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79,308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상세검색이희숙(서울교대 교수) “바다가 공활하고 하늘이 끝간데 없듯이, 우리의 기상도 저 하늘 저 바다 같아라! 우리의 우정을 상쾌하게 드높이자. 날자, 날자! 양어깨에 날개를 달고 날아보자! 비울수록 가벼워지는 육신! 육신의 짐도 일상의 욕심도 세상살이의 의무도 세월의 무게도 다 내려놓고 새처럼 가벼이 날아보자!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마다 훌훌 벗어 던지고 따라나서 줄 친구들이 곁에 있다면” 천상병 시인이 ‘귀천(歸天)’에서 노래한 것처럼 우리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학창시절 모처럼 숨통 트이는 날 그러한 우정과의 첫 만남은 학창시절에 함께 한 수학여행에서일 것이다. 반장의 차렷 구호로 시작하는 조회에서 경례로 맺는 종례의 나날들! 감색 치마에 흰색 블라우스. 검은색 운동화에 검은색 양말. 남학생 빡빡 머리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새까만 모직 교모(校帽). 귀밑 2∼3㎝의 여학생 단발머리. 모든 것이 획일적이어서 찍어낸 붕어빵 같기만 하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우리 모습. 모든 과정은 규격화의 하달로 진행되고 선택의 여지란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학교와 집 사이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날이 그날이던 학교생활. 월장(越牆)을 하는 희귀한 영웅도 있긴 했지만, 울 밖을 넘보는 것은 금지사항. 단체 관람 외에 친구끼리 영화 한편 보는 것조차 영화내용과 상관없이 처벌감이었다. 월말고사가 끝나는 날, 모처럼 벼르고 별려서 범생들이 극장에 숨어들었다가는 영락없이 처벌 대상자로 방이 붙게 마련. 소풍가는 날이나 사생대회 가는 날도 교복을 단정히 입고 가지런히 줄맞추어 갔다. 그런 우리에게 숨통 트이는 날이 있었다면, 3년 과정에 단 한 번뿐인 수학여행이었을 것이다. 교복을 입은 채로 떠나는 지라 달리 개성을 표출할 도리는 없었다. 간밤이 새도록 바지통을 줄이거나 끝단을 내거나 줄이는 일이 고작이다. 그러나 교모 하나를 가지고도 어찌 그렇게 다양하게 연출을 해내는지. 우리는 기차역 대합실에 들어서는 친구들을 마치 이방의 낯선 사람들이 등장할 때와 같은 호기심으로 훔쳐보게 된다. 교모는 물론 중절모에서부터 승마용 운동모까지 제각각 삐딱하게 머리에 올려놓은 용감한 남학생들. 단발머리 여학생들이 연출하는 각가지 머리모양새와 흥분한 재잘거림이 기차역 대합실을 화려하게 모자이크해 나간다. 그렇게 출발한 수학여행 길에는 반드시 희생양이 있게 마련. 평소에 좋아하고 존경하던 선생님일수록 그 반열에 오르게 된다. 물론 학생들을 쥐잡듯 꼼짝 못하게 하던 선생님들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잠자는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매직펜으로 그림 그려놓거나 불침 놓기. 안경알에 빨간 색칠을 해놓고 불이야 소리지르기. 여장한 남학생이 여학생의 열차 칸에 숨어들기. 짐짓 놀란 여학생들의 과장된 고성. 굴속을 지나갈 때 선생님 몰매주기 등등. 악동들의 창의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굶주린 짐승이 먹이감을 찾듯이, 이 작업은 밤을 하얗게 밝히며 가히 필사적으로 진행된다. 여기 저기서 괴성, 교성, 아우성, 고통의 신음소리, 숨 넘어갈 듯 터지는 폭소….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기회로 교복 속에 꼭꼭 눌러 두었던 그 많은 끼와 개성이 제각기 한꺼번에 폭발, 여행 내내 폭죽이 터지는 불꽃놀이와 같은 장관이 연출된다. 무대도 없는 장급 여관의 툇마루에서 벌어지는 장기자랑.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그 당시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남녀공학이어서, 수학여행은 그 진가를 더할 나위 없이 발휘하는 때이기도 했다. 가랑잎이 굴러가는 것을 보고도 자지러진다는 사춘기의 여학생들 앞에서, 남학생들은 각기 자신들을 각인 하고자 모듬마다 화려한 공작새의 변신을 연출하고, 새침때기 여학생일수록 카멜레온의 변신은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PAGE BREAK]여행이란 것이 일상을 벗어나는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아서 어떤 일이 전개될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누구나 동경하게 되는 것 같다. 우리는 때때로 숨이 막힐 것 같은 틀에 박힌 삶에서 벗어나, 흐르는 시간에 자신을 내맡기는 치기를 부려보고 싶어한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일상의 자리를 박차고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비용에 구애받지 않아도 좋을 만큼 여건이 갖추어지고 돌보아야 할 자녀들이 다 성장할 만큼 나이가 들어도, 어느 날 갑자기 여행하고 싶다고 해서 쉽게 떠나지는 것은 아닌 듯 싶다. 그만큼 여행이란 것이 일상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은 여행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평생의 수기(修己)이다. 선생님의 안내로 우리는 새로운 문화, 풍습, 자연풍광, 역사의 현장, 사람들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모듬 구성, 방 배정, 주어지는 대로의 식단, 나의 주기와 다른 집단생활의 수칙들, 표면적인 질서 뒤에 숨어 있는 복병 등등은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대응해 가는 해결과정을 통해서 알지 못했던 나의 면모와 친구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학창의 삶을 송두리채로 빼앗는 시험위주의 공부는 얼마나 단편적인 토막 지식인가, 실제 문제에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왜소하고 무력한가, 남을 배려하고 남들이 피하는 일을 도맡아함으로 윤활유 역할을 하는 친구의 도량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함께 하는 나눔의 활동을 통한 이러한 사고의 과정은 우리에게 사안(事案)뿐 아니라 세상 전체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시각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한다. 우리의 삶도 수학여행 같기를… 수학여행은 문자 그대로 수학(修學), 실지로 보고 듣는 체험을 통해서 지식을 넓히는 학습활동의 일환으로서의 여행이다. 수학과 끼 발산의 주체는 학생들이지만, 인솔은 선생님의 몫이다. 여행 안내자로서 교사는 볼거리와 먹거리, 교통 편의와 편안한 잠자리, 안전 등에 면밀한 계획을 짜야 할 것이다. 불안이나 불편 없이 여행자들이 견문과 식견을 넓히고 자연과 사람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발견하고, 잠재되어 있던 자신의 풍요한 정서와 인성과 끼를 발산하면서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자아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 여행은 다시 하고 싶은 즐거운 추억으로 오래 오래 간직될 것이다.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의식을 하든 못하든 마음을 비쳐주는 등불 같은 스승 한 분을 평생동안 마음 깊이 모시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메마른 삶의 한가운데서 인습에 물들고 세상 욕심에 눈이 멀고 타인 지향적인 외향적인 들뜬 삶에서 참 자아를 잊고 각박하게 살다가 문득 수학여행의 즐거웠던 추억을 회상하게 되면 연어의 귀소본능처럼 붕어빵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의 그 한 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추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언제 어디서나 온 세상에 가득한 왕성한 자유의 기운을 들여마실 수 있을 것이다. 불가능이 없어 보이던 순수한 열정, 온갖 주위의 사물로부터 해방된 듯한 호연지기의 그 자유, 수학여행에서 그러한 자유를 함께 누리던 그 때 그 벗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면, 그러한 순수하고 왕성한 원기를 다시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날자! 날자! 양어깨에 날개를 달고 날자! 나의 날개가 되어주는 것은 언제나 우정이다. 마음만 먹으면 함께 길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길동무들! 그래서 우리는 비행기를 소유한 사람들보다 더 자유롭게 날 수 있다. 우리의 여행은 이 땅만이 아니다. 땅위에가 아니어도 마음속에서 날마다 함께 수학여행을 떠날 길잡이 스승님, 친구들, 추억이 있다. 앞으로 이어갈 삶도 날마다가 수학여행이기를!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기를!
한재혁(경기 양평 지평종고 교사) 1. 들어가는 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교육현장도 많은 변화가 있어 왔다. 그런데 학교의 여러 행사 중에서 그 내용이 크게 변하지 않고 유지되어 오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수학여행이 아닐까 한다. 봄이나 가을철이 되면 전학년이 경주나 설악산으로 떠나는 획일적인 수학여행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다. 20여 년 전 학생의 신분으로 설악산에 갔던 수학여행이나 지금 학생들을 인솔하고 가는 수학여행이 그 내용 면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변화한 것이 있다면 고급화된 버스나 숙박시설일 것이다. 수학여행의 진정한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가는 현 시점에서 수학여행의 교육적 의미를 검토해보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2. 수학여행의 교육적 의미 수학여행의 교육적 의미는 크게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국내의 문화·경제·산업·정치 등의 주요 현장을 직접 견학함으로써 교과 외의 분야에 대한 학습을 기도할 수 있고 넓은 식견과 풍부한 정서를 육성시키는 데 보탬을 줄 수 있다. 둘째, 학교 밖에서의 집단적 행동을 통해서 건강·안전·집단생활의 수칙이나 공중도덕 등에 대한 바람직한 체험을 얻을 수 있다. 셋째, 미지의 세계를 견문하며 사제(師弟)와 학우(學友)가 함께 생활함으로써 즐거운 추억을 갖게 되고 학교생활의 인상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수학여행에서 이러한 교육적 의미들이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가는 의심스런 상황이다. 학생들이 여행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예전에는 수학여행을 간다는 것 자체가 매우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지금처럼 가족단위나 친구끼리의 여행이 자주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수학여행 그 자체가 학생들에게 크게 흥미를 끌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 학교 생활에서 한 번은 가야만 하는 귀찮은 학교 행사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수학여행의 불참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고 그러한 학생들의 불참 사유도 예전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수학여행의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가기 싫다는 것이다. 앞으로 주 5일제 근무가 보편화된다면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3. 수학 여행의 새로운 모색 수학여행이 학생들에게 흥미를 잃게 된 그 원인을 진단해 보면 그것은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획일적인 여행 방식 때문일 것이다. ‘철이 되면 전학년이 관광버스에 나눠 타고 경주나 설악산으로 가는 여행…. 선생님의 통제하에 유적지나 명승지를 주마간산으로 둘러보고 저녁부터는 숙소에서 꼼짝 말아야 하는 여행…’ 아마도 이것이 우리의 머리 속에 그려지는 수학여행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획일적인 여행방식은 학생들에게 흥미를 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육적 효과도 그리 크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수학여행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모색이 필요한 시기이다. 기존의 틀을 깨고 다양한 방식의 여행을 시도해 보고 정착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실시하는 수학 여행이 아니라, 학생들을 주체로 세워 학생들과 함께 준비하는 테마수학여행 등의 방법을 적극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PAGE BREAK]반이나 특별활동 부서별로 여행 팀을 구성하여 학생들이 여행의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맞는 시기, 장소, 일정 등의 여행 계획을 세워 여행을 준비한다. 그리고 인솔 교사가 동행하여 여행을 지도하고 여행이 끝나면 여행 중에 경험하고 조사했던 내용들을 보고서로 정리하여 제출한다면 여행의 흥미뿐만 아니라 교육적 효과도 크게 얻을 수 있는 수학여행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의 수학여행이 실시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이 존재하겠지만 기존의 획일적 방식을 지양하고 작은 부분부터라도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새로운 모색이 필요할 것이다. 4. 마무리 글 수학여행은 점점 그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 흥미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제는 더 이상 수학여행을 기대하며 전날 밤 잠 못 이루는 학생도 없을 것이고 수학여행을 통해 학생들의 견문을 넓히고 여행의 감동을 느끼는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는 교사도 흔치 않을 것이다. 입시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1학년 때 빨리 갔다오는 학교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제는 급변하는 교육환경 속에서 수학여행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존의 획일적인 틀을 벗어나 좀 더 열린 자세로 고민한다면 다양한 방식의 수학여행이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육수요자인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참여할 수 있는 수학여행이 될 수 있다면 수학여행의 진정한 교육적 의미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도종호(대구 남산여고 교사) 각종 행사 외부로부터 불신 많아 학교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이 직접 경비를 부담해야 하는 행사의 종류는 과거에 비하여 매우 다양하다. 야영수련활동, 각종 현장체험학습, 단체수련활동(수학여행) 등 많은 행사가 모든 단위학교의 모든 학년에서 각각의 교육적인 목적을 가지고 매년 반복해서 진행된다. 이러한 행사의 내용이 보다 교육적이면서도 재미있게 진행될 때 학생들은 신명나고 교사들은 보람을 얻는다. 여기에 더 욕심을 부린다면 각종 행사의 예산과 결산이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집행된다면 우리 교사들은 학부모들로부터 더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될 것이고 학생들 앞에서 지금까지보다 훨씬 당당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지금까지 우리 교사들이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각종 학교행사에서 외부로부터 불신의 의혹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우리가 왜 이러한 불신을 받게 되는지를 모르고 있다. 또 무엇이 왜곡되어 있는지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이들은 불신의 눈길에 소극적이나마 불만을 표시하기도 한다. 어떤 교사들은 무엇이 잘못되어 있고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침묵한다. 소수의 교사들은 ‘과거에도 그렇게 해왔고 다른 학교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이유를 방패삼아 아직도 각종 학교행사에서 비교육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일부의 교사들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각종 불합리를 바로잡아 무너진 교권을 바로 세우고 질 높은 교육을 추구하기에 진력한다. 우리 학교의 경우 합리적이지 못하고 효율적이지 못한 각종 행사의 진행과 교육소비재의 구매를 개선해보겠다는 교사들이 다수 있어 이들의 뜻을 확인하고 하나로 묶는데는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뜻을 모으기는 쉬웠지만 진행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2년 9개월간 혼신의 힘을 다하여 노력한 결과 교육소비재(교복, 체육복, 앨범)의 구입과 각종 행사(1학년 야영활동, 2학년 수학여행, 3학년 졸업여행)의 진행, 학교수익사업(매점임대) 등에 공개경쟁입찰과 사전답사를 도입하여 기대 이상의 큰 성과를 얻고 있다. 사전답사 통해 기대이상의 성과 우선 단체수련활동을 개선하기 위하여 선생님들의 뜻을 모으고 학교와 이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경비 책정이 합리적이고 교육적 내용이 충실한 단체수련활동을 계획하기 위하여 봄방학에 사전답사를 실시하고 여기에 선생님을 참여시켜야 한다고 학교에 건의하였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학교를 설득해 갔다. 그 동안 준비한 자료를 바탕으로 설득력을 갖추었으며 지난 세월 개선해 왔던 여러 가지의 일들이 힘이 되어 개혁적인 성향의 선생님이 단체수련활동 사전답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냈다. 1박 2일 동안의 답사에서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은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채 변화를 부정하는 현실의 답답함과 씨름하였고 영구불변일 것만 같던 답답한 현실에서 변화를 일구어내는 성취감을 맛볼 수 있어 피곤함을 덜 수가 있었다. 숙박업소와 버스 회사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소비자에게 봉사를 하겠다는 자세보다는 법적인 근거도 없는 협정요금을 내밀어 소비자를 우롱하는 자세였다.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분위기에서도 단체수련활동의 개선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들의 의지를 설명해 갔다. 과거의 관행이 어떻게 잘못되었던 그보다는 잘못된 관행의 개선이 중요하다고 믿고 일했다.[PAGE BREAK]그래서 ‘학생들이 지불하는 경비가 오로지 학생들의 편익을 위해서만 쓰일 수 있도록 하자’고 상인들을 설득했고 그렇게 했을 때의 최소경비를 책정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믿게 하는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으며 또한 우리 선생님들이 그간 얼마나 못 믿게 했으면 이런가 하는 생각에 이를 때는 지난 17년의 교직생활이 한없이 부끄럽기도 했다. 이렇듯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무사히 답사를 마치고 우리가 원하던 성과를 얻어 가벼운 마음으로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에 와서는 답사 결과를 바탕으로 빈틈없는 계획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2학년 학년부장을 중심으로 한 학년회의에서 답사결과를 발표하고 선생님들의 의견을 쫓아 단체수련활동계획을 차근차근 세워나갔다.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계획에 모든 선생님께서 기뻐하였고 단체수련활동계획은 충실해지면서 동시에 교사의 보람도 조금씩 커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진작에 이런 일들을 하지 못했나 하는 자책도 동시에 마음 한 구석을 메워왔다. 학생들에게 단체수련활동계획을 알리고 참여 동의를 받으면서 절대 다수 학생의 참여에 다시 한번 놀람과 기쁨을 맛보고 지금껏 없었던 기대를 안고 여행을 출발했다. 경비는 오로지 학생들 위해 써야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던 행사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첫 식사에서부터였다. 답사할 때의 식사 수준이 아니었다. 학생들의 실망 가득한 눈빛에 나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몰았으며 숙박업자를 불러 책임을 묻기에 바빠졌다. 숙박업자로부터 식사를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다음의 일정들을 진행했다. 두 번째 식사에서도 학생들의 실망은 마찬가지였다. 단체수련활동의 개선에 동참했던 선생님들의 도움을 청하면서 단체수련활동의 개선에 냉소를 보이던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숙박업자에게 거세게 항의하고 숙박업자의 사과와 식사의 질 개선을 약속 받았다. 이 후 편안하고 쾌적한 여행에 모두 만족해 했고 가슴속의 뿌듯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단체수련활동을 개선하기 위하여 정신없이 뛰는 가운데 확인한 사실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행사들이 그러하듯이 단체수련활동도 합리적이지 못한 요소가 많다’는 것을 대부분의 선생님이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선생님들이 “여태 그렇게 해왔지 않느냐?” “다른 학교도 다 그렇게 하지 않느냐?” 하는 소극적 논리로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체수련활동 개선의 장애물로는 첫째,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하는 상인들의 조직적인 방해를 느꼈으며 둘째, 교사가 해내기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패배의식이 교사들의 가슴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올 단체수련활동을 개선하면서 경비의 투명성과 효용성 확보에 많은 비중을 두다보니 일정이나 내용이 좀 더 교육적이고 다양하게 채워지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허 숙(인천교대 교수·한국교원교육학회장) 교육에 대한 거창한 이론이나 관점이야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주 간단히 말해서 교육이란 교사와 학생이 교실에서 만나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은 교육이론을 연구하는 학자의 연구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교육정책을 결정하는 교육인적자원부의 장관실에서 행해지는 것도 아니다. 교육은 교실에서 시작해서 교실에서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실수업은 모든 교육의 근본이요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교육의 개혁이나 개선을 이야기할 때면 흔히 제도나 정책의 변화를 거론하고는 하지만, 그런 모든 변화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교실수업을 통하여 교사와 학생의 교육활동에 반영되고 구현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교육의 정책이나 제도, 행정, 시설 등은 교사와 학생에게 도움을 주어 교육(교실수업)을 잘 하자고 필요한 것이지, 교육행정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밥벌이나 승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쉽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의 교육현실을 보면 선(先)과 후(後)가 뒤바뀌고 본(本)과 말(末)이 전도된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급격한 교원의 정년단축, 촌지 고발센터 설치, 체벌의 금지와 재허용 등 최근에 이루어진 몇 가지 학교정책은 교실현장의 상황을 무시한 채 정치가들의 한건주의와 행정가들의 상명하달식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교실수업을 돕기는커녕 교사의 극심한 사기저하와 교실붕괴라고 하는 엄청난 후유증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공교육의 부실과 위기를 해결하고자 수준별 교육을 강조하며 도입한 제7차 교육과정의 적용과, 우리 교육현장의 오랜 숙원이었던 과밀학급 해소를 위해 획기적으로 추진한 교실증축 사업이 그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학교현장으로부터 박수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교실수업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입안자들의 ‘밀어내기식’ 탁상행정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육정책과 행정의 요체는 상부 기관에서 학교현장에 수많은 공문과 지시를 내려보내는 일이 아니라, 학교교실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보다 자유롭고 다양하게 마음껏 가르치고 배울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고 뒤를 밀어주는 일이라고 하겠다. 우리 공교육을 바로 살리는 길도 멋진 학교 건물이 생긴다고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요, 학교에서 체벌이 없어진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직 교실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어야만 교육이 바로 서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육개혁을 외쳐대던 많은 사람들도 정작 교육의 핵심인 교실수업 개선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교육의 주변 문제에만 매달려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교실수업에 대한 배려와 투자를 통하여 교사와 학생이 잘 가르치고 잘 배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일이 교육개혁의 첩경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PAGE BREAK]교실수업의 개선을 위해서는 학급 교사의 책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활동의 일차적인 권한과 책임은 바로 교사에게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교실수업의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보면 초등학교 교사들은 대부분 콩나물교실로 표현되는 과밀학급에 그 원인을 돌리는 경우가 많고, 중등교사들의 경우는 대학입시의 제도와 경쟁에로 화살을 넘기는 사례를 종종 본다. 그러나 요즈음 선진국보다 적은 소규모 학급을 운영하는 농어촌의 학교에서 예전보다 학력이 크게 향상되었다거나 교실수업이 획기적으로 달라졌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으며, 대학입시 제도는 해마다 바뀌어도 중등학교 교육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어렵다. 우리 교실수업의 현실을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은 교과서 중심의 획일적인 교수방식의 만연을 염려하고 있다. 말로는 21세기에 필요한 창의적 인간의 육성을 표방하지만, 우리의 교실수업은 여전히 암기식과 주입식으로 불리는 전통적 방식이 주를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교사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어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교육적 권위를 바로 세우고, 교수방법의 다양화를 통하여 능력이 서로 다른 모든 학생들을 만족한 수준의 목표달성으로 이끌어 가려는 교사의 노력은 교실수업 개선과 교육개혁의 밑바탕이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교사, 학부모, 행정가 모두가 교실수업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교실수업의 개선을 통한 교육 바로 세우기에 함께 힘을 모아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황석근(한국교총 대변인) 교육부는 지난 6월 학교 구성원들의 공동생활규칙을 담은 ‘학교생활규정’ 예시안을 발표했다. 학교단위에서 자체적으로 생활규정을 만들기 곤란하므로 예시안을 제공해 달라는 학교현장의 요구가 빗발쳤다고 한다. 또 어디까지나 예시에 불과하므로 반드시 그대로 따라야 할 의무는 없으며 학교현장에서 적의하게 활용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예시라고 하더라도 학교현장의 지원에 그 취지가 있는 만큼, 도움은커녕 혼란만 조장한다면 이는 당초 예시안의 발표 취지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학교생활규정은 예시안의 목적에서 밝히고 있듯이 학생, 학부모, 교직원이 준수해야 할 제반사항들을 규정함으로써 자주적 학습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의 생활 및 준법습관을 습득하게 하여 학교, 지역사회, 국가의 발전과 법치주의 사회 실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초·중등교육법이나 학칙에서 정할 수 없는 세세한 내용을 규정하고 이를 스스로 준수함으로써 학교내 공동체간의 일체감을 높이고 학교생활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그 취지가 있다. 따라서 학교생활규정은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실천수칙을 담고 있어야 한다. 법률체계로 볼 때에도 가장 하위에 속하는 만큼, 보다 구체적이고 명료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상위법의 영역에 속하는 포괄적이고 선언적인 내용을 생활규정에서 반복하는 것은 학교현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음은 누구나 노력하면 지킬 수 있는 현실적인 내용이어야 한다. 학교생활규정은 법률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구성원들이 스스로 지키는 가운데 학교 공동체 문화의 형성에 그 취지가 있는 만큼, 구성원들이 수용 가능한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취지가 훌륭하다는 이유만으로 물리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내용으로 구성된다면 이는 학교공동체의 발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규정의 작성과정 또한 모든 구성원들의 참여와 폭넓은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학교구성원들의 실천수칙인 만큼, 학교구성원들의 폭넓은 여론을 포함시켜야 제대로 된 규정이 완성될 수 있다. 학교생활규정의 취지에도 불구하고 교육부가 발표한 예시안의 내용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생활실천 수칙임에도 선언적인 내용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컨대 이성교제에 관한 부분에 있어 ‘남녀학생간 서로 존중하고 양성평등의식을 갖는다’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책임 있는 행동을 한다’와 같은 내용은 학생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그 의미가 불분명하다. 차라리 구체적으로 남녀불평등이 발생할 수 있는 사례, 예컨대 은연중에 사용하는 성적 비하 발언은 남녀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식의 구체적인 예시가 있을 때 학생들은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기의 이성교제에 관한 사항을 학교생활규정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한 타당성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기왕에 포함시킨다면 명료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용의 사항도 마찬가지다. ‘신발은 활동하기에 편리한 것으로 고가의 신발보다는 학생 신분에 맞는 검소한 것으로 착용한다’ ‘가방은 자유로이 하되 학생 신분에 맞는 것으로 한다’는 식의 표현은 학생 신분에 맞는 것이 무엇인지 그 기준이 애매하다. 예시안은 또 학생생활지도 전반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기 위하여 생활지도 협의회를 두도록 하고 있다. 생활지도협의회에는 전 교직원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토록 하며 실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생활선도협의회를 두도록 하고 있다. 생활지도협의회는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계획을 ‘학교폭력추방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후 실행하도록 하고 있다. 또 상벌점제 운영을 위해 ‘학교생활평가위원회’까지 두도록 하고 있다. 이쯤되면 학교는 그야말로 위원회 천국이 될 것이다. 생활지도협의회는 기존의 직원협의회와, 생활선도협의회는 기존의 생활지도부 기능과 중복된다. 따라서 이러한 기구들은 그야말로 옥상옥의 성격이 짙다. 최근 단위학교 자율성 강화라는 명분으로 학교분쟁조정위원회 등등 그야말로 수많은 위원회가 정부당국의 사실상 강요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 그러나 기구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기구의 설치에 따른 행정적 준비로 인해 잡무를 양산하게 되고 오히려 본질적인 업무에 소홀해 질 우려가 있다. 이번 생활규정에서 학교현장에 가장 직접적인 혼란을 초래한 것이 바로 체벌 관련 조항들이다. 교육적 수단으로서의 체벌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오랜 논쟁거리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체벌의 필요성은 일단 인정하고 그 시행에 관한 세부사항을 이번 예시안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교사, 학생, 학부모 모두가 수긍하기 힘든 내용들일 뿐만 아니라 특히 교사의 교육권을 결정적으로 위축시킬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PAGE BREAK]예시안에 따르면 체벌 시행은 다른 학생이 없는 별도의 장소에서 반드시 제 3자를 동반하도록 하고 있고 체벌도구의 규격과 체벌 부위까지 지정하고 있다. 체벌은 교육적 필요에 의한 것이다. 때로는 현장에서 필요한 부분도 있고 시간을 두고 시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판단의 몫은 교육전문가인 교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체벌도구의 규격이나 체벌부위 역시 학생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체벌하기 전에 교사는 학생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를 점검해서 이상이 없는지를 반드시 확인토록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교사가 학생의 신체적, 정신적 이상 유무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막연하다. 특히 정신적 상태의 이상유무는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식의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자칫 체벌에 따른 모든 휴유증을 교사의 사전 점검 및 확인 의무 소홀로 돌릴 수 있는 빌미가 되며 교권침해의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는 말로는 체벌규정을 만들었음에도 사실상 체벌을 전면 금지하는 규정이나 마찬가지다. 체벌 대상 학생이 대체 벌을 요구할 수 있다는 조항도 마찬가지다. 교육부의 주장대로 체벌은 다른 교육적 수단으로 불가능할 때 시행하는 최후의 교정수단이다. 그럼에도 학생이 다시 대체 벌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은 논리가 맞지 않다. 더구나 학생이 스스로 체벌을 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대체벌 운운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사실 이번 예시규정으로 인해 정부는 체벌에 대한 개념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는 체벌을 신체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일체의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즉 체벌에는 매를 드는 것 외에 벌주기 등 신체적 고통을 주는 모든 행위가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이번 생활규정에는 마치 매로 때리는 것만이 체벌인양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부의 생활규정에 충실하여 매로 때리는 것 외에 운동장 돌기 등 각종 벌은 교사가 임의로 시행해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은 면제받는 것인지 정부는 책임 있는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욱 문제인 것은 정부의 체벌에 관한 일관성 없는 태도가 학교현장의 혼란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98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은 불가피한 경우에는 체벌을 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음에도 정부는 획일적인 체벌 금지로 확대하였다. 이 조치가 교권실추와 교실붕괴의 직접적 원인으로 비난받자 지난 3월 발표한 공교육내실화 방안에는 체벌 허용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최근에는 예시규정까지 발표하였다. 그러나 예시규정 내용의 타당성과 해묵은 체벌합법화에 대한 논란이 재연되자 이번에는 강제성이 없다는 식으로 슬쩍 한발 물러서고 있다. 이러한 어정쩡한 태도는 체벌에 대한 학교구성원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학교생활규정의 법적 효력에 관한 사항이다. 생활규정을 준수하였음에도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학교구성원들은 어떠한 책임을 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특히 당사자간의 다툼이 사법적인 문제로 비화되었을 때 생활규정이 교사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는 없다. 그렇다면 학교생활 규정을 애써 지켜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생활규정을 준수하였다면 사법적인 조치는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더라도 징계 등 교육행정상의 조치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거나 최소화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어야 한다. 스스로 제정한 규칙을 준수하였음에도 발생한 사고에 대해 교육행정 당국조차 교사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학교생활규정은 유명무실해질 것이다. 교육행정의 기본방향은 단위학교의 자율성과 책임강화이다. 생활규정의 취지 역시 웬만한 문제는 학교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해 단위학교의 자율성과 책임성 강화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예시안처럼 많은 위원회를 만들고 무조건적으로 참여를 많이 한다고 해서 자율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학교는 어디까지나 교육의 장이다. 국회처럼 평등한 참여가 강조되는 민주성의 원리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전문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다. 따라서 무분별한 참여보다는 학교 내에서 전문적인 영역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자율성 확보의 핵심이다. 교사의 전문적인 영역을 학부모가 인정해 주고 교사는 학부모와 학생의 교육적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 만약 학부모, 학생이 교사의 전문적인 영역을 간여한다면 이는 학교조직의 자율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번 교육부의 예시가 학교에 혼란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학교에서 가장 필요한 교사의 전문적 영역에 대한 불인정에서 비롯되고 있다. 체벌의 경우 최소한의 절차나 규격은 필요하지만 어디까지나 교육적 수단으로서 교사의 영역에 속한다. 각자의 전문적 영역이 인정받지 못하고 교육주체간의 흥정거리로 전락할 경우, 학교단위를 지배하는 전문성의 원리는 부정되고 학교의 자율성은 요원할 것이다.