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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강인수(수원대 교육대학원장) 1. 머리말 교육활동의 행사로 소풍과 수학여행을 가게 될 때 학생의 안전사고나 학생간의 싸움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교외에서의 교육활동에는 교실내나 학교에서보다 학생지도나 보호·감독이 더 힘들게 된다. 그런데 교외에서의 교육활동 중이거나 휴식시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교사의 보호·감독 의무를 인정해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인지가 문제이다. 그리고 교내에서라도 정규학습시간 시작 전의 자율학습 시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교사가 보호·감독의무를 가지고, 사건에 대한 법적 책임이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들 문제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졸업여행중 학생간 폭력사고에 대해 교사는 책임이 있는가 가. 문제와 사건 교육활동의 한 행사로 소풍과 수학여행을 가게 된다. 이 때 교사들은 교통안전과 학생들의 건강과 안전에 많은 주의를 하고 고생을 하게 된다. 목적지까지 가고 오는 도중의 교통안전과 안전사고 방지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목적지에 도착한 후 단체로 고적답사를 하거나 놀이를 할 때에도 평소보다 더 많은 주의를 하게 된다. 학생들은 일상의 학교를 벗어나 낯선 곳의 분위기에 기분이 들뜨기도 한다. 단체로 문화재, 공연, 자연경관 등을 즐기는 시간에는 물론 교사들이 지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단체로 하는 교육활동 외에 학생들의 개인 시간이나 휴식시간이 있다. 이 때에도 교사들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 주고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 두 사람이 아니고 한 학급만 해도 40여명이 넘으니 개인시간이나 휴식시간에 이들을 모두 지켜보고 보호·지도하기란 어렵다. 특히 수학여행 중 숙소에서 휴식시간은 학생들은 각자의 방에서 쉬거나 놀이를 할 수도 있고 숙소 주위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담임교사가 여러 방에 나누어진 학생들의 방을 모두 지킬 수 없는 시간이다. 이 때 숙소의 방에서 학생들끼리 싸우는 일이 있을 경우 다른 방에 있는 교사들은 연락을 받기 전에는 모를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이 발생할 경우 교사의 보호·감독 의무를 인정해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인지가 문제이다. 이러한 사례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보기로 한다. 고등학교에서 고적답사를 겸한 졸업여행 중 숙소 내에서 휴식시간에 학생들 간에 폭력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로 한 학생이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교사의 보호·감독 의무를 인정할 것인지, 그렇다면 교사는 의무를 위반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인데 이러한 사건에서 교사의 책임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살펴보기로 한다. [PAGE BREAK]나. 법원의 판결 (1) 교사의 학생 보호·감독 의무의 범위 지방자치단체가 설치·경영하는 학교의 교사는 학생들을 보호·감독할 의무를 지는 것이지만 이러한 학생에 대한 보호·감독의무는 학교 내에서의 학생의 모든 생활관계에 미치는 것이 아니고 학교에서의 교육활동 및 이와 밀접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생활관계에 한한다고 판시하였다. 그리고 그 의무범위 내의 생활관계라 하더라도 교육활동의 때, 장소, 가해자의 분별능력, 가해자의 성행,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기타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사고가 학교생활에서 통상 발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예측되거나 예측가능성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교사가 보호·감독의무 위반에 대한 책임을 진다고 하였다. (2) 이 사건의 판결 고적답사를 겸한 졸업여행 중 숙소 내에서 휴식시간에 학생들 사이의 폭력사고로 말미암아 한쪽 눈을 실명한 사안에서, 학교측의 안전교육이나 사전지시에 따르지 않고 돌발적으로 벌어진 사고로서 예측가능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보호·감독의무 위반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대법원 1999.9.17. 선고, 99다23895 판결 ‘손해배상(기)’) 3. 자율학습 시간에 급우를 다치게 한 경우 교사의 책임 있나 가. 문제와 사건 정규 수업이 시작하기 전이라도 교사는 출근 이후 교실에서 학생을 지도하고 보호·감독할 수 있다. 그러나 정규 학습시작 전에 반드시 교사가 교실에서 학생을 보호·감독해야할 의무가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그 시간에 학생간의 사고나 시설물에 의한 안전사고가 발생하였다면 교사의 보호·감독 의무를 인정할 것인지의 여부 및 손해배상범위가 문제가 된다. 이 사건은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 한 학생이 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에 교실에서 주인을 찾아주려는 마음에서 실과수업 교재인 아크릴판을 던지다가 잘못되어 다른 학생의 눈을 다치게 하였다. 이 사건에서 자율학습시간에 교사의 학생에 대한 보호·감독 의무 인정 여부 그리고 6학년학생의 발달정도에 따른 판단능력 인정 여부 또한 손해배상 범위 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을 보기로 한다. 나. 법원의 판결 (1) 사고 발생의 예측 가능성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요지는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의 교장이나 교사는 학생을 보호·감독할 의무를 지는 것이나 이러한 학생에 대한 보호·감독의무는 학교 내에서의 학생의 모든 생활관계에 미치는 것은 아니고 학교에서의 교육활동 및 이에 밀접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생활관계에 한한다. 그리고 그 의무의 범위 내의 생활관계라고 하더라도 사고가 학교생활에서 통상 발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예측되거나 또는 예측가능성(사고발생의 구체적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만 교장이나 교사는 보호·감독의무 위반에 대한 책임을 진다고 할 것이다. 그 예측가능성에 대하여는 교육활동의 때, 장소, 가해자의 분별능력, 가해자의 성행,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기타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판결하였다. [PAGE BREAK](2) 이 사건의 판결 가해자와 피해자가 초등학교 6학년생들로서 비록 책임을 변식할 지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초등학교 6학년 정도라면 대체로 학교생활에 적응하여 상당한 정도의 자율능력, 분별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가해자의 성격도 친구들과 잘 사귀고 책임감이 강한 학생이었으며 피해자와도 원만한 사이였고 이전에는 교실에서 학생들 사이에 아크릴판을 던지는 등의 장난 등은 없었던 경우, 호기심이 많은 학생들이 장난 등 돌발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많다고 하여 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에 교실에서 주인을 찾아주려는 마음에서 실과수업교재인 아크릴판을 던지는 등으로 인하여 잘못되면, 신체에 커다란 충격을 줄 수 있는 위험한 행위를 하리라는 구체적인 위험성이 있다거나 담임교사 등이 이를 예측하였거나 예측 가능하였다고 보여지지는 아니하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돌발적이거나 우연한 사고에 대해서까지 교사 등에게 보호·감독의무 위반의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고 판결하였다(대법원 1997.6.27. 선고, 97다15258 판결 ‘손해배상(기)’ [공1997하, 2363]). 4. 맺는 말 위의 사건에서 고등학생의 졸업여행 중의 사건에서나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의 사건에서 예측가능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보호·감독의무 위반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초등학교의 교장이나 교사의 보호·감독의무는 학교 내에서의 학생의 모든 생활관계에 미치는 것은 아니고 학교에서의 교육활동 및 이에 밀접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생활관계에 한한다고 판시하였다. 그리고 그 의무의 범위 내의 생활관계라고 하더라도 사고가 학교생활에서 통상 발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예측되거나 또는 예측가능성(사고발생의 구체적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만 교장이나 교사는 보호·감독의무 위반에 대한 책임을 진다고 할 것이다. 그 예측가능성에 대하여는 교육활동의 때, 장소, 가해자의 분별·능력, 가해자의 성행,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기타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판결하였다. 초등학생이나 고등학생은 그 연령수준에 맞는 분별, 판단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교사의 예측 가능성을 판단하였다. 근래의 학교안전사고의 판결경향은 과거에 비해 교사의 예측가능성의 유무를 기준으로 판결하여 교사의 교육활동 보호에 상당한 배려가 되고 있다.
이의영(한국사립초등학교장회장, 서울경희초 교장) 사립초등학교는 건학이념과 특색 있는 교육으로 자율 학교로서의 자율적 발전을 해야 한다’ 교육부의 사립초에 거는 기대와 자율학교로서의 책무성에 대한 견해이다. IMF 이후 어려워진 학교재정의 일부라도 지원 받아 극복해 보려고 요청을 했을 때도, 또한 의무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립초에도 최소한 1인당 지원되는 학생 교육비의 지급을 요청했을 때도 재정지원이 불가하다면서 내린 교육행정 최고기관의 사립초에 대한 시각이다. 지원은 없고 규제만 심해 평준화 교육이 세계화 지식기반 사회인 21세기 인적자원 육성에 한계가 있다고 보아 자립형 사립고 육성에 길을 트고 있는 것도, 건학이념에 따라 학교 책임하에 차별화·특성화 교육으로 다양한 인재양성을 기대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상당수 사립고가 자립형으로의 신청을 하였으나 엄격한 심사와 아직도 평준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태와 여론에 밀려 극히 소수만이 인가된 상태이다. 자립형이다 하면 신입생 선발권부터, 행·재정, 인사, 교육과정운영, 학사운영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지원과 간섭 없이 학교 나름대로 경쟁력을 가지고 차별화된 교육을 인정함으로써 다양한 인재양성을 학교의 교육력으로 이룰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선진국 사립학교 육성에서 보편화되어 있는 것을 일부 조심스럽게 푼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자립형 학교에 대해서는 온갖 학교운영에 대한 규제를 풀면서 국고지원 없이 자율적으로 재정자립을 통하여 학교경영을 하여 경쟁력으로 학교발전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혜택(?)이 이미 사립초에 주어졌다고 보는 것이 교육행정 최고위 부서의 견해다. 교육은 미래세대에게 ‘바르고 행복하게 살 힘’을 육성시키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의 가치관은 사람에 따라 가풍에 따라 다룰 수 있겠으며 목표지향도 수천 수만 가지일 것이다. 선진국의 사립초는 그 학부모들이 막대한 교육비를 납부하면서 자녀의 미래를 전문직, 관리직, 예술직 등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려는 것이 기대목표이다. 따라서 사립초의 건학이념 특수성, 교육비, 차별화된 교육내용 등에 세심한 검토와 검증을 거친 뒤 보내고 있으며 학교도 이러한 수요자의 욕구와 전통에 따라 학교수준의 교육과정으로 소신껏 학교경영에 전력을 기울이고 신뢰도와 특성화를 높인다. 정부에서도 가능한 지원을 할지언정 간섭과 규제는 거의 하지 않으며 다양한 인재육성을 위하여 힘쓰는 추세다. 이에 따라 전형권, 행·재정, 인사권, 교육과정, 학교의 특색교육, 영재교육, 월반제, 학사관리 등에 대한 권한은 기정사실화하고 학교의 발전여부도 경쟁력에 맡긴다. 우리 나라처럼 국고지원은 없으면서 규제만 하는 나라가 있을까? 말레이시아나 동남아시아에도 사립초에 대해 규제만 하는 나라는 없다. [PAGE BREAK] 학생 선발권 학교에 줘야 신입생 전형에서 추첨에 의한 방법은 어린 새싹들에게 사행심과 운수를 체험시킨다(교육법, 사립학교법, 시행법, 예규 어디에도 없는 1964년 군사독재정권 때 시작된 관행을 계속함). 사립초도 온갖 공문·보고서는 일반 공립학교와 똑같이 하고 있고 수시로 있는 지도장학·학사운영 규제, 시의원·교육의원 요구자료 제출, 학교발전기금 모금상황·사용내용 등을 분기별로 샅샅이 살핀다든지 하여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학교와 똑같이 감독하면서 거기에 정기감사도 시행하여 옥죄고 있다. 사립초는 법인에 회계사 자격자의 감사가 있어 감사를 받는데 이를 믿지 못한다. 학교운영이 어려워 사립학교 학부형도 교육세를 내고 있으니 조금 지원을 요청하면 사립초는 자율학교로 건학이념과 특수성에 맞게 교육하라고 자립형을 내세워 기각하면서 규제만 하니 숨통이 막힐 지경이다. 21세기는 다양한 방면의 인재가 요청되는 시기이며 세계의 모든 국가 교육정책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 나라도 자립형 사립고를 국책사업으로 점차 확산하려 하고 있다. 이제는 고형화되고 있는 교육의 틀을 과감히 깨고 개개 사람에게 맞추는 교육의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미래지향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시기이다. 모든 학생들을 다같이 하향 평준화 시켜 보통 국민만을 양산하는 현 교육 규제를 과감히 떨쳐 버릴 때이다. 이런 일은 앞장 설 수 있는 교육기관이 현 초·중·고교에서는 자율형 운영을 권장 받고 있는 사립초가 앞장서서 건학이념에 맞는 학교발전을 이룩할 때이다. 사립초에서 수학시키려는 학생을 학교의 특성에 맞게 선발해야 하고 설립목적에 따라 종교중심교육·예능중심교육·인성발달 중심교육·영재교육 등 차별화되고 내실 있는 교육과정 구축, 투명하고 신뢰받는 학교상, 수요자중심의 교육활동 전개, 꾸준한 교수-학습 방법 개선, 학교경영자의 투철하고 확고한 교육철학과 교육관, 전 교직원이 합심하여 명문사립으로의 도약을 이룩하는 굳은 의지 등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최은희(미 토마스 제퍼슨 초등학교 교사) 미국은 우리 나라처럼 임용고시를 통해 일괄적으로 교사를 뽑아 발령을 내지 않고, 일반 대기업 사원 채용처럼 인터뷰를 거쳐서 뽑게 된다. 그래서 교직과목 수업을 듣다 보면 이력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인터뷰 당일날 옷차림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언급하는 교수를 쉽게 만나볼 수 있다. 필자도 신문에 난 ‘교사채용박람회(Teacher’s Job Fair)’ 광고를 보고 인터뷰에 임했다. 박람회 장소에 가면 각 학교들이 부스를 마련해 놓고 학교 이름을 멋있게 장식해서 붙여 놓은 후 인터뷰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 교장과 비서(미국 학교에서는 사무적인 일들을 보조하는 비서가 따로 있다)가 앉아 인터뷰를 하게 된다. 그러면 예비 교사들은 자신이 근무하고 싶은 학교에 가서 인터뷰를 한 후 교장이 채용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물론 교장도 자신이 맘에 드는 교사를 뽑을 수 있고 교사도 자신이 가고 싶은 학교에 가게 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학군이 좋은 학교는 교사가 몰리게 되고, 반대로 그렇지 않는 학교는 인터뷰를 신청하는 사람이 없어서 골치를 앓을 때도 있다. 새 학년이 시작하기 직전인 6월에 대부분 박람회를 하게 되는데(미국 학교들은 8월 20일경에 새 학년을 시작한다), 박람회 기회를 놓친 교사들은 교육청(School Board Office)에 이력서와 신청서(application)를 작성해서 제출해 놓으면 서류 심사를 거친 후 교사가 부족한 학교로부터 인터뷰 제안을 통해 교사가 되는 방법도 있다. 교직과목 이수 전에 자격시험 거쳐야 인터뷰를 해서 교사를 뽑는다고 해서 무조건 아무나 지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는 교대를 졸업하거나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나면, 무시험 전형으로 자격증이 주어지지만, 미국에서는 시험을 치뤄 일정 점수를 넘지 못하면 자격증을 소지할 수 없다. 물론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나서 자격증 없이 교사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월급이 자격증 소지 교사의 절반 수준이고, 만약 교사 자격증을 소지한 사람이 신청서를 냈을 때는 여지없이 그만둬야 하는 실정이어서 자격증 없이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교사자격증 취득시험을 통과하려고 한다. 미국 교육법에는 지원자 중 교사자격증을 소지한 사람들로 교직을 충당한 다음에 교사가 부족할 경우에만, 자격증은 없지만 4년제 대학을 졸업했거나 교직과목을 이수한 사람에 한해서 채용을 하게 되어 있다. 단 채용된 후에는 일반 4년제 졸업생들은 의무적으로 교직과목을 이수하도록 한다. 또한 대학 내에서 아무나 교직과목을 이수할 수는 없다. 교직과목을 이수하기 전에 반드시 청각 테스트 및 기타 교사로서 필요한 테스트들을 통과한 후(이 부분은 한국과 같다), 프랙시스(PRAXIS)라고 불리는 시험 중 읽기, 쓰기, 수학(PPST:READING, PPST:WRITING, PPST:MATH) 시험을 통과해야만 교직과목을 이수할 수 있다. 이 시험들은 기본적인 읽기, 쓰기, 수학에 관한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인데 교사의 질을 높이기 위한 한 방편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쓰기, 읽기, 셈하기 능력을 지닌 사람에 한해서만 교직과목을 이수하도록 함으로써 미연에 교사의 질이 낮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이다. [PAGE BREAK]PRAXIS(Professional Assessments for Begining Teachers)는 교육행정가, 중등교육자 등을 막론하고 교직에 관련된 모든 자격증에 관련된 시험을 일컫는 말이다. 초등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기초 시험을 통과한 후, 교직과목을 이수한 다음 세 가지 시험을 더 통과해야 한다. 세 가지 시험은 초등교육과정에 대한 이해와 교수법 및 평가 등 교육학에 관한 시험, 교육심리 및 교수법의 적용에 관한 시험을 말하는데, 교육학에 관한 시험(Elementary Education:Curriculum, Instruction, and Assessment)은 2시간에 걸쳐 110개의 객관식 문제가 주어진다. 초등 교육과정에 대한 시험(Elem Ed:Content Area Exercises)은 4개의 주관식 문제를 주어 한 문제 당 30분 안에 교육학 지식을 어떻게 현장에 적용해 낼 것인지를 답하는 문제들이다. 마지막으로 교수법의 적용 및 실제에 관한 시험(Principles of Learning and Teaching:K-6)은 45개의 객관식과 6개의 주관식 문제로 전문직으로서 교사가 갖추어야 할 윤리 및 지식, 학생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도 방법, 교육 매체 이용방법, 교육 자료, 교육환경 등 보다 실질적이고 실천적인 질문들을 답하는 시험이다. 이 모든 시험들을 각 주마다 제시하는 일정 점수를 넘긴 후 교육부(Department of Education) 로 신청서와 함께 보내면 교사 자격증을 받게 된다. 하지만 각 주마다 요구하는 점수가 각각 다르고, 한 주에서 받은 자격증은 다른 주로 가면 인정하지 않아 만약 다른 주로 이주할 경우에는 그 주에서 지정한 대학에서 몇 과목을 이수해야만 그 주의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서 교사가 되니 어찌 보면 우리 나라보다 훨씬 복잡하고 교사들이 더 전문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봉급은 주(州)마다 천차만별 하지만 여기서 우리 나라 교육의 장점이 훨씬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은 각 주(州)마다 월급이 틀리고 한 주 안에서도 각 시, 지역구마다 월급이 다르다. 각 지역에서 거둬지는 세금에 따라 예산이 책정되므로 교육에 투자하는 교육비도 다르게 되어서 30분이나 1시간 정도 운전하고 가면 교사 월급이 연 2∼3만 달러 차이가 나는 곳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여러 지역에서는 벌써 올해의 목표를 100% 교사자격증을 갖춘 교사로 고용하기로 세웠다. 하지만 결국은 바로 옆에 있는 시에서 전근하는 교사들이 생겨나게 되고 급료 차이가 나는 만큼 자격증이 있는 교사들은 월급을 많이 주는 곳으로 당연히 옮겨간다. 교사 자격증을 소지한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결국 어떤 지역은 교사 자격증을 소지한 교사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지금 내가 근무하는 지역구에서 올해 연 5000달러의 인상폭이 있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서 급료가 동결된 지역구는 자격증을 소지한 교사가 45%에 머문 반면, 내가 근무하는 지역은 자격증 소지 교사는 95%를 넘어섰고, 석사 이상의 학위를 소위한 자격증 소지자만 해서 65%에 육박했다. 한마디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고, 어디에서 살고 있느냐가 인생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 한국 사람들 못지 않게 좋은 선생님, 좋은 학교를 찾아서 이사하는 맹모들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의 교육예산은 5∼10%가 정부예산(Federal Funds), 44∼55%는 각 주의 소비세, 소득세, 물품세, 담배 소비세, 부가가치세 등 주예산(State Funds)으로 충당되며, 나머지 40∼50%가 각 지역의 재산세로 구성되기 때문에 발생되는 현상이다. 아무리 우리 나라 교육조건이 열악하다고는 하지만 교사의 질이나 교육 조건이 미국보다는 평등하며 월등하다는 사실을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물론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세금을 많이 거둬들인 주는 거의 완벽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미국 국가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부시행정부가 상당히 골치를 썩고 있는 부분이 바로 교사의 질과 교육 불평등에 관한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PAGE BREAK] 발령 2년 뒤 평가 통과해야 ‘진짜’ 교사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교사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시험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2년 뒤에 있을 교사평가(Interstate New Teacher Assessment and Support Consortium)에서 합격을 해야만 교사로서 인정을 받을 수가 있는데, 이 평가에서 일정 점수를 받지 못하면 교사를 그만 두어야 한다. 그래서 새내기 교사들에게는 이 평가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대신 교사의 전문성을 높여주는데 기여한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대신 이 평가는 교사 일생에 단 한 번이기 때문에 청소년에게 주어지는 성년식 같은 것이기도 하다. 처음 교사가 되고 나면 1년 동안은 수습 기간으로 일정 기간 연수를 받은 지도교사(Mentor)가 새내기 교사를 도와준다. 그리고 근무하고 있는 학교의 교장을 포함하여, 다른 학교의 교장이나 경력이 있는 교사 등 3인으로 구성된 지도팀을 만나게 되는데, 처음 1년 동안은 수업을 수시로 관찰하고 새내기 교사와 수업에 관해 회의를 하는 등 적어도 1년에 4번 이상의 지도를 받게 된다. 1년의 지도 기간이 끝나게 되면 2년째 되는 해에는 평가를 받게 된다. 다시 3인으로 구성된 팀이 짜여지는데, 이 팀에는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는 배제된다. 그리고 1년 동안의 평가를 바탕으로 2년을 다 보내고 난 후에 평가서가 작성된다. 평가되는 항목은 총 10개이다. 즉 교사가 적절한 교수매체를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수업을 하고 있으며 수업 준비는 잘 하고 있는지 ■교실환경은 긍정적인 학습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적절한지 ■주어진 수업시간에 이동하는 시간이나 수업 준비하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학습에 투자된 시간이 최대화되는지 ■학생들의 행동지도는 잘 되고 있으며 학생 개개인의 특성에 맞추어서 적절한 행동지도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학생들의 발달 수준에 맞게 지도하고 있는지 ■학생들의 참여를 최대한 유도하는지 ■적절한 평가도구를 사용하고 있으며 피드백이 제때에 잘 주어지는지 ■교사의 전문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주변 동료교사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고 있는지 ■학교의 의사결정사항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지역사회, 학부모, 그리고 동료교사와 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등에 관해서 평가를 받게 된다. 최소 4년 지나야 종신재직권 취득 이 평가를 통과하고 나면 이제 교사들은 종신재직권(Tenure)을 얻기 위해 준비한다. 종신 재직권이 없는 교사들은 매년 새로운 계약서에 사인을 해야 한다. 9개월 단위로 매년 새로 계약을 해야 하는데 종신재직권이 없는 교사들은 수습교사로서 일한다고(Probationary Teaching Period) 볼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교사들은 해고의 두려움 때문에 행정가와 지역사회에 논쟁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2년에서 4년이 지나고 교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면 종신재직권이 주어지는데 한 번 받게 되면 평생 동안 유효하게 된다. 종신재직권을 받은 교사는 한 번 사인된 계약서로 평생 동안 근무하게 된다. 종신재직권은 월급을 적게 주고 경험이 적은 교사들을 고용할 수 있는 병폐에서 교사들을 보호하며, 안정된 직업을 보장한다는 장점이 있으며, 종신재직권을 받은 후에야 교사들은 해고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의 전문성을 개발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이렇게 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안정된 교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간이 지나고 나면 교사의 전문성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종신재직권을 얻는 과정에서 새내기 교사의 40% 이상이 교직을 떠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은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바로 전문성을 갖춘 교사-이 충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김삼웅(성균관대 겸임교수) 히틀러의 제3제국 수립 나치(NAZIS)는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을 통칭한다. 나치즘은 19세기 말엽 유럽에 일반화된 반(反)유대주의, 백색인종 지상주의, 국가주의, 제국주의 및 반사회주의와 반민주주의를 기초로 해 발생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과 함께 독일 제3제국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나치즘의 중심이론은 독일민족 지상주의와 인종론이었다. 여기에는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과 유대민족의 열등성이 대비되었다. 게르만 민족은 인류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종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을 지배할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반대로 가장 열등하고 해악적인 인종은 유대 종족으로, 그들은 아무리 환경을 개선하고 교육을 실시하더라도 천성적인 열등성과 해악성은 개선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유대종족은 항상 주위 환경을 부패시키거나 또는 해악을 만연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우수한 민족은 그들의 열악성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을 격리시키거나 또는 절멸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념적·정치적 배경에서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오랜 음모 끝에 마침내 독일공화국 총리에 지명되었다. 권력을 장악하게 된 히틀러는 의회 방화사건을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반대당을 탄압하면서 총선거를 통해 만든 전권수임법으로 강력한 1인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는 복수정당제를 폐지하여 일당독재를 확립하고 히틀러 유겐트, 나치부인단 등 전국민을 대중조직으로 묶었다. 여기에 반항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강제수용소에 감금하거나 처형하였다. 게르만 민족지상주의를 제창하면서 유대인의 공민권, 나중에는 영업권마저 박탈하고 이들을 강제수용소에 수감하였다가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치독일에는 300개가 넘는 강제수용소와 그 지소가 있었다. 확인된 것만 해도 3만3500명 이상의 외국인이 정치범으로 처형되고, 600만 명의 유대인과 수십만 명의 집시, 독일 각지의 병원에서 이송되어 온 10만 명 이상 환자, 330만 명의 소련인 포로, 유럽 피점령 지역의 주민 수백만 명이 살해되었다.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중 1944년 11월까지 9413명의 장교와 병사가 처형되었다. 민간인의 경우 적어도 40만 명의 독일인이 나치정권 12년 동안 ‘합법적’으로 살해되었다. 사형 이외에 같은 기간에 22만500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자유로운 예술과 학문, 언론이 소멸되고 사회 전체가 병영국가, 감옥과 학살장으로 전락하였다. ‘대독일’ 건설의 명분으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이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 나중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전부를 병합하였다. 이어서 폴란드를 침입하는 등 게르만 민족에 의한 동유럽 정복을 꾀하여 광적인 학살극을 자행하면서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를 전화(戰禍)에 몰아넣었다. 히틀러는 나치체제의 버팀목으로 친위대(SS)를 조직하고, 비밀경찰을 강화하여 각계 각층의 모든 국민을 감시토록 거미줄처럼 엮었다. 뿌리깊은 증오의 대상이 된 유대인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까지 닥치는 대로 강제수용소에 수감하여 혹독한 고문과 살육을 저질렀다. 교회, 군대, 학교, 노동조합을 나치 조직으로 획일화시키고 일반 국민도 히틀러 신봉자로 만들었다. [PAGE BREAK]히틀러의 광적인 독재와 이웃 나라 침략을 비판해 온 학생, 지식인과 종교인들의 조직적인 저항운동이 전개되고 학생들과 종교지도자 등 각계에서 히틀러 제거운동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암살계획이 폭로되면서 수많은 학생지도자와 기독교인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처형당하였다. 나치에 저항하는 많은 지식인이 해외로 탈출하거나 망명하였다. “레지스탕스 정신은 반항적 기질과 이상주의의 혼합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반파시스트 지하운동에 가담한 남녀들은 모멸적 권위에 대항하여 자존을 지키고, 공포와 폭력에 항거하여 양심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싸웠다. 특히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레지스탕스는 정치에 도덕적 차원을 부여해 주는 체험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승산 없는 전투를 위해 자기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희생토록 유도하였다. 그들의 이상으로부터 공동의 노력이 우러나왔으며, ‘경쟁심, 치졸함, 모략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따뜻하고 우애 있게 단결된 협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지식인과 저항』, 제임스 D, 윈킨스) 망명길 오른 일급 지식인들 히틀러의 파시스트 독재가 심화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국외로 탈출하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우리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모든 것이 변하고 말 것이다”라는 칼 츠마이어의 말대로 국외로 망명한 지식인들은 국외 반나치 운동의 중심이 되고 국제적인 연대를 형성하였다. 나치 선전상 괴펠스가 “나는 그들을 지구의 끝까지 쫓아가 근절시키고야 말 것이다”라는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망명가들은 게슈타포의 마수를 피해가면서 나치 패망 때까지 개인적으로 또는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히틀러와 싸웠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과 함께 지식인들의 국외 망명은 학자, 언론인 1300여 명, 문학, 예술가 800여 명으로 2000여 명이 연구실과 서재, 교회를 뒤로 하고 국외로 빠져나갔다. 프라하, 취리히, 암스테르담, 스톡홀름, 파리, 런던, 뉴욕, 멕시코, 모스크바 등 세계 각지가 망명지로 선택되었다. 망명자들의 성향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4그룹으로 나눠진다. ①그룹은 자유주의자들로서 프랑스, 영국, 스위스, 미국, 남미에 망명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전후 서독으로 귀환하였다. ②그룹은 사회주의 계열로서 모스크바에 망명하고 전후 동독으로 귀환하였다. ③그룹은 유대계 출신으로 전후 이스라엘에 정주하고 ④그룹은 국내에 잔류하면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하여 이른바 ‘국내 망명그룹’으로 분류되었다. 양심과 지성에 충실하고자 국외 망명길에 나선 이들은 가난과 질병, 굴욕과 소외감을 감수하면서 반나치 투쟁에 온몸을 던졌다. 가장 참혹한 경우는 ‘국내 망명자’들이다. 이들에게는 비밀경찰의 감시와 이웃의 밀고, 강제수용소, 집필금지 등 극한 상황이 주어졌다. 붙잡히면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저항운동은 그치지 않았다. 스위스로 망명한 슈테판 게오르게는 임종에 앞서 “나치 독일에는 나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근대 독일시의 성좌라 불리는 슈테판의 임종 소식에 나치 선전상 괴펠스가 국장(國葬)을 제의했지만 측근들은 끝내 거절했다. 슈테판의 사례에서 망명가들의 의지를 살필 수 있다. 대부분이 일급 지식인들인 이들의 망명으로 나치 독일의 학문세계는 황폐화되었다. 학자적 양심을 가진 교수들의 다수가 대학에서 추방되거나 망명객이 되고, 당대의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15명의 시인, 작가 중 11명이 국외 망명길을 떠났다. 남아 있던 4명 중 1명도 강제수용소에 수감됨으로써 독일문학계는 황폐화되었다. 정치학계의 경우 중진 학자 18명이 망명하여 나치독일의 정치학계는 종전을 맞을 때까지 그야말로 황무지 상태였다. 대표적인 국외 망명가 중에는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탈출하여 영국에 이어 미국으로 망명한 F. 노이만, 망명지 브라질에서 자살한 오스트리아 태생의 빈 상징파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 아내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교수직에서 추방되어 망명한 철학자 칼 야스퍼스 등이 독일의 일급 지식인들이었다. 프로이트, 훗셀, M 셀러, 아인슈타인, E 블로흐, K 레비트,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포이, 히방거, E 윙거, L 렌, H 아렌트 등 독일의 세계적인 학자들이 고국을 떠나 망명객이 되었다. 지식인뿐만이 아니었다. 히틀러의 암살 사건으로 가족과 함께 체포돼 악명높은 다하우 수용소에 수감된 반나치 활동의 중심인물 육군대장 G 할터와 같은 무반(武班)도 나치독일의 고국을 떠났다. [PAGE BREAK]이들과는 달리 저명한 철학자로서 나치에 협력한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기회주의 지식인도 적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치 당원이었던 하이데거는 프라이르그 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나치 계획을 실현시키고자 학생들을 동원했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그 대학생들을 이끌고 투표장에 나가 “독일민족이 하나가 되고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기 위하여 총통에게 투표할 것”을 역설했다. 그는 히틀러의 학살정책에 대해 비판은커녕 일체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지원하는 어용지식인이었다. 하이데거는 당정책에 대한 이견과 바덴주 문부성과의 불화관계로 취임 1년여 만인 1934년 2월 총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하지만 수많은 지식인이 망명하고 국내 반나치 전선에서 싸울 때 ‘소극적’ 이나마 히틀러를 지지하고 ‘침묵’함으로써 지식인의 역할을 외면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전후 독일사회에서 크게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물샐 틈 없는 정보정치와 폭압 통치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나치 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멈춰지지 않았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3년 동안에 확인된 것만도 5425건의 정치적 재판, 즉 반나치 활동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2만883명의 피고에 대해서 연 3만979년에 이르는 징역 내지 금고형이 선고되었다. 1936년에는 1만1687명의 공산당원과 1374명의 사회민주당원이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고, 1937년에는 공산당원 8068명, 사회민주당원 733명이 체포되었다. 나치체제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집단인 수많은 카톨릭과 기독교인이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지거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유대인 과학자로서 나치로부터 박해를 받은 A 아인슈타인은 전후에 나치 시대 저항운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남겼다. “나치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나는 자유의 애호자로서 자유의 옹호를 먼저 대학에 기대하였다. 대학은 언제나 진리에의 헌신을 스스로 자부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대학은 곧 침묵하였다. 그래서 나는 신문의 위대한 편집자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불같은 사설들은 지나간 날에 그들의 자유에의 정열을 힘차게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대학처럼 침묵하였다. 오직 교회만이 진리를 탄압하는 히틀러의 싸움터에 결연히 일어섰다. 나는 전에 교회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교회에 대하여 큰 애착과 찬미를 느낀다. 왜냐하면 교회만이 지적· 도덕적 자유의 옹호에 용기와 끈기로 싸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므로 내가 과거에 멸시하던 존재를 지금은 솔직히 찬미한다는 것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다.” 반나치 운동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토마스 만, 본 회퍼, 브레히트의 저항과 수난의 역정을 살펴서 당시 독일지식인들의 고난상을 돌이켜본다. 토마스 만의 저항과 고난 토마스 만(1875~1955)은 형 하인리히 만과 장남 클라우스 만도 모두 작가인 독일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 「부덴브로크가(家)의 사람들」, 「마의 산」 등 명작으로 널리 알려지고, 1929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일찍부터 나치의 대두를 위험시하고 ‘이성의 호소’ 등 정치적 강연과 평론을 통해 독일시민들에게 위기를 호소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1933년 국외강연 여행길에서 그대로 망명객이 되어 스위스에 머물렀다. 1936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국적을 얻고 반나치 투쟁의 작품을 발표하자 히틀러 정부는 독일국적과 국내재산을 몰수하고 본 대학 철학과에서 받은 명예박사 칭호까지 박탈해 버렸다. 만은 여기에 대항하여 반파시즘 기관지 「척도(尺度)와 가치」를 발행하고, 1939년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 초빙교수로 초청받아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40년부터 1945년 5월까지 BBC방송을 통해 독일국민에게 히틀러 타도를 호소하는 반나치 정기방송을 계속하는 집념을 보였다. [PAGE BREAK]본 대학이 박사학위를 취소하자 이 대학에 보내는 공개 서한에서 “나는 순교자이기보다는 오히려 대변자이기를 원한다”면서 정신적인 망명 독일의 대변자 역할을 도맡게 되었다. 1934년 미국을 처음 방문하여 이듬해 하버드 대학이 아인슈타인과 함께 박사학위를 수여하여 조국이 빼앗은 학위를 미국에서 되찾았다. 이때 루즈벨트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백악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망명생활중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하여 「바이마르의 롯데」, 「요셉과 그의 형제들」, 「독일과 독일인」, 「파우스트 박사」 등 대작을 잇따라 발표했다. 특히 「파우스트 박사」는 예술성으로나 사상적으로 나치를 증오하고 히틀러 정권의 야만성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집필한 명작으로 꼽힌다. 나치스 패망 후 미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하면서 1955년 8월 12일 8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죽기 전 분단된 조국에 대해 “나에게는 동서독 간의 분계선이 없다. 내가 찾은 것은 서독도 아니고 동독도 아니다. 오직 독일 땅, 한 덩어리의 독일 땅이 나에게는 있을 뿐이다”라고 절규했다. 본 회퍼의 저항과 고난 디트리히 본 회퍼(1906~1945)는 반나치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히틀러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신학자이다.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동차에 뛰어올라 미친 사람으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하지 않겠는가?” 본 회퍼가 독재에 저항하는 지식인의 행동원리를 제시한 말이다. 베를린 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하고 당시 교수들로부터 ‘천재적 신학청년’의 평가를 들었던 본 회퍼는 히틀러가 집권한 다음날 ‘지도자 개념의 변천’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서 히틀러는 국민을 잘못된 길로 오도하고 있으며, 그의 정치원리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적 지도자를 우상화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권력의 광신자가 된 히틀러는 교회까지도 나치체제에 편입시키려 들었다. 육군 군목 출신의 루드비히 뮐러를 통해 제3제국의 감독이 지배하는 하나의 제국교회를 시도한 것이다. 나치는 이를 위해 ‘신앙운동 독일기독교인’을 결성하여 복음주의교회를 파괴하고자 하였다. 독일의 기독교는 뮐러의 수중에 들어가고 “국가사회주의 정신이 곧 교회의 정신이며 국가사회주의라는 의지를 교회의 의지로 대체해야 한다”라고 ‘정부의 교회일체화’ 공작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본 회퍼를 비롯한 독일교회에서는 히틀러의 광적인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다. 저항의 중심에 선 본 회퍼는 고백교회에 속한 목사로서 반나치 투쟁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저항운동 틈틈이 저술활동도 계속하였다. 「기독교 윤리」는 이렇게 하여 집필한 저서이다. 본 회퍼는 ‘미친 운전사’를 차에서 끌어내리고자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하였다가 1943년 4월 5일 게슈타포(비밀경찰)에게 체포되고 베를린에 있는 터겔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2년여 동안 각처의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는 옥중생활을 하다가 나치가 패망하기 직전 1945년 4월 9일 베를린의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게슈타포 장관의 직접명령으로 39세를 일기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PAGE BREAK] 브레히트의 저항과 고난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는 뮌헨 대학 시절부터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은 독일의 대표적인 극작가이다. 뮌헨과 베를린을 무대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모든 문학장르에 걸쳐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여 독일의 당대 최고 작가로 문명을 떨쳤다. 1933년 부인, 아들과 함께 체코의 프라하로 피난, 이때부터 12개국이 넘는 나라를 떠도는 15년간의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치는 1933년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시작으로 자신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자유주의적인 문인, 지식인, 언론인에 대해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켜서 많은 문인, 학자를 체포했다. 브레히트는 히틀러의 비인간적인 만행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풍자시 「죽은 병사의 전설」을 발표하여 나치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브레히트가 망명한 후 나치 당국은 그의 모든 책을 공개리에 소각했다. 나치의 분서광란은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히틀러가 집권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일간지 나치타우스가베가 1933년 4월 26일 분서대상의 서적 목록을 제시한 것을 계기로 서적의 ‘불온성’을 가늠하는 명단이 나돌았다. 이 해 5월 10일 전국의 대학도시에서 브레히트의 작품을 포함하여 수많은 저명 작가와 학자들의 저서가 소각되었다. 1935년 망명지 파리에서 ‘진실을 쓸 때의 다섯 가지 어려움’을 발표, 이 글이 ‘응급조치를 위한 실천지침’이란 위장된 제목으로 독일에 반입되어 유포되면서 나치 당국은 브레히트의 국적을 박탈했다. 미국에서 나치 패망 때까지 저항하다가 1948년 10월 서독으로 귀국하려고 하였으나 연합군 당국이 미군 점령지 독일에 입국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동베를린으로 가게 되었다. 15년에 걸친 기나긴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극단 베를린 앙상블을 창단하고 동베를린에 전용극장을 마련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가 1956년 8월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했다. 건강이 점차 나빠져 죽음을 예감하기 시작한 그는 “내가 죽거든 사체는 전시하지 말고 장례식에서는 조사가 없기를 바란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브레히트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온 동독 당국은 장례식을 호화롭게 거행했으며 독재자 울브리히트도 참석하여 거창한 조사(弔辭)를 읽었다. 동서독의 출판인들은 분단시절부터 브레히트의 전집을 준비하여 통일 후 30여 권이 넘는 전집을 공동 출판하여 그의 문학적·정신사적 업적을 기렸다.
김흥규(서울 광신고 교사) 학교에서 배우는 물리, 화학이 관찰과 실험을 통해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기보다 개념이나 수식을 외우고 계산을 하는 것에만 집중하다보니 입시에서 받을 점수에 대한 부담 때문에 과학을 기피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신문기사를 접한다. 노래를 못하는 것을 음치(音痴)라고 하듯 이제는 수학을 못하면 수치(數痴), 과학을 못하면 과치(科痴)라 불러야 옳을 것 같다. 과학을 즐겁게 인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과학에 관한 좋은 책을 읽는 것도 한가지 방법일 것이다. 과학은 어렵고 복잡할 것이라는 선입관과는 달리 복잡한 수식이 없이도 쉽고 재미있게 과학의 이야기를 풀어 가는 책이 있다. 바로 『발견하는 즐거움』(The Pleasure of Finding Things Out)이다. 특히 이 책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과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의 재미있는 일화를 비롯하여 강연, 인터뷰 한 내용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책의 내용은 실제에 바탕을 둔 총 13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으며, 물리학은 물론, 과학의 본질과 가치, 문화, 사회, 종교까지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제1편 발견하는 즐거움’에서 출발하여 ‘제13편 과학과 종교의 관계’로 끝맺는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과학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들고 있다. 파인만은 자신이 과학을 배우게 된 것은 아버지 덕분이라고 말한다. 사업가였고 제복회사의 판매 관리인이었던 아버지는 과학 책을 즐겨 읽을 정도로 과학을 좋아했으나 아들에게 과학자가 되라는 말을 한 적은 없다고 한다. 파인만은 아버지를 통해 관찰과 인내를 배웠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교육에 대한 파인만의 이야기를 인용해 본다. “내가 어렸을 때, 내가 기억하는 맨 처음의 이야기인데, 저녁식사후 아버지는 나와 함께 놀이를 했어요. (중략) 먼저 놀이로 아이를 즐겁게 하면서 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학습하도록 하는 겁니다.”(p.55) 이 방법은 학부모는 물론 교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르키메데스가 금관의 비밀을 풀었을 때 외쳤다는 ‘유레카(Eureka : 알아냈다!)’도 발견의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다. 과학은 즐겁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파인만의 이야기를 빌자면 세상에서 사물의 이치를 발견하는 즐거움만큼 큰 상은 없단다. 『발견의 즐거움』은 물리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수학을 잘하는 비결(?)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내가 만약 ‘수학이란 무엇인가’로 강연했다면 벌써 나는 말했을 겁니다. 수학은 한마디로 패턴을 찾는 것이다.”라고.(p.56) 이 말 속에 수학의 본질이 담겨있지 않을까? 수학공식을 외워 단순히 적용해서는 응용문제를 풀 수 없다. 파인만의 말을 잘 음미한다면, 자신이 수학엔 소질 없다고 생각하는 수치(數痴) 아닌 수치(數痴)들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교양서가 아니다. 문화와 종교에 대해, 미래의 컴퓨터(양자 컴퓨터)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한 과학정신은 무엇일까? 아이들에게 어떤 자세로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이에 대해 파인만은 제2편 과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학생들을 과학자처럼 사고하도록 가르치는 방법, 호기심과 열린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심을 작고 세계를 바라보는 마음을 이야기한다. 특히 ‘제13편 과학과 종교’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식의 진보를 위해 우리는 항상 겸허해야 하며, 우리가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을 용납해야 한다. 모든 의심을 떨쳐 버릴 만큼 확실하게 증명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호기심을 지니고 탐구하는 것은 답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이다.” (p.306) 21세기 과학에 있어 가장 위대한 이론 두 가지를 들라고 하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이론을 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위대한 두 과학자는 상대성 이론의 아인슈타인, 양자역학의 파인만이다. 특히 파인만의 양자전기역학(Quantum Electrodynamics:QED)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인만의 양자역학의 경로적분은 물리학과는 별도로 수학적 엄밀성을 첨가하여 수학분야에서 파인만 적분으로 연구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