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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불씨를 만들지 말라!*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이 미라의 주인공은 문정왕후의 종손녀. 부검 결과 미라의 태아는 머리가 질 입구까지 내려와 있었고 산모의 자궁은 파열된 끔찍한 상태였다. 자그마한 몸집의 이 여성은 출산의 고통 속에 아기와 함께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요즘에는 이렇게 목숨을 걸고 출산하는 여성이 없다. 하지만 옛날에는 미라가 된 ‘윤씨’처럼 죽어간 산모와 태아가 부지기수였다. 20세기 초에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유아 사망률은 4명 중 한 명 꼴이었다. 출산 과정에서 죽는 것까지 합치면 거의 절반가량이 세상에 태어나 걷지도 못하고 죽은 것이다. 출산의 고통은 커진 뇌와 좁아진 골반 때문 우리는 흔히 출산의 고통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지만 동물의 출산은 사람보다 훨씬 수월하다. 고통스런 출산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인간이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두뇌가 커져 생긴 부작용이다. 인간은 두뇌가 커지면서 고도의 기술을 만들고, 추상적 사고 능력과 언어 능력을 키워 복잡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됐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같은 몸 크기의 포유류에 비해서는 두뇌의 크기가 6배나 크며,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나 고릴라에 비해서도 3배가 크다. 인간은 머리 큰 기형적 생물체인 셈이다. 인간은 머리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숲 속의 원숭이 시절에는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외진 곳에서 혼자 아기를 낳을 수 있었다. 침팬지는 골반이 크고 아기의 머리가 작기 때문에 출산이 쉽다. 게다가 침팬지는 산도에서 빠져 나올 때 아기와 엄마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자세로 나오므로 엄마가 자신의 두 손으로 아기의 머리를 잡아당겨 빼낼 수 있다. 하지만 250~180만 년 전 사람(Homo) 속의 영장류인 인간이 출현해 두뇌가 급팽창하기 시작하면서 출산의 고통은 갈수록 커졌고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줘야 아기를 낳을 수 있게 됐다. 세계 어느 문화권이나 조산원이 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침팬지와 사람이 공통의 조상에서 갈라진 것은 600만 년 전. 인간은 침팬지보다 뇌의 크기가 3배나 커졌다. 사람의 아기는 큰 머리로 자궁경부를 압박해 열고 나온 뒤 머리를 옆으로 돌려 모체의 골반 뼈를 통과하므로 아기를 잡아 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아기를 자기 손으로 무리하게 잡아 빼면 척추나 목을 다치게 할 가능성이 크다. 아기는 임신 9개월이 되면 골반 개구부의 산도를 통해 머리부터 나온다. 산도를 비집고 나오는 아기의 머리는 0.5∼1㎝나 찌그러질 만큼 큰 압력을 받는다. 지난 300만 년 동안 인간의 뇌는 무려 3배나 커졌다. 반면 골반은 오히려 좁아졌다. 네 발로 걷던 원숭이가 직립보행을 하면서 다리와 다리 사이가 좁아진 것이다. 서서 배와 히프를 지탱하려면 두 다리 사이가 점점 좁아져야 한다는 것은 간단한 물리 법칙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골반이 좁아지면서 아기가 나오는 골반의 개구부도 따라서 좁아졌다. 갈수록 커지는 뇌와 좁아지는 골반 때문에 생겨난 출산의 부작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호모속의 인류가 출현한 이래 태어난 무수한 아기가 좁은 산도를 빠져 나오면서 질식해 죽었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생존 경쟁이자 자연선택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숙성한 뇌를 가진 태아만이 살아남았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자신은 수만 세대에 걸쳐 모두 무사히 좁은 골반을 통과한 선조의 후예인 셈이다. 조상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골반 통과에 실패했다면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뇌 미숙아 상태에서 태어나 보통 침팬지나 포유류는 뇌가 성체 뇌 용적의 45% 정도 됐을 때 세상에 나온다. 하지만 인간은 어른 뇌 용적의 25%일 때 태어난다. 걷지 못하는 것은 물론 기어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미숙한 상태에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1993년 침팬지와 인간의 뇌를 비교해 발표한 미국 노틀 데임 대학의 제임스 맥케나 박사는 만일 다른 동물처럼 태아가 충분히 성숙한 상태에서 세상에 나온다면 임신 기간이 21개월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뱃속에서 9달, 태어나서 12달을 합쳐 21개월이 되어야 아기는 겨우 혼자서 걷기 시작하고 뇌도 어느 정도 성숙하기 때문이다. 태어난 아기의 뇌는 만 한 살이 될 때까지 뱃속 태아와 똑같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다가 비로소 성장이 둔화된다. 세상에 어떤 영장류도 이처럼 특이한 뇌 성장 패턴을 가진 동물은 없다. 그래서 앨런 워커와 팻 쉽맨은 1996년 에서 인간이 고등한 지적 존재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뇌의 75%가 출산 뒤에 크는 특이한 성장 패턴을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람의 어머니는 새끼의 두뇌 성장을 위해 다른 포유류보다 극도로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장기간에 걸쳐 투자해야 한다. 동물 가운데 포유류는 암컷의 양육 부담이 무겁다. 그 포유류 가운데서도 인간은 더욱 더 양육의 부담이 크다. 사실 세상의 어느 동물도 인간처럼 자식 양육에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는 동물은 없다시피 하다. 인간은 엄마에 의해 미숙아에서도 생존 인간의 어머니는 생물학적으로 보면 극도로 미숙한 아기를 돌보게 디자인되어 있다. 엄마는 자궁과 태반 속의 따스함, 영양, 보호를 아기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램 되어 있다. 특히 아기에게는 엄마의 젖가슴이 제2의 자궁이다. 거기에는 엄마가 음식을 먹고 소화를 해 만든 고농도의 영양물질을 빨대처럼 빨아먹을 수 있는 젖꼭지가 달려 있다. 또 엄마의 젖가슴은 체온이 1∼2도 가량 높아 따뜻하다. 보드라운 엄마의 젖가슴은 촉감을 먹고 사는 아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감촉을 준다. 엄마가 아기에게 주는 모유는 단순한 영양물질이 아니라 사회적 영양물질이다. 엄마의 젖가슴은 아기가 울고 보채면 자동적으로 젖이 나온다. 처음에 아기와 엄마는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울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아기와 엄마는 하나가 된다. 아기는 탄생 직후부터 웃으면서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엄마가 웃으면 아기도 웃고 엄마가 실망하면 아기의 기분도 우울해진다. 아기와 엄마의 관계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인간관계이다. 이때 엄마와 아기 사이에 맺어진 관계가 커서 어른이 될 때까지 인간관계와 행동의 틀이 된다. 출산 전 아기는 유전적 프로그램에 의해 성장한다. 하지만 탄생 뒤 아기는 엄마와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처럼 다시 한번 창조된다. 미숙아로 태어남으로써 인간의 행동은 본능보다는 교육에 의해 사회적으로 형성되도록 운명을 타고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 접어들면서 아기는 엄마의 품에서 떨어져 나오고, 혼자서 잠을 자고, 보모의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는 무언가 불안한 존재가 되기 쉽다. 미숙아로 태어난 것이 뇌 발달에 결정적 그렇다면 언제부터 인간은 미숙아로 진화하기 시작했을까? 인간이 직립하면서부터다. 인류학자 리처드 리키는 1984년 아프리카의 케냐에서 180만 년 전의 완벽한 호모 에렉투스 화석을 발견했다. ‘나리오코톰 소년’으로 불리는 이 호모 에렉투스의 뇌 용적과 골반의 크기를 조사해 본 결과 이때부터 이미 사람은 미숙아로 태어났다는 것이 밝혀졌다. 미숙아로 태어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호모 에렉투스에게는 역설적으로 엄청난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뇌세포가 왕성하게 자라는 시기에 어둡고 재미없는 엄마의 자궁 속에서 있는 것보다 1년 빨리 세상에 나와 엄마와 세상이 주는 자극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기어 다니지도 못하지만 아기는 다양한 자극을 통해 감각신경이 매우 예민하게 발달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호모 에렉투스는 사회적 지능이 매우 발달하게 되었고 복잡한 협동 사회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두뇌가 커지면서 인간은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회적 지능이 특히 발달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상대를 속이고, 또 상대가 나를 속이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분별하고, 없는 데도 있는 척하고,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고,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고, 상대의 심리를 읽고, 협동 행동을 유도해 복잡한 사회를 만들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직립보행으로 손까지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호모 에렉투스는 힘을 합쳐 사냥을 하기 시작했고, 사냥 기술이 날로 발전함에 따라 음식도 고단백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이로 인해 아기들은 뇌가 한창 자랄 때 충분한 단백질을 공급받게 됐다.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한 200만 년 전쯤 최초의 돌도끼나 박편이 나오고 석기 사용이 시작된다. 100만 년 전에는 매우 우수한 공예술이 나타났다. 이 시기는 뇌의 용적이 커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미숙아로의 진화로 부부 관계도 달라져 짧은 시간 동안에 매우 빠른 속도로 뇌의 용적이 늘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진화 과정에서 이처럼 인간의 미숙아 전략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한 것도 현생인류보다 더 큰 머리를 갖고 있어 출산의 부작용이 훨씬 컸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인간이 미숙아를 낳게 되고 유인원 가운데 자녀의 양육을 위한 투자가 극대화되면서 부부 관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양육의 부담을 혼자서 지는 것이 어렵게 된 엄마가 아버지를 자녀 양육의 동반자로 끌어들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식에게 시간 투자를 많이 하는 동물은 일부일처제가 많다. 포유류 가운데 일부일처제는 3∼5%에 불과하다. 소나 말 같은 대부분의 포유류는 낳자마자 걸어 다니기 때문에 부모의 도움이 그다지 필요 없다. 따라서 굳이 일부일처제가 필요 없다. 반면 지구상에서 사람 못지않게 자식에게 공을 많이 들이는 동물인 새는 90%가 일부일처제다. 새들은 알을 품어야 하고 또 새끼가 나오고 난 뒤에도 스스로 날 수 있을 때까지 먹이를 물어다 줘야 한다. 초기 원시인류도 처음에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척 동물인 침팬지처럼 난교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숙아를 낳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비록 바람을 좀 피우더라도 일단 가정을 이루면 일정 기간 동안 부부가 힘을 합쳐 미숙아를 잘 돌보는 경우에만 아기가 살아남았다. 부부가 사랑해 아기를 돌보지 못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진화의 무대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많은 부류가 성 해방을 외치고 또 포르노가 판을 치지만 우리의 몸속에는 어느 정도 일부일처제의 DNA가 있다. 이 DNA는 부부간의 사랑과 함께 아기를 키우는 기쁨을 준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아이를 기르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얼마나 큰 사랑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는지 잘 안다. 자식에 대한 과도한 시간 투자 말고도 일부일처제 동물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암컷의 ‘배란 은폐’가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동물은 암컷이 배란기에만 발정을 해서 성교와 임신을 한다. 하지만 사람은 예외적으로 발정기가 아닌 때도 섹스가 가능하다. 자주 섹스를 하는 게 공고한 일부일처제 가정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가 바람피우기와 반드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여성이 배란을 은폐함으로써 자녀 공동 양육의 대가로 성을 제공했고 아버지를 자녀 양육에 끌어들여 일부일처제를 정착시켰다고 본다. 하지만 최근 연구를 통해 새나 사람은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 동물이지만 몰래 바람을 많이 피운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조사가 없지만 미국에서 유전자 검사를 해본 데 따르면, 태어나는 7명 중 1명이 아버지와 전혀 다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다. 원앙도 부부간의 금실이 좋기로 유명한 새이지만 암컷 원앙이 낳는 새끼 가운데 40%가 지아비가 아닌 다른 수컷의 새끼이다. 새가 일부일처제 동물이기는 하지만 바람기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바람피우는 남편과 아내가 많아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는 부부들이 매우 많다. 그리고 이들이 이혼을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녀 양육이다. 자녀에 대한 사랑과 보호의 본능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는 부부애만큼이나 인간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본능인 것이다. [PAGE BREAK]인류의 진화는 여성이 주도했다. 여성의 배란 은폐 인류는 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다른 포유류 동물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문명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만 차이를 보이는 게 아니다. 섹스 행태도 아주 독특하다. 임산과 출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발정기가 아닌데도 섹스를 하는 거의 유일한 동물이다. 이를 전문 용여로 '배란 은폐'라고 한다. 거의 모든 포유류는 암컷이 배란기가 되면 냄새를 풍기고 자극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수컷에게 자신이 임신할 수 있다는 것을 동네방네에 알린다. 하지만 인간 여성에게는 외부로 드러나는 배란기가 없다. 배란기가 아닌데도, 다시 말해 임신을 할 가능성이 없는데도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고 향수를 몸에 뿌린다. '시간'에 대한 통찰 그렇다면 왜 인간 여성은 배란을 은폐하게 되었을까? 최근 국내에도 번역된 책 의 저자인 미국 캘리포니아대 외과 쉴레인 교수(인류학자)는 젊었을 때 의대생으로서 여성이 남성보다 15% 정도 적혈구가 적은 데 주목한다. 철 결핍의 요인은 월경이다. 여성이 월경으로 잃는 피는 평생 40리터. 출산과 수유 등으로 잃어버리는 양까지 포함한다면 56.8리터에 이른다. 산소를 나르는 적혈구의 작용에는 헤모글로빈이 핵심 역할을 하며, 그 주성분은 철이다. 다른 포유류는 월경이 없거나 아주 소량에 그친다. 여기서 질문은 시작된다. '왜 우리 종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체액을 그렇게 많이, 흥청망청 내버리도록 진화한 것일까?' 쉴레인의 책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하나씩 찾아 나선다. 지난 250만년 동안 인간의 뇌는 3배가 커졌다. 특히 15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으로 뇌가 급격한 팽창 과정을 거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여성 골반이 뇌의 크기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아이를 낳다 죽는 산모가 늘어났다. 출산 시 태아가 산도에 막히거나 산모가 과다출혈을 일으켜 산모와 태아 모두가 사망할 확률이 어느 생물보다 높아졌다. 고통과 죽음의 가능성을 수반하는 임신과 출산은 인류 여성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위협적인 상황에서 자연 선택은 여성의 호르몬 사이클을 급격히 재조직화 하는 길을 택했다. 여성의 발정이 사라지고 월경은 달의 주기적인 움직임에 맞춰 일어나게 되었다. 여성은 '달'이라는 시간의 개념을 섹스와 임신 사이에 도입했고, 이런 시간의 비법을 배우면서 고대의 여성들은 배란을 할 때에는 섹스를 거절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남자는 이런 새로운 여성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인류 여성은 자궁이 달의 주기에 따라 피를 흘린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섹스와 임신의 함수 관계도 눈치를 챘다. 이들은 또한 큰 뇌 덕분에 다른 동물에게선 볼 수 없는 '자유의지'를 갖게 되었다. 발정기만 되면 꼼짝없이 짝짓기에 돌입하는 여타의 종과 달리 여성은 섹스를 이용하고 거부할 수 있는 유일한 암컷이 된 것이다. '현명한 여자'는 섹스의 기쁨과 9개월 뒤의 고통스럽고 위험한 분만을 통해 '시간'에 대한 결정적인 통찰을 갖게 됐다. 여성은 달의 주기에 맞춰 29.5일마다 다량의 피를 흘린 덕분에 시간의 차원을 발견한 것이다. 여성들은 섹스와 임신의 연결고리를 파악했고, 다음에는 섹스와 분만 중 사망 가능성, 그리고 섹스와 태어날 아기에 대한 평생 책임의 관계를 인식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에 대한 결정적인 통찰을 갖게 됐다. 그리고 남성에게 이 관념을 주입했다. 이로 인해 인류는 다른 동물을 앞지를 수 있는 기회들을 늘려나갔다. 여성의 짝짓기 전략 여성에게 부족한 철분은 오직 사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녹슨 쇠와 고기 덩어리가 붉은 것은 철분이 많기 때문이다) 여성의 짝짓기 전략의 변화에 적응할 수밖에 없게 된 호모 사피엔스(남성)는 배고픔보다는 성적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사냥하는 동물이 되었다. 이를 통해 인류는 지구에서 가장 유능한 포식자가 되고 자연을 지배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인류 남성은 성교를 거부하는 여성을 설득하기 위해 언어를 발전시켰다는 가설도 제시한다. 요컨대 여성 섹슈얼리티의 변화가 인간 진화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곽해선 | 경제교육연구소 소장(www.haeseon.net) 저금리와 유동성 함정 이자율 곧 금리가 낮아지면 기업은 싼 이자로 자금을 빌릴 수 있다. 그만큼 전보다 자금을 많이 빌려 사업을 확대할 수 있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생산이 늘어난다. 금리가 낮은 자금이 시중에 풍부하면 가계 소비도 부추겨진다. 늘어나는 소비는 생산 증가와 맞물려 경기를 확대시킨다. 이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금리 저하와 통화량 증가 →기업 투자, 가계 소비 확대 →경기 확대 그런데 저금리가 경기를 확대시킨다고 하는 이 일련의 과정이 현실에서 반드시 공식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금리가 낮아 자금을 얻기 쉬운 상황에서도 기업들이 투자에 의욕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경제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졌을 때 그런 일이 생긴다. 유동성 함정이란 금리가 충분히 낮은데도 경기가 좋아지지 않아 마치 함정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경제 상태다. 현금을 구하기도 쉽고 예금해봤자 이자도 못 버는데 투자와 생산, 소비가 요지부동 늘어나지 않는 경우다. 유동성 함정은 금리가 매우 낮을 때 생긴다. 경기도 좋아졌다가는 나빠지고 나빠졌다가는 다시 좋아지듯이 금리도 경기와 함께 올랐다 내렸다 한다. 보통 금리가 낮으면 투자가 늘어나기에 유리하다. 그런데 금리가 이미 충분히 낮다면 금리는 더 이상 투자 결정을 좌우하는 변수가 못 된다. 심지어 금리가 바닥에 와 있으니 앞으론 오르리라는 기대까지 생긴다. 만약 경기 전망이 나쁜 와중이라면 현금을 투자하거나 소비해 없애기보다는 계속 갖고 있으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이럴 때는 중앙은행이 공정금리, 콜 금리를 내리고 통화 공급을 늘려도 소용없다. 통화 공급을 늘려도 금융시장에서는 현금을 보유하려는 수요에 흡수되고 만다. 가까운 미래에 경기가 나아질 전망이 있다면 현금을 보유하려는 성향은 강하게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경기가 좋아진다면 투자를 해야 경기가 나아지는 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까운 시일 내에 경기 전망을 낙관하지 못할 때는 기업들은 계속 투자를 미룬다. 금리가 낮아서 자금을 쉽게 빌릴 수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가계는 가계대로 벌이가 한동안 나아지지 않을 테니 소비를 늘리지 않고 저축한다. 결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하려 해도 투자와 소비가 늘어나는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금리를 내리면 경기가 좋아져야 정상인데 아무리 금리를 내려도 소비와 투자가 살아나지 않아 경기는 마치 함정에 빠진 듯한 상태가 된다.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전형적인 것은 경제 주체들이 미래 경기가 지금보다 좋지 않으리라고 예상하는 경우다. 장차 경기가 상당 기간 더 나빠진다고 생각하면 소비자나 생산자나 소비와 생산에 적극 돈을 쓰지 않는다. 그러면 경기는 실제로 더 나빠진다. 경제적인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기업이 투자를 꺼릴 수도 있다. 기업에게는 일정 기간 사업이 순조롭게 지속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서야 투자가 가능하다. 그런데 가령 국내 정치 상황이 불안해 사업상 불리한 급격한 개혁조치 같은 것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하자. 불안해하는 기업들은 돈이 많아도 투자를 꺼릴 게 당연하다. 유동성 함정에 빠진 우리 경제 우리나라 경제도 지금 유동성 함정에 빠진 상태로 생각된다. 최근 한국은행이 금리를 계속 내렸고 또 계속 저금리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기업의 투자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2004년 상반기까지 10%를 웃돌던 예금은행의 대출 증가율이 2004년 하반기 이후 5% 안팎으로 줄었고, 2003년 3/4분기에 11.7%의 증가세를 보였던 기업 시설자금 대출은 올해 1/4분기에 1%대로 떨어졌다. 반면 시중 부동자금(浮動資金)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만기 6개월 이내로 금융권을 떠도는 시중 부동자금은 올해 1/4분기 말 현재 414조 5천억 원. 그나마 전년도 같은 기간 대비 4%대로 증가하던 이 자금이 2004년 하반기를 넘겨서는 5~6%로 증가 속도가 빨라졌다. 물론 이 자금은 실물경제 곧 기업이 주도하는 생산적 투자로 흘러들지 않고 있다. 기업들이 투자를 안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금명간 경기 회복이 어려워 보여서다. 하지만 기업들 가운데는 불황 속에서도 미래의 호황을 대비한 투자를 하는 곳이 늘 있게 마련이다. 특히 자금 사정이 좋고 지금도 수출이 잘 되어 실적이 괜찮은 대기업은 상대적으로 투자의욕이 높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의 투자의욕은 단기적으로 여러 경우에서 정부 규제에 부딪쳐 있다. 주로 수도권 집중 억제와 국토의 균형개발, 환경 문제 등이 이유다. 그렇다면 생산적 부문으로 흘러갈 이유를 찾지 못하는 자금이 갈 곳은 재테크 쪽이다. 주식·부동산으로 몰리는 투자 금리는 재테크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금리가 높거나 장차 높아지리라고 예상될 때는 금융기관에서 판매하는 예금상품이 인기를 끈다. 반대로 금리가 낮거나 떨어지는 추세일 때는 예금해봤자 별로 이자를 못 받기 때문에 다른 투자 수단을 찾는다. 대안은 주로 주식이나 부동산이다. 저금리 때는 기업도 여유자금 재테크에 나선다. 금리가 낮을 때는 돈을 빌려서라도 투자를 늘리는 게 정상이지만 그것도 경기가 좋거나 좋아질 전망이 있을 때 얘기다. 장차 경기가 나쁘다면 투자해봤자 손해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가계와 기업의 여윳돈이 주식, 부동산으로 몰리면 전체 경기가 좋지 않은 와중에도 주식, 부동산 시세가 뛰는 수가 있다. 주식이나 부동산이나 경기가 좋을 때 투자가 몰리는 게 정상이다. 다만 주식은 경기가 나쁠 때라도 장차 경기가 좋아진다는 전망만으로 수요가 몰려 시세가 뛰기 쉽다. 그런 만큼 경기 전망이 흐리면 즉시 시세가 침체하기도 한다. 부동산보다는 미래 경기 전망에 따라 투자 수요와 시세가 민감하게 움직인다. 2001~2003년 우리나라에서는 경기가 위축된 가운데 시중 여유자금이 주식과 부동산으로 몰려 비상한 재테크 열풍이 불었다. 2001년 초반을 전후로 우리 경제는 해외 경기 침체로 수출이 부진해 경기가 침체한 상태였다. 한국은행은 기업들이 사업자금을 쉽게 마련해 투자를 늘릴 수 있도록 금리를 낮게 유지하는 정책을 지속했다. 그러다 하반기 들어서자 미국 등 선진국 수출시장 경기가 살아나리라는 전망이 나타났다. 그러자 2001년 말부터 2002년 봄까지 주식으로 투자가 몰렸다. 곧 경기가 회복되리라는 기대심리와 저금리 상황을 업고 수요가 몰린 것이다. 당시 주식은 시세가 몇 달 사이 두 배로 뛰었다. 그러나 해외 경기 회복은 예상보다 늦어졌다. 그러자 수출과 국내 경기 회복도 늦어지리라는 예상이 우세해졌고 주가는 도로 주저앉았다. 이후 주가는 2003년 초 반짝 좋아지는 듯 했던 것을 제외하면 내내 부진을 면치 못했다. 부동산은 2002년 봄 주식 시세가 고개를 숙일 무렵부터 불이 붙었다. 2001~2002년에 정부는 1980년대 말 부동산 시세가 폭등했을 때 도입한 각종 규제를 풀어 아파트 등 부동산 투자를 부추기는 정책을 썼다.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의 분양권을 당첨 즉시 전매하지 못하게 했던 규제를 푼 것이 대표적인 조치다. 이로부터 신규 분양 아파트의 프리미엄을 노린 투기가 창궐했다. 새 아파트 프리미엄을 노린 투기가 일자 기존 아파트 가격도 따라서 폭등했다. 집값이 뛰는 걸 보자 가계는 다투어 은행 등에 집을 잡혀 빚을 내서는 주택 매매에 동참했다. 은행들이 집값의 90%까지 담보로 인정해가며 위험한 대출 경쟁을 벌이고, 신용카드회사가 무모할 정도로 신용카드를 남발하면서 신용대출을 마구 늘렸다. 하지만 정부 금융감독기구는 금융 감독을 관대하게 했다. 부동산 투기를 부추긴 정부 정책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일각에서는, 정부가 부동산 투기의 부작용이 있더라도 부동산 경기를 살려 국내 경기를 띄우자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해외 경기가 되살아나 수출이 늘 때까지 국내수요를 부추겨 경기를 붙들어보려는 궁여지책을 쓰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결과적으로 경기는 나쁜데 시중 자금은 흘러넘치는 상황이 빚어졌다. 자금은 넘치는데 경기가 나빠 투자할 곳은 마땅찮은 가운데 부동산 투기 규제가 풀리자 넘치는 자금이 흘러갈 곳은 부동산밖에 없었다. 은행 등이 대출에 열을 올린 결과 2001년과 2002년 가계의 부채 증가율은 전년 대비 30% 이상 급증했다. 가계대출은 2001~2002년 1년간 새로 67조원이 늘었다. 그 중 50~60%에 해당하는 40조원 정도가 2002년 봄부터 맹렬한 기세로 아파트 등 부동산시장으로 몰려 부동산 가격을 폭등시켰다. 투기가 심했던 서울 강남과 수도권 일대 인기지역에서는 집값이 불과 한 두해 사이에 두, 세배로 뛰었다. 서울, 수도권과 지방의 땅 값, 집값은 그만큼 크게 벌어졌다. 부동산의 투기 열풍과 시세 폭등은 2003년에도 가속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경기 부양 효과보다는 부동산 값 폭등이 서민의 생활고를 가중시키는 효과가 더 부각되었다. 국민들 사이에는 부동산 시세 폭등을 막지 못하는 정부와 여당에 대한 불만이 고조됐다. 2년간 이어진 부동산 투기 열풍은 2004년 들어 안정세로 돌아서는 듯했다. 2003년 10월 말 정부가 비교적 강력한 부동산 투기억제대책을 내놓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시기엔 이미 투기 자금이 에너지를 분출할 대로 분출하고 단기적으로 스스로 잦아드는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가계도 이미 이전의 투자에 소요된 빚 부담에 짓눌리고 있었다. 이 시기의 부동산 가격 폭등은 저금리 상황 아래 넘치는 자금이 생산 활동으로 흘러가지 않아도 되게 하고, 가계를 빚 부담에 눌리게 해 소비를 부진하게 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부진한 국내 경기를 한층 내리눌렀다. 그 탓에 2004년엔 해외 경기가 살아나 수출이 잘 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경기는 내내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다. 결국 국민의 불신만 높아져 그보다도 우리 국민경제가 입은 더 큰 타격은, 정부가 부동산 투자를 부추겨 경기를 띄워보려 한 데 따라 가계가 정부의 경제정책을 불신하게 된 점이다. 가계는 적어도 부동산에 관해서는 정부가 표명하는 정책의지를 깊이 의심하게 됐다. 가계는 2000년대 전반기의 경제 학습을 통해, 언제 또 부동산 시세가 폭등할지 몰라 불안해하는 한편 여차하면 부동산 투기에 끼어들어야 뒤처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강박관념처럼 갖게 됐다. 시장이 정부의 정책의지를 불신하게 됨에 따라 부동산 시장은 한층 자기논리를 고집하는 체질이 강해졌다. 그만큼 정부 정책은 시장에 제대로 먹혀들기 어렵게 됐고, 시장은 전보다 더 큰 부동산 투기 의욕을 갖게 됐다. 저금리와 시중 부동자금이 흘러넘치는 상황에서는 정부가 부동산 경기 부양을 경기부양 수단으로 써먹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한, 가계도 부동산 시세 폭등에 따른 불안이나 투자수익 기대를 갖는 것이 당연하다. 저금리 정책에 대한 일대 수정이 필요한 시기이지만 막상 정부는 사태를 그리 심각하게 보지 않는 듯하다.
박경민 | 역사칼럼니스트 cafa.daum.net/parque 불가피했던 충돌의 시작 오리엔트를 두 번째로 통일한 페르시아! 이란에서 발흥하여 리디아와 신 바빌로니아를 정복하더니 기원전 525년에는 제26왕조의 이집트도 멸망시키고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강 일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니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나아가 발칸 반도에 둥지를 틀고 있는 그리스의 폴리스가 잔뜩 긴장하게 되었다. '빛은 동방에서(Lux ex Orient)'가 아니라, '전운(戰雲)은 동방에서(Guerra ex Orient)'가 된 것이다. 거대한 통일제국 페르시아는 전성기인 다리우스 1세 치세에 그 여세를 몰아 그리스를 원정하게 되었는데, 그의 눈에 지중해가 눈에 들어오니 바다 건너편에 있는 발칸반도와 펠로폰네소스의 폴리스를 평정하지 않고서는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폴리스는 대내적으로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에 걸친 체제정비를 통해서 문화적으로는 성취기반을 확립하면서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입장에서 페르시아라는 존재는 눈엣가시와 같았다.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는 아테네를 비롯한 폴리스와 흑해와 지중해 방면으로 팽창하려는 페르시아가 만났으니, 이렇게 동서양의 충돌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강력한 전제군주체제하의 페르시아와 그리스 연합군은 전쟁을 통한 문제해결에 합의(?)하고 진검승부를 위한 칼을 빼어 들었다. 다리우스 1세의 엄청난 착각 여기서 페르시아의 정치·외교의 기본 틀을 알아보자. 우선 페르시아는 단명의 아시리아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복지의 관습을 존중하고 자치를 인정하는 관대한 정책을 폄으로써 무단통치 때문에 스스로의 명운을 재촉한 아시리아의 경우와는 달리, 민심수습에 성공하여 안정된 토대 위에서 전체 오리엔트 세계를 다스릴 수 있었다. '흐흐흐… 세상에서 날 대적할 자가 누구냐! 서쪽 편에 있는 그리스 녀석들은 통일조차 이루지 못하고 밤톨만한 폴리스로 서로 분열되어 살고 있지 않은가!' 다리우스 1세는 엄청난 착각을 하고 만다. 그는 오리엔트에 만족하지 않았다. 교통망의 정비로 광범위한 교역과 문화교류로 그리스 인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문명에 대해서 호기심, 나아가서 정복욕이 발동하였고 페르시아의 통일된 내부적 역량이 능히 그리스를 도모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수사에서 사르데스에 이르는 '왕의 길'을 닦아 새 도읍지로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한 바 있었으므로 자신만만에 야심만만의 군주였던 것이다. 다리우스 1세는 첫 번째 군사행동을 시작하였는데, 소아시아 서안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식민도시를 압박하고 본국인 그리스 측이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기다렸다. 적대행위를 하면 그것을 트집을 잡아 침략의 구실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마치 1875년 일본이 운양호사건을 일으키고 조선 조정이 어찌 나오나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다리우스 1세가 전쟁이라는 모험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앞에서 그가 착각한대로 '그리스'라는 정치적 실체가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이 말은 독립된 폴리스가 지방정부라면 각 폴리스를 전체 그리스 차원에서 통제할 연방정부 내지 중앙정부가 없다는 데에 있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정치적인 '그리스'라는 것은 없었을지라도 '헬레네스', 즉 헬렌의 후손이며 '헬라스(그리스인들의 땅)'는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낸다는 정신적인 힘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라톤의 기원, 마라톤 전투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499년 식민도시의 하나였던 밀레토스가 아테네의 지원을 받아 반(反)페르시아 운동을 일으키자 기원전 494년 이를 무력진압하고 테러집단(밀레토스)를 지원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폴리스를 불량집단(국가로 인정하지도 않고)으로 낙인찍고 페르시아 함대에 발진명령을 내렸다. 우선 페르시아 함대는 트라키아 해안을 경유하여 그리스 본토를 친다는 작전을 세웠지만 폭풍을 만나 페르시아 해군이 궤멸당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본격적인 전쟁은 페르시아의 2차 침공부터 시작되었다. 마침 그 당시 페르시아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있었다. 전직 아테네의 참주 히피아스였다. 그는 독재로 일관하여 아테네 시민들의 도편추방에 의해서 쫓겨난 인물이었는데, 엉뚱하게 페르시아 원정군을 도움으로써 조국에 복수하려고 하였다. 매국노의 길 안내로 페르시아군은 발칸반도에 상륙했지만 그리스측은 밀티아데스를 지휘관으로 하는 아테네의 중무장 보병대를 마라톤 평원으로 보내어 격전 끝에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하였는데(기원전 490년), 총사령관인 밀티아데스는 전에 트라키아 지방에서 페르시아군과 싸운 전투경험이 있어 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손자병법이 맞다. 마라톤 평원은 그리스 영웅들이 무용을 겨루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후세의 로마 역사가 플루타르코스(Plutarchos)는 그의 에서 마라톤의 승리를 아테네 시민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한 사람의 전령이 아테테까지 쉬지 않고 계속 뛰어 승전보를 알림과 동시에 숨을 거두었다는 일화를 기록하여 마라톤 경주의 유래가 되었다. 실제 아테네에서 마라톤까지의 거리는 39.909km이다. 그러나 마라톤 경기가 42.195km가 된 것은 윈저 궁을 출발점으로 삼은 제4회 런던대회의 코스를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1924년 제8회 올림픽 이후부터는 42.195km가 공식거리로 굳어지게 되었다. 세계 4대 해전, 살라미스 해전 마라톤 전투의 패배로 충격을 받은 다리우스 1세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재침을 준비하였으나 기원전 486년 갑자기 죽고 말았다. 마음의 병이 너무 깊어서였을 것이다. 복수혈전은 대를 잇게 되는데,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 BC 486∼465)는 복수하기 위해서 전쟁준비를 했지만, '페르시아는 사실 덩치만 컸지, 별 볼일 없더라'는 소문이 전체 페르시아 제국으로 퍼져 나가 이집트와 바빌론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리스 침공을 늦추어야 했다. 드디어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 원정을 감행하였는데, 이제 페르시아와 그리스는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스 측은 전쟁에 대비해서 아테네는 데미스토클레스가 주장한 해군력 강화, 스파르타는 육군을 동원하여 대 페르시아 방어전선을 구축한다.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 가운데 그 첫 번째가 페르시아 전쟁 당시에 벌어졌다. 페르시아 대군이 임전무퇴와 필사즉생의 각오로 그리스에 상륙하여 여러 폴리스를 굴복시키면서 파죽지세로 진격하였지만 이는 자발적이 아니라 물러서면 참수하겠다는 자기네 왕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속전속결로 전쟁을 결말지으려고 하였다. 물론 자신의 승리로 말이다. 만약 이번에도 진다면 아케메네스 왕조가 창업된 이래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며, 돌아가는 귀로에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퓔레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의 중심이었던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군대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 3백여 명의 스파르타군을 전멸시켜 버렸다.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듯 하였다. 페르시아군은 방어선이 뚫린 아테네로 진군하여 도시를 함락시키고 철저한 복수를 하였다. 신상을 무너뜨리고 신전을 유린하면서 도시 곳곳에서 철저한 살육전을 벌였는데 페르시아군의 무자비한 살상극은 오히려 자신들에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일단 민주주의와 자유의 맛에 길들여진 아테네 시민은 전제적인 페르시아의 압제 하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 살라미스 앞 바다로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아테네를 수복하기 위한 전선을 구축하였다. 과연 현명한 판단이었다. 어차피 육전에 강한 스파르타의 방어선이 무너진 마당에 구태여 아테네를 사수한답시고 아까운 목숨을 버릴 필요가 없었다. 해전에 강한 아테네인들은 차라리 적을 바다로 끌어내어 섬멸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일순간의 승리에 도취한 페르시아군은 바다에서 약을 살살 올리고 있는 아테네 해군을 보고 분을 참지 못하고 그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아테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배 밑바닥에서 노를 젓고 전투요원들은 배 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상대로 불화살을 날려 좌충우돌하는 페르시아 함대를 수장시켜 버렸다. 페르시아 함선의 노를 젓던 노예들이 달아날 궁리만 하니 지휘관의 전투수행에 차질이 생겨 마치 훈련이 잘된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과 귀선에 섬멸당하는 일본수군과 같았다. 지상전도 물론 그렇겠지만, 특히 해전은 전체적인 팀웍을 중요시하는 전투이다. 이렇게 아테네 시민과 해군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만약에 아테네에서 민주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비록 노예를 기반으로 한 제한적 민주정이었지만) 그토록 자유시민들이 결사적으로 싸웠겠는가? 아마 '아테네의 독재나, 페르시아의 전제나 그것이 그것이며 목숨만 부지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테네의 승리는 동방 전제세력의 침략에 대한 서방 민주주의의 수호였으며 최초의 동·서 충돌이었다. 전쟁 후에 나타난 승자의 분열 양대 축을 중심으로 세력균형을 유지하면서 발전하다가 어느 한쪽이 힘을 잃게 되면 선의의 경쟁심이 없어짐으로써 둘 다 공멸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스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페르시아의 침공으로부터 그리스를 구한 아테네는 발언권이 세졌다. 따라서 종전의 아티카 계열의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폴리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라코니아 계열의 폴리스간의 힘의 균형이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스파르타 계열의 폴리스는 아테네 측의 공금횡령을 규탄하면서 물고 늘어졌는데, 전쟁이 터지자 그리스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을 구축하고 기금을 모아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에 비축해 두었고 의장격인 아테네가 관리했던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친 아테네는 그리스의 맹주가 되어 크게 번영하였는데, 공동으로 출자한 델로스 동맹의 비축자금을 각 도시국가에 돌려주지 않고 그 돈을 아테네로 옮겨 오로지 아테네 해군력 강화에 유용하고 말았다. 물론 다른 도시국가도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 번영하였으나 아테네의 융성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어 이를 질투한 스파르타가 반 아테네 동맹인 펠로폰네소스 동맹 을 결성함에 따라 패권을 다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남았다. 물론 스파르타가 이겨 일시적 전성기를 누렸으나 자신에게도 독(毒)이 되었다. 아테네의 쇠퇴는 그리스 전체의 침체를 가져와 소아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기회를 잃고 말았다.
국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 말은 어떻게 생긴 말일까?’, ‘언제부터 쓰였을까?’ 하는 궁금증을 품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어원에 대한 궁금한 점을 물어오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어원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은 것이 현실이다. 예전에 우리말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 시대 이전의 우리말에 대해서는 전체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비교적 우리말의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시기는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우리말을 온전하게 기록할 수 있게 되면서라고 할 수 있다. ‘행주치마’의 어원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본 적이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찾은 것인데 예전에 교과서에 실렸던 내용이라고 한다. "이 싸움의 경과를 살펴보면, 비단 실전(實戰)한 장졸(將卒)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단결된 국토 수호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으니, 부녀자들이 일제히 앞치마를 해 입고, 그 치마폭으로 돌을 날라 다투어 석전(石戰)을 도운 것이 그것이다. 이로 하여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행주 대첩에서 행주치마가 유래했다는 내용은 백과사전에도 올라 있다. 아래는 인터넷 백과사전에 올라 있는 ‘행주산성’의 뜻풀이다.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행주동에 있는 삼국시대 토축 산성. 둘레 약 1000m. 강 연안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꼭대기를 에워싼 소규모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장군이 대첩을 이룬 옛 싸움터로, 임진왜란 3대첩에 꼽히는 하나인 행주 대첩으로 유명하다. 이 전투는 부녀자들까지 치마 폭으로 돌을 날라 싸움을 도와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생겼을 정도로 격전이었다. 행주 대첩에서 부녀자들이 치마를 덧입고 돌을 날라 왜적을 물리쳤다는 내용은 감격스럽다. 그렇지만 행주 대첩에서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행주치마’라는 말이 행주 대첩이 있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다. 아래는 조선시대의 언어학자 최세진이 1527년에 편찬한 《훈몽자회(訓蒙字會)》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帍 쵸마 호 1527년에 펴낸 책에 ‘행주치마’가 들어 있다는 것은 이 말이 그 이전부터 쓰였다는 뜻이다. 행주 대첩이 1593년이었으니까 ‘행주치마’는 이미 70년 전에 쓰이던 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행주치마와 행주 대첩을 연결한 것은 대단히 재미있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국어사적으로 볼 때는 그리 근거가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행주치마’는 그 당시에는 ‘쵸마’이었으므로 ‘’와 ‘幸州’ 사이에는 읽을 때도 적지 않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가 그 이후에 어떤 연유로 ‘행주’가 되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적어도 ‘행주 대첩’에서 행주치마가 유래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지어낸 어원을 ‘민간 어원’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에 ‘담배’의 어원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국어 선생님이 얘기해 준 민간 어원의 한 사례가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 수업 시간에 배운 ‘담배’의 어원은 포르투갈 어 ‘Tobacco’가 일본에서 ‘타바코’가 되고 다시 ‘담파고’, ‘담바귀’ 등을 거쳐 ‘담배’가 되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무척 재미없고 따분한 것이었는데 선생님은 민간 어원에 대해 설명하면서 ‘담배’의 민간 어원에 대한 그럴듯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담배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애연가들이 늘어나서 담배가 늘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담배를 실은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늘 담배를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담배는 순식간에 동이 났고 뒤늦게 담배를 사러 온 사람들은 ‘다음 배에 오시오’라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바로 담배를 사지 못한 사람들이 들었던 말인 ‘다음 배’가 줄어들어 ‘담배’가 되고 그것이 바로 그 물건의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담배’의 어원이다.” ‘담배’의 어원에 대한 국어학적 설명보다 민간 어원이 훨씬 재미있고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민간 어원이 진실일 거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재미있지만, 진실을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존재가 민간 어원이기 때문이다.
지숙 | 인천 심도중 교사 시작하며 21C 고도 정보화 사회로 들어서면서 수많은 정보와 자료 속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을 스스로 찾아내어 구성해 갈 수 있는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을 길러주는 학습자 중심의 학습이 요구되고 있다. 이는 학습자들로 하여금 정보의 수동적 동화나 기계적 암기 능력이 아니라 문제 해결력, 반성적·비판적 사고, 창의성을 비롯한 고등정신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교육하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영균은 종래의 국어 교육 내용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취사선택하여 적절히 활용·요약할 수 있도록 하고, 목적과 필요에 맞는 내용을 선택적으로 빨리 읽어 내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상대방에게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정보 활용 능력 신장에 관한 교육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언어문화연구원, 2001, p.7..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적인 요구에 발맞춰 자기주도적인 학습 능력을 길러주는 학습자 중심의 학습과 필요한 정보를 찾아 분류, 분석하고 요약하여 사회현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줄 수 있는 적합한 학습 방법은 무엇일까? 신문을 활용하는 교육(NIE: Newspaper in Education / NIE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본 연구에서는 NIE를 ‘신문을 알고, 신문으로 학습하는 교수-학습 프로그램’으로 정의한다. 이하 본문에서는 편의상 NIE로 약칭하기로 한다.)이 바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본고의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신문은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한 정보, 현재나 미래에 관한 시대를 초월하는 정보를 매일 신속하게 전달해주고 있어 관심 있는 기사를 언제라도 접할 수 있다. 윤덕홍은 신문은 유익한 정보를 다양하게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간접 체험을 통해 사회를 알고 삶을 배울 수 있고 비판능력, 표현력, 독서력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 인성지도를 위한 학습 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어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훌륭한 학습 자료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윤덕홍, 한국신문협회주최 2003년 7월16일 프레스센타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주제 중심 통합 학습을 위한 NIE 프로그램 개발 방안」 세미나 내용 중 일부 인용). NIE를 교육 현장에서 실천하는 교사들은 신문으로 가르치는 것이 교과서를 위주로 가르칠 때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수업과 관련된 NIE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발해 왔다. 그러나 논리적인 구조를 형성하지 못하고 개별적 수업 사태에 부분적으로 활용한 것을 소개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므로 NIE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체계를 가지고 적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함이 사실이다. NIE란 무엇인가 NIE의 탐구 대상은 크게 인간 요인(언어 표현과 이해 활동의 주체자로서의 학생), 언어 요인(신문에 보도된 기사), 활동 요인(사회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의 이해나 표현 행위 등), 교육 요인(국어 교육의 목표, 신문 자료 선정, 교수-학습 방법, 교육 결과 평가 등) 등 총 4가지로 볼 수 있다. NIE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NIE의 정의 1948년 파리에서 결성된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는 NIE를 ‘학교에서 유용한 보조교재와 교수 방법을 제공하는 수단이며, 동시에 미래의 신문 독자를 키우는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공통적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일본 신문 협회는 ‘교육에 신문을’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중앙일보사에서는 ‘신문을 학습에 활용하여 신문을 친숙하게 하며 교육적인 효과를 높이는 이라고 하였다.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NIE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학교에 유용한 보조자료와 교수방법을 제공하는 수단으로써 신문을 학교 수업에 활용하여 신문과 친숙하게 하며 교육적인 효과를 높이는 교수·학습 프로그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2. NIE의 시작 NIE는 ‘신문을 교육에 활용하여 교육적인 효과를 높이고 교육 속에 신문을 활용하자’는 취지로 1955년 미국의 아이오와주 레지스터(Register) 신문이 미국교육협회와 협력해 처음에는 NIE의 전신인 NIC(Newspaper in Classroom ‘신문을 교실로’)를 채택하였다. 이후 NIC는 1976년부터 NIE(Newspaper in Education ‘교육에 신문을’)로 한걸음 더 나아갔다. 신문을 활용한 교육 프로그램에 ‘NIE’라는 명칭을 붙여 준 것은 캐나다 일간 신문 발행인협회였다. 신문의 교육적인 활용 방법이 전통적인 학교 교육의 범주를 넘어서 일반 사회단체나 연구 기관에까지 폭넓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4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에서 ‘NIE 세미나’를 주관하면서 ‘NIE’라는 용어를 소개하였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그 당시 교육부 장관 앞으로 서한을 보내어 ‘X세대라고 불리는 요즈음 신세대들은 읽고 쓰기를 싫어하며 문자로부터 이탈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고, ‘TV, VTR 등에서 얻는 정보량은 많지만 생활체험의 부족에서 오는 편협한 인간관계, 자율적인 의견 및 판단력의 결여, 주장만 있고 책임이 따르지 않는 행동, 피동적이고 끈기 없는 생활태도 등의 부작용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협회는 또 이 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언론계와 교육계가 협력하여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국가시책으로 추진할 것과 그 방안으로 신문 알기 교육, 신문 읽기 훈련, 신문 제작 실습, 시사 토론 연습, 신문을 통한 전인교육, 민주교육, 사회교육, 역사교육을 제안했다. 이 같은 신문편집인협회의 건의에 따라 교육부는 ‘특별활동 시간에 교장 재량 아래 신문을 교육교재로 활용하는 방안을 포함, 다각적인 실천방안을 검토키로 했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NIE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는 이를 계기로 정부·교육계·언론계가 NIE에 대한 논의와 관심을 갖게 되었다. 3.NIE의 교육적 목적 (1) 미국 미국의 ‘Pantagraph’지는 NIE의 목적을 신문매체의 올바른 이해와 교육적 활용에 초점을 맞추어 크게 다음의 4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민주사회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가늠할 수 있는 민주시민의 양성 둘째, 신문 읽기 능력을 키워줌으로써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능력 강화 셋째, 과목이나 주제 중심으로 작문·역사·수학·시사·소비문제·생태학 등 여러 분야의 내용들을 효과적이며 흥미 있게 가르쳐 주는 교수도구의 제공 넷째, 현대 생활에 필요한 정보나 오락기능 등을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의 개인적 성장도모 (2) 영국 영국신문협회가 밝힌 NIE의 교육적 목적을 살펴보도록 한다. 첫째, 다양하고 현실적이며 비용이 적게 드는 보조적인 교육 자료의 제공 둘째, 역사적 기록과 정보에 대한 일상적인 접촉 셋째, 적극적인 독서를 통한 실용적인 단어와 문장력의 증대 넷째, 학생들의 개인적·사회적인 교육의 추진 다섯째, 다양한 미디어 중 하나인 신문에 대한 이해를 촉진 여섯째, 신문의 제작과정에 대한 이해 일곱째, 실질적인 청중을 대상으로 목적 있는 글쓰기 기회의 제공 (3) 우리나라 한편, 우리나라 중앙일보사에서는 NIE의 목적을 10개로 나누어 구체화시켰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실용적인 단어와 문장능력의 증대 둘째, 신문의 제작과정에 대한 인식의 창조 셋째, 목적을 갖고 실질적인 청중을 대상으로 한 글 쓰는 기회의 제공 넷째, 간결한 작문, 레이아웃(어떤 특정한 기사를 전체 지면의 어느 부분에 어떻게 구성하느냐 하는 부분적이며 개별적인 지면구성 방법)과 디자인, 이야기의 명쾌한 검증 등에 대한 창조적인 훈련 다섯째, 지역의 역사와 지리, 현재의 사회적 이슈와 사건 등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 확대 여섯째, 팀워크를 통해 자신감과 의사소통의 효율성 제고와 프로젝트 수행의 개인적인 능력 개발 일곱째, 사회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는 사회성 확립 여덟째, 다양한 의견과 가치의 존재 사실 인식 아홉째, 많은 사실과 의견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할 수 있는 판단력과 사고력 배양 열째, 많은 정보 가운데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취사선택해 활용할 수 있는 능력 육성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NIE의 목적이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나, 신문 매체가 지니고 있는 특성을 활용하여 교육의 효과를 높이고자 하는데 NIE의 목적을 두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4. NIE의 세계 동향 (1) 미국 1958년부터는 미국 신문 발행인 협회가 NIE 프로그램을 짜서 재정적·행정적·기술적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미국 신문 협회(NAA : Newspaper Association of America)가 NIE 사업을 전담하여 전국적 규모로 전개하고 있다. 1990년에는 FIEJ와 공동으로 뉴욕에서 세계 각국의 NIE 대표를 초청하여 NIE에 관한 첫 번째 국제회의를 개최했으며, 이 날을 ‘국제 NIE의 날’(International NIE Day)로 이름 붙이고 기념일로 정하였다. 현재 700여 개 신문사에서 NIE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세미나와 워크숍을 통한 교사연수를 하고, 안내책자와 교재도 발간하고 있다. 또한 NIE 주간행사를 매년 3월 첫 주에 마련하고, NIE 주간이 아니라도 항상 학생들의 신문사 방문과 신문제작을 돕고 있다. (2) 영국 1984년 신문협회(Newspaper Society)의 주도 아래 시작되었다. 미국에 비해 본격적인 신문활용교육의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1997년 8월 현재 약 700여 개의 신문사가 NIE 프로그램을 실시할 정도로 빠르게 보급되고 있다. 신문협회 안에 NIE 소위원회가 조직되어 신문사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각종 NIE 프로그램을 활성화하고 있으며, 미국처럼 학교와 신문사, 지역사회 사이의 연계가 잘 되어 있다. 인터넷에도 미국 다음으로 많은 NIE 사이트를 개설하며 정보화 시대에 발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영국의 신문협회 역시 매년 10월 첫째 주를 NIE 주간으로 정하고 전국적인 행사를 하고 있다. 특히 1993년의 NIE 주간에는 어린이들의 독서에 부모가 참여하자는 주제의 행사(Reading Together)를 열고 모두 네 권의 독서 여권(Reading Passport)을 개발·보급하여 교사와 학생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3) 일본 지난 1987년에 설립된 일본신문협회가 중심이 되어 NIE의 도입을 추진해 왔으며, 1988년에는 NIE 소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89년부터 NIE 교육의 토대를 쌓기 위해 5년간 실시한 실험 프로젝트는 일본의 문화적·교육적 환경에서 매우 적절한 것으로 평가되어 일본 전역에서 적용될 수 있는 실천적 모델로 채택되었다. 1992년에는 최초의 NIE 세미나가 신문협회 주최로 열렸다. (4) 독일 일부 교육자나 신문사의 관심과 이해에 따라 간헐적으로 NIE가 전개되고 있으나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NIE 실시는 1970년대에 전개된다. 이때 독일신문협회는 ‘학교에서의 신문교육’(Zeitung in der Schule)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시켜 전국지 및 지방지의 호응으로 붐을 일으켰다. NIE에 대한 열정으로 NIE 알리기에 널리 힘쓰고 있는 지숙 교사(인천 심도중)가 본지에 6회에 걸쳐 NIE에 대한 글을 싣는다. 1981년 교직생활을 시작한 지 교사는 학습자 중심의 교육 방법을 찾던 중 대학 시절 학보사 기자 경험을 살려 NIE 교육 직무연수를 받고 NIE를 통한 수업에 힘써왔다. 인천광역시북부교육청 국어교과 연구회 부회장, 중앙일보 NIE 연구위원, 교육인적자원부 제3기 사이버 현장교원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각종 언론과 인터넷 홈페이지 ‘지숙선생님의 NIE(www.goodnie.pe.kr)'를 통해 NIE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지 교사는 NIE는 생각의 폭을 넓히고, 사고력과 창의력을 높이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며 이번 연재를 통해 많은 동료 교사들이 다양한 사례들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