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 문부성에서 검정 중인 2002년 중학교 역사 교과서들이 일제히 `종군위안부'를 삭제하고 일본의 침략전쟁과 가해사실을 대폭 축소하는 등 개악됐다. 이 같은 역사 모독은 지난 82년 `역사 교과서 파동' 이후 채택한 `近隣 제국에 대한 배려(외국 관계 서술은 국제 이해와 국제 협조의 견지에서 배려한다)' 원칙을 깨고 양국간 화해무드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으로 우려되고 있다.
▲검정중인 중학 교과서 최근 일본의 `교과서에 진실과 자유를' 연락회 등 5개 단체가 밝힌 내용에 따르면 현재 검정 중인 7종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2002년 도입)는 기존 교과서(97년판)에서 일본의 침략상과 가해 규모를 대폭 축소·삭제해 버렸다.
`종군위안부'는 기존 교과서에 모두 기술돼 있지만 검정 신청본에서는 4종의 교과서가 이를 완전히 삭제했다. 나머지 3종도 내용을 축소시켰고 그 중 1종만이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동경서적은 현행 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로 강제적으로 전쟁터에 보내진 젊은 여성도 많았다'고 기술했지만 검정 신청본에서 완전히 삭제했다. 대서서적도 `조선 등의 젊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전쟁터에 연행했다' `강재로 징병당한 병사나 종군위안부에 개인보상을 추구하는 의견도 있다'는 기술을 완전히 뺐고 전후 보상을 요구하는 전 종군위안부의 시위사진을 없애 버렸다.
또 제국서원은 `전쟁에도 남성은 병사로서, 여성은 종군위안부로 차출돼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았다'는 기술을 삭제했다. 남경대학살에 대한 기술도 대폭 후퇴했다. 우선 남경대학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던 4개 사 중 2개 사가 `남경사건'으로 용어를 바꿨다. 본문에서는 3개 사가 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모두 `살해' 또는 `죽였다'라는 말로 순화했다.
또 현행본에서는 6개 사가 희생자수를 20∼30만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검정본에서는 일본서적, 청수서원 2개 사만 서술하고 있고 나머지는 `대량의' `많은'으로 모호하게 처리했다. 심지어 일본문교출판은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라는 각주까지 달고 있다.
항일운동을 탄압한 `三光작전'(다 태우고 다 죽이고 다 빼았는)은 5개 사가 기술했으나 남겨진 것은 일본서적 뿐이며 그 동안 교육출판만이 기술했던 731부대의 만행도 완전히 삭제됐다. 침략이라는 용어는 `진출' `지배' 등의 용어로 의식적으로 수정했다. 대서서적은 `제국주의 세계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라는 단원 제목을 `일청·일러 전쟁과 아시아 정세'로 고쳤으며 `일본은 조선 침략을 더욱 강행했다' `355만인의 일본병이 침략전쟁을 위해 해외에 출병했다'는 기술을 완전히 삭제했다.
동경서적도 `일본의 침략에 대해 조선의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내용을 없앴고 제국서원은 `아시아 사람들은 바로 일본의 침략행위에 환멸을 맛봐야했다'는 기술을 삭제했다. 교육출판은 제목에서 `일본의 중국침략'을 `제2차 세계대전과 일본'으로 처리했고 청수서원은 `근대일본과 중국·조선의 침략'을 아예 삭제해 버렸다.
대부분의 교과서는 한일합병 이후 일어난 3·1운동과 의병 봉기 등 조선의 저항을 의도적으로 축소했다. 동경서적은 `조선의 독립을 이루려는 운동이 이어졌다. 만주에서는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는 등 해외에서도 싸움을 계속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내용을 완전히 삭제했다. 또 조선신궁에 참배를 강요당하는 조선의 학생들(사진)을 없애고 황민화를 위한 신사참배에 관한 서술도 삭제했다.
대서서적은 `3·1 운동 시 일본정부는 헌병, 경찰뿐만 아니라 군대까지 동원해 진압했고 조선 민중의 8000명 정도가 사망했다'는 내용을 `일본정부는 경찰이나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다'는 것으로 축소시켰다. `어린이와…21'의 다와라 요시부미 사무국장은 "역사교과서의 개악은 일본 정부와 문부성의 압력에 의해 강요당한 것이 사실"이라며 "이는 국제공약을 공공연히 무시하는 처사이고 입으로만 전쟁을 반성하는 일본정부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 행위로서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역사학과 교수는 "한일간 우호협력이 아무리 중요해도 황국사관으로 회귀하는 일본의 태도를 묵과하는 일은 새 세기에도 한국의 역사를 짓밟고 더렵혀도 좋다는 것을 일정하는 꼴"이라며 "진정한 우호협력과 공존공영은 역사인식의 상호이해로부터 출발한다"고 강조했다.
▲日 고교 역사 교과서는 중학 역사 교과서의 개악은 2년 후로 다가온 고교 역사 교과서의 검정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다. 조금씩 개선돼 왔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 왜곡돼 있는 고교 역사 교과서도 20년 전으로 후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사용 중인 일본 山川출판의 `현대의 일본사' 등 7개 교과서는 과거에 비해 한국 관련 기술도 늘고 내용에 대한 개선도 어느 정도 이뤄졌다. 그러나 아직도 고대사에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서술하고 근대사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상을 축소·왜곡하는 부분이 남아 있다.
우선 이들 교과서는 고조선을 부정하고 있다. 고조선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는 대신 漢郡縣을 가장 처음에 등장시킴으로써 한국사의 상한선을 늦추고 한국 역사는 시작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은 것처럼 암시하고 있다. 즉, 實敎출판과 桐原서점 교과서에는 한국의 기원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고 동경서적 등 나머지 교과서에도 漢의 한반도 지배와 한문화 전파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기원전 10세기부터 시작된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일본의 야요이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조차 왜곡하는 부분이다. 임나일본부설은 고대 한일관계사 가운데 최대의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淸水서원 교과서를 제외한 나머지 교과서에는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369년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 진출해 6세기 중엽까지 백제, 가야, 신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지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여러 사료나 역사학자들에 의해 역사 왜곡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일본 식민주의 사관의 가장 큰 사례로 지적되고 있다. 이 같은 식민사관은 임진왜란에 대한 기술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산천출판을 비롯한 5종의 교과서는 임진왜란의 발발 원인을 `征明假道'에서 찾고 있다. 즉 `명의 정벌을 위해 조선에 길은 빌린다'는 일본의 요구를 조선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 침략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또 實敎출판 교과서에는 조선과 명의 군사, 양민들의 귀와 코를 베어 전공의 근거로 삼았던 귀무덤을 `풍신수길이 명과 조선의 군사들의 영혼을 위로한 곳'이라고 왜곡하고 있다. 또 근대사에서는 일본이 조선 진출을 위해 계획적으로 일으킨 운요호 사건에 대해 그 목적과 의도를 누락시키고 있다. 아울러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던 청일전쟁을 마치 불가피한 상황에 의해 발생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즉 `갑오농민전쟁이 진압된 이후에도 조선의 내정 개혁을 둘러싸고 청일 양국의 대립이 깊어져서 일어난 일'이라고 기술돼 있다.
이와 달리 일본 교과서에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일 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을사조약 등 일련의 조약 체결을 통해 1910년 한국의 주권을 박탈한 과정을 비교적 바르게 기술하고 있다. 또 다소 축소된 면도 있지만 식민지 정책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강제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등 진일보한 측면도 있다.
그리고 일본의 강제 징용과 징병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과 희생된 숫자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일군위안부의 실체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산천출팔을 비롯한 모든 교과서가 `젊은 여성들이 위안부로 전쟁터에 보내졌다'는 단 한 줄의 내용으로 처리하고 있어 일본의 비인도적인 범죄행위와 강제성을 전혀 지적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한국 정부와 학계의 노력으로 그나마 많이 개선된 고교 역사교과서도 언제 축소·왜곡될 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국교육개발원 한국바로알리기사업팀장 이찬희 연구위원은 "2년 뒤로 예정된 고교 역사 교과서 검정 과정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된다"며 "일본은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왜곡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후세에게 전달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