린 의자와 책상들이 입시생처럼 지쳐 끄물끄물 휴일 하루를 정양하고 있다. 커튼마저 후줄근해진 몰골로 축 늘어진 채 곤스레 잠들어 있고, 밤늦은 커피를 끓여 마시고 팽개친 감독 교사실의 주전자가 가스렌지 위에서 을씨년스레 꾸벅이고 있다. 문을 여며 주고 독서실을 나와 긴 복도를 지나 생물실까지 왔다. 튼튼하게 생긴 주먹만한 잠금쇠가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문짝을 굳게 아물고 있다. 사층으로 올랐다. 사층 역시 휘말리는 빗발 서슬에 으스스 몸서리를 치고 있다. 긴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곧장 서무실로 내려가려던 나는 구관 현관문을 잠가야 하겠기에 이층으로 되돌아왔고, 구관과 본관의 사잇문을 잠그고 일층으로 내려와 밖으로 나왔다.

현관문을 잠그고 우산을 펼쳐 들었다. 빗속을 누벼 본관으로 왔다. 현관문을 밀었다. 현관문이 비명을 토하였다. 문을 잡은 채 살며시 징거 주었다. 우산을 벽에 세우고 복도로 올라 서무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서무실에 없었다. 그저 교무실에 있나 보다. 일직은 서무실에서 같이 하게 돼 있지 않은가? 열쇠 꾸러미를 함에 넣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원격 조정기로 텔레비전을 켜 보았다. 허공에 뜬 곰보 자국의 창백한 원구가 나타났다. 지구의 나이와 같습니다. 50억 년을 지켜 온 처녀성을 유린당했습니다. 지하에서 이태백이 통곡할 겁니다. 달인가 보다. 촌지 받은 거요? 소파의 감촉이 내 마음인 양 끈끈하다. 탁자 위의 음식점 성냥곽을 집어 담배를 붙여 물었다. 온통 자고 있다. 마녀의 주술에 걸린 성채다. 주검과 같은 깊은 늪. 그리고 폭풍우. 모든 존재는 종말로 닿아 있다. 자아의식에 과민함은 부질없다. 전화 소리가 심장을 흔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떡 일어나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학교지요?"
"그렇습니다."
"겨우 통화군."
"예?"
"전화 받는 사람이 없어서요."
"녜?"
"저, 2학년 8반 담임 선생님 나오셨나요?"
"방학에다 일요일 아닙니까?"
"2학년 8반 담임 선생님 전화 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
"너, 학생이지?"
"녜."
"그럼, 학생이라고 밝혀야지."
"죄송합니다."
"담임 선생님 성함이 뭐야?"
"차순복요."

전화통 옆의 직원 주소록을 당겨 가나다 순의 주소록 끝 부분께서 '차순복'을 들춰냈다.
"여보세요."
"녜."
"3*3에 0606."
"씨이팔, 미친개 번호 한번 기똥차네."
"뭐라구!"
"안녕히 계세요응. 퍼큐! 매롱."
전화가 뚜우 끊어졌다. 이놈의 도깨비!

눈을 떴다. 잠이 들었었다.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달 표면에 붙은 두 마리의 벌레가 고무 풍선처럼 둥둥 지면을 날고 있다. 민물 징거미 같다. 달에서 보이는 지구가 허공에 걸려 있다. 창백한 비누방울이다. 저 속에 아옹다옹이 있다니, 개미의 일만이나 할까? 희로애락이 그지없이 가소롭다. 채널을 바꾸었다. 비가 너무 왔다. 열차가 전복되었다.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이 통곡한다. 다시 채널을 바꾸었다. 지구는 그저 비누방울이다. 그래, 비누방울일 뿐이라구,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방안을 걸었다. 밖은 세찬 비에다 좁은 방안이니 단 둘이 코를 맞대고 앉아 있기 쑥스럽기도 하겠지. 나의 구둣발 소리가 도깨비 발자국 소리 같다. 아니야. 나를 파렴치한 놈으로 보는 모양이야. 이 고도의 성채 속에 단 둘이니...... 탁자 위의 바둑통 뚜껑을 열었다. 흰 알을 집어 화점에 놓았다. 다른 통 뚜껑을 열었다. 하나를 집어 흰 알 옆에 날일자로 걸쳤다. 흰 알이 몹시 경계한다. 흰 알을 또 하나 건져 올렸다. 건져 올린 흰 알을 중앙으로 한 칸 벌여 놓았다.

흰 알이 도망치며 공포에 떨고 있다. 알들을 몰아 통 속에 거두어 넣고, 성채에 갇힌 폭풍우 속의 고도, 중얼거리며 좁은 공간을 맴돈다. 서무과장 책상 위에 나뒹구는 잡지를 집어 올려 한 꺼풀 책장을 거두어 보았다. 백치 같은 눈매로 헤 벌어진 마를린 몬로의 입술이 입술을 기다리고 있다. 아무 입술이라도 상관없다는 듯하다. 자유분방하였다. 탓할 것이 못 된다. 자신을 충실히 살다 갔다. 자유분방과 방임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후루룩 넘겨보다가 책을 책상 위에 탁 내던졌다. 아차, 순간적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쪽 떨어진 화병 운두에 장지손가락의 가운데 마디의 살점이 할퀴면서 금세 선혈이 뚝뚝 떨어진다. 황급히 상처 부위를 움켜쥐고 휴지통에서 휴지 한 겹을 뽑았다. 교실은 도떼기시장이었다. 나는 교탁을 탁 치고 고함을 쳤다. 하지만 어떠한 통제도 위협도 먹혀들지 않았다. 드디어 나는 한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녀석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녀석이 발딱 고개를 쳐들고 곁눈질로 시이팔 하며 나를 치켜보았다. 섬뜩히 드러난 흰자위가 내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듯하였다. 녀석의 볼따귀를 찝으려 하자 녀석이 나의 손을 획 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 통에 여자의 손톱처럼 길게 기른 녀석의 손톱이 나의 손등을 할퀴었고 금세 혈점이 번져 흘렀다. 에이 씨팔! 녀석은 책상을 박차고 휑하니 교실을 나가 버렸다. 야, 이 녀석! 나는 녀석을 소리쳐 불렀다. 폭력 교사는 물러가라! 녀석의 고함 소리가 복도를 타고 메아리쳐 흘렀다. 휴지를 동여 응급 조처를 취하였다. 사환 아이 책상 서랍을 당겨 보았다. 볼펜이랑 물건들이 잡다하다. 스카치테이프를 풀어 상처를 감싼 휴지 위에 친친 동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왔을 때 녀석의 담임 선생이 나에게로 왔다. 이번 시간에 손 댄 아이 있습니까, 그 아이 어머니가 와서 벼르고 있습니다, 하며 그의 자리로 나를 데리고 갔다. 한 여인이 오도마니 앉아 있다가 내가 다가가자 발딱 일어나며 다짜고짜 야! 이 폭력 교사야! 네가 선생이냐! 깡패지! 하며 날카로운 삿대질로 내 얼굴을 찔러댔다. 기가 막힌 나는 아이가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머리가 터져 집에 드러누워 있다면서 고소하겠다고 악을 썼다. 나는 증인으로 그 반의 반장을 불러와 그 때의 상황을 설명시켰다. 했지만 머리가 터진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냐며 여인은 한층 더 길길이 뛰기만 하였다. 한바탕 소란을 피운 여인이 돌아가고 이내 파출소에서 즉시 나와 달라는 호출이 날아들었다. 나는 그 반의 반장을 데리고 파출소에 출두해야 하였다. 반장이 상황을 설명했지만 터진 머리가 있는 한 파출소에서는 선뜻 이쪽의 해명을 믿으려 하지 않는 눈치였다. 반장 아이는 양호 교사를 데려 왔고, 점심 시간에 운동장에서 다친 것으로 드러나면서 겨우 일을 잠재울 수 있었다.


밖은 여전한 비바람, 무언가 자꾸 찜찜하다. 탁자 위에 널브러진 신문을 집어 들었지만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돌멩이 섞인 모래판만 같다. 신문을 탁자 위에 팽개치고 다시 소파로 돌아가 몸을 묻었다. 읽을 거리라고 가지고 온 T씨의 수필집을 펼쳐들고 활자를 좇아 보지만 역시 의미의 전달이 따르지 못한다. 읽은 곳을 되짚어 보지만 여전히 활자가 눈 끝에서 흘러내릴 뿐이다. 또 담배를 꺼냈다. 하지만 귀찮았고 눈을 감았다. 서먹서먹하겠지, 처녀이고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니까. 하지만 내일부터 당장 나를 어떻게 대하려고 저러는 걸까? 전화 소리가 눈꺼풀에 쏟아져 내렸다. 기절할 것같이 놀랐다. 또 잠을 잤다. 허겁지겁 전화기를 들었다.

"하 학굡니다."
놀란 끝이 말 마디를 중첩시켰다.
"아빠야?"
아내의 목소리다.
"무슨 일이야?"
"가 있었구만."
"가 있다니?"
"학교에서 전화가 왔었어."
"학교에서라니?"
"일직 선생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교대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다고. 가도 두 번은 오갔을 시간인데도 가지 않았다니 웬일인가 해서......"
"뻐쓰간에서 일이 있었어."
"일이라니?"
"별일 아니야."
"장동표 엄마라고 쓴 봉툰 뭐야?"
"돌려 줄 거야."
"돌려 줄 걸 가지고 오긴 왜 가지고 왔어?"
"녀석 편에 보내 오기도 했고......"
"웃기지도 않는군. 그럼, 녀석 편에 돌려 줬어야지."
"고스란히 돌려 줄 녀석이 아니야."
"알았어."

전화기를 내려놓고 지갑을 꺼내 지갑 속에서 정성스레 접어 간직한 한 장의 천 원 짜리 지폐를 꺼냈다. 때에 전 지폐는 변함 없이 구운 오징어 껍질처럼 쪼글쪼글 그 추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때때로 생각나면 그것을 꺼내 늘어지려는 탕개를 조이는 각성제로 써 먹곤 하는 그것이다. 지각이 상습적인 녀석의 종아리에 두어 대 매를 댄 그 이튿날 보충수업 전 신새벽에 불이나케 달려온 녀석의 어머니가 교무실로 달려들어 낮도깨비처럼 나타나 손바닥에다 종이 탁구공을 재빨리 쑤셔 넣고는 휑녀케 돌아서서 바람처럼 나가 버렸다. 얼떨결에 당한 나는 돌돌 구겨 비벼 만든 손안의 종이 탁구공을 펴 보았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용케도 구한 시래기 잎 같은 천 원 짜리 지폐. 나는 우거지 같은 지폐를 다시 착착 접어 지갑 속에 넣고 시계를 보았다. 2자에 짧은 침이 걸쳐져 있다. 점심을 어떡허나? 알아서 하겠지. 중얼거리며 사환 아이 책상으로 걸어갔다. 스카치테이프에 물려 있는, 책상 위의 외부 전화 번호들에서 중국집을 더듬어 내려갔다. 전화기를 끌어당겨 숫자를 찍었다. 세 번째 울림에서 신호가 떨어졌다.

"우성 반점이지요?"
"예, 우성입니다."
"짜장면 하나요. 국일 학굡니다. 고량주 한 도꾸리하구요."
"예."
전화기를 내려놓고 사환 아이 책상으로 가 직원 주소록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중간쯤에서 주혜자 선생의 주소와 약도가 드러났다. 약도가 자세하다. 정교한 그림과 반듯한 글씨가 그녀의 깔끔한 마음이다. 방과 후 홀로 남아 휑뎅그렁했던 교무실 책상 밑의 가지런했던 그녀의 실내화가 떠올랐다. 그녀의 단정한 증표들이었다. 또 전화다.

"학굡니다."
"한정수 선생님 계세요?"
"접니다."
"저, 길주 애비 되는 사람입니다. 댁으로 전화 올렸더니......"
"예, 안녕하십니까?"
"근래 왜 낚시 안 나오세요? 붕어 향어 해서 많이 나옵니다."
"그렇습니까? 요즈음은 입어료가 얼맙니까?"
"아따, 일변 입어료 타령입니까? 제 언제 선생님한테 입어료 챙겼습니까? 정말 섭섭합니다. 그냥 들르세요. 그나저나 길주란 놈 말썽은 안 부리는지......"
"말썽 부릴 놈이 따로 있지 길주는 얌전하지 않습니까?"
"이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이나 모래쯤 나오실 시간 나실는 지...... 낚시 겸......"
"시간은 있습니다만 이 태풍 속에......"
"내처 이러겠습니까? 꼭 나와 주세요. 3학년이니 드릴 말씀도 있고......"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 문제로 전화 올렸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씨이팔."

허허, 머리가 찡 편두통이 인다. 수화기 저편으로 아득히 증발하는 마지막 말은 못 들었어야 하였다.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바퀴가 심장을 갈아 뭉갰다. 복도로 나와 교무실 쪽을 넘겨다보았다. 문이 아물려 있다. 문을 잠그고 있을지도, 해졌고 현관으로 나왔다. 비는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다. 현관문 앞으로 다가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움직이는 한 덩어리의 이물이 눈에 잡혔다. 뒤엣 것이 앞엣 것의 꽁무니에 주둥아리를 붙이고 혀를 널름거리며 줄레줄레 따라간다. 뒤엣 것은 들어올 때 본 그놈이다. 앞엣 것은 이따금 획 돌아서서 꼬리를 내리깔고 땅바닥에 주저앉곤 한다. 들어올 때 본 녀석은 더욱 안달이 나서 주둥아리를 앞엣 것의 꽁무니에 들이밀려고 한다. 앞엣 것이 일어나 걸어간다. 다시 녀석이 줄렁줄렁 따라간다. 앞엣 것이 이번에는 성가시다는 듯 흰 이빨을 드러내고 녀석을 돌아보며 앙, 용을 쓴다.

녀석이 주춤 물러난다. 다시 앞엣 것이 걸어간다. 콧중배기를 앞엣 것의 꽁무니에 들이대고 킁킁거리며 따라가던 녀석이 앞엣 것의 등을 훌렁 걸터타고 흘레질을 친다. 헤헤거리는 녀석의 주둥아리에서 침인지 빗물인지가 계 에 흘러내린다. 신발장을 열고 헌 슬리퍼짝을 꺼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자지러졌다. 뒤엣 놈을 향해 슬리퍼짝을 냅다 뿌렸다. 뒤엣 것에 정통으로 꽂혔다. 통쾌하다. 이물들이 운동장으로 달아났다. 다시 들어왔다. 화장실을 들렀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화장실 갈 일도 없나 보지? 방안을 한 바퀴 돌았다. 흑판에 한일자를 그었다. 두 바퀴 돌았다. 또 한 획을 그었다. 다섯 바퀴에서 바를정자가 되었다.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하나에서 백으로 세어 갔다. 백에서 거꾸로 내려왔다. 주선생! 미간에 송곳을 들이댄다. 일어서시오. 나가시오 3층 생물실로 가시오. 폭풍우 속의 고도. 아무도 오지 않소. 쥐도 새도 모르오. 삐그르르 현관문 소리가 나고 닫히는 소리가 머리를 도끼질하였다. 피식 웃음이 빚어 나왔다. 온통 빗물에 뒤발린 비옷의 아이가 알루미늄통을 들고 복도로 올랐다.

"식사 시켰습니까?"
아이의 목소리가 솜방망이 문 듯 볼메어 있다.
"응. 이리 가져 와."
드르릉거릴 문바퀴가 지레 살덩이를 오그라들게 한다. 아이가 문을 열었다. 심장이 졸아붙었다.
"수고했어. 비 오는데 미안해."
아무 말 없이 아이가 탁자 위에다가 짜장면과 단무지, 장, 젓가락, 술잔들을 고량주하고 털어놓았다.
"달아 놔. 한정수라구."

그저 대답 없이 아이가 돌아섰다. 현관문이 메다꽂혔다.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젓가락을 튿어 짜장을 비볐다. 끈끈한 짜장이 어째 내 마음인 양 찐득인다. 주전자를 찾았다. 주전자는 함지박 엉덩이를 깔고 문 옆 가스렌지 위에 퍼질러 있었다. 일어나 주전자 뚜껑을 열어 보았다. 먹다 남은 보리차를 반쯤 담고 팅팅 불어터진 보리톨들이 강바닥에 나붙은 골뱅이처럼 깔려 있다. 냄새를 맡아보았다. 쉬지는 않은 것 같다. 가스불을 켰다. 파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탁자로 돌아와 한 자락 면을 걸어 넣었다. 보기보다 맛이 없다. 고량주 물점을 한 점 핥고 또 면을 걸어 넣어 보았다. 하지만 입맛이 당기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또 한 점 고량주물을 핥았다. 면을 다 비우도록 입맛이 쓰다. 남은 고량주물을 홀짝 핥았다. 주전자 물이 끓는다. 주머니 속에 챙겨 가지고 온 봉지 커피를 확인하였다. 탁자 위에 있는 컵에다가 봉지를 튿어 커피 가루를 비웠다. 커피 봉지를 돌돌 말았다. 끓는 물을 컵에 따르고 가스불을 끄고 돌돌 만 커피 봉지로 컵 속의 물을 저으며 소파로 돌아왔다. 술기가 알딸딸해 온다. 한 모금 한 모금 커피물을 머금으며 어딘지 날씨 같은 추진 마음을 달랜다. 전화가 운다. 벌떡 일어나 전화기를 들었다. 잠을 잤다.

"학교지요?"
대뜸 송곳 같은 여인의 지름소리다.
"예, 그렇습니다."
"오팔팔 선생 집 전화 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
여인의 목소리가 앙칼지다.
"우리 학교에는 오팔팔이란 선생님이 없습니다."
나도 조금은 퉁명스레 말하였다.
"애들이 노상 오팔팔 오팔팔 하는데 없어요?"
여인의 목소리가 한층 앙칼지다.
"오팔팔이 아니라, 천양리 선생님이십니다. 그런데 왜지요?"
나는 감정을 꾹꾹 눌러 가며 또박또박 말하였다.
"우리 집 애가 어제 나가곤 여태 안 들어왔어요. 애들을 어떻게 가르치기에 가출을 해요?"
맹랑하다.
"그런데요?"
"우리 집 아이하고 가까이 지내는 그 반 아이 좀 알아보려고요."
"예, 좀 기다리세요."
직원 주소록을 당겨 천 선생의 주소를 들추었다.
"여보세요. 3*7에 2397입니다."
"선생이란 사람이 오팔팔 같은 데나 다니니 애들이 그 모양이지."
"예?"
"애들이 선생 닮지 누굴 닮아요!"

빽 소리치고 전화가 뚜우 끊어진다. 머리가 또 찡 편두통이 인다. 빗소리가 창을 넘어든다. 나는 또 담배를 피워 물고 눈을 감았다. 한정숩니다./ 안녕하세요? 순범이 어머닙니다. 다름 아니라, 어저께 학교로 선생님을 찾아간다는 게 다른 반 선생님을 만나고 왔지 뭡니까? 오팔팔 선생이라고요...../ 그런데요?/ 그런데 어제 만난 오팔팔 선생님 반에도 정순범이란 학생이 있다면서요?/ 예, 있습니다. 3학년 2반이지요. 순범이가 제 이름과 반을 말하지 않던가요?/ 왜 안 했겠어요. 3학년 4반 한정수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그게 어떻게 됐냐믄요, 교무실에 들어섰더니 수업중이라 그랬는지 선생님이 한 분만 계시더라구요. 그래 다가가 정순범이란 학생의 어머니 되는 사람인데, 하는데 아, 순범이 어머니십니까? 제가 순범이 담임입니다. 여기 앉으시죠, 하고 의자를 내밀며 반기지 않겠어요./ 그래서요?/ 그래 앉아 이 얘기 저 얘기하고 봉투를 건네고 왔는데, 저녁에 우리 집 애가 왔길래 키 크고 안경 쓰고 구렛나루가 거뭇한 게 너희 담임 선생 잘 생겼더라 했더니만, 우리 담임은 키도 작고 안경도 안 끼고 구렛나루도 없고 똥배가 뽈록 튀어 나와서 별명이 맹꽁인데 혹시 3학년 2반 담임인 오팔팔 선생을 만나본 게 아니냐면서, 그 반에도 제 이름하고 똑 같은 정순범이란 아이가 있다 잖겠어요./ 그런데요?/ 오팔팔 선생님한테 가서 봉투를 돌려 받으시라고 전화 드리는 겁니다./ 제가 어떻게...... 어머니께서 돌려 받으세요. 그보다 전 절대로 봉투 같은 거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의 집 애도 그러긴 합디다만 괜히 그러는 척하지 돈 싫은 사람 봤나 캤더니만 우리 집 애도 그럴 거라면서 찾아가 보라고 하길래....../ 어머니께서 돌려 받으세요./ 제가 어떻게 준 돈을 돌려 달라고 합니까, 빈대도 낯짝이 있지? 꼭 돌려 받아쓰세요./ 알겠습니다. 돌려 받아 순범이 편에 보내 드리지요. 고량주 기운이 전신에 쏴 하다. 직원회 끝났습니까? 한 마디 물어 보겠습니다. 선생을 옆차기로 때려눕히고 발길질을 한 김동문이 오늘도 버젓이 학교를 활보하고 다니는데 어떻게 처리하실 지 교장 선생님과 학생 주임 선생님, 그리고 담임 선생님의 의중을 듣고자 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습니까?/ 퇴학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담임 선생님이 꺼리고 당사자 선생님 본인도 처벌을 바라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좀 더 두고 봅시다./ 뭘 두고 보자는 겁니까? 그냥 저냥 넘어가자는 겁니까?/ 누가 그냥 저냥 넘어가겠다고 했습니까?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어디 그게 그레 간단한 문젭니까?

삐그르르르 철겅. 현관문 소리에 잠을 깼다. 복도로 오르는 발소리가 들리고 드르릉 미닫이 소리가 가슴을 까뭉갰다.

"수고가 많습니다."
경비원 곽 씨다.
"아침엔 왜 늦었지요?"
곽 씨가 다가와 몸을 소파에 맡겼다.
"그렇게 됐습니다."
나는 소파에 묻힌 몸을 뽑아 올렸다.
교무실 쪽에서 또박또박 구둣발 소리가 다가온다.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5시가 10 분을 남기고 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죽은 듯이 잠을 잤다.

"한 분은 누구죠?"
"..........?"
"일직 교사 말입니다."
곽 씨가 나를 돌아보았다.
"주혜자 선생입니다."
나의 성대가 푸르르 떨렸다.
"새로 부임한 처녀 영어 선생? 벌써 들어갔나요?"
"교무실에......"
나는 귀찮았고, 겨우 입술을 놀렸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문께서 빼끔히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살짝 목례를 하였다. 나의 고개가 반사적 반응을 보였다.
"수고하세요."
그녀가 말하고 곧 돌아섰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들어가시게요?"
곽 씨가 그녀의 등에 대고 말하였다.
"녜, 수고하세요."
그녀가 다시 말하며 현관으로 내려섰다.
"안녕히 가세요."
곽 씨가 그녀의 등에 대고 커다랗게 소리쳤다.
그녀가 나가고 곽 씨가 담배 한 개비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비죽이 내밀린 담배 개비 하나를 뽑았다.
"한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곽 씨가 탁자 위의 성냥을 끌어당기며 나를 돌아보았다.
"마음이 아프답니다."
투덜거리고 나도 성냥을 끌어당겨 불을 붙였다.
"남을 가르치며 밥을 먹는다는 게 얼마나 보람 있는 삶이라고 마음이 아프다는 겁니까?"
"남을 가르친다는 보람이라구요?"
씨부리고 흘레질이라 해라, 속으로 너부죽거릴 때 곽씨가 허공에 연기를 풀어내고 나를 돌아보며 말한다.
"그나저나 각방을 쓴 것 같군요."
"신혼 부부요, 한방을 쓰게?"
나는 투덜거렸다.
"요새 사람들답지 않게 내외를 했다 그겁니까? 하하하하......"
곽씨가 하하거렸다.
"각방 쓴 것까지는 좋아요. 문까지 잠그고 있었다니까."
나는 미확인 사실을 이죽이었다.
"접근을 꺼렸다 그거군. 보긴 제대로 봤우. 나 같아도 그랬겠습니다. 하하하하......"
곽씨가 또 하하거렸다.
"농담이요, 진담이요?"
"나 언제 농담하는 거 봤어요?"
하다가 곽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농담이고...... 들어오다 보니 개놈 둘이 흘레붙어 있습디다. 하지만 누가 그 개놈들을 비난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생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라구요?"
나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건성 대꾸하였다.
"그래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요."
곽씨가 강조하듯 '다른 사람'에 힘을 주었다.

곽씨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나는 그녀를 떠나 보내기 위해 한동안 몸을 소파에 맡겼다가 손톱 밑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석이 어머니와 다방에서 만나기로 한 시각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형석이는 장동표한테 맞아 머리가 터졌고 일곱 바늘이나 꿰맸다. 형석이 쪽에서는 위자료 조로 200만 원을 요구한다. 아니면 고소하겠단다. 동표 어머니는 50만 원으로 중재해 보라지만 중재가 먹혀들지는 의문이다.

"들어가시게요?"
T씨의 수필집을 봉투에 넣는 나를 올려다보며 곽 씨가 말하였다.
"예, 수고하세요."
"수고 많았습니다."

곽 씨의 말을 뒤로하고 어딘지 그저 울적한 나는 현관으로 내려서서 벽에 기대어 둔 우산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그저 비다. 언제쯤 비구름이 걷힐까? 우산을 펴들고 운동장으로 내려서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생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던 곽 씨의 말을 되씹어 보았다. 선생은 그러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러고 있다는 뜻의 반어적 풍자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그 모두를 망라한 포괄적이고도 단적인 표현인가? 이놈의 신분, 그 무게는 얼마나 될까? 이 놈의 직업 팽개치고 구멍가게나 낼까? 중얼거리며 교문을 나서자니 그녀가 문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웬일일까? 의아해 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죄송해요. 전화 받으시느라 하루 종일 귀찮으셨죠? 혼자 조용히 생각해 봐야 될 심각한 고민이 있었어요."

그녀가 씁쓸한 표정으로, 그러나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하였다. 그랬었구나, 해지자니 불쾌감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고, 마침 포장마차를 본 나는 하루의 찜찜함을 풀 겸 그녀와 한 잔의 술을 나누고 싶었다.

"주 선생님, 대포 한 잔 하시겠습니까?"
나는 포장마차의 장막을 들추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녀의 팔을 포장마차 안으로 끌었다.
"아저씨, 홍합하고 소주 좀 주세요."
의자에 앉으며 술을 청하였다.
"아침엔 죄송했어요. 뻐쓰깐에서 소매치기 소동을 만났지 뭐에요."
그녀가 내 옆에 앉으며 말하였다.
"저도 소매치기 소동을 만나 늦었는데 같은 뻐쓰를 탔었군요."
담배를 후비적거릴 때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이게 뭔지 아세요?"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에 신문지 보따리가 들려 있다.
"학이에요.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묵묵히 세상을, 창공을 포르르 날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시는 선생님들을 용타고 우러르며 하루 종일 이 종이학들을 접었어요."

말하며 그녀는 신문지 보따리를 펼쳤다. 신문지 속에서 수십 마리, 아니 수백 마리는 될 듯한 종이학들이 수르르 쏟아져 나왔다.

"여기는 아무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더군요. 이 학들을 접으며 새학기부터 다른 직종으로 옮기느냐 마느냐로 하루 종일 고민했어요. 그런데 이 학들을 접다가 아이들에게 세상을 포르르 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 준다는 생각이 문뜩 들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단순한 생물학적 영위가 아닌 반딧불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비록 천칭에나 달릴 서글픈 무게지만 제 빛을 깜빡이잖아요. 너나 없이 자기 직업에 보람을 느낀다지만 결국은 남의 돈이나 긁어 주고 그 대가로 입에 풀칠이나 하기 위해 터덜거리다가 죽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 학교에 남기로 결론 봤어요. 이보다 더 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랬었구나, 그녀가 하루 종일 교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던 이유가 풀려지려는 때에 그녀가 또 말하였다.
"가다가 버리려고 했는데 이 학들, 개학하면 선생님 반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세요. 저도 나눠줄래요. 이 학들처럼 창공을 날 수 있는 날렵한 날개들을 달라구요......."

순간 흘레질 칠 뿐이라는 초라한 모습이 불식되면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보람이 조용히 일었고, 나는 속으로 뇌었다. 그래. 날개를 달아 주는 반딧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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