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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충북 청원군 각리초(교장 이문희) 교무실에서 '손명선·전병환 장학기금 기탁식'이 있었다. 1억 원이라는 장학기금은 지난 7월에 피부암으로 작고하신 손명선(58세)선생님께서 담임을 맡았던 2학년 어린이들에게 ‘세상을 이끄는 훌륭한 사람이 돼라.’라는 편지를 남긴 채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한다. 그의 유언 속에는 “각리초등학교 학생들의 즐거운 면학분위기를 위해 조그마한 성의를 표하고 싶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유지에 따라 남편인 전병환 씨가 전했다고 한다. 고인은 생전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결손가정과 조손(祖孫)가정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나 생활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쏟아왔다고 한다. 끼니를 거를 정도로 어려운 제자들에게 쌀과 의류를 사들고 찾아가 보살피는 사랑을 남모르게 실천하였던 참 스승이었다고 한다. 가정이 어려운 제자가 중학교에 진학할 때면 교복을 맞춰주기도 하는 등 사랑으로 가르침을 실천하셨던 선생님 이라고 하였다. 장학금은 각리초등학교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교인 강경의 황산초등학교에도 1억 원의 장학금을 전달하였다고 한다. 사랑과 진실로 모범을 보였고 마지막 가는 길에도 아름다운 감동으로 세상에 사도(師道)가 무엇인지 일깨워주신 이 시대의 참스승으로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이번에 기증받은 장학기금은 각리초등학교의 소외계층 학생들이 불편함 없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손 선생님의 뜻에 따라 지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왕소나무(천연기념물 제290호)도 태풍 볼라벤의 강풍을 이기지 못했다. 28일 오전 10시경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의 왕소나무(천연기념물 제290호)가 쓰러졌다. 수령 600년의 왕소나무(王松)는 높이 12.5m, 둘레 4.7m에 이르는 노거수로 줄기가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승천하듯 꼬여 '용송'으로 불렸다. 또한 성황제를 지내던 신목으로 마을 이름 삼송리(三松里)에서 알 수 있듯 가까이에 있었다는 소나무 3그루 중 1그루만 외로이 남아있었다. 처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고, 인근을 지날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왕소나무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며 '국내 최고의 소나무'로 소개했던 터라 현장으로 달려간 시간이 오후 6시경이다. 뿌리가 통째로 뽑히고 가지가 부러진 채 볼품없이 누워 있는 왕소나무의 모습이 처량했다. 현장에서는 포클레인이 대형 트럭들이 실어 나르는 흙으로 뿌리를 덮는 작업이 한창이었고, 그 모습을 관계자들과 마을사람들 여럿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 태풍에 가로수들이 힘없이 뽑힌 이유가 여름내 바싹 마른 땅에 집중 호우가 내리면서 지반이 약해지는 '액상화 현상'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왕소나무가 쓰러진 것도 재해일까? 왕소나무의 뿌리가 땅에서 30㎝가량 들려 위험하다는 제보로 외과수술을 했다지만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대로 지주대 등을 설치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왕소나무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앞으로 원형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에 오랫동안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왕소나무에서 6.5㎞거리에 있던 연리지가 생각나 청천면 송면리의 연리지가든으로 차를 몰았다. 가든 옆 야산에 있던 연리지(괴산112호 보호수)는 수령 100여년의 붉은 소나무로 땅위 4m 높이의 굵은 가지 하나가 남녀가 손을 맞잡듯 서로 끌어당기고 있는 모습이 국내의 연리지를 대표했었다. 몇 년 전 이곳의 연리지도 시름시름 앓다 말라죽었다. 줄기가 붙은 연리목과 달리 가지가 붙은 연리지는 매우 귀한 나무이기에 아쉬움이 크다. 한순간에 수백 년의 세월이 그대로 사라지고 있는 현장들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나무들이 앞으로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후약방문에 희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3,4세 누리과정 도입…신‧증설만 1163학급 “국정과제 수행 변화, 특별 정원 접근해야” 유치원 교원 증원을 위해 한국교총이 전면에 나섰다. 연령별 누리과정 도입으로 교원 수요가 대폭 늘어났음에도 행정안전부가 교육과학기술부의 유치원교사 1381명 증원 요청에 대해 불가능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8월20일자 참조) 한국국공립유치원연합회 전호숙 회장은 “행안부 장관 면담 신청을 세 번이나 했지만 만나주지 않고 있다”면서 “교과부가 행안부에 요구한 증원 인원은 내년에 신설되는 유치원에 필요한 최소 인원인데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정부기관이 정부정책을 실현하지 못하게 훼방 놓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정부는 올해 만5세 누리과정 도입에 이어 내년에는 3~4세까지 연령별 누리과정을 확대‧추진한다고 지난 7월8일 발표했다. 이에 따라 교과부와 시도교육청은 내년 26개의 단설유치원 신설을 확정, 현재 공사 중에 있다. 교과부가 요청한 인원은 신설되는 유치원 원장 26명과 원감 192명(연합회 요구 738명의 26%), 교사 1163명(신‧증설 1163 학급)이다. 교과부 유아교육과 안정은 장학관은 “수차례 행안부 담당자를 상대로 설명했지만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며 “원감은 양보한다고 해도 교사는 줘야 가르칠 수 있지 않냐”고 말했다. 신설 유치원에 필요한 교사 156명만 주겠다는 행안부 논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기존 병설유치원에 신설되는 138학급과 증설되는 단설 66학급‧병설 825학급에는 단 1명의 교사도 증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 장학관은 “공무원 증원이 어렵고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지만, 결국 모자라는 교사는 기간제로 채워야 하지 않냐”면서 기간제 인건비도 예산임을 강조했다. 전 회장은 “우리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지 않냐”며 “수석교사나 전문상담교사 등 정부 정책의 변화로 정원이 대폭 늘어나는 경우에는 ‘수시’ 정원 조정을 통해 추가 확보한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여러 부처 공무원 정원과 연동된 ‘정시’ 정원이 아닌 특별 소요 정원으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총은 27일 국무총리실 심오택 사회통합정책실장을 만나 이 같은 유치원 교원증원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김황식 국무총리에게 전달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박근혜 대선캠프 안종범 의원에게도 28일 자료를 전달했다. 30일 안양옥 회장은 이주호 장관과 간담을 갖고 유치원 교원증원을 위해 공조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며, 9월초 맹형규 행안부 장관을 만나 유치원 교원증원 문제를 매듭지을 방침이다. ‘수시’ 정원 반영 여부에 따라 신규임용 숫자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교총 정동섭 정책본부장은 “행안부의 182명 증원(원장 포함)도 사실상 증원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학생 수 감소로 인한 초등교원 감축 정원을 유치원에 돌린 꼼수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안 회장은 “3~4세 누리과정 도입은 유아교육 공교육화의 첫걸음이자 인성교육의 시발점”이라며 “우수한 국공립유치원 교사들이 제대로 누리과정의 틀을 잡아 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반드시 정원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오랜만에 막내딸이 두 살 된 아들을 데리고 왔다. 사위의 새 차에 동승하여 울고 넘는다고 하는 박달재 옛길을 올라갔다. 황금송도 드문드문 보이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도로를 굽이굽이 돌아서 정상에 주차를 하였다. 차에서 내리니 언제나 들려오는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구성지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공원에는 조각품들이 잘 어울려 있는데 박달도령과 금봉이 조각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길 건너편 조각공원에는 나무로 조각한 작품들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좌측으로는 거란군과 싸워 박달령을 지킨 고려의 김취려 장군이 말을 타고 함성을 지르는 동상모습이 위풍당당해 보였다. 아이들 장난감과 이 고장 특산품을 판매하는 가게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니 큰 물레방아가 맑은 물을 쏟아 부으며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옛날의 물레방아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목각 수공예품을 만들어 큰 상도 받은 분이 육각정 아래 가게에서 목공예 체험과 판매도 하고 있었다. 장난감 자동차를 유난히 좋아하는 외손자는 트레일러처럼 만든 나무자동차를 쥐고 놓지 않는다. 장난감을 손에 쥐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스님이 고목에 오백나한을 조각한 작품이 TV에 소개된 것을 보았다며 구경하고 가자고 아내가 말하였다. 차를 타고 백운방면으로 조금 내려가니 푸른색 포장을 씌운 것이 보였다. 차에서 내리니 작업장 안에서 스님 한분이 환하게 웃으시며 구경하라고 하셨다. 스님은 승복을 입고 조각 작품을 열심히 만들고 계셨다. 오백 나한전을 조각한 작품은 3년 6개월 동안 작업을 하여 완성했는데 작품을 전시할 공간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어 임시로 포장을 씌워놓고 있다고 한다. 대형 정각(亭閣)을 조각공원에 짓게 되면 많은 관광객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천년의 세월이 지난 대형 느티나무 고목의 뿌리부분까지 빈 공간에 오백나한을 끌과 조각도로 새겼다고 한다. 조각한 솜씨가 예술의 경지를 넘어선 느낌이 들어 조각을 전문적으로 배우셨느냐고 여쭤보았더니 그냥 혼자서 시작하셨다고 한다. 아무리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다고 해도 믿기지 않았다. 스님은 목각을 하며 수행을 하시는 것 같다. 바로 옆에 또 하나의 포장이 씌워진 것이 있었다. 목굴암(木窟庵)이라고 하는데 한사람만 엎드려 들어가서 한 가지 소원을 비는 곳이라고 하는데 역시 고목을 이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입구에는 일인일실, 일인일원(一人一室, 一人一願)이라고 쓰여 있다. 작업장 앞에 큰 느티나무 뿌리가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은 관세음보살상을 조각할 예정이라고 한다. 요즈음은 너무 더워서 선선한 바람이 불면 작업을 시작 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작업장 뒤편에 조립식으로 지은 거처하는 집이 보인다. 우측으로는 절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어 암자(庵子)냐고 여쭤보니 암자가 아니고 박달재의 전설을 지키는 ‘금봉이 박달이 사당’이라고 한다. 금봉(선녀) 박달(신선) 수호신으로 사당을 짓고 벽화, 현판 조각 등을 손수 그리고 만드셨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족이 작업장 앞에서 구경을 하려고 하니 작업을 중단하고 나오셔서 많은 말씀을 해 주셨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목각작품을 종교차원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피력하였다.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조성되고 있는 조각공원이 우리의 전통문화를 감상하며 스스로 깨닫는 공간으로 가꾸어 나가고 싶다고 하였다. 전국적인 명성과 함께 박달재의 관광자원이 되도록 제천시의 적극적인 지원을 기대해 본다. 조각공원에는 스님이 조각하여 세운 박달도령과 금봉이 상을 비롯하여 장승과 해학적인 조각 작품들이 산책로에 세워져있고 전망대도 보였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어울리는 전설어린 수많은 조각 작품을 감상하면서 테마가 있는 관광지로 가꾸어 갔으면 한다. 합천 해인사 문중이라고 소개하시며 남쪽지방 자치단체에서 오백나한전 조각품을 가지고 오면 정각을 비롯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는데도 박달재를 지키며 오늘도 나무망치로 조각을 하며 구슬땀을 흘리시는 스님이 한없이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청풍으로 향했다.
충청북도유아교육진흥원(원장:강상무) 개원식이 지난 27일 오전 11시에있었다. 유아의 전인적 발달을 위한 종합적인 유아교육을 실시하는 진흥원 단재교육원 옆에 82여억 원을 들여세워졌다. 유아교육진흥원은 연면적 3,779㎡에 3층 규모로 놀이 체험실과 보건실, 다목적실, 교수·학습 자료실, 교재·교구제작 전시실 등을 갖추고 있다. 야외에는 야외공연장, 암벽타기, 유아골프시설, 미로 찾기, 쉼터 등 유아들이 부모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자연체험 시설도 조성됐다. 유아교육진흥원은 유아에게는 다양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교원에게는 맞춤형 연수와 연구 활동을 지원하고, 학부모에게는 유아교육 정보자료를 제공하여 모두가 행복한 유아교육 지원센터로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날 개원식은 이기용 교육감을 비롯해 유관기관 기관장 등 약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초대형 태풍 '볼라벤'의 북상으로 피해가 확산됨에 따라 전국 1만4000여개 학교가 임시 휴업에 들어갔다. 서울은 28일 하루 모든 유·초·중·고와 특수학교, 각종학교가 임시 휴교에 들어갔고, 경기도는 유·초등학교에 임시 휴업ㆍ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인천·광주·대전·울산·충북·전북은 유·초·중·특수학교가 휴업에 들어갔고 고등학교는 학교장 판단에 따라 휴업 여부를 결정했다. 이밖에 부산은 유·초등학교, 강원은 초·중학교, 전남은 유·초·중학교에 휴업령이 내려졌으며, 나머지 학교는 학교장 결정에 따라 휴업 또는 등교시간 조정 조치를 했다. 세종시는 일부 중·고등학교를 제외한 대부분 유·초·중·고가 휴업에 들어갔고, 대구는 유·초·중·특수학교의 등교시간을 조정하도록 하고 고등학교는 학교장에게 재량권을 부여했다. 경남은 전체 943개 학교 중 초등학교 354곳, 중학교 140곳, 고등학교 70곳이 휴업을 결정했고, 초등학교 33곳, 중학교 69곳, 고등학교 74곳은 등교시간을 낮 12시 이후로 미뤘다. 제주도에서는 토산초·어도초·남광초·한천초·제주남초·하귀일초 등 6개교가 임시 휴업에 들어갔다. 임시휴업을 결정한 학교 학생들은 등교하지 않지만 대부분 학교 교사들은 안전관리 등을 위해 정상근무하고 있다.
8월 18일, 내곡초등학교(청주시 흥덕구 강서2동) 20회 동기 부부 50명이 통영으로 추억여행을 다녀왔다. '세월이기는 장사 없다'고 코흘리개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들이 멀리 걷는 것도 귀찮아하는 50대 후반이 되었다. 늘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부부들이 함께한 여행이라 멋있는 것 보고, 맛있는 것 먹으면서 많이 즐거워했던 여정을 사진으로 되돌아본다. 아침 7시 청주를 떠난 관광버스가 대전통영중부고속도로를 달려 3시간 30여 분 만에 통영시내에 들어섰다. 통영항의 바닷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통영대교를 건너 미륵도의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 하부선착장에 도착했다. 케이블카를 타려면 오랜 시간 대기해야 하는데 통영에 근무하는 친구의 아들이 미리 예매하여 곧바로 탑승구로 향했다. 정원이 8명인 케이블카에 탑승 후 상부의 주차장으로 향한다. 이곳의 케이블카를 여러 번 타봤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니 기분이 새롭다. 관광객들을 태운 케이블카가 12분 동안 볼거리를 보여주며 유유히 미륵산 정상 근처의 가파른 봉우리까지 올라간다.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는 통영시내와 바다의 풍경이 아름답고 고소공포증을 느끼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채롭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계단을 따라 미륵산 정상으로 간다. 더운 날씨에 땀이 흐르지만 그럭저럭 오를만하다. 중간에 쉼터와 전망대가 몇 곳 있다. '미륵산 461m'가 써있는 표석이 정상을 알리는 미륵산정상에 오르면 통영시내를 비롯한 통영항 주변의 풍경과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다운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1926년 통영에서 태어났고 2008년 봄 다시 통영을 찾은 후 그해 5월 5일 생을 마감하여 고향에 잠든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묘지와 기념관도 내려다보인다. 시내, 항구, 섬, 바다, 마을, 산줄기 등 방향을 바꿀 때마다 다른 풍경이 조망되는 매력이 있다. 나폴리에 가본 사람이 보기에도 통영은 '동양의 나폴리'라 부를만하다. 통제영(統制營) 본영에 가장 근접해 있던 봉수대(경남기념물 제210호)가 정상 바로 아래편에 있다. 약간의 석축 흔적이 남아 있는 봉수대에 오르면 남해안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멋진 포즈로 추억남기기를 하기에도 좋다. 싱싱한 회와 곁두리 음식이 맛있었던 금호충무마리나리조트 앞 금호횟집에서 친구들과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정을 나눴다. 횟집 바로 앞에 있는 높이 20여m의 연필등대를 친구들과 돌아봤다. 도남항의 연필등대는 통영이 토지의 박경리, 청마 유치환, 음악가 윤이상 등 문인들이 많이 배출된 고장임을 나타낸다. 내륙의 충청북도 사람들은 바닷가에 와서 유람선을 타야 여행 제대로 했다고 한다. 한산도의 제승당을 구경하려던 계획을 바꿔 2시간 동안 유람선을 타고 배위에서 한려수도를 돌아봤다. 유람선 선착장을 출항한 유람선이 연필등대를 지나 바다 쪽으로 나가자 제51회 통영한산대첩축제의 프로그램으로 한산대첩을 재현할 배들이 여러 척 떠있다. 배가 진행하는 방향에 따라 새로운 섬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가끔 한 번씩 섬 구경을 하는 육지사람 눈에는 비슷비슷해 구분하기 어렵다. 유람선의 경상도 아저씨는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귀찮아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뱃전에서 살아가는 얘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통영시내로 들어가 동피랑마을을 구경하고 통영항에서 같이 회를 먹기로 했다. 그런데 축제 마지막 날 해안로에서 한산대첩420주년기념 축하퍼레이드가 열리는 시간이라 통영항 주변의 도로를 통제한다. 축제장에 걸려있는 소원들이 우리모두의 마음이다. 차 2대가 중앙시장과 서호시장에서 따로 시간을 보내다 청주로 향하며 통영에서의 추억 쌓기를 마무리 했다.
마더 테레사의 통찰 인생의 모든 경험과 관계는 나를 비춰 주는 영혼의 거울이다. 오늘날 가장 심각한 질병은 전염병도 아니고, 결핵도 아니다. 바로 무관심이다. 신체적인 질병은 의학으로 고칠 수 있으나, 외로움과 우울함은 고칠 수 없다. 이것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약은 관계 속의 사랑이다. -마더 테레사 지난 22일 서울 여의도에서 벌어진 칼부림 사건은 실직자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전 직장 동료에 대한 증오를 품었던 김씨는 미리 범행을 계획하고 무고한 행인들까지 무차별 공격한 '다중살인'(Mass Murder)이다. 미국 등에서 다중살인을 저지르는 이들 가운데는 해고·실직 등 사회경제적 곤궁에 처한 경우가 많으며 더 나빠질 게 없다는 관념에 빠진 이들은 범행 직후 자살하거나 태연히 체포당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절망살인' 또는 '절망범죄'가 본격화됐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최근 급격히 진행된 사회 양극화의 결과, 한계상황에 빠진 이들이 절망적 상황에 대한 분노를 특정 집단이나 군중을 대상으로 흉악범죄를 통해 표출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겨레 신문:2012년 8월 24일 치 참고) 학자에 따라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신형 우울증'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한다. 불안증폭사회,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성폭행 사건을 비롯한 다양한 범죄 사건은 줄어들기는 커녕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으니 사회 전체가 불안증후군으로 시달린다. 퇴근 길에 아무런 이유 없이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폭행을 당하는 일, 직장에서 예고 없는 해고로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겪는 가족 해체와 갈등은 이제 일상처럼 보도된다. 마치 당연한 일상처럼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가고 있다. 이제는 아침 운동을 조용히 느긋하게 하는 작은 여유나 저녁 식사 후 가까운 공원을 산책하는 일조차 용기를 내야 할 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주는 소식들은 보이지 않고 서로 헐뜯고 싸우는 풍경들이 난무하는 모습은 여과없이 눈과 귀를 공격한다. 매체들은 뉴스라는 형식을 빌어 잔인한 사건의 현장을 몇 차례씩 중계 방송을 하듯 내보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몸서리치게 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은연중에 모방범죄를 유발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무의식 중에 사람들의 뇌에 폭력성을 각인시키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그런 점에서 언론과 가상공간, 매체들은 불안을 증폭시키는 기폭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국민들의 알 권리가 소중하긴 하지만 그처럼 잔인한 폭력성 기사는 보도를 자제하는 사회적 합의 도출할 방법은 없을까. 대다수의 시민들과 어린 아이들의 충격을 덜어 주기 위해서.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면역성이 약한 아이들이 가장 위험하다. 특히 국가나 거대 자본과 같은 특정 권력은 폭력 행위를 저지르고도 진정성이 담긴 사과는 커녕 죽음으로 내몰고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음으로써 국민들의 잠재의식에 엄청난 상처를 주고 있다. 늘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약자이고 법에 호소할 능력도 없으니 억울함조차 대물림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다중살인이나 절망범죄를 옹호하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불공정성이 범죄의 씨앗을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자는 뜻이다. 더욱 염려되는 것은 이같은 사회 현상을 아무런 여과없이 그대로 보고 듣고 자라는 우리 학생들이 받을 충격이다. 자신이 자라고 생활하는 동네를 안전하게 거닐 수 없고 성범죄가 활보하고 이웃을 믿을 수 없는 사회, 학교 주변이나 집 주변에 널린 정화 대상 시설들은 언제든지 우범지역으로 돌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마음 놓고 여가를 즐기거나 행복을 누릴 시설은 찾기 어렵다. 집과 학교와 학원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오가는 일상 속에 컴퓨터 게임 중독도 모자라서 이제는 스마트폰 중독까지 비집고 들어와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시간조차 없다. 거기다 폭력성이 난무하는 영화나 드라마, 선정성이 넘치는 프로그램들은 청소년의 정서를 무차별 공격하며 중독시키고 있지 않은가. 모든 학과 공부에 생명 존중 교육 선행되어야 이제는 동물적인 본능으로 자신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가장 원시적인 인간의 모습을 지식보다 먼저 가르쳐야 할 판이다. 자신의 생명의 안전을 위해 어느 누구도 믿지 말고 스스로를 지키는 생명 교육이 필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학과 공부보다 인성 교육보다 먼저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사랑과 행복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신을 소중히 하는 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교육이 모든 교과에 우선해야 한다. 자신의 생명이 소중한 줄 알고 다른 생명도 소중히 하는 생명 윤리 교육의 당위성을 짚어야 할 때이다. 밖으로만 내다보는 눈을 안으로 거두어들여 자신의 내면을 보게 하는 교육, 정신적인 가치가 물질적인 가치보다 우선함을 절실하게 가르쳐야 한다. 정신적인 의지가 강한 사람은 외부의 충격에도 상황이 나쁠 때도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늘 가변적이며, 세상의 중심이 자기 자신임을 가르치되 이기적인 인간이 되지 않는 상생의 교육까지 겸해야 한다. 이제라도 반성해야 한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지식 교육에 편향되었던 현실, 줄서기 교육으로 무한 경쟁으로 서로 상처를 주는 교육, 학벌 중심주의에 물든 인간 소외 교육을 반성해야 할 때다. 서두에 인용한 마더 테레사의 통찰은 삭막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일자천금의 지혜임에 분명하다. 자신을 소중히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관계 속의 사랑을 키우는 일만이 무관심으로 비롯되는 따돌림이나 학교 폭력, 이웃을 해치는 다중살인을 막는 예방책이다. 경제를 살리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것처럼 몰아붙인 어른들, 학과 공부만 잘하여 좋은 대학에 가면 행복하다고 가르친 물질만능주의는 어떻게든 짓밟고 1등을 하여 박수를 받는 성적지상주의의 그늘에서 다수의 행복은 늘 상처 받고 울분과 분노로 마음의 상처를 지닌 채 불안정한 어른들을 양산하였으니 언제든 곪아 터질 문제였다. 우리 사회를 보면 마치 초등학교의 운동회에서 개인 달리기를 하는 모습과 닮았다. 신체 조건이 다 다른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똑같은 트랙에서 달리기 경주를 하여 1등을 가려 상을 주는 풍경처럼. 이제는 다같이 박수치는 운동회를, 모두 같이 손잡고 즐거운 운동회를 하듯 서로 아끼는 사회를 꿈꾸고 싶다.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범죄 예방을 위한 노력을 공유했으면 한다.
초강력 태풍 '볼라벤(BOLAVEN)'이 북상함에 따라 서울 지역의 모든 유치원과 초ㆍ중ㆍ고교가 28일 임시 휴업·휴교령이 내려졌다. 제주교육청은 태풍피해 예방을 위해 27일 도내 초중고 대부분 학교가 단축수업에 들어갔다. 경기도교육청도 28일 도내 모든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대해 휴업·휴교를 하도록 했고, 중학교와 고교에 대해서는 학교장 재량으로 휴업·휴교령을 검토 하거나 등·학교 시간을 조정하도록 했다. 전북, 전남, 경북, 경남 등 다른 남부 지방 학교도 태풍 발생 상황에 따라 등하교 시간 조정과 휴교 조치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지역 학생들은 28일 수업이 취소돼 등교할 필요가 없으며 안전관리를 위해 교사들만 출근한다. 다만 출퇴근 시간은 학교장이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했다. 또 바람이 거세질 것에 대비해 당장 27일 오후부터 학교장 판단 아래 방과후 학습 시간을 조정해 학생들이 일찍 귀가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앞서 교과부는 우선 시·도교육감 및 각급학교 장이 해당 지역의 기상특보를 고려해 등교시간 조정 또는 휴업 등의 조치를 하고 그 결과를 교과부로 보고토록 했다. 교과부의 '자연재해위기대응 매뉴얼'에 따라 비상연락망 유지, 신속한 상황보고 등 비상근무를 철저히 하도록 당부했다.
“사회적 기업에 고용되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고, 처우가 더 나아지는 것 같은데 전교조 쪽 말처럼 교육청이 정말 고용을 책임지지 않으려고 외주를 주는 건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충남 A초등돌봄강사) “연수를 처음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돌봄강사를 했지만, 이렇게 직무를 비롯해 학생들의 심리 등 다각적으로 교육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니 제가 정말 교사가 된 것 같습니다. 2학기엔 열심히 가르칠 거예요. 정말….”(충남 B초등돌강사) 돌봄강사의 사회적 기업 고용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 충남도교육청이 돌봄강사의 처우와 방과후 수업 수준을 높이기 위해 공주교대에 (재)나우누리 설립을 허가하고 돌봄강사를 고용하려 하자, 전교조와 일부 초등돌봄강사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나우누리로 처우가 나아진다는 충남도교육청의 주장과, 교육청이 직접 고용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전교조와 일부 초등강사의 주장 사이에서 도내 491명의 초등돌봄강사들은 어느 쪽을 선택해야할지 몰라 눈치작전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나우누리는 교과부가 2월 공주교대를 대학주도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하면서 충남도교육청과 협력해 재단법인으로 개소했으며 돌봄교실·방과후학교 강사 선발 및 교육을 담당한다. 현재 학교장과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돌봄강사들이 나우누리와 근로계약을 체결할 경우 무기계약 전환과 55세까지 정년이 보장되며 직무 연수를 통해 전문성 신장도 할 수 있게 된다. 또 나우누리를 통해 여러 학교와 연계해 일을 할 수 있어, 강사들이 일일이 학교와 재계약 하지 않아도 된다. 나우누리 관계자는 “학교 비정규직 문제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사회적 기업에 고용되면 무기계약직으로 안정적인 보장을 받게 되는데 전교조와 함께 일부 초등돌봄교사들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 같다”며 “교육감 직접 고용을 요구하지만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부분 아니냐”라고 말했다. 공주교대 관계자 역시 “여름방학 동안 초등돌봄강사의 직무연수를 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공주교대 교수들이 직접 커리큘럼을 짜고 강의하는 등 돌봄강사, 방과후교사의 전문성 향상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전교조와 일부 초등돌봄강사들은 교육 당국이 고용을 책임지지 않으려고 사회적 기업으로 외주화를 유도하고 있다고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나우누리와의 계약 철회 △근무환경 열악하지만 학교에 남기 원함 △학교 회계직원으로서의 신분보장 △국민연금과 고용보험 가입 등을 도교육청에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충남의 한 방과후학교 담당 교사는 “국립대와 사회적기업이라는 신뢰성이 담보되고, 교사의 업무도 경감되기 때문에 잘 되었으면 좋겠다”면서 “한 조직의 세 불리기 싸움에 돌봄강사들이 희생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도교육청 관계자도 “사회적 기업에 채용된 강사들은 사규에 의해 퇴직금 등 정년이 보장되는 사원으로 채용된다”며 “만약 학교에서 돌봄교실 프로그램이 없어져도 나우누리 사원으로 남아 강사로서 활동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187명의 초등돌봄강사들이 나우누리 고용을 선택, 연수를 받고 9월 개학을 맞아 활동하게 된다”며 “사회적 기업이 처음 개소돼 고용 등에 대해 오해가 많지만 달라지는 처우를 돌봄강사들이 직접 느끼게 될 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한편 교과부는 지난 2월 대학주도 방과후학교 사회적 기업 22개 대학을 선정하고 지난 6월 프로그램 및 교재 개발비, 강사 연수비, 운영비로 1개 기업당 평균 5000만원~1억5000만원의 예산을 지원했으며, 향후 2년간 올해 지원액의 50% 범위 내에서 추가 지원할 예정이다. 선정된 대학은 상명대·서경대·서울교육대·성균관대(서울), 경성대·동의대·신라대(부산), 인천대, 전남대·조선대(광주), 수원여자대·한신대(경기), 청주교대·충북대(충북), 공주교대·공주대(충남), 군산대·전북대(전북), 전남대·순천대(전남), 경남대, 제주대 등이다. 교과부는 내년까지 50개 이상의 대학주도 사회적 기업을 육성할 계획이며, 제2기 공모는 오는 11월쯤 실시할 예정이다.
충청북도교육청(교육감 이기용)이 지난 16일 오후 2시 충북교육과학연구원에서 수업 전문성 신장을 위한 ‘2012. 유·초·특수 수업스타 연찬회’를 개최했다. 이번 연찬회에는 ‘2012. 수업연구대회’에서 입상한 유·초·특수교사 161명과 교실수업 개선과 교수학습 정보 교류를 통해 더 좋은 수업을 운영하고자 노력하는 교사 등 총 400여명이 참석했다. 연찬회에서는 2011년 수업스타로 인증 받은 제천 입석초 임정희 교사가 국제수업비교연수에 참가했던 캐나다 선진학교의 우수사례를 발표했다. 이어서 각 분과별 수업 우수사례 발표와 질의응답을 통해 더 좋은 수업을 만들기 위한 수업기술을 공유하고 학생중심 교실 수업방안을 모색하는 기회를 가졌다. 한편, 이기용 교육감은 1등급에 선정된 수업스타가 된 충주 엄정초 교사 김은태 외 25명에게 상장과 인증 패를 수여했다. 이 교육감은 인사말에서 “단 한명의 학생도 놓치지 않기 위해 더 좋은 수업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는 선생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또, 더욱 내실 있는 활동으로 교사의 전문성 신장과 신뢰받는 교사상 확립에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집에서나 객지에서나 시간의 흐름은 어김이 없다. 올림픽 축구 결승전을 보느라 잠을 설쳤지만 12일 아침이 밝았다. 일찍 일어나 비 내리는 남당항을 돌아봤다. 빗줄기가 제법 거셌지만 간월암 가는 길에 궁리소나무를 구경하기로 했다. 홍성군 서부면 궁리의 96번 지방도 길가에서 분재처럼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안내문에 의하면 궁리소나무는 수령 300여년의 보호수로 1980년대 서산 AB지구 간척사업 전에는 바로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나무 아래에서 음식물을 먹으며 백사장에서 해수욕을 즐겼고, 음력 정월에는 마을의 안녕과 바다의 풍랑을 막기 위해 풍어제를 올리던 당상목이다. 서산A지구 방조제가 끝나는 간월교차로에서 좌회전하면 천수만의 어업근거지였던 섬이었으나 간척사업으로 육지와 연결된 간월도다. 영양가 많은 굴은 깊은 맛과 함께 양념이 잘 묻어난다. '얼얼하다'의 사투리인 '어리어리하다'가 '어리굴젓'이 되었다는 것도 재미있다. 간월도의 특산품 어리굴젓에 걸맞게 굴밥으로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맛집이 있다. 언덕 위에 있어 주변이 다 눈에 들어올 만큼 조망이 좋고 주차장이 널찍한 맛동산(041-669-1910)에서 영양굴밥으로 아침을 먹었다. 간월암(看月庵)은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의 작은 돌섬으로 물위에 떠있는 종이배처럼 만조 때 물위에 떠있는 모습이 신비롭다.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가 조선 초 창건해 무학암에서 간월암으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썰물 때는 육지와 연결되어 사람들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고 밀물 때는 외로운 섬이 되어 쪽배로 건너야 한다. 20평 남짓한 절 마당에 들어서면 서너 그루의 나무가 서있고 그 앞으로 삼면이 바다다. 작고 적은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곳의 암자에 목조보살좌상(충남유형문화재 제184호)이 있고 동쪽으로 갯벌과 방조제, 서쪽의 천수만 건너편으로 안면도와 연결된 황도가 가깝게 보인다. 서산B지구 방조제를 지나 원청사거리에서 우회전해 안면도와 정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77번 국도를 달린다. 다시 태안을 지난 후 다시 603번 지방도를 서쪽으로 한참 달리면 안흥이 나온다. 왼쪽의 안흥내항을 내려다보며 신진대교를 건너면 신진도에 신진도항, 안흥신항으로 불리는 안흥외항과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간월암에서 신진도까지 승용차로 1시간여 거리에 청포대해변, 몽산포해변, 청산수목원, 팜카밀레허브농원, 연포해변, 안흥성 등 볼거리들이 많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더니 신진도에 도착하자 날씨가 맑다. 수산물 가게와 횟집들이 늘어선 수산시장, 꽃게잡이배가 부지런히 조업준비를 하고 오징어잡이배가 닻을 내린 채 만선을 꿈꾸는 항구 주변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안흥항은 유람선관광과 낚싯배로 유명하고 한때는 오징어 축제를 열만큼 오징어잡이배가 많았던 곳이다. '쓰레기 버리면 손목아지 자를겨(잘르것시유~)' 부둣가에 써있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를 향한 경고인지 섬뜩한 문구가 여행지에서 환경보호를 생각하게 했다. 마구 버린 쓰레기가 부메랑이 되어 지구의 이곳저곳이 이상기후로 몸살 앓는 것을 보면 환경이 파괴되면 우리 모두가 피해자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버리는 습관을 생활화해야 한다. 안흥외항에서 유람선을 타기로 했으나 궂은 날씨에 오전 11시 30분, 오후 2시의 정기유람선 운행시간이 맞지 않아 다음 기회로 미뤘다. 가끔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여행이다.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수정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기분 내며 즐겁게 마시면 술도 약이 된다. 유람선 휴게실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방금 수산시장에서 사온 오징어회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안흥을 떠나며 안흥내항 뒷산의 안흥성(충남기념물 제11호)을 구경했다. 1655년에 축성된 안흥성은 석성(石城)으로 태안팔경 중 제2경이다. 동학혁명 때 성내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어 폐성되었지만 성곽과 동서남북의 성문이 비교적 원형대로 남아 있다. 서해바다와 가까운 603번 지방도와 32번 국도를 40여분 달려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의 천리포수목원으로 갔다. 수목원이 있는 소원면 해안을 북쪽으로 따라가면 만리포,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일리포해수욕장을 만나는 재미가 있다. 인근에 모항항, 의항항, 소근진성, 신두리해변, 신두사구 등 볼거리들이 많다. 천리포수목원은 국내 최대 식물종을 보유하고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아시아에서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수목원이다. 수목원을 설립한 故 민병갈 박사는 미국에서 태어나 2002년 운명하기까지 57년간 한국인으로 살며 "내가 죽으면 묘를 쓰지 말라. 묘 쓸 자리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으라"고 말했을 만큼 나무를 사랑했던 푸른 눈의 한국인이었다. 설립 이후 40년간 연구목적 외에는 출입할 수 없던 비밀의 정원이 7개 지역 중 밀러가든만 2009년 3월 1일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아름다운 수목원에서 국내외의 희귀한 식물자원을 구경하고 다양한 숲 체험을 하며 1시간 30여분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해수욕과 갯벌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천리포해수욕장과 만리포해수욕장이 인접한 천혜의 자연환경 때문에 이곳의 생태교육관과 게스트하우스가 친환경 숙박시설로 각광받고 있다. 생태교육관은 사용하고자 하는 날로부터 한 달 전, 그 외 숙소는 13일 전부터 예약이 가능한데 숙박 예약은 홈페이지(http://www.chollipo.org)에서 할 수 있다. 때로는 운이 좋은 날도 있다. 이 맛에 인생살이가 재미있기도 하다. 간간이 비를 뿌렸지만 차로 이동하는 시간에만 빗줄기가 거셌다. 수목원에서 나와 이원면 포지리의 이원식당으로 차를 몰았다. 원북면사무소를 지나 603번 도로를 북쪽으로 달리면 이원면소재지이다. 분명 태안군에 위치하지만 서산경찰서 소속인 이원분소 앞에 박속밀국낙지탕으로 유명한 이원식당(041-672-8024)이 있다. 여행은 추억거리가 많아야 한다. 이곳의 음식 맛을 아는 내가 일행들이 40여분 달려와 늦은 점심을 먹도록 특별히 소개한 식당이다. 주인이 입구에서 인원수를 묻더니 낙지가 딱 우리 인원만큼만 남았단다. 크기가 작은 것은 2마리, 큰 것은 1마리의 낙지가 들어가는 박속밀국낙지탕은 1인분에 15000원이다. 낙지가 연하고 박속이 무척 부드럽다. 이 집의 초장이 낙지를 더 맛있게 만든다. 국수와 수제비도 맛이 특별한데 여행객의 배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양이 넉넉하다. 배곯던 어린 시절 박속을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식량 대용으로 사용하던 식품들이 웰빙 음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편리한 교통 때문에 볼거리, 먹거리가 지천인 세상이다. 계획을 조금 벗어났지만 주어진 환경에 스스로 적응하며 마음을 맞춘 여행이었다. 이원식당에서 청주로 향하며 모두가 만족한 여행을 마무리 했다. ■박속밀국낙지탕■ 1. 냄비에 물과 박속을 넣고 끓인 후 육수에 낙지를 넣어 익힌다. 2. 낙지를 알맞게 썰어 초장에 찍어 먹은 후 국수와 수제비를 넣는다. 3. 다시 한 번 끓인 후 국수와 수제비를 건져 먹는다.
필자는 어릴 적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의 담임선생님을 잊지 못한다. 1학년 담임 전월순 선생님은 여름 무더위에도 하얀 옷을 깨끗하게 입으셨고 백구두를 신은 단정한 분이셨다. 내가 자란 시골은 매일 흙먼지가 일었고, 비라도 오는 날은 흙탕물이 튀기는 곳이었지만 담임선생님은 항상 깨끗한 흰 옷을 입으셨던 걸로 기억이 된다. 선생님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셨으며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니 어린 마음에도 긍정의 마음이 와 닿고 긍정을 배워 오늘의 성공을 이루게 됐다고 생각한다. 창의적 체험학습 시도하다 박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교수로 생을 보내다 학교를 설립하고 총장이 되기까지 힘든 과정을 거쳤지만 그럴 때마다 초등학교 시절에 몸으로 익혀 뒀던 깨끗한 선생님의 이미지와 긍정의 힘이 작용해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의 행동과 지도는 나에게 뿐 아니라 동기생 모두에게 일생의 지침이 됐다. 한 날의 일화를 소개한다. 금요일인 그 날은 선생님의 생신이었다. 선생님은 예쁜 옷을 입고 오셔서 학생들에게 특별한 시간을 갖자고 하셨다. 그리고는 반장이었던 나를 불러 학생들을 줄 세우라 하셨고, 줄 선 학생들을 이끌고 옆 동산에 올라가 야외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덕분에 어린 나와 친구들은 신나게 가위바위보 게임이나 노래 등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귀가했다. 그 후 부모들의 쑥덕임을 통해 선생님이 학교에 보고하지 않고 결재도 받지 않은 상태로 학생들을 이끌고 나가 화가 난 교장선생님에게 불려가서 혼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돼 걱정이 컸었다. 그 시절의 학교에서는 교실을 벗어난 수업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고, 공부라는 것은 책을 읽고 쓰는 것이 전부라고 보는 시기였다. 문맹수준도 높았고 침 발라 연필을 꾹꾹 눌러 쓰던 시절에 허락받지 않은 야외수업이라는 큰일을 선생님은 겁 없이 벌였던 것이다. 지금의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창의적인 수업을 구상해 실현한 멋진 분이었는데 말이다. 다음 주 월요일 교장선생님의 훈화가 이어졌다. 담임선생님은 전교 학생들 앞에서 야단맞을 각오로 고개 숙이고 있었는데 단상에 오르신 교장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교운영은 교장의 책임 아래 하는 것이고, 학급 운영은 담임교사 책임지고 하는 것이다. 지난 금요일 1학년 수업을 알아보니까 4시간 동안 야외수업을 잘 진행했고 전 학생이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참여했으며, 학생들은 그 날의 수업에 만족하고 있었다고 한다. 야외수업을 사고 없이 잘 해냈으므로 이 사항은 벌 받을 사항이 아니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사전에 보고하고 결재를 득한 후 야외수업을 계획 하에 시행하십시오.” 멋진 선생님에 멋진 교장선생님이었다. 초등 선생님들에게 박수를 먼 옛날의 이야기지만 지금도 초등학교 학생이나 교사를 보면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과는 지금도 모임을 갖고 있다. 다들 사회 각계각층에서 지도자로서 든든한 위치에 우뚝 서 있으며 스승의 날이면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 그 때의 가르침과 그동안의 고생에 감사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멋진 선생님의 가르침은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흡수하는 잠재적 교육과정으로 학생들의 성장의 원동력이 되며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 어리디 어린 시절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의 이미지는 늙어가는 제자의 가슴에 훈훈히 남아 내 생애 평생의 지침이 되고 있다. 어린 제자들 키우느라 고생하시는 초등학교 선생님들께 격려와 존경의 박수를 보내 올린다.
‘불리’를 보며 피해자들의 사연에 눈물을 훔친 관객들에게 영화는 한 가지 의문을 남긴다. 영화가 실제 피해자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오랜 기간 장애로 인해 괴롭힘을 당해왔던 사실상의 주인공인 알렉스는 영화 촬영 후 단 한 명의 가해자에게만 진정어린 사과를 받았다. 그러나 괴롭힘은 중단됐고, 알렉스는 그대로 이스트미들스쿨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친구들과 말도 잘 하지 못했던 알렉스는 현재 전국을 돌아다니며 학교폭력예방 강연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가수 숀 킹스턴과 프리스타일 랩 대결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성 정체성 때문에 교사들에게까지 왕따를 당해 결국 학교를 중퇴했던 캘비는 어엿한 고졸 학력을 갖게 됐다. 학교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그녀는 5월 여자친구와 3주년을 기념했다. 캘비의 가족은 오클라호마시로 이사해 더 이상 이웃들의 따돌림을 받지 않는다. 그녀는 왕따 피해자를 위한 활동을 계속할 계획이다.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통학버스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던 저미야는 소년비행센터에서의 치료 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어머니의 보호관찰 아래서 지내야 했지만, 이제는 학교로 돌아가 무사히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집단 따돌림으로 집에서 목을 매 숨진 타일러의 부모 데이비드와 티나 롱은 지속적으로 학교폭력예방 활동을 펼치는 한편 타일러 자살 관련 소송도 진행하고 있다. 5월22일 롱 부부는 교육감의 해명과는 달리 타일러의 자살 원인이 따돌림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판결 요지를 받았다. 그러나 학교의 감독책임 소홀에 대해서는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배상을 받지 못해 6월15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페이스북에 ‘침묵하는 아이들을 위해(Stand for the Silent)’ 페이지를 개설해 학교폭력 피해자 옹호 활동을 시작한 타이의 부모 커크와 로라 스몰리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그들의 사연을 전할 수 있게 됐다. 현재 그들의 활동에는 25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다. 알렉스 사건의 간접적인 가해자로 묘사된 킴 록우드 교감은 영화 상영 후 수없이 쏟아지는 협박 메일과 해임 청원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도 이후 영화의 일방적 묘사와는 달리 그녀도 학교폭력 피해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노력했다는 학부모들의 제보가 들어와 청원은 기각되거나 중단됐다. 그녀는 이번 학기부터 인근 초등학교 교장으로 임명됐다.
최철자 여구회 회장이 17일 전주교대(총장 유광찬)를 방문해 발전기금 100만원을 기탁했다. ‘여구회’는 전주교대 9회 졸업생 중 전북권 교육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25명의 초등 여교사들이 교육정보 교류 및 활성화 도모 등 전북 초등교육진흥에 기여하기 위해 결성했다.
김영화 서울화계초 교장이 22일 건국대에서 ‘학교조직혁신의 결정요인에 관한 연구: 초등학교 교원의 사회연결망 특성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김 교장은 조직 구성원 간의 연결망 구조, 상호작용, 행위자의 특성 등을 살펴보고 수업, 학교운영, 학교조직에 있어 어떤 결정요인에 의해 혁신이 촉진 및 억제되는가를 밝혔다.
어린 시절 시골마당의 멍석에 앉아서 옥수수를 먹던 추억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온 가족이 저녁을 먹고 풀잎을 태워 모기를 쫒는 연기를 쐬며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여름밤을 보냈었다. 라디오도 없었던 시절이라서 마을단위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을 주제로 이야기하다가 피곤한 몸으로 누워서 밤하늘의 은하수를 따라 별을 세며 하루를 보냈던 그 시절이 요즘의 도시생활 보다 더 정겨웠던 것 같다. 어쩌다 고향을 지나칠 때면 도로 옆에 원두막을 짓고 대학찰옥수수를 파는 임시로 만든 가게가 여기저기 보인다. 피서 철을 맞아 지나가는 차량이 멈추어서 가족과 함께 삶은 옥수수를 사서 먹는다. 그리고는 맛있다고 하며 옥수수를 담은 자루를 트렁크에 싣는다. 초여름부터 추석 무렵까지 몇 차례 옥수수를 판매하고 있다. 입소문이 퍼져서 전국에서 택배로 주문이 쇄도하여 현장에서 판매하는 것 보다 택배로 파는 양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TV에도 수차례 소개되어 괴산 장연의 대학찰옥수수는 없어서 못 팔정도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찰옥수수를 먹어 본 사람은 다른 옥수수는 맛이 없어 못 먹겠다고 한다. 매년 단골로 사가거나 전화로 주문하여 택배로 받아 삶아 먹는다고 한다. ‘대학찰옥수수’가 탄생하게 된 것은 1991년 이 고장 출신 최봉호 박사가 충남대학교에 재직할 당시에 신품종으로 개발한 옥수수(장연 연농1호)라고 한다. 개발했을 당시 찰옥수수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대학교수가 개발했으니 ‘대학찰옥수수’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굳어졌다는 이야기이다. ‘대학찰옥수수’는 일반옥수수(15~17줄)와 다르게 한 자루에 8~10줄로 알이 굵고 색이 희다. 차지고 고소한 맛에 껍질도 얇아 잇새에 끼거나 달라붙지 않는 특징이 있고 맛이 달다. 보통의 씨앗처럼 옥수수 알을 심어 재배하면 특유의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대학찰옥수수’를 개발한 최 박사님이 미국(오클랜드)에서 씨앗을 생산하여 국내로 보내와 농가에서 재배한다고 한다. 올해 재배현황은 약 2,600여 농가에서 재배하여 약 201억 여 원의 소득을 올릴 예정이라고 한다. 농학박사의 애향심으로 고향사람들은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대학 찰옥수수가 유명해 지자 인근지역으로 확산되어 재배되고 있다. 옥수수를 냉동처리를 하여 저온저장고에 보관하기 때문에 겨울철에도 냉동옥수수를 녹여서 쪄먹으면 그 맛이 제철에 먹는 것처럼 맛이 있다고 한다. 옥수수 작목반이 구성되어 생산하고 저온저장고도 괴산군청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현지의 이상기온으로 옥수수 씨앗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정년 후에도 연구를 계속하는 최박사는 미국에 거주하면서 대형농장에서 생산한 씨앗을 고향으로 보내주고 있다. 최봉호 박사의 공로는 인정해주어야 한다. 성품이 겸손하시고 애향심이 남달라서 매년 고향마을 경로당 어르신들에게 돈을 보내주셔서 잔치를 한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들린다. 이렇다 할 만 한 특용작물이 없던 농촌지역에 알맞은 ‘대학찰옥수수’라는 품종을 개발하여 보급함으로써 농가소득에 크나큰 보탬을 주고 있는 학자이다. 지역축제도 여러 차례 하였고 이제는 그 명성이 전국에 알려졌다. 피서 철에 송계계곡을 비롯하여 단양팔경, 청풍, 수안보, 문경새재, 쌍곡 등의 계곡을 찾는 피서객이 많이 사먹는다고 한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IC가 있는 곳이라 교통도 편리하여 오지마을 이었던 곳인데 이 고장 출신 농학박사의 남다른 애향심으로 살기 좋은 마을로 성장해 가고 있다. 농업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식량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우리의 토종종자까지 지키지 못하고 미국에서 역수입해오는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통일벼 품종을 개발하여 식량자원 확보에 크게 공을 세운 충주 소태면 출신 ‘통일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허문회 박사도 충주출신이다. 2010년에 작고하신 고 허문회 박사의 기념관이 조동리 선사박물관 안에 마련되었다고 한다. 고향땅의 기후와 토질에 맞는 찰옥수수를 개발 보급하여 고향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최봉호 박사의 기념관이 그 분의 고향집근처에 개관 될 날을 마음속으로 기대해 본다.
漢字속에 숨은 이야기 (15) 제30회 런던 하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양궁여자단체전에서 7연패(連覇)의 위업을 달성했고 개인전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하는 낭보(朗報)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 한다. 남자단체전 4강의 감독이 모두 한국인이고 40개 참가국 중 12명의 한국인 감독이 활약하고 있다. 이(夷)자를 파자하면 大 +弓(활에 화살을 합쳐 형상화)한 글자인데 설문해자에 오랑캐(중국의 변방사람)이(夷)자로 되어있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큰활 이(夷)로 가르쳐야 한다. 은나라 갑골문에 나오는 동이(東夷)는 활을 잘 쏘는 민족으로 명판(明板)에 “夷人不盜”라 했고 夷는 仁也, 大也, 居也라 했다. 동이(東夷)는 君子 不死之國이라고 하여 우리민족은 동이(東夷)족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올림픽을 통해 증명해주고 있다.
지난 8월 11일부터 12일까지 대학동기 부부들이 충남 서북부지역의 문화재와 자연풍경을 돌아봤다. 어디인들 소중하지 않은 곳이 있을까만 코스를 정할 때 되도록 고속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문화적 가치에 비해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여행지를 우선시했다. 짝짝짝!!! 런던올림픽 축구경기 동메달 결정전.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트집삼아 바다 건너편에서 괜히 열을 내고 있던 때라 경기 내내 TV 앞에서 마음 졸였다. 우리의 태극 전사들이 투지를 불사르며 2:0 승리를 이뤄낸 덕분에 날밤을 새웠어도 정신이 멀쩡했다. 청주를 출발한 일행들이 경부고속도로와 21번 국도를 달려 처음 찾은 곳이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추사고택이다.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건립했다는 추사고택은 조선후기의 실학자로 서예가를 대표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고택은 솟을대문의 문간채ㆍㄱ자형의 사랑채ㆍㅁ자형의 안채ㆍ추사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이루어졌고, 왼편의 야트막한 산 아래에 멋들어진 소나무가 만든 풍경이 아름다운 추사 선생의 묘가 있다.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소박하면서도 품격이 느껴지는 사랑채와 화단 앞쪽 중앙의 석주가 맞이한다. 사랑채는 추사가 거처하며 친교와 예술 활동을 했던 공간이고, 해시계로 사용되었던 1m 높이의 석주에 '石年(석년)'이 새겨져 있다. 뒤편으로 돌아서면 벽에 걸린 주련과 낮은 굴뚝이 맞이하고 먼발치의 추사영실까지 담장이 이어진다. 안채는 안방ㆍ건넌방ㆍ대청이 배치돼 있고, 부엌의 천장에 다락이 설치돼 있다. 사랑채에서 안채로의 이동로,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로운 공간구조, 지붕의 부드러운 곡선미가 돋보인다. 안채 뒤편의 돌계단으로 연결된 작은 문을 들어서면 돌담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건물이 있다. 이곳이 추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추사영실이다. 추사영실(秋史影室)이라는 현판은 추사체의 제자인 권돈인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사당에서 바라보이는 고택의 야트막한 지붕들이 평화롭다. 추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장남으로 태어나 병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고 당쟁에 휘말려 떠난 제주도 유배지에서 추사 예술의 진수인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그렸다. 추사고택 곳곳에서 추사가 남긴 유물과 유작들을 만나볼 수 있다. 죽로지실(竹爐之室)ㆍ무량수(無量壽)ㆍ만수무강(萬壽無疆) 등의 편액이 방마다 붙어 있고, 추사의 글이 적힌 주련(기둥이나 벽에 장식 삼아 써 붙인 글씨)이 고택을 감싸듯 걸려 있다. 주련의 글귀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추사고택에서 백송으로 가는 길가에 돌담장이 둘러있는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 열녀문인 화순옹주 홍문(충남 유형문화제 제45호)과 묘막터, 조각공원이 있다. 김한신은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로 김정희의 증조부이고 화순옹주는 영조의 둘째 딸로 남편이 38세의 나이에 별세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의 길을 택해 정조가 열녀정문을 내렸다. 예산 용궁리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은 수령이 약 200년으로 높이가 14.5m 정도 되는 껍질이 하얀 소나무이다. 백송은 추사 김정희 일가의 상징으로 1810년경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추사가 필통에 씨를 넣어 가져와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것으로 전해온다. 백송은 번식이 어렵고 잘 자라지 않아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은 희귀수종으로 지상 50cm에서 갈라진 세 줄기 중 동쪽의 줄기만 외로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618번 지방도로를 40여분 달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의 서산마애삼존불상으로 갔다. 운산면의 고풍저수지 앞에서 좌회전하면 가까운 곳에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이 있다. 가뭄으로 물이 적지만 용현계곡에 피서객들이 많아 차를 주차하기 어렵다. 마애삼존불상은 용현식당 앞 산기슭에 있어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관리소를 지나면 강한 비바람을 막아주도록 큰 바위의 아랫부분에 부조로 조각된 삼존불이 백만불짜리 미소로 맞이한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아침에는 밝고 평화로운 미소, 저녁에는 은은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보여주는 백제시대 최고의 걸작이다. 계곡의 층암절벽에 여래입상(2.8m)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보살입상(1.7m), 왼쪽에 반가사유상(1.66m)이 조각되어 있다. 어느 위치에서 보든 개성이 뚜렷한 세 불상이 세상을 다 품은 듯 포동포동한 얼굴에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1400년 전에 조각한 불상의 자연스러운 생김새와 편안한 미소가 보면 볼수록 우리네 이웃을 닮았다. 불상 앞에 보호각을 세웠다 철거하는 등 그동안 마애삼존불상의 보존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중국과 교류하던 시절 백제의 도읍지 부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용현자연휴양림 쪽으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보원사지를 만난다. 보원사지는 불교문화를 꽃피운 절터로 보물로 지정된 석조, 당간지주, 5층석탑, 법인국사보승탑, 법인국사보승탑비가 자리를 지킨다. 마애삼존불을 나와 좌회전해 서산 방향으로 가며 고풍저수지를 구경한다. 삼거리에서 647번 지방도로로 좌회전해 직진하면 소떼가 풀을 뜯는 목장지대와 한우개량사업소를 지난다. 개심사 방향으로 좌회전한 후 목장지대 사이의 신창저수지를 지나면 운산면 신창리에 개심사 주차장이 있다. 주민들이 농산물을 파는 상가에서 산채비빔밥을 먹었다. 상가 끝에 몇 년 전에 세운 일주문이 서있다. 일주문이 세워진 후에도 개심사의 진짜 분위기는 계곡 옆 산책길을 지나 작은 돌덩어리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일주문을 대신하는 두 개의 돌에 마음을 씻는 동네와 마음을 여는 절 입구를 뜻하는 '세심동(洗心洞), 개심사입구(開心寺入口)'가 써있다. 산속에서 이보다 좋은 말을 어떻게 만나겠는가. 그런데 산책로를 공사 중이라 두 개의 돌이 사라졌다. 돌이 서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세심동 개심사입구'의 뜻을 되새겼다. 백일홍이 붉게 꽃을 피우고 맞이한 개심사는 수덕사의 말사로 651년(의자왕 11)에 창건되었을 만큼 역사가 깊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ㆍ영산회괘불탱화ㆍ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의 문화재가 있고, 굽은 소나무를 가공하지 않고 건축자재로 사용한 종루나 심검당이 볼거리다. 심검당의 벽면을 보고 있으면 기둥의 나무들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세상엔 속은 채우지 않고 겉만 화려하게 포장하면서 크기를 키운 것들이 많다. 하지만 개심사에서는 고즈넉한 연못과 작은 앞마당, 낮은 축대와 울퉁불퉁한 돌계단, 부드러운 곡선과 자연으로의 회귀를 배우는 화장실 등 공간에 어울리는 아담한 크기의 건물들을 만난다. 이렇게 작고 소박한 것들이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한다. 개심사에서 나와 서해안고속도로 해미IC와 가까운 해미면 읍내리의 해미읍성으로 갔다. 해미읍성(사적 제116호)은 원형이 잘 보존된 읍성으로 해안지방에 피해를 입히던 왜구를 막기 위해 조선시대에 건립되어 병마절도사가 청주읍성으로 옮겨가기까지 230여년간 충청도의 군사와 행정을 책임졌던 곳이다. 해미읍성도 다른 옛 성들과 같이 3년 이내 무너질 경우 책임을 지도록 공사를 맡은 구역에 고을 명을 새겨 넣는 실명제를 실시했다. 실명제 실시로 튼튼하게 성을 쌓은 읍성은 밖에서는 수직의 석성이나 안에서는 비스듬한 토성이다. 당시 내 고장 청주사람들이 이곳까지 와서 성을 쌓았다니 그 고생을 알만하다. 성문에 들어서면 수령 300여년의 회화나무(기념물 제172호)와 옥사가 눈에 들어온다. 해미읍성은 선조 12년(1578) 충무공 이순신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고, 약 3천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로 처형당한 순교성지이다. 1790~1880년대에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의 머리채를 회화나무 가지에 철사줄로 매달아 고문했다. 옥사에서 나와 민속가옥을 지나면 동헌이다. 외삼문과 동헌, 객사와 내아를 둘러보고 뒷산으로 올라가 송림과 성벽을 따라 걷는 것도 좋다. 송림 옆 정자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더위를 식혔다. 서문 밖으로 가면 순교성지를 알리는 '순교현양비'와 병인 대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자리개질로 처형했던 사형도구 '순교 자리개돌'이 있다. 광천IC까지 서해고속도로를 달려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의 갈매못성지로 갔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자리 잡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갈매못은 1866년 병인박해 때 프랑스인 다블뤼 주교와 장주기 요셉 등 500여명이 처형된 곳이다. 갈매못성지가 우리나라 유일의 바닷가 순교성지가 된 사연이 있다. 고종의 국혼을 앞두고 한양에서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면 국가의 장래에 이롭지 못하다는 무당의 예언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오천의 충청수영으로 보내 사형을 집행했다. 형장은 바닷가 모래밭 수군들의 훈련장이었는데 부근에 암매장 되었던 유해는 명동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975년 순교지가 확인되며 순교비가 세워지고 성지가 조성되었다. 이곳에 순교성인비, 순교터 표석, 예수성심상, 기념전시관, 승리의성모성당 등이 있다. 오천항은 주변의 산과 섬들이 방파제 역할을 해줘 폭풍의 피해가 없고, 조수간만의 차에 관계없이 선박의 통행이 자유로운 서해안 천혜의 항구로 조선시대 충청수영이 있어 군선이 정박하고 수군이 주둔하던 곳이다. 오천항 바로 옆 산중턱에 왜군의 침범과 이양선을 감시하던 오천성이 있다. 오천항에서 홍성군 서부면의 남당항까지 40번 국도를 달리면 보령방조제, 천북굴단지, 홍성방조제를 지난다. 남당항은 가을철이면 해마다 대하축제가 열릴 만큼 해산물이 풍부해 주변에 횟집이 많고 안면도가 바라보이는 해안경관이 아름답다. 이곳의 신토불이횟집 (041-632-8000)에서 푸짐한 회와 소주를 앞에 놓고 여행의 피로를 풀며 올림픽 여자배구 동메달 결정전을 시청했다. 일본에 패해 아쉬웠지만 4위도 대단한 성과이기에 기분 좋게 술잔을 부대며 "위하여"를 외쳤다. 인근의 숙소로 향하며 첫째 날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가방에 집착하는 여자 나는 가방을 참 좋아한다. 그렇다고 비싼 명품에 집착하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세상 일에 미련이 많아서일까? 저장 본능 같은 것이 마음 속 깊이 내재되어 있어서 그런 걸까. 단골 마트에서 물건을 일정 금액 이상으로 구입하면 가방을 보너스로 얹어주는 행사를 할 때면, 몇 번을 망설이다 기어히 사고 마는 집착을 보인다. 물건 자체보다도 가방에 마음이 끌려서 충동 구매를 하는 편이니 고쳐야 할 태도이다. 그렇게 해서 받은 여행용 가방을 아들에게도 주고 딸아이에게도 주었다. 친구들 모임에 가거나 직장의 친목 모임에서 여행을 갈 때에도 가장 먼저 챙기는 물건이 가방이다. 제자의 주례 부탁을 받고 제일 먼저 준비한 것도 가방이었다. 심지어 딸아이가 색다른 손가방을 가지고 다니면 자꾸 예쁘다며 아이들처럼 귀찮게 하곤 한다. 그렇다고 쓰지 않고 둔 가방을 버리거나 쉽게 처분하지도 못한다. 그 가방에 얽힌 자잘한 이야깃거리까지 같이 버리는 것같아서이다. 가방에 대한 이런 집착은 어렸을 때 제대로 된 책가방을 가져보지 못한 탓이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마치 모유를 제대로 먹지 못한 아이가 손가락을 빨거나 특정한 물건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처럼 나도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의 파랑새, 새 어머니 가방에 대한 나의 이런 애착은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어머니의 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30년이 넘은 어머니의 작은 옷가방. 그것은 새어머니가 우리 아버지와 재혼하면서 가져오신 참 작은 가방이었다. 그 어머니는 3년 동안 홀아버지와 삶을 이어가던 우리 집에 찾아온 파랑새였다. 쉰을 넘긴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면 철없는 딸아이 대신에 따스한 저녁 밥을 지어놓고 아버지의 지친 어깨를 보듬어 준 여인이었으니 우리 집의 희망이었던 새어머니는 파랑새가 분명했다. 다만 어린 나에게는 그것이 늘 서럽고 불만이었지만 적어도 아버지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등불이었던 어머니. 그 어머니는 가로 세로 50센티미터에 깊이는 10센티미터 쯤 되는 연하늘색 작은 손가방 하나를 가지고 우리 집에 오셨다. 45년이나 지난 그 가방의 모양과 색깔, 심지어 지퍼의 위치까지 장기기억의 저장고에 정확하게 기억되어 있으니 놀라울 뿐이다. 그날은 칠월칠석이었는데 비가 참 많이 왔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놀려댔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에 결혼을 한다면서. 나는 그날 샘통을 부리면서 방 아랫목에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어른들의 농담을 들으며 괜히 슬퍼했다. 사람들이 나의 친엄마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어린 마음에 슬펐던 것이다. 나이 많고 가난하고 볼품 없는 남편을 사랑한 어머니 어머니는 그 손가방을 무척 소중히 하셨다. 내 손이 닿지 않을만큼 높은 시렁에 올려놓으셔서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몰랐다. 어머니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손가방을 갖고 싶어서 욕심을 부리곤 했지만 어머니는 늘 높이 올려 놓고 구경조차 시켜주지 않으셨다. 가난한 아버지를 따라 두 번째 시집을 온 어머니. 내 어머니와 헤어지고 3년 동안 홀로 나를 기르시던 아버지와의 만남은 동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만큼 금슬이 좋으셨다. 아버지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어머니는 아버지 마음 하나보고 사신다며 아버지의 얼굴때문에 싸우거나 탓하는 소리를 듣지 않고 자랐다. 하얀 피부에 곱상한 얼굴을 가진 어머니는 손재주가 좋으셔서 뭐든지 잘 만드셨고 음식 솜씨도 일품이어서 얌전하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솜씨가 좋으신 어머니는 나를 가르치는 데도 엄격하셨다. 그때 겨우 초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음식을 하실 때면 곁에 세워놓고 설명을 하시며 요리법을 가르치고 솜씨를 가르치셨던 어머니였다. 초등학교 3학년에게 살림 가르친 독한(?) 엄마 "옥순아, 아직 어린 너에게 일을 가르치고 음식 만드는 법까지 배우게 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울지 모르지만 네가 커서 성공하여 다른 사람을 부릴 때에도 네가 알고 시키는 것과 모르고 시키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단다. 그리고 여자가 부지런해야 살림이 모이는 법이다. 밥태기 하나라도 구정물에 버리면 죄 받는다. 음식이 귀한 줄 모르고 함부로 하는 것은 아주 나쁜 짓이지. 너희 아버지가 일터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해서 벌어온 돈으로 사들인 쌀인데 한톨이라도 버리면 되겠냐? 자고로 여자는 엉덩이가 가벼워야 하는 법이다. 어디 가서 놀면서 해넘는 줄도 모르면 안 되지. 시집을 가더라도 시댁에 가면 제일 먼저 설거지통을 가까이 해야 한다." 열살 남짓한 어린 내가 알아 듣지도 못할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게 읊으시던 어머니의 신부 수업(?)은 그렇게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어머니는 야박하리만큼 나에게 일을 가르치셨다. 설거지를 해놓으면 밥 그릇 둘레를 손가락으로 만져 보시며 행여나 덜 씻어졌나 확인하시곤 했다. 어머니 맘에 들 리가 없던 어린 소녀는 그런 엄마가 팥쥐엄마 같았고 나는 콩쥐라고 생각해서 늘 몰래 울고 다녔다. 그런데 어머니에게 듣던 잔소리를 내 딸아이에게 그대로 반복하는 내 모습이 튀어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웃곤 한다. 오히려 딸아이를 아낀다며 잔소리 대신 내가 다 해주는 바람에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하는 것같아 부끄러운 생각이 들곤 한다. 그 당시에는 시집올 때 혼수품목으로 재봉틀이 손꼽혔지만 가난한 신부였던 어머니는 재봉틀 대신 손으로 옷을 잘 지으셔서 옷도 잘 만들어 입으셨고 내 옷도 잘 지어주셨다. 바느질 솜씨와 요리 솜씨가 뛰어난 어머니는 얌전하셔서 살림 밖에 모르셨으니 아버지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그런데 그 어머니는 성질이 급하셔서 느려 터지고 고집도 센 나와 정반대라서 그게 문제였다. 그래도 어머니께 느리고 고집부린다고 매라도 맞으면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눈물을 감추는 지혜로움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얻곤 했다. 내가 울고 있으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할 것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나더러 영리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걸 보면 미련퉁이는 아니라며 동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추켜 세워 주시곤 했다. 이제 생각하니 우리 부모님은 '미녀와 야수' 커플이었던 것같다. 마술이 풀리지 않고도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하며 가난하고 볼품없는 외모를 가진 쉰을 넘긴 한 남자를 극진하게 사랑한 어머니. 가난한 남편의 수입을 쪼개어 쓰던 어머니는 살림의 지혜가 빛났던 분이었다. 어쩌다 소고기 한 근을 사 오면 그것을 볶아서 시원하게 갈무리하여 일주일 동안 아버지의 조반상에 조금씩 국으로 끓여 내놓는 현명한 부인이었다. 아끼고 모으는 전형적인 아내의 모습을 내게 보여주셨던 어머니의 모습을 은연중에 나도 배우고 있었다. 외모로 보아서는 여자들의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아버지의 외모는 젊어서 병치레로 얼굴 중에서 외모를 결정짓는 잘 생긴코 모양이 정상인들과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미남이셨던 아버지가 젊어서 병을 얻어 코를 상하신 후 인생을 포기하려고까지 하실만큼 치명적이었다. 철없는 나도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부형 총회 때 아버지 얼굴을 보고 친구들이 놀려대는 게 싫어서 늘 숨어버리곤 했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엄마들이 학교에 나오는데 우리 집에서는 다른 집 아버지들보다 훨씬 나이 들고 코 모양까지 보통 사람들과 달랐던 아버지가 학교에 오시는 날은 복도 쪽을 내다보느라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던 철없는 딸이었다. 오직 친구들의 놀림이 부끄럽고 싫었던 초등 학생이었던 나에게 아버지의 자상함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선생님을 존경한 멋진 아버지의 교육 방법 학교에서 회의가 있거나 선생님의 가정방문이 있는 날은 일도 나가시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주신 아버지의 교육열은 박수를 받아 마땅했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를 부끄러워한 불효자식이었다.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신다고 하면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잉어튀김을 하여 술상을 차리게 하셨고 소풍을 가는 날에는 아버지가 즐겨 피우시던 아리랑 두 갑을 꼭 싸서 갖다드리라시던 아버지. 아버지가 가장 많이 고개를 숙이던 유일한 분은 나의 담임 선생님이셨다. 어렸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우리 선생님인 줄 알았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아버지도 꼼짝 못하고 인사를 공손히 하는 분이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교직이나 선생님을 우습게 보거나 자식들 앞에서까지 선생님을 험담하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었다. 심지어 중학교를 시험을 쳐서 가던 그 시절에 아버지가 원하는 중학교에 원서를 내야 진학시킬 수가 있으니 도시로 원서를 내면 좋은 중학교에 합격이 되더라도 집안 형편상 학교를 보낼 수 없다며 발이 닳도록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설득을 하시면서도 내 앞에서 선생님을 원망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이제 생각하니 아버지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선생님을 그처럼 위하고 존경했던 것이리라. 결국 나는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도시 학교로 원서를 낸 선생님의 뜻대로 입학시험을 보았고 합격했으나 진학하지 못한 채 가방끈이 짧은 인생을 시작해야 했다. 초등학교(그 때는 국민학교)시절에는 책가방이라기보다는 책보자기가 전부였다. 친구들의 멋진 빨간 책가방이 부러웠던 초등학교 시절, 그리고 멋진 교복을 입은 여중학생이었던 친구들이 가지고 다녔던 의젓한 책가방은 부러움을 넘어 집착으로 변질되었으니, 사춘기를 지나던 소녀의 가슴 속에는 '나도 배우고 싶다'는 간절함이 나를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주경야독의 길을 찾아 서울 길을 떠날 때 어머니는 가장 아끼는 물건인 그 손가방을 선물로 주셨다. 어머니의 손때 묻은 손가방 속에는 책 몇 권과 성경, 속옷 한 벌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나를 집안을 일으키는 기둥으로 여기셨고 서울로 돈을 벌러 떠나는 나를 보내시며 하염없이 우셨던 1974년 5월 8일. 20개월 동안 식모살이를 하며 월급을 모아 세 식구가 살 전셋방을 얻어 고향으로 내려오던 날, 나는 어머니의 손가방을 몇 배나 큰 가방 속에 담아서 귀향했다. 그 어머니가 가르치신 대로 주인 집의 살림을 잘 해냈고 알뜰히 모은 월급으로 강의록을 사서 독학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젊은 날의 내 가슴 속에는 늘 어머니의 손가방과 내가 갖고 싶었던 책가방이 있었다. 젊어서 고생한 덕분에 잘 이겨낸 세월 비록 친구들처럼 당당하게 정규중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주경야독의 길로 돌아와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었다. 그렇게 공부한 결과 공무원 시험을 합격하였고 한 발 더 나아가 통신대학 학사 과정을 마치고 교사 자격증을 획득하였으며 순위고사를 치르고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까지 얻었다. 교단에서 내려서는 그날부터는 가장 좋아하는 분야의 박사 학위에 도전할 생각이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배우는 자로 살고 싶다. 나는 아직도 책가방을 소중히 하며 살아가고 있다. 퇴근 후에는 도서관에 들러 독서 활동을 하곤 한다. 서점에다 주문해 둔 새 책을 책가방에 넣고 다니며 어린 시절 부족했던 책가방에 대한 포만감을 느껴보는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이승의 문을 지나 먼저 가신 저 세상에서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슴에 안으신 채, 언젠가 만나게 될 추억의 손가방을 들고 나를 기다려 주시리라. 나를 낳아주신 친어머니가 내 육신의 어머니라면 길러주신 어머니는 나를 가슴으로 낳아주신 분이다. 친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지만 새어머니는 늘 내 눈물샘을 자극하는 분이다. 그 어머니가 가신 음력 3월 보름에는 어머니가 그토록 소중히 하셨던 그 손가방과 꼭 닮은 가방을 하나 사야겠다.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나에게 인생의 희망을 걸고 지극히 믿어주셨던 어머니의 비원을 담아주셨던 그 손가방 덕분에 나는 아직도 살아있는 동안 생각을 갈고 닦는 일에 목말라 하는 지도 모른다. 늘 채웠다가 비우는 연습을 하며 주인의 의지에 따라 용도가 바뀌는 손가방. 어머니는 비록 나를 몸으로 낳아주시지는 못했지만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나를 끔찍히 아끼신 분이었다. 그 마음을 담아 슬픈 서울 길에 당신을 대신하여 딸려 보낸 손가방에 마음을 담아 나를 지켜 주셨던 내 어머니! 먼 후일 어머니를 다시 만나는 그 날, 지상에서 제대로 하지 못한 딸노릇을 다하렵니다. 그 때는 어머니, 당신의 손가방에 제 마음과 영혼, 가슴까지 가득 담아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겠습니다. 생전에 드리지 못한 말, "사랑해요! 내 어머니! 그리운 내 어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