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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괜찮아. 내가 알고 있네

영화 <덩케르크> _ Where the hell were you?(당신은 대체 어디 있었나?)
#1940년, 덩케르크 철수 작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5월, 독일군은 파죽지세였다. 프랑스·벨기에 국경지대에서 연합군의 방어선은 처참하게 깨졌고, 독일군은 그대로 영국해협을 향해 돌진했다. 퇴로가 막힌 수십만의 연합군은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독 안의 쥐처럼 갇혔다. 몰살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영국 육군 원수 고트 경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일단 병사들을 살려야 했다. 덩케르크에 고립되어 있던 연합군의 대부분은 영국군이었고, 이들은 당시 영국 지상군의 실질 주력이었다. 이들이 몰살당하면 영국군은 재기불능이 될 터였다.

 

독일 공군의 비행기가 끊임없이 폭격을 퍼붓는 가운데, 마침내 연합군의 철수작전이 시작되었다. 하늘에서는 연합군의 비행기가 독일 공군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동안, 4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지상에서는 목숨을 건 대규모 탈출이 감행되었다. 

 

#33만 8천 226명. 
이 작전으로 당시 유럽에 파견되었던 영국군 22만 6,000명과 프랑스·벨기에 연합군 11만 2,000명은 믿기 어려운 최소한의 희생만 치르고 영국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연합군은 이후 전력을 재정비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다.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철수 작전은 영국 역사에서 두고두고 ‘덩케르크 정신’으로 되새겨지고, 훗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 의해 영화 <덩케르크>로 되살아난다.


#죽지 않고 귀국한 공군 장교에게 일개 병사가 던진 조롱
9일 동안의 철수 작전을 통해 영국에 도착한 군인들은 열렬한 귀국 환영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승리하지 못했다고 해도 이 기적과도 같은 철수로 30만 명이나 되는 이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무사히 고국 땅을 밟은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영국 국민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영화 <덩케르크>에서는 이 역사적인 장면을 다음과 같이 그린다. 

 

영국으로 귀국하던 군인들의 행렬 안에서 한 육군병사가 장교 콜린스(배우 잭 로던)의 공군 군복을 본다. 그 병사는 대놓고 콜린스에게 비아냥댄다. Where the hell were you?(당신은 대체 어디 있었나?)

 

우리 육군이 죽을 똥을 싸며 고생하고 있을 때, 너희 공군이 한 건 대체 뭐가 있느냐고 이죽거린 것이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귀국했다고는 하지만 콜린스는 엄연히 장교였다. 소속은 다르다지만, 장교의 면전에서 일개 병사가 조롱한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하는 하극상. 일개 병사의 눈에 비친 공군은, 모두가 죽기 살기로 싸우던 지옥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조롱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교사의 ‘위대한 일상’은 보이지 않는다.
#덩케르크의 하늘엔 공군이 있었다.
눈앞의 총탄과 독일군의 폭격이 공포스럽기만 한 덩케르크 해안에서는 먼 하늘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가 보일 리 없다. 만약 독일 폭격기가 영국 공군기를 격추시키고 해안으로 달려와 폭탄을 떨어뜨리면 육군은 몰살당하고 차가운 바다는 잠수함의 무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영국 공군이 하늘을 지키는 동안은 사방이 평화로울 수 있다. 그걸 모르는 병사가 콜린스에게 욕을 한다. 심지어 콜린스는 연료가 바닥나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독일 폭격기를 막아내다 바다에 불시착했고, 불시착한 비행기가 폭발하기 전 탈출해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목숨만 건져 돌아온 영웅인데 말이다. 

 

우리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 너희 공군은 ‘그곳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때 덩케르크에서 자신의 선박 문스톤(Moonstone)호를 몰고 군인들을 구조했던 도슨 씨(마크 라이런스)가 콜린스의 어깨를 다독인다. 
“괜찮아. 내가 알고 있네.”

 

도슨 씨의 말처럼 대부분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덩케르크의 하늘엔 공군이 있었다.

 

#뭐든 학교교육이 문제라고 한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무슨 일만 터지면 학교교육이 문제라고 한다. 뭐든지 학교에서 안 가르쳐서 그렇단다. 그러니 일만 터지면 ‘교육 분야’만 빼고 다른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께서 나서서, 유독 자기 전공이 아닌 ‘교육’문제를 놓고, 행여 자기만 빠질세라 숟가락을 얹어가며 침을 튀긴다.

 

이것도 가르치고 저것도 가르치라며 온갖 것을 끼워 넣으라고 내려 보내니, 현장의 교육과정은 온통 누더기로 변한다. 학교현장에 문제라도 생기면 ‘선생님들은 뭐 하고 있었느냐’고 인터넷 댓글창은 쑥대밭이 된다. 막상 진짜 원인으로 작동하는 가정이나 사회 그리고 유관기관은 팔짱끼고 느긋할 때가 많은데 말이다. 


그러면서 정작 정책을 만들거나 전문가 의견이 필요한 자리에는, 설령 그것이 초·중·고 현장과 관련한 문제일지라도 교수나 사교육 종사자를 부른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있는 현장 선생님들을 불러 의견을 묻는 경우는 그다지 본 적이 없다. 

 

#교사의 위대한 일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늘도 아침을 거른 채 헐레벌떡 출근해 학급 조회부터 들어갔다. 출결부터 확인하고 교실에서 나오자마자 등교하지 않은 아이들 부모님에게 전화 거느라 정신이 없다. 아이도 부모님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1교시 수업이 있으니 하는 수 없이 신호음만 울리는 전화는 끊고 수업부터 들어갔다.

 

연속으로 두 시간 수업을 하고 나오니, 한 아이가 울면서 교무실에 와있다. 성적 문제인가 싶어 달래가며 물어보니 부모님이 자꾸 원하지도 않는 간호대에 가라고 이공계 진학을 강요한다는 거다. 자신은 수학도 싫고, 과학도 싫고, 간호대는 죽어도 가기 싫단다.

 

그러고 보니 1차 과목 선택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방과후에 다시 상담하자며 일단 수업에 들어가라고 달랬다. 기억하기로 이 학생은 진로검사에서도 인문계열, 그것도 어문계열이 나왔던 걸로 안다. 부모님 상담까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을 쉬며 연 컴퓨터 업무시스템에서는 굴비 두름처럼 공문이 주르륵 쏟아진다. 어째 공문이라고 하는 것들은 해마다 없어지거나 줄어들지는 않고 보태지고 늘어나기만 하나, 머리가 어지럽다. 오른쪽 창에 띄워놓은 쿨메신저에서는 붉은색 숫자가 열 몇 개를 표시하고 있다.

 

그 잠깐 사이에 읽어야 할 업무관련 메시지가 최소 열 개는 넘게 들어와 있다는 말이다. 첫 번째 메시지는 중간고사 시험 문제지를 언제까지, 어떻게 제출하라는 안내다. 3월 시작하자마자 계속된 학기 초 학생상담으로 매일 야근까지 하면서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늘어져 퇴근하던 게 며칠 전 겨우 끝났다. 그런데 중간고사 시험문제 출제가 코앞으로 닥친 거다. 

 

스승의 날, 오히려 나는 도슨 씨가 그립다.
이렇게 하루하루 분초를 다투며 살아도, 입에서는 단내가 나게 뛰어도, 나는 일개 평범한 교사다. 특별히 주변 동료교사들보다 더 열심히 사는 것도 아니고, 더 뛰어난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내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교사로서 주어진 일상을 겨우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일반계 고등학교 교사로 눈에 띄지 않고 근무하다가, 은퇴하면 모두의 기억에서 조용히 사라져 갈 것이다. 


이런 내게 ‘스승의 날’을 맞아 지금의 우리가 본받을 만한 위대한 스승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잠시 눈을 감았다. 인류의 스승이라 할 만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많은 이들이 스쳐 갔다. 지금의 대한민국에도 사표(師表)로 떠오르는 분들은 많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발붙이고 있는 학교현장, 바로 내 옆에 있는, 나와 같은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동료교사들보다 그들이 더 위대한지 확신할 수가 없다.

 

‘위대한’, ‘존경받을 만한’, ‘영웅’이라는 말은 언제나 ‘일상’을 기반으로 한다. 그 일상을 탄탄하게 지탱하고 있는 자가 곧 영웅이다. 덩케르크 해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았던 공군의 활약으로 역사적인 철수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듯, 위대한 대한민국의 기반은 평범한 선생님들이 일구어 지탱하는 학교현장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학교현장이 무너지는 순간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다. 그나마 우리 사회의 건강함은 공교육에서 나오고, 공교육은 교사들의 헌신을 먹고 버틴다. 아침부터 늦잠 자서 학교에 오지 않는 학급 아이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옆자리 동료보다 더 위대한 스승을 찾는다는 건 어쩐지 부질없다. 


그러니 스승의 날을 맞아 본받을 만한 위대한 스승이 그리운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도슨 씨가 그립다. 한 명의 도슨 씨가 아닌, 여러 명의 도슨 씨, 아니 수많은 도슨 씨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깨를 다독이며 우리 선생님들에게 이 말을 해주는 도슨 씨가 그립다. 

 

괜찮아. 내가 알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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