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교육을 전공하고 특수교육에 몸담았기에 나는 특수교육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방법이 무엇인지 찾고 고민하는 것뿐이었다.
처음 시골학교에 첫발을 딛었을 때, 교실에서 다 큰 아이들에게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에 열변을 토하면서 차츰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회의가 들었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운 대로라면 이 아이들도 분명히 조금 부족하지만 씨 뿌리고 김매어 추수하며 잘 살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로 많이 다니기 시작했다. 나물이름, 나무이름을 알려주고 밤을 주우며 숫자를 세고…. 그러던 중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나는 아이들과 농사일을 시작했다. 700여평의 텃밭에 온갖 종류의 작물과 채소를 심었다. 그 곳 시설관계자와 보육사들은 하나같이 혀를 찼다. 배추마저도 다 자라기 전에 속을 파먹는 아이들이 태반인데 무슨 토마토며 수박, 참외, 메론 농사까지 하냐고 비웃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 해 여름 그리고 가을, 그 곳 농작물은 아주 튼튼히 남았다. 농작물이 익으면 언제나 아이들과 함께 먼저 맛보았다. 항상 이 농작물의 주인은 바로 아이들 자신이란 것을 주지시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그 농작물을 지켜준 것이다.
호박 심어놓고 풀 뽑으라고 하면 호박만 골라뽑던 녀석들, 피망 농사짓는다고 옆순 따주라고 하면 윗순만 몽땅 따던 녀석들, 무공해 콩나물 키운다고 정확한 시간 맞춰 잠도 자지 않고 물주던 여자아이 세 녀석…. 그렇게 장화 신고 거름 묻혀 출퇴근하며 보낸 한해를 나는 잊을 수 없다.
서울로 직장을 옮긴 다음해 가을, 소포가 도착했다. 내가 아이들과 함께 비지땀을 흘린 그 곳에서 수확한 배가 두 상자나 가득 담겨 있었다. 보석보다 귀한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