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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슈3] ‘한강’을 읽다  .. “고통을 서로 나누는 게 사랑”

2024년 10월 10일 저녁 8시경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SNS에는 같은 뉴스가 도배되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파문은 순식간 일렁이며 크게 퍼졌다. 늦은 저녁 시작된 고요한 소란이 다음 날, 그리고 다음 날도 이어졌다. 모두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대단한 소식에 놀랐다. 한국 작가가 후보에 올랐다고 해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세태에서 김대중 대통령에 이은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이자,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온 것이다. 문화예술 예산을 삭감하고, 도서관 지원금을 대폭 줄이고, 불온서적과 블랙리스트 목록을 만드는 시국에 반갑고도 감동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2021년, 기다림 끝에 나온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밝힌 한강 작가의 말이다. 이 책으로 또, 그 이전의 책들로 작가는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인용한 작가의 말을 다시 들여다보면 읽는 이들을 향한 당부처럼 들린다.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로 여겨달라고 한다. 한 작품만이 아닌 모든 작품을 향한 말이면서 대중들에게 기대는 말이기도 하다. 

 

#01 _ 아프지만 읽게 되는 힘이 문장에 있다
한강의 소설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누군가는 읽기에 부담스럽다거나 힘들다고도 한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칼끝이 쇠를 긁거나 스치는 소리가 내 안에서 쟁쟁거린다. 고요 속에서 고통이 따른다. 활자로부터 통증이 전이된다. 공감각적 심상을 제대로 겨누며 매번 심장을 조준한다.


고요 속 통증은 멀고 먼 곳에서부터 밀려드는 파도 같다. 가슴속에서 내달려오다 이윽고 목울대로 차올라 와 시큰거리는 코와 눈으로 덮치는 파도. 작가는 어떤 세계와도, 어떤 시간과도 작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내지르듯 그러나 조용하게 낮은 음역대로 읊조리듯 글을 써나간다. 작가의 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지극한 사랑에’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을 헤아려 달라는 듯 조용하면서 단호하다. 결코 작별할 수 없는 사람과 사건, 시대와 그 모든 사랑에 대해 서서히 읊조린다.  


작가의 문장들은 끝끝내 맞닿은 좌절과 고통 속에서 흔들리듯 가물거리는 어떤 실체에 다다르려 한다. 아프지만 직시하며 아주 가녀린 희망 같은 것을 우직하게 끌고 간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글로써 표현하지 않은, 정확하게는 표현할 생각도 못 한 말들을 세세하게 나열한다. 서사 속에서 세밀하게 그리듯 나아간다. 소설 속 화자의 고통은 소설가의 통증이 되어 문장을 끌고 가는 힘이 된다. 이를테면 간병인이 3분마다 주삿바늘을 찌르기 위해 알루미늄 상자를 열 때 “진저리나는 소리”라고 말하며 독자의 눈언저리를 찌푸리게 한다거나, 잘린 손가락에서 본 ‘무서운 아픔’이 작품 전반에 뻗어나간다(<작별하지 않는다>, p.73, p.75).


가만가만 읊조리듯 나아가는 문장 안에서는 못 할 말이 없다. 세상에 진저리가 난 사람 같아 보이는 주인공, 초췌하고 기운 없고 어디가 아픈 사람 같은데 작가는 그의 삶을 끌고 간다. 소설 속에서 읽는 이와 작별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가 사력을 다해 끌고 가는 것만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가듯 문장에 이끌려 끝까지 읽고 만다. 아프지만 읽게 되는 힘이 문장에 있다. 

 

#02 _ 개인의 이야기지만 사회의, 국가의, 세계의 이야기다
한강의 소설은 이야기라 하기엔 아프다. 통증이 있다. 쓰는 이도 그러할 것이라 여겨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픔이 읽기를 멈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끝내 작가의 손끝을 따라가며 낮게 읊조리듯 나아가는 이야기를 계속 지켜본다. 개인의 이야기지만 사회의 이야기다.

 

사회의 이야기지만 국가의 이야기며 세계의 이야기다. 한 개인이 살아가는 시간 안에 상처와 고통은 사회와 떨어질 수 없다. 개인과 사회는 국가를 배제 시킬 수 없다. 국가는 세계를, 개인은 세계를, 세계는 개인을 서로 배제할 수 없다. 개인의 상처는 사회 안에서 온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아픔 안에서 깊어진다.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울부짖는 소리는 간신히 목 떨림을 최소화한 목소리로 뻗어 나온다. 


한강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깊은 고통을 들려준다. <채식주의자>에서의 영혜는 사회적 억압 속에서 억눌려 있던 욕망과 고통이 반항과 파괴로 이어진다. 개인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은 우리를 질문의 미로에 들어서게 한다. 작가는 언제나 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며, 언제든 쉽게 배일 수 있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인물의 내면은 외부세계로부터 상처받는다.

 

<희랍어 시간>에서처럼 낯선 문화에서의 이질적 상황과 외로움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우리는 절대 고독할 수밖에 없음을 각인시켜 준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지극한 사랑’이다. 사랑만이 문학이 가닿을 지향점이기에 특유의 감성적인 문체로 아픔도 유려하게 잡아끈다. 모든 문장은 끊임없이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에서 시작하며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조이는 듯 밀도 높은 묘사를 향해 간다. 작가의 가장 큰 특징이자 문장을 쓰는 태도이다.  


#03 _ 모든 작품이 차갑고 고요하다
한강의 글 속에는 ‘눈송이’가 자주 등장한다. 눈은 때로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처럼 제목에 가닿고, 이야기 전체의 흐름 속에서 날린다. 눈은 ‘갓 빻은 쌀가루처럼’(<소년이 온다>, p.98) 가볍게 날리고, 머리에 쌓였다가 물방울로 맺히고, 전조등이 비추는 밤의 허공에서 소금 가루처럼 날리고, 강풍과 함께 휘몰아치며 온 세상을 덮어버릴 듯 날린다. 


이야기 속에서 눈송이들은 상처를 보듬는 손길이 되고 때론 추위와 차가움 속을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마치 길을 잃은 행자를 위로하듯 시선을 잡아끌며 지금의 처지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주려는 듯. 불덩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잊은 듯 다시 살아내게끔 어딘가로 데려간다. 아름다움의 본연을 말하듯 하지만 하늘에서 지상으로, 어딘가로 흩어지는 본성에도 목숨을 상징한다. “따뜻한 애기 얼굴에 왜 눈이 안 녹고 그대로 있나.”(<작별하지 않는다>, p.111)라고 한 인선의 엄마처럼 눈송이는 꿈속에서 죽음의 공포로 상징되기도 한다.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군병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얼굴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살얼음으로 얇은 막을 쌓아 올려 이룩한 죽음의 상징이다. 


‘눈’은 눈송이로 가볍고 부드럽게 표현되기도 하지만 끝도 없이 생산되어 몰려드는 함박눈의 형상으로 공포를 대변하기도 한다. 마치 보이지 않는 책 너머의 누군가에게 고요히 항거하는 것만 같다. 죽음으로 내몰려야 했던 시린 뺨들에 입김을 불어 넣기 위한 생의 장치이자 아픈 역사의 항변을 문장 속에서 흩뿌리고 있다. 지극히 고요하고 정교하게 낱낱의 고통을 실어 생생히 들려주려 애쓴다. “이렇게 인간은 나약합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더욱 지켜져야 합니다.” 끊임없이 속삭이듯 문장 속에서 암시하고 어른거리는 혼들을 위로한다.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꼽은 ‘눈’을 인간의 존엄성에 빗대어 상징적 의미로 쓰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한강의 글은 차갑고도 친절하다. 친절한 문장은 세세하게 진술되나 다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마치 본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세밀한 표현으로 그려내지만 밀도 높은 문장은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외와 상처, 고통과 비극, 반항과 견딤의 진행에서 차갑고도 시린 세세함으로 문장을 채운다. 인간의 존재 탐구에서 비롯된 질문은 오밀조밀하게 그려낸 세계 안에서 하얗고 시린 분위기를 연출한다.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자 달려가는 과정일지라도 초췌한 풍경을 그린다. 그러나 실은 인간 본성을 짓밟는 거대한 억압에 억눌린 따스한 본성을 말하고 싶어 한다. 차가운 겨울은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따뜻한 존재인지를 확인하게 하고, 따스함에 닿는 차가움은 생에서 죽음으로, ‘나’에서 타자로, 개인에서 사회로 이어진다. 


눈송이는 세상 어디에나 조용히 내려앉는다. 우리는 가만가만 숨죽여 들여다본다. 볼에 닿는 눈송이처럼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눈송이의 온도가 스민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귀를 더 열게 하고 집중시키는 것처럼 흩뿌린 분위기는 읽는 이를 작가가 세운 질문 안으로 끝없이 내몬다. 마주하는 아픔은 독자의 몫이지만 때론 바람이기도 하고 열매이기도 하고 어떤 빛깔이기도 하다. 모든 작품이 차갑고 고요하다. 무거우면서도 묵직하고 섬세하다.

 

#04 _ 작가는 글로 말하는 자, 그래야만 살 수 있는 자
눈뿐만 아니라 글 속에는 새·혼·흰·어른어른·촛불·꿈 등의 말들이 자주 보인다. 작가의 내밀한 사유 공간 속에 깃든 정서를 유추하게 한다. 과거에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쓴다는 것을, 고통에서 구원으로 향하고 싶다는 것을, 아픔을 공유하며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작가는 <여수의 사랑>에 나온 “어디로 가든, 나는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라는 말처럼 그곳으로 간다. 


그곳은 제각각 다른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지만 같은 출발점이자 같은 맥락이다. 다른 이름으로 변주될 뿐 끝없이 내리쏟아지는 눈송이처럼 보이지 않는 비명을 들리게 하려 거듭 노력하며 나아가는 중이다. 상처에서 치유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미 2018년 광화문 교보에서 열린 낭독회에서 “되돌아 나가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왔다”던 작가의 말대로 깊이 들어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 그 깊이 안에서 스스로 등불을 켜고 어김없이 한 자 한 자 나아가는 중이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빛을 향해, 밝음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 자, 세심하며 고되게 쓰는 자, 대신 목소리를 빌어 말해주는 자이다. 작품 속 인물이 되어 몸을 빌려주고 그 인물이 되어 삶을 말한다. 어느 작품에서든 그러하다.


작가는 글로 말하는 자, 그래야만 살 수 있는 자,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통증을 느끼는 자, 씀으로 인해 마치는 것이 아닌 모두가 함께 완성을 꿈꾸는 자이다. 또한 작품으로서 애도하고 추모하고 죄스러워한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소설가이지만 시인으로 먼저 등단한 그녀의 시집 제목에도 들어간 ‘저녁’이란 단어가 유독 와 닿는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에 표기된 그 말의 의미를, 소설을 읽고 더 잘 알게 되는 이유는 ‘더 이상’이라는 말과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인간의 폭력성 앞에서 그 잔인함 앞에서 나약한 생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일관된 시선과 태도를 본다. 작가는 인간존재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인간에 대한 존엄성으로 귀결시키며 고통에 닿은 구원을 그려낸다. 나약하기에 더 지켜져야 할 인간성. 어떤 글을 쓰든 모든 작품은 이어지고, 쓰는 한은 계속 강조될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고통을 서로 나누는 게 사랑”이라고 말한 것처럼 작가의 바람대로 모두가 사랑이었다. 그 ‘지극한 사랑’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노벨문학상을 축하하는 수많은 물결에 작은 방울 하나 보태 크게 축하한다.

 

권지영 시인·작가 / 저서로는 <아름다워서 슬픈 말들>, <누군가 두고 간 슬픔>, <푸른 잎 그늘>, <너에게 하고픈 말>, <천개의 생각 만개의 마음; 그리고 당신>, <행복>,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너에게>, <달보드레한 맛이 입 안 가득>, <전설의 달떡>, <팔랑팔랑 코끼리>, <하루 15분 초등문해력>, <봄>, <여름>, <가을>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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