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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합격한 박수빈 선배, 후배 찾아 꿈 이야기 각종 체험학습 보고서 쓰기, 독후감 쓰기, 영어표현력 경시대회, 생각나무 키우기'에서실력 발휘 학교 수업을 충실하게 하기 중학생 시절은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해야 한다. 이는 꿈을 정하고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꿈이 없으면 힘을 낼 수가 없다. 동기부여가 안되기 때문이다. 꿈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순천동산여중은 다른 학교보다 먼저1학년 2학기를 '자유학기제'로 실시했다. 이 기간에는 다양한 진로체험을 통하여 자신의 꿈을 찾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만일 찾지 못하였다면 아직도 늦지 않으니 탐색 작업을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26일은 특별히 순천동산여중을 2015년 2월에 졸업해 이번 대입에서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게 된 박수빈 학생이 학생들에게 자신이 중학교 생활 중 어떻게 공부하였으며, 후배들에게 어떻게 중학교 생활을 잘 보낼 것인가에 대해 알려달라는 초청을 받아 1학년 4반 교실,27일은 1반, 3반 교실을 찾았다. 남은 2년간이 인생의 진로 결정을 하는 중요한 기로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한 시간 동안 질문하고 답하기를 통해 진로 탐색을 하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 ▲ 순천동산여중 3년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이 있다면? - 중학교 생활둥 꼭 공부에만 신경 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전체 석차가 5등이 된 적도 있었다. 운동도 좋아하여 피구동아리에 들어가 건강하게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주어진 학교 수업 시간을 가장 소중히 하여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중학교 때 실천한 공부 방법을 소개한다면? - 대부분 성적 우수한 학생들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가장 먼저 학교수업에 충실하고, 수업중 한 번도 잠을 잔 적이 없었다. ▲ 서울대학교 진학을 결정하게 된 동기와 고교 공부 중 가장 힘든 것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 처음에는 서울대에 대한 생각이 부족하였는데 고등학교에 가서 밀알장학생 선배들을 만나면서 서울대 진학에 대한 꿈이 생겼고, 힘든 시간이 많았지만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격려를 많이 받았다. ▲ 지금까지 공부가 힘들었을텐데 진로결정에 가장 도움을 준 분이 있다면 소개하여 주시길? - 특별한 분이 아닌 중학교에서부터 선생님과 관계를 좋게 하여 선생님들의 격려가 많았던 것 같았다. 중학교 3학년 때 밀알장학금을 받고 더욱 열심히 해야하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 관내 입학 초등학생들에게 순천동산여중의 좋은 점을 소개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 순천동산여중은 현재 내가 다니는 순천매산여고 보다도 운동장을 비롯하여 학교 내부 시설이 너무나 좋다. 하지만 주변 초등학교 학부모나 학생들이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는 것이 안타깝다. 현재 재학생들이 자신이 다니는 학교를 후배들에게 잘 소개하여 순천동산여중이 좋은 학교로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재학생 모두가 노력을 하면 좋겠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서 입소문이 나게 해야 한다. ▲ 미래의 꿈을 소개하여 주신다면? - 중학교 때는 약사가 되는 꿈을 꾸었지만 점차 생명과학에 대한 관심이 커져 생명바이오소재학과를 진학하게 되었다. 장차 의료치기를 만드는 연구자의 길도 생각하고있다. 꿈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순천동산여중은 다른 학교보다 먼저1학년 2학기를 '자유학기제'로 실시했다. 이 기간에는 다양한 진로체험을 통하여 자신의 꿈을 찾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만일 찾지 못하였다면 아직도 늦지 않으니 탐색 작업을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박수빈 학생(순천매산여고 3학년)은 순천동산여중 재학중 이 제47기 학원밀알장학생으로 선발돼 고교 3년간 연 200만원과 대학입학준비금으로 300만원 총 900만원의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하게 돼 순천지역에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학생은 평소 학교생활에서 '각종 체험학습 보고서 쓰기, 독후감 쓰기, 영어표현력 경시대회, 생각나무 키우기'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졸업할 당시 꿈은 “약사가 되어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앞으로 ‘희망을 주는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이 꿈 ”이라고 했다.
경북 문경공고(교장 함종환)는 매력적인 직업계고 육성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2일 문경새재(경북 문경시 문경읍 소재)에서 1, 2학년 재학생 210명을 대상으로 사제동행 문경새재 둘레길 걷기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매직(매력적인 직업계고)사업 중 핵심프로그램인 비젼을 제시하는 학교, 흥미롭게 경험하는 실전수업, 머물고 싶은 행복 공간, 이웃과 함께하는 학교 만들기와 학업중단 예방 및 건전한 성장 발달에 도움을 주고, 위기 학생 및 부적응학생들의 심신을 정화하고 또한, 사제동행 문경새재 둘레길 걷기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의 지속적인 관리와 잠재력을 개발하고 학교적응력을 높이고자 인성교육 실천차원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되었다. 본 프로그램 주요 미션으로는 학급별 단체사진 찍기, 신길원 현감 충렬비 인증샷 찍기, 산불됴심비 인증샷 찍기, 시가 있는 옛길에서 시비(시가 새겨져 있는 비석)인증샷 찍기, 문경새재 민요비 인증샷 찍기, 주막 인증샷 찍기 등을 통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참여도를 크게 높이는 한편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여 푸짐한 상품을 시상하기도 하였다. 함종환 교장은 본교가 2017 대한민국 미래학교박람회 참가학교 선정과 더불어 2017 학업중단 예방 우수학교에 선정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모든 교직원이 학생 인성교육 실천을 위해 함께 노력한 결과이며, 향후 본교가 글로벌 BEST 특성화고로 자리메김하기 위해서는 교육청과 학교운영위원회, 동창회, 유관기관 등을 비롯하여 지역사회의 성원이 필요하며“모든 구성원이 다함께 Go Together”하자고 힘주어 말하였다.
경북 문경공고(교장 함종환)는 매력적인 직업계고 육성 및 생활지도 특별지원학교 어울림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학교폭력 예방활동 및 인성함양을 위해 1일부터 28일까지 약 한 달간의 긴 시간에 걸쳐 전교생을 대상으로 매력적이고 다양한 사제동행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동장군처럼 꽁꽁 얼어붙은 학생들의 마음을 활짝 열고 있어 주위로부터 크게 주목받고 있다. 매직(매력적인 직업계고)사업 중 핵심프로그램인 비젼을 제시하는 학교, 흥미롭게 경험하는 실전수업, 머물고 싶은 행복 공간, 이웃과 함께하는 학교 만들기와 학업중단 예방 및 건전한 성장 발달에 도움을 주고, 위기 학생 및 부적응학생들의 심신을 정화하여 학생들에게 자존감을 높이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글로벌 산업인재를 육성하고자 인성교육 실천차원에서 본 매직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되었다. 본 사제동행 주요 프로그램으로는 첫째, 사제동행 학교폭력 예방 UCC공모전, 둘째, 사제동행 도자기 빗기/굽기 체험, 셋째, 사제동행 학교폭력 예방 골든벨 대회, 넷째, 사제동행 문경새재 들레길 걷기 등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참여하게 됨으로서 사제지간 정이 싹트고 학생들 간에도 우정이 쌓아져 천년지기가 되는 디딤돌이 되었다고 하였다. 함종환 교장은 본교가 2017 대한민국 미래학교박람회 참가학교 선정과 더불어 2017 학업중단 예방 우수학교에 선정되어 경상북도교육청 이영우교육감으로부터 우수상과 표창패를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모든 교직원이 학생 인성교육 실천을 위해 함께 노력한 결과이며, 향후 본교가 글로벌 BEST 특성화고로 자리메김하기 위해서는 교육청과 학교운영위원회, 동창회, 유관기관 등을 비롯하여 지역사회의 성원이 필요하며“모든 구성원이 다함께 Go Together”하자고 힘주어 말하였다.
교총은 학생 성추행 누명으로 자살한 전북 교사, 학부모의 요구대로 학생을 휴게소에 내려줬다가 아동학대로 몰린 대구 교사 등에 소송비를 지원한다. 교총 교권옹호기금운영위원회는 1일 심의를 통해 올 하반기 교권침해 23건에 대한 소송비 4750만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14일 해당 시도교총에 소송비 보조금 신청에 대한 심의결과를 통보했다. 이에 따르면, 지난 8월 학생 7명에 대한 성추행 누명으로 자살한 전북 부안 송 모 교사의 유가족이 전북교육청과 전북학생인권센터 관계자들을 상대로 형사 고소한 사건에 대해 소송비 300만원을 지원한다. 유가족은 무리한 조사와 비상식적인 행정처분으로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했다며 고소했다. 또 ‘휴게소 방치’ 사건으로 알려지며 교육청으로부터 직위해제 처분을 받고 학부모로부터 아동복지법 위반으로 형사 피소된 대구 초등 교사에 대해서도 소송비 500만원을 지원한다. 체험학습을 가는 도중 6학년 여학생이 복통을 호소하자, 갓길에 버스를 세울 수 없어 버스 안에서 용변을 보게 하고 학부모 요구대로 휴게소에 학생을 남겨뒀는데, 학부모가 아동학대로 민원을 제기해 수사를 받고 있는 건이다. 이외에 수업 태도가 좋지 않아 교실 뒤에 서있으라고 한 경기 A초 교사에 대해 학부모가 아동학대로 고소한 사건, 학생 간 다툼으로 부상을 입은 학생의 학부모가 원만한 화해가 이뤄지지 않자 학교장과 담임교사, 가해학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민사소송을 제기한 사건에 대해 각각 소송비 250만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교총은 학교안전사고, 신분 피해, 학부모와의 분쟁 등으로 소송이나 행정절차를 진행하는 교총 회원에 대해 변호사 선임료를 보조해주고 있다. 소송에 대해서는 심급별로 500만원 이내로 3심까지 최고 1500만원, 교원소청심사나 행정심판 등에 대해서는 200만원 이내에서 지원하고 있다.
겨울 햇살이 창가를 통해 들어오고 있다. 푸른 하늘이 보인다. 바깥 날씨는 완전무장을 하고 나가야 견딜 수가 있다. 이런 날씨 속에서도 학생들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선생님? 학생들의 질의에 정확하게 대답하는 선생님이다. 오늘 길음 주변에 있는 농협은행(중앙회)에 볼 일이 있어 찾아갔다. 한 분에게 물었다. 주변에 농협은행이 있는지 물었다. 없다고 대답했다. 분명 길음 주변에 있는 것을 네이버로 검색을 했는데 없다고 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지 없다고 하니 더 힘들었다.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선생님이 학생들의 질의에 모를 때도 있다. 그러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 빙 둘러 더 헷갈리게 만들면 안 된다. 길을 가다가 아파트 청소하시는 분에게 물었다. 가르쳐 주셨는데 대충 알아들었을 뿐이다. 선생님이 학생들의 질의에 확실하게 알아듣도록 해야지 대충 알게 하는 것도 안 된다. 또 물어야 했다. 친절하게 가르쳐주기는 하는데 농협은행과 단위농협을 혼돈하고 있었다. 즉 정확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어물어 찾아가니 농협은행이 아니고 단위농협이었다. 혹독한 날씨 속에 걸어가니 다리는 무겁고 또 실망했다. 들어가니 입구에 한 직원이 있었다. 농협은행이 어딘지 물으니 찾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8단지 주변이라고 했다. 8단지가 찾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농협은행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선생님의 정확한 지식의 전달이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무엇을 물어도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선생님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친절한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이다. 이제 길음역을 가는 길을 묻게 되었다. 한 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반면에 어떤 분은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학생들에게 친절하게 질의에 답변을 해주어야 하겠다. 애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면 그 다음부터 질문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좀 더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할 것 같다. 나이 많은 사람이 지나가면서 길을 묻곤 하면 아주 친절하게 갈 길을 안내해 주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경기 안산서초 책나래 봉사단 어머니에서는 18~21일 ‘선생님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연극을 도서관에서 공연하였다. 연극은 기본생활습관을 형성해야하는 저학년 아동들을 대상으로 학교생활 중 공감하기 쉬운 내용을 코믹하고 기발한 요소들을 넣어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공연에서 다양한 표정과 몸짓, 목소리로 실감나게 연기하기 위해 어머니들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일 모여 약 45일간 연습을 했다. 연극소품부터 대본각색까지 모두 어머니들이 손수 준비하였다. 이번 연극은 어머니들이 해설부터 실감나는 연기까지 완벽히 소화해 아이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문화 체험 소외 계층의 아이들도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연극을 관람한 학생 이○은 “엄마들이 책을 보고 따라하니까 책을 읽는 것보다 실감나고 재미있었어요.”라고 말하였다. 관람한 교사 이○은 “어머님들의 연기 수준과 극의 완성도가 높아 아이들의 몰입도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연극이라는 장르가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도 재미있게 관람한 것 같습니다. 어머님들께 감사합니다.”라고 전했다.
며칠 전 내가 회장을 맡고 있는 교원문학회 동인지 ‘교원문학’을 잡지로 정식 등록했다. 2016년 창간호에 이어 지난 5월 ‘교원문학’ 제2호를 발간한 걸 생각하면 좀 더딘 행보라 할 수 있다. 이것저것 서류 구비하는 것도 번거로웠지만, 어차피 만만찮은 교원문학회 운영비를 감당할 요량으로 창립하고 회장도 맡아서 그런지 굳이 등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교원문학’을 잡지로 애써 정식 등록한 것은 도의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에 신청하기 위해서다. 시에 잡지 등록이 되어 있어야 신청 자격이 주어지는 것을 비로소 알게된 것이라 할까. 교원문학상은 그렇다쳐도 ‘전북고교생문학대전’같이 이런저런 문학회보다 한 발 나아간 활동을 하고 있는데, 탈락할 이유가 없다는 은근한 자신감도 작용했지 싶다. 이를테면 곧 있을 2018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 신청 준비를 나름 마친 셈이다. 이제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사업 신청후 결과를 기다릴 일만 남게 되었지만, 다른 문학회에 대한 부러움이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것은 동시에 교원문학회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하다. 다름이 아니다. 교원문학회 회원 수가 다른 문학회에 비해 너무 적음을 새삼 깨닫게된 것이다. 속된 말로 ‘쪽수’가 중요한게 아니라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문학상 시상식을 참석하거나 이런저런 동인지들을 받아보면서 절로 든 생각이다. 가령 시인들은 전북시인협회 회원들이다. 회지 말미에 실린 회원 주소록을 보니 230명이 넘는다. 수필가들은 전북수필문학회 회원들이다. 나 같은 평론가나 시인들도 회원으로 있지만, 그 수가 150명이다. 장르 불문한 ‘한국미래문화’ 회원은 타지 116명을 포함해 250명이 넘는다. 그것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한국미래문화’ 제28집은 기존 ‘한국미래문학’에서 제호를 바꿔 새롭게 출간된 회지다. 제호뿐 아니다. (사)한국미래문화연구원은 회원 가입 유무를 물어 회원제 문화예술단체로 새롭게 출발했다. 이전에 없었던 회비납부의 의무가 회원들에게 지워졌음은 물론이다. 나 역시 가입을 희망해 회원이 되었는데, 그 주소록을 꼼꼼히 살펴보니 일종의 의문이 생긴다. 내가 교원문학회 가입을 권했을 때 거절했던 교원문인들이 상당수 있어서다. 그 의문엔 두 가지 답이 가능할 수 있다. 먼저 회비다. ‘한국미래문화’ 일반 회원 회비는 1만 원이다. 반면 교원문학회 연회비는 5만 원이다. 입회비도 따로 5만 원을 내야 한다. 다른 하나는 회장에 대한 불신이나 비호감일 수 있다. 지난 해 교원문학회 창립 당시 회원은 20명이었다. 아쉬워하면서도 회원 수가 증가하길 고대(苦待)했던 발간사와 달리 제2호를 펴낼 때는 오히려 1명이 줄어든 19명이었다. 3명이 탈퇴하고 2명이 새로 들어온 결과다. 정기총회 안건중 하나로 심도있게 회원 배가 논의를 했을 정도다. 온전한 파악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전⋅현직 교원 문인은 도내에만 100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100명만 잡아도 그중 20%가 채 안 되게 참여한 교원문학회다. 이건 문제가 좀 있지 않나? 시인이면 자연스럽게 전북시인협회 소속이듯 전⋅현직 교원은 자동으로 교원문학회 회원이 될 것이란 아전인수적 착각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그것을 깨닫는 지금 참 서글프다. 그럴망정 최근 저서나 회장으로 있는 동인지를 보내준 교원문인들에게 감사 인사와 함께 교원문학회 가입 안내문을 보냈다. 설마 전⋅현직 교원임을 밝히기 꺼려 교원문학회 입회를 안하는지 너무 ‘쎈’ 회비 때문 망설이는지 알 수 없지만, 이대로 안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렇다. 교원문학회 새해 소망은 회원 수가 많이많이 늘어나는 것이다. 교원문학회는 여느 문학회와 다르다. 선생님으로서의 자부심을 뿌듯하게 가진 채 문학활동하는 교원만 회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문학회여서다. 한교닷컴 이용 전⋅현직 교원 문인에게도 동참을 권한다. 입회는 입회원서 없이 입회비 납부로 완료된다. 현재는 전북도내 전⋅현직 교원 문인들이 주축이지만, 교원문학회는 원칙적으로 전국 문학회임을 표방하고 있다. 회지 ‘교원문학’이 필요하거나 입회 뜻이 있는 분은 연락바란다. 연락처는 메일 yeon590@dreamwiz.com, 손전화 016-654-9593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꿈꾼다. 행복은 누구나 원하는 삶의 가지로서 행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은 정말 행복합니까?”라고 물어보면 과연“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한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고 남들이 안 된 것을 이야기하며 불행을 즐기려는 생각이 있는 한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사랑을 줄 때는 아무 조건 없이 진실 된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한다. 최근 일본에서 은퇴한 60대 여성을 대상으로 행복에 관한 여론조사를 한 결과 행복한 사람을 공부를 시작하거나 취미활동을 하거나 남을 위해 나눔과 봉사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란 보고가 있었다. 오늘 당장 먹고 잘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행복하다. 행복도‘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 같다. 파티나 연회에서 나온 음식은 음식이 아니라 작품을 내놓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게 되고 격식과 매너를 지켜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맛있는 식사를 하기 힘들다고 한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배고프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보람 있는 일에 육체노동을 하고 땀을 흠뻑 흘린 후에 가장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타인의 재산, 행복, 용모를 더 부러워하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더 가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요즈음 드라마나 방송에서는 더욱 더 그러한 것 같다. 자꾸 누군가를 의식하면서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데 정작 그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을까? 궁금하다. 요즈음은 바쁘지 않게 사는 사람들이 비정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출세, 성공, 일중독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을까? 진정한 행복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원만한 대인 관계를 유지 할 때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진정한 행복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하며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길 때 가능하다. 어릴 적 모습처럼 새해에는 순간순간 순수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냐. 영임이가 날 보고 웃잖아.” 하자, 영임이가 다시 낄낄거리면서 “너 이마에 흙탕물을 잔뜩 뒤집어썼어.” 하였다. 이 말에 아이들은 모두 우리 쪽을 바라보고서는 승희의 이마에 팔뚝으로 문지른 자국이 흙투성이 인 것을 보고 한 바탕 웃음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승희가 울상이 되어서 “왜에. 얼굴에 뭣이 묻었는데?” “얼굴이 아니라 이마에 흙이 묻었다구.....” 내가 대답을 해주자 승희는 그제야 웃으면서 “넌 안 묻은 줄 알고, 너희들도 다 묻었어. 옆에 사람에게 물어봐.” 하며,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약 4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이미 일이 끝난 아이들이 잠시 쉬었다가 다른 사람의 줄을 잡아서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형주는 어느 새에 자기 줄을 널펀하게 다 베어 눕혀 놓고서 선생님의 두둑을 거꾸로 베어 오고 있었다. 문섭이도 다 베고 나서 가장 길게 남은 승희의 줄에서 중간에서부터 베어서 도와주고 있었다. 우리는 1학년 입학을 해서 졸업을 하도록 까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같은 반에서 그대로 올라가기 때문에 모두 한 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만약 한 동네에 사는 여자아이가 아파서 걷지 못할 만큼 심하면 남자아이들이 들쳐 업고 달려갈 만큼 우리들은 남자, 여자를 따지고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에서나 남자니 여자니 따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었고, 이렇게 도와주어도 어느 누구도 흉을 보거나 이상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같은 학급의 친구일 뿐이었고, 서로 도와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커다란 논의 보리 베기가 끝나기까지는 불과 2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찌나 열심히 베었든지 모두들 말을 하는 것도 잊은 듯했다, 승희네가 몇 마디 하는 사이에 웃음꽃을 피운 것이 전부였다. 선생님도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서 주르르 흘러내리고 등줄기를 타고 내린 땀이 흘러 내여서 바지의 허리띠 부근이 흠뻑 젖어 있었다. “자, 잠깐 쉬자, 우리가 벤 것이 450평이라는데 꼭 25분이 걸렸나보다. 이렇게 하다보면 오늘 너무 많이 베게 될 것 같은 데 걱정이다 너무 힘을 빼지 말아라. 하루 종일 베려면 안 된다.” 하시면서, 논둑에 걸터앉으셨다. 나는 그냥 쉬는 것보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자고 생각해서 “ 산 위에서 부는 바람......” 하고 노래를 시작하였다. 모두들 따라 불러 주어서 금세 음악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다음 논으로 가서 자기가 맡을 줄을 잡으면서도 계속 노래를 불렀다. 어쩐지 신이 나고 힘이 덜 드는 것만 같아서 좋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더운 날씨가 점점 더 견딜 수가 없게 만들었다. 우리는 무더위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작업은 멈추지 않았고, 우리가 지나는 들판은 깨끗하게 면도를 한 듯이 보리가 베어져 눕고 말았다. 벌써 들판의 한 부분이 우리들의 손으로 깨끗하게 베어져 가고 하늘 높이 떠오른 햇볕은 목덜미를 따끔거릴 정도로 따가워 졌다. 우리는 시내에 가서 파놓은 웅덩이에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땀을 닦고, 목에 두르면 훨씬 더 시원해졌다. 한 시간쯤 일을 하고 잠시 쉬고, 다시 시작하여 쉬기를 세 번째 하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논주인 되시는 분들이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 주셔서 그걸 먹으면서 잠시잠시 쉬었기 때문에 우린 그리 지치지는 않았다. 들판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 밑으로 모여든 우리는 들판을 지나온 바람이 뜨뜻한 무더위로 우리를 감싸 안았지만, 땀을 흘린 우리는 그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더운 줄을 몰랐다. 점심을 먹고 나자 남자아이들은 시내의 웅덩이에서 멱을 감느라고 소란스러웠다. 여자아이들도 가고 싶었지만 시내에 물이 넉넉하지 않아서 갈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그늘에서 친구들과 손뼉치기를 하면서 놀고 있을 때, 남자아이들이 돌아오면서 “야 ! 너희들도 좀 씻고 와라. 그래도 물에 씻으니까 훨씬 낫다. 더운 줄을 모르겠어.” 하면서 우리더러 가보라고 하였다. 정말 우리들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물이 얼마나 있어서 남자들이 더럽혀 놓은 물웅덩이가 깨끗해 졌을까 ?’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야 ! 여자들도 가서 좀 씻어라. 옷을 벗고 들어 갈만한 물은 없어도 발목을 적시고 씻을 수는 있는 모양이다.”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가보라고 하셔서 일단 우리들은 시냇가로 가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시냇가에 가자마자 제법 물이 고인 웅덩이를 발견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풍덩”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옷들을 입은 채로 물 속에 뛰어 들어서 서로 물을 끼얹기도 하고, 물 속에 텀벙 잠기기도 하였다. 금세 시냇가는 왁자그르르 우리들의 소리로 채워져 버렸다. 한 동안 정신없이 물장난을 하고 있는 동안에 시간은 벌써 제법 흘렀던가 보다 선생님께서 그만 나오라는 호루라기를 길게 불어 주셨다. 우리는 잔뜩 젖은 옷을 대충 물기를 훑어 내려서 털고 나섰다. 그 정도만으로도 얼마나 시원했는지, 아마도 시원한 수영장이나, 해수욕장의 물 속도 이만큼 시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잠시 옷이 좀 마를 동안에 우리는 들판 한가운데서 신나는 음악 시간을 하였다. 교실 안에서 부른 노래보다는 너른 들판 한 가운데서 마음껏 소리를 질러 보는 것도 상쾌한 기분이었다. 오후에 우리는 정말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모른다. 그 많은 논들이 우리가 지나는 대로 깨끗하게 깎여져 들어 누운 것만 보아도 기분이 좋았다. 오후 5시가 되어서 해가 좀 설풋하게 기울자 이제 더위는 좀 가신 것 같았지만, 우리는 상당히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보리를 베는 논의 주인아저씨가 우리들이 쉬는 시간에 맞춰서 간식을 가지고 오셨다. “자, 아이들아 나오너라. 세참 가지고 왔다. 시원한 아이스 바를 사왔어 !” 하시자 아이들은 모두 베던 낫을 내던지고 논둑으로 나왔다. 선생님께서 호루라기를 불면서 “야 ! 다친다. 너무 달리지 마라. 위험하니까. 모두 다 줄 수 있게 사오셨을 거니까 차례로 와도 돼. 염려들 말고.....” 하시면서 안전을 당부 하셨다. 아이들이 몰려 와서 줄을 서자 아저씨가 모두 하나씩 아이스 바를 들려 주셨다. 우리는 너무 반갑고 시원해서 더위가 다 달아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둘째 날의 작업이 끝났을 때는 오후 5시 20분경 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에 우리는 아침에 약속했던 대로 9,000평이나 되는 논을 모두 베고 나서도, 600평을 더 베었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 사람이 한 마지기 가까이씩이나 벤 것이란다. 선생님은 한 마지기가 얼마나 되는 땅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면서 우리에게 “야 ! 너희들 정말 국민학교 6학년이 맞니? 아무래도 너희들은 농군들인가 보다. 너희들이 오늘 벤 논은 9,600평이나 되는데, 한 사람이 대략 저 논 한 뙤기 만큼씩이나 벤 거야. 엄청나지 않니?” 하시면서 우리들을 칭찬해 주셨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많은 논을 베었는지 다시 한번 우리가 벤 자리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이 이 들판에서 보리를 벤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벤 자리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정말 들판의 한 부분을 몽땅 베어 버린 것이었다. “자, 이제 오늘의 작업은 여기서 마치기로 하고, 지치고 힘이 들 테니까 집에 돌아가서는 시원한 물로 깨끗이 씻고 나서 벽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서 약 30분만 있으면 다리 아픈 것이 좀 풀릴 것이다. 꼭 그렇게 좀 해라. 알겠지?” “오늘 우리가 너무 많은 일을 했어. 내일을 아무리 많은 부탁이 있어도 우리가 너무 무리하게 해선 안 되겠다. 너희들의 힘에 겨운 일을 시킨 것은 오늘 내가 잘 못 생각 한 거야. 내일은 좀 적게 할 테니까 오늘 잘 쉬고 나오도록 해라.” 하시면서 피로가 쉽게 풀리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 우리는 학교에 가서 가방을 가지고 돌아 와야 했지만 너무 힘이 들어서 내일 공부한 한 시간 책만 들고 가면 되니까 그냥 가기로 하였다. 들판에서 우리 마을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우리는 들판에서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지친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때쯤에는 기운이 없어서 터덜터덜 돌아갔다. 선생님도 오늘 일을 끝내고 나서는 혼자서 계산을 해보셨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하신 것이다. 사실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 시간까지 잔다고 생각하고 잠이 든 것이 그만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났었다고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억지로 깨워서 저녁을 한술 떠먹고 다시 들어 눕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손아귀가 아파서 주먹이 잘 쥐어지지 않았다. 오빠가 어깨를 주물러 주고, 팔목 운동을 시켜주기까지 하였지만, 아침밥을 먹으려니까 수저를 잘 쥘 수가 없었다. 이런 나의 꼴을 보신 아버지께서 혀를 차시면서 “아니 어린것들에게 얼마나 일을 시켰으면 저렇게 수저질을 못하고 저럴까? 아직 어린 학생들인데 농촌 일손 돕기도 좋지만 어지간히 해야지 아이들이 견디겠어?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저렇게 함부로 일을 시킬 수가 있나? 원.....” 하시는 것을 듣고 나는 만약 아버지가 학교에 오시면 선생님과 싸움이라도 벌이 실 것 만 같아서 “아버지, 그게 아니어요. 농촌 일손 돕기도 하고 품삯을 받아서 우리들 가을 수학여행을 가자고 우리들이 하자고 그런 것 이예요. 선생님도 우리랑 함께 일을 하시느라고 옷도 땀으로 다 젖고 기운이 없어서 흔들거릴 지경이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어제처럼 많이 하면 안 되겠다고 하시면서 우리들이 팔 다리를 쉽게 풀리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셨어요.” “저 녀석은 제 아비 말은 안 듣더니 선생님은 감싸고돌면서 하는 짓이 뭐야 지금?” “ 아앙, 아빠가 학교에 와서 선생님이랑 싸움이라도 하면 나는 학급에서 쫓겨난단 말 이예요.” “왜? 네가 일러 바쳤다고 선생님이 혼낼까 봐서?” “아니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쫓겨나요. 우리가 그렇게 하자고 결정을 했으니까 선생님이 책임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알았으니 어서 밥 먹고 나가서 오늘은 열 마지기씩만 베어라.” 아버지께서 우리들이 하는 일이 못 마땅하셔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한 사람이 열 마지기라니 그러면 어제 학급 전체가 벤 만큼씩을 베어란 말인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게 미운 소리는 하셨지만, 나를 위해서 아버지는 낫을 잘 갈아서 다치지 않게 새끼로 말아서 잘 싸서 내 운동화 옆에 놔주셨다. 엊저녁 같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니 그래도 몸이 개운하여서 얼른 학교를 향하였다. 어제 가방도 안 가져 왔기 때문에 첫째 시간에 공부할 국어 책만 한 권 달랑 들고, 낫을 들었으니 학교에 가는 것인지 일터에 가는 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일에 지친 우리들이지만 아침에 집 앞에 나서니 아이들은 언제 그렇게 힘든 일을 했느냐는 듯이 여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몸이 약한 윤숙이도 힘든 기색도 없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팔이 아프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어제처럼 많은 논을 베지 않기로 했다. 어제 너희들이 너무 무리를 해서 몸살이 나서 다들 학교에 못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단 한 사람도 결석을 하지 않고 다 나왔으니 참 다행이구나. 엊저녁에 힘들었지?”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들은 합창이라도 하듯이 “아아니요.” 하자, 선생님은 어깨를 휘돌리는 동작을 하시면서 “그래? 난 엊저녁에 어깨가 아파서 아이들에게 두들겨라, 주물러라 야단을 했는데?” 하시자, 우리들은 “에게, 그 꼬마들이 두들겨서 시원해요?” 하고 선생님을 놀리기까지 하였다. 선생님은 학교 안의 사택에서 사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선생님 댁의 아이들을 잘 안다. 2학년짜리 딸아이와 다섯 살, 네 살짜리 두 아들을 두셨는데, 아이들이 너무 귀엽고 우리들을 잘 따라서 가끔씩 아이들을 데리고 놀아 주기도 한다. 아직 세 발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을 밀어 주면서 귀여워서 서로 업어 주려고 쟁탈전이 벌어 지기도 하였었다. 그런데 그런 꼬마들이 두들겨 보았자 선생님의 어깨가 시원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시간 공부를 마치자 벌써 우리들이 작업을 하러 갈 논의 주인이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다. 일손이 없는 노인들만 사시는 댁이어서 우선 해드리기로 약속을 했더니, 혹시 다른 곳으로 갈까 걱정이 되셔서 미리 와서 기다리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왕 일손을 돕는 것이지만 일할 만한 젊은 분이 안 계신 그런 댁의 일부터 해 드리는 게 우리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서 우선적으로 해드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새끼미 마을의 앞들에서 베기로 한 날 이었다. 이 마을의 원호 가족 한 집과 노인들만 있는 집, 그리고 우리 반의 정아네 인데, 할아버지가 농삿일을 하시고 아버지는 몸이 허약하여 일을 못하시는 댁인데, 할아버지께서 앓아 누우셨다고 해서 그 집의 일손을 도와 드리기로 약속을 하였다. 학교에서 동남쪽으로 시내를 건너서 산기슭으로부터 흘러내린 듯이 펼쳐진 들판이었다. 그래서 논들이 계단식이고 그리 넓은 것이 별로 없이 한배미가 보통 한 두 마지기씩이나 되는 것들이었다. 300에서 500평 정도의 논바닥에 아이들이 한꺼번에 들어 갈 수가 없어서 두 세 배미씩 나누어서 들어섰다. 아이들이 힘이 들기는 하였지만, 사흘째가 되니까 낫질을 하는 요령이 생기고 보리 베기에 익숙해져서 점점 더 베는 속도가 빨라졌다. 학교에서 건너와서 우리 동네 정자나무 아래에다가 도시락을 가져다 두고, 논에 들어서서 작업을 시작 한 것이 10시 30분이 조금 지나서였는데,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정아네 집의 논 7마지기를 몽땅 다 베어 버렸고, 원호 가정의 논 다섯 마지기까지 거의 다 베었다. 점심 전에 3,600평이나 되는 논의 보리를 다 벤 셈이 된 것이다. 정자나무 아래 제법 너른 마당이 있어서 점심을 여기서 먹게 되었다. 나는 우리 집에 가서 커다란 주전자에다가 시원한 물을 퍼 가지고 와서 선생님께 드리자 “고맙다. 은자야. 집까지 제법 먼데 일부러 가서 이렇게 시원한 물을 떠오니 고맙구나. 아이들이 얼마나 반갑겠니?” 하시면서, 차례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셔서 모두 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점심시간에 잠시 쉬라고 하나 아이들은 그 동안에 고누를 두는 아이들, 씨름을 하는 아이들,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로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선생님께서 정자나무에 기대고 눈을 감으시면서 “얘들아 앉아서 놀자 !” 라고 큰 소리를 하셔서 우리들은 하던 놀이를 멈추고 잠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바로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서 ‘얘들아 앉아서 놀자!’라고 했던 선생님의 친구가 있었단다. 지금부터 약 30년 전의 일이구나.” 하시자 아이들은 하던 놀이를 멈추고 모두들 선생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30년 전쯤의 일이다. 이 마을에 살던 선생님의 친구가 몹시 집안이 가난하여서 끼니를 제대로 먹고 살 수가 없었단다. 그 무렵에는 모내기를 하면 모내기 나온 사람들의 식구는 모두 다 나와서 모내기하는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지. 부잣집에서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모두 점심을 대접하는 것이 풍습이었단다. 그래서 그 친구가 아침도 굶고 나와서 기다리다가 점심을 먹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의 밥그릇은 이렇게 커다란 그릇에다가 고봉으로 수북하게 밥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가득 담은 어머니의 밥을 그 친구가 혼자서 다 먹은 거야. 겨우 일곱 살짜리가 말이야. 어머니는 다시 타다 잡수셨지만, 일곱, 여덟 살 밖에 안 되는 아이가 어른 밥을 수북하게 한 그릇 다 먹었으니 얼마나 배가 불렀겠니? 배가 남산만 해 가지고 여기 이렇게 기대고 있는데, 다른 친구들은 지금 너희들처럼 뛰어 너는 거야. 이 친구 뛰고는 싶은데 배가 불러서 뛸 수가 없으니까 친구들에게 한 말이..” 선생님이 여기까지 이야기 하셨으니 무슨 말인지 모를 우리들이 아니었다. 모두들 입을 모아서 합창을 하였다. “얘들아 앉아서 노올자 !”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나서는 모두들 손뼉을 치며 깔깔거리고 한바탕 웃음보따리를 풀었다. 우리 선생님이 우리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라셨는데, 학교 다닐 적에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여서 그곳에서 학교를 마치고 우리 학교로 발령을 받아 오셨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이 동네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처음이었다. 잠시 쉬었다가 오후 작업을 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은 또 다시 시끌벅적하게 놀이를 시작하였다. 정말 나무에 기대어서 ‘얘들아 앉아서 놀자’ 하는 얘들도 있었다. 오후엔 비가 내릴 듯이 구름이 끼어서 작업하기엔 좋았지만, 어른들은 이제 비가 올 가봐 걱정들을 하셨다. 그렇다고 베기로 한 논을 다 베지 않고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보리를 베어 나갔다. 오전 보다 훨씬 더 일을 하기가 쉽고, 시원하였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열심히 일을 한 덕분에 어제 보다 도 더 많은 실적을 올렸다. 오늘을 10,000평이 넘는 논의 보리를 베었다. 11,400평을 베었는데도 어제 보다 40분이나 빨리 끝났다. 더 벨 논만 있었으면, 아마도 40마지기는 베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논을 베고 나자 동네 어른들이 나오셔서 혀를 내두르셨다. “아니? 이 아이들이 하루에 11,000평을 더 베었단 말이야? 그럼 거의 한 사람이 한 마지기씩을 베었는데? 그럼 어른들과 같은 거 아니야? 아이구 놀래라. 원 아이들이 뭐 이렇게 일을 잘해?” 하시는 분은 바로 이 동네 이장님이셨다. “야 ! 너희들 이젠 저희들이 어른들보다 일을 더 많이 하게 생겼는데?” 하시면서 앞에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어제 너무 힘들어 하길레 오늘은 조금 적에 하겠다고 했는데 어제보다 훨씬 더 많이 베었는데도 이렇게 일찍 끝났는데요.” 하고 이장님께 말씀드리고 나서 “자, 오늘 일은 여기서 마친다. 너희들이 너무 일을 잘해서 이장님이 이렇게 칭찬을 하셨는데, 난 너희들이 지칠까봐 걱정이다. 집에 가서 잘 씻고 다리도 좀 주물러야 한다. 팔과 어깨도 주무르고 푹 쉬도록 하여라.‘ 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아이들은 너무 일찍 끝나서 섭섭한지 한바탕 놀이를 하다가 떠났다.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이 동네 저 동네로 다니면서 보리 베기를 한 것이 열흘 동안이나 되었고, 그 동안에 번 돈이 64,000원이나 되었다. 320마지기96,000평나 되는 논의 보리를 우리가 다 베어낸 것이다. 완전히 우리 고장의 논보리의 1/3은 우리가 베었다고 소문이 났다. 이렇게 열흘씩이나 보리를 베고 나니 아이들은 코피를 쏟는 아이들도 있고 모두들 지쳤다. 선생님은 이런 우리들을 보면서 “아무리 나가고 싶어도 안 된다. 난 너희들이 스스로 벌어서 수학여행을 가겠다는 결심을 보고 지금까지 함께 일을 했지만 , 이젠 나도 지쳐서 더 이상 안 되겠다. 너희들 벌써 코피를 쏟은 아이가 몇 이냐?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4일간은 작업을 나가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난 더 이상 내 보낼 수 없어. 이젠 안 나간다. 알겠나?”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기가 죽었다. 날마다 돈이 불어나는 것이 좋아서 계속 하자고 하였지만, 지친 아이들이 많아서 더 이상 할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선 나도 지쳐서 이제 그만 했으면 싶었다. 그 동안 못한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서 우리는 체육 음악 같은 시간은 줄이면서 우선 국, 산, 사, 자 4과목의 공부를 계속 하였다. 오후 5시가 되도록 하루 열 시간이라도 좋다고 공부에 매달린 우리는 4일 동안에 열흘 동안의 모자란 공부 진도를 거의 다 맞추었다. 우리는 매달마다 월말 일제 고사를 보아서 그 점수만 가지고 성적을 내었기 때문에 안 배우고 시험을 볼 수 없어서 무척 바빴다. 월말이 다가왔었기 때문에 일제고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작업을 하느라고 시험 범위까지 배우지도 못해서 서둘러야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 자습시간까지 공부 시간으로 해서 간신히 시험 범위까지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6월 첫 주에 5월말 일제고사를 치르고 나자, 그렇게 기다리던 비가 조금 내렸다. 이 비가 오자 농촌은 진짜 야단이 났다. 지금까지 논에 물이 없어서 갈지도 못하고 논둑을 붙이는 일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니까, 논을 갈고 논둑을 붙여서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일에 매달려서 단 한 사람도 일손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또 다시 우리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게 되었다. [모내기 농촌일손 돕기 운동]을 펼쳐라 는 지시가 잇달아 내려 왔다. 하긴 그 때만 하여도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대부분이 농사에서 얻던 시절인데 이렇게 날씨가 가물어서 전 국민이 나서서 가뭄대책을 서두르다가 비가 왔으니, 온 나라의 모든 힘을 다 모아서 모내기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만약에 위에서 이런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농사일을 돕기 위해서 농번기 방학을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이기도 하였다.
1977년의 봄은 유난히도 빨리 찾아 왔었다. 지난 겨울에도 별다른 추위가 없이 넘어갔을 뿐만 아니라, 수북하게 쌓일 만큼 눈다운 눈이 내린 적도 없었다. 비가 내린 것도 아니어서 봄이 돼도 파란 싹들이 제대로 돋아나기나 할 것인지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겨우내 비가 내리지 않은 들판은 봄이 되자 얼었던 것이 녹으면서 온통 먼지만 풀썩거리는 사막과도 같았다. 벌써 물이 고이고 못자리를 할 준비를 해야 할 논바닥은 허옇게 메말라 있고, 쟁기질을 하는 논에서 뽀얗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논바닥이 요 모양일 때 밭에 심은 보리나 밀은 자라지 못해서 앙당하게 퍼지기만 하고 키가 자라지 못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 전에 보리밭에 풀을 매고 북을 주어서 보리 뿌리를 튼튼하게 해주는 작업을 할 때에도 온통 먼지가 날려서 허옇게 흙먼지를 덮어써야만 했다. 하긴 그래서 논에 심은 보리는 다른 해 보다는 훨씬 더 좋은 편이었다.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내리는 해에는 보리를 심은 논에 물기가 많아서 보리가 물손물기가 많아 해를 입어 죽어 가는 일을 받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올해는 논이 바짝 말라서 밭처럼 고슬고슬하기 때문에 논에 심은 보리는 오히려 아주 잘 자라 주었다. 농부들은 이런 논보리에 정성을 쏟아서 보리 고랑을 쳐 올려서 보리 논 두둑에 뿌려주는 북주기에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 논보리는 다른 해보다 훨씬 더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3월이 되고 4월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비가 오겠지, 오겠지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못자리를 해야 할 때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정부에서도 걱정이 되어서 각 마을별로 공동 못자리를 만들라고 권하였다. 물대기가 편하고 물을 끌어 올 수 있는 곳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힘을 모아서 모를 기를 수 있게 한 곳에 못자리를 만들면 물이 부족하더라도 한 곳에만 대기 때문에 좀 더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양수기나 저수지, 댐이 지금처럼 물을 많이 끌어 올 수 있는 그런 형편이 아니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이 시냇가에 집중적으로 공동 못자리를 만들었지만, 가뭄이 계속 되자 그것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5월도 중순이 되었건만 비가 내리지 않아서 시냇물도 말라서 흐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시내의 바닥을 파서 웅덩이를 만들고 그 웅덩이에 고인 물을 퍼 올려서 못자리의 모들이나마 말라비틀어지지 않게 지켜보려고 노력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부에서는 이처럼 가뭄에 시달리는 농촌을 돕기 위해 어린이들까지 나서서 가뭄극복을 위해 노력 봉사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까지 들판에 나가서 못자리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시내 바닥에 고인 물을 세수 대야나 양동이로 길러다가 말라 비틀어져 가는 못자리에 뿌려 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각자가 물을 떠서 가지고 가서 못자리에 뿌리는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까 앞의 아이들이 뿌리고 간 자리만 다시 뿌리기도 하고 좁은 논둑길을 오가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점차로 두 줄로 나란히 서서 물을 퍼서 올려 보내면 이어받기를 해서 못자리에 가면 차례로 받아서 뿌려 주는 사람이 있어서 일은 좀 더 효과적이었다. 비가 오지 않아서 논바닥에서는 먼지가 풀썩거리고 메마른 논바닥의 열기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한 평의 못자리라도 더 살려 보자고 우리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물을 퍼 날랐고, 못자리는 조금씩 파랗게 생기를 되찾았다. 이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우리 못자리도 좀 해줘요”하고 선생님을 졸랐다. 선생님들도 있는 힘을 다해서 해보자고는 하지만 어린 우리들은 땀이 비 오듯 흐르면서 먼지투성이가 돼갔다. 이렇게 애를 써서 물을 퍼 나르는 모습을 보고 차마 시킬 수가 없었던지 학교 옆의 일부만을 하고는 계속 할 수 없다고 다음으로 미루고 해서 하루 두 시간씩만 물대기 작업을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동안에 이미 온 몸은 흙투성이가 되고 땀에 흠뻑 젖어서 옷까지 흙투성이가 되곤 했다. 어린 우리들까지 나서서 못자리 살리기를 하게 되자, 마을의 어른들도 더 이상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냇가를 파고 물을 퍼 올려서 못자리를 살리는 일에 힘을 쏟게 됐다. 점차 마른못자리가 없어지게 됐다. 그러나 못자리의 모가 겨우 목숨을 건지는 정도에서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학교에 우물을 파도록 교육청에서 지원이 나와서 학교 마당에 구멍을 뚫고 우물을 판 곳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우물물을 멀리에 있는 곳까지 끌어가서 못자리를 살리는 데 이용하니 학교 부근의 논들은 우선 갈증을 풀 수가 있었다. 이젠 이 들판에 모내기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온 들판을 가득 매운 보리를 베어 내어야만 모를 심을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이제는 보리 베는 일이 급하게 됏다. 가뭄 극복에 힘을 쏟느라고 보리 베기를 할 손이 모자란 농촌의 일손을 돕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이 무렵만 해도 농촌의 학교에서는 보리 베기나 모내기시기에 맞춰서 농번기 휴가라는 것을 하여 우리 같은 어린이들도 농촌의 바쁜 일손을 돕게 했었다. 그렇지만 올해 같은 때는 농번기 휴가가 문제가 아니라 가뭄 극복과 보리 베기, 모내기라는 일이 한꺼번에 해야 하는 농촌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학생들을 동원하여 도와주라는 지시가 내려 졌다. 보리는 벼와 달리 나란히 베지 않아도 탈곡기에 그냥 쓸어 넣어서 털 수 있는 곡식이다. 우리들 같은 어린이들의 손으로 베어도 탈곡을 하는데 크게 불편하거나 어려움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어른들처럼 품삯을 다 받을 수는 없지만, 일부만 받고 일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한 푼도 안 받는 다면 너도나도 해 달라고 해서 어린이들이 다 해주지도 못하고 갈등만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쨌든 우리는 논의 보리를 베러 가야 했다. 처음에 나가서 보리를 베려니까 쉽지는 않았다. 물론 집에서 소먹일 풀을 베어 보기는 하였지만, 보리를 베어 보지 않았던 어린이가 더 많았기 때문에 처음엔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베는 요령을 가르쳐 주셨다. 몸을 다치지 않게 주의할 점도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첫날 논에 나가서 조금씩 일을 익혔다. 어른들은 한 마지기(약 300평)를 베는데 300원을 받는데 우리 어린이들은 200원만을 받기로 돼 있었다. 우리는 첫날 약 3,000 평을 베었다. 물론 하루 종일이 아니고 오전 공부가 끝나고 나서 오후에만 하여서 많이 벨 수가 없었다. 하루에 우리가 번 돈이 2,000원이 되었다. 우리는 이튿날 아침에 학급회를 열어서 이 돈을 쓸 곳을 의논했다. “우리 이 돈을 모아서 가을 수학여행을 가면 어떻겠어요,” 반장인 경수의 의견은 우리 모두에게 환영을 받았다. “선생님 우리가 수학여행을 가려면 돈은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건대요?” 역시 계산에 밝은 영호의 질문이었다. 선생님은 “너희들이 갈 수학여행지에 따라 달라지고, 며칠 동안을 갈 것인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우리 고장의 도시에 2박3일 정도로 간다면 약 3,000원 정도면 될 것이다”라고 일러 주셨다. 그래서 우리들은“그렇다면 우리들이 돈을 모아서 수학여행을 갔다 올 수 있게 열심히 보리 베기를 해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들이 모은 돈으로 수학여행을 가도록 하려면 우리 모두 열심히 보리 베기를 해야 한다고 다짐까지 했다. 그래서 의논을 마친 그 날부터 우리는 아침 시간만 공부를 하고 나서 낫을 들고 들판으로 나갔다. 첫날 우리가 3,000평을 베어서 2,000원을 벌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쓸 돈을 저축하기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우리들을 장난을 하거나 게으름을 피울 이유가 없어졌다. 혹시 누가 게으름을 피우면 우리 스스로가 “야 ! 명직이 넌 혼자만 편하길 바래? 누군 허리 안 아프고 힘 안 들겠어?” 하고 꾸짖으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서곤 하였다. 선생님은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래도 너무 힘들게 하지는 말아라. 무엇보다 낫을 가지고 하는 일이니까 다치지 않게 조심들하고, 알았지?” 하고 우리들을 격려 해주시기도 하고, 선생님이 앞장을 서셔서 일을 해나가셨다. 아무리 우리가 잘해보려고 해도 선생님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보리논의 한 두둑씩을 맡아서 베어 나갔다. 자기 몫을 다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끝나도록 좀 쉴 수도 있다. 그러나 일찍 끝난 남자아이들은 이런 일에 서투를 수밖에 없는 여자아이들이 아직 저 만큼 베어 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냥 쉬고만 있지 않았다. 가장 많이 남은 여자아이가 베어 오는 두둑을 중간에서 싹둑 잘라서 베어 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우리들이 힘껏 벤 덕분에 우리는 처음 시작한 다음날이자 우리가 보리 베기 삯으로 수학여행 비용을 마련하자고 결정을 한 첫날에는 논 7,200평을 베어서 하루에 4,800원을 벌었다. 일이 끝나고 오후 5시가 거의 되어서 선생님은 오늘 한일을 반성해보는 자리를 가졌다. “자, 오늘 우리가 벤 보리논의 모습을 보아라. 저기 언덕에서부터 여가까지 우리 학교 전체 면적보다도 두 배는 될 만큼 많은 논을 우리가 모두 베었구나”하시면서“오늘 품삯까지 합하면 벌써 두 사람 몫은 벌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모두 “와 !” 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좋아했고, 우리는 우리 힘으로 이렇게 수학여행 비용이 착착 저금되고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힘 드는 줄을 몰랐다. 힘든 일을 하였으면서도, 우리들은 신바람이 났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자랑스럽게 오늘 우리가 한 일을 이야기했다. “오늘 우리가 논 7,200평을 베어서 우리 고장의 일손을 돕기도 하지만, 우리가 번 돈으로 수학여행 비용으로 하기로 했는데 오늘까지 두 사람 몫을 더 벌었다고 하셨어요. 우리 열심히 일해서 집안일도 돕고 수학여행 비용도 벌 거예요”하자, 어머니는 걱정스런 목소리로“너희들이 힘든 일을 얼마나 할 수 있을는지 걱정이구나. 몸살이라도 나면 안 된다. 너무 애쓰지 말아라”하셨고, 오빠는 이런 어머니께“에이, 경미가 언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애예요. 보나마나 꾀나 부리고 제일 꼴찌를 하고 있을 텐데 몸살이 날 까닭이 있어요?” 하면서 혀를 날름 내밀며 나를 놀렸다. “에이, 오빠, 또 날 어린애로 봐. 만날 그런 오빤 뭐 잘하는 게 있어?” “요게? 또 나를 무시하고 덤벼? 너 한 대 얻어맞아 볼래?” “에이, 넌 오빠가 되가지고 동생을 그렇게 놀리고 그러냐? 좀 듬직 해봐라. 그러니까 동생이 널 무시하려는 거 아니냐?” 하면서 오빠를 나무라셔서 다행히 그것으로 끝났지만, 오빠가 종주먹을 해 가지고 군밤을 먹이는 모습을 해서 어머니께 또 꾸중을 들어야 했다. 저녁을 먹은 나는 지쳤는지 금세 잠이 몰려 왔다. 이를 닦았는지 안 닦았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벌써 어머니가 아침상을 들고 들어오시면서 “경미가 아주 지쳤구나. 오늘 학교에 갈 수는 있겠니? 그렇게 힘이 들어서 며칠이나 견딜까? 아무래도 걱정이다. 어서 씻고 오너라. 밥 먹자.” 하시면서, 나를 깨워주신 것이었다. 나는 환한 아침 햇살을 보면서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서 뛰어 나갔다. 마음속으로 ‘아차 늦었구나. 서둘러야겠는데.....’ 하면서 서둘러 세수를 하고, 들어가서 서둘러 아침을 먹고 아버지가 갈아서 잘 싸놓은 낫을 가방에 꽂고 나서 집을 나섰다.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나의 인사를 받은 어머니가 “그래, 네가 지금 학교 가는 거니? 논에 보리 베러 가는 거지?” 하고 놀리셨다. 물론 하루 종일 일을 하게 될 것이기는 하지만, 학교에서 하는 일이니 그것도 학교 공부라고 생각하니까 논에 일하러 나가는 것도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아침 인사를 나누는 교실의 분위기는 다른 날보다 훨씬 더 밝고 신이 난 것이었다. “그래, 어제 너무 많은 일을 해서 힘들었지? 혹시 몸살이 난 사람은 없을까 걱정을 했는데..... 그래도 너희들 모두 밝은 표정으로 나온 걸 보니까 정말 반갑구나. 힘들었지?” “네에,” 우리들의 목소리는 힘차고 밝았다. 선생님은 이런 우리들을 보고서 “ 너희들 그렇게 힘든 일을 한 아이들 같지 않구나. 정말 괜찮은 거니?” “네에.”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신 선생님의 표정은 환하게 웃어 주시고 계셨다. “어제 너희들이 너무 많은 논을 베어 치웠기 때문에 오늘은 쉬네 부락 부근으로 가기로 했다. 그랬더니 어제 보다 더 많은 논을 베어 달라고 신청이 들어 왔는데, 너희들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할 수 있는데 까지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시는 말씀을 끊고 명식이가 “선생님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 오늘은 30마지기를 베어 버릴 거예요.” 하며 팔뚝을 들어서 뽀빠이 흉내를 내었다. 이런 모습을 본 아이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선생님도 웃으시면서 “야, 명식이 ! 너 혼자서 30 마지기를 벨 거라고?” 하시자 아이들은 모두 “와 !”하고 웃음으로 즐거운 한 바탕을 만들었다. “오늘 베어 달라고 신청을 한 논이 꼭 30 마지기이거든. 그럼 그걸 정말 다 벨 수 있을까? 너희들 생각은 어때?”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들은 누가 시킨 것도 의논을 한 것도 아니지만 모두 한결 같이 “다 벨 거예요.” 하고 합창을 하였다. 정말 우리는 그 많은 논을 다 벨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당시의 아이들 작업장면**** 첫째 시간을 공부하는 동안도 아이들은 논에 가서 일하는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 힘든 일을 하기 싫다는 아이는 없었다. 어서 나가서 오늘 베기로 한 30마지기를 다 베자는 생각들 뿐이었다. 첫째 시간이 끝나자 선생님은 “난 이제 교무실에 가서 오늘 작업을 나간다고 신고를 해야 하거든, 너희들은 낫 조심하고 작업 준비들을 갖추고 운동장에 나가서 모여 있거라.” 하신다. 우리들은 마치 소풍을 나가는 아이들만큼이나 신바람이 나서 “와 ! 아.” 하고 함성을 지르며 좋아들 하였다. 물론 작업을 하면 늘 꼴찌를 하는 몸이 약한 성애 같은 아이들은 기가 죽어서 아이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아무리 일이 하기 싫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이렇게 야단인데 혼자서 그런 말을 할 용기도 없었다. 또 논에 나가면 아이들의 도움을 받는 데, 공연히 아이들에게 미움을 살까 봐서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낫을 챙겨 들고 목에 수건을 질끈 묶은 아이도 있었고, 작은 수건을 허리춤에 찬 아이도 있었다. “야 ! 문식이 넌 아주 마당쇠 같다. 마당쇠!” 정근이가 문식이를 놀리자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도리어 “예이, 무엇을 할 깝쇼 마님!” 하며, 마당쇠 흉내를 내어서 온 교실이 한 바탕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우리들이 운동장에 줄을 지어 모여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 선생님과 함께 교장선생님께서 함께 나오셔서 우리에게로 오셨다. 선생님이 반장에게 눈짓을 하자 반장이 “차렷, 교장 선생님께 경례 !” 하고 경례를 하자 다시 돌아서서 “열중 쉬어 !” 하자 교장선생님은 “험, 험”하시면서 목을 가다듬고서 “너희들이 작업을 한 것에 대해서 선생님께 잘 들었다. 우리 고장의 일손을 돕고 너희들이 결정한 돈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낫을 가지고 하는 일이니까 우선 다치지 않게 조심들 해야 한다. 너무 욕심을 부려서 일을 하다가 몸살이 나거나 하면 안 되니까 천천히 조심들 해야 한다. 자 열심히 해라. 다치지 않게 몸조심하고, 알았지?”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힘차게 “예.” 하고 대답을 하였고,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곧장 출발을 하여서 쉬내 동네 부근으로 가기 위해 들판을 가로질러 나갔다. 교실 보다 덥고 먼지가 풀썩이기는 하지만 들판을 나오니, 기분이 좋았다. 소풍을 가는 것처럼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면서 걸었다. 우리들은 마치 적군을 물리치러 나선 국군처럼 씩씩하고 용감하였다. 오늘 하루의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미리 알았다면 아마도 우린 기절을 하고 말았을는지도 모른다. 9.000평이라는 면적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 전체의 면적이 3,000평 남짓 밖에 되지 않으면 그 세 배나 되는 넓은 면적이 아닌가? 그러나 우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일을 하는 요령도 생겼고, 일을 잘 하는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지지 않을 만큼 익숙하게 보리를 베어 젖히는 것을 본 어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이기 때문에 겁날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도착하자, 논의 주인 되시는 장수동 이장님은 우리들에게 “아직 어리고 공부해야할 너희들에게 이런 일을 시킨 것은 미안하다. 그러나 이왕 일을 하러 나왔으면 어른들에게 욕먹지 않게 깨끗하게 일을 해주어야 하는 거야. 너희들도 모두 우리 고장의 아이들이고, 농사를 짓는 집의 자녀들이니까 모두 내 집의 일이다 하고 생각하고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알겠지?” 하고, 말씀을 하시고 나서 선생님께 따로 부탁을 하시면서 조금 후에 새참을 준비해 오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마을로 돌아 가셨다. 우리들은 각자의 옷이나 도시락을 모아서 더워지지 않게 잘 덮어서 햇볕을 가려 놓은 뒤에 각자 한 두둑씩 일을 맡았다. 아무래도 힘이 약하고 일이 서투른 여자들에게는 귀퉁이의 두둑이 짧은 것을 맡기고 남자들은 한 가운데 두둑이 긴 것들을 맡았다. 요즘처럼 논이 반듯하게 농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이니까 아무리 부잣집의 논이라도 모두 비뚤비뚤 땅 모양이 생긴 대로 둑을 지어 만든 논들이었다. 그래서 논에 심은 보리의 두둑은 모두 그 길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른 그 부근에 있는 여러 논의 보리를 베어야 하였으므로, 남자들은 서로 두둑이 길고 보리가 잘 자란 것을 고르려고 하였다. 그래야 다른 아이들과 같이 끝날 수 있고, 다른 아이들보다 잘 하는 아이들이 더 많이 베어야 한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오늘의 일을 시작 해보자. 너희들이 지치면 안 되니까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 때 까지 열심히 베고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잠시 쉬어 가지고 다시 시작하도록 한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다치지 않게 조심하자.” 선생님은 말씀을 마치자 호루라기를 힘차게 불어 주셨다. 우리들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힘차게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가듯이 모두 자기가 맡은 논 두둑에 덤벼들어서 보리를 베기 시작하였다. 모두들 어찌나 열심히 베는지 말소리 하나 나지 않고 마치 누에가 뽕잎을 먹는 소리처럼 사그락사그락 보리들이 베어져 눕는 소리만 들려왔다. 선생님이 맡은 두둑의 길이가 가장 길지만 선생님도 만만찮은 솜씨로 보리를 베어 나가시기 때문에 따라 붙은 사람은 형주와 문섭이 뿐이었다. 두 아이는 키도 크고 힘도 좋아서 집에 가면 어른 몫을 한다고 소문이 난 일꾼들이다. 우리들이 사는 곳은 읍내에서도 40리가 되는 면 소재지에서도 또 십리 길을 더 들어와야 하는 산골 마을이다. 오죽 했으면 정부에서 지정한 벽지교통이 불편하고 뒤진 고장로 지정을 받은 고장이었다. 그래서 하루네 4번씩 다니는 버스가 생긴 것도 몇 년이 되지 않고 늘 십리 길을 걸어 다녔다. 큰 장을 보려면 삼십리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이런 일은 결혼 같은 큰 잔치나 있어야 마차를 동원하여 함께 보는 그런 고장이다. 그래서 이 고장의 아이들은 모두 우리처럼 농촌에서 집안의 일을 도와 가면서 자랐기 때문에 대부분이 어느 정도의 농사일을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 고장에서는 이런 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일단 보리 베기가 시작되자 들판은 사그락 거리는 낫질 소리만 들려오고 우리들의 이마에는 금세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가 손등이며 발들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더위에서 힘든 일을 하는 우리들은 이마의 땀을 쓱 팔뚝으로 문지르고 만다. 그러면 팔뚝에 묻은 흙먼지가 이마에 굵은 줄을 그리고 말았다. 이런 모습을 본 아이들은 옆의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히죽거리는 것이었다. 내 왼쪽 곁에 두둑을 맡은 영임이가 오른쪽에서 베던 승희의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보이자 승희는 힘이 들어서 주저앉으면서 “왜에? 내가 뭐 잘못 했어?” 하고, 나의 쪽을 향하여 말을 걸었다. 나는 나에게 그런 줄 알고 의아해서 “뭐? 나보고 그러는 거야?” 했더니, 승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한 개인의 성장 과정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영향을 준다. 가정에서의 체험, 그리고 학교에서의 만남, 책을 통한 간접 경험 등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이 초등학교 6학년은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재일 한국인 영양사 홍영실 선생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신의 꿈인 영양사의 길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사는 세계가 학교라는 공간이기에 직접 가르치는 선생님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단순히 교사만이 아닌 영양사, 행정직원도 학생들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일본 초등학교에서는 졸업 문집을 전통적으로 발행한다. 현재 6학년생인 이학생의 글 쓰는 수준이 놀랍다. 그리고 글씨체도 대단하다. 그런가 하면 가정에서부터 교육이 잘 이뤄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저의 장래 꿈은 모두를 웃는 얼굴로 만드는 초등학교 영양사 선생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제가 2살 때 가족이 선물 해준 장난감 식칼로 요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3살 때 진짜 아동용 식칼을 선물 받은 후 계속 요리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올해 저에게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쿠사미 초등학교에 홍영실 선생님이 전근오신 것입니다. 홍선생님은 쿠사미초등학교 어린이들 모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거나 만날 때면 말을 걸어주시는 바로 제가 되고 싶은 이상형의 영양사와 비슷했습니다. 어느 날 홍선생님이 "급식 실습생(영양사가 될 사람)이 와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들어 보면 어때?"라고 물어 주셔서 "부탁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대학생은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하면 좋을지, 외워 두면 좋을 것 같은 것 등 여러가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는 이때 생각했습니다. "반드시 홍선생님 같은 영양사가 되고 아이들로부터 맛있었습니다"라고 인사 받는 영양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장래 꿈을 위해서는 홍선생님이나 대학생한테서 배운 것을 가슴에 새기고 잘 살려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당국의 법규 집행과 시민의식 변화가 필요하다 최근 충북 제천시 9층 건물에서 일어난 화재는 순식간에 6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어처구니없는 끔찍한 대참사다. 실시간 뉴스에서 국민들은 늘어나는 사망자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봐야 했다. 다시 입에 꺼내기도 참담하나, 세월호 참사의 악몽이 겹쳐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가슴이 내려앉았다. 이 사망자 가운데 중학교 동창생이 들어 있어 더욱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다. 자고 일어나면 한심한 사고 소식이다. 낚싯배 전복에 타워크레인 사고, 이대 목동병원 신생아 집단 사망 등 한숨 돌릴 새도 없다. 이는 모두 나라 밖으로 소문나면 창피할 후진적 사고들이다. 이런 미개형 사고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니 국민 불안감은 커질 대로 커진다. 밥 먹듯 이어지는 인재(人災)의 공포를 느낀다. 이번 사고의 한 유가족은 “이 나라에 하루도 더 살기가 싫다”고 비통함을 토하는 것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 건물의 방재 관리에서부터 사고 대응 과정까지 어느 한 곳 제대로 된 구석이 없다니 세월호 이후 책임자나 국민들이 각 위치에서 행동에 옮긴 것은 무엇인가?안전불감증으로 인한 책임의식의 부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건물 외벽 자재 문제는 재작년 의정부 아파트 화재 참사 때 그렇게 뼈아픈 경험을 해 놓고도 그대로라니. 의정부 사고 이후 관련 법을 만들었지만 무용지물인 셈이다. 이를 책임지고 단속해야 할 해당 관청이 나 몰라라 팔짱을 끼고 있었던 결과가 아닌가. 가장 직접적인 것은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다. 이 비상구가 있어도 알지 못했다는 원인 분석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사소한 일상생활에서 앎을 중요시 하지 않은 결과가 이같은 참혹한 참사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높아지는 아파트 건물은 증가하는데 만일 불이 난다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스템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지금도 고층이 아닌 3층에서 살고 있다. 일본에서 거주할 때 아파트에서 살면서 경험한 것이 매월 한 번씩 피난 훈련을 하는 것이다. 아파트 건물은 우리처럼 샷시가 없고, 옆 집과 칸막이 부분에 물건을 두어서는 안된다. 사고가 발생하면 이를 쉽게 부수고 옆으로 통행할 수 있는 피난 경로이다. 그리고 자기 아파트에서 아랫집으로 내려 갈 수 있는 피난 사다리가 준비되어 있다. 나아가 놀라운 사실은 소방 담당자들의 끊임없이 소방훈련 연습을 하는 모습이다. 그만큼 소화작업은 속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저녁 어둑어둑한 곳에서 팀을 구성하여 소방훈련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와 다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번 사고를 시민의 차원에서 보면, 큰 문제는 얼마든 살릴 수 있었던 목숨을 눈 뜨고 놓친 것 같아서 기가 막힌다. 불법 주차 차량들이 소방차 진입을 막지 않았더라면 구조됐을 목숨이 적지 않았다. 우리 주변 가까이서 이같은 참사를 보고도 도로 양쪽을 가득 메운 차량들을 주차장이나 다른 곳으로 옮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하는 주차는 소방차가 다니는 도로와 상관이 없다는 식이다. 좁은 도로에 양쪽이 차량으로 가득 차 화재가 나도 달릴 수 없는 곳이 어디 내가 사는 도로 뿐인가? 하루 속히 도로 양쪽에 세운 불법 차들이 제자리를 찾아 가도록 법규를 만들고, 도시 계획 설계시 주차장을 충분히 만들고, 불법 주차 단속도 엄격하게 적용하여야 할 것이다. 더 가관은 출동한 소방차의 굴절 사다리 고장이었다니, 전쟁터에 총알 없는 총을 메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는 한심한 이야기다. 과연 소방관청의 관리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선제적 대응이 어렵다면 최소한의 학습효과라도 있어야 한다. 장소만 옮겨졌을 뿐이지 안전의식과 시스템은 세월호 사고 후에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당국의 법규 집행과 시민 인식의 변화 없이 다시 우리는 화마가 들이닥쳐도 보고만 있을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때 현장을 직접 지휘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도 확실하게 물어야 한다.
순천교육삼락회 정기 총회와 담화, 노래교실 무엇을 하면서 '노후를 보낼 것'인가? '지적인 호기심이 강해'배움'에 돈과 시간'투자 찬 바람이 불어온다. 겨울 맛을 느끼는 계절이 되었다. 그런데 바람에도 이처럼 옷깃을 스치는 찬 바람이 있고, 사람을 변화키는 따뜻한 바람이 있다. 순천교육삼락회는 19일 오전 11시에 순천교육지원청 대회의실에서 2017년 정기총회를 갖고 담화와 노래를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담화에서 최고령이신 김상욱 회원은 "게이트볼을 통하여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며, 갈수록 젊은 사람들이 가입하지 않아 자신이 지금도 회장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삼락회 모임에도 후배들 얼굴을 보기 위하여 참여하고 있다"면서 노후생활에 건강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또, 오부록 회원은 순천향교 유림들이 일전에 국회의사당을 찾아 유교의 중요성을 배우는 기회를 가졌는데, 순천지역 국회의원 얼굴만 보고 떳떳하게 이야기 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해 우리지역에서도 정치인을 잘 뽑지 못해 안타까웠다"고 전하였다. 한편으로, 황희량 회원은 "일전에 서면의 은평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그친 지 오래되어 우리 지역에도 인구 고령화가 심각함을 절감하게 되었고, 앞으로 이 나라의 장래가 걱정된다"는 담화를 하였다. 이어서 순천만 연가를 부른 강경인 회원의 지도로 김성한이 부른 '묻지 마세요'와 진시몬 작사, 작곡인 '보약 같은 친구'(https://youtu.be/Krf6-m6Vt70 )를 부르는 가운데, 이 곡은 우리 세대에 딱 들어맞는 노래 가사라면서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지금 이웃 나라 일본에는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 보다 고령화가 먼저 진행된 일본 시니어 활동의 모습에서 힌트를 얻을 만한 것이 많다. 일본 평론가 쓰노 가이타로가 가 쓴 '100세까지의 독서술'도 그런 책이다. 그가 말하는 '100세까지의 독서술'은 70세부터의 독서술을 의미하고 있다. 그가 강조하는 독서야말로 새로운 경험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책 제목만 보면 뭣 때문에 독서만을 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지만 단지 늙어가는 노인이 아니라 감이 익어야 제맛이 나는 것처럼익어가는 진짜 노인이 되기 위한 지침서이다. 이처럼 책을 가까이 하면서 보내는 일본의 노인들의 모습이 무게있게 다가온다
여가 시간 1위는 게임이라니통계청이 지난 12월 12일 발표한 '2017년 한국의 사회동향'을 보면, 초등학생(4~6학년)의 91.1%, 중학생의 82.5%, 고등학생의 64.2%, 성별로는 남학생의 91.4%와 여학생의 66.7%가 온라인·모바일·비디오 게임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과몰입군과 과몰입위험군 청소년은 ADHD, 불안, 우울감 수준이 게임선용군과 일반사용자군 청소년보다 높은 반면 통제력,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 자존감 수준은 이들보다 낮았다. 특히 게임 과몰입군 청소년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불안, 우울감 수준이 일반사용자군 청소년보다 높은 것으로 조사되어 대책이 시급하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게임중독으로 겪는 개인적, 사회적 문제점이 대두된 건 이미 오래된 일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필자 역시 맞벌이 부부이다보니 초등학생이던 아들을 일찍부터 돌봐주지지 못해서 오랜 동안 컴퓨터 게임과 싸우다시피 했다. 그 터널을 지나는데 아이도 나도 많은 시간을 아프게 보냈고 힘들어했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교직을 포기하고 전업주부의 삶을 선택하고 싶을 만큼 그 길고 힘든 시간이 아깝다. 게임중독 치료도 학부모 교육부터 이제부터라도 초등학생들의 게임중독을 해결할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우리 1학년 학생도 입학 초기부터 학부모와 꾸준히 상담을 하고 학생지도에 힘쓴 결과, 지금은 게임중독으로부터 해방되어 매우 고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학교와 학부모가 한 마음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다. 가장 어려운 점은 학부모가 이미 게임을 즐기는 경우였다. 그러니 학부모 교육이 먼저였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라서 조슴스런 접근이 필요했다. 요즈음 젊은 학부모들의 게임중독은 상당히 심각하다. 이것은 우리 반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확인된 사실이다. 자녀들 앞에서 부모가 게임하는 시간이 많으니 어떻게 자녀의 게임중독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거의 매일 알림장에 게시간 줄이기, 게임 안 하기를 칸을 만들어 학부모의 사인을 받게 했다. 자녀가 게임을 했는지 안 했는지 날마다 O, X 표시를 해서 담임 선생님에게 확인을 받게 한 알림장의 효과는 대단했다. 요즈음 우리 1학년 아이들은."선생님, 우리 반 알림장에 부모님도 게임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써 주세요."라고 부탁하는 아이들까지 생겼다. 부모님이 게임을 하니 걱정된다는 거였다. 게임중독의 나쁜 결과를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나다 필자는 비결을 제시한다. "부모님이 게임을 하실 때마다 여러분이 즐겨 읽는 재미있는 동화 책을 읽어드리면 어떨까요? 부모님도 동화 책을 좋아한답니다. 더구나 1학년인 자식이 사랑스럽게 책을 읽어주면 얼마나 행복하시겠요요? 그리고 부모님이 게임을 안 하실 때마다 칭찬을 해 드리는 것도 좋아요. 어른들도 칭찬을 들으면 더 잘하고 싶거든요." 지금 우리 1학년 학생들은 게임하는 시간 대신 독서를 즐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것 또한 알림장에 매일 독서한 책 이름과 독서한 시간을 학부모가 확인하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학생들을 움직여서 학부모님까지 움직이게 이 방법 역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자녀가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앞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부모는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 반 학부모 중에는 학부모독서동아리 회원이 30%에 이른다. 바쁜 학부모가 일하는 틈을 내어 학교에서 운영하는 학부모독서동아리에 참여하는 모습은 게임중독을 이겨낸 모습이어서 더욱 감사하다. 이제 담양금성초(교장 최종호)1학년 학생들은 게임중독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틈만 나면 독서하는 풍경으로 필자를 즐겁게 한다. 집에 가서도 열심히 독서하는 자녀를 보며 학부모님들도 참 좋아한다. 겨울방학이 되면 담양공공도서관을 찾거나 책방 나들이를 하겠다는 다짐을 들으며 교육의 효과에 놀라는 중이다. 요란스럽지 않으면서도 가랑비에 옷 젖듯 조용한 교육이 한 사람의 학생, 한 가정의 학부모를 변화시킬 수 있다.
[한국교육신문 백승호 기자] 교육부가 무자격교장공모제 확대를 위한 ‘교육공무원임용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가운데 한국교총이 즉각 철회를 요구하고 나섰다. 학교를 정치장·선거장화 하고 교육감 코드인사로 악용될 소지가 커 교육현장에 불안정성을 가중시킬 수 있다 우려다. 교총은 무자격 교장공모제의 폐단을 지적하며 교육계 대표적 적폐로 규정, 이에 대한 개선을 요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밀어붙인다면 강력 투쟁으로 맞서겠다고 밝혔다. 교총은 27일 교육부 입법예고에 대한 입장을 통해 “교장 공모제는 당초 능력 있는 공모교장을 임용해 학교현장의 긍정적 기반을 조성하겠다는 취지로 도입됐으나, 무자격 공모제 시행으로 교원으로서의 열정과 전문성을 가늠할 수 있는 기초적인 기준도 배제하고 오직 교육감을 선거에서 밀어준 정치세력의 보은 인사 수단으로 악용돼 왔다”며 “학교 현장에 폐단이 큰 무자격교장공모제를 확대하려는 것에 대해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특히 “무자격 교장공모제의 경우 제도 시행 이후 지속적으로 진보교육감과 선거 지원 세력의 보은인사 수단으로 악용돼 온 ‘적폐 중의 적폐’ 인사 제도”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확대하려는 것은 정부가 나서 성실히 근무하고 연구하며, 보직교사로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교사의 승진기회를 박탈하는 불공정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올해 국정감사에서는 나경원·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이 무자격교장공모 교장 중 수도권의 90%, 전국의 80% 이상이 특정 노조 출신이며, 서울·인천·광주·전남 등의 지역은 제도 시행 이후 100% 특정노조 출신만 교장으로 배출됐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교총은 또 그동안 무자격교장공모제 시행 과정에서 나타난 임용과정의 불투명성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하며 제도의 확대 방침은 반드시 철회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총은 “공모 교장들의 자기소개서에 버젓이 진보교육감과의 친분을 강조하거나, 교육경력이 아닌 특정노조 투쟁 이력을 소개하는 등 사실상 공모제가 공모가 아닌 ‘사전에 짜고 치는 공모제’로 전락한 지 오래”라며 “지금처럼 특정노조 투쟁 경력과 교육감과의 친분이 곧 승진의 보증이 되는 제도가 확산될 경우 교사들은 교단이 아닌 시위 연단으로 달려가고, 학생 교육보다는 교육감 선거 운동에 뛰어다닐 것임은 자명하다”고 우려를 표했다. 교총은 이번 사안이 심각하고 중차대하다는 점에서 27일 오후 3시 ‘긴급 한국교총-시·도교총 회장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향후 투쟁방법과 수위 등 종합적 대응방안을 결정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교육부가 이날 발표한 교육공무원임용령개정안에 따르면 무자격 공모제(자격 미소지자 대상 교장공모제) 학교 비율을 자율학교 또는 자율형 공립고 중 신청학교의 15%로 제한한 조항을 삭제하여 전면 확대한다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선생님, 저 한양대에 갑니다 빌려주신 책, 정말 도움이 되었어요 광양여중 재직시 지도한 한 학생이 12월 18일 저녁, "저 한양대에 갑니다"라고 카톡을 보내왔다. 만남이란 참 기묘하다. 이 학생은 중 1학년 때 만났다. 처음 지도를 받게 된 사연은 실내화를 신고 교실 밖으로 나갔고, 그 상태로 집에 가려고 한 것이다. 이처럼 학생들의 실내화, 실외화 개념이 없이 신고 다닌 것이다. 이런 사건을 학생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이 학생이 지각을 하여 지도를 하게 된 사연이다. 그런데 이 학생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기록을 남겨 놓았다. 자신이 작성한 반성문에는 교장 선생님에 대한 불만을 토할만도 하지만 깊이반성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지각한 나 스스로가 한심하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경험이 평소 부지런하지 못한 나에게 특훈이었으며, 지각한 학생을 잡으려고 추운 아침 바람을 맞으며 서 계시던 교장선생님께도 죄송스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이 들어서인지 스승의 날에는 손편지를 써서 나에게 가져왔다. 보통 학생들은 교장실에 가는 것을 무서워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잘 지도해 주심에 감사한다면서 과거 1학년 때 자신이 잘못한 것을 지도받은 사항을 세심하게 기억해 기록하고 있었다. 또 학습에 참고가 될 책을 읽도록 빌려주었는데 잘 읽었는지, "항상 저에게 관심을 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번에 선생님께서 빌려주신 책,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제가 뭐가 부족한 지도 알았고, 더 나아갈 방향을 알았어요. 선생님께서 한국교육신물에 올리시는 글을 보았는데 정말 좋았어요!...... 선생님의 글을 읽고 깨닫는 점도 많고 저 자신도 반성하게 돼요." 이후 2학년 때는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여서는 꿈이 바뀌었다. 중2학년 때도 학습습관이 많이 바뀐 것은 결코 아니었다.적혀진 항목의 절반 정도만 수행할 정도였다.하지만 3학년이 되어 학습습관이 매우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의 행동선언에도 "수업시간 5분 전에 예습, 복습을 하며, 수업 끝나고 복습을 한 번 더 한다"로 기록하여 마지막까지 자신의 습관 개선을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학기 수업이 끝나고 7월 14일부터 16일까지 보성에 있는 용정중학교에 체험학습을 의뢰했다. 친구인 민서와 함께 참가하는 기회를 가졌다. 기록문을 보니 "애들도 모두 공부하고 있어 그 분위기에 휩쓸려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으며, 궁금한 점들도 스스럼 없이 물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공학이 전공인 김인권 박사가 수학공부에 관한 특강을 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곳에서 "가장 많이 배우고 간 것은 '독서'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나와 광양여중에서 마지막 송별을 하기 전인 8월 27일 엽서에 손편지를 써 가져왔다. 편지에는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들(공부방법, 인성, 스피킹 등등)을 뼈에 새겨 잘 기억하여 앞으로 살아갈게요!"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9월 1일자로 광양을 떠나 순천동산여중으로 임지가 바뀌었다. 3학년 1학기가 되어 다시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때는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겠다'는 의사를 나에게 보였다. 1학기 학교 성적에서도 이과에서 최상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사연인지 잘 모르겠지만 한양대학교 산업 정보시스템 공학과를 선택해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하여 왔다. 어찌보면 머리도 좋았지만 다소 흐트러진 모습을 가진 1학년 때 방향을 잘 잡지 못하면 딴 길로 갈 가능성도 있지만 이 학생은 결코 지도하는 나의 관심에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면서 따라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이 학생의 미래를 지켜보면서 그의 장래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가은초등학교(교장 전규순) 희양분교장에서는 12월 21일에 드론을 날리는 체험활동을 했다. 이 행사는 꿈끼 탐험대 진로체험학습으로 다양한 체험 중심의 인성활동을 통해 학생들의 미래 사회 핵심 역량을 강화하고자 실시됐다. 드론으로 배우는 우주항공과학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수업에서는 미래의 직업인 우주항공과학에 대한 이해 및 전망 등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드론 조종하는 방법과 안전교육을 실시한 후 학생들이 직접 드론을 조종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드론을 처음 보아서 신기해하고, 직접 조종을 할 때는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 답답해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 중 2학년 학생은 다른 학생들과 달리 능숙하게 드론을 조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처음에는 저도 생각처럼 드론이 잘 움직이지 않아서 힘들었지만 이틀 동안 여러 번 연습을 하니 잘 조종할 수 있게 되었어요. 드론을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서 기뻐요” 라며 뿌듯한 마음을 전하였다. 이 날 진로체험학습을 통해 우주항공과학에 대한 관심 고취 및 미래사회 핵심 역량인 의사소통, 공동체, 자기 관리 역량 등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가은초등학교(교장 전규순)는 11월 29일 농어촌 전원학교의 프로그램인 꿈끼탐험대 활동으로 대구 리틀소시움에서 꿈끼도시체험활동을 실시했다. 요리사에서부터 시작해 고고학자까지 다양한 분야의 총42개 직업 중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적성과 흥미에 맞게 6~8개의 직업을 선택하여 체험할 수 있었다. 한○○학생(1학년)은 "운전면허증을 따서 아빠처럼 자동차를 운전도 해 보고, 통장 개설, 경찰관 체험 등 직업 체험이 흥미진진했다"고 한다. 가은초 어린이들은 리틀소시움 체험 활동을 통해 진로를 다양하게 탐색해볼 수 있었고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제46대 경북교총 회장에 류세기 경안고 교장이 당선됐다. 경북교총은 제46대 회장선거에서 기호1번 류세기 후보가 유효투표의 62%인 4697표를 얻어 당선됐다고 지난달 23일 밝혔다. 이번 선거에는 총 회원 9252명 중 7619명이 참여해 85%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류 신임회장은 공약으로 정책을 선도하고 경북교육의 중심이 되는 교총, 젊은 회원과 소통하고 교원 사기진작에 앞장서는 교총을 내걸었다. 또한 시도 교육이양과 관련해 학교자율성을 확대하고 교권을 강화하는 교총, 회원 복지와 공익적 사회활동을 확대하는 교총 등을 핵심과제로 제시했다. 안동고,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영남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안동시교총 부회장을 거쳐 경북교총 대의원, 교총 발전특위 위원, 경북사립중고교장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류 신임회장은 “학교현장의 정책 현안을 해결하고 교권 회복으로 든든한 울타리가 되는 강한 교총을 만들겠다”며 “모두 힘을 모아 변화와 도약을 이끌어 나가자”고 말했다. 임기는 1월1일부터 3년이다. 경북교총은 지난해 10월 26일 선거공고를 시작으로 11월 13일 후보자 화정, 11월 22일까지 공식 선거운동, 11월 27일~12월 8일 오프라인 투표방식으로 선거를 진행했다.
시절은 동지를 지나고 있습니다.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어둠이 휘몰아 오는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에는 눈썹처럼 고운 달과 그 옆으로 별무리가 펼쳐져 있습니다. 칠흑 같은 동짓날 밤입니다. 깊고 깊은 어둠, 그 어둠을 거두어 갈 태양의 빛은 내일 아침이면 더 아름답게 떠오를 것입니다. 이 어둠이 있기에 빛이 더 간절하겠지요. 빛은 어둠을 짝하여 가장 환하게 타오를 것입니다. 지옥처럼 깊은 어둠이 내린 동짓날, 긴긴 밤을 읽은 책이 있습니다. 김경복의 네 번째 평론집 『연민의 시학』입니다. 저 역시 평론에 관심을 갖고 있기에 최근 평론집을 많이 읽고 있습니다. ‘평론’은 작가의 세계를 더 깊고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작품이 가지는 새로운 지평을 찾아내는 발견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좋은 평론집을 읽으면 원석이 장인의 손을 거쳐 다시 아름다운 보석으로 재탄생되듯 작가가 쓴 작품에 또 다른 생명을 불어넣는 듯 느껴집니다. 『연민의 시학』은 전체적으로 영혼과 한의 미학, 노년의 삶과 죽음, 의식의 점등과 동일성, 여성의 자의식과 치유 등의 네 가지 테마로 시인들의 시를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시인과 작품의 세계를 동시 일컬을 수 있는 시의 태동이 느껴집니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아직도 자신은 비평가보다 시인으로 한 생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비평이 작품에 대한 이성적 판단보다는 심중에 일어나는 감성적 반응에 더 기대어 전개된다는 말을 통해 시인의 의식에 나의 의식을 동조시킨 비평, 즉 ‘창조적 비평’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참 멋진 표현이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시가 비평을 통해 새롭게 빛을 더해가는 과정이라는 저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 독자 자신의 경험이나 지향과 맞물려 섞여들면서 시는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존재의 본질을 변화시킨다.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다. 그 새로운 세계의 접면에 영혼의 생살이 닿게 되었을 때 생기는 어질머리가 바로 여러 날을 혼미하게, 그러면서 달콤하게 보내는 까닭이 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고통과 쾌락의 초기 증상은 그 호르몬의 변화는 같고 그 중상이 비슷하므로 그것이 고통인지 쾌락인지 잘 모르게 된다고 하는데 바로 이 경우가 거기에 딱 들어맞는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한 시가 내게 기쁨인지 고통인지 그 시작은 어질머리로 출발해 여러 날들을 숙고하는 동안 마음의 평정을 주는 기쁨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나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고통의 죽비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기쁨이든 고통이든 일상 속의 무미건조한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즐거운 고통이다. 좋은 시는 나의 존재성을 뒤흔들어 각성케 하는 회초리 같은 것이다. p16 밤이 깊고 바람은 차갑습니다. 깊은 산 속에서 만난 찬샘 같은 한 권의 평론집을 동지팥죽을 먹듯 기쁘게 읽으며 올해의 제 어둠을 갈무리합니다. 내일은 병아리 눈물보다 더 작지만 분명히 낮이 길어질 것입니다. 태양은 조금씩 더 이 땅에 머물다 갈 것입니다. 이렇게 밝음이 어둠을 몰아내듯 새해에는 우리 주변의 삶이 더 행복하고 밝아졌으면 하고 기도합니다. 웅숭깊은 비평의 그늘 속에서 따뜻한 시의 힘을 찾아내는 비평가처럼, 저도 어둠이 빛의 다른 이름임을 기억하며 더 성실하게 새해를 맞이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연민의 시학』, 김경복 지음, 시인동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