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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손충기 | 원광대 교수·교육학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교육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교육의 세계가 끊임없이 변하기에 변화에 맞춰 습관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꿔야 한다. 구태를 고집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말만의 개선과 개혁은 뒤쳐지고 도태되고 만다는 것이 세상이치이다. 그러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육의 원칙과 규율과 기강이다. 교육에서의 원칙과 규율과 기강은 제2세들에게 가르쳐야 할 덕목이면서 동시에 덕목을 가르치는 방법적 원리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교육에서 원칙과 규율과 기강이 어떻게 지켜지고 무너지는가를 보고 배운다. 수능시험 장소에 휴대폰을 비롯한 전자매체를 소지하는 경우 처벌하기로 했으면 법대로 처벌되어야 한다. 사전에 다양한 방법과 매체를 통하여 소지하지 말 것을 홍보하고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규정을 지켰는데, 몇 학생이 규정을 어겼음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구제방안이 논의된다면 형평성의 문제가 있다. 일부 학부모들이나 정치권에서 법의 융통적인 운영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으나, 거기에 교육의 원칙이 휘둘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설립주체와 관계없이 학교가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는 경우 법에 의하여 처벌하면 되는 것이지 법을 새로 만들어 교육주체들 간 갈등을 조장할 이유가 없다. 법과 원칙이 없어서 일부 사학의 비리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법과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정치가 교육에 우선한다는 반 교육전문가적 행태의 소산이다. 학교와 교육을 정치인들이 좌지우지하려고 하면 자정력을 키우는 데 방해만 될 뿐이다. 교원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법과 원칙이 세워졌으면, 이를 어긴 경우 법대로 처벌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법과 원칙은 잘 만들어져 있다. 문제는 법과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법과 원칙에 없는 행동을 하는 교사가 오히려 이득을 얻고 큰소리치는 상황이라면 누구든지 손해 보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학생들이 이러한 교사의 모습을 보면서 성장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금 우리 교육에, 교사에게 권위는 있는가? 학생들은 교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며 수업시간에 잠자는 학생, 들락거리는 학생 등 교육상황은 혼란스럽다. 학부모들이 교사를 대하는 행태도 존중에 기반하고 있지 못하다. 교원의 정년을 단축시키더니, 일부 촌지 교사문제를 전 교단의 문제로 매도하는가 하면, 체벌을 추방한다는 미명하에 교사가 학생의 잘 못을 보고도 외면하거나 눈 감게 만들고 말았다. 무능력하고 반교육적 행위를 하는 교원이 있다면 법에 의해 엄정하게 처벌하면 될 것이다. 지금 우리 교단에 불고 있는 교원평가제는 원래의 취지는 퇴색되고 결국 교원들의 사기와 권위만 위축시킬 것이 분명하다. 교원평가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 취지와 목적에 맞게 방법을 제대로 강구하고 실시하자는 것이다. 지구상에 모든 초등학교, 모든 중․고등학교 교원을 대상으로 획일적으로 교원평가를 실시하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어디 있는가? 학교장 공모제는 또 어떤가? 학교 운영은 공장 운영이나 회사경영과는 매우 다른 특수성이 있다. 인간관계의 상․하, 좌․우의 위계와 연계와 협업이 어느 조직보다 중요한 곳이 바로 학교다. 교육의 산출은 제품생산이나 판매고와 같이 수량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인적인 인간을 형성시켜 내는 학교라는 도량은 학생들의 성적 점수로만 서열이 매겨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학교장의 리더십도 몇 가지 준거로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세계에서 평생을 몸 바친 교원들을 제쳐두고 엉뚱한 인사가 교장으로 초빙되면 누가 교직에 정열을 불태우고자 할까? 학교가 사교육 기능까지 수행하도록 하는 정책으로는 사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교원 법정 정원을 확보하고, 교원들로 하여금 교육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한 연후에 사교육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별도의 교원을 충원하여 학교가 나서도록 해야 한다. 2006년은 무너진 교육의 기강과 규율이 바로 서고, 추락한 교원의 사기와 권위가 회복되는 그런 해로 만들어야 한다. 법과 원칙을 지켜야 손해 보지 않는다는 행위준칙이 지켜져야 우리 교육에 미래와 희망이 있다.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흔히 쓰는 표현이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이다. 일본은 한국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일본인 하면 불쾌한 과거의 역사가 먼저 떠오른다. 마치 DNA에 새겨져 있기나 한 것처럼 반일 감정은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한(恨)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DNA에 기록된 2300년 전 일본사 하지만 정작 DNA로 한국인과 일본인의 족보를 파헤쳐 보면 두 민족은 형제나 다름없다. 2300년 전쯤부터 수백 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사실상 일본을 세웠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이렇게 가까운 혈족이란 것은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우리는 그저 불교를 전파해 주고 도공들이 몇 백 명씩 건너갔다는 정도로 생각했지, 밝혀진 것처럼 한반도에서 수만 혹은 수십만 명씩 건너간 이민자들이 일본인이 됐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일제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와 한국인이 일본인과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일선동조론'을 우리에게 강요했지만 이는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동북아대륙의 어느 인종과도 함께 자리 매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었다. 하지만 한국, 일본 등 아시아 4개국 유전학자들이 1996년 유전자를 통해 일본인의 기원을 밝힌 논문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이 연구는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가 주도하고 한국 학자도 참여했다. 이들은 남한, 중국, 혼슈 지방에 사는 일본 본토인, 오키나와인,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 등 모두 293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했다. 그 결과 본토 일본인의 23%, 한국인의 27%가 같은 유형을 갖고 있었다. 반면 본토 일본인과 중국인은 서로 겹치는 유형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었고 본토 일본인과 아이누 족은 같은 유형을 가진 사람이 6%에 불과했다.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 사토시 호라이 박사는 "한국인과 본토 일본인의 유전적 거리는 거의 영(0)이다"고 논문에 썼다. 즉 2300년 전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과 일본 원주민이 섞이면서 야요이 시대(BC 3세기∼AD 3세기)가 시작됐고 융합이 서기 600년까지 계속되면서 현대 일본인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이주자들은 처음에 일본 규슈 지방에 먼저 정착하고 이어서 일본 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로 이주했다. DNA 뿐만 아니라 문화도 비슷해 일본 돗토리 대학 의학부 이노우에 다카오 교수 팀은 2003년 더욱 확실한 증거를 발표했다. 벼농사 도입과 청동기 전래로 상징되는 야요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전자가 현대 한국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이노우에 교수 팀은 야요이 시대 유적인 돗토리 현 절터와 사가 현에서 출토된 야요이인 유골 4점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했다. 그 결과 한국인과 혼슈의 일본인이 동일한 집단에 속했다. 유골이 발견된 돗토리 현은 동해와 맞닿은 혼슈 지방의 해안 도시이고, 사가현은 규슈 지방 북부에 있다. 두 곳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다. 일본에는 수만 년 전부터 동북아시아에서 들어온 아이누 족, 류큐 인 등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수렵이나 채집 생활을 했다. 기원전 4∼5세기경 한반도를 통해 도래인이 건너가 벼농사와 함께 청동기 및 토기 문화를 전파하면서 일본에서는 비로소 농업 혁명이 시작된다. 일본 문명의 원형이 만들어진 야요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100여 개의 부족국가를 세우고 서로 경쟁하다가 마침내 4세기에 야마토(大和)라는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다. 일본의 야요이 시대와 야마토 시대는 한반도 이주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정치권력이 들어선 야마토 시대는 고분문화 시대(AD 300∼700)라 불릴 정도로 무덤이 많은데 대부분 백제의 고분과 비슷하다. 대륙 혼란이 일본 이주사 만들어 그렇다면 한국인이 일본으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 2300년 전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대륙은 큰 혼란의 시기였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앞두고 진·초·연·제·한·위·조 7웅이 피의 전쟁을 벌이던 전국 시대(BC 453∼221)였다. 이때 한반도와 만주 지방에는 고조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국의 역사서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경 처음 등장해 기원전 4세기 무렵에는 중국 요녕 지방에서 한반도 서북 지방에 걸친 강력한 국가였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 전 중국 전국 시대 칠웅의 하나인 연이 고조선에 쳐들어왔다. 이로 인해 고조선은 서쪽으로 2000리에 이르는 땅을 잃고 평양 지역으로 옮겼다. 이때 많은 고조선 주민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 뒤 삼국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홍익대 김태식 교수는 4∼7세기에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대량 인구 이동이 세 차례 있었다고 본다. 먼저 삼국 간의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던 4∼5세기에 백제 북부 지역 주민들과 낙동강 유역의 가야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어 5세기 후반에 백제 귀족과 한강 유역의 주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7세기에 접어들어 신라가 3국을 통일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망명객들이 넘어갔다는 것이다. DNA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특별한 관계가 드러나자 아키히도 일왕은 월드컵 공동 개최 직전 한일 왕실 간의 핏줄 커넥션까지 공개했다. 환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왕의 후손이라고 밝힌 것이다. 환무 천황의 생모는 789년에 죽은 다카노 니이가사이다. '속일본기'는 다카노 황태후가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 태자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순타 태자는 505년 일본에 파견됐다가 8년 만에 죽었다. 짧은 일본 체류 기간 동안 그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 후손이 바로 일본의 황태후가 된 다카노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순타 태자의 후손들은 다카노 황태후가 나올 때까지 무려 270년 동안 일본 귀족 사회에서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명분으로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산 셈이다. 고대 고구려어가 일본어의 뿌리 일본인과 일본 문화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총지휘한 도쿄 대학 인류유전학자인 오모토 게이이치 교수가 한국에 왔을 때 그를 호텔로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100명의 일본 학자들과 여러 분야의 연구자를 총지휘하며 일본 민족과 일본 문화의 기원을 밝혀낸 중심 인물이다. 그 역시 대륙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이 일본인의 80%를 형성했고 한반도가 그 길목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도래인이 일본에 정착했을 무렵 사람들의 묘지가 있는 야마구치 현 도이가하마 인류학박물관에 가면 당시 묻혀 있는 사람들의 머리가 모두 한국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은 이처럼 가까운데도 왜 말이 다를까? 현대 일본어와 현대 한국어는 단어의 유사성이 15% 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다. 핏줄이 가깝다면 말도 상당히 비슷해야 하는데 서로 말이 너무 다르다. 그 이유는 고대 고구려어가 일본어의 뿌리가 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 한국어는 신라의 말이 뿌리가 됐고 그 후 훈민정음이 만들어지면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지만, 일본어는 이미 한반도에서는 사라진 고구려 언어가 뿌리가 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나오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 제어드 다이아몬드 교수도 고대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다른 언어를 갖고 있었으며 현재의 한국어는 신라어에서, 일본어는 고구려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일본어는 기원전 400년 경 한반도에서 일본 남부 규슈로 건너와 쌀농사를 짓고 이 농사법을 일본 북부로 퍼뜨린 고구려 농민의 언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한국어는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이두나 구결, 향찰이라는 한자로 표기했다. 3, 5, 7 숫자는 고구려어로는 密, 于次, 難隱로 표기된다. 이는 '미', '이쓰', '나나'로 발음되는 일본어와 비슷하다. 과거에서 벗어나 세계의 중심으로 우리는 일본인을 왜인(倭人)이라고 부른다. 키가 작기 때문이다. 키가 큰 한국 사람이 일본인과 어떻게 유전자가 같으냐고 할지도 모른다. 일본인이 키가 작은 것은 환경적 요인이지 유전자 때문이 아니다. 몇 년 전 일본의 생수공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의 생수는 칼슘성분이 한국보다 매우 적었다. 일본인이 작고 치아가 튼튼하지 못하고 뻐드렁니가 많은 것은 칼슘 부족 때문이지 유전자가 우리와 달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한일 간의 혈족 관계가 밝혀지고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면서 한일 관계에도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두 나라가 협력하면 아시아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 수 있는데도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만 집착해 일본인을 증오하고 있다. 일본인도 같은 핏줄을 괴롭힌 부끄러운 역사를 솔직히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한국도 무조건적인 반일 감정에서 벗어날 때 한국과 일본은 피를 나눈 진정한 형제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산행교훈*
신아연 | 호주칼럼니스트 2월, 새 학년 시작을 앞두고 지난해의 묵은 교과서와 노트, 필기도구 등을 제 방 한가득 펼쳐놓고 정리하는 아들애를 돕다가 잡동사니 사이에 묻힌 유난히 낡은 과학책에 눈길이 머물렀다. 겉장은 벌써 어디로 떨어져 나가 없고 손때로 갈피갈피 말려 올라간 각 페이지, 여백의 군데군데 낙서까지, 지난 한 해 동안 아들애의 손에 몸살을 앓았을 과학책의 고단함이 한 눈에 읽히는 듯했다. 옆에 있는 영어와 수학책도 꼴이 남루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올해까지 계속해서 2년 연속 써야 하는 체육책은 그나마 좀 얌전하게 간수한 듯했다. 대학의 원서 버금가는 두꺼운 지질의 교과서가 이 지경이 될 정도로 책을 험하게 다룬 아들애에게 한마디 주의를 줄 법도 하건만, 책 더미 속에서 과학책의 표지를 찾는 손길 중에도 잔소리는커녕 오히려 흐뭇하고 내심 대견하기조차 했다. 아들애가 지난 1년간 사용한 과학 교과서는 실은 헌책이다. 표지 안쪽에 쓰여 있는 우리 아들의 이름 위에 또 다른 두 아이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교과서의 주인이 3년 내리 세 번이 바뀌었던 모양이다. 지난 해 9학년(한국의 중학교 2학년)을 시작하면서 아들애는 새 교과서를 갖고 싶어 했다. 그러는 녀석을 타일러서 되도록 깨끗하게 사용한 헌 책을 사도록 했는데 영어, 수학, 사회 등 죄다 남이 쓰던 것으로 장만하던 중에 과학책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새 책, 새 공책, 새 필기도구로 산뜻하게 새 학년을 시작하고 싶었던 소망이 일그러져서 제 딴엔 기분이 후줄근했을 텐데도 녀석은 헌 책들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여 학년말에는 우등상도 받고, 특히나 과학과목은 학년 전체에서 최고점수를 받았다. 갖가지 펜으로 어지럽게 밑줄이 그어진 공식하며, 연습문제 풀이에는 새 주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미 해답이 쓰여 있는 열악한(?) 환경의 교과서를 가지고도 우수한 성적을 냈으니 책을 좀 험하게 다루었다한들 대수일 것도 없고, 어미의 마음에는 그저 기특하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 애 뿐 아니라 호주에선 매해 학년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 구입을 놓고 부모와 자식들 간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선배들의 교과서를 물려받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대개는 부모들의 뜻을 따르게 된다. 교과서뿐만 아니라 교복과 체육복, 가방, 심지어 신던 구두조차도 후배들에게 물려주어 재활용 할 수 있는 데까지 사용토록 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새 학기 시작을 앞둔 1월 초순경에, 더 이상 필요 없는 교과서나 교복 등을 팔고 싶어 하는 학생들로부터 수거하여 일정한 값을 매겨 신학기 준비물 기간동안 판매를 대행해 준다. 물건이 팔리는 대로 각 개인별로 집으로 수표를 보내주기 때문에 학생들은 되도록 빨리 새 임자를 만나게 하려는 조바심에 평소 사용할 때도 깨끗이 취급하는 습관을 들이게 된다. 부모 마음으로는 자식한테 다른 것도 아니고 교과서 하나쯤 새 것으로 사주지 못하랴 싶지만, 만만치 않은 신학기 준비물을 생각한다면 보통 가정에서는 그도 쉬운 노릇은 아니다. 고등학교 교과서도 새 책으로 구입할 경우 과목당 5만원 내지 10만원을 훌쩍 넘는 게 보통이고, 여기에 교복을 비롯해서 학용품 및 기타 신학기 필요용품을 전부 합치면 한 자녀 당 최대 80만원을 상회하기도 한다. 초등학교의 경우는 이보다 덜 들지만, 호주에서는 1년간 필요한 수업 준비물 일체를 새 학년 새 학기에 한꺼번에 일괄 갖추도록 하기 때문에 집집마다 목돈이 필요하고 형제가 여럿이다 보면 감당하기가 벅찬 가정이 많다. 그러다보니 되도록이면 쓰던 것을 물려받거나 비싼 값을 치루고 새로 산책은 절반이라도 건지기 위해 학생들의 신학기 용품 재활 습관이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교과과정이 개편되어 교과서가 바뀌지 않는 한 학교마다 펼치는 책 물려받기 전통은 좀체 대가 끊어지지 않으면서 학부형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데 한 몫을 하는 것이다. 한편 이맘 무렵이면 형편이 어려운 가정들의 새 학기 준비 가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사회도 십시일반 도움의 손길을 펼친다. 평소 생활 곳곳에 알뜰살뜰 배어있는 이 나라의 재활용 문화가 이웃을 향해 보람과 빛을 발하는 순간 중의 하나로 재활용품 판매 대금으로 장학금을 마련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일반 가정에서 내다버린 생활 집기나 옷가지 따위를 모아 깨끗이 수선하고 정리 정돈한 후 재활용 가게를 통해 1~2달러의 값으로 팔아 모은 수익금의 일부를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자금이나 학용품 구입비로 환원을 하는 것이다. 재활용 기금을 통해 고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매년 50~100만원 정도를 보조 받으면서 학업을 마친 학생들의 경우 비록 액수가 많지는 않지만 그 돈이 모아지기까지의 따스한 손길과 정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한 푼을 쓸 때에도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감사를 표하곤 한다. 재활용품점은 또 신학기가 되면 시내 각 학교로부터 학생들의 작아진 교복이나 헌 가방 등을 수집하여 대대적인 할인판매에 돌입한다. 깨끗이 손질이 된 물건을 저렴한 비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잇점으로 인해 자녀수가 많거나 소득이 낮은 가정들을 단골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라면 누구나 무엇이 되었건 자식들에게 최상의 것을 해주고 싶고, 학업이나 학교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주는 것에는 그 정성이 더욱 앞서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비용이 만만치 않고, 그로인해 학생들 간에 위화감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호주 학교처럼 빈부 구분 없이 아예 헌 책으로 공부하는 것을 전통으로 굳혀 버린다면 학생들이나 부모들이나 마음 언짢은 일 없이 새 학기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선배들의 수고와 땀, 노력의 흔적이 여기저기 배어 있는 교과서의 갈피갈피를 넘기면서 앞서 걸어가면서 빠뜨린 공식이라도 있다면 뒷사람이 챙기며 따라가는 재미도 느끼면서 말이다.
김정호 | 서울 양화초 교사 어느 나라에서나 초․중등교육은 국가 교육체계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다. 때문에 모든 국가에서 초․중등교육의 내실화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중국 역시 그동안 정부차원에서 초․중등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교육정책을 집행하여 초․중등교육이 외형적으로는 많은 발전을 하였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아직도 많은 문제점들이 존재하고 있어 향후 중국 교육의 발전 및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이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러한 현행 중국교육의 문제점과 관련하여 최근 중국의 인터넷 포털 사이트인 ‘인민망(人民網)’에는 중국의 현직교사가 쓴 ‘중국 초․중등교육에 있어서의 7가지 병’이란 제목의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글쓴이는 이 글에서 현행 중국 초․중등교육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7가지로 지적하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 교육의 현실과 비교해보는 기회를 가져보고자 한다. 우선, 학교에서 교사를 평가할 때 지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교사의 능력을 주로 학생들의 상급학교 진학률 및 명문대학 진학한 학생수에 따라 평가하는 것으로 진학률이 높고, 학생수가 많을수록 우수한 교사로 평가받고 그렇지 못할 경우 교육자적 자질이 있음에도 우수한 교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다. 이렇듯 교사의 평가에 있어 지나치게 눈에 드러나는 지표에 집착하는 것은 과거 계획경제시대 때부터 계속되어 온 업적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중국 사회의 특성상 학교에서도 교사들이 자신의 업적 과시용으로 학생들의 명문대학 진학률을 최고의 지표로 삼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학교의 혈관에 해당하는 우수한 교사들이 부족한 현상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우수 교사의 부족 현상은 교사의 사회적인 지위가 높지 못한데 있는데, 사회적으로 낮은 교사의 지위로 인하여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대학에 우수한 인재들이 진학하려 하지 않아 질 좋은 교사의 학교 현장으로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또한 학교 내에서도 실질적인 업무능력이나 수업능력이 배제된 채 서열에 의해 우수교사로 선정되고, 교사의 승진에 있어서도 개인의 능력보다는 고위관료들과의 친분이나 심지어는 금전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교사들의 직업에 대한 열의 및 애착이 부족하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교사들에 대한 훈련도 교사들의 질을 높이는 데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셋째, 초․중․고의 학교 수업에 있어 교과서, 교실, 숙제 등을 중시하고, 학생들의 개성을 소홀히 하는 현상이 만연되어 있다. 중국의 학교 교육에서는 단지 수업을 잘 듣고, 숙제를 잘 하며, 시험을 잘 보는 획일적인 학생들만을 양성해내고 있는데, 이러한 획일적인 학생들의 육성에 대한 일차적인 원인은 국가의 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국가의 교육정책이 입시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에 대학입시를 위해서는 학교 교육에서 주지교과에 비중을 두는 반면 음악, 미술, 체육 등의 과목은 소홀히 여겨지고 있는 게 중국 교육의 현실이다. 넷째, 현행 중국의 학교 교육에서는 도덕 교육이 소홀해지고 있다. 학교 교육에서 도덕교육은 자라는 학생들에게 사회생활에 필요한 남과 어울리는 법을 가르치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지켜야할 예절 등에 대한 교육을 필요로 한다. 현재 중국의 학생들 가운데는 인터넷에 중독 되고, 대중스타에 중독 되고, 폭력 영화 및 공포만화에 열광하는 현상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와 같이 학생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유는 학교 교육에서 도덕교육이 부족하고, 실시되고 있는 도덕 교육마저도 학생들이 싫어하고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대충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등 제대로 된 도덕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중국 초․중등교육에서의 학교 운영자금 부족 현상 문제를 들 수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도시지역을 제외한 발달되지 못한 지역 및 기타 농촌지역에서는 학교 운영비가 태부족 상태로 많은 수의 학교 운영이 학생들이 내는 학비나 학생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잡부금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학교 운영비의 부족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선진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없고, 질 좋은 기능 훈련을 받을 수 없는 등 초․중등교육의 질 저하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학교 운영비의 부족현상은 정부의 지원부족과 더불어 주로 학교 경영자들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데 중국에서는 교사와 학교 건물만 있으면 학교의 설립 및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부 학교 경영자들은 학생들의 교육시설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학생들의 교육에 투자를 하기 보다는 학교를 보다 나은 값으로 팔아넘길 생각을 하는 등 학교를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학교를 직접 경영하는 학교장들의 자질부족으로 인한 학교 운영의 문제를 들 수 있는데, 학교 경영자로서의 학교장의 무능은 그 학교의 교사들에게도 그대로 전파되어 결국은 학생들의 교육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같은 문제는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다 시간이 흐르고 경력이 되어 학교장으로 승진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행정기관에서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낙하산식으로 학교장이 되거나, 기타 비정상적인 수단을 통하여 학교장이 되는 승진제도의 문제, 학교장을 감독할 수 있는 감독기구의 부족 및 학교장을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일곱째, 중국의 초․중등교육에서는 상부에서 혹은 기타 지역에서 어떠한 교육방법이 유행하고 있다고 하면 그 학교의 실제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좋다는 방법들만을 모방하여 차용하는 유행병이 심각한 문제다. 이러한 유행병들은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 및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아 각 학교들로 하여금 자기네 학교의 특성을 갖추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학교 교육에 있어서도 일관성 및 지속성을 가지고 학교 교육을 진행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의 중요한 원인으로는 현재 중국의 각 학교들에서 내실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단기적이고 피상적인 효과만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중국 교육에 있어서의 중요한 문제점들은 비단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육에서도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교육개혁을 외치며, 수요자 중심교육이니, 교사들의 자질 함양이니, 충분한 교육예산 확보니 하는 말들을 무수히 쏟아놓았지만 과연 우리의 교육현실이 중국의 교육현실과 큰 차이가 있는지? 흔히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하는데 과연 그 백년 앞을 내다보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중국의 사례를 통하여 다시금 우리 교육의 현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수채화는 동심을 닮은 맑고 깨끗한 청량제 미술이 타고난 재주를 갖춘 몇몇의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현실에서 우리 아동교육미술은 70년대 교육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경남지역 초등교사들의 뜻이 모여 1998년에 탄생한 '그림마실.' '마실'은 '동리 안을 나들이 가서 여가를 즐긴다'는 뜻이지만, 정작 그림마실의 탄생은 회원들의 열정과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더 이상 미술교육을 사교육기관에 맡길 수 없다는 것에 뜻을 같이 했지만 전문성이 없다면 공염불에 그칠 일이었다. 그래서 그림마실 창립회원들은 1996년부터 2년간 수채화에 대한 공부를 한 후 정식으로 활도을 시작하였고, 이후에도 저자인 전성기 씨, 아동 미술연구가 윤정방 교수, 진주교육대학 이쌍재 교수, 한국수채화협회 등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9회에 걸친 정기전을 개최하였다. 그림마실 회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특기적성지도. 교과 공부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 수채화는 솔직한 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휴식처럼 편안한 시간을 갖게 해준다. 하지만, 시작의 아름다운 감동을 그대로 살려서 표현하여 만족감과 자신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초벌 단계에서 포기를 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그림마실 회원들은 수채화에 대한 공부에 더욱 충실히 하며 각 학교에서 클럽활동을 지도하고, 방학기간에는 미술캠프를 운영한다. 틈나는 데로 학생들과 야외스케치를 하는 것도 큰 보람 중 하나이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1998년 초·중등학교 수업혁신을 위한 교과 교육 연구활동 지원계획에 참여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각종 아동 실기 대회에서 지도자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실력 향상에 힘입어 매년 각종 공모전에 10여명이 입상을 한다. 그림마실은 현재 더욱 더 변화하기 위해 아동그림캠프, 타지방 미술동호교사회와의 교류전, 세미나, 전국 아동미술 현황자료 수집, 전국 공모전 응모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림마실은 앞으로도 어린이들의 미적체험활동과 표현활동을 통한 참다운 인간육성을 유도하여 그들의 요구와 본능, 흥미를 건전하게 충족시켜 주고, 꾸밈없는 자연의 세계를 표현한 전시회를 통하여 미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그림마실에 대한 자세한 활동 내역과 회원 가입은 홈페이지 http://painting.gnedu.net를 참고하면 된다.
김연수 | 생태사진가 주로 가파른 암벽지대에 서식 체감온도가 영하 30도를 밑도는 강원도 고성군 건봉산 산마루. 이곳은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DMZ가 인접한 민통선의 최북단으로 해발 1000~1500m의 가파른 암벽지대이다. 산양(천연기념물 217호)은 인간이나 또 다른 포식자가 접근할 수 없는 이런 곳에 서식한다. 눈이 쌓이고 영하 15도를 밑도는 추위가 계속되면 산양들은 먹이를 찾아 DMZ의 철책선 근처로 이동하여 주로 건봉산 오소동계곡이나 고진동계곡에서 월동한다. 1960년대 초만 해도 강원도 설악산이며 오대산, 태백산 등지에 수천 마리가 넘는 산양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1964~65년에 대폭설이 내려 굶주린 산양들이 먹이를 찾아 민가로 내려왔다가, 그 어렵던 시절에 몽매한 주민들에 의해 무참하게 포획되었다. 그 후 1968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국가에서 보호하고 있지만, 강원도 고성과 양구의 DMZ와 민통선에서 얼마 안 되는 개체수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밖에 설악산과 오대산 등지에도 몇몇 마리가 생존해 있는 등, 남한에 살고 있는 총 개체 수는 200마리를 넘지 못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예민한 탓에 사진 찍기 어려워 농가의 흑염소와 비슷하게 생긴 산양은 어미의 몸길이가 110㎝ 안팎이고 키는 55~70㎝, 몸무게 35kg 가량이며 암수 모두 10~23㎝ 정도의 검은 뿔이 나 있다. 사슴과 달리 뿔이 빠지지 않고 평생 자라기 때문에, 산양의 나이를 이 뿔의 크기로 가늠하기도 한다. 맹수를 피해 기암절벽에 살도록 진화된 초식성 산양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굵은 다리와 바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는 스펀지처럼 탄력성 있는 발바닥을 가졌다. 게다가 적갈색의 보호색을 띠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바위 같아, 눈밭이 아니면 육안으로 식별이 어렵다. 금강산 가는 길목인 이곳 건봉산에는 '건봉사'라는 유서 깊은 사찰이 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의병들을 훈련시켰던 곳이고, 한국전쟁 때는 남북의 군인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건봉사는 민통선 안 군작전지역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민통선이 좁혀지면서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건봉사를 옆에 끼고 가파른 산악길을 지프차로 2시간이 넘게 올라가면 건봉산 꼭대기에 커다란 부대가 있다. 산양을 보려면 이 부대보다 더 북쪽인 오소동계곡으로 내려가야 한다. 낮이 짧은 겨울의 산간계곡인지라 오후 4시가 되니 어느새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래도 산등성이는 백설이 반사되어 아직도 대낮처럼 훤하다. 운이 좋으면 이곳에 가는 길목에서 몇 마리의 산양을 목격할 수 있다. 산등성이 보다 약간 밑쪽을 주시하면 검은 바위같이 생긴 것들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몸을 감추고 숨을 죽이면 이들이 꽤 가까이 접근하기도 하지만 카메라 셔터 소리에 놀라 후다닥 달아 날 때가 많다. 군인들의 도움 받는 야생산양 오소동계곡에 다다르자, 산양 가족 일곱 마리가 떨어지는 해님을 아쉬워하며 부지런히 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다. 필자의 카메라 셔터 소리에 간간이 고개를 들어 초소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지만 온통 눈으로 도배한 산속에서 파란 먹잇감을 횡재한 녀석들은 두려움도 잠시 잊고 열심히 먹이를 먹는다. 이곳 군인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야생동물을 보살피기 위해 이따금씩 파란 배추를 갖다 놓아주기 때문이다. 물론 야생동물에게 인위적으로 먹이를 주는 것이 권장할 만한가는 학술적으로 좀 더 검토해 보아야겠지만, 멸종위기에 놓인 산양을 한 마리라도 더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계곡의 얼음장을 녹이듯 훈훈하다. 산 너머 바로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곳은 야생상태의 산양을 볼 수 있는 세계유일의 명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이곳에 갈 수 없다. DMZ와 바로 붙어있는 곳이고 겨우내 눈이 쌓인 험로이기 때문에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는 한 출입이 통제된다. 산양을 보고 싶다면 용인 에버랜드나 과천 서울대공원을 찾으면 손쉽게 볼 수 있다. 산양 보호에 앞장서는 '산사모' 그러나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월운리에 좀 특별한 곳이 있다. 1996년 '산사모(산양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인 정창수씨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1만 여 평의 야산에 산양 증식장을 세우고 멸종위기의 산양을 증식시키고 있다. 이곳에는 7마리의 산양이 자연 상태와 비슷하게 살고 있다. 정씨와 150여명의 산사모 회원들은 겨울철이면 산양보호에도 촉각을 세운다. 눈이 쌓여 먹을 것을 찾지 못하는 산양들이 민가 주위로 내려와 밀렵되거나 교통사고로 죽는 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사모 회원들의 노력으로 양구일원에서 산양의 소중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외지에서 잠입하는 전문밀렵꾼들을 감시하는 일은 조금도 등한시 할 수 없다. 간혹 부상당하거나 굶주림에 쓰러진 산양이 발견되면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는 비상대기조가 항상 운영되고 있다. 산사모와 같이 지역에서 요란하지 않고 조용히 활동하고 있는 NGO들이 늘어간다면 조만간 백두대간 곳곳에 산양들이 안정된 개체수로 늘어갈 것이다. *DMZ에 서식하는 산양의 모습! 새교육 2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아우구스투스의 사후, 로마는 서서히 몰락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었다. 제국은 이미 로마다움을 상실한지 오래였으며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티투스가 제위에 오른 그 해에 폼페이를 매몰시킨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하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역병이 돌고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로마다운 정신 잃고 분열의 길로 나라가 망하려면 여러 징조가 나타난다. 민심의 이반이 첫째요, 둘째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다. 특히 티투스는 자연재해 발생으로 이재민 구호에 정신이 없어 황제 노릇을 어떻게 했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현재 로마 시에 있는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을 완성시켰다. 그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Titus Flavius : AD 81~96)는 엄격한 입법과 행정으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황제의 신성(神性)을 강조하여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측근의 배반으로 암살을 당함으로써 다음 황제인 네르바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의 오현제(五賢帝)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오현제 가운데 마지막 황제이며 《명상록》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AD 161~180)치세 말기부터 제국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한나라의 무제가 흉노족를 치자, 민족 이동의 '도미노 현상'이 벌어져서 그 가운데 흉노족에게 밀린 게르만족이 로마제국 영토 내로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변방 수비군에 차츰 게르만 용병이 채워지게 되었다. 게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죽고 암살당한 그의 아들 콤모두스를 거쳐 로마제국은 한동안 심각한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어 군인들에게 의해서 황제의 선출과 폐위가 거듭되는 '병영황제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약 50년 사이에 26명이나 되는 황제가 폐위되어 중앙권력의 약화가 가속화되었다. 병영황제시대의 혼란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Gaius Aurelius Varelius : AD 284~305)의 즉위로 일단락되었으나 이미 제국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지 오래였다. 그는 과감한 정책을 통해서 정치와 경제, 국경경비에 주력하는 한편, 원로원의 기능을 대폭 축소시켜서 로마 시 의회 정도로 만들어 버리고 태양신을 자칭하는 등 황제권을 강화하였다. 로마제국의 붕괴를 초래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전제 군주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신분제를 강화한다는 것이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전통적으로 로마의 힘이 되었던 시민의 자유가 상실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로마다운' 정신을 잃었다는 뜻이다. 더욱이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함으로써 나중에 제국의 동·서 분열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거대해진 로마제국은 공룡들이 많은 먹이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제국 관리를 위한 유지비가 많이 들어가게 되었고 도시에 중과세를 부과할 수밖에 없었다. 물건을 많이 팔면 팔수록 세금을 많이 거두어 가는데 누가 열심히 장사를 하겠는가! 자연히 상업의 쇠퇴를 가져왔으며 로마 제정시대가 열리고 정복사업이 중단되자, 일할 노예공급이 딸리게 되어 노예노동이 주가 되는 산업은 자연적으로 쇠퇴하였다. 제국의 탄압 속에서 탄생한 예수 로마의 정신적 유산인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멸망 이후에도 유럽의 전통을 계승 유지하게 되었다. 원래 오리엔트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는 현실주의적 가치관과 사고방식, 도덕적 질서를 거부한 나머지 로마제국의 정치구조와 충돌하였으나 결국 종교성, 다시 말해서 순수성과 세계성은 로마사회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물론 예수가 창시한 그리스도교는 그 뿌리를 유대교에 두고 있다. 때문에 두 종교는 많은 점에서 같지만 또 여러 면에서 다르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기록인 신약성서를 경전으로 삼고 있으며 유대교의 배타적 구원관과는 달리, 구원의 전면개방과 국제화와 세계화를 표방하였다. 예수 탄생 이전의 약 250년 동안 유대민족은 거의 기적적으로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 70여 년 동안 유다 마카베오와 그 후계자들이 독립정부를 유지하면서 그리스계 왕인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탄압에 항거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인의 결속을 다지고 있었다. 그 후 로마가 헬레니즘 국가를 정복하고 계속 세력을 확장하자 유대인들은 필사적인 저항으로 맞섰지만 결국 폼페이우스의 로마군단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특히 아우구스투스는 무자비한 진압을 통해서 3만여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을 노예로 만들고 시리아 총독의 위임통치를 받는 2급 속주로 전락시켜 버렸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민중들 사이에서는 영웅탄생(메시아)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고 있었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의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팔레스타인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에서 30여 년을 지내다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복음전파 활동에 나섰다. 서기 30년경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이스라엘 민중들은 예수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재건하려는 꿈에 부풀어 호산나를 외치며 열광적인 환영을 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늘나라 건설에 주된 목적이 있다면서 물리적 혁명을 거부하였다, 마테오 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구약의 모든 약속을 실현하는 메시아(장차 올 왕으로서의 구세주)였지만 당대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자'로서 국수주의적 왕만을 기대하고 예수에게 실망한 나머지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외쳐댔다. 결국 예수는 신성모독 및 군중선동 등의 죄목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십자가에는 'INRI'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INRI란 라틴어로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즉 유대인의 왕, 나자렛의 예수를 나타낸 말이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등장은 로마와 그리스 지역에서 숭배되고 있었던 종교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다(결국 모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테두리 안에 흡수되고 말았지만). 구원의 개방화로 널리 퍼진 종교 최초의 선교는 유대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던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지역에 국한되어 전개되었으나 나중에 사도 바울로의 안티오키아 선교가 성공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보편성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크리스천 공동체를 기존의 유대교 가운데 하나의 분파와 동일시되었으나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과격한 유대 민족주의 발생에 따른 지역적 이동과 사도 바울로에 의한 비유대인 교회의 성장으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완전히 결별하고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유대인의 공동체가 예루살렘 교회라면 당시 비유대인의 공동체는 안티오키아 교회였다. 특히 안티오키아는 예루살렘에 비해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고,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비유대인의 중요한 공동체로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안티오키아 교회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로마제국의 황제 클라디우스(Cladius, Nero Germanicus Tiberius : AD 41~54)시대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추종자란 의미로 '그리스도인(Christians)'이라 일컬어지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가 이제는 더 이상 유대교의 한 종파가 아니라, 거대한 하나의 독립된 종교 단체가 되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조상대대의 종교를 포기하느냐 마느냐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대표적 사도이며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와 그리스도를 이념적으로 정립한 바울로는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비유대인들을 소중하게 여긴 바울로의 생각은 유대교의 율법주의 멍에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중요했고, 베드로는 유대인 신도들이 국수적 유대 민족주의의 압력에 굴복하여 유대교로 되돌아갈 위험성을 우려했다. 예수에 의해서 창시된 신흥종교였던 그리스도교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계층의 마음을 파고들었으며 복음화로 사회변혁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이에 당황한 유대교의 탄압이 이어졌다. 로마제국은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아니, 유대교 자체의 유혈 종파싸움으로 간주하고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의 처형에 동참했던 사울(나중에 개종한 사도 바울로)의 개종으로 그리스도교는 극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고, 사울의 세 번에 걸친 ‘전교여행’으로 로마와 그리스 세계로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나갔다. 그리스에서는 기존 제우스-디오니소스의 신앙체계인 오르페우스교를 포기토록 하였으며 로마로 확산되어 황제숭배 사상에 정면으로 충돌하여 무려 300여 년간 박해를 받았다. 절대왕권과 충돌한 그리스도교 처음에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교가 박해하고 처형하는 것을 보고 '같은 민족끼리 잘 들 하는 짓이다'하면서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왜냐하면 로마의 종교정책은 관대하였다. 황제에 대한 숭배와 국가종교를 존중하는 이상, 제국내의 모든 종교를 다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에서 황제숭배사상과 충돌하자, 즉각 박해를 시작하였다. 체제전복 세력으로 본 것인데, 역대 황제들은 국경선도 없는 범세계적이고 초국가적인 성격의 종교가 국가를 전복시킬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2~3세기의 유능한 황제들(네르바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의 오현제 시대)이 로마의 종교를 토대로 하여 국가를 내적으로 견고케 하고자 시도하였을 때 그리스도교가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인 박해과정은 이야기하지 않겠다. 다만 네로 시대의 박해는 개인적인 광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박해는 도미티아누스 황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는 유독 황제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면서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신도들을 줄줄이 묶어 처형장으로 끌고 갔다. 서기 100년부터 250년 사이에 일어난 박해는 그리스도교가 기존의 유대교와 완전히 구별되면서 위험한 종교로서 박해를 받았다. 체제전복 집단이 수호집단으로 가장 가혹한 박해를 하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은퇴한 이후, 제국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말경에 그리스도교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313년 봄에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었으며 서기 325년 이후 콘스탄티누스가 전 로마제국을 통치하게 되자, 그리스도교 역시 제국 안에서 보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더욱이 서기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국교화를 선포하고 모든 이교적인 행사를 금지시킴으로써 체제전복 집단이 제국의 체제수호체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제국의 보호 속에 그리스도교는 날이 갈수록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새로 서양세계의 주인이 된 게르만족을 개종시켜 라틴-게르만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중세문명을 일구어내었으며 유럽인의 정신적 지주로, 서구문명의 원천으로 자리매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 세계로 전파되어 33%라는 최대의 종교 인구를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